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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온 解放… 獨立 協商 全無했던 韓日[박훈 韓國人이 본 20世紀 日本史]|東亞日報

갑자기 찾아온 解放… 獨立 協商 全無했던 韓日[박훈 韓國人이 본 20世紀 日本史]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3月 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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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 회의에서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동그라미 안)와 한국 측 대표 김용식 당시 주일 공사가 악수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1953年 4月 第2次 韓日會談 財産請求權委員會 會議에서 日本 側 代表 구보타 間이치로(동그라미 안)와 韓國 側 代表 김용식 當時 駐日 公使가 握手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提供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박훈 서울대 歷史學部 敎授
《1951年에 열린 第1次 韓日會談 豫備會談에서 韓國 側 양유찬 代表가 “Let us bury the hatchet(和解합시다)”라고 하자 日本 側 지바 고(千葉皓) 代表가 “What is bury the hatchet?(뭘 和解하자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兩 代表는 氣가 막혔을 테지만, 이보다 植民支配에 對한 韓日 兩國의 認識 茶를 잘 보여주는 場面은 없을 것이다. 이어 1953年 10月 15日 第3次 韓日會談 財産請求權委員會 會議에서는 日本 側 首席代表 구보타 間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發言이 問題가 되었다. 有名한 ‘구보타 妄言’이다.》

“日 德에 朝鮮 發展” 구보타 妄言

1953년 6월 구보타가 작성한 극비 외교문서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을 취하며 세계의 지탄을 받고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은퇴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다. 동아일보DB
1953年 6月 구보타가 作成한 極祕 外交文書 ‘日韓會談 武器 休會안’. “李承晩이 世界의 孤兒가 되려는 政策을 取하며 世界의 指彈을 받고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隱退하게 될 것”이란 內容이 담겨 있다. 東亞日報DB
구보타는 “日本은 36年間 많은 利益을 韓國人에게 주었다. 日本이 (韓國에) 進出하지 않았더라면 韓國은 中國이나 러시아에 占領돼 더욱 悲慘한 狀態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當時 韓國 側 首席代表 홍진기는 “마치 日本이 占領하지 않았더라면 韓國人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前提下에 말하고 있으나, 韓國人은 스스로 近代國家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反駁했다. 이 發言으로 인해 韓日會談은 그 後 4年 半 동안이나 열리지 못했다(이원덕 ‘韓日過去事處理의 原點’).

이 發言들이 어느 程度 歷史的 事實에 符合하느냐는 且置하더라도, 아마 이 두 가지 認識이 日帝 植民地時代를 바라보는 韓日 兩國民의 大體的인 立場일 것이다. 勿論 敗戰 後 오랫동안 日本의 進步, 리버럴 知識人들을 비롯해 적잖은 日本 市民들이 植民支配에 對한 徹底한 反省을 堅持해 왔으나, 나는 많은 日本人들의 속내에는 ‘그래도 日本 때문에 朝鮮이 發展한 面도 많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한便에 있음을 隨時로 느껴 왔다. 表現하지 못했던 그런 속내가 最近의 右傾化 雰圍氣 속에서 噴出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日本人들은 敗戰 直後 이미 植民支配에 對한 立場을 體系的으로 整理하고 있었다. 1946年 9月 日本 政府 大藏省(大藏省)은 外務省과 協議하고, ‘在外財産 祖師會’를 設置해 ‘(極祕)日本人의 海外活動에 關한 歷史的 調査’를 發刊하기 始作했다. 모두 35卷에 達하는 厖大한 文書인데, 그中 總 10卷이 朝鮮便이다. 여기에 京城帝國對 敎授였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가 쓴 ‘朝鮮統治의 性格과 實績―反省과 反批判’이라는 文書가 실려 있는데, 아마도 朝鮮植民地에 對한 當時 日本 政府와 엘리트들의 立場을 代表한 內容일 것이다. 그는 日本의 植民支配는 結果的으로 여러 가지 未熟한 點이 있어 朝鮮人의 支持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主觀的 意圖만큼은 朝鮮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었다는 이른바 ‘善意의 惡政’論을 主張했다.

他 植民地들의 ‘獨立 協商’


다른 칼럼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朝鮮植民地에는 植民地 歷史賞 特異한 點이 많이 있다. 1910年이라는, 世界史的으로는 帝國이 解體되던 가장 늦은 時點에 이미 民族意識이 充滿한 國民을 無理하게 植民地化했다는 點, 植民支配 期間이 35年으로 植民史上 가장 짧았다는 點, 오랫동안 歷史와 文化를 共有해 온 이웃 나라를 植民地化했다는 點 等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將來의 植民地 獨立에 關한 論議가 植民本國-植民地 間에 一切 없었다는 點이다. 다른 地域의 境遇 植民本國과 植民地 사이에 將來에 對한 一種의 ‘로드맵’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에 關한 論議가 展開되었다.

例를 들어 英國과 印度는 共同의 敵에 對한 鬪爭(印度는 第1次 世界大戰에 150萬, 2次 世界大戰에 250萬의 軍人을 提供했고, 數많은 死傷者를 내었다) 過程에서 未來에 對한 協商을 進行했으며, 그 過程에서 獨立이나 自治를 包含해 植民地의 存在 樣態에 對한 다양한 안들이 檢討되었다(박지향 ‘英國的인, 너무나 英國的인’). 프랑스와 베트남의 境遇는 植民支配 期間과 戰爭(1945年 以後 베트남의 獨立戰爭) 過程에서 길고 지루한 協商을 繼續했다. 美國과 필리핀은 필리핀의 將來에 對해 眞摯한 對話를 나누었으며 1930年代 中盤 필리핀 獨立에 關한 法案이 美 議會를 通過했고, 2次 大戰 終結 後 필리핀은 卽刻 獨立했다.

이런 過程을 통해 植民地의 리더들은 다가올 未來를 어느 程度 豫見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自身들의 立場을 調節할 수 있었으며, 植民本國에 對한 感情도 緩和, 또는 상대화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獨立은 突發的인 것이 아니라 自身들의 努力과 協商 如何에 따라 그 經路가 어느 程度는 統制 可能한 것이었다. 反面 朝鮮의 解放은 親日 勢力뿐 아니라 獨立運動 勢力에게도 뜻밖의 것이었다. 적어도 解放 5年 前까지만 해도 5年 後의 解放을 豫想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正말 “도둑처럼 解放이 찾아왔다”(함석헌).

日敗戰에 直接 對話 없었던 韓日


게다가 朝鮮을 統治하던 日本은 2次 世界大戰의 敗戰國이었다는 點도 重要하다. 英國, 프랑스, 美國의 境遇는 勝戰國이었기 때문에 植民地에 植民本國의 統治力이 維持되는 가운데 植民權力과 現地 엘리트 사이에 協商 過程을 거치면서 權力이 漸進的으로 移讓되었다(프랑스-베트남은 協商 決裂로 戰爭 勃發). 그러나 朝鮮의 엘리트들에게 戰爭 後 獨立을 論議할 相對는 日本이 아니라 美國이었다. 植民本國과의 協商 經驗과 蓄積도, 그들과의 協商채널度 거의 없는 狀態에서 갑작스럽게 分離가 이뤄졌다. 한일은 協商과 論爭을 통해 植民 支配를 ‘精算’할 機會가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정상들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를 논의하는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45年 7月 獨逸 포츠담에서 美國, 英國, 蘇聯 等 聯合國 頂上들이 만나 第2次 世界大戰의 處理를 論議하는 모습.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唐慌하기는 日本 側도 마찬가지였다. 日本은 카이로와 포츠담 宣言을 受容하여 朝鮮을 抛棄하는 데 異議를 提起하지 않았지만, 그 認識에 있어서는 混線을 보였다. 日本 亦是 朝鮮의 獨立이라는 프로그램을 거의 想定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츠담宣言 受諾(1945年)과 同時에 朝鮮이 獨立한 것인지, 大韓民國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樹立(1948年),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講和條約 發效(1952年)로 朝鮮 獨立이 認定된 것인지 明確한 整理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35年間의 植民 支配를 어떻게 位置 지을 것인지, 그리고 그를 가져온 1910年의 韓日合邦조약을 어떻게 評價할 것인지에 對해서도 그러했다.

이런 狀態에서 解放 後 6年 만에 대면한 兩國 엘리트 사이에 벌어진 저 對話는 ‘未定算’ 狀態인 歷史 認識의 懸隔한 差異를 赤裸裸하게 보여준 것이다. 以後 日本은 過去事에 對해 十數 次例 謝過했지만 곧 이를 無色하게 만드는 갖가지 ‘妄言’들을 해왔고, 이는 韓國人의 對日 感情을 악화시키는 데 決定的으로 寄與했다.

박훈 서울대 歷史學部 敎授
#第1次 韓日會談 豫備會談 #구보타 #妄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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