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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關連絡船 탄 朝鮮靑年 辛格浩, 日시모노세키港에서 폭행당하다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東亞日報

釜關連絡船 탄 朝鮮靑年 辛格浩, 日시모노세키港에서 폭행당하다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1月 7日 09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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誕生 100年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創業主①
牛乳 配達과 新聞 配達이 첫 일, 와세다實業學校 夜間 編入
와세다高 學生 創業의 꿈, 美軍 爆擊으로 6萬 엔 날려
誠實 勤勉 信賴 創意로 롯데그룹 成功의 土臺 일군 事緣

《1921年 11月 3日 태어난 롯데그룹 創業主 故(故) 신격호 會長이 誕生 100周年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이를 記念해 ‘熱情은 잠들지 않는다’는 題目의 辛格浩 回顧錄(羅南)을 最近 發刊했다. 回顧錄에 나타난 신격호의 숨 가쁜 挑戰과 成功의 스토리는 時計錘를 돌린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고향인 울주군 둔기리 생가에서 만년(晩年)의 신격호. 롯데그룹
故鄕인 蔚州郡 둔기리 生家에서 萬年(晩年)의 辛格浩. 롯데그룹


日本 爆擊機가 美國領 하와이 眞珠灣을 奇襲 爆擊한 1941年 12月 8日 太平洋戰爭이 始作됐을 때 辛格浩는 나이 20살의 靑年이었다.

當時 그는 故鄕인 蔚州郡 언양 近處인 慶南 梁山에서 羊(羊) 地圖技術院 資格證을 갖고 羊을 牧畜해 羊털을 供給하는 慶南種畜場에서 일하고 있었다. 農村所得 增大事業으로 알고 있었던 格護는 머지않아 日本 政府와 朝鮮總督府가 戰爭에 對備한 軍服 生産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面 書記와 비슷한 月給인 30원을 받으면서 安定된 生活에 젖어들 무렵. 日帝의 戰時總動員이 떨어지면서 格護는 心亂한 마음을 讀書로 달랬다. 이광수 현진건 廉想涉의 小說과 함께 白石(白石)의 詩集 ‘사슴’을 읽는 文學靑年이었다. 日本 劇作家 兼 小說家 야마모토 留鳥의 에세이 한 句節은 靑年 格護의 가슴에 强烈하게 다가왔다.

“하나 뿐인 自身을, 한 番 뿐인 삶을, 眞情으로 살지 않으면 태어난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東京에 가서 더 工夫를 하고 싶슴더’
結婚한 지 2年이 지난 後 夫人이 아이를 가졌다는 消息에 기쁨은 暫時, 11男妹의 長男인 格護에게 子息은 무거운 責任感이기도 했다. 야마모토 유조 作家의 말처럼 “태어난 보람을 찾아 큰 世上으로 가고 싶다”는 熱望이 靑年 格護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까만 煩悶의 밤을 잠 이루지 못한 나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格護는 結局 아버지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는다.

“東京에 가서 工夫를 더하고 싶슴더.”

“곧 애비가 될 놈이 무슨 헛소리냐?”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反應도 싸늘했다.

답답한 마음에 作故한 큰 아버지의 墓所를 찾았다. 每事에 進取的이고 格護를 아끼는 큰 아버지였다.

“큰 아부지! 사내大丈夫가 蔚州 깡촌에서 羊털만 깎고 살기엔 너무 抑鬱함더. 對處(大處)에 가서 待望을 이루고 싶어예!”

무덤 뒤 山 골짜기에서 솔개 한 마리가 蒼空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큰 아버지의 音聲이 들리는 듯했다.

“니 이름대로 해보거래이! 임금에게도 直言하는 格軍審지비(格君心之非), 事物의 理致를 바로 보는 格物致知(格物致知), 그러라고 니 이름에 格(格)을 쓴 거 아이가!”

그 길로 格護는 다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떠나리라. 가서 반드시 큰 꿈을 이루리라.’

●시모노세키 釜關連絡船 7時間 航海 끝 格護를 기다린 것은?
신격호 회장의 울주군 둔기리 복원 생가. 롯데그룹
신격호 會長의 蔚州郡 둔기리 復元 生家. 롯데그룹


日帝 植民地 治下인 朝鮮, 더욱이 戰時 狀況이어서 日本으로 건너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가까스로 四寸兄님의 도움을 받아 蔚山警察署長을 찾아갔다. 威勢가 대단했던 日本人 署長은 뜻밖에 格護를 友好的으로 對해줬다. 家族 몰래 旅行許可證을 받았다. 할아버지 父母님 兄弟 아내의 얼굴이 次例로 떠올랐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莫無可奈 釜山으로 向했다. 手中에 있던 돈은 110원. 네 달値 月給이었다. 洋服을 하나 사 입고 시모노세키 行 釜關連絡船 배票를 한 張 사고 나니 83원이 남았다.

日本에 가서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定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釜關連絡船 3等室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7時間 동안 倍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甚하게 토를 하는 바람에 惡臭가 振動했다.

日本 혼슈(本州) 南西部 시모노세키港에 내린 格護를 기다린 것은 따뜻한 歡待가 아니었다. 旅行許可證만 믿었던 것이 禍根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特別高等係 取調室에 끌려갔다. 思想犯을 다루는 惡名 높은 警察 組織이었다.

格護는 밤을 새워 白紙 10餘張을 빼곡하게 채워야 했다. 出生 關係, 學校, 職場, 父母 兄弟, 旅行 目的 等 쪼그리고 앉아 日本에서의 첫 밤을 이렇게 꼴딱 새웠다.

“야마모토 유조 冊을 感銘 깊게 읽었다고? 그 作家는 神聖한 戰爭에 反對하는 分裂主義者 아닌가?”

刑事가 주먹으로 格護의 얼굴을 후려쳤다.

“너 共産主義者地? 共産黨에 加入하려고 日本에 온 빨갱이지?”

“工夫하러 왔습니다. 學校에 다니려고요. 小說家 志望生으로 文學을 工夫하러 왔습니다.”

또 다시 주먹질이 이어졌다. 코피가 터져 입술 周邊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刑事는 다시 白紙 10餘張을 또 던져줬다. 陳述書를 쓰는 동안 옆房에서 高喊소리와 채찍 소리, 찢어지는 듯한 悲鳴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植民地 朝鮮의 한 靑年이 日本에 들어오는 길은 이처럼 멀고도 險難했다. 蔚山警察署長의 旅行許可證을 받게 된 經緯도 샅샅이 調査했다.

긴 取調와 暴行 끝에 마침내 取調室을 나서는 瞬間 시모노세키의 하늘은 노랗게 보였다. 그리고 어지러웠다. 都市 風景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靑年 格護는 ‘나중에 큰 人物이 되면 이런 恝視를 받지 않을 거야’라며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牛乳配達員에서 代理店 소(小)社長으로
1941년 당시 부관연락선. 7082t급에 여객 정원은 1746명이었다.
1941年 當時 釜關連絡船. 7082t級에 旅客 庭園은 1746名이었다.


도쿄에 언양普通學校를 같이 다닌 故鄕 親舊가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單칸房에 동생과 함께 自炊하는 親舊에게 얹혀 산 것이 格護의 日本 生活 始作이었다. 運이 좋게도 洞네 牛乳代理店에서 職員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금세 일자리를 求할 수 있었다. 어두운 새벽 손수레를 끌고 500ml짜리 牛乳甁 100餘個를 싣고 洞네를 한바퀴 돌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格護를 눈여겨 본 牛乳代理店 社長은 도쿄 生活에 適應할 무렵 配達區域 두 군데를 떼어주며 獨自的으로 運用해보라고 했다. 꼭두새벽에 하는 險한 牛乳 配達을 그만두는 配達員이 적지 않았다. 그 때마다 格護가 두세 名 몫을 해냈다. 많을 때는 牛乳 350病을 돌리기도 했다.

牛乳 配達 後에는 빗자루를 들고 集荷場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았다. 缺勤이나 知覺 한番 하지 않는 格護를 代理店 社長은 눈여겨 봐온 것이다. 도쿄에 온지 不過 넉 달 만에 작은 代理店의 社長이 됐다. 格護는 配達員 2名을 雇用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牛乳를 配達했다. 牛乳를 消化하지 못하는 老人을 위해 양유(羊乳)를 搜所聞해 配達했다. 그러던 어느 날 牛乳 配達 길에 만난 낯익은 新聞補給所 總務는 “配達員 少年이 다쳤다”며 울相을 지었다. 格護는 이 때부터 牛乳와 新聞을 함께 配達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輸入을 더 늘릴 수 있었다. 다다미 4個짜리 房을 얻어 自炊 親舊 집 身世를 면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배움과 文學을 놓지 않았던 靑年期
젊은 청년 신격호의 일본에서의 모습
젊은 靑年 신격호의 日本에서의 모습


格護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트럭技士 助手로, 建設 雜役夫나 典當舖 店員으로도 일했다. 工夫를 하려면 牛乳代理店 만으로는 生活費와 登錄金 冊값을 調達하기가 빠듯했기 때문이다. 2年制 蔚山農業失手學校를 卒業한 格護는 와세다實業學校 夜間部 4學年 編入 機會를 놓치지 않았다. 作家의 길을 抛棄하고 浮氣(簿記)나 珠算, 制度(製圖) 等을 배웠다. 格護 또래의 大學生을 보면서 얼른 中等課程을 마치고 高等敎育을 받고 싶었다.

와세다 實業學校를 卒業한 格護는 敎務主任으로부터 와세다高等學校에 進學하라는 勸誘를 받았다. 學費가 싼 데다 成績이 좋으면 産學協同 奬學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日本이 戰爭에서 敗色이 짙은 1943年 4月 格護는 와세다高 應用化學科에 入學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서도 學業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와세다高 2學年生 格護에게 마침내 創業의 機會가 찾아왔다. 典當舖와 古物商을 運營하던 64歲의 하나미츠 어른을 偶然히 만났다. 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會計帳簿를 말끔하게 整理해준 格護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當時 와세다고에서 커팅오일 開發硏究所에 配置돼 일하던 格護에게 그는 自身의 全 財産 6萬 엔을 맡겼다. 커팅오일 製造業을 생각한 하나미츠 어른은 “자네가 우리 店鋪에서 일할 때 눈여겨봤다”며 “單 한番도 遲刻하지 않고 1錢 한 푼의 金錢 事故도 없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會計帳簿를 一目瞭然하게 整理하는 創意性을 보였다”고 感動했다. 收益金은 2對 1로 나누는 條件이었다.

●모든 投資金, 爆擊으로 사라지다
조선청년 신격호는 일본에서 성실과 근면 신뢰 창의로 일본에서 인정을 받았다. 롯데그룹
朝鮮靑年 辛格浩는 日本에서 誠實과 勤勉 信賴 創意로 日本에서 認定을 받았다. 롯데그룹


誠實과 勤勉, 努力에다 創意性까지 갖춘 格護를 日本人들은 注視했다. 생각지도 못한 提案을 받은 格護는 人夫 대여섯 名을 雇用해 오일 製造設備를 갖추고 原料인 誑誘와 維持도 調達했다. 學生創業가가 된 것이다. 마침내 試製品이 나와 工業廳에 品質 檢査를 依賴하고 本格的인 販賣를 準備했다. 설레는 格護에게 그러나 運은 따라주지 않았다. 日本 本土에 對한 美軍의 爆擊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도쿄 市街地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8萬 名의 死傷者와 罹災民 100萬 名이 생겼다. 格護의 工場도 痕跡 없이 사라졌다. 막 販賣를 始作하려는 때 投資金이 美軍의 爆擊으로 사라진 것이다.

모든 工場設備가 없어졌다. 落膽한 格護, 그렇다고 언제까지 挫折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多幸히 投資金이 折半假量 남아 있다는 것을 慰安으로 삼아야 했다. 도쿄 西쪽 하치오지 地域에 비어 있는 纖維工場을 發見해 再起를 노렸다. 여기에 오일 製造設備를 갖췄다. 納品處는 이미 確保해놓은 狀態였다. 生産品을 쌓아놓고 納品 忌日만 손꼽아 기다렸다.

1945年 8月 1日 하치오지 上空에 B-29 戰爆機가 떼를 지어 나타났다. 美軍의 大大的인 爆擊이 또 다시 始作됐다. 하치오지는 霎時間에 焦土化돼 버렸다. 出荷를 눈앞에 둔 格護의 工場도 잿더미가 돼 버렸다.

눈에선 피눈물이 났다. 하나미츠 어른도 넋이 나간 表情으로 헛웃음만 지었다. 그의 夫人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하나미츠 어른은 모든 것을 諦念한 듯 故鄕으로 돌아가 農事를 짓겠다고 했다. 格護는 엎드려 謝罪하고 빌고 또 빌었다.

●敗戰 日本, ‘샤롯데’가 辛格浩에게 손짓하다
독일 문호(文豪) 괴테의 자전적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 청년 신격호는 일본의 서점에서 운명적인 ‘샤롯데’를 소설에서 만나게 된다.
獨逸 文豪(文豪) 괴테의 自傳的 小說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女主人公 샤롯데. 靑年 辛格浩는 日本의 書店에서 運命的인 ‘샤롯데’를 小說에서 만나게 된다.


“어르신, 6萬 엔은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하나미츠 어른은 그러나 “빌려준 돈이 아니고 投資한 돈이니 아무 잘못도 없는 當身이 갚을 必要가 없네”라며 格護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모든 것을 잃고 며칠을 보내자 1945年 8月 15日이 됐다. 日本이 降伏하고 마침내 2次 世界大戰이 幕을 내린 것이다. 시모노세키港은 釜山으로 가려는 韓國人들로 連日 超滿員이었다. 故鄕을 등진지 어느 덧 3年 8個月. 格護度 故鄕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學業을 마치지도 못했고, 胡주머니엔 돈도 몇 푼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하나미츠 어른과의 約束도 지키지 못했다. 結局 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을 抛棄했다. 더 이를 악물었다. 戰爭이 끝난 日本에선 새로운 世上이 기다리고 있었다. 敗戰으로 亡한 日本, 달라진 世上은 格護에게 危機이면서 同時에 機會였다.

牛乳配達 일을 하면서 자주 書店을 찾아 獨逸의 文豪(文豪)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單숨에 읽은 格護. 小說의 女主人公 ‘샤롯데’는 格護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최영해 記者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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