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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캔버스로 붓이된 作家 김주영[韓國美術의 딥 컷]|東亞日報

땅을 캔버스로 붓이된 作家 김주영[韓國美術의 딥 컷]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8月 18日 17時 06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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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어느 기생의 영혼 祭’(1993-1994)
김주영 ‘어느 妓生의 靈魂 祭’(1993-1994)

손끝이 아닌 ‘온 몸에서 나오는 藝術’이란 무엇일까?

現代美術의 巨匠 요셉 보이스(1921~1986)는 이미 美術館뿐 아니라 大學 講壇, 社會團體, 政黨(綠色黨) 等 곳곳을 누비며 삶 自體가 藝術임을 보여주고 ‘20世紀 다빈치’라는 別名을 얻었다. 그런데 우리는 如前히 ‘르네상스’나 ‘모더니즘’ 같은 虛榮的 美意識에 얽매여 剝製된 美術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韓國의 現代美術家 김주영(72)의 藝術은 흰 廣木천 위에 찍힌 검은 발자국이다. 이 單純한 몸짓이 藝術인 것은 그것이 그女의 삶과 온 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보이스의 ‘펠트 수트’와 벨기에 作家 프란시스 알리스의 ‘散策’ 그 自體가 藝術 作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요셉 보이스 ‘펠트 수트’ (1970)
요셉 보이스 ‘펠트 수트’ (1970)

自身의 삶과 韓國의 歷史,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버무린 韓國 作家 김주영의 藝術 世界를 紹介한다.

● 길 위에서 스스로 붓이 되다

김주영 ‘쌀의 길’(2009), 불가리아에서 ‘노마딕 빌리지’ 프로젝트.
김주영 ‘쌀의 길’(2009), 불가리아에서 ‘노마딕 빌리지’ 프로젝트.

2009年 東유럽 불가리아의 草原. 카라반과 臨時 住居村이 만들어진 ‘노마딕 빌리지’ 한 가운데서 김주영 作家가 흰 廣木천을 펼쳤다. ‘노마딕 빌리지’는 ‘길 위에서 作業하다’는 콘셉트로 藝術家들이 유럽 一圓을 移動하며 함께 生活하고 作業하는 프로젝트다. 오스트리아 슈미에드(Schmiede) 財團 後援으로 이뤄진 프로젝트에 김주영 作家도 參與했다.

그는 빈 땅에 스스로 만든 흰 廣木천 길 위로 검은 먹을 漆한 발자국을 찍어 나갔다. 길 끝에 到着한 곳은 ‘祕密 庭園’. 作家가 노마딕 빌리지에 到着하고 열흘 동안 가꾼 不毛의 땅이다. 조약돌로 50X100cm 區域을 境界 짓고 每日 물을 주었더니 神奇하게도 풀이 돋아났다.

불가리아 ‘노마딕 빌리지’ 속에 만든 비밀 정원(2009)
불가리아 ‘노마딕 빌리지’ 속에 만든 祕密 庭園(2009)

이 길 앞에 선 作家는 땅에 完全히 엎드린다. 그리고 兩팔을 十字로 벌렸다 머리 위로 모으고 半쯤 일어나, 自然의 神에게 쌀 한줌을 바친다. 김주영 作家의 行爲 藝術 ‘쌀의 길’이다. 이렇게 흰 廣木천을 펼치고, 손에는 흙이나 재를 담은 채 발자국을 찍으며, 땅 위에 엎드리며 祭式을 올리는 行爲는 김주영 作家의 트레이드마크다.

一般人이 理解하기 어려운 部分은 이러한 퍼포먼스가 어떻게 藝術 行爲가 되느냐는 것이다. 傍點은 行爲 自體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수많은 脈絡과 含意에 있다. 1990年代부터 始作된 作家의 ‘노마딕 프로젝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이 意識은 韓國의 悲劇的 近代史와 포스트모더니즘 藝術이 얽히면서 誕生한 作品이다.

● 文(門)의 이便과 저便

서 있음(1985), 문틀 위 캔버스에 오일·아크릴, 260x227cm
서 있음(1985), 門틀 위 캔버스에 오일·아크릴, 260x227cm

作家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사주신 크레용과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홍익대 繪畫科에서 油畫와 누드모델을 처음 接하고, 大學院 硏究助敎와 講師 生活 時節엔 幾何學的 그림과 검은色 모노크롬 作業을 했다. 日曜日에는 ‘弘益日妖花迂廻’ 일을 하며 風景畫도 그렸다.

李仲燮의 主治醫였던 精神健康醫學科 博士 유석진 敎授 밑에서 臨床藝術療法(藝術 治療)을 硏究하면서 精神分析學과 心理學을 깊이 理解하게 된다. 이 때 나온 모티프가 바로 ‘門’이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門은 이便에서 저便으로 넘어가는 超現實的 象徵이다. 1986年 파리로 移住한 後 博士論文으로도 이어졌던 이 모티프에 對해 作家는 이렇게 說明했다.

“너무 不充分한 이 世上의 수많은 矛盾들을 생각하며 想像한 ‘저便의 世上’으로 통하는 門과 같다. 모든 問題가 풀어질 것 같은 그런 憧憬의 世界가 있다고 假定한 것이다. ‘九雲夢’의 꿈 속 개미窟 저便의 世界 或은 武陵桃源처럼. 나 스스로를 支撐하게 하는 내 몸 속 집 같은 곳이다.”

환기미술관에서 선보인 ‘무제’(1993), 면 위 혼합재료, 75x500cm
환기미술관에서 선보인 ‘無題’(1993), 面 위 混合材料, 75x500cm

그가 말하는 ‘矛盾’이란 두 가지 側面에서 理解할 수 있다. 하나는 巨視的인 觀點에서 韓半島는 勿論 人間 社會가 갖고 있는 矛盾이다. 또 하나는 微視的 觀點에서 作家의 胎生的 條件이 자아낸 歷史의 矛盾이다.

● ‘神經 姑母’ 이야기

1983년 김주영 작가
1983年 김주영 作家

그는 30代 初盤부터 弘益工業專門大에서 講義를 始作하고, 1982年 當時 뉴욕에 있었던 喚起財團 公募에서 入賞할 程度로 인정받는 作家였다. 그런데 1986年 敎授 자리를 내려놓고 프랑스로 떠난다. 이 때부터 始作된 노마드(流浪)의 삶은 프랑스에서 獨逸 印度 네팔 몽골과 韓國의 DMZ, 다시 中央아시아와 터키로 數十 年間 이어졌다.

流浪이 始作된 理由를 물었을 때, 그는 “내 眞짜 이름은 김주영이 아니다”라고 털어놨다.

“내가 태어나기 前 世上을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가 事實은 左翼 活動을 하다 蒸發했다는 걸 成人이 되어서 알았다. 어머니의 徹底한 證據湮滅로 나는 그 存在조차 몰랐다. 어릴 때 어머니가 나에게 크레용을 쥐어 준 것은 우리 家族의 正體가 綻露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 本名이 ‘현선영’임을 알게 된 것이 파리行 즈음이다.”

存在 自體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經驗. 그가 겪었던 地震과 같은 矛盾은 事實 分斷이라는 韓國 近現代史의 悲劇과도 맞닿아 있다. 이 矛盾과 苦痛을 때로는 깊이 파고들고, 또 때로는 周邊과 世界로 擴張하며 김주영의 作品은 이어졌다.

철원 노동당사에서 행위 예술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 등잔불 祭’(2000)
鐵圓 勞動黨舍에서 行爲 藝術 ‘떠도는 無名의 靈魂들이여: 燈盞불 祭’(2000)

2000年 南大門市場과 DMZ로 이어진 作業 ‘떠도는 無名의 靈魂들이여: 燈盞불 祭’와 2010年 노마드 프로젝트 ‘松花江은 흐른다: 神經 姑母’는 作家의 個人事와 連結된다.

DMZ 프로젝트 當時 作家는 言論 인터뷰에서 “이름 없이 벌판에 버려졌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찾아보고 싶다. 體制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消滅될 수 없는 끈질긴 生命의 鬪爭을 담겠다”고 밝혔다. 作家는 DMZ를 따라 戰爭의 傷痕이 남은 곳에서 호롱불을 켜고 祭式을 올리며 남은 재를 箱子에 담았다.

‘松花江은 흐른다: 神經 姑母’에서는 中國 神經에서 男便을 만난 엄마, ‘神經 姑母’(親戚들이 作家의 어머니를 부르던 呼稱)의 이야기를 追跡해갔다. 하얼빈 長春 吉林으로 이어진 旅程에서 그는 731部隊 博物館, 義烈團 結成 場所, 松花江 等을 찾아 無名의 靈魂을 위한 祭式을 올린다. 돌아온 뒤에는 자개장농 속에 어머니의 遺品과 데드마스크를 놓고 에폭시로 굳혀 剝製했다.

부산 쿤스트독 초대전에서 ‘신경 고모-송화강은 알고 있다’(2010)
釜山 쿤스트毒 招待展에서 ‘神經 姑母-松花江은 알고 있다’(2010)


● 쌀과 흙과 한줌의 再

1986年 作家는 삶의 풀리지 않는 矛盾을 안고 프랑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몇 番의 重要한 만남을 經驗하는데, 그 中 하나가 金煥基의 夫人 김향안 女史(1916~2004)였다. 4年 前 喚起財團 公募에서 受賞한 젊은 作家를 김향안은 記憶했다. 그리고 파리8大學에 進學한 김주영에게 奬學金으로 支援을 해주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때로는 不法 占居(squat)韓 建物을 畫室 삼았던 그에게 큰 도움이었다.

2016년 환기미술관 기획 ‘뮤즈 김향안’전에 출품한 김주영의 작품 ‘창’
2016年 환기미술관 企劃 ‘뮤즈 김향안’展에 出品한 김주영의 作品 ‘窓’

또 다른 만남은 노마디즘 哲學者 질 들뢰즈(1925~1995)였다. 막 파리에 到着해 프랑스語도 流暢하지 못했던 김주영은, 들뢰즈의 講義室 앞에 기다리다 그에게 講義를 듣게 해달라고 졸랐다. 東洋人 藝術家의 切迫함을 본 들뢰즈는 好意를 베풀었고, 김주영은 그의 講義를 聽講했다.

이 때 그의 作品은 平面에서 空間으로 擴張된다. 주어진 空間에 흰 천을 깔고, 검은 발자국을 찍으면서 衝突 속에 그는 造形 이미지를 건진다. 또 납작한 바닥에 거울을 놓아 깊이를 만들기도, 나무로 지은 幾何學的 造形物 속에 草綠色 네온사인을 넣어 活氣를 불어 넣는다. 이 모든 것은 固定된 形式이 아닌 周邊 脈絡에 따라 자유롭게 變化하는 ‘里좀’(Rhizome)的 造形言語다.

2009년 서울 포스코미술관 초대전 전시 전경
2009年 서울 포스코美術館 招待展 展示 前景

유럽 知性史의 變化를 體化한 作家가 돌아온 것은 우리 農家의 悽然한 삶이었다. 흙과 쌀과 農器具와 나무를 活用한 造形 言語를 그는 ‘애잔한 抒情의 風景’이라고 말한다.

“실컷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이 짓 저 짓 해보았는데, 原點으로 돌아왔다. 結局 나의 原點은 韓國의 시골 논밭이 있는 電源이었다. 거친 雜풀더미와 뙤약볕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말이다.”
설치 작품 ‘녹색의 전령사들’(2019) 210x277cm
設置 作品 ‘綠色의 傳令使들’(2019) 210x277cm

지난해에도 터키로 노마드 프로젝트를 이어간 김주영의 作業은 現在進行形이다. 그는 늘 끊임없이 이야기(내러티브)를 만들고, 집을 지으며 또 終局에는 그 집을 불태우고 재로 돌아갈 것이다. 흰 廣木천에 찍힌 검은 발자국처럼, 우리의 삶도 結局은 타고 남는 ‘한줌의 再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억상자 시리즈 ‘한줌의 재 이야기’(2018)
記憶箱子 시리즈 ‘한줌의 再 이야기’(2018)


金敏基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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