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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짜 구경, 深夜의 家出 그리고 도둑질|新東亞

空짜 구경, 深夜의 家出 그리고 도둑질

蹴球에 미쳤던 時節의 漫畫 같은 이야기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skr0814@hitel.net

    入力 2004-09-16 16: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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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시민운동장에서 望遠鏡으로 처음 만났던 花郞팀, 10年 뒤를 훤히 내다본 蹴球狂 아저씨, 思春期 少年을 설레게 만들었던 분데스리가와 獨逸 女學生의 펜팔 便紙… 밥보다 蹴球를 더 좋아했던 사커키드의 그때 그 時節.
    TV로만 蹴球競技를 보던 1970年代 시골少年에게 가장 懇切한 所望은 直接 運動場으로 찾아가 國家代表 選手들의 競技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年代 中盤까지만 해도 A매치를 包含한 大部分의 蹴球競技가 서울에서만 열렸기 때문에 地方에 사는 蹴球팬들이 代表選手들을 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나는 1977年 中學校에 入學하면서 大邱로 옮겨왔다. ‘말은 濟州島로 보내고 人材는 大邱로 보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所信에 따라 村놈이 大都市로 進學한 것이다. 나는 中學校 抽籤을 實施할 때 蹴球部가 있는 계성中學校(황보관氏가 나온 學校)에 配定되기를 懇切히 祈禱했지만 하늘이 무심했던지 럭비부가 있는 中學校로 가게 되었다.

    그해 봄 대구시민운동장에서는 MBC杯 高校蹴球大會가 열렸다. 워낙 蹴球 熱氣가 높고, 大邱MBC가 熱心히 弘報한 德分에 豫選 첫날부터 3萬名을 受容하는 競技場이 꽉 들어찼다. 흔히 大邱를 野球의 都市라고 말한다. 경북고와 大邱商高라는 野球名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當時만 해도 蹴球의 人氣는 野球에 견줄 만했다.

    나는 잔디球場에서 벌어지는 眞짜(?) 蹴球試合을 보기 위해 날마다 學校가 끝나면 市民運動場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大會進行 途中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消息이 들렸다. 地方의 蹴球熱氣를 높이기 위해 國家代表팀이 高校蹴球大會 決勝에 앞서 영남대학과 評價戰을 치른다는 빅뉴스였다.

    當時 代表팀의 人氣는 上終價였다. 不過 한달 前 이스라엘과 日本을 누르고 1978年 아르헨티나월드컵 最終豫選戰에 進出했기 때문이다. 韓國이 이스라엘을 3代1로 痛快하게 누른 게임은 올드 蹴球팬이라면 누구나 記憶할 만한 名勝負였다. 나는 只今도 그때의 感動을 잊을 수가 없다. 暫時 1977年 서울運動場으로 돌아가보자.



    1977年 봄. 78아르헨티나월드컵을 앞두고 全世界는 地域豫選戰 烈風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始作했다. 韓國도 例外가 아니었다. 4年 前 74西獨월드컵 最終豫選에서 濠洲에 덜미를 잡혀 온 國民에게 쓰라린 挫折을 안겨준 韓國蹴球는 이番에야말로 월드컵에 進出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1次豫選 조 編成은 蹴球팬들을 한숨짓게 했다. 强豪 이스라엘, 宿敵 日本과 같은 組에 屬한 것이다. 세 팀 中에서 1位만 最終豫選에 進出할 수 있었다. 日本이야 이길 수 있겠지만, 유럽蹴球를 驅使하는 이스라엘은 아무래도 버거운 相對였다.

    1次戰 어웨이 競技는 0對0 無勝負. 이제 홈에서 이기면 最終豫選 進出이 確定된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1年 前 서울에서 열린 76몬트리올올림픽 豫選戰에서 이스라엘에 1代3으로 完敗당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3月20日.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和暢한 日曜日 午後였다. 서울運動場은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찼고 道路는 閑散했다. 都市와 農村을 가리지 않고 3000萬 國民 모두가 TV 앞에 모여 앉았다.

    競技 始作 前 篤實한 基督敎 信者인 이영무가 運動場에서 무릎을 꿇고 祈禱하자 觀衆들은 爆笑를 터뜨렸다. 이스라엘 選手들과 싸우면서 하나님께 祈禱를 하다니….

    마침내 휘슬이 울렸다. 그러나 채 5分도 안돼 김강남이 허벅지 筋肉痛으로 쓰러지면서 不吉한 兆朕이 나타났다. 韓國代表팀의 최정민 監督은 곧바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박상인을 交替 投入했는데, 이것이 結局 歷史에 길이 남을 ‘大型事故’를 일으키고 말았다.

    戰列을 整備한 太極戰士들이 特有의 機動力으로 이스라엘 門前을 威脅하자 老鍊한 이스라엘 選手들도 唐慌하기 始作했다. 前半 22分 韓國이 드디어 첫 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이 왼쪽을 치고 들어가다 이영무에게 밀어주자 이영무는 相對守備를 넘기는 才致있는 月(Wall)패스로 功을 차범근에게 넘겼다. 그리고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서 相對 守備 두 名을 제친 차범근의 왼발이 불을 뿜었다.

    골인! 숨죽이며 지켜보던 3萬 觀衆의 喊聲이 暴發했다. 차범근은 得點 後의 感激을 이렇게 回顧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뒤에서 목을 감아쥐었고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繼續해서 同僚들이 나를 짓누르듯 올라탔다. 蹴球가 아닌 그 무엇이 이런 感激을 맛보게 할 수 있을까.”

    後半戰. 이스라엘의 猛烈한 反擊이 펼쳐졌다. 제발 1代0으로 끝나주었으면 하는 온 國民의 哀切한 所望을 짓밟기나 하듯 이스라엘은 後半 31分 同點골을 뽑아내고야 말았다. 門前 프리킥이 守備를 맞고 나오자 末尾吏案이 땅볼 中距離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스탠드는 瞬息間에 寂寞에 휩싸였다.

    無勝負는 안된다! 同點골을 許容한 뒤 太極戰士들의 鬪志가 다시 불타올랐다. 짧은 패스와 果敢한 突破로 이스라엘 門前을 더욱 세차게 두들겼다. 몇 次例의 決定的 찬스가 있었으나 아쉽게 골문을 비켜갔다. 남은 時間은 3分餘. 이때 오른쪽 코너 附近에서 최종덕이 긴 드老人을 던지자, 차범근이 飛虎처럼 달려들며 백헤딩했고, 한番 잔디에 튀긴 볼은 골에어리어 正面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곳에 박상인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물이 찢어질 듯한 痛烈한 발리슛이 터지면서 電光板에는 2代1이란 스코어가 새겨졌다.

    그라운드엔 天地가 떠나갈 듯한 喊聲이 울려퍼졌고, 박상인은 龍鬚鐵처럼 뛰어오르며 골 세리머니를 演出했다. 아마도 이때가 박상인의 蹴球人生에서 가장 劇的인 瞬間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박상인의 回顧다.

    “범근이의 헤딩 패스가 날아오는 瞬間, 골문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골키퍼는 若干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나는 오른쪽을 노렸다. 내 生涯를 통해 이처럼 짜릿한 感激은 없었다.”

    逆轉골의 興奮이 가시기도 前인 不過 1分 뒤 이番엔 守備手 최종덕의 長距離 캐논砲가 터져 運動場을 狂亂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攻擊에 加擔한 최종덕이 約 40m 떨어진 支店에서 슛을 날려 이스라엘 골문의 왼쪽 모서리를 꿰뚫은 것이다. 3代1. 韓國의 完璧한 勝利이자, 1年 前 敗北의 痛快한 雪辱이었다.

    競技가 끝나고도 觀衆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本部席에 앉아 있던 코미디언 남보원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觀衆들을 흥겹게 했다. 다음날 어느 新聞엔 ‘3月20日을 韓國蹴球의 날로 定하자’는 社說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드디어 高校蹴球大會 決勝戰이 열리는 날이 왔다. 그날은 봄비가 오락가락하는 日曜日이었다. 接戰 끝에 決勝에 올라온 팀은 大邱 대륜고와 서울 우신고였다. 나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市民運動場으로 向했다. 兄은 母校(대륜고)가 決勝에 進出하는 바람에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당시 대륜고 監督은 프로蹴球 全北 監督을 지낸 김기복氏였고, 우신고에는 최강희가 뛰고 있었다).

    運動場에 들어서자 스탠드는 이미 滿員이었다. 觀衆들은 게임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國家代表 選手들을 注視하고 있었다. 國家代表팀이 高校蹴球大會 決勝戰에 앞서 오픈게임을 벌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代表選手들이 練習하는 쪽 스탠드에서 구경하다 競技가 始作될 무렵 재빨리 자리를 옮겨 代表팀 벤치 바로 뒤에 앉았다. 내가 좋아하던 최종덕 許丁茂 박성화 選手를 좀더 仔細히 보기 위해 望遠鏡까지 動員했다. 그런데 자꾸만 主戰 選手들보다 候補 멤버였던 조광래 김희태 박종원 等에 視線이 쏠렸다. 세 選手는 벤치 쪽에서 함께 헤딩 練習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을 처음 봤다. 望遠鏡으로 봐도 얼굴 輪廓이 제대로 보이질 않을 程度였다. 조광래의 別名이 ‘깜상上이라는 걸 나중에 알고 나서 學窓時節의 記憶을 떠올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우연인지는 몰라도 세 選手 모두 연세대 同期에다 나중에 프로팀 大宇에서 뛰었다).

    競技를 앞두고 볼보이를 맡은 中學生 選手들이 代表팀 벤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더니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혀 人事하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組暴文化’에 觀衆들은 爆笑를 터뜨렸다. 요즘에야 ‘그 흔한 代表選手’라는 말이 나올 程度로 太極마크의 權威가 땅에 떨어졌지만, 當時엔 代表選手가 蹴球選手로서의 成功을 의미하는 絶對的인 基準이었다.

    選手가 紹介되었다. 代表選手들이 스탠드 한쪽 구석에 숨어있다가 呼名되면 그라운드 한가운데로 달려나오는 세련된 方式이었다. 選手가 달려나올 때마다 밴드가 伴奏를 넣고 太極旗를 든 學生들이 選手 周邊을 護衛했다. 選手 이름도 밋밋하게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분 記憶하십니까? 이스라엘戰에서 40m 롱슛을 痛快하게 꽂아넣은 韓國 最高의 長距離 슈터, 崔-種-德!”

    “韓國蹴球의 大들보, 아시아의 虎狼이, 次-犯-筋!”

    마지막으로 車範根을 紹介할 때는 場內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맞춰 3萬 觀衆이 一齊히 “車-犯-筋!”하면서 喊聲을 질렀다. 요즘 유럽蹴球에서나 볼 수 있는 場面이 20年 前 韓國蹴球에서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景氣는 豫想대로 國家代表팀이 영남대를 4對1로 눌렀다. 한마디로 代表팀이 가지고 논 게임이었다. 觀衆들을 의식해서인지(?) 嶺南大 選手들이 齷齪같이 마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代表選手들의 個人技가 그라운드를 수놓았던 興味滿點의 게임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데도 蹴球에 굶주린 大邱市民들은 微動조차 없이 게임에 빠져들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代表팀 競技가 끝났는데도 觀衆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只今 같으면 選手 學父母와 同門들이나 자리를 지킬 高校大會 決勝戰에 3萬 觀衆이 集中하는 長官이 펼쳐졌다. 勿論 大邱市民들은 故鄕팀 대륜고를 熱狂的으로 應援했다.

    結局 一方的인 聲援을 받은 대륜고가 優勝을 차지했다. 대륜고는 네덜란드 아약스팀을 그대로 흉내낸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終了 휘슬이 울리자 同門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어내려와 選手들을 舞童 태운 채 運動場을 한바퀴 돌았다. 그後로도 오랫동안 韓國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長官이었다.

    난 보자마자 이 冊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西獨代表팀의 모든 選手들이 全面 컬러로 나왔으니 到底히 안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普通 ‘사커 매거진’보다 서너 倍나 비싼 이 冊을 내 用돈으로 산다는 것은 不可能했다. 몇 番을 뒤적이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冊꽂이에 다시 꽂아놓았다. 몇 달 用돈을 모아 그 冊을 사야 하나?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며칠 뒤 난 決心했다. 훔치기로! 犯行을 決心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中間考査를 마친 어느날, 나는 大膽하게 書店門을 열고 들어갔다. 언제든지 冊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冊가방 열쇠는 풀어놓았다. 冊가방 안의 敎科書도 最大限 줄여 그 雜誌를 넣어도 表示가 나지 않게 했다. 이 얼마나 周到綿密한 犯行準備인가.

    그 單行本을 冊꽂이에서 꺼내 뒤적이는 척하며 나는 主人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있자 어느 손님이 冊값을 計算하러 카운터에 갔다. 손님으로 인해 내 몸이 가려졌다. 그 瞬間, 재빨리 冊을 가방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泰然히 다른 雜誌들을 만지작거렸다. 正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내 實力에 나도 感歎할 程度였다.

    或是, 萬에 하나 그 主人이 내가 훔치는 場面을 目擊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主人이 警察에 申告할 可能性은 別로 없다고 判斷했다. 내가 그 書店의 主要 顧客 中의 한 名이므로 主人은 차라리 모른 척하고 다음에도 나에게 冊을 파는 것이 더 利益이 된다고 判斷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아, 난 왜 이렇게 머리가 좋은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 冊을 손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데 그렇게 보고 싶던 그 冊이 막상 手中에 들어오니 別로 좋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良心의 呵責 때문인지 後悔가 됐다. 내가 이런 짓을 해서 都大體 뭐가 되려고 하지? 온갖 想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已往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그 事件 以後에도 그 書店에 자주 들렀다. 그 다음부터는 돈을 주고 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0餘 年이 지난 只今 그 書店은 없어졌다. 大邱 집에 들러 市內에 나가면 가끔 그 附近을 지나게 된다. 이미 다른 가게가 들어선 그 자리를 보면 그때 느꼈던 喜悅, 놀라움, 그리고 부끄러움이 새삼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른다.

    “學生, 蹴球 꽤 좋아하나봐? 日本語도 잘하겠네.”

    恒常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던 그 書店 主人에게 이제라도 빌고 싶다. ‘아저씨, 저를 容恕해 주세요’.

    그날 以後 代表選手들이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代表選手의 빨간色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 參考로 當時 代表팀은 빨간色 上衣, 흰 팬티에 빨간 스타킹을 신었다. 그때까지는 特別한 메이커도 없고 太極旗만 달랑 붙어 있었으나, 1977年부터 아디다스가 代表팀 유니폼을 獨占 供給하면서 어깨에 세 個의 줄이 그려진 산뜻한 디자인이 登場했다. 나는 그 유니폼을 사기 위해 大邱의 옷가게와 스포츠用品店을 이잡듯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유니폼은 없었다. 代身 ‘아디도스’니 ‘아디스’니 하는 複製品은 숱하게 많았다. 大邱 市內에 아디다스 代理店 하나 없던 時節이었으니 애初부터 不可能한 試圖였다.

    國家代表팀의 大邱競技가 人氣를 끌면서 그뒤 脂肪競技가 잇따라 열렸다. 박스컵 豫選戰과 外國 프로팀 招請競技가 열릴 때마다 地方의 公設運動場은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이 대목에서 告白할 게 하나 있다. 나는 大邱 市民運動場에서 競技가 열릴 때마다 空짜로 드나들었다. 運動場 바로 앞에서 가게를 하시던 外三寸이 運動場 職員들과 잘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外三寸이 나를 運動場 入口까지 데리고 가서 눈짓으로 信號를 보내면 언제나 無事通過할 수 있었다. 그게 뭐 대단한 特權은 아니었지만, 나는 恒常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外三寸의 힘을 빌려 여러 親舊들을 空짜로 立場시켜주는 바람에 ‘能力 있는 아이’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될 때도 있는 法. 78아르헨티나월드컵이 끝나고 페루의 어느 프로팀을 招請한 적이 있었다. 當然히 空짜 立場을 하려고 外三寸과 出入口 쪽으로 다가갔는데 運動場 職員이 우리 三寸을 報告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냥 가라는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市廳에서 特別團束을 나온 것이었다. 그때 걸렸으면 卽決審判에 넘어갈 뻔했다. 할 수 없이 外三寸 집에 쪼그리고 앉아 間間이 들려오는 喊聲소리에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運動場에는 재미있는 사람도 많았다. 1979年 내가 中3 때 西獨의 함부르크팀이 來韓해 大邱에서 代表팀과 競技를 벌인 적이 있었다. 그날 내 옆에 앉은 한 아저씨는 서울에서 個人事業을 하고 있었는데 代表팀 競技는 勿論이고 웬만한 全國大會는 어디에서 열리든 다 구경 다닌다고 했다. 그 분은 이틀 前 釜山에서 1次戰을 보고 서울로 올라가 일을 본 뒤 오늘 다시 大邱로 내려왔다며, 競技를 보고 나면 서울로 가 장사하고, 光州로 가서 3次戰을 볼 計劃이라고 했다. 나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면서 神奇하게 생각했다.

    代表팀 競技에 앞서 大邱 청구고와 협성고가 오픈 게임을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야, 청구고의 저 오른쪽 풀백 있지? 쟤 이름이 박경훈인데 守備 좋고 오버래핑이 끝내주는 애야. 아마 몇年 後면 이름 날릴 거야. 내가 確信해. 昨年부터 쭉 봐왔거든. 그리고 저기 청구고 攻擊陣에 키 큰 놈하고 오른쪽 윙 보는 조그만 選手 있지? 큰 애가 백종철이고, 작은 애가 변병주인데 쟤들도 대단해. 너 꼭 記憶해 둬라. 쟤들 틀림없이 스타 된다.”

    난 그 말을 듣고 아저씨의 熱誠에 歎服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청구고 3人坊은 後날 ‘큰 物件’이 되었다. 그 蹴球狂 아저씨는 只今도 蹴球場 스탠드 어느 한쪽에서 熱辯을 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시골 少年이 大都市 大邱에 適應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中學校 2學年에 올라가자 學校 가기가 싫어졌다. 아침마다 콩나물 시루보다 더한 滿員버스에서 1時間 동안 시달리는 일도 지겨웠고, 規律을 强調하는 學校 雰圍氣도 마뜩찮았다. 또 學校가 貧民街에 있다보니 登下校 때 退學당한 不良輩들에게 돈을 빼앗기는 일이 許多했다. 재미라곤 하나도 없던 그 時節, 그나마 나의 精神世界를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蹴球뿐이었다.

    1978年 6月 아르헨티나월드컵이 열렸다. 事實 월드컵이 열려도 別로 興奮이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出戰조차 못한데다 아는 選手도 別로 없고, 내가 좋아하는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는 負傷이 憂慮된다는 理由로 出戰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獨逸 對 폴란드의 開幕展도 월드컵 競技치고는 너무 재미없었다.

    둘째날 主催國 아르헨티나와 헝가리의 豫選 1次戰이 열렸다. 난 아무 생각없이 TV를 켰다. 그런데 始作부터 뭔가 雰圍氣가 달랐다. 選手들이 入場하자 8萬名을 收容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버플레이트스타디움에 色종이 꽃가루가 뿌려지기 始作했다. 8萬名의 홈관중이 한꺼번에 뿌려대는 五色종이, 抛物線을 그리며 떨어지는 하얀 두루마리, 一齊히 나부끼는 하늘色과 흰色의 아르헨티나 旗발…. 난 그렇게 멋있고 熱狂的인 場面은 처음 봤다.

    觀衆들의 뜨거운 歡呼를 받고 登場하는 아르헨티나 選手들. 하늘色 줄무늬에 까만 팬티, 하얀 스타킹, 夜間競技에 特히 잘 어울리는 傳統의 유니폼. 난 그 競技를 보기 前까지만 해도 南美蹴球 하면 브라질이 最高인 줄 알았다.

    그러나 始作하자마자 아르헨티나가 보여준 絶妙한 1代1, 2代1 숏패스, 놀라운 個人技, 始終一貫 원터치 패스로 헝가리 陣營을 蹂躪하는 組織力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도 完全한 찬스가 생길 때까지 個人技로 守備를 제치거나 끝까지 패스를 주고받는 모습은 南美蹴球의 眞髓를 滿喫하게 했다. 動作 하나하나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공이 발에 착착 달라붙으면서 패스가 살아 움직였다. 때까지 車範根과 허정무가 最高인 줄로만 알던 나에게 南美의 個人技는 경이로움 그 自體였다.

    요즘은 南美蹴球度 유럽 스타일의 롱패스와 空中攻擊을 많이 試圖하지만 當時만 해도 徹底하게 南美 스타일을 固執했다(그런 點에서 나는 最近까지 南美蹴球를 無識하다 싶을 程度로 固守하는 콜롬비아 代表팀을 좋아한다). 더군다나 아르헨티나 選手들은 自國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만큼 始終 自信滿滿한 플레이를 펼쳐 剛한 印象을 남겼다.

    아르헨티나 選手들의 容貌는 또 어떤가. 白人과 인디언의 混血이 빚어낸 그 絶妙한 調和(?), 한마디로 너무나 멋지게 생겼다. 두꺼운 가슴은 當時 流行하던 착 달라붙는 上衣와 어울리고, 고무공처럼 彈力 있고 미끈한 다리는 짧은 팬티와 調和를 이루었다. 홈 觀衆들을 熱狂시키며 連戰連勝을 거둔 하늘色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戰士들은 決勝에서 오렌지群團 네덜란드를 꺾고 優勝을 차지했다.

    1979年 大邱의 어느 劇場에서 78아르헨티나월드컵 記錄映畫가 上映되었다. 題目이 ‘土도스의 祝祭’인가 그랬다. 월드컵 記錄映畫는 가끔 TV에 나오지만, 劇場에서 上映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5mm 映畫필름으로 蹴球를 보는 그 생생한 맛은 비디오와는 또 달랐다. 劇場側에서는 觀客이 꽤 있을 줄 알고 上映했지만 興行에는 完全히 失敗해 내가 그 映畫를 볼 때는 觀客이 열 名도 채 안됐다. 그렇지만 난 너무나 재미있어 두 番이나 보았다. 마지막 場面에서 決勝戰이 끝난 後 아르헨티나 選手들이 優勝컵을 들고 舞童을 탄 채 運動場을 行進하자, 8萬 觀衆이 모두 일어나 旗발을 흔들며 “알젠티나! 알젠티나!”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1978年에 아르헨티나가 보여주었던 ‘蹴球藝術’로 因해 索莫하고 暗澹했던 나의 中學時節은 아름답게 彩色될 수 있었다. 同時에 蹴球는 내 生涯 最高의 스포츠로 永遠히 자리잡게 되었다.

    78아르헨티나월드컵 以後 나는 蹴球의 새로운 境地에 눈뜨기 始作했다. 월드컵에 이어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獨逸 분데스리가였다.

    20代 後半 以上이라면 1970年代 後半에서 1980年代 初盤까지 獨逸 분데스리가 競技가 얼마나 國內 蹴球팬들을 사로잡았는지 잘 記憶할 것이다. 분데스리가 때문에 國內 蹴球가 시시해 보이고 蹴球場에 觀衆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올 程度였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데스리가는 내가 中學校 1學年 때인 1977年부터 MBC 텔레비전의 正規 프로그램으로 放映됐다.

    먼저 競技場 施設이 視聽者들을 놀라게 했다. 일자무늬로 絨緞처럼 멋있게 깎은 잔디는 黑白TV로 보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듬성듬성 敗因 잔디, 조금만 날씨가 추워지면 누렇게 變하는 우리나라 蹴球場만 보다가 洋탄자를 聯想케 하는 競技場을 보니 蹴球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스탠드를 꽉 메운 觀衆들이 우렁찬 喊聲과 合唱으로 競技場 雰圍氣를 高調시키는 場面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暫時도 쉴틈 없이 攻擊을 주고받는 가운데 數萬 觀衆들이 하나가 되어 부르는 合唱소리…. ‘讚揚하라 노래하라 創造者의 榮光을’ 하는 베토벤의 交響曲도 들리고, 當時 人氣를 끌던 록그룹 퀸의 노래도 나왔다. 特히 同點골이나 逆轉골이 터지는 瞬間 추운 날씨에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觀衆들이 부르는 雄壯한 베토벤의 交響曲은 銳敏한 思春期 少年의 感性을 刺戟하기에 充分했다. 나는 그때 西獨 蹴球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1974年 월드컵 優勝과 莫强한 獨逸의 經濟力을 바탕으로 한 분데스리가는 蹴球選手라면 누구나 羨望하는 黃金의 땅, 世界蹴球의 ‘엘도라도’였다. 따라서 유럽의 내로라하는 蹴球選手들, 例를 들어 잉글랜드의 케빈 키件, 토니 우드콕, 덴마크의 알란 시몬센,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페差異(車範根과 함께 프랑크푸르트팀의 外國傭兵이었던 이 選手는 1996年에 아깝게 죽었다. 車範根度 葬禮式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리고 有故, 폴란드 같은 共産國家의 有名 選手들이 모두 분데스리가에 몰려 들었다.

    當然히 競技 水準도 最高였다. 1976年부터 1981年까지 유럽 最優秀選手賞을 모두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選手가 차지할 程度였다. 各國의 蹴球 스타들이 網羅된 데다 獨逸 特有의 組織的이고 짜임새 있는 스타일, 그리고 두 골을 먼저 먹더라도 세 골을 넣어 逆轉勝을 거두는 特有의 ‘게르만 精神’으로 因해 분데스리가는 언제나 興味滿點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蹴球競技라도 只今처럼 便安하게 소파에 기대어서 보거나 누워서 視聽했다면 記憶에 오래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데스리가가 錄畫放送되는 時間은 每週 月曜日 밤 11時부터 1時間 동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學校 안 가는 日曜日보다 月曜日이 더 기다려졌다. 月曜日 저녁만 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時計를 자꾸 쳐다보았다. 冊床에 앉아 英語單語를 외우면서도 머릿속은 蹴球로 가득 찼다. 練習帳에 R字로 始作되는 單語 스펠링을 쓰다가 보면 어느새 Rittbarski(리트바르스키)나 Rummenigge(壘메니게) 같은 蹴球選手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蹴球가 始作되는 밤 11時는 大部分의 사람들이 잠자는 時間이다(1970년대에는 通禁이 있었기 때문에 就寢時間이 只今보다 더 빨랐다). 우리 父母님도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안타깝게도 집에 한 臺뿐인 TV는 안房에 있었다. 月曜日 밤마다 나는 도둑 걸음으로 소리 안나게 안房門을 열고 들어가 가슴 졸이며 TV를 켜야만 했다.

    불꺼진 房에서 TV를 켜면 房이 갑자기 환해지므로 父母님이 깰 念慮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畵面을 어둡게 했다가 차츰 밝게 하는 戰術을 썼다. 또 畵面이 房안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려면 TV 앞에 바짝 다가앉아 봐야 했기 때문에 2.0이던 내 視力은 그때부터 垂直 落下했다.

    소리가 밖으로 새면 안되므로 이어폰은 必須的이었다. 그냥 그림만 봐도 되겠지만 이철원 캐스터의 明快한 進行과 主榮光 할아버지의 구수한 解說을 빼놓으면 興味가 半減된다. 그리고 蹴球競技에서 觀衆들의 應援소리는 얼마나 重要한가. 숨소리도 잘 못내는 이런 劣惡한(?) 視聽條件이었지만, 한 競技 한 競技 모두 蹴球의 眞髓를 보여주었기에 暫時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고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싸는 法이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시는 바람에 이부자리를 펴자마자 분데스리가를 放送하는 時間이 됐다. 난 조금 不安했지만 여느 때처럼 操心스레 TV를 켰다. 아직 잠이 들지 않으신 아버지는 “疲困하니까 오늘은 그만 가서 工夫나 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조금만 볼게요” 하면서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어느 팀間의 競技였는지는 記憶이 잘 안나지만 아무튼 골이 많이 터지면서 逆轉劇이 펼쳐질 刹那였다. 아버지는 이里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잠을 못이루셨고, 옆에 있던 어머니도 그만 TV를 끄라고 재촉하셨다. 그러나 到底히 中間에 抛棄할 수가 없어 못 들은 척하며 繼續 보았다. 그러자 暫時 後 아버지의 불號令이 떨어졌다. 只今도 귀에 생생한 그 호통…. “이 勞務 자슥이 蹴球에 미쳤나? 工夫는 안하고 뭐하고 있노! 빨리 안 나가나?” 그러시면서 TV를 팍 꺼버리는 게 아닌가.

    난 입을 삐죽 내민 채 안房을 나왔다. 아, 어떡해야 하나? 大逆轉劇이 펼쳐질랑말랑 하는 時間인데. 暫時 머리를 싸매다가 勇斷을 내렸다. 洞네 市場에 있는 電波社로 가자! 그 가게는 밤 늦게까지 門을 열어놓고 있으니 거기 가서 보자! 밤 11時가 넘은 時間에 추리닝服을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집에 돌아올 때를 對備해 大門을 살짝 열어 놓았다. 11月쯤이었을 것이다. 밤 날씨가 꽤 추웠다. 그러나 분데스리가에 對한 사커키드의 熱情을 막을 수는 없었다. 電波社 琉璃 안에 陳列된 TV를 밖에서 보느라 오들오들 떨었다.

    所願대로 競技를 다 보고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大門이 잠겨 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보니 火가 난 아버지가 내가 房에 없는 것을 보시고는 얼어죽으라고(?) 大門을 잠가 놓은 것이다. 嚴하고 固執 世紀로 소문난 아버지가 大門을 잠가 놓았으니 아무도 許諾 없이 열어주지 못한다. 몇番이나 大門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이고, 난 죽었다. 이 추운 날씨에 正말 얼어죽겠구나.’ 손은 시려오고 발은 漸漸 얼어오고. 혼자 大門 앞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에 熱을 냈다. 이러기를 30餘 分. 드디어 救援의 손길이 왔다. 119 救助隊, 아니 어머니가 나오시는 게 아닌가. 大門을 열어 주시면서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아이고, 이 자슥아? 뭐가 좋다고 밖에까지 나가서 그걸 보고 오노?” 이러셨다. 나도 내 身世가 凄凉해서 눈물이 나올 地境이었다. 나는 ‘다시는 안 봐야지. 이게 무슨 꼴이야’ 하며 굳게 決心했다. 그러나 1週日 뒤 나는 또다시 도둑 고양이처럼 안房門을 열고 말았다.

    분데스리가 選手 中에 내가 特히 좋아했던 選手들이 있다. 바이에른 뮌헨 所屬의 칼 하인츠 壘메니게는 20歲 新人 때부터 보았는데 첫눈에 大成할 것 같은 豫感이 들 程度로 골 決定力이 돋보이는 典型的인 獨逸스타일이었다. 高 1 때인가, 이 選手에게 난生 처음으로 팬레터라는 것을 보낸 적이 있다. 日本 蹴球雜誌에서 뮌헨팀 住所를 찾아내 보냈는데 英語로 作成하느라 며칠을 끙끙 앓았다. 期待도 안했지만 答狀이 없어 그 뒤로는 그 選手를 좋아하지 않았다.

    슈투트가르트 所屬의 韓紙 뮐러度 나의 偶像이었다. 이 選手는 20歲에 代表팀에 뽑혀 1978年 월드컵에 出戰할 程度로 天賦的인 才能을 가진 選手였다. 어머니가 이탈리아系여서 그런지 몰라도 라틴兄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東洋的으로 보이는 美男이었다. 잘생긴 얼굴에다 뛰어난 實力을 가진 德分에 오랫동안 아디다스의 公式모델로 活躍했고, 이 때문에 外國 蹴球雜誌엔 언제나 이 選手 얼굴이 나와 있었다. 中學校 2, 3學年 무렵 내 房안에는 韓紙 뮐러와 아르헨티나의 마리오 켐페스, 그리고 蹴球를 좋아한다는 팝 歌手 로드 스튜어트의 大型寫眞이 붙어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第一 좋아한 選手는 쾰른팀의 헬베르트 노이만이었다. 쾰른팀의 미드필더로 活躍한 이 選手는 實力은 勿論이고 뛰는 모습이 멋졌다. 늘씬한 몸매에 金髮을 휘날리며 날렵하게 달리는 모습은 魅惑的이었다.

    그 나라의 蹴球가 맘에 들면 그 나라 自體가 좋아진다. 분데스리가에 반한 나는 獨逸이라는 나라에 愛情을 느끼기 始作했다. 中3 때 英語實力도 키울 겸해서 펜팔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西獨의 어느 女學生과 便紙를 주고받았다. ‘엘케 브링크마이어’라는 이름을 가진, 나보다 한 살 어린 시골 女學生이었다.

    내가 또박또박 印刷體로 써서 便紙를 보내면, 이 女學生은 알아보기 힘든 筆記體로 날려써서 答狀을 보내왔다. 이 때문에 文章 解釋보다는 綴字 害毒에 더 오랜 時間이 걸렸다.

    그 女學生에게 한番은 “1988年에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걸 아느냐”고 내딴에는 民族的 自負心을 가지고 물었는데, 그 女學生은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簡單히 對答했다. 當時 放送에서는 世界가 韓國을 注目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나는 西獨 女學生의 答狀을 받은 以後 우리나라 言論을 別로 믿지 않게 되었다.

    또 한番은 차범근이 西獨에서 猛活躍하던 때여서 “車範根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나는 스포츠를 別로 안 좋아해서 모른다. 그러나 오빠에게 물어봤더니 안다고 하더라”라는 內容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 내가 내린 結論은? ‘蹴球는 올림픽보다 偉大하다’는 것.

    1年 程度 便紙를 주고받으면서 親해지자 膳物이 오갔다. 나는 유럽 最高의 權威를 자랑하는 西獨의 蹴球 週刊誌 ‘키커(Kicker)’誌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女學生이 보고 싶어한 우리나라의 女學生 雜誌들을 몇 卷 보내주고 ‘키커’誌를 보내달라고 要請했다. 한달 後 서너 卷의 ‘키커’誌가 到着했다. 분데스리가의 생생한 競技寫眞과 스타들의 올 컬러 畫報를 보던 瞬間의 짜릿함이란…. 나는 며칠동안 그 雜誌 뒤적이는 재미로 살았다.

    분데스리가는 蹴球에 對한 나의 視野를 한 段階 높여주었다. 플레이는 어떠해야 아름다운가. 高級蹴球는 무엇이며, 觀衆들의 應援은 어떠해야 하는가. 팬을 最優先視하는 그들의 確固한 프로精神度 배웠다. 페어 플레이의 所重함도, 誠實한 蹴球스타의 姿勢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重要한 것은 蹴球가 아름답고 感動的인 스포츠라는 事實이었다.

    撞球를 처음 칠 때 누워서 天障을 보면 撞球알이 굴러가고, 바둑을 熱心히 배울 때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바둑板이 어른거리는 法이다. 무엇인가에 빠져들면 사람의 視覺, 聽覺 等 모든 感覺이 最大로 銳敏해지기 때문이다. 特히 感受性이 豐富하고 記憶力이 最高로 發達해 있는 思春期 時節에는 自己가 좋아하는 것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모든 商品이 靑少年을 제1의 購買對象으로 設定하는 理由도 여기에 있다. 靑少年期에 親密하게 接했던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好感을 갖는 法이다.

    蹴球에 빠져들던 中高等學校 時節의 나 亦是 마찬가지다. 蹴球와 關聯된 것들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고, 한番 들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正確하게 記憶했다. 정작 잊지 말아야 할 重要한 것들(數學公式, 親戚 이름 等)은 쉽게 까먹어서 ‘난 참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蹴球에 關한 記憶力은 非常해 나 스스로 무척 疑訝하게 생각했다.

    나는 蹴球에 빠져들수록 더 많은 情報를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接한 것은 스포츠 週刊誌였다. 내가 初等學校 5學年 때인 1975年, 서울신문사(現 대한매일新聞社)에서 ‘週間 스포츠’라는 雜誌를 創刊했다. 中學校에 다니는 兄이 學校 갔다오는 길에 사오면 난 兄보다 빨리 읽어 나갔다. 當時 最高 人氣 스포츠는 뭐니뭐니해도 蹴球라서 許久한 날 表紙는 차범근이었고, 代表팀의 國際試合만 있다 하면 代表選手 全員의 컬러 寫眞이 畫報로 실렸다.

    選手 個個人에 對한 紹介나 海外 有名스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只今도 기억나는 것은 當時 國家代表 守備手였던 김호곤(現在 釜山 아이콘스 監督)李 高等學校 時節 한때 誘惑에 빠져 깡牌 비슷한 生活을 했다는 얘기였는데 어린 마음에 꽤 衝擊이었다.

    좀처럼 잊을 수 없는 寫眞으로 차범근이 아이스크림 먹는 寫眞을 들 수 있다. 1975年 ‘브라보콘’이라는 이름을 달고 콘 形式의 아이스크림이 처음 登場했다. “12時에 만나요. 브라보콘” 하는, 只今도 가끔씩 나오는 追憶의 텔레비전 廣告가 流行하던 때였는데, 시골 아이들이 브라보콘을 먹는 것은 엄청난 幸運이었다. 나 또한 브라보콘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所願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主幹스포츠’의 ‘소문난 自己’ 코너에 當時 大學生이던 차범근이 登場했다. 조끼 러닝 차림에다 天眞爛漫한 表情을 지으며 브라보콘을 먹고 있는 寫眞(亂 只今까지 차범근의 그 얼굴만큼 해맑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이 실렸는데,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正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스포츠 新聞이 速報뉴스와 다양한 읽을거리로 사람들의 人氣를 끌기 始作하면서 스포츠 週刊誌는 漸次 衰退하기 始作하더니 1980年代 初盤이 되자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85年 프로野球 붐을 타고 ‘스포츠서울’이 생기기 前까지 우리나라 唯一의 스포츠 新聞은 ‘일간스포츠’였다.

    1970年代 初盤에 創刊된 ‘일간스포츠’는 1970年代 中盤부터 人氣 作家 고우영의 漫畫가 連載되면서 獨占的인 人氣를 누렸다. 요즘에야 1年 내내 스포츠 新聞의 1面이 프로野球로 裝飾되지만 1970年代만 해도 前날 벌어진 競技 中心으로 1面 톱기사를 채웠다(나는 이게 原則的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말도 안되는 뻥튀기 記事는 없었다).

    분데스리가에 本格的으로 關心을 갖기 始作한 中2 때부터 ‘일간스포츠’를 定期購讀했다. 勿論 스포츠 新聞 본다고 父母님이 돈을 주실 理는 없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兄을 꼬드겨(?) 共同으로 負擔하는 條件으로 購讀하게 됐다. 분데스리가가 每週 土曜日 열리므로 月曜日 아침 ‘일간스포츠’엔 분데스리가 消息이 꼭 실렸다. 그만큼 讀者들도 關心이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아예 분데스리가 18個팀을 가로, 세로로 그려놓고 리그 1次戰부터 大田記錄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한칸 한칸 메워나가면서 내가 좋아하던 쾰른팀과 보루시아 MG팀의 優勝 可能性을 展望해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蹴球가 뭐길래 유럽에서 벌어지는 리그競技를 놓고 아시아 東쪽 끝에 있는 나라의 시골 少年이 마치 住宅福券 番號 맞추듯이 체크해가며 一喜一悲했는지 只今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일간스포츠 購讀은 高等學生이 되면서 끝났다. ‘工夫하기도 바쁜데 그 따위 新聞을 돈주고 보느냐’는 父母님의 驅迫을 더 以上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新聞으로도 蹴球情報의 渴症을 시원하게 풀 수는 없었다. 競技結果와 斷片的인 消息만으로 蹴球專門家(?)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大邱市內 中心街 큰 書店을 두리번거리다가 ‘月刊 蹴球’라는 雜誌를 發見했다. ‘어? 이런 게 있었어?’ 感激의 瞬間이었다.

    只今 본다면 別로 시답잖은 內容이었겠지만 蹴球에 關한 情報를 목마르게 찾던 나에겐 샘물과도 같았다. 비록 두어달 지난 消息이긴 했지만 外國의 主要 競技를 꼼꼼히 說明해주고, 外國 스타들에 對해서도 仔細하게 紹介했다. 外國의 蹴球雜誌를 飜譯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程度로 文章이 語塞했지만, 그런 게 問題가 될 수는 없었다.

    ‘月刊 蹴球’라는 대단한(?) 雜誌가 있다는 것을 發見한 以上 다음號가 나올 때까지 無酌定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月刊 蹴球’ 課月號를 사기 위해 書店을 찾았다. 그러나 大型 書店엘 가도 課月號는 이미 返品된 뒤였다. 落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結局 헌冊房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日曜日 하루를 잡아 大邱 市內 헌冊房을 이 잡듯이 뒤졌다. 自轉車 하나 없던 그 時節에(있어도 複雜한 都市에서 끌고 다닐 수도 없었겠지만) 그 넓은 大邱市內를 걸어서 돌아다녔으니 나도 참 웃기는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닌 結果 收穫은 꽤 짭짤했다. 거의 空짜로 ‘月刊 蹴球’ 課月號를 모으게 되었다. 나는 4∼5年 前에 나온 것까지 求했는데, 그 德分에 許丁茂 조광래 최종덕 같은 選手들의 高等學校 時節 까까머리 寫眞도 볼 수 있었다. 또 내가 幻想처럼 여기는 74西獨월드컵 때의 畫報와 그 大會의 스타들에 對한 記事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그때의 즐거운 氣分을 뭐라고 表現해야 좋을까? 아마 考古學者가 千辛萬苦 끝에 原始時代 遺跡을 發見했을 때의 기쁨이 그렇지 않을까? 그때 헌冊房에서 사온 옛날 ‘月刊 蹴球’를 房 한쪽 구석에 쌓아둔 채 滿面에 微笑를 머금고 冊張을 넘기던 내 모습을 누가 봤다면 ‘讀書三昧境’이란 말이 어떤 건지 實感했을 것이다.

    ‘月刊 蹴球’의 때 늦은 記事, 質 낮은 寫眞, 엉성한 情報는 海外蹴球에 本格的으로 눈을 돌리기 始作한 나의 눈에 漸次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 始作했다. 이제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 했다. 中學校 3學年 때인 어느날, 市內에 들렀다가 日本人들이 主로 찾는다는 호텔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옆에 日本冊만 파는 조그만 書店이 있었다. 好奇心에 들어가 봤다. 요즘에야 外國冊 書店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大邱에 그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日本에 雜誌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다양할 줄은 미처 몰랐다. 若干은 외설스런 雜誌도 있었는데 한마디로 ‘文化的 衝擊’이었다.

    한참을 보다가 드디어 蹴球 雜誌를 發見했다. ‘사카 마가진(사커 매거진)’과 ‘이레分(일레븐)’이었다. 于先 華麗한 컬러寫眞이 나를 사로잡았다. 와, 이렇게도 멋있는 寫眞들이! 그것도 한두 페이지가 아니라 앞, 뒤, 中間으로 여러 쪽에 걸쳐 있었다. 모두 最新 寫眞들이었다. 게다가 유럽, 南美 各國의 最近 리그 消息, 甚至於는 韓國蹴球 消息까지 仔細히 실려 있었다. ‘月刊 蹴球’만 봐오다가 그런 雜誌를 보니 한참 동안 눈이 떼어지질 않았다.

    當時 ‘사커 매거진’은 한 卷에 350엔 程度 했는데 한달 用돈의 3分의 1을 바쳐 購入했다. 陳列臺에 꽂혀 있는 蹴球 雜誌 中 日本選手 寫眞이 가장 적고, 유럽의 蹴球스타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을 사기 위해 고르고 또 골랐다. 이렇게 사온 ‘사커 매거진’을 집에 가져와 밤 새도록 뒤적이는 내 모습은 여러분의 想像에 맡긴다.

    이렇게 해서 中3 때부터 用돈을 탈 때마다 사기 始作한 日本 蹴球雜誌가 高等學校 2學年쯤 되자 40∼50餘 卷에 達했다. 學校 親舊들이 가끔 집으로 놀러오면 蹴球雜誌만 잔뜩 冊欌에 꽂혀 있으니까 “너 蹴球選手 되려고 하냐?”면서 놀리기도 했다. 甚至於 어떤 親舊는 “넌 賣國奴, 親日派다. 저 冊 사면 日本놈들 돈 버는 것 아니냐” 하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안타깝도다! 鴻鵠의 뜻을 어찌 聯作이 알 것인가.

    蹴球를 꽤 좋아한 한 親舊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雜誌를 보며 대단히 재미있어했다. 高等學校 때 내가 다니던 學校는 第2 外國語로 日本語를 배웠기 때문에 나는 어렴풋이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記事 內容 中에 어떤 選手를 說明하며 ‘韓事務 푸레이야(핸섬 플레이어)’라는 말을 써놓았다. 親舊가 “그게 무슨 말인지 到底히 모르겠다”고 나에게 물어왔다. 가소로운 녀석, 그런 것도 모르다니. 나는 그 親舊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한참 동안 無識함(?)을 탓한 後에 가르쳐준 일도 있다(그 親舊가 어찌어찌해서 廣告會社에 들어가 몇 年 前에 엄청난 히트를 친 ‘孝(孝) 廣告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親舊는 팀長으로 新聞, 雜誌에 자주 紹介되기도 했는데, 이런 것만 봐도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法이다. 그러니 함부로 親舊를 無識하다고 놀리면 안된다).

    이番에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告白하겠다. 1980年 가을, 고1때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럽蹴球選手權大會가 열렸다. 壘메니게, 슈스터 等을 앞세운 西獨이 벨기에를 누르고 優勝을 차지, 유럽 最强의 自尊心을 지켰다. 몇 달 뒤 내가 들르는 日本雜誌 專門書店에 유럽蹴球選手權大會를 다룬 特別 單行本이 나왔다. 競技모습과 스타들의 컬러畫報만 數十쪽에 이르는 꽤 두꺼운 冊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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