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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衆 政治’ 꿈꾼 異端兒 마키아벨리|新東亞

‘民衆 政治’ 꿈꾼 異端兒 마키아벨리

  • 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入力 2004-09-16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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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는 貴族과 民衆의 ‘階級對立’을 直視했다. 君主는 힘의 均衡을 表現하는 法을 만들어 民衆의 便에 서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오늘날 마키아벨리는 權謀術數의 代價, 파시즘의 惡靈으로 誤解받고 있다. 그가 熱望한 ‘참된 君主의 꿈’은 르네상스 時期의 都市國家에서 왜 좌절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韓國과 日本, 中國 사이에는 歷史的으로 늘 葛藤이 있어왔다. 그 세 나라를, 흔히 우리는 佛敎·儒敎圈에 屬한 東洋이라 부르며 西洋에 對應시키지만, 動·西洋이라는 區分의 具體的 內容에 對해서는 여러 疑問이 든다. 地理的으로도 正確히 말하자면 ‘東洋 3國’이란 곧 東北아시아다. 東洋에는 그밖에도 많은 地域의 나라들이 包含돼 있다.

    最近 유럽이 統合됐다. 꼭 그 水準은 아니어도 世界 여러 地域에서 統合이 進行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特히 東北아시아에 統合이란 없다. 합치기는커녕 韓半島는 分斷國이다.

    유럽 統合과 함께 15個國 歷史家가 共同執筆한 유럽史가 나왔다. 우리나라에는 ‘유럽 共同의 歷史 敎科書’란 式으로 紹介되었는데, 여기서 ‘敎科書’란 事實과 다른 宣傳에 不過할 뿐이다. 이런 類의 유럽社는 以前에도 수없이 씌어졌다. 그러나 東北아시아에서처럼 歷史敍述에 葛藤이 일었던 境遇는 거의 없다.

    이 冊의 첫머리를 裝飾하는 것은 로렌제티의 壁畫다. ‘調和를 이룬 하나의 유럽’이라는 主題 아래 이 壁畫를 紹介하면서 都市와 農村의 均衡, 空間을 組織하는 能力이 유럽의 特徵임을 說明하고 있다. 只今은 그 特徵들이 巨大都市에 依해 威脅당하고 있으나, 다른 많은 挑戰들을 克服했듯 이 또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이 冊의 主張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都市는 유럽의 物質的 土臺로서 큰 重要性을 갖는다.

    이 冊은 또한 ‘유럽 精神’이란, 그리스에서 비롯한 民主主義(市民의 積極的 參與를 土臺로 한)에서 出發해, 로마時代 法治主義와 立憲主義를 거쳐, 르네상스와 啓蒙主義에 依한 個人의 自由로 完成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로마 時代 以來 部(富)의 偏重 問題가 發生했으나 中世 修道院은 이 問題를 克服했고, 그 成功을 바탕 삼아 19世紀에는 歲속修道院 創設을 通한 유토피아 建設을 追求했다. 새로운 試圖는 失敗로 끝났으나 代身 勞動組合運動이 일어나 1945年 以後 社會保障制度에 依한 福祉國家 建設로 歸結되었다. 이 冊은 國民福祉 實現이야말로 全世界에 發散하는 유럽의 魅力이라 결론짓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對한 잘못된 視角


    유럽 統合의 아버지로는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많은 르네상스人들이 擧論되고 있다. 反面 마키아벨리는 이들과 敵對關係에 있었던 것으로 評價했다. 이는 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사람들의 見解에 基盤한 것이다. 그러나 實狀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統一을 渴望했고, 그 實現을 위해 現實感覺이 뛰어난 政治人이 되기를 希望한 人物이지 유럽 統合에 反對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 剛하게 ‘民衆을 위한 政治’를 主張한 사람이었다.

    한때 反工學者로 脚光 받은 막스 베버는, 이제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닌 儒敎를 土臺로 資本主義 發展을 說明하는 理論的 土臺를 形成한 사람으로 援用되고 있다. 그가 ‘東아시아는 儒敎로 인해 資本主義가 發展하지 못했다’고 主張한 것은 看過한 채 말이다. 그러나 베버 自身은 마르크스주의를 否定한 것이 아니라, 物質만으로 文化를 說明할 수 없다는 視角에서 精神의 側面을 補充한 것에 不過했다.

    그런 點에서 베버는 겹눈을 가진 르네상스的 人間이었다. 그는 19世紀末 獨逸에 蔓延한 이데올로기病을 治癒하고자 努力했다. 卽 政治를 하나의 觀念으로 보고, 그것을 肯定하면 無條件 美化하고 否定하면 無條件 否定하는 態度를 克服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베버는 肯定에 對해서는 不正, 不正에 對해서는 肯定이라는 均衡的 態度를 取했다. 卽 國粹主義가 판을 치면 平和主義를 擁護하고, 平和主義가 판을 치면 國粹主義를 辯護했다.

    이를 一貫性 없는 態度라 罵倒할 수도 있겠으나, 베버에게 政治란 倫理와 別個인 實用主義의 對象에 不過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價値를 先驗的인 것으로 固定해두지 않고, 强靭한 主體性을 바탕 삼아 具體的 狀況에 따라 끊임없이 流動化·相對化하는 悠然한 思考를 驅使했다. 그러한 思考는 當時 獨逸에서 徹底히 罵倒되었으나, 悠然한 思考의 不在야말로 나치스와 分斷의 ‘씨앗’이었다. 只今 우리의 事情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이러한 겹눈의 思考方式이야말로 르네상스, 特히 그 政治觀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마키아벨리의 思想을 잇는 것이라고 본다. 마키아벨리를 흔히 權謀術數의 獨裁를 主張한 사람으로 貶毁해 왔으나 이는 先驗的 價値에 사로잡힌 偏見에 不過하다. 그는 政治와 倫理를 區別한 點에서 政治學의 先驅者였고, 反民衆的인 貴族情(貴族政)에 反對하기 위해 君主政과 共和政을 번갈아 擁護했다.

    ‘모나리자’의 微笑와 달리 마키아벨리의 입가에는 嘲笑가 있다. 눈은 狡猾하게 빛나고 얇은 입술은 굳게 닫혀 있으나, 언제나 비웃는 듯한 모습이다. 權謀術數를 뜻하는 마키아벨리즘의 立場에서 보면 대단히 狡猾한 느낌을 주나, 貴族에 對抗하는 民衆思想家라 생각할 때는 英敏한 智慧와 抵抗의 嘲笑를 表象하는 얼굴로 볼 수도 있다.

    한便 우리 政治學者는 信念 없이 政治판에 뛰어드나, 플라톤이나 마키아벨리는 一貫된 信念에 따라 政治에 參與했다고 보는 見解가 있다. 나는 우리 政治學者가 그랬다는 點에는 同意하나, 플라톤이나 마키아벨리가 그렇지 않았다고 보는 것에는 同意하지 않는다. 設令 그렇다해도 五十步百步 差異라고 본다.

    나는 마키아벨리를 處世主義字로 理解하는 나나미類의 態度와 마찬가지로, 韓國 政治學者들이 그를 共和主義者나 統治技術者로 理解하는 것에 對해서도 疑問을 갖고 있다. 나나미처럼 그를 風流客으로 描寫하거나 政治學者들처럼 學問의 始祖 모시듯 하는 態度 또한 無視한다. 마키아벨리는 權威意識 없는 民衆 知識人으로서 勞動者·娼女·寡婦·弟子들과 함께했고, 한便으로는 歷史를 통한 政治 硏究에 盡力했던 르네상스人이라는 것이 내 見解다.

    아니 그는 政治學者이기보다 歷史學者, 무엇보다 휴머니스트라는 點에서 르네상스人이었다. 그 自身 ‘政治學者’라는 意識을 全혀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오늘의 行態主義的 政治學은 그의 實踐的 政治學과는 아무 關聯 없는 理論造作에 不過하므로 그를 ‘현대政治學의 아버지’라 稱한다면 아마 그 自身이 異議를 提起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喜劇과 悲劇을 쓴 劇作家이자 詩人이기도 했다. 그의 ‘萬드라골라’는 이탈리아 演劇史에서 가장 偉大한 喜劇 中 하나로 評價된다. 有夫女를 誘惑하는 줄거리에는 아마 마키아벨리 自身의 經驗이 그대로 녹아있으리라. 그러나 ‘萬드라골라’가 이 땅에서 上演돼 우리에게 感動을 줄 可能性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 點에서는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學問과 藝術의 모든 것을 말한 듯한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度 政治에 對해서는 그다지 關心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上昇하는 時代의 새로운 人間商, 世界의 創造者이며 自身의 運命을 만드는 全人的 人間의 社會參加, 文化 形成에 關心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時代는 政治的 危機의 時代였다. 外國의 侵入으로 이탈리아 政治組織의 虛弱性이 暴露됐으며 人間의 可能性에 對한 從來의 信賴 또한 徐徐히 무너졌다. 人文學은 淺薄한 觀念의 遊戱로 轉落해 宮정인이 되기 위한 出世 要件 程度로 待接받게 됐다. 마키아벨리가 산 16世紀 르네상스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마키아벨리는 그 時代를 다음과 같이 描寫하고 있다.

    “히브리인보다 더 隸屬되고, 페르시아人보다 더 抑壓받고, 아테네人보다 더 分裂되어 있으며, 認定받는 指導者도 없고, 秩序나 安定도 없으며,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찢겨지고, 유린당한, 한 마디로 完全히 荒廢한 狀況에 處해 있다.”

    그가 1513年 執筆한 ‘君主論’ 第26張에 나오는 글이다. 그런 極端的 現實分析으로부터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君主를 熱望하는 이 冊 ‘君主論’을 쓴 것이다. 分斷 克服은 侵略國家에 對抗하는 鬪爭을 통해 可能한데, 民衆의 鬪爭力은 充分하나 이를 뭉쳐 낼 指導者가 없다는 것이 그의 現實認識이었다.

    ‘君主論’ 憲政史에서 그는 實證科學, 政治科學의 土臺라고 여겨진 모든 것들에 對한 ‘참된 理解’를 펼치기 始作한다. 事物을 現實的 眞理 그대로 表象하는 것은 假想敵으로 表象하는 것보다 낫다는 主張을 편다. 政治的 實踐을 이데올로기보다 重視한 것이다.

    여기서 問題 삼은 이데올로기에는 當時 휴머니스트들의 勳古風 (政治·道德·美學的) 談論이나 사보나롤라의 革命的 說敎, 基督敎 神學, 古代 政治理論 等이 모두 包含돼 있다. 르네상스가 文藝復興으로 理解되듯 苦戰 復活이 脚光받던 時代에 마키아벨리는 그 古典의 權威에 徹底히 抵抗한다. 그런 點에서 마키아벨리는 訓詁적 學者가 아니다.

    敍述 形式에서도 그는 다른 典型的 르네상스人들과 다른 길을 간다. 高尙한 語調나 멋진 句節 等의 搜査, 技巧는 一切 排除했다. 이는 自身의 冊이 오직 獨創性과 重要度로 判斷되기를 바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憲政史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部分은 ‘民衆의 立場에서 쓴다’는 것을 分明히 한 點이다. 君主가 아닌 民衆의 觀點에서 본 君主論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觀點이 아니면 統治에 對한 어떤 知識도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君主는 民衆敵 軍주다.

    ‘君主論’ 第1章에서 第11張까지는 前制定이나 世襲情을 비롯한 君主國의 여러 現實 類型을 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目標는 그런 낡고 時代에 뒤떨어진 類型이 아닌 새로운 君主國의 必要性을 力說하는 것이다. 勿論 그것은 이탈리아를 分裂시키고 統一을 妨害해온 敎會國家나 都市共和國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君主國에 對한 說明은 第12章에서 第23張까지 收錄돼 있다. 君主가 이끄는 國家는 民衆 속에 뿌리내린 民衆國家로서 軍隊로 대표되는 强制裝置, 宗敎나 名聲을 통한 同意裝置, 階級鬪爭의 結果이자 制度인 政治-司法裝置로 構成된다.

    그中 가장 重要한 것은 軍隊다. “武裝한 豫言者는 모두 成功하나, 武裝하지 않은 豫言者는 失敗한다.” 따라서 軍隊는 이데올로기와 法에 優先한다. 여기서 軍隊란 外國軍이나 傭兵이 아닌 純粹 自國軍, 卽 民衆軍隊여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君主란 私的 個人이 아니라 政治的 個人이다. 따라서 宗敎나 道德과는 全혀 다른 次元의 目標, 卽 歷史的 目標인 國家 創建과 鞏固性(鞏固性)을 追求해야 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主張하는 것은 個人的 非道德이 아닌 政治的 非道德이다. 君主는 法에 依據하되 法이 無能하면 强制力을 使用할 줄 알아야 한다는 主張이다.

    强制는 獅子와 여우의 比喩로 說明된다. 덫을 알기 위해서는 狡猾한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쫓아버리기 爲해서는 사나운 獅子가 되어야 한다. 여우는 欺瞞, 卽 奸計와 속임數를 뜻한다. 欺瞞은 强制와 法을 使用하는 方法이다. 軍隊에 代入하면 戰略이고 法에 代入하면 政治術이 된다. 그러나 이는 無法이나 不法과는 다르다.

    法을 갖고 術策을 부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法이 存在하고 承認돼야 하며 無視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君主는 다시금 民衆的 基盤에 注目해야 한다. 이는 當代의 現實에서 볼 때 君主란 人民의 便에 서서 貴族에 抵抗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貴族과 民衆의 ‘階級對立’을 直視했다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貴族은 民衆을 支配하려 하나 民衆은 그 支配를 願치 않아 對立이 생기므로 君主는 힘의 均衡을 表現하는 法을 만들어 民衆의 便을 들어야 한다고 主張한다.

    그렇다고 마키아벨리를 알튀세르 같은 社會主義者로 볼 수는 없다. 그는 國家가 한 사람의 君主에 依해 創建된다고 본 點에서 分明 君主論者다. 그렇게 본다면 마키아벨리 亦是 時代에 妥協한 宮廷人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스틸리오네처럼 宮廷人으로의 出世를 위한 淺薄한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은 아니나, 權謀術數의 君主를 絶對視한 것만큼은 否定할 수 없는 事實이다.

    마키아벨리는 가난하나 德이 높은 中世式의 禁慾的 유토피아 國家를 否定한다. 에라스무스의 寬容에 根據한 理想主義的 政治思想 같은 것은 마키아벨리에겐 休紙조각보다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의 冊은 出刊되자마자 敎皇이나 新婦, 道德主義者는 勿論 君主들에게조차 詛呪를 받았다. 宗敎나 道德을 政治의 道具로 타락시키고, 殘忍하며 奸巧하고 背信을 일삼는 惡魔를 君主로 推仰했다는 것이 그 理由였다. 그래서 ‘마키아벨리的’이라는 말은 權謀術數의 代名詞로 歷史에 남게 됐다.



    나나미의 冊에 知性은 없다


    그러나 當時 社會指導層이 마키아벨리를 憎惡한 眞짜 理由는 다른 데 있었다. 이탈리아 半島의 政治는 르네상스期뿐 아니라 古代 로마帝國이 崩壞할 무렵부터 19世紀까지 分裂과 不安의 連續이었다. 그 要因 中 하나가 統一을 妨害한 가톨릭의 存在였다. 半島가 統一되면 敎皇廳은 그 傘下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自主獨立을 追求하는 各 都市國家의 利害關係와 一致했다. 따라서 敎皇廳이나 都市國家나 마키아벨리를 歡迎할 理 없었다. 그는 分明 異端兒였다.

    마키아벨리가 그렇게도 熱望한 强力한 君主를 통한 이탈리아 統一은 ‘君主論’李 出版되고 約 350年이 지난 1861年에야 可能했다. 여기서 우리는 르네상스 當時의 政治를 經濟·社會的 觀點에서 살펴볼 必要가 있다. 그래야만 마키아벨리의 政治論을 제대로 理解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經濟 르네상스는 12世紀 무렵에 始作됐다. 그러나 이는 나나미가 讚揚하듯 이탈리아人의 商才(商才)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무렵 오랫동안 닫혔던 地中海가 사라센 等의 弱化로 비로소 열리기 始作한 때문이다. 富 蓄積의 代表走者는 베니스였다.

    우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冊 ‘바다의 都市 이야기’를 통해 베니스에 對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冊의 譯者는 ‘自願이라고는 없는 손바닥만한 나라’가 貿易入國으로 繁榮하는 過程이 ‘世界化를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敎訓을 준다고 한다. 그런 敎訓이야 韓國보다 日本에서 더욱 일찍, 더욱 剛하게 의식되어 日本에는 베니스에 對한 冊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나나미의 立場은 다르다. 그는 베니스를 르네상스의 ‘알맹이’라 보았기 때문에 그 冊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 1000페이지를 다 읽어도 알 수가 없다. 베니스에서는 藝術이나 學問이 그다지 隆盛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뛰어난 장사나 外交術을 ‘알맹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 나나미의 冊을 읽어보면 장사나 外交를 르네상스만이 아닌 로마를 비롯한 모든 文明, 歷史의 알맹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나미의 世界에서 藝術과 學問은 登場하지 않는다. 唯一한 例外인 마키아벨리마저 學者로서가 아니라 政治가, 外交街로 다루고있다. 저 명치維新 以來 마키아벨리만큼 日本人들에게 큰 影響을 끼친 스승은 없다. 只今도 日本 政治家의 相當數는 마키아벨리 弟子들이다. 그것도 오직 權謀術數의 代價라는 意味에서.

    그런 日本的 風土에서 씌어진 나나미의 冊을 대단한 知的 作業으로 評價하는 傾向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최인호의 ‘상도’와 같은 小說 以上의 興味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나나미나 최인호가 歷史를 ‘재미있게’ 엮은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재미 以上은 期待할 수 없다. 그나마 담긴 敎訓이란 것도 곁가지일 뿐이다.

    日本에서는 베니스나 로마 이야기가 100年 以上 쓰여지고 읽혀졌다. 貿易入國, 장사帝國의 모델로서 말이다. 나나미의 冊은 그런 風潮의 産物 中 하나에 不過하다. 따라서 敎訓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그저 재미있다는 걸로 充分하다. 그런 冊이 처음 紹介되는 까닭에 韓國에서는 아직 100年 前 日本에서처럼 敎訓 云云하는 이야기가 먹히는 것일까.

    日本을 따라 韓國도 貿易入國, 장사帝國으로 치닫고 있다. 나나미의 冊이 우리 企業人이나 企業人이 되려고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人氣 있는 理由 中 하나이기도 하다. 나나미의 冊이 그들에게 興味는 勿論 ‘敎訓’까지 준다면 多幸이겠다. 그러나 ‘知性’ 운운함은 率直히 逆겹다.

    마키아벨리는 經濟에 對해 쓴 바가 없다. 그러나 政治를 經濟 없이 理解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베니스뿐 아니라 르네상스 全體가 都市의 産物이다. 都市 形成의 重要한 契機는 自然的 條件과 로마時代 以來의 道路(只今의 鐵道)였다. 自然的 條件으로 보면 海洋都市와 江邊都市로 分類된다. 前者의 보기는 베니스·제노바·나폴리 等이고, 後者는 피렌체·로마·피사 等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都市의 發生을 說明하는 것은 充分치 않다. 그 發生을 必要로 하는 다른 地域이 背後에 存在해야 한다. 그에 따라 都市는 다음 세 가지로 區分된다.

    첫째, 商業都市인 베니스와 그 好敵手인 제노바다. 베니스 商人들은 유럽과 東方貿易의 核心 仲介商이었고, 15世紀末 포르투갈人들이 喜望峯을 도는 航路를 開拓하기까지 競爭相對가 없었다. 그때까지 베니스는 世界 最强의 商業都市로서 木綿·緋緞·香辛料(特히 후추)를 輸入해 유럽 全域에 팔았고, 毛織物과 銀貨를 輸出했다. 한便 제노바는 穀物·羊毛 貿易으로, 프랑스·스페인·北아메리카와 깊은 經濟關係를 맺었다.

    둘째, 工業都市인 피렌체와 밀라노다. 피렌체는 毛織物과 手工藝의 中心地로 15世紀 後半에 이미 270個의 某織物工場을 保有하고 있었다. 밀라노에서도 毛織物工業은 重要했으나 이곳에선 特히 武器製造業을 비롯한 金屬細工業이 發達했다. 베니스와 제노바의 工業은 相當히 發達한 水準이었다.

    셋째, 서비스 都市다. 가장 利益이 큰 分野는 金融業으로 14~16世紀 이탈리아人은 유럽 全體의 銀行業을 支配했다. 예컨대 피렌체의 메디치가(家)는 그 自體가 最大의 銀行이었다. 로마와 나폴리는 首都이자 官吏들의 都市였으며 權力의 中心이었다. 로마는 敎會國家의 首都로서 가톨릭 世界 全體에 政治的·宗敎的 서비스를 提供했다. 로마는 ‘그리스도에 關한 모든 것을 販賣하는 巨大한 商店’으로서 特히 값비싼 免罪符와 各種 許可書를 輸出했다. 그 經營은 敎皇廳에 딸린 銀行家들이 맡았다. 그 銀行家의 代表가 바로 메디치家였다.

    位 어느 都市든 全體를 뒷받침하는 것은 農業이었다. 特히 포강 流域은 유럽 大平原의 하나였다. 그 肥沃함은 適當한 降雨量과 함께 15世紀, 100餘 年間에 걸친 灌漑事業에 依한 未開墾地의 境地化라는 人爲的 努力에 依한 것이었다. 그러나 14~15世紀에 이르러 토스카나에서는 境地 相當 部分이 버려졌고, 村落의 10%가 消滅했다.

    그보다 더 南쪽에서는 바위가 많은 地形과 적은 降雨量으로 因해 나폴리 周邊 地域을 除外하고는 農業이 크게 發達하지 못했다. 南部 農業은 갈수록 衰退해 경지는 放牧地로 轉換되고 人口도 減少했다. 英國의 토머스 母語가 “量이 人間을 먹는다”고 慨歎한 現象이 이곳에서는 더욱 일찍 發生했다. 巨大한 都市人口를 먹여 살리기 위해 農業은 市場을 위한 商業的 生産으로 轉換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都市는 周邊 農村을 支配하고 희생시켜 都市 住民에게 값싼 食糧을 提供하는 經濟政策을 實施했다. 現代 資本主義의 基本 政策과 다를 바 없다. 또한 農民들에게는 本來 課稅해야 할 額數보다 높은 稅金을 賦課해 富裕한 農民들이 都市로 移住하는 現象을 낳게 했다. 都市 住民들이 享有한 法的·政治的 特權은 農村 住民에게는 認定되지 않았다. 그래서 16世紀에 妊産婦들은 子女에게 그런 特權을 附與하기 위해 都市에 가 아기를 낳았다. 當時 이탈리아에는 ‘農村은 動物을 위한 곳이나, 都市는 人間을 위한 곳이다’라는 格言이 存在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時代에 都市와 農村이 均衡을 이루었다는 評價에는 疑問의 餘地가 있다.

    資本主義가 무엇인가에 對해서는 여러 論議가 可能하나, 少數 企業家에게 資本이 集中되며 그 運營이 合理的·計劃的으로 制度化된 點을 特徵으로 들 수 있다. 르네상스는 어떠했는가.

    첫째, 資本의 集中度가 높아 메디치家처럼 巨大 資本을 가진 企業家가 存在했다. 資本의 蓄積은 勞動者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毛織物工場의 境遇 分業이 高度로 發展해 25段階 以上의 專門 職印을 要求했다. 이들은 日給을 받았다. 紡績工業은 相當 部分 在宅(在宅)女性에 依存했다. 그들은 原料를 供給하는 企業家에 從屬돼 있었다. 商人들은 原料뿐 아니라 機械나 工場까지 職工들에게 貸與해, 19世紀式 直接 管理는 아니되 間接 手段을 통한 支配를 鞏固히 했다.

    둘째, 資本主義的 制度로서 抽象槪念과 計算을 基礎로 하는 複雜한 信用制度·銀行·公採(公債)·商業會社·海上保險 等이 存在했다. 特히 銀行業, 公式 利子가 定해진 公益 典當舖 制度 等은 敎會의 奬勵에 따라 擴散됐다. 이는 14世紀 피렌체에서 市民을 國家에 對한 投資者로 삼는 公採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甚至於 딸의 結婚 때 投資한 돈을 利子와 함께 支給받는 結婚資金 基金制度까지 있었다. 商業會社 投資者는 會社가 破産할 境遇 有限責任을 졌다. 船舶 喪失에 對備한 保險도 있었다. 特히 베니스는 海上保險의 中心地였다. 제노바에서는 男便이 出産하는 妻를 對象으로 保險을 들기도 했다.

    또 한 가지 特記할 만한 點은 藝術家와 藝術作品의 去來가 始作되었다는 것이다. 베니스는 香辛料와 함께 中部 유럽과 藝術家 및 藝術作品을 사고 팔았다. 티치아노는 只今의 獨逸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로 갔고, 反面 뒤러는 獨逸에서 베니스로 왔다. 또 피렌체의 繪畫作品은 프랑스 王室까지 갔으며, 되돌아오기도 했다. 14世紀에는 特히 페스트에 依한 景氣 後退로 美術品 投資가 늘어났고, 15~16世紀에는 個人的 誇示 傾向이 더해져 그 規模는 날로 커졌다.

    勿論 傳統的인 要素도 있었다. 工業生産과 商去來는 如前히 小規模 攻防과 家族經營이 가장 普遍的이었다. 또한 大多數 小作農은 現物로 地代를 支拂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時代 經濟를 近代 資本主義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只今까지 學者들은 르네상스를 부르주아 社會로 보아왔으나 그에 對해서는 여러가지 疑問이 든다. 15~16世紀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가장 都市化한 社會였던 것은 事實이다. 1550年에 이미 人口 1萬名 以上을 가진 都市가 40餘 個에 이르렀으며, 그中 20個 都市는 人口가 2萬5000名 以上이었다. 都市集中度도 높았다. 예컨대 토스카나 地域 人口의 4分의 1은 피렌체를 비롯한 都市에 集中됐다. 當時 유럽에서 그 程度 集中度를 보인 곳은 네덜란드의 프랑드르뿐이었다.

    그러나 都市民 全體가 부르주아였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大部分이 勞動者였다. 勿論 商人·技術者·專門職이 存在했으며 그들이 르네상스 文化의 主軸이 된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들이 부르주아的 價値觀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부르주아에 屬한 마키아벨리는 단테와 마찬가지로 ‘商店主人’들이 다스리는 피렌체를 輕蔑했다. 마키아벨리는 부르주아를 讚揚하지 않았다.

    近代 부르주아 社會는 흔히 이념적으로 封建的 大家族制度를 脫皮한 것으로 說明하나, 르네상스 時代에는 大家族制度에 根據한 家計의 重要性과 結合力에 커다란 價値를 附與했다. 祖上崇拜에 根據한 巨大 宮殿과 家族 集會所, 家族 禮拜堂 및 家族 墓所가 多數 建設됐다.

    우리 社會에서 大部分의 近代的 用語가 日帝 以後 定着된 것처럼 西洋에서도 近代的 用語는 實際 近代가 始作된 以後에야 나타났다. ‘社會’란 말이 登場한 것도 17世紀 後半이다. 르네상스期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使用한 ‘正體’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社會를 ‘身體’에 比喩한 것이었다.

    卽 ‘身體에서 모든 機關은 心臟의 支配에 服從하듯’ ‘正體에서 사람들은 君主에 服從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式이다. 또 支配者는 停滯의 ‘內科醫師’에 比喩되기도 했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君主論’에서 診斷과 治療라는 槪念으로 政治를 說明했다. 卽 君主를 心臟과 같은 것으로 보고, 人體가 心臟에 支配되듯 君主를 停滯의 ‘內科醫師’로 보았음을 ‘君主論’ 第3章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한便 當時 ‘국가’라는 말은 停滯에 對立하는 것으로서 公共福祉나 權力構造의 뜻으로 使用됐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위 冊에서 國家라는 말을 115回나 쓰고 있다. 反面 政府라는 말은 君主政이나 共和政, 또는 寡頭情이나 民主政을 뜻하는 말이었다. 當時 政府는 그 두 가지, 또는 中間形態를 取했으므로 사람들은 政府란 住民에 依해 變化하는 것으로 認識했다. 마키아벨리 또한 當時의 많은 사람들처럼 政府는 選擇이 可能하다고 믿었다. 神이 附與한 것이 아니라 建築처럼 人間이 ‘建設’하는 것으로 認識한 것이다.

    當時 建築論은 社會建築論이기도 했다. 예컨대 알베르티의 그것은 建築術의 유토피아에 對한 것이자 社會 유토피아로 當時의 以上인 都市國家를 構想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의 想像都市 設計圖도 社會生活의 計劃이 可能하다는 認識을 基礎로 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文化’의 ‘藝術作品으로서의 國家’라는 章에서 强調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個人主義的 政治意識이 르네상스의 發展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最近에는 官僚制로 說明하는 學說이 優勢하다. 베버는 官僚制를 加算制(家産制)와 對立시켰다. 加算制는 個人에 歸屬되나, 官僚制는 非個人的이며 專門家에 依해 運營된다. 前者는 傳統에 依存하나, 後者는 法과 理性에 依存한다.

    르네상스期 이탈리아에서는 都市化와 더불어 式自律(識者率)李 높아졌으며 共和國이 存在했다. 또한 알베르티는 工事의 區分을 主張했다. 政府에는 感謝祭가 있어 管理들이 私的 利益을 取하지 못하도록 制御하는 機能을 했다. 專門 法學士 敎育을 받은 常勤 管理의 數도 많았는데 이들은 精液의 給與를 支給받았다.

    이처럼 當時 이탈리아에서는 藝術뿐 아니라 政治 領域에서도 革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大部分의 君主國에서 아직 工事 區分은 明確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公職은 賣買되고, 그 給與는 非熟鍊 勞動者 水準에도 미치지 못해 不淨腐敗가 蔓延했다. 이처럼 當時 官僚制에도 問題가 많았다. 또 이탈리아 都市國家는 우리의 邑 程度에 不過한 크기였기 때문에 非人格的 官僚制 行政에 限界가 있었다.

    그렇다고 當時 都市國家가 우리 시골마을처럼 單一한 農村社會였던 것은 아니다. 特히 貧富 差가 激甚해 사람에 따라서는 3500倍씩 差異가 나기도 했다. 例를 들어 1500年頃 베니스에서 가장 富裕한 樞機卿의 輸入이 1萬4000리라였다면, 1450年頃 피렌체의 使喚은 40리라에 不過했다. 이처럼 都市國家는 平等社會가 아닌 身分의 差異를 明確하게 認識시키는 社會였다. 그럼에도 中世의 聖職者·軍人·農民이라는 單純 區別은 더 以上 통하지 않을 만큼 充分히 複雜해져 있었다.



    벼락出世는 어떻게 可能했나


    먼저 職務가 아니라 徵稅를 위해 父子·中産·貧民이라는 區別이 存在했다. 또한 家計에 따라 貴族이냐 아니냐, 政治的 權利에 따라 市民이냐 아니냐를 가렸다. 아울러 길드에 따른 區別도 있었다. 當時 가장 重要하면서도 模糊한 槪念은 只今 우리 社會에서와 같이 ‘大衆’ 또는 ‘民衆’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들은 使用者에 따라 全혀 다른 意味를 內包했다. 上層部는 그 말을 一般人을 輕蔑하기 위해 使用한 反面, 中産層은 政治的 權利를 갖지 못한 庶民과 自身들을 區別하고자 使用했다. 前者는 현대와 類似하나, 後者는 當時의 社會狀況을 念頭에 두고 생각할 必要가 있다. 當時에는 停滯가 人間에 依해 變化한다고 믿어졌듯 身分도 變化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存在했다. 이에 따라 貴族性이란 出身에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個人의 價値에 依해 判斷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論爭이 벌어지기도 했다.

    果然 貧富間 자리 交換이 可能할 程度로 이탈리아 都市는 開放的이었는가? 예컨대 使喚이 樞機卿이 될 수 있었는가? 그렇다. 지오토를 비롯해 農民 出身이 藝術家가 된 境遇도 있고, 貧民의 子女가 敎授나 司祭, 敎皇의 자리까지 오른 事例도 있다. 社會가 開放的인 만큼 競爭은 熾烈했고 嫉妬가 亂舞했다.

    단테는 ‘신곡-地獄編’에서 벼락出世나 벼락富者가 많다는 理由로 피렌체 社會를 批判했으며, 特히 貴族들은 農村 出身이 市民이 되거나 公職者가 되는 것을 激烈히 批判했다. 그러나 社會 全般의 認識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當代 사람들은 오히려 大部分 벼락出世를 肯定的으로 보았다. 特히 商人이 支配하는 피렌체에서는 業績을 重視하는 氣風이 形成돼, 뛰어난 創意力으로 業績을 生産해내는 文化人의 價値를 쉽게 認定했다. 이는 當時 이탈리아의 나폴리나 프랑스, 스페인 等이 出身成分을 重視한 것과 比較되는 것이다.

    그러나 當時 社會의 流動性이 어느 程度였는지를 가늠할 具體的 證據는 없다. 自由와 平等을 謳歌하는 現代社會에서도 社會的 流動性이란 至極히 制限的인 形態로 나타남을 考慮할 때, 當時 피렌체 社會 亦是 階級·階層의 移動이 一般的이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特히 15世紀 後半에 오면 社會的 上昇의 길은 거의 막혀버린다. 이는 베로나 等 여러 地域이 베니스에 編入된 結果다. 베니스에서 새 貴族의 誕生은 極히 어려웠다. 르네상스 都市가 아무리 開放的이었다고 해도 外國人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黑人 오셀로가 베니스에서 將軍이 되었다는 셰익스피어의 想像力은 歷史的 狀況과 맞지 않다.

    흔히 르네상스는 都市國家와 共和政의 産物이라고 한다. 13世紀 무렵 이미 都市國家의 數는 200~300個에 이르렀다. 15世紀에 와서 그 大部分은 獨立性을 喪失했으나, 르네상스가 꽃핀 피렌체, 베니스 等은 이를 維持했다. 두 都市는 모두 共和政을 採擇하고 있었지만 性向은 對照的이었다.

    흔히 베니스는 安定과 均衡, 調和를 特徵으로 했다고 한다. 그 理由로 흔히 提示되는 것이 세 가지 形態로 構成된 政治 시스템이다. 君主制에 該當하는 統領制, 貴族制에 該當하는 元老院, 民主政에 該當하는 評議會의 混合. 그러나 統領의 힘은 弱해 實質的 權力을 갖지 못했고, 貴族으로 構成된 評議會度 民主的이지 못했다. 結局 少數 貴族에 依한 支配였다고 보는 것이 正確하다.

    어쨌거나 베니스의 政治狀況은 比較的 安定돼 있었으나 피렌체는 그렇지 못했다. 단테는 이를 ‘신곡’에서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便하지 않은 병든 女性에 比喩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自身의 政治體制에 決코 滿足하지 못했고 그것을 認定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變化를 熱望해 하나의 停滯가 15年 以上 維持된 적이 없었다. 勿論 韓國처럼 5年에 한番 꼴로 正體를 바꾼 程度는 아니었지만.

    이렇듯 피렌체는 變革의 都市였다. 例를 들어보자. 1434年에는 코지모 데 메디치가 追放되었다가 돌아와 都市를 掌握했으며, 1458年에는 70人 評議會가 같은 일을 했다. 1494年 메디치家가 다시 추방당하면서 베니스의 그것과 같은 議會가 設立됐다. 1502年에는 統領의 一種인 終身 國家主席制가 實施되었으며, 1512年에는 메디치가 外國 軍隊를 끌고 復歸했으나 1527年에 다시 追放되었다가 1530年에 歸還했다. 이러한 政治的 變革과 藝術的 變革 사이에는 相當한 關聯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相對的으로 安定的인 베니스보다 피렌체에서 훨씬 激烈한 藝術的 變革이 이루어졌음은 勿論이다.

    그러나 정작 르네상스를 빛낸 美術과 文學은 君主政이 實施되던 밀라노, 나폴리, 바티칸에서 더욱 蕃盛했다. 밀라노와 나폴리는 世襲 君主國이었고, 敎皇이 다스리는 敎會國家 바티칸은 選擧 君主政이었다.

    君主政의 舞臺인 宮廷은 數百名의 官吏들로 構成됐다. 1527年 敎皇宮廷은 約 700名의 宮廷人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피렌체의 共和國을 支配한 메디치家는 數十名에 不過했다. 宮廷에는 貴族들이 차지하는 上位職부터 갖가지 職業이 있었는데, 是認 音樂家 美術家와 같은 藝術家群(群)은 君主를 즐겁게 하는 下層職業에 屬했다.

    君主政은 君主와 그 家族이라는 私的 部分과 國家를 運營하는 貴族이라는 公的 部分으로 構成됐다. 君主는 家族 및 貴族과 함께 食事를 하고 恒常 같이 움직였는데 그 自體가 巨大한 行事이자 行政이었다. 宮廷을 構成한 貴族들은 物質的·時間的 餘裕로 인해 藝術에 關心을 가졌으며 그 點에서 民衆과는 決定的으로 달랐다. 이는 르네상스뿐 아니라 17世紀 파리의 살롱文化에까지 이어진 傳統이었다.

    그렇다고 宮廷의 君主나 貴族들이 高尙했다고는 決코 말할 수 없겠다. 當時 文獻은 宮廷文化를 美化하는 傾向이 있으나, 그것은 事實 時間을 죽이는 娛樂에 不過했고, 그 또한 大部分 藝術이라기보다는 헛되고 消費的이며 頹廢的인 享樂人 境遇가 大部分이었다. 只今 르네상스 藝術의 痕跡으로 認定받고 있는 것들 亦是 그러한 쓰레기 中 一部다. 그들에 依한 政治 또한 分裂을 일삼고 統一을 妨害하는 一種의 消費行爲였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君主·貴族에 依한 政治에 反對해 새로운 政治를 熱望했다. 그것은 軍隊에 依한 强制裝置, 宗敎에 依한 同意裝置, 그리고 法에 依한 權力裝置다. 이는 近代國家의 運動原理를 分析한 ‘最初의 政治學’이었다. 그러나 그의 思想이 祖國 이탈리아에서 現實化한 것은 19世紀에 이르러서였다. 20世紀에 들어서도 이탈리아는 파시즘을 經驗하는 等 施行錯誤를 거듭하고 있다. 베버가 警告한 바, 이데올로기甁에 걸린 19世紀 獨逸과 마찬가지로. 果然 우리는 例外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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