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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奇心 먹고 사는 ‘자유로운 禿수리’|新東亞

好奇心 먹고 사는 ‘자유로운 禿수리’

旅行家 한비야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入力 2004-09-16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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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 위의 人生, 길 위에서 세운 뜻. 타고난 驛馬煞度 없다는데 어느새 地球를 세 바퀴 半이나 돌고도 다시 그만큼의 길을 꿈꾸고 있다는 旅行家 한비야氏. 旅行을 하다보니 사람을 만나게 됐고 그러다보니 그들을 사랑하게 됐다는 그는, 難民을 위한 救護事業에 獻身하는 渦中에도 요트를 타고 世界를 一周하는 또 다른 計劃에 마음이 달뜨고 있다.
    只今은 더없이 우스운 일이 돼버렸지만 예전에는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게 흉이었다. 왼손잡이인 筆者의 女同生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다가도 남이 보면 얼른 오른손으로 옮겨 쓰는 ‘僞裝術’을 보여주곤 했다.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나쁜 習慣’이라는 認識 탓이었으리라.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堂堂함


    1958年生이니까 한비야(韓飛野)氏도 年齡으로만 따지면 그 世代에 屬한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보건 말건 堂堂하게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 世界를 누비는 이 당찬 女性은 작은 것 하나도 달랐다. 우리 나이로 45歲, 늘어지는 나이일 법한 데도 공처럼 통통 튄다. 쫓기는 듯 빠른 말씨, 敏捷한 行動 하나하나가 다부지고 彈力이 있다. ‘貫祿 있는 老處女’지만 結婚 못해 안달하는 水準은 오래 前에 通過한 듯하다.

    全世界 65個國의 奧地를 찾아다닌 膽力, 本人의 表現을 빌리자면 ‘産前 수전 空中戰 市街戰’까지 모두 겪으며 世界旅行을 척척 해낸 그의 冒險精神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疑問을 풀어보겠다고 그가 일하고 있는 서울 汝矣島 證券去來所 앞의 월드비전빌딩 10層 事務室을 찾아가는 길에 筆者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質問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女子가 怯도 없이 홀로 世界를 누비면 무섭지 않습니까?”

    女性에게 ‘女子가 敢히’라는 套의 말을 하는 것이 半(反)페미니즘的 態度인 것은 分明하다. 이 말 속에는 女性卑下나 性差別의 뜻이 暗默的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터뷰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궁금한 것이 事實이다. 女性을 노리는 犯罪가 갈수록 極惡해지고, 白晝 대낮에 婦女子를 拉致해 連鎖殺人을 저지른 事件이 新聞 社會面을 裝飾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世界를 四方八方 누비는 한비야氏라도 緊張感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筆者가 잘못 짚었다. 그는 簡單明瞭하게 以北式으로 對答했다.

    “일없습니다.”

    일없다? 어떻게 그렇게 自信滿滿할 수 있을까.

    “男子들이 劫奪하고 强盜짓을 하겠다고 덤벼든다 해도, 내 態度가 분명하면 99.9%는 豫防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極端的인 狀況이라고 해도 臨하는 姿勢가 또렷하면 克服할 수 있어요. 事故는 어정쩡하게 對處하거나 微溫的으로 나갈 때 當하는 거죠.”

    그러면서 韓氏는 멕시코를 旅行할 때의 逸話를 들려주었다. 現地의 한 美男靑年이 好意를 베풀며 다가오더란다. 古跡地, 市場通, 繁華街 等을 案內해주는 그에게 自然스레 고마움을 느꼈다.

    “그랬더니 다음날부터 저를 어떻게 해보려고 酬酌을 벌이는 거예요. 愛人 役割을 하려는 거죠. 繁華街를 걷는데도 저를 껴안으려고 해요. 그래서 냅다 뺨을 한 대 갈겨주었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點을 分明히 보여주었더니 靑年이 떨어지더라는 것. 怯 먹고 질질 끌려다니다 보면 自己도 모르게 當하는 수가 있지만 自己 態度가 斷乎하面 危險을 얼마든지 突破해나갈 수 있다는 게 韓氏의 指摘이다. 그는 海外旅行을 할 때는 늘 가스銃을 携帶하고 다닌다. 如此하면 發射해버릴 態勢를 풀지 않는다. 한番도 써먹은 적은 없지만 對處能力을 完璧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犯罪地域을 旅行해도 自信滿滿하다.

    “그렇다고 제가 마냥 무서운 女子는 아니에요. 알고보면 限없이 부드러운 女子죠.”

    한비야氏와의 인터뷰는 모두 세 次例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만큼 그의 하루 日常이 빡빡하다. 平均 5時間 程度 걸리는 인터뷰를 單番에 處理하지 못하고 ‘다음에 繼續’을 거듭한 것은 ‘할 일은 많고 世上은 넓기 때문’이다. ‘老處女가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을까’라고 생각하면 誤算이다. 處女地만 儼然히 두 딸을 둔 어머니고, 世界의 難民救護를 위해 바쁜 活動家다. 에티오피아와 방글라데시에 한 名씩 흩어져 있는 入養한 두 딸을 보살피는 일이나, 國際 NGO인 ‘월드비전’ 緊急救護 팀長 役割이 한假銜과는 距離가 먼 자리인 것이다. 게다가 冊 執筆에 各種 講義까지 쌓여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난 7年 동안 世界의 奧地를 두루 누벼온 그는 最近 아프간 難民救護 活動을 벌이고 돌아온 데 이어 곧바로 다시 아프리카와 中東地域으로 떠날 準備를 하고 있다.

    -그 동안 어디어디에 다녀오셨지요.

    “맨 처음 海外旅行을 떠난 것은 1987年 9月부터 約 3個月間이었어요. 美國 유타大學 言論大學院에서 國際弘報學을 專攻하고 있을 무렵인데, 이탈리아 超敎派 宗敎會議에 參加하면서 유럽을 돌아보고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共産圈인 東유럽 旅行이 如意치 못해서 그 쪽은 돌아보지 못했고, 特別히 準備하고 떠난 旅行도 아니었습니다.

    緻密한 計劃과 準備를 하고 길을 나선 것은 1993年 3月부터 1998年 12月까지 다녀온 두番째 旅行부터였어요. 旅行이라기보다 世界의 奧地에 直接 들어가 살다온 겁니다. 한 大陸에서 1年6個月씩 살다왔으니까요. 그래서 오세아니아를 빼고 全 大陸을 旅行했습니다.

    세番째는 中國 旅行입니다. 2000年 3月15日부터 2001年 3月14日까지 中國에 머물렀어요. 一旦 中國語를 배우자고 마음먹고 간 길이었지만 中國을 제대로 알자는 뜻에서 1年間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1999年에 2個月 半 동안 南韓을 縱斷한 것도 빠뜨리면 안되겠네요. 中國으로 떠나기 前이었죠. ‘外國으로만 돌아다니는 게 올바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全南 海南의 땅끝에서 休戰線 바로 밑인 통일전망대까지 徒步로 宗團했습니다.”

    -旅行 經費는 집에서 支援해 주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렇게 호사스런 사람이 아니에요. 두番째 旅行부터 直接 經費를 調達한 셈인데, 그동안 會社에서 받은 月給을 탈탈 털어 떠났죠. 유타대학 大學院을 卒業하고 國際弘報會社인 버슨 馬스텔라 韓國支社에서 勤務했거든요. 한 3年 모으니 2500萬원 程度 되더군요. 다른 女子들이 婚需 밑천을 準備하기 위해 貯蓄하는 동안 저는 海外旅行을 떠나기 위해 돈을 모은 셈이죠.”

    남들의 눈에는 無謀한 짓이었겠지만 本人에게는 徹底히 ‘準備된 行動’이었다. 괜찮은 職場을 버리고 훌쩍 世界旅行을 떠난 것은 어렸을 때부터 다져온 單純하고도 素朴한 꿈을 達成해보자는 所望 때문이었다. 初等學校 時節 그의 工夫房 壁에는 世界地圖가 걸려있었고, 머리맡에는 地球儀가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未知의 世界에 對해 無限한 憧憬의 날개를 펴곤 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旅行을 꿈꾸게 된 데 특별한 理由가 있었나요.

    “가장 큰 影響은 아무래도 父母님 때문이겠죠. 只今 생각해보면 父母님은 제가 하는 일에 關해선 거의 干涉을 안 하셨어요. 아무리 危險한 일이라도 하지 말라는 制止를 받아본 記憶이 없거든요. 언니들은 規範이나 禮儀 같은 旣存 틀 속에 安住하는 傾向이 剛했지만 저는 好奇心이 많았어요. 言論人(朝鮮日報)이셨던 아버지는 제가 中學校 2學年 때인 1972年에 돌아가셨는데, 가끔씩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라고 말씀하시던 記憶이 只今도 생생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말씀에 刺戟을 받았던 것 같아요.”

    高等學校(숭의여고)를 마친 그는 ‘大學에 갈 必要가 뭐가 있나’라는 固執으로 바로 出版社에 就職한다. 飜譯 일을 하며 6年을 보냈지만 能力과 相關 없이 大卒者와 엄청난 差異를 두는 月給에 火가 나 大學進學을 決心했다. 1年間 學院을 다닌 끝에 弘益大 英文科에 入學했다. 試驗 成跡이 뛰어나 서울대도 갈 수 있었지만 4年間 奬學金을 줄 수 있는 學校를 찾다보니 홍익대를 擇하게 됐다는 것이 本人의 後日談이다.

    한비야라는 이름 석字도 獨特하다. 날비(飛)에 들野(野). 들판을 날아다니는 잠자리처럼 살라는 뜻이었을까.

    “天主敎 洗禮名이자 제 本名입니다. 偶然이지만 ‘비야’라는 洗禮名의 語源에는 ‘새’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고 하더군요. 運命論者는 아니지만 제 八字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긴 있나 봐요. 새와 같은 好奇心이 숨어있다고 할까요. 한番 固執을 피우면 어느 누구도 꺾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兄弟들에 비해 父母님은 저에게 寬大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언젠가 저 아이는 무엇인가 일을 저지를 것이다’라는 式으로요. 只今도 제 가슴속에는 ‘好奇心’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어요. 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저는 瞬間瞬間 窒息할 것 같아요.”

    旅行을 始作하면서 그女는 몇 가지 原則을 세웠다. 가장 重要한 것은 徹底하게 陸路만을 利用한다는 것. 飛行機는 그의 體質과는 距離가 멀었다.

    “韓半島에 살면서 원통하게 생각한 것이 海外로 나가려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하고 飛行機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北쪽이 막혀 있으니 陸路 旅行은 不可能하잖아요. 그에 對한 아쉬움이랄까, 反撥이랄까. 그래서 旅行地에 到着하면 恒常 陸路로만 旅行했죠.



    危機一髮의 瞬間들


    陸路旅行을 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飛行機로 가면 그야말로 走馬看山(走馬看山)일 뿐입니다. 地球는 直接 맨땅에 헤딩하면서 봐야 제 맛이죠. 제가 하느님도 아니고, 天上에서 내려다보며 旅行한다는 건 건방진 態度라는 생각도 들고요. 게다가 陸路旅行은 經費가 쌉니다. 비싼 돈 주고 地球의 뚜껑만 본다는 것은 地球에 對한 冒瀆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둘째 原則은 現地人과 똑같이 먹고 잔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나라 사람들 固有의 냄새를 더 密接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民族의 風俗, 固有의 傳統, 먹고 사는 方式을 接할 수 있어야 眞짜 旅行이라는 意味다. 이는 ‘可及的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셋째 原則과도 脈이 닿아 있다. 只今껏 이런 方式을 固守해온 것이 旅行을 더욱 풍요롭고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쓸데없는 老婆心일까. 女子 혼자서 낯선 곳으로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다시 걱정이 앞선다.

    -女子 홀몸으로 世界를 돌아다니면서 곤란하거나 不便한 點은 없었나요. 무엇보다 낯선 곳을 다니려면 두렵고 무서울 텐데요.

    “저는 오히려 가장 理想的인 旅行方式은 ‘女子 혼자서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둘 以上 團體로 다니는 것이 不便하게 느껴지거든요. 홀로 旅行하는 女子에 對해서는 누구나 警戒心을 갖지 않죠. 그래서 現地의 家族生活을 抵抗 없이 들여다볼 수 있어요.

    서너 名이 團體로 움직이면 拒否感이 생기겠지만 女子 혼자라면 現地人들이 먼저 好感과 好奇心을 가져요. 남의 집 부엌에서 主婦와 얼마든지 對話도 나눌 수 있고,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습니다. 혼자니까 家庭집에서도 쉽게 잠을 재워주지요. 얼마나 좋은 條件입니까. 經費節約 次元에서도 그렇죠.

    잠을 잔 집에 돈을 주려 해도 大槪는 받지 않아요. 代身 方法을 硏究했죠. 안主人이 갖고 있는 物件을 팔라고 우겨서, 그 物件값이라는 핑계로 돈을 주는 겁니다. 世界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런 따뜻한 人情도 女子 홀몸으로 다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旅行을 다니면서 詐欺를 當하거나 돈을 털린 적은 없었을까. 먼 땅 奧地에서 낯선 男子에게 이런저런 受侮를 겪지는 않았을까. ‘자꾸 劫奪당할 危險이 없었는지 캐물어 인터뷰를 興味 爲主로 끌고 나가려 한다’고 不平하면서도, 韓氏는 旅行地에서 겪은 수많은 ‘事緣 褓따리’를 풀어놓기 始作했다.

    “危機에 處한 적도, 誘惑을 받은 적도 있고, 또 제가 먼저 男子에게 빠져든 적도 있죠. 印度 旅行 때의 일입니다. 릭샤(人力車)를 타고 移動하는데 릭샤꾼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거예요. 어느 골목을 지나 周圍를 돌아보니 異常한 洞네예요. ‘나를 私娼街에 팔아 넘길 생각인가’ 싶어 얼른 릭샤에서 뛰어내렸어요. 私娼街에 갇히는 것보다는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거죠.”

    旅行地에서도 可及的 重要한 物件은 直接 携帶한다. 經驗上 그 便이 더 安全하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카메라나 달러 等은 纏帶에 담아 차고 다닌다. 勿論 그 程度면 現地人들에게는 몇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큰 財産. 强盜가 行人이 오가는 거리에서도 버젓이 ‘한탕’을 노리는 境遇도 있다.

    “탄자니아에서의 일이에요. 거리를 구경하려고 旅館을 나섰죠. ‘重要한 物件은 집에 두고 나가라’는 旅館 主人의 말을 無視하고 平素처럼 纏帶에 넣어 메고 나섰죠. 市場 골목을 지나가는데 한 녀석이 팔로 제 목을 껴안아 조르는 거예요. 行人들은 멀거니 이 光景을 지켜보고만 있고요. 제가 누구예요? 柳寬順 언니의 後輩답게 勇敢하게 뿌리쳤죠. 우스운 것은 두렵다는 恐怖보다 그 靑年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에 對한 역겨움이 더 컸다는 거예요. 스컹크 냄새보다 더 至毒해 窒息할 뻔했으니까요. 以後로도 旅行하면서 한番도 돈을 털린 적이 없어요.”

    터키의 한 旅館에서 겪은 일도 잊지 못할 ‘危機一髮의 瞬間’이었다.

    “그루지아에서 터키로 밤늦게 넘어왔어요. 旅館 主人이 寢臺를 두 個 쓰겠냐, 하나 쓰겠냐고 물어요. 當然히 하나만 쓰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門을 잠그지 말고 자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받으려나보다 하고 門을 잠그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곤히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 몸을 더듬는 거예요.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男子가 곁에 있는 거예요. 男子는 ‘나타샤, 나타샤’와 ‘쟁기, 쟁기’를 連發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洞네는 娼女村이고, ‘나타샤’는 몸을 파는 러시아 女性을 象徵的으로 부르는 用語더군요. ‘쟁기’는 러시아語로 돈이라는 뜻이고요. 말하자면 몸 파는 러시아 女性을 찾아 들어와, ‘돈 줄게, 돈 줄게’ 한 셈인데, 오히려 제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자 自己가 더 화들짝 놀라 逃亡을 가더군요.”

    自身이 쓴 旅行記에도 없는 武勇談을 뒤로하고 이야기는 그가 ‘내 旅行의 目的’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關한 것으로 천천히 옮겨가기 始作했다. 드넓은 大陸, 다양한 나라에서 만난 다양한 人種, 다양한 階層의 사람들. 奧地를 다니다보면 英語로 말하는 사람만 보아도 반갑다고 한다. 말이 통한다는 事實만으로 바로 共感帶가 形成돼 ‘同胞愛’를 느낄 程度라는 것. 그렇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또 그 나름의 삶을 배울 수 있다.

    -旅行을 하다보면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터키에서 英語를 流暢하게 하는 男子를 만났어요. 이란 亡命者였는데 호메이니 時節 反政府 指導者로 活躍한 사람이었습니다. 英國에서 操縱士로 活躍했고, 親西方的 視角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죠. 처음 저를 필리핀 女子로 알더군요. 美國 노래 ‘The end of the world’를 좋아하는 것도 같아 今方 가까워졌어요. 祕密組織에서 活動하고 있는 그의 親舊를 통해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只今도 두바이에서 反政府 組織 資金責으로 活躍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볼리비아에서 만난 할머니는 또 다른 意味에서 記憶에 오래 남습니다. 라파즈라는 都市는 海拔 4000m가 넘는 高原都市죠. 다른 곳으로 移動하려면 꾸준히 내려가야 돼요. 山 밑까지 꼬박 4泊5日이 걸리죠. 네덜란드 女子 2名과 一行이 되어 함께 내려가는데 寂寞하기 이를 데 없는 山골짜기를 가게 됐죠. 그런데 到底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그 山골에 할머니 한 분이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더라고요.”

    할머니는 그들 一行을 보자 저승에 갔다온 子息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1年에 한番 사람을 만날까 말까 하는 程度니 반가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 그 地方 사투리로 연신 신발과 洋襪을 벗어달라는 할머니에게 한 켤레 줄 料量으로 登山靴를 벗어주었다. 신발에 欲心을 내는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신발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잘 말리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山길을 내려오느라 젖은 신발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 집에서 묵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안이 正말 돼지우리 같은 거예요. 할머니 혼자 살림을 堪當해갈 수 없으니 그렇게 됐겠죠. 그래서 집안 淸掃며 해진 옷을 기워드렸어요. 눈이 안 보이니 바느질은 아예 할 생각을 못했던 模樣이에요. 왜 혼자 이 깊은 山中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10年 前에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린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곳으로 移徙를 가면 아들이 自身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이 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겠다는 거죠.

    헤어질 때 돈을 좀 드렸더니 영 받지 않으세요. 必要없다는 거죠. 그래서 雪糖, 齒藥, 비누 같은 物件을 드렸더니 고구마 비슷한 그 고장 特産物을 주는 거예요. 할머니가 하도 願해서 豫定에도 없이 며칠을 보냈는데, 헤어질 때는 얼마나 섭섭해 하며 우시는지 只今도 잊을 수가 없네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보다는 가난하고 弱한 사람들의 얘기가 가슴에 오래 남는 것일까. 볼리비아의 할머니 못지않게 베트남의 한 旅館에서 만난 化敎 少女를 떠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호치민시의 조그만 旅館에 投宿했죠. 化敎 少女가 심부름을 하고 있는데 主人이 어찌나 苛酷하게 부려먹는지 애가 픽픽 쓰러지는 거예요. 奴隸나 다름이 없더라고요. 越南戰 以前에 美軍 通譯을 했던 아버지는 共産黨이 執權하자 廢人이 돼버렸다더군요. ‘反動分子’였던 거죠. 아이는 結局 멀리 호치민市까지 흘러들어와 旅館에서 일하고 있었고요. 反動의 子息이니 누구도 關心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家畜처럼 부리는 걸 當然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어요.

    아이에게 將次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으니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1年 學費가 100달러라고 하길래 제가 100달러를 주기로 하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주었죠.”

    여기서 問題가 생겼다.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當時만 해도 베트남은 統制가 甚한 나라였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가면 保安警察에게 摘發된다. 寫眞을 찍느라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더니 곧바로 마을 治安責任者에게 發覺돼 警察이 들이닥쳤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숨느라 혼났죠. 그 아이는 只今도 가끔 저와 連絡을 하고 지내는데 이젠 훌륭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돼 있어요. 낯선 길을 가는 旅行者에게 100달러는 決코 적은 額數가 아니지만, 한 少女의 人生을 바꾸어주었다는 點에서는 100달러 以上의 값어치를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사는 方式은 달라도 사람은 모두 똑같다’는 걸 느껴요. 染色體 構造上 人間과 醋파리는 같은 部分이 60%나 된다고 하더군요. 침팬지와는 98.8%가 같고요. 그러니 사람끼리는 거의 100% 完璧하게 같은 거겠죠. 그런데도 다른 것인 양 神奇해 하고, 조금만 말이 달라도 別種인 양 自己 式대로 裁斷하고 斷絶하고 싸우고 으르렁거리지요. 돌이켜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너의 幸福이 나의 幸福’이라는 걸 모르고 말이죠.”

    ‘全地球的 人類愛’에 對한 使命感에 넘치는 한비야氏는 機會만 있으면 眞摯한 主題로 말길을 돌리려 애썼다. 德分에 技士가 재미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眞摯함도 좋지만 그 때문에 讀者들이 지루해 한다면 그 또한 難堪한 일. 筆者는 急히 다른 話題로 이야기를 돌렸다.

    旅行을 하다보면 美男이 많은 곳, 美女가 많은 곳도 알 수 있을 터다. 好事家들을 위해 案內해달라고 提議했다. ‘美男이 많은 곳은 아껴두었다가 혼자만 가려고 한다’던 한비야氏가 結局 善心 쓰듯 몇몇 곳을 推薦해 주었다.

    “於此彼 全部 차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몇 군데 알려드릴게요. 于先 터키 男子들이 잘생겼죠. 로마 男子들도 괜찮고요. 그中 터키 男子들은 石膏像하고 比較도 안될 만큼 完璧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요.

    美女는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女人들을 들 수 있습니다. 皮膚가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새까만 것이 아니고 褐色 潤氣가 나는 검은 皮膚죠. 이곳 女性들은 내가 봐도 흠뻑 빠질 만큼 魅惑的이에요. 에티오피아 南部는 아프리카 系統이지만 北部는 오래 前에 基督敎가 들어온 地域이고, 西洋文物에 익숙한 곳입니다. 사람들도 混血이 많아요.

    생각해보면 魅惑的인 女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魅惑的인 男子가 있어요. 美女가 있는 곳에는 美男이 있는 法이더라고요.”

    -景致가 아름다운 곳도 紹介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山을 좋아하거든요. 個人的으로는 파키스탄의 北部 山岳地帶를 꼽고 싶어요. 히말라야, 힌두쿠시, 파미르 高原의 三角地帶로 볼 수 있는 地域인데, 海拔 6000m 程度의 山은 너무 흔해 이름도 없고, 7000m 쯤은 돼야 族譜를 내놓을 수 있는 山岳地帶죠. 그 아름다움이란 말로 形容할 수가 없어요. 莊嚴하고, 아름답고, 氣候도 좋죠.

    勿論 티베트나 네팔 쪽도 좋지만 파키스탄 北部의 山들은 神이 만들어놓은 藝術品처럼 느껴지거든요. 킬리만자로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登山하기 쉬운 山일 뿐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몽골의 山岳地帶가 훨씬 아름답습니다. 몽골을 흔히 沙漠地帶라고 하지만 沙漠은 3%밖에 안된다고 해요. 大部分 山岳地帶죠. 山이 깊으니 溪谷의 물도 좋고, 湖水가 많아 참 아름답습니다. 알래스카의 山과 숲도 좋고요.”

    -旅行에는 飮食 얘기가 빠질 수 없죠. 어느 나라 飮食이 가장 맛있던가요.

    “베트남 飮食이 맛있습니다. 飮食은 中國과 프랑스 飮食이 좋다고 하지만 普遍化해서 그런지 별다른 感興이 없어요. 또 高級 飮食店의 메뉴는 맛으로 評價할 수가 없다고 봐요. 비싼 값을 해야 하니까 맛있어야 하는 것은 當然한 일 아닌가요? 그렇지만 베트남 국수나 빵은 구수한 맛에서나 쫀득쫀득한 맛에서나 比較할 만한 對象이 없다고 봅니다.

    特히 베트남 쌀국수는 最高로 치고 싶어요. 野菜에 소의 눈살코기가 한 點씩 들어가는 쌀국수, 여기에 콩나물 비슷한 것이 들어가는데 이 나물을 씹는 맛이 사각사각 輕快하고 싱그럽죠. 다음으로 과테말라의 옥수수빵 토르티아가 맛있어요. 프리홀렛을 으깨서 빵에 바르고, 매운 고추를 넣어서 먹는 맛이 最高예요. 터키 飮食도 맛있죠. 東西洋이 交叉한 곳이기 때문에 飮食도 다양하게 發達했어요. 매콤달콤한 맛이 좋지요. 중동 飮食들도 괜찮고요.”

    -나라마다 民族性도 各其 다를 텐데 實際로 接해본 나라의 民族性은 어떻던가요. 흔히들 게르만民族 하면 理智的이고 論理的이라고 하고, 프랑스는 藝術的 趣向, 스페인은 樂天的이고, 놀이文化에 익숙하다는 式으로 말하는데. 그건 果然 妥當한 評價인가요 아니면 그냥 常套的인 評價基準日 뿐일까요.

    “제가 文化人類學者度 아니고, 그 方面에 딱히 造詣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떻다고 斷言하기는 어렵네요. 다만 어떤 先入見을 갖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接近한다면 자칫 歪曲되거나 一面의 眞實에만 빠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에 對한 情報가 太平洋 바닷물 中 물 한 컵 程度의 分量인데 어떻더라고 말하는 것은 適切치 않지요.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도 個人的 잣대를 갖지 말라고 注文하고 싶어요. 그게 旅行하는 사람의 基本 姿勢일 거라고 믿거든요. 다만 우리 民族의 强靭함은 外國에서 發見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會社가 建築工事를 하는 곳에서는 그곳 사람들이 모두 歎服을 해요. 코리아 넘버 圓이라는 거죠.”

    -우리 內部에서는 國民氣質이나 性向이 엉터리라고 하는데도요.

    “하지만 外國에서 우리를 보는 눈은 尋常치 않아요. 방글라데시엔 東西를 가르는 큰 江이 있어요. 나룻배로 이 江을 건너다 急流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交通이 不便해 發展이 안된다는 곳이었죠. 江 下流는 江 셋이 合流한 地點이어서 江이라기보다 바다라고 해야 옳을 程度高요. 이곳에 스웨덴 等 여러 나라에서 다리를 놓으려고 試圖하다 失敗하고 撤收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現代建設이 끄떡없이 다리를 놓았어요. 그 뒤 그곳 사람들은 韓國사람만 보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最高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줍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레이스키(舊 蘇聯地域의 韓人同胞)들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 民族의 强靭함은 더 實感나요. 스탈린의 高麗人 强制移住 政策으로 1937年 沿海州에 있던 우리 同胞들이 中央아시아의 늪이나 沙漠地帶에 强制移住를 當했는데, 이들은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땅을 開拓해 수박을 심고 감자를 키워서 最高의 收穫을 올렸어요. 移住 4年 만에는 쌀農事를 짓기도 했고요. 우리 同胞가 가지 않았다면 只今까지 不毛地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거지요. 實際로 우리 同胞가 손대지 않은 다른 地域은 如前히 沙漠이나 늪으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海外旅行을 많이 하다보면 누구나 民族主義者 또는 국수數椅子 性向이 剛해지는 걸까. 그의 著書 ‘中國見聞錄’에는 이런 句節이 나온다.

    ‘旅行中에는 늘 작은 太極旗를 가지고 다니며 說明과 자랑을 한다. 아프리카와 中東旅行이 끝난 다음부터는 大型國旗度 한 張 넣어 다녔다. 갖가지 危險한 일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서 였다. ‘萬에 하나 내가 客地에서 不歸의 客이 되면 太極旗로 나를 덮어야 한다.’ 自稱타칭 코스모폴리彈이라는 사람이 웬 感傷的 民族主義냐고? 나도 예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 한비야라는 個人만으로도 充分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섞여보니 大部分 그들에게 나를 확인시키는 첫番째 窓은 ‘韓國人’이라는 事實이었다.’

    - 直接 쓰신 國土縱斷氣를 읽었는데, 國土를 縱斷하면서 에피소드가 많았더군요.

    “저는 늘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을 골라 宿食을 했어요. 하루는 全羅北道 淳昌의 한 할머니 宅에서 묵는데, 저녁에 자장면과 糖水肉을 시켜먹었죠. 그런데 配達하는 飮食店 主人 아들이 警察에 申告를 해버렸어요. 生前 자장면 한 그릇 사먹을 理 없는 집인데, 갑자기 糖水肉까지 시키니 異常하다는 거죠. 그래서 繼續 房안을 기웃거리다가는 ‘낯선 사람이 돈을 펑펑 쓴다’고 警察에 申告해 버렸어요. 糖水肉 하나가 큰돈으로 비쳐지는 農村의 經濟規模가 우습기도 했지만, 아직 申告精神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 神奇하더라고요.”

    -特別히 할머니가 사는 집을 골라 宿所로 定하는 理由가 있습니까.

    “于先 便하잖아요. 할머니 한 사람 한 사람이 小說冊 한 卷만큼의 辭緣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 실타래가 풀리면 밤새 듣는 재미도 있고요. 우리나라 農村 現實이 그렇듯 農家에는 大部分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요. 눈 어두운 老人분들을 위해 며칠씩 묵으며 裁縫틀 일도 해주고 옷도 기워주면 더없이 좋아하시죠.”

    마을에 잠잘 곳이 없으면 시골 敎會堂을 찾는다. 聖堂을 찾아 聖像 밑에서도 자기도 한다. 警察官이 勤務를 서고 있는 防犯哨所에서 身世를 진 적도 있었다. 可及的 旅館에는 가지 않는다.

    “旅館의 이불이 淸潔한 便은 아니죠. 밤새 어떤 男女가 뒹굴던 이부자리가 아닌가 하는 不快感도 들고요. 그래서 旅館에 들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 寢囊을 使用해요. 할머니 房을 찾으면 퀴퀴한 냄새가 나긴 해도 한 이불 속에서 자죠. 親해지면 쭈그러진 할머니 젖을 만지면서 自己도 하고요.”

    旅行을 다니며 한비야氏가 만난 사람들 中 가장 잊을 수 없는 이들은 世界 到處의 難民들이다. 그가 世界 旅行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로 꼽는 것도 難民村의 아이들이 굶주려 죽거나 콜레라 等 傳染病에 걸려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境遇다.

    “제 몸이 괴로울 때는 차라리 괜찮아요. 아프리카 奧地의 住民들은 動物 畜舍 같은 곳에서 動物과 함께 먹고 잡니다. 그러면 擇(진드기의 一種)이라는 벌레가 온통 다리나 목 等 露出 部位에 엉겨붙어서 피를 빨아먹어요. 사람들은 慢性이 된 데다 지친 나머지 그대로 빨리고 자고 일어나지요. 房에는 빈대, 벼룩, 쥐 같은 온갖 害蟲 때문에 皮膚가 성한 곳이 없어요.

    特히 어제까지 나하고 즐겁게 놀던 아이가 아침에 쓰러져 죽어갈 때 이를 지켜보는 마음은 견딜 수 없이 아파요. 그게 알고보면 單純한 脫水症 때문이에요. 單 700원짜리 링거 注射 한 放이면 시퍼렇게 살아날 症狀이라는 말이죠. 700원과 목숨이 交換되는 現實을 보면서 無力感이랄까, 絶望感에 빠집니다. 그럴 때가 가장 괴롭습니다.”

    韓氏가 이들을 돕는 國際團體 ‘월드 비전’에서 緊急救護팀長으로 일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博愛精神이나 獻身, 配慮 같은 巨創한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 對한 素朴한 愛情을 바탕으로 始作한 작은 實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强調한다.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하는 水準’의 月給을 받고 있지만 그마저도 다시 口號事業에 쓸 程度로 熱誠을 갖고 臨하고 있다.

    “월드비전은 1950年 韓國戰爭中에 美國人 피어스 牧師와 作故한 한경직 牧師가 設立한 團體입니다. 只今은 全世界 100餘 個國에서 緊急 救護事業을 펼치고 있죠. 우리는 지난 40年間 다른 나라의 支援을 받아 일어섰지만, 1990年부터는 우리가 直接 外國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最近 戰爭을 치른 80萬 아프간 難民을 돕는 일을 하고 있고, 將次 北韓訪問度 計劃하고 있어요.”

    그는 이들이 當場 必要로 하는 食水 食糧 醫藥品 天幕과 物資를 輸送하는 任務를 맡고 있다. 好奇心과 冒險心으로 海外旅行을 始作했지만 이젠 人類愛的인 使命感으로 目的이 바뀐 셈이다.

    “緊急救護팀長度 熱情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徹底한 訓鍊을 받죠. 地震은 瞬息間에 致命的인 傷處를 남깁니다. 戰爭도 그렇고요. 緊迫한 狀況에서 孤兒들과 貧困에 處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救護活動을 벌이고 保護할 것인가에 對해 世界的 基準에 맞춘 敎育프로그램을 履修해야 하는 거죠.”

    -財源은 어떻게 마련하지요.

    “寄附나 募金으로 確保하죠. 그런데 우리는 富者가 더 인색한 것 같아요. 돈 있다고 돕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날 聖堂에 說明會를 하러 갔더니 가난한 聖堂인데도 그 자리에서 數百萬원이 모아져요. 그들 大部分이 가난한 샐러리맨들입니다. 우리는 會員 7萬名을 두고 있는데 大部分이 月給 130萬원 以下의 職場人들이에요.”

    當分間은 口號事業에 힘을 쏟을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旅行을 抛棄한 것은 아니다. 그 동안 陸路로 世界를 누볐으니 앞으로는 요트를 타고 海路로 地球를 돌 計劃이라고. 只今까지 旅行한 地球 세 바퀴 班을 바닷길을 통해 다시 한番 試圖한다는 構想이다. 大洋을 橫斷하는 巨大한 計劃보다는 港口에서 港口로 沿岸을 따라가는 요트 旅行이 요즘 그를 설레게 하는 꿈이다.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하는 水準의 月給으로 어느 歲月에 요트를 사시려고요.

    “이래봬도 저는 베스트셀러 作家예요. ‘中國見聞錄’만 해도 30萬部가 나갔는데요.”

    그가 執筆한 ‘바람의 딸, 걸어서 地球 세 바퀴 半’이라는 4卷짜리 冊, 國土縱斷 紀行文집人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와 지난해 가을 出版한 ‘한비야의 中國見聞錄’은 모두 스테디셀러 目錄에 올라 있다. ‘中國見聞錄’만 해도 30萬部가 넘게 팔렸다. 冊을 쓰게 된 動機도 재미있다.

    “1996年 아프리카를 旅行할 때의 일입니다. 말라리아 藥을 過多服用한 後遺症으로 머리털이 뭉텅뭉텅 빠지는 거예요. 자고 나면 머리맡에 수북이 쌓이더라고요. 삼단 같던 머리털이 瞬息間에 줄어드니 怯이 덜컥 났어요. 눈이 시리고, 健康 狀態도 몹시 惡化됐어요. 부랴부랴 歸國해서 간 檢査를 받았죠. 豫想했던 대로 아주 안 좋았어요.

    그래서 治療를 받는 동안 글이나 쓰자는 생각으로 入院을 했지요. 4個月 동안 治療를 받으면서 쓴 冊이 또 돈벌이가 돼요. 그게 ‘바람의 딸, 걸어서 地球 세 바퀴 半’이었어요.”

    冊이 잘 팔린 德分에 더 호사스럽게 旅行을 할 수 있는 밑천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믿거라 하는 구석이 있으니 未來에 對한 計劃도 자유롭다.

    “저는 지난 1年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제 自身에게 質問하며 보냈어요. 現在로서는 緊急救護 活動이 1順位이고, 다음이 요트 旅行이죠. 그 다음에는 世界의 在來市場과 부엌에 對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언젠가는 韓國式 傳統 유스호스텔度 運營하고 싶어요. 그렇게 얼추 計算해보니 110歲까지 살아야 할 일을 할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 女性의 平均 壽命이 79.2歲라니 아쉬울 뿐이죠.”

    -해야 할 일 目錄 中에 結婚은 없습니까.

    “當然히 있죠. 그동안 사랑한 사람도 있었지만 떠나보냈어요”

    -왜 헤어졌죠. 헤어질 때는 괴롭거나 슬프지 않습니까.

    “저는 遊牧生活을 좋아하는데 相對方은 定着生活을 願하죠. 그러면 別 수 없죠, 訣別해야지. 헤어질 때는 꼭 合意 해서 합니다.”

    -理想的인 結婚 相對者를 꼽는다면.

    “같은 길을 갈 사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귀고 싶어요. 情緖가 통하고, 마음을 맞춰 이야기할 수 있는 品位 있는 男子. 그런 結婚生活이라면 아름다울 것 같아요. 그런데 일로서, 同僚로서 멋진 男子를 많이 만났지만 結婚은 쉽게 안되더라고요.”

    -同僚로서 만난 멋진 男性을 紹介할 수 있습니까.

    “케냐에서 勤務하고 있는 40代 獨身 眼科醫師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7年 가뭄이 繼續되니 사람들이 손을 씻을 理가 없지요. 그래서 눈病이 많고, 甚할 境遇 장님이 됩니다. 이 때문에 視覺 障礙人들이 유난히 많아요. 또 視神經이 腦를 刺戟해 精神疾患을 誘發하는 수도 있고요. 그래서 거리마다 異常하게 웃거나 高喊 지르며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죠.

    나이로비로 나가면 큰돈을 벌 수 있는데도, 이 醫師는 소말리아에서 輕飛行機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는 原住民 村에서 無料 仁術을 베풀고 있어요. 비싼 돈 들여서 배운 것을 돈 버는 데만 使用하기에는 人生이 아깝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同僚로서 사랑스럽고 눈물이 날 程度로 멋진 분이었죠.”

    그는 只今 혼자 살고 있다. 入養한 두 딸은 各各 에티오피아와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다. 直接 데리고 사는 것은 아니고 든든한 後援者 役割을 맡은 것. ‘아이들에게서 온 서툴게 쓴 便紙를 받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혼자 살게 된 것은 2年 前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다. 食事準備를 해주곤 하던 어머니가 더 以上 안 계시니 이젠 그조차도 일거리가 됐다. 밥을 지어먹고 다닐 틈이 없는 동생을 위해 只今은 가까이 사는 언니가 飯饌을 챙겨놓고 돌아가곤 한다.

    -외롭지 않으세요.

    “글쎄요. 외로움을 타고난 運命이 아닐까 해요. 運勢를 보는 方法도 餘러街지잖아요. 그中에 손금-觀相-骨上의 巡으로 正確度가 높다는데, 가장 確實한 것이 心狀이라고 하더군요. 어떤 道士 한 분이 제 心象에는 ‘마음의 새’가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새 中에서도 猛禽類라는 거죠.

    猛禽類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法이 別로 없죠. 禿수리는 혼자 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勿論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나뭇가지에 앉아 쉬는 禿수리는 魅力이 없잖아요. 自由로운 날갯짓을 繼續해야 아름답죠. 中間에 抛棄한다든지 失敗할 수도 있지만 單 1%의 可能性만 있으면 끝까지 가보는 것, 아마 남은 人生도 그런 信條로 살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먼 하늘, 夕陽을 背景으로 바람을 따라 큰 날개를 펼치고 천천히 滑空하는 한 마리 禿수리. 世上의 눈에는 神經 쓰지 않는다는, 이미 中年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限없이 젊기만한 이 女性을 만나고 난 筆者의 머릿속에는 그런 이미지가 남았다. 그의 두 눈이 앞으로 어느 곳을 向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關心이 미치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는 繼續해서 살아 움직이고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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