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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感覺에 迎合하지 않겠다”|신동아

“젊은 感覺에 迎合하지 않겠다”

匠人精神으로 똘똘 뭉친 映畫監督 임권택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入力 2004-09-16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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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林監督 世代中에는 植民地와 戰爭 그리고 가난의 混亂 속에서 正規制度圈 敎育을 받은 사람이 드물다. 이 點에서는 林監督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分野를 繼續 파고들며 硏究하고 實驗한 現場實力은 正規敎育課程의 博士學位에 비할 바가 아니다.
    韓國 映畫界의 巨匠 임권택 監督의 98番째 作品 ‘吹花癬(醉畵仙)’이 ‘춘향뎐’에 이어 칸映畫祭 本選 競爭部門에 들었다. 5月24日 開幕되는 칸映畫祭에서 ‘吹花癬’李 賞을 받게 되면 林監督의 榮譽日 뿐만 아니라 새로운 中興期를 맞은 韓國 映畫界의 傾斜다.

    林監督은 1962年 ‘豆滿江아 잘 있거라’로 데뷔해 여러 次例 最多 觀客動員 記錄을 更新했다. 1990年에는 ‘將軍의 아들’로 서울 團成社에서만 68萬名을 動員하는 前無後無한 記錄을 세웠다. 1993年 ‘西便制’는 全國에서 350萬名 以上의 觀客을 動員했다.

    그는 藝術家로서 大衆性과 藝術性을 조화롭게 結合하는 드문 幸運을 누리고 있다. 國際映畫祭의 喪服도 적지않게 따라주었다. 강수연이 1986年 베니스映畫祭에서 ‘씨받이’로, 1989年 모스크바映畫祭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女優主演賞을 탔고 1987年에는 몬트리올 映畫祭에서 신혜수가 ‘아다다’로 女優主演賞을 받았다. 모두 그의 作品이다. 1993年에는 ‘西便制’가 第 1回 上海映畫祭에서 監督賞과 女優主演賞(오정해)을 받았다.

    ‘西便制’는 興行에는 大成功을 거두었지만 칸映畫祭 本選 進出에 失敗해 林監督의 自尊心에 傷處를 입혔다. 韓國 最初로 칸映畫祭 本選에 들어선 映畫는 ‘춘향뎐’이다. 그러나 興行에는 慘澹하게 失敗했다. 50億∼60億원(韓國映畫 平均 製作費)을 들여 찍은 映畫가 開封館에서 일찌감치 看板을 내리면 零細한 製作者는 그야말로 存亡의 岐路에 설 수밖에 없고 監督은 罪人이 된 氣分에 빠져든다.

    言論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社長과 定日性 撮影監督, 林監督을 ‘老人 트리오’ 라는 불경스러운 呼稱으로 부른다. 老人트리오는 요즘 ‘吹花癬’ 일로 늘 함께 다닌다. 開封 前날 試寫會에도 劇場 入口에 세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映畫판에서 山戰水戰 다 겪은 이들 세 映畫人들의 얼굴에서 大學入試를 치르고 發表를 기다리는 受驗生 같은 焦燥함을 읽을 수 있었다.



    태흥영화사는 서울 한남동 檀國大學校 後門 近處에 있다. 이태원 社長이 옛날에 살던 집을 改造해 映畫社 事務室로 쓰고 있다.

    宮合 잘 맞는 ‘老人 트리오’

    斑白의 스포츠머리를 한 林監督은 기침을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웠다. 林監督은 말이 語訥한 便이다. 對答이 짧고 생각이 잘 안나면 ‘뭐인가’하고 더듬는다.

    ―이태원 社長은 “두 番씩이나 불러놓고 설마 이番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겠지” 하고 期待가 대단하던데요.

    “두 番 왔다고 해서 認定으로 주어지는 賞이 아니거든요. 作品 自體의 質이 首相을 決定합니다. 上에는 運도 따라요. ‘吹花癬’ 같은 映畫를 좋아하는 性向의 審査委員이 많으면 유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칸映畫祭 本選 進出 및 受賞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世界에서 알아주는 큰 映畫祭로 칸, 베니스, 베를린, 모스크바映畫祭를 꼽습니다. 모스크바映畫祭는 亡했지만. 內 映畫는 베니스·모스크바映畫祭에서 最優秀 女優主演賞을 受賞했고, 베를린에서는 賞을 못 받았지만 本選 競爭에 두 番 올랐습니다. 칸은 本選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내가 1980年代 初부터 칸映畫祭에 出品하기 始作해 2000年에야 ‘춘향뎐’으로 本選에 들어갔으니 20年이 걸렸죠. 그렇게 壁이 높은 映畫祭입니다.”

    ―南楊州에 있는 서울종합촬영소에서 映畫美術思想 最初로 21億원을 들여 朝鮮末期 서울거리를 再現했다지요. 映畫 찍고는 그 아까운 걸 撤去하는 겁니까.

    “映畫振興委員會에서 6億원을 志願했습니다. 우리가 映畫 찍고 난 다음에는 振興委員會가 넘겨받아 觀覽客에게 公開할 計劃이죠.”

    ‘JSA’의 撮影 세트도 거기에 있다. 서울綜合映畫撮影所는 로스앤젤레스 유니버설스튜디오처럼 有名 映畫의 세트를 觀光客에게 보여주고 入場料 3000원을 받는다. 週末에는 손님이 몰려들어 꽤 장사가 된다고 한다.

    ‘吹花癬’은 朝鮮末期 天才 畫家 장승업(1843∼97)의 一代記를 映畫化한 作品이다. 오원(吾園) 張承業은 檀園(檀園) 金弘道, 蕙園(蕙園) 申潤福과 함께 朝鮮時代의 3원(園)으로 불린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해 宮闕 生活을 견디지 못하고 宮에서 뛰쳐나갔다가 붙잡혀 들어오기 例事였다. 술과 女子를 좋아해 美人이 곁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는 逸話가 傳해진다. 金弘道 申潤福에 對한 資料는 豐富하지만 張承業은 記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마흔 살에 화명(畵名)을 얻어 奇行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쉰둘의 나이에 갑자기 傳說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小說 作品을 映畫로 만드는 境遇가 많던데 ‘吹花癬’은 素材를 어디서 取했습니까.

    “記錄과 口傳을 土臺로 檮杌 김용옥 敎授와 내가 함께 시나리오를 썼지요.”

    ―언제 張承業을 映畫化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까.

    “1978年 維新時節에 張承業을 찍어볼까 생각했죠. 王이 불러서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自己가 싫으면 뛰쳐나가는 勇氣를 지닌 畫家였습니다. 維新政權이 우리의 숨筒을 完璧하게 조이던 時代에 自由人의 熾烈한 삶을 映畫로 담아보려는 構想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如意치 않아서 덮어두었다가 이番에 하게 된 거죠.

    ‘춘향뎐’과 ‘西便制’에서는 판소리를 映像과 만나게 試圖했습니다. 소리와 映畫를 調和롭게 만나게 해서 판소리를 살려내고 映畫로서도 성공시키려는 努力이었습니다. ‘吹花癬’에서는 東洋畫와 映畫가 만났습니다. 줄거리 自體는 장승업이라는 畫家의 삶을 다루었지만 映像으로 그린 韓國化라고 할 수 있습니다.”

    ―‘吹花癬’에서는 書畫, 陶藝, 판소리, 器樂, 衣裳, 茶道 等 韓國 藝術의 모든 部門이 登場하더군요.

    “‘西便制’ 以後 내가 映畫를 한다고 하면 도와주려는 쪽이 많아졌어요. 過去에는 外部의 도움 없이 未熟하고 모자란 대로 우리 안에서 解決했어요. ‘西便制’ 以後 文化 全般이라고 해도 좋을 程度로 映畫에 얽히는 分野에서 積極的으로 도와주기 始作했어요. ‘吹花癬’에서 그런 參與가 映畫의 完成度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진작 이런 風土가 돼있었으면 우리 映畫가 더 빨리 成長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동안 서로 너무 갇혀 살고 있었는데 이제나마 열려서 고마울 뿐입니다.”

    ―‘춘향뎐’에는 조상현氏의 판소리가 映畫 中間中間에 끼어들던데요. 春享, 香壇, 李도령, 房子, 월매가 西洋 뮤지컬 映畫처럼 各自 판소리를 하는 方式으로 했으면 어땠을까요. 판소리와 演技를 모두 잘하는 俳優를 求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조상현氏 판소리가 자주 길게 나오니까 映畫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各自 소리를 하는 唱劇式으로 해갈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주는 소리의 感動을 一貫性 있게 해갈 것인가는 대단히 重要한 部分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나눠서 하면 西洋의 오페라하고 다를 게 뭐 있어요. 아마 外國에 나갔을 때 아무도 評價해주지 않았을 거예요. 西洋音樂의 亞流 方式이거든요. 映像이 갖는 效果와 소리의 效果를 極大化하는 데서 映畫의 評價가 높아집니다. 판소리의 맛에 빨려 들어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아무 感興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빨려 들어오면 지루함이나 斷絶感이 안 생깁니다. 우리의 原型을 追求하려는 冒險的 試圖였습니다.”

    ―100篇에 가까운 作品 하나하나에 愛着이 가겠지만 그中에서 代表作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필름을 버려야 한다면 어떤 作品을 고르고 싶습니까. 新聞 인터뷰에 보니까 ‘西便制’는 나의 얼굴이라는 얘기를 했던데요.

    “나의 얼굴 云云은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記者가 그렇게 表現한 거지요. 記者들이 代表作 하나만 꼽아보라는 質問을 많이 합니다. 監督 立場에서 보면 欠 잡을 데가 없이 完成度가 높다고 생각되는 映畫는 없습니다. 但只 客觀的으로 드러난 成果라는 側面에서 보자면 ‘西便制’가 相當한 成果를 거두었습니다.

    于先 興行面에서도 韓國映畫 史上 最高 觀客 動員 記錄을 깼죠. 젊은 世代로부터 멀어져가는 판소리가 價値 있는 우리의 音樂이라는 걸 映畫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西便制’를 契機로 全般的으로 우리 것에 對한 關心이 相當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西便制’는 왜 그렇게 興行에 成功했다고 봅니까.

    “이태원 社長에게도 이 映畫는 絶對 興行이 안될 거라고 김 빠지는 이야기를 했지요. 理事長도 同意하더군요. 團地 판소리의 맛을 映像에다가 끌어 담아 觀客한테 傳達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필름에 對해 그렇게 엄청난 反響이 일 것이라고는 全혀 豫想하지 못했습니다. 監督 立場에서 보자면 우리가 워낙 먹고사는 데 汲汲한 歲月을 살다가 經濟的으로 여유로워지면서 우리 것에 對한 關心이 싹트기 始作한 時期와 ‘西便制’의 製作이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춘향뎐’은 上映 期間이 짧아 劇場에서 보지 못하고 이番 인터뷰를 위해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춘향뎐’은 칸映畫祭 本選에 進出하면서 言論의 華麗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興行에는 慘澹하게 失敗했다.

    “너무 잘 아는 素材를 다루어 觀客들의 好奇心을 끌지 못했어요. ‘春香傳’은 14番이나 映畫로 만들어졌지요. 누구나 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素材를 映畫로 해 그런 結果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칸映畫祭 本選에 進出해 世界 市場에 配給돼 海外 僑胞들이 많이 봤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만 4個月을 上映했습니다. 美國에서는 할리우드 亞流의 韓國映畫와는 달리 評價가 썩 좋았습니다.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가 極讚했습니다. 個人的으로는 監督으로서 立地를 確實하게 굳혔고, 世界 속에서도 韓國 映畫의 位相을 높였습니다. 映畫社로서는 出血이 컸지만 크게 봐서는 所重한 것을 얻었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의 故鄕은 全南 長城이다. 판소리 發源地가 好男地方이다보니 成長期에 판소리를 들을 機會가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西便制’ 찍기 前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을 보다가 판소리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릴 만큼 關心이 적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판소리를 映畫로 만들겠다는 構想을 했습니까.

    “解放 直後에 임방울 先生 公演을 본적이 있지만 판소리를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70年代 後半에 이청준氏의 ‘西便制’를 읽고 나서 언젠가는 映畫로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祖上들이 남긴 몇 가지 안되는 것 中에 하나가 판소리인데 消滅돼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西便制’를 찍을 當時에도 판소리에 對해서는 아마추어 水準이었습니다. 아마 監督이 소리의 깊은 世界에 빠져 있었으면 ‘西便制’ 같은 映畫는 못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소리의 깊은 맛을 살려내려면 ‘西便制’와는 빛깔이 다른 映畫가 나와야 했을 겁니다. ‘西便制’가 監督의 아마추어的인 水準을 映畫에 담았기 때문에 觀客들이 理解하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하죠. 깊은 소리의 世界를 담다보면 觀客이 부담스러워집니다.

    ‘西便制’를 할 무렵에 조상현氏의 春香傳을 듣게 됐어요. 조상현氏의 소리를 짤막짤막하게 들어봤지만 5時間 넘게 이어지는 完唱을 들을 機會는 없었습니다. 누가 完唱을 들어보지 않고 映畫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해서 조상현氏의 春香傳 完唱을 들어보고 그 소리가 주는 感動에 매우 놀랐습니다. 春香傳 줄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뻔한 內容을 판소리로 하면서 사람을 엄청난 感動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西便制’를 하면서 언젠가 내가 소리에 좀더 빠지면 소리와 映像이 만나는 映畫를 한番 해보자는 決心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리와 映像의 조화로운 만남이 말로는 쉽지만 實際 하기는 宏壯히 어렵습니다. ‘춘향뎐’에서 房子가 춘향이 부르러 뛰어가는 場面을 봄 여름 初겨울로 季節이 바뀔 때마다 찍었지만 失敗를 거듭했습니다. 그만큼 어렵습니다. ‘西便制’를 찍으면서 판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 ‘춘향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귀가 그렇게 높은 水準은 아닙니다. 판소리는 內部 깊은 곳을 건드리는 感動이에요.”

    ―‘西便制’와 ‘춘향뎐’은 只今 國立劇場長하는 김명곤氏가 脚本을 썼죠.

    “조정래氏의 ‘太白山脈’을 映畫化하려고 準備하는데 文化部에서 아직 理念 問題를 客觀的으로 다룰 時期가 아니라는 理由로 製作社에 壓力을 넣었습니다. 道理 없었지요. 1年 後면 노태우 大統領이 물러나고 김영삼氏와 김대중氏 中에서 누구든 大統領이 될 것이고 그리되면 形便이 풀릴 것으로 判斷하고 한 1年 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西便制’ 생각이 난 거예요.

    1970年代에는 演技者 中에 소리를 正式으로 배운 소리꾼들이 없었어요. 東學敎主 崔時亨 先生을 그린 ‘開闢’이라는 映畫에서 김명곤氏가 全琫準 將軍 役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판소리를 너무 잘해 演技者 中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알고 지냈습니다.

    김명곤氏는 月刊誌 ‘뿌리깊은나무’의 記者로 있을 때 판소리꾼들을 많이 取材하고 이 分野의 冊을 著述했습니다. 김명곤氏를 만나 내가 ‘西便制’를 만들고 싶은데 當身의 도움이 없으면 絶對 될 수 없는 映畫이니 도와달라고 했더니 선뜻 受諾했습니다.

    偶然히 텔레비전으로 全北 南原에서 열리는 춘향選拔展 行使를 보는데 카메라가 오정해 얼굴을 탁 잡았습니다. 아마 準決勝인가에서 그 아가씨가 그 자리에서 판소리를 하더군요. 이런 演技者들을 入力하고 있다가 ‘西便制’에서 써먹게 됐죠.”

    最近 韓國映畫는 第2의 中興期를 맞고 있다. 韓國映畫는 只今까지 할리우드映畫에 從屬돼 있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었다. 政府는 한동안 放火 育成策으로 放火 4篇을 찍으면 外貨 1篇의 輸入쿼터를 줬다. 韓國映畫는 外國映畫 쿼터를 配定받기 위한 手段으로 轉落해 설렁설렁 찍고 정작 돈벌이는 輸入 外國映畫로 했다. 韓國映畫에는 低質 싸구려라는 말이 붙어다녀 觀客들로부터 漸漸 외면당했다.

    그러나 昨年에는 韓國映畫와 外國映畫의 市場 占有率이 거의 비슷해졌다. 外國映畫도 無制限으로 들어오다 보니 觀客으로 하여금 時間과 本錢 생각나게 하는 低質도 적지 않다. 映畫人들이 死活을 걸고 스크린 쿼터制 廢止를 反對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韓國은 輸入 障壁이 아니라 映畫 自體의 實力으로 할리우드에 뺏긴 市場을 收復했다.



    組暴映畫와 代理滿足


    ―韓國映畫의 未來가 안 보이던 時代가 한 때 있었잖아요. 그런데 最近에 韓國映畫가 國內 市場에서는 할리우드映畫를 누르는 現象이 나타납니다. 韓國映畫가 成功하는 理由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映畫판에 良質의 人力이 많이 들어왔어요. 外國 留學 갖다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텔레비전과 함께 成長한 映像文化 世代라고 할 수 있습니다. 映畫 만드는 資本도 過去에는 地方 配給業者들에게 依存했지만 只今은 金融會社에서 펀딩을 합니다. 1960年代를 韓國 映畫의 黃金期라고 했지요. 그 뒤로는 衰退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나는 1960年代에 監督을 해본 사람으로서 只今이 그보다 더 좋은 黃金期라고 斷言할 수 있습니다. 機械와 技術도 좋아지고 有能한 人力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손님도 늘어나 옛날에는 想像할 수 없는 많은 製作費를 投與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60年代에 黃金期를 謳歌하던 映畫가 1970年代부터 왜 衰退했다고 봅니까. 텔레비전의 影響이 크지 않았나요.

    “勿論 텔레비전 影響도 있었지만 朴正熙 政權이 決定的으로 숨筒을 조인 거예요. 映畫는 어떤 素材든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야 손님이 모입니다. 그런데 安保 環境 等을 理由로 도무지 映畫로 만들 素材를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製作社들은 國産映畫로는 打算을 맞출 수가 없었지만 1年에 4篇 만들면 映畫輸入 쿼터를 주니까 날림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 時節에는 1年에 輸入되는 外貨가 20篇 程度에 不過하니까 어지간하면 興行이 되었습니다. 韓國映畫가 숨쉴 空間이 없었습니다. 甚至於 優秀映畫라고 찍어 輸入 쿼터만 따먹고 劇場에서 開封도 못해보고 묻혀 버리는 일이 非一非再했습니다.”

    ―最近에 ‘親舊’ ‘組暴 마누라’ ‘新羅의 달밤’ 等 觀客 動員에 成功한 映畫 中에는 組暴 시리즈가 많습니다. 映畫를 보면서 실망스러운 대목이 있어요. 마피아 映畫에도 ‘대부’ ‘언터處블’ ‘애널라이즈 디스’ 等 名畫가 많지요. 우리는 이 水準에 顯著히 못미치는 것 같아요. 林監督도 ‘將軍의 아들’이라는 組暴 映畫를 찍어 히트한 바 있지만 組暴映畫의 流行이 언제까지 갈 거라고 豫想하십니까.

    “組暴 映畫를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합니다. 世上이 너무 어지럽다보니까 힘의 論理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 代理滿足을 하는 觀客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代理滿足에서 그쳐야지 憧憬의 對象이 돼서는 안됩니다. 組暴 映畫가 히트하다가 流行처럼 수그러들면 코미디나 멜로 드라마로 바뀌어갈 겁니다. 組暴 시리즈가 언제까지 人氣를 누린다고 할 수는 없죠. 代父 같은 좋은 映畫가 안나오는 것은 아직 우리 映畫界에 熟鍊된 人的 資源과 尖端 技術 機械가 不足하기 때문입니다.”

    ―‘親舊’에서 殺人法을 아주 詳細하게 指導하는 場面이 나옵니다. 사람을 確實하게 죽이려면 허파에 칼을 꽂아서 90도 틀어주라는 式으로. 할리우드의 잘된 마피아 映畫를 보면 너무 끔찍한 場面은 省略하거나 暗示로 끝내잖아요. ‘親舊’를 보면서 果然 저런 殺人技法을 具體的으로 가르치는 場面들이 映畫에 그대로 나와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映畫뿐만 아니고 텔레비전도 그런 機能을 하고 있잖습니까. 假令 사람을 拉致해 信用카드를 使用해 돈을 빼내는 具體的인 內容들이 나오잖아요. 映畫뿐만 아니고 텔레비전도 社會에 對해서 밝고 健康한 쪽으로 이바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한 事件들이 頻發하다 보니 유난히 그런 생각이 切實해집니다.”

    林監督은 1970年代까지는 興行師의 要求에 따라서 映畫를 마구 찍던 싸구려 低質 監督이었다고 스스로 述懷한다. 映畫 두 篇을 同時에 ‘街케모찌(겹치기)’로 찍었다는 傳說도 있다. 1962年 데뷔해 1972年까지 10餘 年 동안 50餘 篇을 찍었다. 한해에 平均 다섯 篇 꼴이다. 只今은 2年에 한 篇 만들고 있으니 그때는 엄청나게 찍어댔다고 할 수 있다.

    ―액션 映畫監督에서 藝術映畫 監督으로 轉換한 契機는 무엇이었습니까.

    “映畫撮影이 스케줄대로 順坦하게 進行되지 않고 어떤 緣由로 撮影이 늦어져 새 作品과 時期가 겹치면 가케모찌를 했습니다. 完全히 興行만을 目的으로 찍은 虛荒한 映畫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아무런 關係도 없는 虛構의 쓰레기들이었습니다.

    10餘 年 그런 生活을 하면서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虛荒한 映畫만 찍다보면 내 人生도 虛荒한 것으로 끝날 게 아니냐는 自覺이 들기 始作했습니다. 삶 自體의 目的을 映畫 만들기에 두고 있는 나의 自尊心을 세우기 위해서도 거짓 없는 映畫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60年代 後半부터 方向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映畫를 製作하는 現實이 그렇게 閑暇하지 않았습니다. 映畫 製作者들이 立稻先賣式으로 脂肪 版權을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湖南 嶺南 忠淸 講院 京畿 等의 配給業者들이 自己 地域의 版權料를 미리 내고 사는 거죠.

    3流 監督으로 살던 사람이 眞摯한 作品을 하고자 해도 누가 믿어주나요. 低質 映畫를 찍는 監督으로 꼬리票가 붙어있었으니까. 그래서 變身의 몸짓으로 ‘雜草’(1973)라는 映畫를 製作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地方業者들에게 版權을 팔아 直接 製作했는데 興行에서 慘敗했습니다. 그러나 저 親舊가 眞摯한 映畫도 찍을 수 있는 監督이라는 印象을 심어주는 成果를 거두었습니다.

    只今까지 만들어 온 作品 性向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10餘 年 동안 低級한 趣向이 體質이 돼 있었지요. 이런 毒素를 빼내는 作業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1970年代는 韓國映畫史上 最惡의 暗黑期였습니다. 維新政權 때는 興行과는 無關하게 團地 健全한 映畫를 찍어 篇 數를 채우거나 쿼터가 配定되는 映畫祭에 出品해 賞을 타면 됐습니다. 興行에 神經을 쓰지 않아도 되는 狀況에서 한 10年 동안 作品에서 低級한 趣向을 빼냈지만 그러다보니까 正말 映畫가 재미없어져요. 굵직한 主題는 있으되 映畫로서의 興味는 없는, 뼈만 있고 살은 없는 映畫를 만들었습니다. 1970年代에 10餘 年間 그런 過程을 거쳐 1980年代 들어와 ‘曼陀羅’(김성동 原作) 같은 映畫를 하게 됐습니다.”

    ―映畫 ‘太白山脈’은 原作하고 指向性이 다르다는 評價를 받았습니다. 조정래의 小說 ‘太白山脈’은 左派 이데올로기를 美化했다는 理由로 檢察 搜査를 받기도 했지요. 小說을 映畫化할 때 原作에 充實하려고 努力하는 便입니까. 아니면 새롭게 創作한다는 氣分으로 臨합니까.

    “‘曼陀羅’도 原作이 하고자 했던 테마와는 다른 내 생각을 넣었기 때문에 原作者는 不滿이 많았어요. 原作은 主人公이 小乘的 修道를 해가다가 大乘的 世界로 들어가는 主題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小乘的이든 大乘的이든 關係없이 各(覺)을 向해 熾烈하게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原作이 해놓은 걸 일부러 비틀 理由는 없지만 테마를 보는 見解가 原作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假令 조정래의 小說 ‘太白山脈’은 조금 左偏向的인 느낌이 드는 作品입니다. 左와 右의 衝突, 그런 混亂의 時代를 體驗한 世代가 直感的으로 갖는 생각이 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世上을 具現하기 위한 方便으로 사람의 犧牲을 要求하는 것에 對한 懷疑라고 할까요. 6·25라는 同族끼리의 慘澹한 戰爭을 일으켜 左와 禹 쪽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國土는 荒廢해지고 사람들한테 엄청난 犧牲만 要求했던 거죠.”

    林監督의 집안은 左便에 加擔하고 있었다. 林監督의 할아버지 3兄弟 中 큰 할아버지의 둘째아들(堂叔)李 日本 留學時節 社會主義에 물들어 獄苦를 치르고 歸國했다. 그의 影響으로 집안의 젊은이가 모두 社會主義 運動에 나섰다. 饌卓 反託을 두고 時局이 들끓던 時節에 林監督은 어른들의 指示에 따라 서투른 글씨로 ‘信託統治 支持하자’는 戰團을 만들어 警察 모르게 洞네 곳곳에 뿌리고 다녔다.

    빨치산이던 三寸은 補給鬪爭(食糧調達)에 나섰다가 붙잡혀 大邱刑務所에서 죽고, 아버지도 빨치산에 加擔해 山生活을 했다. 戰爭이 끝날 무렵 아버지는 自首했지만 社會와 絶緣한 生活을 하며 病을 앓다가 1965年에 作故했다. 林監督은 1989年 모스크바映畫祭에 參席했다가 智異山 빨치산들이 建設하려고 했던 社會主義 國家의 實體를 씁쓸하게 觀察할 機會가 있었다.

    ―‘太白山脈’은 軍警에 쫓기고 굶주림과 銅像에 시달리며 智異山 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는 左翼 理念의 鬪士들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목숨을 바쳐 建設하려던 社會主義 祖國 北韓의 모습을 보면 地下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안은 地主 집안이었습니다. 집안의 根據地가 全南 長城郡 南面이었지만 할아버지가 羅州(只今의 光州市 평동)에도 位土를 갖고 있어 小作料를 받아들였습니다. 只今도 小作人들이 세워놓은 할아버지 頌德碑가 남아 있어요. 파묻어 버려야 할 物件이긴 하지만. 堂叔이 日本 메이지大學에 留學가서 獨立運動의 一環으로 共産主義 運動을 했어요.

    堂叔은 日本에서 獄苦를 치러 國家報勳處의 獨立有功者 名單에 들어가 있습니다. 湖南地方의 左翼運動은 農民들이나 霧散大衆들로부터 始作된 것이 아닙니다. 留學 다녀온 地主집안의 子弟들이 先導的 役割을 했습니다. 地主階級의 사람들이 理想的인 思考에서 平等社會를 부르짖으면서 無産大衆의 便에 섰던 것입니다. 純粹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분들의 限 많은 삶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亡하기 直前의 東歐 國家나 蘇聯을 둘러본 所懷가 複雜하더라고요. 智異山 一帶에서 共産主義 運動을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꿈꾸던 社會主義 理想鄕이 그런 모습으로 轉落하리라고 想像이나 했겠어요.”

    ―具體的으로 蘇聯의 어떤 모습에 對해서 크게 失望했습니까.

    “全體主義가 갖는 劃一性, 非能率性이라고 할까요. 個人에게 自由가 許容되지 않고 組織에 눌려 살았던 사람들의 生活態度가 寒心했습니다. 社會主義 이데올로기가 發展的으로 實踐되지 않고 그 自體의 矛盾 때문에 形便없이 주저앉은 實體를 보고 돌아온 거지요. 智異山 빨치산들이 꿈꾸던 以上이 그런 結果를 가져올 줄 事前에 알았겠어요? 何如튼 蘇聯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理想世界를 具現하겠다고 個人의 삶은 勿論 집안을 風飛雹散냈던 사람들이 피땀 흘린 結果가 그런 慘澹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衝擊을 넘어 虛脫感을 느꼈습니다.”



    “이청준 小說 좋아한다”


    ―이청준氏 小說 中에서 ‘西便制’와 ‘祝祭’를 映畫로 만들었지요.

    “이청준氏는 얄팍한 現象이 아니라 우리 社會의 根源的인 데 눈을 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 小說을 보고 있으면 믿음이 갑니다. 外國 小說은 읽을 틈도 없고 別로 안 읽어요. 映畫의 素材를 찾는 努力이기도 합니다. 話題가 되는 것은 봅니다. 最近에 金訓氏가 쓴 ‘칼의 노래’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시나리오 作家들이 많았으면 小說 쪽에 그렇게 기웃거리지 않았을 겁니다. 시나리오 쪽이 워낙 弱해서….”

    ―2000年 11月 北韓에 들어가 平壤에 있는 朝鮮藝術映畫撮影所를 둘러보고 왔지요. 北韓의 監督, 俳優하고 對話를 많이 나누셨을 텐데…. 김정일 委員長은 映畫狂이어서 北韓의 映畫 水準을 높이는 데 寄與했다지요.

    “北韓의 映畫人들과 別로 말할 機會가 없었어요. 撮影所에서는 우리를 맞을 準備를 꽤 했더군요. 前에 나왔던 映畫를 撮影하고 錄音하는 過程을 一一이 再演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物資가 不足해 어려움이 많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北韓의 映畫人들이 映畫에 關心이 깊은 指導者를 만난 것은 幸運이지요.”

    ―或是 機會가 닿으면 北韓하고 合作 映畫를 찍어볼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可能하다면 北韓의 人力이나 自然을 活用해 映畫를 찍어보고 싶은 欲心은 있어요. 具體的인 計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缺禮인 줄은 알지만 讀者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요. 이番 ‘吹花癬’에서는 監督料로 얼마나 받았습니까.

    “韓 1億원.”

    한 1億원과 正確히 1億원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얼마만한 金額의 差異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韓國에서 손 꼽는 名監督치고는 輸入이 높은 便이 아니다. 1年에 한便 또는 2年에 한便을 찍으니 年俸으로 치면 5000萬∼1億원 程度다.

    ―생각보다 적게 버네요.

    “그렇죠. 監督 生活하려면 쓰임새도 많아요. 이것 저것 資料 蒐集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어가요. 興行이 잘되면 보너스를 타는데 近者에 통 안돼서…(웃음)”

    ―西便制 때는 보너스를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若干 받았어요.”

    夫人에게 숨겼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昨年 1月에 받은 第6回 佚民 藝術賞 賞金 5000萬원은 新聞에 記事가 나는 바람에 夫人이 통째로 押留해갔다.

    否認 채혜숙氏는 MBC 탤런트 3期 公採 出身으로 映畫俳優로 活動했다. 林監督의 映畫 두 篇에 出演했다. 芳年 20歲에 林監督의 ‘尿檢’(1971)에 出演하면서 銀幕에 데뷔했다. 채령이라는 藝名을 林監督이 直接 지어주었다. 8年 뒤인 1979年 結婚할 때까지 結婚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林監督이 44歲 때 비로소 家庭을 꾸렸다. 新婦와의 나이 差異는 15年.

    “無名監督 時節이라 家庭을 꾸려나갈 만한 自身도 없었고, 아내가 예쁘다보니 奢侈에 빠져들면 뒷堪當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선뜻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누가 먼저 좋아한 게 아니고 서로 같이 좋아했죠. 워낙 나이 差異가 많고 나 自身이 別 볼일 없는 無名監督에다가 모아놓은 財産이 없으니 躊躇하게 됐지요. 時間을 오래 끌다보니 아내 쪽에서 더 積極性을 보인 것은 事實이지요.”

    ―大韓民國에서 한다 하는 女俳優를 主演으로 등장시켜 映畫를 찍다보면 或是 否認한테 숨기는 로맨스 같은 것도 있었을 텐데요.

    “映畫판에 예쁜 女子들이 많잖습니까. 로맨스가 벌어질 可能性은 充分히 있지요. 그러나 없었습니다. 없었던 理由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내가 俳優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映畫에 愛着을 갖기 때문이지요. 나도 젊고 예쁜 女子를 보면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아내가 俳優 出身이어서 집사람 體面도 생각해야 하고…. 집사람 모르게 감쪽같이 하기가 어렵지요.

    假令 내가 어떤 女俳優와 좋게 지내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다음에 그 俳優를 또 써야 되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내가 하고자 하는 映畫보다는 그 女俳優에 맞는 役割이 있는 素材를 求하려고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亡하게 돼요.”

    그가 順順히 自首할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期待하지 않았다. 林監督의 말이 眞實일 수도 있고, 가장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그의 아내일 것이다. 한番 더 確認 射殺을 試圖해봤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映畫에 出演시켜 달라고 다리 붙잡고 매달린 映畫 志望生이나 新人俳優들은 없습니까.

    “젊어서부터 내가 性格的으로 相當히 차다는 評을 듣습니다. 그런 付託이 통하지 않는 監督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不利할 境遇도 없지 않습니다.”

    내가 少時적人 1968年 정소영 監督의 ‘미워도 다시 한番’李 空前의 빅 히트를 했다. 서울 人口가 400萬名일 때 100萬名이 이 映畫를 보고 울었다. 申榮均과 전계현(本妻), 문희(愛人)의 三角關係를 다룬 映畫다.

    ―最近 偶然히 ‘미워도 다시 한番’을 다시 봤어요. 그런데 눈물 代身에 웃음이 자꾸 나와요. 멜로드라마가 코미디로 바뀐 것이지요. 文化의 코드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지…. 몇十年 사이에 왜 그런 現象이 일어난다고 보세요.

    “어떤 時流나 流行에 맞추어 作品을 만들면 生命이 짧아요. 그러나 時流나 流行과 關係 없는 素材를 찍으면 生命이 깁니다. 얼마 前 샌프란시스코映畫祭에서 平生功勞賞을 준다고 해서 갔을 때 내 回顧榮華傳을 했습니다. 거기서 1986年 作品 ‘씨받이’를 上映하더군요. 15年 동안 어디서 흘러다닌 필름을 求했는지 畵面에서 繼續 비가 내려 영 憫惘했습니다. 한달 後에 觀客이 뽑은 最高人氣賞을 받았다는 連絡이 오더군요. 샌프란시스코映畫祭가 競爭을 시켜 賞을 주는 映畫祭는 아니지만 10年도 훨씬 넘은 필름이 아직도 그런 生命力을 가지고 있는 것은 流行이나 時流와 關係 없는 映畫이기 때문이지요.”

    ―私的인 親分 關係를 떠나 韓國 監督 中에 映畫를 잘 찍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監督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있긴 있어요. 그런데 내가 누구를 찍어서 얘기하면 後輩 監督들이 싫어할 테니까 말은 못합니다. 좋은 監督들이 分明히 있습니다.”

    ―最近에 재미있게 본 國內 映畫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히트 映畫를 다 본다고 할 수는 없지만 大槪는 봐요. 이창동 監督의 ‘薄荷沙糖’은 相當히 좋은 映畫입니다. 이창동 監督은 本來 小說을 쓰던 사람인데 映畫도 잘 찍었어요. 배용균 監督의 ‘達磨가 東쪽으로 간 까닭은’도 좋고요. 이광모 監督의 ‘아름다운 時節’도 印象에 남아요.”

    ―外國映畫 中에서 記憶에 남는 映畫 몇 篇을 推薦해주시죠.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르네 크레망의 ‘太陽은 가득히’,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休日’, 존 포드 監督의 西部劇을 記憶하고 있습니다.”

    ―映畫 찍다가 俳優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 없습니까.

    “汚損 윌슨 같은 사람은 뛰어난 俳優이자 監督입니다. 찰리 채플린도 그렇고…. 俳優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나를 너무 잘 알거든요. 얼마나 俳優의 素質이 없냐 하면 取材온 寫眞 記者들한테 數없이 寫眞을 찍혔지만 아직도 수줍음을 탑니다. 이런 마당에 배우는 焉敢生心이죠.”

    ―100番째 作品으로 어떤 걸 찍고 싶으십니까.

    “나의 境遇 100番째 作品이라는 것에는 全혀 意味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1960年代에 말도 안되는 作品을 不知其數로 찍었습니다. 그런 것까지 合해서 100番째 作品이라고 헤아린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篇 數가 갖는 意味는 別로 없다고 봅니다.”

    林監督은 1960年代에 날림으로 찍은 作品은 잘 記憶하지 못한다. 林監督이 몇年 前에 偶然히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1960年代 映畫가 放映되고 있었다. 처음 보는 映畫 같기도 하고 어디서 한番 본 映畫 같기도 했다. 中間 쯤에서 보기 始作해 뒤에 字幕을 보니까 그가 監督한 作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잊어버릴 수 있냐며 周圍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林監督처럼 부끄러운 일에 對해 忘却의 機制가 完璧하게 作動하는 것은 精神健康에 有益하다.

    ―‘吹花癬’ 다음 作品으로 構想하신 건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이거 끝나고 한番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外國 映畫 中에는 公害, 吸煙의 弊害, 獨裁政權下의 民主化 運動 等 政治 社會問題를 다루면서도 作品性이 뛰어나고 興行에도 成功한 映畫가 많습니다. 朴正熙 전두환 前大統領 時節에는 그런 映畫를 만들기가 不可能했지만 只今은 素材 選擇이 아주 자유로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韓國에서는 社會 問題를 映畫和解서 興行에 成功한 境遇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을 찍은 박광수 監督은 社會問題를 아주 깊이 파고 듭니다. 優秀한 作品들을 만들고도 興行에는 成功하지 못했습니다. 近者에 와서 그런 作品이 눈에 안 띌 만큼 製作 篇 數가 줄었다는 거죠. 映畫社 쪽이 아닌 獨立映畫 쪽에서는 只今도 하고 있을 겁니다. 아주 적은 豫算으로 自己 所信대로 찍는 거죠.”

    映畫를 찍다보면 利益團體들의 豫想치 못한 反撥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林監督은 1983年 태흥영화사 創立作品으로 ‘比丘尼’를 製作하다가 佛敎 宗團의 反對에 부딪쳐 中途에 抛棄했다. 이렇게 되면 製作社가 莫大한 損失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는 ‘太白山脈’을 撮影하면서도 右翼團體들의 執拗한 妨害工作에 시달렸다. 태흥영화사를 통해 “빨갱이의 子息이 이런 映畫를 만들어도 되냐”는 壓力이 公公然하게 들어왔다.

    “韓國은 映畫 만들기에 참 힘든 나라예요. 假令 醫師를 素材로 다루면 醫師協會에서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歷史的으로 確實한 內容으로 史劇을 찍었는데 自己 祖上을 부끄럽게 그렸다고 門中이 펄펄 뛰었습니다. 참 映畫 해먹기 힘든 나라입니다. 只今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假令 ‘투캅스’ 같은 映畫는 警察官의 非理를 거리낌없이 드러냈는데도 큰 問題없이 받아들여졌지요.”

    ―이태원 社長, 임권택 監督, 定日性 撮影監督을 가리켜 老人 트리오라고 하는데 氣分 나쁘지는 않습니까. 젊은 觀客들에게 받아들여지는 作品을 만드는 팀워크로서는 問題가 없지 않나요. 製作 監督 撮影이 全部 60代인데….

    “우리가 젊은이 趣向의 感覺的인 映畫를 찍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거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런 感覺이나 流行과는 無關한 映畫를 찍고자 합니다. 興行시키기 위해 젊은 感覺에 迎合해 映畫를 찍고 싶지도 않고 그럴 나이도 아니예요.”

    이태원 社長은 ‘吹花癬’에서 端役으로 暫時 登場한다. 張承業이 기와지붕 龍마루에 걸터앉아 올라가 술을 마시는 場面에서 지나가던 선비로 登場해 “여보게 勝業이. 기왓張 깨지네. 내려와 이 사람아”라고 한 마디 하고 사라진다. 映畫에서 有名한 사람이나 監督 製作者 等이 잠깐 端役으로 나오는 技法을 카메오라고 한다. 西洋의 名畫 中에도 畫家의 얼굴이 숨은 그림 찾기 처럼 들어가 있는 그림이 있다. 가벼운 재미를 주는 藝術 技法이다.

    ‘吹花癬’ 製作에 投入된 55億원은 시네마서비스가 하나銀行 SBS MVP 創投社 等을 끌어들여 投資했다. 利益金을 태흥영화사와 映畫 投資會社인 시네마서비스가 4對 6으로 나누어 갖는다. ‘춘향뎐’의 興行 失敗로 어려움을 겪은 태흥영화사로서는 危險負擔이 적은 投資 方式을 選擇했다고 할 수 있다.

    ―映畫 以外에 趣味는 뭡니까.

    “趣味랄 것이 특별하게 없는데요. 어디가 순대국 잘한다 곰湯 잘한다 그런 데 쫓아다니는 재미 外에는 別로 다른 趣味가 없어요.”

    태흥영화사 트리오는 食道樂이라는 趣味를 共有하고 있다. 아침 9時부터 인터뷰를 하다보니 點心때가 되었다. 林監督이 點心을 함께하자고 해 따라나섰다. 이태원 社長이 運轉하는 車에 定日性 撮影監督 林監督과 함께 탔다. 車에 오르고 나니 江南 예술의전당 近處에 有名한 돈가스 집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돈가스를 먹고 나서 近處 洋服店에서 칸映畫祭에서 입을 턱시도를 맞추러 가는 길이었다.

    칸映畫祭를 取材하려면 記者들도 턱시도를 입어야 立場이 可能하다. 洋服店은 세 사람에게 턱시도를 만들어 空짜로 貸與해주고 칸映畫祭에서 돌아온 뒤에는 돌려받는다. 洋服店 陳列欌에 林監督이 입고 칸映畫祭에 參席한 턱시도라고 써서 걸어놓을 計劃이란다. ‘吹花癬’李 뜨면 턱시도 洋服店 弘報에 도움이 될테니 칸映畫祭에 實로 여러 業種의 사람들이 목을 매고 있는 셈이다.

    내가 “過去에는 나는 韓國映畫를 보지 않았는데 只今은 좋다는 評判이 도는 作品은 가끔 본다”고 말하자 이 社長은 “어디서 情報를 얻느냐”고 물었다. 亦是 製作者는 關心이 다르다. 내가 逆으로 인터뷰를 當하는 處地가 됐다.

    “기초적인 情報는 新聞 文化面이나 廣告에서 얻지만 가장 强한 影響을 미치는 것은 亦是 보고 나온 사람들의 입所聞이지요.”

    林監督 世代 中에는 植民地와 戰爭 그리고 가난의 混亂 속에서 正規 制度圈 敎育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드물다. 이 點에서는 林監督도 마찬가지다. 한 分野를 繼續 파고들며 硏究하고 實驗하며 쌓은 現場 實力은 正規 敎育課程의 博士學位에 비할 바가 아니다.

    “最終 學歷이 中學校 3學年 中退입니다. 光州에 있는 숭일中學校. 6·25 以後 左翼 附逆者의 家族이 버티고 살아날 길이 없던 時代였습니다.”

    林監督은 釜山 避亂 時節에 美軍部隊에서 흘러나오는 中古 軍靴를 修理해서 팔아 生計를 이었다. 收復 後 美軍 軍靴 販賣商들 中에 映畫事業에 뛰어든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들을 고리로 林監督도 映畫판에 들어와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雜役夫로 映畫人生을 始作했다.

    ―林監督은 映畫를 만들고 나면 新聞에 인터뷰도 많이 하고 映畫評에도 오르내립니다. 新聞의 映畫評이나 映畫擔當 記者에 對한 不滿은 없습니까.

    “映畫擔當 記者도 專門人의 眼目을 가져야 되는데 會社에서 막 돌리잖아요. 映畫를 겨우 알만하면 다른 데로 갑니다. 映畫를 바르게 읽어내는 記者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監督이 무엇을 했는지, 作品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記者의 資質 問題가 아니고 專門記者가 必要하다는 거죠. 外國에는 50~60代까지도 映畫 한 장르에만 매달리는 記者들이 많잖아요.”



    두 아들 모두 映畫 志望生


    膝下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얼마 前 除隊한 長男 同准은 동국대 演劇映畫科 2學年에 在學中인데 監督 志望生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고 한다. 둘째 東齋는 단국대 演劇映畫科를 休學하고 軍服務中이다. 둘째는 俳優가 되고 싶어한다. 林監督 夫婦는 子女들이 힘들고 어려운 映畫판으로 들어오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映畫라는 遺傳子가 子女들 속에도 들어가 있는 模樣이다.

    “내가 여기까지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데는 엄청난 努力과 忍耐가 必要했거든요. 애들한테 그런 끈氣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原因 提供을 내가 했고 저희들이 좋다고 하니까 그냥 놔두고 있는 거예요.”

    ―신영균氏처럼 俳優들 中에는 돈을 번 사람이 있는데 監督은 어떤가요. 監督과 製作을 겸하는 분들도 있던데….

    “監督들 中에 크게 돈을 번 사람도 있어요. 강우석 監督이 ‘투캅스’, 강제규 監督이 ‘쉬리’를 製作해서 大舶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댈 수 없지만 더러는 製作에 손 댔다가 다 털어먹고 주저앉은 監督이 더 많죠.

    映畫를 잘 만드는 사람이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우리 韓國映畫에 좋은 映畫를 보탰을 사람들인데 그만 주저앉았다는 아쉬움이 남는 監督들이 있어요. 나는 그런 곳에는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關心이 없어요. 큰돈은 못 벌지만 오래도록 밀려나지 않고 監督生活을 하고 있는 利點도 있죠.”

    林監督은 한番 撮影을 마친 映畫는 잘 보지 않는다. 一旦 製作을 마친 映畫를 다시 보는 것이 苦痛이라고 한다.

    “저런 場面은 그 水準밖에 생각을 못하는가? 더 잘해낼 수 있었던 것을 겨우 그 模樣으로 찍었는가? 이런 後悔가 밀려오지요. 어떤 데는 대충 넘어가다가 두고두고 後悔합니다. 깜빡 失手할 때도 있어요.”

    인터뷰에 앞서 林監督의 말이 짧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보다 質問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 質問의 量이 普通 사람 같으면 對答하는 데 세 時間은 걸릴 거라고 計算했는데 두 時間 만에 바닥났다.

    ―인터뷰가 豫想보다 짧아졌습니다. 내가 신동아에서 받는 原稿料 收入이 줄어들 것 같아요.

    “더 보탤 게 없으니까요. 제가 지어서 말하질 못해요. 기억나는 것들을 整理해서 재미있게 말씀드려야 되는데 그게 안돼요. 지나간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린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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