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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北韓 核 對決의 뿌리는 6·25戰爭|新東亞

美國·北韓 核 對決의 뿌리는 6·25戰爭

韓半島 核 威脅 分析

  • 정욱식| 平和네트워크 代表

    入力 2012-01-20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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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戰爭 때 美國 核 威脅이 北 核 開發 刺戟
    • 核에 對한 트루먼의 放心과 스탈린의 오만으로 戰爭 勃發
    • 美 開戰 初부터 核武器 使用 檢討
    • 核 威脅으로 ‘코리아 아마겟돈’ 危險 尙存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6·25戰爭 當時의 落下傘 部隊.

    “1950年代부터 오바마 行政府에 이르기까지, 美國은 反復的으로 北韓에 對해 核武器 使用을 考慮해왔고, 計劃해왔으며, 威脅해왔다.”

    親北左派의 主張처럼 들리겠지만 美國 AP通信이 祕密 解除된 美國 文書를 分析해 내린 結論이다. 그 餘波는 무엇인가. 日本 外務省에서 核軍縮 및 對北政策을 擔當했던 美네 要視키가 이 通信을 통해 한 말에서 斟酌해볼 수 있다. “美國의 核 威脅은 北韓에 核武器를 開發·保有할 口實을 주고 있다. 北韓은 이러한 基本的인 問題가 解決되지 않는 限, 核武器를 抛棄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不便한 眞實’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認定하지 않는 限, 死活的인 利害가 걸린 北核 問題 解決의 실마리를 찾긴 어렵다.

    그래서 다시 6·25戰爭에 注目한다. 北核의 ‘뿌리’가 바로 이 戰爭과 그 遺産에 있기 때문이다. 美國은 開戰 初期부터 停戰協定 締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銃聲이 멈춘 以後에도 持續的으로 北韓에 核 威脅을 加해왔다. 이는 當時 美 陸軍部 次官補와 次官으로 있었던 벤데트센(Karl R. Bendetsen)李 “開戰 初期부터 美國은 核武器 使用을 檢討했고, 이와 關聯된 暗號名(code name)도 있었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6·25戰爭과 核武器의 關係

    이러한 脈絡에서 볼 때, 6·25戰爭과 核武器 사이의 關係를 밝히는 作業은 北韓의 核 武裝과 美國의 核 雨傘 政策이 맞서 있는 오늘날의 韓半島 核問題에도 重大한 含意를 준다. 北韓의 對美 威脅 認識의 뿌리는 美國의 核 使用 威脅을 비롯한 6·25戰爭 當時의 經驗이 크게 作用하고 있고, 美國이 6·25戰爭 以後 60年 넘게 對北 先制 核 攻擊 戰略을 固守하는 것 亦是 6·25戰爭의 延長線上에서 把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6·25戰爭이 ‘世界 戰爭’이었음을 理解하기 위해서라도 이 戰爭의 勃發, 展開過程, 停戰協定 締結, 그리고 停戰體制에서 核武器가 어떤 役割을 했느냐를 理解하는 것은 대단히 重要하다.



    6·25戰爭과 核武器의 關係에 關聯해 여러 質問을 던져볼 수 있다. 6·25戰爭 當時 美國의 核 威脅은 實際로 있었을까? 美國이 歷史上 처음으로 ‘이길 수 없는 戰爭’에 直面하고도 核武器를 使用하지 않은(혹은 못한) 理由는 무엇일까? 美國이 애치슨 라인(1950年 美國 國務長官 애치슨이 宣言한 美國 極東防衛線)에서 韓國을 除外한 背景에는 核 獨占에 對한 自信感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反對로 스탈린이 立場을 바꿔 김일성의 要求를 들어준 데에는 自身의 核 武裝이 美國의 介入을 抑制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美國이 38線을 넘어 北進(北進)을 敢行한 데에는 自國의 核 威脅이 中國의 介入을 遮斷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거꾸로 마오쩌둥이 美國으로부터 核 報復을 當할 憂慮가 있었음에도 參戰을 强行한 理由는 무엇일까? 美國의 主張대로 自國의 核 威脅이 共産軍의 戰爭 意志를 꺾어 休戰協定에 到達할 수 있었던 힘이었을까? 美國의 核 攻擊 움직임에 對해 南韓의 李承晩과 北韓의 김일성은 어떻게 反應했을까? 6·25戰爭을 거치면서 美國의 核戰略에는 어떤 變化가 일어났고, 이것이 韓半島를 비롯한 地區 地政學에 어떤 影響을 주었을까?

    勿論 이 글에 이러한 質問에 對한 모든 對答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最近 祕密 解除된 美國 文書들을 追跡하고 外國 硏究者들의 硏究 成果를 分析해본 結果, 6·25戰爭과 核武器의 關係는 相當히 密着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25戰爭, ‘核 時代’의 첫 戰爭

    6·25戰爭은 核武器라는 ‘絶對 武器’를 保有한 두 ‘슈퍼 파워’의 對決이었다는 點에서 以前 戰爭들과는 質的으로 그 性格을 달리한다. 蘇聯의 核 實驗 成功으로 美國 核 獨占 時代가 幕을 내린 時點에 터진 6·25戰爭은 核에 依한 勝戰의 誘惑과 相互間 絶滅의 恐怖가 交叉하는 地點에 있었다. 戰爭 開始 當時 美國은 約 300個의 核爆彈과 이를 運搬할 수 있는 260餘 基의 戰爆機를 갖고 있었고, 有事時 蘇聯에 集中的으로 使用한다는 計劃도 갖고 있었다. 戰爭 勃發 10個月 前에 核實驗에 成功한 蘇聯도 20個 程度의 原子爆彈을 保有하고 있었다. 美國의 軍 歷史學者인 스펜서 터커가 “冷戰時代의 첫 實戰인 同時에 核 時代의 첫 制限的 戰爭이었다”고 6·25戰爭의 性格을 規定한 것도 이러한 脈絡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에 引用한 美國의 歷史學者 존 루이스 가디스의 假想 에세이는 ‘글로벌 아마겟돈’의 危險을 안고 있었던 6·25戰爭의 特徵을 잘 보여준다.

    “1950年 12月 2日, 맥아더는 트루먼의 委任에 따라 美 空軍에 韓半島로 進軍하는 中國軍을 向해 5發의 核爆彈 投下를 指示했다. 核爆彈이 뿜어낸 閃光과 爆發은 中國軍의 攻擊을 멈추게 했다. 約 15萬 名의 中國軍이 死亡했고, 美軍과 韓國軍 捕虜 相當數도 목숨을 잃었다. 나토 會員國들은 事前 相議 없이 核武器를 使用한 美國을 强力히 非難했고, 6個月 前 韓國 防禦를 위해 採擇된 유엔 安保理 決議案을 無效化하기 위한 決議案을 提出했지만, 美國의 拒否權 行使로 霧散됐다.

    核 報復에 나서달라는 中國의 壓力에 따라 蘇聯은 美國에 韓半島에서 모든 軍事行動을 中之下든, ‘가장 深刻한 結果’를 監修하든 48時間 안에 決定하라는 最後通牒을 보냈다. 12月 4日, 48時間이 지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離陸한 2基의 蘇聯 戰爆機는 釜山과 仁川에 核爆彈을 投下했다. 이 두 곳은 유엔軍 支援의 核心 據點이었다. 맥아더는 蘇聯의 核 攻擊이 自身이 行한 것보다 2倍 以上의 死亡者를 내자, 週日 美空軍에 블라디보스토크와 中國의 선양 및 하얼빈에 核爆彈을 投下하라고 指示했다. 이러한 消息은 蘇聯 空軍機의 作戰 範圍에 있는 日本과 유럽 國家들의 激烈한 反美 示威를 惹起했고, 英國·프랑스·베네룩스 3國은 나토에서 脫退하겠다고 宣言했다. 그러나 이미 獨逸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蘇聯의 核爆彈이 떨어진 뒤였다.”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유엔 安保理 專門家 報告書에 收錄된 寧邊 核施設 衛星寫眞. 美國 週刊誌 ‘위클리스탠더드’ 홈페이지.



    戰爭 勃發도 核武器 關聯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北核 6者會談 南側 首席代表인 위성락 外交通商部 韓半島平和交涉本部長(오른쪽)과 北側 首席代表인 李容鎬 外務省 副相이 2011年 9月 21日 午前 中國 베이징 長安俱樂部에서 만나 握手하고 있다.

    6·25戰爭의 勃發 背景과 原因에 核武器 問題가 있다. 核의 힘을 믿었던 트루먼의 放心과 스탈린의 傲慢이 交叉하는 地點에서 이 戰爭이 勃發했기 때문이다. 第2次 世界大戰을 거치면서 暴騰한 軍事費를 줄여 經濟와 福祉로 轉換하고자 했던 트루먼 行政府는 核武器에 對한 依存度를 높이는 것이 低廉하게 軍事 態勢를 維持할 수 있는 方法이라고 생각했다. 當時 美國이 애치슨 라인에서 韓國을 除外했던 것도 核武器의 힘을 믿었던 탓이 컸다.

    祕密 解除된 中央情報局(CIA)의 文書들을 보면 美國은 6·25戰爭 勃發 1週日 前까지 北韓의 全面 南侵 可能性을 낮게 봤다. 北韓은 ‘蘇聯의 꼭두각시’에 不過하고, 蘇聯은 “第3次 世界大戰의 前奏曲”李 될 北韓의 南侵을 指示할 程度로 準備되어 있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反映하듯 極東司令部는 “美國의 軍事的 힘에 依해 全滅”될 覺悟를 무릅쓸 만큼 北韓도, 中國도 無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當時 美國은 “蘇聯이 全面戰의 危險을 甘受하기로 決定하는 데 核心的인 要素는 原子爆彈”에 있다고 봤는데, 6·25戰爭이 터지기 直前에는 蘇聯이 充分한 量의 核武器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南侵을 指示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美國의 이런 核 抑制에 對한 自信感은 스탈린의 또 다른 믿음과 代置된다. 1949年 내내 김일성의 南侵 承認 및 支援 要請을 뿌리쳤던 스탈린은 1950年 5月 14日 마오쩌둥에게 書信을 보내 “變化된 國際環境을 考慮해, 統一을 向한 北韓의 (南侵) 提案에 우리는 同意하기로 했다”고 傳했다. 그가 말한 ‘變化된 國際環境’이란 蘇聯의 最初 核實驗(49年 8月 29日), 中國의 共産化 및 中華人民共和國 宣布(49年 10月 1日), 韓國과 臺灣을 아시아 防禦線에서 除外한 애치슨 라인의 宣布(50年 1月 12日), 中小 同盟條約 締結(50年 2月) 等이었다.

    特히 核實驗 成功은 스탈린에게 自信感을 불어넣어주었다. 祕密 解除된 蘇聯 文書를 分析한 이브구에니 바자노프(Evgueni Bajanov)는 스탈린이 마음을 바꾸게 된 理由 가운데 하나가 核實驗 成功에 있었다며, “그는 共産圈의 힘에 더 剛한 自信感을 갖게 되었다”고 分析했다. 當時 蘇聯의 外交 前文은 “勝利의 雰圍氣는 蘇聯이 原子爆彈을 갖고 있고 우리 立場이 平壤과 더욱 密接해지고 있는 事實로 인해 더욱 高調되고 있다”고 記述했다.

    스탈린의 中國 앞세우기 作戰

    結局 6·25戰爭은 트루먼과 스탈린 모두 ‘核의 威力’에 對한 盲信이 遭遇하는 地點에서 發生했다. 트루먼 行政府는 北韓은 勿論이고 中國 亦是 蘇聯의 ‘꼭두각시’ 程度로 看做하면서 美國보다 核戰力이 크게 뒤졌던 蘇聯이 北韓과 中國에 南韓 攻擊을 命令할 程度로 無謀하지 않을 것이라고 判斷했다. 그리고 相當 期間 核 獨占과 優位를 自信했던 트루먼은 在來式 軍事力을 줄이는 한便 駐韓美軍 撤收를 斷行했다. 그러나 그건 放心이었다. 駐韓美軍의 撤收와 애치슨 라인 宣布는 美國의 介入 意志에 深刻한 疑問을 惹起했고, 核의 威力을 믿고 斷行한 在來式 軍事力의 大大的인 減縮은 美軍이 6·25戰爭에서 苦戰을 면치 못하게 한 物理的 要因이었다.

    反面 核實驗 成功으로 大膽해진 스탈린은 김일성의 南侵 承認 要求를 받아들였다.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亦是 美國이 第3次 世界大戰을 不辭할 程度로 無謀하지는 않을 것으로 期待했다. 이에 따라 美國의 介入 可能性도 낮고 介入하더라도 中國을 앞세우면 蘇聯이 直接 피 흘릴 일은 없다고 봤다. 스탈린의 期待와는 달리 美國이 6·25戰爭에 迅速히 介入하자 스탈린은 美國의 힘을 빠지게 해 冷戰體制에서 優位를 占할 수 있는 機會로 看做했다. 그러나 이 亦是 誤判이었다. 6·25戰爭을 蘇聯이 일으키는 第3次 世界大戰의 前奏曲으로 看做한 美國은 엄청난 速度로 軍事力을 增强시키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對蘇(對蘇) 封鎖를 위한 同盟體制 强化에 拍車를 加한 것이다.

    搖動치는 世界 地政學

    核武器에 對한 美國의 過信이 6·25戰爭 勃發의 한 原因으로 作用했다면, 當時 美國의 壓倒的인 核 優位는 迅速한 介入을 可能케 한 物理的인 힘이었다. 6·25戰爭 介入을 選擇한 美國의 가장 큰 憂慮는 蘇聯의 유럽 侵攻 可能性이었다. 이에 對備하기 위해 트루먼은 6·25戰爭 介入 直後인 7月 11日 英國에 原子彈 搭載가 可能한 戰略 爆擊機 B-29를 配置했다. 이는 東北亞에 쏠린 美國 軍事力의 空白을 틈타 蘇聯의 유럽 攻擊을 抑止하고자 하는 戰略的 判斷에 따른 措置였다. 이와 關聯해 美國의 核 專門家인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와 버드(Kai Bird)는 다음과 같이 指摘한다.

    “原子爆彈은 美國의 6·25戰爭 參戰을 可能하게 만들었다. 核武器가 없었다면, (美國이 6·25戰爭에 介入하면서도) 유럽 防禦가 同時에 可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便 開戰 初期 美國 主導의 유엔軍이 敗退를 거듭하면서 美國 內에서는 原爆 使用을 둘러싼 論難이 激化됐다. 美 陸軍은 “只今 段階에서의 原爆 使用은 아시아人의 生命을 蔑視한다는 美國 政策의 無慈悲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고, 美 空軍의 情報部隊 亦是 美國의 原爆 投下는 “아시아의 反美感情을 더욱 鞏固히 하는 結果를 가져올 것”이라고 警告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유엔軍司令官으로 任命되자마자 原子爆彈 使用 權限을 自身에게 委任해달라고 要求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構想이 있었다.

    “滿洲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北韓으로) 들어오는 唯一한 通路에는 터널과 다리가 많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遮斷攻擊을 하기 위해 核爆彈을 使用할 둘도 없는 곳이다.”

    맥아더의 請願을 接한 반덴버그 空軍參謀總長은 7月 中旬 日本 도쿄를 訪問해 맥아더와 核武器 使用에 關해 協議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中國軍의 介入을 事前에 沮止하기 위해서는 原爆 投下가 必要하다며, B-29 戰爆機의 運用 權限을 自身에게 委任해주면 그 任務를 完遂하겠다고 公言했다. 當時 맥아더는 北韓에 大規模의 攻襲을 加하는 한便 “敵의 主要 軸線을 放射能 物質로 만들어 韓半島를 滿洲와 分離하겠다”는 作戰 計劃을 說明했다. 이를 통해 “最大 10日 안에 勝利할 수 있다”고 壯談했다. 그는 後날 北中 國境 地域을 放射能으로 오염시키기 前에, 北韓에 “30~50個의 原子爆彈 投下를 希望했다”고 傳하기도 했다.

    ‘核武器는 大統領의 武器’

    核 使用 問題가 도마에 오르자 트루먼은 두 가지 措置를 取했다. 하나는 “核武器는 大統領의 武器”라며 맥아더의 要請을 拒絶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核 攻擊 態勢를 갖추기 위해 10基의 B-29 戰爆機를 괌에 派遣하는 것을 承認한 것이었다. 그러나 核爆彈의 核心 物質(fissile core)李 ‘分離된’ 爆彈을 搭載하도록 指示함으로써 原爆 投下의 最終 權限을 自身에게 남겨두었다. 이처럼 美國이 原爆 投下를 檢討할 程度로 絶望的이었던 傳貰는 9月 中旬 重大한 轉換點을 맞이하게 된다. 맥아더가 主導한 9月 15日 仁川上陸作戰이 大成功을 거두고 곧바로 서울을 收復하면서 傳貰를 逆轉시킨 것이다. 그러나 北進을 强行한 美國이 ‘勝者의 詛呪’에 直面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時間이 걸리지 않았다. 中國의 參戰으로 “完全히 새로운 戰爭”에 直面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美國은 核 攻擊을 더욱 深刻하게 考慮하게 된다. 第3次 世界大戰을 豫防한다는 名分으로 介入한 6·25戰爭이 世界大戰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門을 노크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及其也 트루먼은 “美國의 對應에 原子爆彈도 包含되느냐”는 한 記者의 質問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武器가 包含된다”며, 核武器 使用을 强力히 暗示하고 나섰다. 1950年 11月 30日 記者會見 자리에서였다. 그러자 世界 地政學이 요동치기 始作했다. 英國 總理인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lee)는 “주사위가 던져지기 前에 英國도 自國의 運命을 결정짓는 데 반드시 參與해야 한다”며 워싱턴行 飛行機에 몸을 실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와 濠洲도 憂慮를 表明했고, 印度의 네루 總理는 “原子彈 使用에 단호히 反對한다”는 立場을 闡明했다. 中東과 中南美의 大多數 非共産系熱意 國家도 “美國의 核 使用이 第3次 世界大戰의 導火線이 될 것”이라며 反對 立場을 分明히 했다. 이러한 憂慮와 批判에 直面한 트루먼은 結局 한발 물러났다.

    ‘核 攻擊은 不道德의 極致’

    이듬해에 접어들어 유엔軍과 共産軍의 피비린내 나는 戰鬪가 繼續되자, 트루먼은 4月 6日 完製品 核武器가 搭載된 B-29 戰爆機를 괌에 보냈다. 美國이 自國의 本土 밖으로 卽時 使用 可能한 核爆彈을 搭載한 戰爆機를 配置한 것은 1945年 8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原爆 投下 以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核 攻擊 態勢를 强化하는 한便, 맥아더 해임에 따른 美國 內部의 不滿을 달래고자 하는 意圖도 깔려 있었다. 맥아더의 後任으로는 리지웨이가 任命됐는데, 그는 “核 攻擊은 不道德의 極致”라고 말했을 程度로 核 使用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美國이 核 使用 檢討에 들어가자, 李承晩과 김일성의 反應도 크게 엇갈렸다. 김일성은 美國이 “原子爆彈을 使用한다”는 欺瞞戰術로 人民들을 끌고 갔다고 非難하면서 美國의 核 攻擊 威脅을 프로파간다의 素材로 삼았다. 反面 李承晩은 “李 빅뉴스를 悲壯한 覺悟로 歡迎한다”고 했다. 當時 陸軍參謀總長이던 정일권의 回顧錄에 따르면, 李承晩은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傘下의 어느 한구석에라도 共産黨 한 놈이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며 原爆 投下를 剛하게 要求했다. 그러나 李承晩의 期待와는 달리 트루먼이 原爆 投下를 決心하지 않자, “왜 原子爆彈을 쓰지 않는가”라며 憤慨했다. “當身도 잘 알다시피 原爆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이 大統領께 말할 수 없이 未安하오. 만날 때마다 原爆度 不辭한다고 했던 約束이 이처럼 虛事가 될 줄은 몰랐다고, 老人에게 말씀 傳해주시오.” 맥아더가 정일권에게 건넨 말이다.

    1951年 7月 8日 停戰協商이 始作됐지만, 捕虜 送還 問題로 이렇다 할 進展은 없었다. 膠着 狀態가 繼續되자, 美國은 北韓을 相對로 ‘허드슨 港口 作戰(Operation Hudson Harbor)’이라는 極祕 모의 核 攻擊 訓鍊을 實施했다. 또한 旣存의 核爆彈은 너무 커서 北韓과 같은 작은 나라에는 使用하기 곤란하다며, 작은 核武器, 卽 ‘戰術 核武器’ 開發·生産에도 拍車를 加했다. 또한 6·25戰爭 終熄을 核心的인 大選 公約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大統領에 當選되었는데, 그는 “原子爆彈도 수많은 美國 武器 가운데 하나”라며 核 攻擊에 相當히 積極的이었다. 이를 反映하듯 美 合參은 核 攻擊 對象으로 共産軍의 兵力과 物資가 集中되어 있던 個性을 指目했고, 아이젠하워 亦是 戰術 核武器 使用에 적합한 地域이라고 同意했다. 北韓의 다른 地域과 中國의 軍事 施設도 核 攻擊 對象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美國은 1954年 5月을 “原子爆彈의 廣範圍한 戰略的·戰術的 使用이 要求되는” 그날(D-day)로 잡았다. 이때로 잡은 理由는 蘇聯軍의 介入 等 擴戰에 對備하기 위해서는 充分한 分量의 核武器를 確保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多幸히 ‘運命의 날’이 오기 前에 銃聲은 멈췄다. 스탈린 死後에 共産圈이 休戰協商에 積極 臨하면서 1953年 7月 27日 停戰協定이 締結된 것이다.

    韓半島의 核 威脅 60年

    銃聲은 멈췄지만, 核의 時代는 本格的으로 始作됐다. 美國은 共産圈의 在來式 武器를 使用한 攻擊에도 核으로 報復한다는 ‘大量 報復 戰略’을 公式 闡明했고, 韓國에도 核武器를 大擧 配置했다. 北韓은 軍事力의 相當 部分을 休戰線 隣近에 配置해 ‘敵 끌어안기’ 戰略으로 맞섰다. 美國과 蘇聯은 理念과 勢力圈 對決에 이어 核 軍備競爭에도 불을 댕겼다. 核武器를 ‘종이虎狼이’에 比喩했던 中國의 마오쩌둥이 생각을 바꾼 契機도 6·25戰爭이었다.

    6·25戰爭이 멈춘 지 60年 가까이 지난 오늘날, 지나간 歲月만큼이나 韓半島와 周邊 情勢도 많이 變했다. 戰爭이 멈춘 後 20年 만에 가장 熾烈한 交戰 當事國들이었던 美國과 中國은 和解했고, 이 機會를 틈타 中國과 日本도 國交를 樹立했다. 美國과 蘇聯도 1989年 銃聲 한 放 울리지 않고 ‘冷戰 終熄’을 宣言했다. 韓國도 美-蘇 脫冷戰과 노태우 政府의 北方外交에 힘입어 1990年과 1992年에 各各 蘇聯 및 中國과 外交關係를 樹立했다. 韓半島의 南쪽은 戰爭의 廢墟를 딛고 눈부신 經濟成長과 民主化를 達成했지만, 韓半島의 北쪽은 地球村에서 가장 貧困하고 閉鎖的이며 孤立된 나라로 轉落했다.

    그러나 變하지 않은 것도 많다. 6·25戰爭 때부터 始作된 美國의 對北 核 威脅은 60年이 넘도록 持續되고 있다. 아마도 이처럼 一貫되게 美國 核 威脅에 露出된 나라는 地球上에서 北韓이 唯一할 것이다. 또한 銃聲이 멈춘 지 60年이 다 되가도록 停戰協定은 平和協定으로 代替되지 않고 있다. 及其也 北韓도 核으로 맞서는 戰略을 選擇하고 말았다. ‘코리아 아마겟돈’의 危險을 품은 核의 對決이 21世紀 들어 本格化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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