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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狀(實相)’이 보이지 않아 가슴속에 들여놓은 節|新東亞

‘實狀(實相)’이 보이지 않아 가슴속에 들여놓은 節

南原 咸陽

  • 최학│우송대學校 韓國語學科 敎授 jegang5@yahoo.com

    入力 2012-01-19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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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末, 정수동이가 그랬다던가. 受動의 마누라가 아이를 낳았다. 미리 미역을 準備하지 못한 터라 마누라가 수동에게 場에 가서 미역을 좀 사오라고 했다. 수동이 市場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데 때마침 바삐 어디론가 行次하는 親舊들을 만났다.

    “자네들, 어디 가는가?”

    “어이, 마침 잘 만났네. 우리 只今 金剛山 遊覽 가는 길인데 자네도 같이 가지 않으려나?”

    “그래?”

    수동이 그 길로 親舊들을 따라붙었다. 金剛山 구경을 잘 하고 돌아와 봤더니 그새 아들놈은 두 돌이 지나 있었다던가. 自古로 旅行은 이런 式으로 해야 하는데 요즘 世上에 이랬다간 제 命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법하다.



    벌써 10年은 됐음직하다. 大田에서 살던 때인데 서울 親舊 둘이 事前 奇別도 없이 大田의 내 職場에 쳐들어왔다. 내가 수동이처럼 물었고 親舊들이 수동이처럼 말했다.

    “자네들 어디 가는 길인가?”

    “응, 智異山 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않으려나?”

    “좋지.”

    그렇게 南原으로 내뺐다. 그곳에서는 後輩인 姨母 詩人까지 불러내어 智異山 백무동으로 들어갔다. 겨울, 山길에 눈이 쌓여 있어서 自動車가 애를 먹었다. 靈源寺 절間 못 가서 車를 세우곤 登山을 했다. 서로들 定處 없이 나섰다가 卽興으로 “도솔암에나 올라가보자” 해서 始作한 山타기인지라 신발 하나 제대로 갖춰 神은 이가 없었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땀을 흘리며 올랐다.

    다들 ‘글장이’여서 그런지 傳해주는 이야기도 그럴싸했다. 이태 前 겨울이었다지. 두 親舊가 처음으로 도솔암을 찾았는데 山中 庵子에는 스님조차 없더란다. 이미 날도 저문지라 두 親舊는 廉恥 不顧하고 빗장을 따고 法堂 內室까지 쳐들어갔다. 쌀을 찾아내 밥을 지어 먹곤 군불까지 지펴 따뜻한 房에서 하룻밤 身世를 졌다. 다음 날 돈 몇 萬 원이랑 便紙 한 張을 佛殿에 남기곤 山을 내려왔단다.

    그 겨울의 智異山 백무동

    한 時間 넘게 힘든 山行을 한 끝에 도솔암 절 마당에 올라섰다. 맞은便으로 훤칠한 天王峯이 빤히 쳐다보이는 明堂이었다. 이 겨울엔 젊은 比丘僧 한 분이 庵子를 지키고 있었다. 어렵게 請을 놓아 더운밥度 얻어먹었다. 親舊들이 그 겨울에 身世진 바를 吐說하며 容恕를 求했는데 스님은 記憶이 나지 않는다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正말, 親舊들이 지어낸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庵子를 나와서는 굳이 林間道路를 걸었다. 다시금 눈발이 분분히 뿌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講說 속에 서 있는 寂寞한 겨울 智異山의 情趣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山을 내려와서는 잠깐 實相寺에 들렀다가 이 詩人의 案內로 萬數千 개울 너머의 看板 없는 茶집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낡은 기와채의 좁은 마당에 褐炭 暖爐가 켜져 있어 금세 心身이 薰薰해졌다. 智異山이 좋아 굳이 이곳에 옮겨와 산다는 老處女 主人이 끓여주는 뽕잎 茶의 香이 참 좋았다. 후덕하며 섬세한 配慮는 동동酒 한 盞과 豆腐김치 한 접시에도 그대로 배어 있었다.

    해 질 무렵에는 萬數千 냇물을 따라 生綃 方向으로 길을 떠났다. 茶집 女主人이 일러준 냇가 宿所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득한 높이의 天王峯 기슭을 돌아 흐르는 山골 냇물을 따라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風光 또한 눈을 즐겁게 했다.

    主人의 趣向을 일러주듯, 巖石으로 通文을 만들고 돌담 안에다 반듯한 집을 세운 業所에서 旅裝을 풀고 醉興을 즐겼다. 아침에는 간밤 宿醉가 있음에도 爽快한 산 空氣와 明朗한 물소리를 곁들인 德에 心身은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以後, 나는 두세 番 더 智異山을 찾으면서도 이 旅程을 反復했다. 季節 따라 同行 따라 情趣가 다른 境遇는 있었지만 自然과 사람에게서 받는 아름다운 感興은 달라지지 않았다.

    實相寺와 萬數千 風景

    乘用車를 利用하는 境遇, 88高速道路의 智異山나들목을 나오는 것이 이便으로 가는 손쉬운 길이 된다. 인월면을 通過한 뒤 60番 道路로 옮겨 타면 곧 萬數千 上流다. 가까운 뱀사골을 둘러보고 山內로 나와 河川을 따라 내려가면 實相寺가 있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닿는다.

    개울에 걸린 해탈교를 건너면 먼저 장승 두 機가 찾아오는 이를 반긴다. 元來는 다리 이便에도 한 雙의 장승이 있었는데 1963年 洪水 때 떠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洪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5年 前인가 내가 다시 찾았을 때도 다리 이便 마을은 그해의 萬數千 汎濫으로 입은 생채기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實相寺 절間은 멀쩡했다. 마을 便에서 보면 절間의 立地가 마을보다 決코 높아 보이지 않는데도 그렇다. 妙한 錯視現象이 이곳에서도 일어난다.

    九山禪門(九山禪門) 中에서도 가장 먼저 改札(開刹)된 實相寺는 들판 가운데 앉은 절이다. 따라서 山間의 절집과 같은 變化 있는 模樣새는 아니다. 그러나 절間에 들어서기 直前 몸을 돌려 南쪽을 바라보면 由緖 깊은 절이 왜 이곳에 앉았는지 斟酌되는 바 없지 않다. 天空을 向해 우람히 치솟은 天王峯이 正面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實로 莊嚴한 이 巨大 山峯을 이곳에서처럼 뚜렷하게 대면할 수 있는 자리가 달리 없다.

    新羅 興德王 3年(828) 때 세워졌다는 實相寺 또한 여러 次例 消失과 復元의 過程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天王門을 지나면 두 基의 잘생긴 石塔이 있으며 塔 사이에는 꽤 덩치가 큰 石燈이 서 있다. 石燈에 불을 켜는 일을 위해 돌階段을 붙여놓은 게 이채롭다. 實相寺에서도 소문난 名物 둘은 藥師殿의 鐵材如來坐像과 보광전의 梵鍾이다. 보는 이를 單番에 壓倒해버리는 巨軀의 鐵불은 特異하게도 맨땅에 坐定하고 있다. 日本으로 빠져나가는 知己(地氣)를 붙잡아 누르기 위해 그렇다는 俗說이 있다. 듬직한 얼굴, 堂堂한 가슴, 불쑥 나온 배…. 마주하는 이의 마음까지 넉넉하게 해주는 近似한 佛像이다. 보광전 梵鍾 겉面에는 꽤 複雜한 文樣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日本 國土의 形象이라고 믿고 있다. 절터를 잡을 때부터 風水學的 考慮가 있었다는데 이렇듯 日本과 關聯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절의 한 特色이다. 壬辰倭亂을 거치면서 實相寺를 日本의 對抗馬(對抗馬)로 하는 象徵體系가 自然스럽게 民間에 생겨났던 것으로 專門家들은 보고 있다.

    近來는 佛敎의 社會參與 方式을 模範的으로 보여주는 例로 實相寺가 浮刻되었다. 不殺生(不殺生) 實踐의 農場共同體 運動, 代案學校 運營 等이 그 例다.

    이른 아침 다시 절집을 둘러보고 나온 나는 門 앞에 선 채로 天王峯을 쳐다보며 深呼吸을 한다. 구름에 가려 꼭대기의 形體는 드러나지 않지만 저 높은 곳에도 내가 디뎠던 돌과 흙이 있음을 暫時 생각해 보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봄과 아래에서 쳐다봄이 이렇게 判異하다. 그리고 절 門 앞에서 나눠지는 세 갈래 흙길을 본다. 山으로, 들판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분명한데 何必이면 그것이 절 門 앞에서 그러하니 괜스레 마음이 쓸쓸하다.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亦是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方向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거친 눈보라로 날려가 버리고

    어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각들은

    눈처럼 녹아버려 그 溫氣를 잡을 수 없다.

    實相은 正말 있는가.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에 갇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저녁.

    마음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절 한 채를 들여놓는다.

    - 김규진 時 ‘實相寺 가는 길.1’ 專門

    차라리 實狀은 알지 못해도, 가슴속에 절 한 채를 들여놓을 수 있기만 해도 우리네 삶은 얼마나 薰薰할까. 흰눈 덮어쓴 댓잎들은 손가락이 너무 많다는구나… 하여 그것의 가리킴은 가리킴이 되질 못한다. 山으로 가야 할지 들판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마을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손바닥에 놓은 생각조차 雜誌를 못한다. 虛無와 高段의 發見과 그리고 諦念의 慰撫를 겨울 實相寺에서 얻고 있는 詩人의 노래가 적이 가슴을 적셔온다.

    길 건너 茶집도 예전 그대로다. 담벼락과 大門에 ‘車(茶)’字 한 字만 써 붙여놓고 손님 받을 窮理를 하는 그 素朴함도 變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달리 사람들이 북적여서 事緣을 알아봤더니 그새 媤집을 가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내가 간 날이 아이의 돌날이란다. 이런 기쁜 일이. 德談 몇 마디 주곤 술과 떡을 功으로 얻어먹는다.

    淸淨 山水의 용추계곡

    數年 前, 德裕山을 縱走하던 때다. 해질 무렵 삿갓再待避所에 到着해 등짐을 내려놓은 뒤였다. 문득 南西쪽 하늘을 봤는데 氣막힌 風景畫 하나가 그곳에 그려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높고 낮은 먹빛의 山들이 鮮明한 스카이라인을 긋고 있었는데 그中에서도 唯獨 낫날처럼 치솟은 奇妙한 山봉우리 하나가 視線을 끌었다. 그 山 꼭대기에는 蒼白한 初生달까지 박혀 있어서 前衛的인 水墨畫를 聯想케 하는 風景을 그려냈다. 뒤늦게 管理人으로부터 涵養의 黃石山이란 說明을 들었다.

    涵養과 居昌 警戒에 形成된 巨大 山君에서도 金猿山(1352m), 箕白山(1331m), 黃石山(1190m), 거망산(1245m)李 빼어나다. 金猿山 箕白山이 하나의 山脈으로 連結되며 黃石과 거網이 또 같은 形勢다. 두 山脈의 틈새를 만드는 것이 용추계곡인데 빼어난 山들이 한 덩어리로 붙지 못하도록 골을 파고 물을 흘리는 自然의 調和가 놀랍다. 따라서 용추계곡은 깊고 그윽하며 아름답고 純眞하다. 6·25戰爭 때는 빨치산 女將軍 정순덕이 이 골짝에서 活躍했던 것으로 有名하다. 國軍 1個 小隊가 그女에게서 武裝解除를 當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扶持한 채 下山한 事實은 近來에 밝혀진 일이다. 가까운 곳에 큰 都市가 없는 德에 四季節 어느 때든 寂寞하며 사람의 손때를 묻히지 않는 淸淨 自然을 그대로 지녔다.

    용추계곡 中間쯤에서 黃石山 登山路가 始作된다. 初入에서부터 아득한 天空에 白雲을 거느리고 솟은 頂上이 바라보이는데 그 光景은 자못 異國的이기까지 하다. 銳利한 세모꼴의 그 바위 봉우리는 쉬 피라미드를 聯想케 하는데 樹林을 뚫고 山을 오르는 동안에는 時時刻刻 빛깔과 模樣새를 달리한다. 黃石山의 깊은 숲은 아직도 前人未踏의 原始林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봄날 登山路 咫尺에서도 고사리는 勿論 사람 손 잘 타는 두릅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능마루에 오르면 오른便으로 거망산 頂上으로 가는 길이 있고, 왼便은 黃石山 頂上 가는 길이다. 孤山初들이 푸른 絨緞을 만들고 그 위로 진달래꽃들이 터널을 이룬 능마루길을 걷는 欣快하고도 벅찬 느낌은 申告(辛苦) 끝에 頂上 가까이 이른 字만 가지는 福이다.

    암봉을 돌아 내려서면 近來 復元한 黃石山性 城壁 위를 걷게 된다. 높고 날카로운 두 암봉 사이의 峽谷을 막은 酸性인데 咸陽 땅 안의(安義) 사람들은 이 酸性을 特히 自身들의 志操와 節槪를 象徵하는 重要한 遺跡으로 여긴다. 丁酉再亂 當時 안의 사람들은 이 높은 데까지 올라와서 城을 쌓고 倭軍에게 悽絶하게 抗拒했다. 이윽고 性이 무너지자 男子들은 最後의 一人까지 싸우다 電源 죽임을 當했으며 婦女子들은 千길 絶壁에 몸을 날려 저들의 丹心(丹心)을 마무리했다. 黃石山 北쪽 바위 벼랑은 아직도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최학

    1950年 慶北 慶山 出生

    고려대 國文科 卒, 同 大學 敎育大學院 碩士

    1970年 경향신문 新春文藝 小說 當選

    現 고려대文人會 會長

    創作集 ‘暫時 머무는 땅’ ‘그물의 눈’ ‘食口들의 歲月’ 等

    長篇小說 ‘西北風’‘안개울음’ ‘彌勒을 기다리며’‘화담명월’등


    頂上의 자리는 워낙 비좁아 여러 사람이 올라설 수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 黃石山 바위 꼭대기에는 네댓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틈밖에 없다. 그 꼭대기에 내 키 하나를 더 세워 맞은便 山줄기를 바라보고 먼 데 智異山 줄기를 더듬는다. 그리곤 그동안 가쁜 숨을 쉬며 헤치고 온 新綠의 골짝과 그 너머의 들판을 내려다본다. 내 몸이 허허고립(虛虛孤立)의 津逮(眞體)라는 存在意識도 그런 자리에서 더욱 切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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