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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 戰爭英雄 16人에 뽑힌 唯一한 아시아系 故(故) 김영옥 大領|新東亞

美國 戰爭英雄 16人에 뽑힌 唯一한 아시아系 故(故) 김영옥 大領

“亡國의 恨, 人種差別 딛고 戰士(戰史)에 이름 남긴 인도주의자”

  • 한우성│在美言論人, ‘아름다운 英雄 김영옥’ 著者 wshan@stanford.edu

    入力 2011-07-19 1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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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齊 抗拒해 美國으로 亡命한 獨立運動家의 아들
    • 第2次 世界大戰 때 유럽 戰線에서 不世出의 活躍
    • 美軍 歷史 最初의 비(非)百人 野戰大隊長
    • 除隊 後 6·25 勃發하자 再入隊해 戰線으로
    • 韓國·프랑스·이탈리아 最高 武功勳章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2003年 韓國人의 美國 移民 100周年을 맞아 移民 英雄으로 選定된 김영옥(왼쪽) 大領과 올림픽 金메달리스트 兼 醫學博士 새미 리氏가 캘리포니아州 패사디나에서 開催된 로즈퍼레이드에 參席한 모습. 두 사람은 竹馬故友다.



    美國 포털사이트 엠에스앤닷컴(msn.com)은 最近 美國 顯忠日을 맞아 美國 歷史上 最高의 戰爭英雄 16名을 發表했다. 故(故) 김영옥 大領(1919~2005)이 그中 한 名으로 꼽혔다. 美國 獨立戰爭의 英雄이자 初代 大統領인 워싱턴, 南北戰爭 當時 北軍 總司令官으로 北軍을 勝利로 이끈 뒤 18代 大統領이 된 율리시즈 그랜트, 第2次 世界大戰 勝利의 主役으로 34代 大統領이 돼 6·25戰爭의 砲聲을 멈추게 한 아이젠하워, 亦是 第2次 世界大戰을 勝利로 이끌고 仁川上陸作戰을 성공시킨 맥아더…. 第2次 世界大戰의 英雄 니미츠 提督조차 들어가지 못한 이 名單에 有色人種으로는 唯一하게 그가 包含된 것이다. 니미츠 提督은 美軍 史上 最大의 해前으로 꼽히는 미드웨이 海戰(1942)에서 電力의 劣勢에도 不拘하고 日本 海軍에 回復할 수 없는 打擊을 입혀 太平洋戰爭 勝利의 발板을 마련한 人物로 꼽힌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 高速道路’가 있다. 大領으로 退役한 ‘김영옥’李 軍人으로서 그보다 높게 評價받은 셈이다.

    엠에스앤닷컴은 名單을 發表하면서 “김영옥은 1919年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韓國系다. 第2次 世界大戰에 參戰한 後 豫編했으나 6·25戰爭이 터지자 再入隊했다. 6·25戰爭 當時 김영옥은 韓國語를 모르는 것처럼 行動해 通譯將校가 되는 代身 步兵部隊로 갔다. 以後 여러 次例 自身의 能力을 立證한 後 美國 歷史上 最初의 아시아系 野戰大隊長이 됐다”는 說明과 함께 그의 寫眞을 揭載했다.

    이番 發表는 美國이 김영옥 大領을 어느 水準으로 評價하는지와 함께, 그에 對한 國際的 歷史的 評價가 깊이 있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엠에스앤닷컴의 짧은 說明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먼저 ‘6·25戰爭 當時 韓國語를 모르는 것처럼 行動해 步兵部隊로 갔다’는 內容을 보자. 當時 美軍은 韓國語를 單 한 마디라도 할 줄 아는 韓國系 美軍 將兵은 모두 情報·通譯·飜譯 兵科에 配定했다. 그런데도 金 大領은 韓國語를 全혀 모르는 것처럼 行動해 最前線 戰鬪部隊로 갔다는 意味다. 實際로 金 大領은 極東軍司令部 韓國語 試驗에 일부러 떨어진 뒤 1951年 3月 韓國에 왔고, 到着한 뒤에도 情報나 通譯 將校로 後方에 붙잡아두려는 駐韓美軍司令部와 7師團 司令部의 試圖를 애써 뿌리친 채 最前線으로 갔다.

    美國 最高의 戰爭英雄



    ‘여러 次例 自身의 能力을 立證한 後’라는 說明은 美國 政治權이나 美軍 指揮部의 政治的 제스처 德澤에 大隊長이 된 게 아니라 自身의 能力으로 大隊長이 됐다는 意味다. 特히 눈여겨볼 것은 ‘美國 歷史上 最初의 아시아系 野戰大隊長이 됐다’는 部分이다. 이 文章에는 實로 커다란 意味가 含蓄돼 있다. 김영옥 大領은 事實 美國 歷史上 最初의 有色人 野戰大隊長이다.

    黑人 奴隸의 勞動力을 바탕으로 建國된 美國은 6·25戰爭이 進行되던 1950年代 初盤까지만 해도 人種差別이 合法的으로 이뤄지던 非人間的인 나라였다. 1964年이 돼서야 法的으로 人種差別을 廢止했으나 現實的인 差別은 繼續되다가, 不過 2年 前인 2009年 오바마 大統領의 就任과 함께 처음으로 有色人度 大統領이 되는 나라로 發展했다.

    美國史(史)는 人種差別의 改善 過程, 다시 말해 自由와 平等의 擴散 過程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自由와 平等의 擴散은 美國이 危機에 處했을 때 有色 人種이 흘린 피와 直接的으로 관계돼 있다. 美國은 戰爭에서 白人 軍隊의 힘만으로 勝利하기 어렵거나 勝利가 不確實할 때 有色人에게 美軍 軍服을 입혔다. 軍隊는 階級章을 公開的으로 달고 다닌다는 點에서 有色人에 對한 大宇가 가장 直說的으로 나타나는 곳이었다. 有色人이 戰場에서 能力을 立證하고 큰 犧牲과 貢獻을 하면 조금씩 높은 階級과 重要한 補職이 許容됐고, 이는 다시 美國社會 全般의 人種差別 改善으로 이어졌다.

    美國은 君을 대단히 所重하게 待遇하는 國家다. 美軍에 對한 美國人의 自負心과 愛情은 實로 대단하다. 每年 顯忠日, 父母들이 子女의 손을 잡고 全國 到處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記念式場을 찾는 모습에서도 이런 特徵을 確認할 수 있다. 이처럼 國民的인 支持를 누리는 美軍은 第2次 世界大戰 直前까지만 해도 有色人을 徵兵對象에서 除外시켰고,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날 때까지는 有色人에게 野戰中隊長까지의 補職만 許容했다. 6·25戰爭 때 첫 有色人 野戰大隊長이, 越南戰에서 첫 有色人 野戰聯隊長이 誕生했다.

    美軍이 戰場에서 有色人을 大隊長에 임명하는 것은 白人 將兵 800名의 生死를 有色人에게 맡긴다는 걸 의미한다. 美國史(史)와 美國人의 有色人에 對한 思考를 考慮하면 破格 中의 破格이다. 社會 全般에 걸친 平等의 擴散이라는 面에서도 커다란 意味가 있는 措置다. 그 主人公이 바로 김영옥이었던 것이다.

    ‘韓國人’의 犧牲과 奉仕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第2次 世界大戰 當時 이탈리아 戰線을 視察하는 美國 戰爭性副長官(가운데 洋服 正裝)을 맞아 儀仗隊 査閱을 引導하는 김영옥 當時 大尉.

    美國에서 ‘美國 最高 戰爭英雄’이란 呼稱은 單純히 戰爭에서 가장 勇敢했거나 有能했던 軍人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意味가 있다. 美國이 英國의 植民統治에서 벗어나 獨立國으로 태어나는 過程에서, 南北戰爭이라는 分斷의 危機를 克服하고 統一國家로 살아남는 過程에서, 國家的 命運을 걸고 싸웠던 兩次 世界大戰에서 勝利해 超强大國으로 浮上하는 過程에서, 冷戰을 勝利로 이끌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時代를 여는 過程에서, 生命을 내놓고 死線을 넘나들며 現在의 美國이 있도록 犧牲과 貢獻을 한 人物을 의미한다.

    美國이 戰爭英雄을 所重히 여기는 理由는 그들이 自身의 목숨을 擔保로 他人의 生命과 財産을 지킨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있음으로써 人權도 福祉도 存在할 수 있음을 비싼 代價를 치르고 배웠기 때문이며, 오래도록 그것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記憶함으로써 戰爭을 記憶하고 그 過程을 통해 왜 戰爭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어떻게 戰爭을 避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同時에 그럼에도 不拘하고 避할 수 없는 戰爭이 强要될 때는 어떻게 對應해야 하는지 그들을 통해 敎訓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番 發表에 곁들여진 說明은 ‘김영옥은 1919年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韓國系’라고 始作된다. 이 說明은 19年 前 韓國人을 破廉恥하게 描寫했던 美國 主流言論의 無責任한 報道와 交叉되면서 隔世之感을 갖게 한다. ‘로스앤젤레스 黑人暴動’(1992年 4月29日 始作)으로 불리며 韓國에도 널리 알려진 이 事件 當時 로스앤젤레스타임스를 비롯한 美國 主流言論은 韓國人의 이미지를 歪曲하는 記事를 大量 生産했다. ‘韓國人들은 地域 社會에 對한 貢獻이나 國家를 위한 獻身에는 關心 없이 돈벌이에만 汲汲한 守錢奴다. 1달러짜리 오렌지주스 한 甁을 훔쳐 달아나는 黑人 少女의 등에 銃을 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要旨였다. 이 같은 報道는 當時 ‘로드니 킹(Rodney King) 事件’으로 爆發 直前이던 黑白葛藤의 噴出口로 在美 韓人 社會를 贖罪羊으로 만드는 데 톡톡히 一助했다. 結局 在美同胞 社會는 人命被害와 함께 3億달러의 財産被害를 보면서 暴動의 慘澹한 祭物이 됐다.

    日本系 美軍部隊에서 猛活躍

    ‘로드니 킹’ 事件이란 1991年 로스앤젤레스 一圓에서 交通法 違反으로 警察에 逮捕된 黑人 靑年 로드니 킹(當時 26歲)李 白人 警察들에 依해 無慘히 毆打당한 事件이다. 이 場面을 偶然히 捕捉한 市民의 動映像이 美國 內外로 퍼지면서 世界的 뉴스가 됐다. 이 事件을 審理한 캘리포니아州 法院은 當時 現場에 있던 警察官 4名 모두에 有罪 宣告를 내리지 않음으로써 黑人社會의 憤怒를 폭발시켰고 이것은 곧 暴動으로 이어졌다. (美國 法體系에서 無罪 宣告와 ‘有罪 宣告를 내리지 않는 것’은 法理的으로 다른 槪念이다. 以後 美國 聯邦法院은 이 事件을 再審해 加害 警察官 2名을 懲役刑에 處했다.)

    그러므로 ‘美國 歷史上 最高의 戰爭英雄 16名 가운데 한 名인 김영옥 大領은 韓國系’라는 說明은 로스앤젤레스 黑人暴動 當時 汎濫했던 韓國人에 對한 惡意에 찬 歪曲 報道의 正反對便에서 韓國人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두 가지 보도 모두에서 韓國人 全體와 在美 韓人의 이미지가 同一視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김영옥 大領은 果然 누구인가. 그는 第2次 世界大戰과 6·25戰爭에서 不敗神話를 남긴 傳說的 戰爭英雄이자 偉大한 인도주의자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在美同胞 2歲인 그는 美軍 陸軍 將校로 第2次 世界大戰에 參戰, 日本系 美軍部隊人 100大隊의 小隊長·情報參謀·作戰參謀 等을 맡으며 名聲을 날렸다. 100大隊는 1941年 12月 日本이 眞珠灣을 奇襲하자 美國이 日本系 移民者의 忠誠心을 疑心해 日本系 市民 12萬 名을 隔離 受容하고 2世들로 編成한 美軍部隊다. 유럽戰線에서 勇猛을 떨쳐 後날 部隊 規模와 戰鬪機肝을 基準으로 美軍 歷史上 가장 많은 勳章을 받은 部隊가 됐다.

    김영옥 大領은 1941年 徵集돼 陸軍 士兵으로 服務하던 中 美軍 史上 最初로 아시아系 將校候補生으로 選拔됐는데, 그가 1943年 2月 任官해 처음 配置된 곳이 바로 이 部隊였다. 獨立運動家 김순권의 아들로 태어나 “日本 飮食은 먹지도 말고, 日本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라”는 徹底한 反日敎育을 받고 자라난 그가 이 部隊에 配置된 것은 混沌의 歷史가 빚은 아이러니다.

    김영옥 大領이 처음 이 部隊로 가자 大隊長은 “韓國人과 日本人의 葛藤을 잘 안다. 다른 部隊로 보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그들도 저도 美國 市民으로 같은 目的을 위해 싸웁니다. 이 部隊에 남겠습니다”라고 答해 殘留한 이야기는 이제 有名한 逸話다.

    以後 그가 세운 전훈은 눈부시다. 第2次 世界大戰 當時 聯合軍과 獨逸軍이 이탈리아 로마를 놓고 攻防戰을 벌일 때 김영옥 大領은 야음(夜陰)을 利用해 部下 1名만 데리고 獨逸軍 陣營에 浸透했다. 다음날 날이 샌 뒤 敵이 放心하는 틈을 타 捕虜 2名을 生捕해 歸還한 그가 英雄이 된 건 當然한 일이다. 聯合軍은 이 捕虜들로부터 얻은 情報를 活用해 總攻勢에 突入, 1944年 6月 로마 解放을 이끌어냈다. 3個月 後 벌어진 이탈리아 피사 解放前에서는 諸葛孔明을 無色게 하는 神出鬼沒한 作戰으로 그가 이끄는 部隊가 單 한 名의 死傷者도 없이 아르노 江을 건너 피사에 無血入城하도록 했다. 그해 9月 김영옥 大領의 部隊에 依해 人類 文明의 7大 不可思議 가운데 하나라는 피사의 斜塔이 電話(戰禍)에서 救濟됐고, 피사는 解放됐다.

    意志와 能力

    프랑스에서 그는 聯合軍이 獨逸에 進入할 때 마지막 障礙物이었던 보주山脈 戰鬪에서 브뤼에르, 非퐁텐 地域을 解放시킨 主役이었다. 같은 해 10月 브뤼에르 戰鬪에서 김영옥 大領은 敵의 犧牲을 줄이기 위해 自身의 목숨을 擔保로 獨逸軍의 降伏을 이끌며 勝利를 얻기도 했다.

    終戰 後인 1946年 豫編해 成功的인 비즈니스맨으로 變身한 김영옥 大領이 다시 戰線으로 向하게 된 건 6·25戰爭 때문이다. 그는 韓國에서 戰爭이 터지자 再入隊를 自願, 유엔軍 3次 反擊의 牽引車가 돼 1951年 5~6月 電線 60㎞ 北上의 主役이 됐다. 中部戰線에서는 이때의 戰線이 오늘날 休戰線의 原形이 됐다.

    김영옥 大領은 이 戰爭에서 通常的인 美軍 戰線 服務期間의 2倍인 18個月 동안, 重傷을 입은 탓에 野戰病院으로 後送된 期間을 除外하면 單 하루의 休暇도 없이 最前線을 지켰다. 그리고 1951年 10月 美軍 歷史上 戰場에서 大隊를 指揮한 最初의 有色人 大隊長이 됐다. 그가 이끌던 美 陸軍 31聯隊 1大隊는 最前線에서 싸우면서도 서울 三角紙 一圓에 있던 孤兒院 ‘敬天愛人社’를 支援, 戰爭孤兒들을 돌봤다. 敬天愛人사는 孤兒를 最高 500餘 名까지 受容했는데 이들 中 多數는 以後 畫家·音樂家·牧師·敎授·科學者·事業家 等 훌륭한 社會人으로 자랐다.

    6·25戰爭이 遲遲不進한 休戰會談과 함께 人命 被害만 量産하는 目的 없는 戰爭으로 變해가자 韓國을 떠난 김영옥 大領은 1963年 軍事顧問으로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다. 이때 韓國에서 다시 戰爭이 터질 境遇에 對備해 韓國軍 最初의 미사일 部隊를 創設하는 等 韓國 防禦計劃을 현대和解 以後 韓國이 經濟開發에 邁進할 수 있는 軍事的 防牌를 마련하기도 했다. 以後 그는 6·25戰爭에서 입은 重傷의 後遺症으로 큰 手術만 約 40次例 받으면서 1972年 大領으로 豫編했다. 轉役 後에도 美國 政界나 財界의 誘惑을 뿌리치고 人種을 超越해 入養兒·障礙人·老人·靑少年·貧民·家庭暴力被害女性 等 社會的 弱者들을 위한 奉仕活動을 하는 데 33年을 바치다 2005年 눈을 감았다. 只今 그는 호놀룰루에 있는 美國 國立墓地에 永眠해 있다.

    그는 日帝强占期라는 暗鬱한 時代에 태어나 △曺國 없는 移民者의 子息이라는 설움 △아버지의 獨立運動에 따른 가난 △法的으로도 認定되던 人種差別 △戰場에서 입은 負傷으로 인한 身體障礙라는 여러 걸림돌을 自身의 意志와 能力만으로 넘어서 世界를 舞臺로 氣像을 떨쳤던, 그러면서도 恒常 弱者의 便에 섰던 人物이다.

    이 때문에 美國은 이番 發表에 앞서서도 김영옥 大領의 犧牲과 獻身과 奉仕를 認定하고 致賀하는 措置를 繼續해왔다. △各種 勳章 및 表彰狀 授與 △김영옥中學校 設立 △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 設立 等이다. 于先 美國 政府는 第2次 世界大戰과 6·25戰爭 當時의 武勳에 立脚해 特別武功勳章(Distinguished Service Cross) 1個(1944年), 殷盛武功勳章 2個, 功勞武功勳章 2個, 同性武功勳章 2個, 전상훈腸 3個 等 最小 10個의 主要 勳章을 그에게 授與했다. 特別武功勳章은 美國 最高武功勳章人 名譽武功勳章(Medal of Honor)에 이어 훈격 2位인 勳章이다. 김영옥 大領은 以外에도 韓國 最高武功勳章人 太極武功勳章(2006年)과 國民勳章 모란장, 프랑스에서는 最高武功勳章人 레지옹도뇌르 勳章(2005年)과 十字武功勳章, 이탈리아의 最高武功勳章人 十字武功勳章(1946年)과 同性武功勳章 等을 받았다. 美國 政府機關, 聯邦議員들, 캘리포니아州 議會 및 州議員들, 로스앤젤레스 市議會 및 市議員들, 民間機關 等이 그에게 授與한 表彰狀도 250個가 넘는다. 에드워드 로이스 美國 聯邦下院議員은 數年 前 김영옥 大領의 業績을 讚揚하며 聯邦議會 速記錄에 이를 公式的으로 남기기도 했다.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왼쪽) 2009年 9月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開校한 김영옥 中學校. 美國 歷史上 最初로 韓國人의 이름을 딴 中學校다. (오른쪽) 2010年 9月 열린 김영옥 在美同胞硏究所 開所式. 왼쪽 두 番째부터 1948年·1952年 올림픽 다이빙 種目 金메달을 獲得한 韓民族 最初의 올림픽 2連霸 選手 새미 리, 티모시 화이트 UCR 總長, 홍명기 後援理事長, 한 名 건너 硏究所長 장태한 敎授다.



    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1945年 2月 유럽戰線에서 싸우다 歸鄕한 김영옥 大領이 로스앤젤레스 汽車驛으로 마중 나온 어머니와 抱擁하는 모습. 當時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김영옥 大領의 歸還消息을 듣고 寫眞 記者를 逆으로 보내 撮影한 것이다.

    比較的 最近에 있었던 措置로는 김영옥中學校 設立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敎育委員會는 2009年 9月 코리아타운에 開校한 한 公立中學校의 이름을 ‘김영옥 中學校(Young Oak Kim Academy)’로 명명하기로 滿場一致로 議決했다. 이에 따라 美國 歷史上 最初로 韓國人의 이름을 딴 中學校가 誕生했다. 校庭 花壇에 無窮花가 심어져 있는 이 學校는 韓國系 學生이 約 10%에 不過하다. 올해 봄 學期에 開設된 韓國語 講座 受講生 33名 가운데 31名이 타 人種이다.

    지난해 3月 리처드 마이어스 前 美國合參議長(豫備役 空軍大將)은 美國 國防大學校 財團 主催로 全國을 巡廻하는 國家安保 심포지엄을 始作하며 1回 場所를 김영옥中學校로 定했다. 個校 2年이 채 되지 않은 김영옥中學校는 이미 로스앤젤레스 韓人 社會를 代表하는 名所로 浮上하고 있다.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州立大學(UCR·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李 ‘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를 設立한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이 大學은 2010年 韓國 政府와 손잡고 세운 在美同胞硏究所의 이름을 ‘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로 定했다. 이 硏究所 亦是 美國 歷史上 最初로 韓國人의 이름을 따 命名된 大學機構다. 同時에 韓國 政府가 1948年 政府 樹立 以來 最初로 國際舞臺에 세운 同胞硏究所이기도 하다. 韓國은 이 硏究所를 世界 到處에 散在한 韓國學 硏究所와 달리 海外 同胞에 對한 硏究, 나아가 地球村 韓民族에 對한 硏究를 하는 硏究機關으로 育成할 計劃이다. 재원은 韓國 政府가 出捐하는 300萬달러, UCR이 내놓은 매칭 펀드, 在美同胞 社會가 寄附하는 100萬달러로 마련했다. 이스라엘과 日本이 재미유대人이나 재미日本人과 손잡고 美國의 對內外 政策에 소리 없이 影響力을 行使하는 現實과 比較할 수 없을 만큼 적은 額數지만 그래도 意味 있는 出發인 것만은 確實하다.

    어린이의 롤모델

    이 硏究所 出帆과 關聯해 한 가지 注目할 만한 것은 關聯 豫算案이 17臺와 18代 韓國 國會를 通過하는 過程에서 한나라당 남경필·鄭鎭碩·김충환·구상찬·이정현 議員, 민주당 이미경·한병도 議員 等의 理解를 바탕으로 超黨籍인 支持를 받았다는 點이다. 韓國 政治權이 政治的 路線을 超越해 김영옥 大領과 關聯된 事案을 힘을 모아 推進한 일은 노무현 政府 時節이던 2005年에도 있었다. 그에게 大韓民國 最高武功勳章人 太極武功勳章을 授與하기 위해 當時 한나라당 남경필·洪準杓·황우여·羅卿瑗 議員과 민주당 이미경·劉在建·宋永吉·한명숙 議員 等 與野 國會議員 100名이 뜻을 모은 것이다. 이들은 함께 이름을 적은 ‘合同支持西’를 發表하며 김영옥 大領에 對한 太極武功勳章 敍勳을 促求했다.

    不世出의 戰爭英雄이자 偉大한 인도주의자였던 김영옥 大領이 남긴 遺産을 未來를 위해 보다 積極的으로 活用하려는 움직임은 以後에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 初等學校 5學年1學期 國語敎科書에 김영옥 大領의 이야기가 4쪽에 걸쳐 실렸다. 現在의 旣成世代가 世宗大王·李舜臣·安重根 等을 韓國이 낳은 英雄이자 役割 모델로 배우고 자랐듯, 이제 韓國의 모든 學生은 김영옥을 배우며 자라게 된 것이다.

    國防大·陸軍本部·陸軍論山訓鍊所·陸軍3士官學校·海軍敎育司令部·海軍士官學校·海軍大學·空軍作戰司令部·空軍士官學校·警察隊 等 軍警機關뿐 아니라 연세대·인하대·금오공대 같은 一般大學, 國民銀行·대영오앤이 等 民間企業도 김영옥 大領의 리더십을 主題로 한 講演을 開催하고 있다. 國防日報와 美洲 中央日報는 紙面을 통해 그의 一代記를 連載했다. 社團法人 유엔人權政策센터(代表 신혜수·정진성·이양희)는 그의 삶을 담은 라디오 다큐드라마를 製作했다. 이 프로그램은 國軍放送에 寄附돼 2007年 첫 放送 後 只今도 再放送 中이다. 美洲 中央放送과 라디오코리아 等을 통해 美國 內에서도 數次 放送됐다. MBC는 그의 一代記를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製作해 亦是 數次에 걸쳐 放送했다. 그의 삶은 앞으로도 繼續 많은 사람에게 感動을 줄 것 같다. CJ E·M 系列社인 tvN이 또 한 番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製作 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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