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복 (1881年)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한규복
出生 1881年 7月 7日 ( 1881-07-07 )
朝鮮 漢城府 평동
死亡 1967年 9月 13日 ( 1967-09-13 ) (86歲)
性別 男性
國籍 조선 朝鮮
대한제국 大韓帝國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대한민국 大韓民國
職業 官僚, 通譯官, 書藝史, 畫家, 言論人

한규복 (韓圭復, 日本式 이름: 井垣圭復 移家키 게이後쿠 , 1881年 7月 7日 ~ 1967年 9月 13日 )은 大韓帝國 의 官僚, 通譯官, 畫家, 書藝家이자 日帝强占期 의 官僚, 畫家, 書藝家로 朝鮮總督府 中樞院 참意圖 지냈다. 解放 後에도 畫家로 活動했고, 企業인, 칼럼니스트로도 活動했다. 日帝强占期 의 信念型 親日派의 한 사람이었다.

1899年 (光武 2年) 官婢奬學生으로 日本 遊學, 東京專門學校 와세다 大學 政經學部에서 修學하다가 1903年 歸國, 大韓帝國 官僚로 任用되어 度支部 注射 , 軍部 度支部 飜譯官 等을 거쳐 度支部 書記官 , 奏任官 을 歷任했다. 1910年 (隆熙 4年) 10月 1日 韓日 合邦 以後에는 朝鮮總督府 高等官 에 任用되어 土地調査局 監査擔當官, 1913年 晋州 郡守 , 以後 東萊 郡守 等을 歷任하였다. 1921年 忠淸南道靑 參與官 , 1924年 慶尙北道靑 參與官 , 1926年 忠淸北道 道知事 , 黃海道 道知事 等을 歷任했다. 1933年 中樞院 參議에 任命되고 이듬해 再選된 뒤 中樞院 參議 에 再選되었다.

解放 後에는 政界에 參與하지 않고 韓國曲子 의 代表理事 等으로 活動하였고, 1949年 反民特委 에 自首한 뒤, 調査받고 풀려났다. 以後 企業 活動과 言論인, 칼럼니스트로 活動했다. 그는 朝鮮總督府 의 植民地 朝鮮人 道知事 經歷者 42名 가운데 背景이 되는 엘리트 出身 高位官僚 8名 中의 한 사람이었다. 書藝 에 能했던 그는 1926年 부터 1930年 의 宣傳(鮮展)에서 5回 受賞하였다. 本貫은 淸州 이고 字(字)는 덕중 (德仲), 號는 온재 (溫齋)이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出生과 數學 [ 編輯 ]

1881年 (高宗 17年) 7月 7日 漢城府 평동(平洞) 19番地에서 注射 한만홍(韓晩洪)과 평산 白氏(平山白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兄 한규호는 求한 말 軍人으로 活動, 步兵 參尉 步兵 部長 을 지냈고 通政大夫에 이르렀으며, 退役 後 1908年 (隆熙 2年) 記號興學會 의 創立에 參與, 會報인 嗜好興學會月報의 後援者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企業人으로도 活動하여 1908年 6月 4日 漢城 의 軟鋼木船운륜(沿江木船運輸) 株式會社의 重役으로 活動하였다.

그의 집안은 相當府院君 한명회 의 從祖父인 開國功臣 한상경 [1] 의 後孫으로, 유암 한계윤 (柳岩 韓繼胤)의 20代孫이다. 한계윤 한명회 와 6寸 兄弟間이며, 外할아버지는 성달생 으로 成勝 성삼문 은 各各 外三寸과 外四寸이었다. 그러나 그의 家計는 沒落하여 下級 武官을 歷任하다가 5大棗부터는 贈職 벼슬만이 傳한다. 한규복의 할아버지 한수익(韓守益)은 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事後 戶曹判書 贈職 되었으며, 曾祖父 한도흥(韓道興)은 戶曹判書 에 追贈되었고, 高祖父 한윤기(韓潤琦)는 好調 參議 에 贈職되었다. 外할아버지 백우혁(白佑赫)은 同志 中樞府 紗를 지냈다.

者(字)는 덕중(德仲)이고, 號는 온재(溫齋)라 하였으며, 書藝作, 그림에는 本名 또는 온재라는 雅號, 樂觀을 썼고 一部 作品에는 온理財(溫二齋)라는 署名을 넣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漢城에서 新學問人 日本語 漢語 (漢語), 英語 를 工夫하다가 1893年 3月 乙未義塾 (乙未義塾) 日本語 學科에 入學, 1897年 3月 乙未義塾 日語學科를 마치고 官立英語學校 로 進學하였다. 그는 獨立協會 萬民共同會 에 加入하여 活動하였다. 그해 11月 6日 情3품으로 大韓帝國 中樞院 2等 衣冠에 選出되었으나 中樞院은 곧 解體되었다. 1899年 (光武 2年) 3月 官立英語學校 를 卒業하였다.

1899年 (光武 2年) 初, 그해의 政府 官費留學生으로 뽑혀 4月 日本 도쿄 로 遊學, 그해 9月 도쿄 神殿中學校(神田中學校)에 編入學하였다. 1900年 3月 神殿中學校 를 卒業하고 도쿄 專門學校 에 入學했다. 東京 專門學校를 거쳐 1901年 9月 11日 와세다 大學 (早稻田大學) 政治經濟學科에 入學하였다. 그러나 1903年 (光武 6年) 7月 15日 3學年 在學 中 와세다 大學 政治經濟科를 修了하고 7月 政府의 名으로 歸國하여, 大韓帝國 의 管理로 勤務를 始作했다.

1902年 에는 와세다 大學 에 다니면서 日本 誘導 圖章인 강도관 (講道館)에 다녔다. 공昇華展開(日本 工勝花雷介)의 《비록日本柔道(秘錄日本柔道)》의 記事와 日本강도관에 照會한 바에 依하면 1902年 한규복 等이 강도관 에 入門하여 誘導 를 배운 것을 確認할 수 있다. [2] 그는 1902年 8月 부터 誘導 를 배웠다고 한다. [3] 日本의 柔道 傳承에 刺戟받은 그는 歸國 後 朝鮮 誘導 團體를 支援하는 한便 上疏를 올려 택견 關聯 人物과 流派를 찾아 支援해줄 것을 政府에 常住하기도 했다.

大韓帝國 官僚 生活 [ 編輯 ]

1903年 大韓帝國 度支部 注射가 되었다. 1904年 (光武 7年) 9月 27日 大韓帝國 國軍 參謀部 飜譯官 步(參謀部飜譯官補)가 되고 判任官 6等(判任官六等)에 任用되었다. 1905年 (光武 8年) 3月 21日 軍部 飜譯官 (飜譯官)으로 昇進, 奏任官 6等(奏任官六等)이 되었다. 以後 軍部 , 度支部 等 여러 部處에서 飜譯官 벼슬 等을 지내고 度支部 書記官과 奏任官을 歷任하였다. 1905年 11月 5日 慶基殿 을 建築하는데 參與한 功勞로 6품으로 昇進하였다. 1906年 度支部 飜譯官으로 옮겼다. 그해 1月 19日 巡陵 비각營建과 標石 樹立에 監督官으로 參與한 功勞로 다시 6品에서 鄭3품으로 가자 , 一躍 昇進하였다.

1906年 3月 31日 度支部 飜譯官 (度支部?譯官) 奏任官 4等(奏任官四等), 5月 31日 度支部 文書과 首席飜譯官(度支部首席?譯官) 奏任官 4等(奏任官四等), 1907年 度支部 書記官 陽地課長(量地課長)을 歷任했다. 1907年 (隆熙 2年) 6月 27日 度支部 書記官, 風池課長으로 在職 中 奏任官 3等으로 昇級하였다. 1907年 首席飜譯官, 이어서 度支部 書記官 (書記官), 土地調査局 書記官을 歷任했다. 1910年 (隆熙 4年) 3月 度支部 土地調査局 書記官 , 奏任官 2等이 되고, 度支部 土地調査局 整理誇張에 補職되었다.

日帝强占期 活動 [ 編輯 ]

總督府 官僚 生活 [ 編輯 ]

1910年 10月 6日 韓日 合倂 條約 締結 以後 다시 朝鮮總督府 高等官 7等에 任用,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1臨時土地調査局) 監査官(監査官)에 任命되었다. 以後 臨時土地調査局 測量課長과 整理課長을 거쳐 朝鮮總督府 土地調査局에서 監査擔當官이 되었다. 1913年 1月 總督府 郡守가 되어 慶尙南道 晋州 郡守 高等官 6等(晉州郡守 高等官6等)이 되고, 慶尙南道 參與官 을 兼職하였다. 1914年 부터 1915年 까지 慶尙南道地方土地調査委員會 調査委員을 歷任했다. 그밖에 農業 團體인 朝鮮農會 慶尙南道支會에 尙衣院으로 加入하였다. 1916年 1917年 慶尙南道地方土地調査委員會 調査委員에 再委囑되었다.

1917年 慶尙南道地方土地調査委員會 調査委員이 되고, 1917年 晋州郡守 在職 中 高等官 5等(高等官5等)으로 昇進했다. 1918年 7月 1日 東萊 郡守 高等官 5等(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發令받았다. 1921年 2月 12日 에는 忠淸南道 參與官(慶尙北道參與官) 高等官 4等(高等官4等)으로 昇進하였다. 7月 22日 다시 忠淸南道 參與官 으로 任命되었다. 1922年 5月 30日 에는 滿洲 로 出張갔다가 10月 에는 東洋協會 視察團의 한 사람이 되어 日本 을 視察하고 1923年 初 되돌아왔다. 1923年 11月 忠淸南道 參與官 으로 在職 中 忠淸南道音樂協會 會長에 選出되었다. 1924年 2月 11日 慶尙北道 參與官으로 옮겼다. 12月 慶尙北道 參與官 在職 中 高等官 3等(高等官3等)으로 昇進하였다.

1926年 8月 에 다시 道知事로 昇進, 8月 14日 忠淸北道 道知事가 되고 1929年 4月 高等官 1等(高等官1等)으로 昇級되었다. 1929年 11月 28日 黃海道 道知事 로 赴任하였다. 1930年 1月 24日 黃海道農民會 會長에 任命되었다. [4] 1930年 2月 黃海道 道知事에 再任命된 뒤 1933年 4月 7日 에 辭職書를 내고 退職했으나 그해 6月 4日 中樞院 勅任官 待遇 參議 (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任命되었다. 中樞院 參議로 在職하면서도 그는 手當에만 依存하지 않고 企業人으로 活動하면서 京城府 敎化團體聯合會 서부교火口委員長을 지내기도 했다. 1934年 中樞院 參議에 再選되었다. 特히 太平洋 戰爭 期間 中 흥아保國團 , 臨戰對策協議會 , 조선임전보국단 , 國民動員總津灰 等 여러 戰爭 支援 團體에 積極 加擔했다. 書藝에도 一家見이 있던 그는 1926年 부터 1930年 의 宣傳(鮮展)에서 4回 걸쳐 受賞하였다.

企業, 社會 團體 活動 [ 編輯 ]

1933年 7月 21日 에는 中樞院 市政調査委員會 學藝部長이 되었다. 10月 21日 에는 小作農審議委員會 委員이 되었다. 1934年 京城府 敎化團體聯合會 西部敎化地球委員長(京城府敎化團體聯合會 西部敎化地區委員長)李 되었다. 1934年 7月 14日 金融 團體의 聯合會人 金融組合聯合會 創立에 參與, 諮問相談驛 [5] 에 委囑되었다. 7月 21日 金融組合聯合會 京畿道 地域 參與에 任命되었다. 1934年 여름 洪水로 朝鮮 三南 地方에 水害가 심해지자, 그해 8月 30日 朝鮮總督府 에서 치소調査委員會 를 設置할 때 그는 民間側 委員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다.

1935年 2月 6日 에는 京城府 에서 윤치호 等이 組織한 啓明俱樂部 財團 (啓明俱樂部財團) 委員의 한 사람에 委囑되었다. [6] 1930年 臺 中盤 以後 그는 各種 啓蒙, 講演會를 다니면서 勤儉 節約의 必要性, 不必要한 奢侈品과 物件 强賣, 사재기 等을 하지 말 것, 貯蓄을 하여 家事 經濟에 보탬이 되게 할 것, 賭博과 노름, 射倖性 復權 等 헛된 一攫千金을 꿈꾸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여 代價를 取할 것을 强調하였다.

1935年 6月 警성양조株式會社 取締役 會長(京城釀造株式會社取締役會長)李 되고, 中央主潮組合聯合會 會長(中鮮酒造組合聯合會會長)에도 被選되었다.

日本 政府는 한규복에게 여러次例 勳章을 授與해 功績을 認定했다. 1929年 勳3等 서보장을 받는 等 退官할 때에는 鄭4位 勳3等에 西魏되어 있었다. 1935年 에 總督府가 編纂한 《朝鮮功勞者명감》에 收錄된 朝鮮人 功勞者 353名 中 한 名이기도 하다. [7] [8] 人物評은 “卓越한 識見과 精麗한 行動으로 出世”韓 人物로 되어 있으며, 所信과 推進力이 있어 가는 곳마다 治績을 쌓고 民情을 純化시켰다고 적혀 있다.

參政權 獲得 計劃과 失敗 [ 編輯 ]

1936年 에는 그는 參政權 을 얻어낼 計劃을 세웠으나, 日帝 當局의 反對로 霧散되었다. [9] 이규완 朝鮮人 參政權 론, 自治 卷 獲得論에 共感하게 된 그는 박중양 等과 함께 朝鮮總督府 에 朝鮮人 參政權을 許容해줄 것을 여러 番 建議하였으나 번번히 默殺되었다.

志願兵制 1930年 臺 中盤부터 一部 親日 維持層 사이에서 自發的으로 提起되었다. 먼저 박춘금 (朴春琴)李 大議事 (代議士)가 된 後 日本國會에서 이 問題를 들고 나왔고, 그後 親日人士들에 依해 여러 番 建議되었다. 1936年 11月 24日 京城府會議員 조병상(曺秉相), 中樞院參議人 한규복 等이 中心이 되어 30餘 名의 懇談會를 열어 具體的으로 이 問題를 推進키 위해 委員 8名으로 期成會를 構成하고 1937年 發會式(發會式)을 가질 豫定이었다. [9] 그러나 日本 當局은 이 問題가 參政權 하고도 關係가 있다 하여 一旦 中止시켰다. [9] 以後에도 그는 朝鮮總督府 에 參政權 許容을 要請하였지만 거절당한다.

中日 戰爭 戰後 [ 編輯 ]

1937年 1月 放送宣傳協議會 (放送宣傳協議會) 委員으로 委囑되어 수양講座·否認講座·常識講座의 講師로 出演하였고, 7月 中樞院 主催 行事에 參與하였다. 同年 朝鮮總督府 에서 朝鮮人들의 所得을 調査할 目的으로 國民所得調査委員會를 構成하자, 한규복은 國民所得調査委員會 京城地域 管內 委員으로 選任되었다. 8月 3日 부터는 10月 까지 總督府 學務局에서 지나事變 以後 洶洶한 民心을 收拾하고자 巡廻時局講演委員會를 組織할 때 演士가 되어 서울 과 各地에 時局講演을 다녔다. 8月 16日 에는 慶尙南道 咸陽郡 에서 時局講演을 하였다. 9月 10日 에는 龍人工步轎 大講堂에서 龍仁郡 地域 時局講演會를 主催하였다.

1938年 朝鮮簡易生命保險事業 諮問委員會 諮問委員에 委囑되었다. 1938年 3月 3日 城南高等普通學校 財團인 原石學院 財團 理事가 되었다. 5月 財務懇談會(財務懇談會) 會長에 選任되었다. 5月 17日 逮捕된 法學者 정광현 에 對해 善處를 呼訴하여 석방시켰다. [10] 西大門警察署 署長을 만나 '나를 봐서라도 정광현 에게 善處를 베풀어 달라'고 付託하였다. 5月 17日 午前 9時 30分, 署長은 한규복의 意見을 欣快히 받아들였다. [10]

1938年 8月 設置된 總督府內 時局對策調査委員會 委員 97名 가운데 한규복은 김연수 (金秊洙), 박영철(朴榮喆), 박중양 , 박흥식 , 윤덕영 , 이기린(李基燐), 李承雨 (李升雨), 崔麟 (崔麟), 한상룡 (韓相龍), 현준호 (玄俊鎬) 等과 함께 朝鮮人 委員 11名 가운데 1名으로 選任되기도 하였다. 그해 陸軍特別志願兵令 이 恐怖, 施行되자 한규복은 尹致昊, 李承雨, 조병상, 조성근 等과 함께 志願兵制 祝賀會 構成을 위한 妥協發起人會를 열고 實行委員陣을 構成하였다. 7月 8日 國民精神總動員聯盟 京城支會 設立에 參與하고 理事가 되었다. 10月 7日 에는 中日戰爭 等 負傷兵을 慰問하기 위해 용산陸軍病院 을 訪問하고 金一封 을 支給하였다. [11]

太平洋 戰爭 戰後 [ 編輯 ]

1939年 2月 2日 國民精神總動員聯盟 各 鄭(東)地域 聯盟 愛國半 創設에 參與하였으나 윤치호 等의 不參으로 金明俊 , 李承雨 , 조병상 等 參與者들 一部와 함께 組織 着手에 나섰다.

1939年 6月 4日 中樞院 參議로 再選되었다. 8月 5日 에는 國民精神總動員聯盟 主催로 全國 巡廻講演을 할 때, 巡廻講師가 되어 國民 貯蓄 奬勵를 目的으로 '百億 貯蓄 生活 刷新'이라는 主題로 全國 巡廻講演을 다녔다. 9月 26日 에는 各地의 勞務者와 貧民을 救濟하기 위해 만든 社會調査委員會 委員에 被任되었다. [12] 그해 9月 30日 京城 에서 資本金 百萬원을 投資하여 朝鮮共營會社 (朝鮮工營會社)를 創立하고 代表理事 社長에 選出되었다. 그러나 그해 11月 5日 朝鮮中央賃金委員會 臨時委員으로 選任되면서 辭退했다. 12月 22日 稅制調査委員會 委員에 選任되었다. 1939年 부터 그는 京城府 , 충주군 , 咸陽郡 , 水原郡 , 龍仁郡 , 楊州郡 等을 다니며 貯蓄을 할 것을 主張하였다.

1939年 朝鮮金融組合聯合會 參與에 選任되었다. 1940年 5月 30日 에는 東亞日報 에 "貯蓄과 國民生活"이라는 主題의 칼럼을 發表하였다. [13] 5月 30日 5月 31日 , 6月 1日 에는 京城中央放送局에 出演하여 貯蓄의 必要性을 力說하였다. 5月 31日 午後 7時 30分에는 京城第2放送局에 出演하여 貯蓄의 必要性에 對하여 講演하였다.

1941年 12月 重船主潮組合聯合會 會長에서 解任되었다. 1942年 4月 朝鮮脈子株式會社 (朝鮮?子株式會社) 取締役 會長에 選任되었다. 그해 5月 에는 財務懇談會 會長職을 辭退했다.

1942年 徵兵制 實施가 決定되고 朝鮮人 參政權 許容 問題가 日本 議會 衆議院 貴族院 에 上程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의 副團長 資格으로 日本 首相과 參謀總長에게 感謝 電報文을 打電하고, 그해 5月 15日 京城 YMCA에서 이광수 (李光洙) 等 名士들을 招請해 演說會를 開催하기도 하였다. 1942年 9月 에는 조선국子株式會社 會長에 就任하였으나 1943年 6月 辭退하였다. 1943年 國民總力聯盟 徵兵記念事業實行委員會 委員의 한 사람에 被選되었다.

光復 以後 [ 編輯 ]

反民特委 自首와 審問 [ 編輯 ]

光復 直後 一切의 公職을 辭退하고 蟄居하였다. 1945年 9月 2日 美軍政廳 拷問에 任命되었으나 辭讓하였다. 8月 16日 韓國曲子株式會社 (韓國穀子株式會社)를 設立하고 代表理事 社長이 되었다. 서울 鍾路區 내수동 에 한동안 居住하다가, 뒤에 서울 城北區 長位洞 으로 移徙하였다.

大韓民國 建國 後인 1949年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에 自首해 왔으나, 反民特委 活動이 妨害를 받으면서 不起訴處分을 받았다. [14] 一說에는 1949年 4月 23日 한규복이 逮捕 [15] , 檢擧되었다는 記事가 報道되었으나 [16] , 그는 8月 12日 自首하는 便紙를 反民特委 앞으로 부친 뒤 서울驛 廣場에서 自首 所感을 發表하였다.

自首 便紙

天運(天運)이 循環下士 우리 大韓民國 이 誕生되니 山川(山川)과 草木이 다시 金빛이 나고 잃었던 自由가 우리 몸에 다시 오니 一般의 歡喜는 무엇으로 形容하리요. 하물며 日帝時代에 許多의 壓制를 견디면서 管理生活을 繼續한 本人으로서는 더욱더욱 感慨無量이외다. 本人은 大韓帝國時代에 官費留學生으로 日本에 留學하여 조도전 大學早에서 政治經濟科를 卒業한 故로 行政官으로 出世하여 民衆指導에 努力하겠다는 理想을 가지고 關係(官界)에 投身하여 道支部 書記官으로 在任한 채로 倂合을 當하여 臨時土地調査局 監査官에 任命되었을 때 本人은 自身處理에 對하여 再三 考慮한 結果 나의 地力과 聖曆의 限度대로 民衆을 指導하는 것이 차라리 유리하다는 見解로 管理生活을 繼續하여 道知事 를 歷任하고 正4位 勳3等까지 되었으니 가위 高級官吏의 地位까지 漸進하였다고 하겠으며 30餘 年間 管理生活을 하는 中에 民衆의 啓發을 如何(如何)韓 程度로 하였느냐 하면 具體的으로 陳述할 材料는 提供치 못하나 다만 良心的으로 民衆을 指導하고 또한 民衆의 意志를 代表하여 抗拒할 點은 어디까지든지 港論도 辭讓치 아니 하였으며 平凡한 政治로 民衆에 臨하고 公正렴筋(公正廉謹)으로서 關係一生(官界一生)의 目標로 삼은 것은 千人(天人)李 公認(共認)하는 바 옵니다. 그러하니 民衆에 對하여 幸福이 되고 利益이 된 點을 一一이 收去치는 못하고 다만 長久한 歲月의 管理生活을 하였다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辨明하오리까. 今日에 地下餘는 전일의 良心的으로 民衆을 위하여 陰으로 陽으로 報道, 努力한 點은 無形(無形)으로 돌아가고 다만 關係生活(官界生活)을 하여 日帝에 阿附한 字로 追認되어 이 點이 忌憚불氣(慨歎不已)할 뿐더러 管理生活로 一生을 보낸 것이 懺悔되는 바이며 謹愼(勤愼)할 뿐이 옵니다. 오직 賢明한 當局의 善惡을 分別下士 寬大한 處分만 바라옵고 敢히 所懷(所懷)의 一端을 진백(陳白)하나이다.

短期 4282年 8月 12日
위 人 한규복

反民行爲特別調査委員會 貴中
 
1949年 8月 12日 自首 直前에 反民特委 에 보낸 便紙

1949年 8月 12日 反民特委 에 便紙를 보낸 뒤 그는 서울 에 있는 反民特委 事務室로 自首, 스스로 찾아갔다. 그는 自首한 點이 勘案되어 拘束되지 않고, 出頭 形式으로 調査를 받았다.

反民特委 調査와 釋放 [ 編輯 ]

反民特委 에 逮捕되었을 當時 한규복은 日帝 治下에서 官吏를 지냈을 뿐 “良心에 비추어 民族精神을 忘却한 事實은 全혀 없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反民特委는 官婢로 留學을 마치고 大韓帝國 官吏로 일하다가 “韓日合倂과 同時에 다시 倭人에게 阿附하여 朝鮮總督政治에 獻身한 唯一한 親日分子”로 評價했다. [14] 當時 그를 심문한 이는 委員長 異人 辯護士 였다.

나는 良心的으로 民衆을 指導하고 또한 民衆의 意志를 代表하여 抗拒할 點은 어디까지나 抗論을 辭讓치 않고, 平凡한 政治로 民衆에 臨하고 公明念根으로써 關係 一生의 目標로 삼은 것은 賤人이 모두 認定하는 바이다. [17]

한규복은 自身은 오로지 民衆의 啓發 報道를 위해 일했음을 强調하였다. [17] 또한 自身은 "民族 指導者"라며 自負心을 드러냈다. [18] 審問 過程에서 그는 잘못된 點이 있다면 合法的인 테두리 안에서 抵抗하되, 朝鮮總督府 의 政策이나 日本의 政策을 盲信, 盲從하지는 않았다며 그는 始終一貫 淡淡한 態度로 審問에 應하였다.

親日派 群像 》에서는 한규복과 全羅北道 道知事 를 지낸 손영목 에 對하여는 "日本人들에게 無條件 親日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主張을 認定해 주었다. [18] 그에 對해서는 盲目的인 親日派는 아니라는 意見이 存在하여 그의 處罰에는 反對하는 輿論도 나타났다.

1949年 8月 31日 反民特委 最終 心理에서 그는 反民法(第4條 2項, 3項) 違反의 嫌疑를 받았지만 起訴猶豫 處分을 받았다. '事實及理由 本件은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 의 意見書 記載 犯罪事實에 關하여 搜査한 바, 被疑者는 韓日合邦 前부터 日帝時代까지 30餘年 間에 亘하여 管理生活을 繼續하고 最後에 中樞院 參議 까지 任命받은 事實을 認定할 수 있겠으나, 平素 그가 惡質的으로 民族에게 害를 끼쳤다는 顯著한 證據가 없음으로 注文과 如히 決定함'이라고 決定되었다. 그는 順順히 搜査에 協助, 陳述하여 情狀參酌이 되었다. 1950年 初 한규복은 김시권 (金時權) 等과 함께 起訴猶豫 處分을 받았다.

最後 [ 編輯 ]

1950年 부터 淸州韓氏 中央宗親會 (淸州韓氏中宗親會) 會長에 推戴되어 1954年 까지 在職했다. 그는 楷書, 草書 等 다양한 書體의 글씨를 남겼고, 話法은 水墨畫, 水墨淡彩畫, 컬러 水墨畫와, 素材로는 風景畫, 바위, 蘭草, 나무 等 다양한 主題의 作品을 남겼다.

1950年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大邱로 갔다. 한동안 韓國曲子 運營과 宗親會 일 以外에는 辭讓하며 蟄居하였다. 1960年 7月 2日 에는 週間綜合雜誌 週刊對中 (週刊大衆) 誌의 同人이자 筆陣으로 參與하였다. [19] 그밖에 古書畵, 美術品, 그림 感情, 鑑別도 하였다. 1959年 3月 6日 손재형 , 최승만 및 美術系 專門家, 大學敎授 470餘名과 함께 秋史 김정희 作品을 鑑定하고 評論을 남겼다. [20]

1967年 9月 13日 午前 3時 서울 城北區 長位洞 6-193番地 自宅에서 死亡했다. [21]

事後 [ 編輯 ]

墓所는 서울特別市 永登浦區 瑞草洞( 1973年 서울市 嶺東出張所로 編入되었다가 現 瑞草區 로 編入)에 否認 平壤조氏 조인옥, 金海金氏 김학인과 合葬되었다. 그의 그림, 글씨 作品 中 一部만이 現在 傳한다.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中 中樞院, 道知事, 도 參與官 部門,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官僚, 中樞院, 親日團體 部門에 各各 選定되었다.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著作物 [ 編輯 ]

그는 1926年 ~ 1930年 朝鮮美術展覽會(朝鮮美術展覽會, 略稱 '선전(鮮展)' 또는 '朝鮮美展(朝鮮美展))에 公式 데뷔, 다섯 番 入選한 畫家였으며, 水墨 淡彩畫와 붓글씨 書藝作을 多數 남겼다. 그의 作品들 一部는 解放 後 그가 親日派로 몰려 규탄당하면서 사라졌고, 6.25 戰爭 等을 겪으며 一部 사라졌지만, 6.25 以後의 作品 一部는 現在 傳해지고 있다.

그림 [ 編輯 ]

  • 菊花도(菊花圖)
  • 蘭草(蘭草)
  • 怪石란 [22]
  • 梅花, 蘭草그림 세트 [23]
  • 梅花
  • 묵매도 [24]
  • 홍매도(紅梅圖), 1950年
  • 墨蘭圖, 1960年
  • 월매도(月梅圖), 1957年
  • 매죽도, 서병오와 共同 作品으로 한규복이 梅花를 그렸고, 서병오가 대나무를 그렸으며, 그림 左側 上段에 話題로 七言絶句의 漢字 詩를 세로로 썼다.
  • 香脂美人(香之美人) - 蘭草花盆 그림. 컬러 水墨淡彩畫
  • 백매화 - 白色 梅花꽃이 살짝 핀 나무 1點 그림

기타 [ 編輯 ]

  • 梅花 3點 屛風 - 緋緞에 梅花나무 3個를 그린 屛風. 上段에는 그가 지은 詩 1首가 親筆로 써져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그의 아들 한용성은 空軍 少領을 지냈고, 다른 아들 한용관은 公務員 으로 副理事官 으로 退職했다. 1964年 11月 28日 京鄕新聞 記事에 그의 아들 한용관의 結婚 記事가 報道되었다. 主禮는 김대우 였다. [25]

評價 [ 編輯 ]

한규복만큼 令達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初期에 高度間에 다녔던 朝鮮人 學生들은 거의 다 抵抗보다 體制 順應을 選好했다. [26]

그가 盲目的인 親日派 民族反逆者였는지 아닌지 與否에 對해서는 當代에도 異見이 存在하였다. 反民特委 의 報告書에는 그를“한일합병과 同時에 다시 倭人에게 阿附하여 朝鮮總督政治에 獻身한 唯一한 親日分子”로 評價했다. [14]

그러나 民族政經文化硏究所 의 報告書인 《親日派 群像》에서는 盲目的인 親日派는 아니라고 認定해 주었다. 《親日派 群像》에 依하면 그를 가리켜 "이러한 機會에 一層 積極 盡忠報國하면 自己 個人은 勿論이요, 民族的으로도 將來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者"로 分類하였다. [27] 한규복과 全羅北道 道知事 를 지낸 손영목 에 對하여는 "日本人들에게 無條件 親日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主張을 받아들였다. [18]

社會運動家이자 文學評論家인 김두용 (金斗鎔)은 그가 惡性 反逆者는 아닌 것으로 봤다. 그에 依하면 '高官 轉職者, 親日派의 巨頭 等은 旣張之舞(巳張之舞 [28] )이니 이러한 機會에 一層 積極 盡忠報國하면 自己 個人은 勿論이요, 우리 民族的으로도 將來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者 [29] '라고 봤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明澮의 할아버지 한상질의 동생으로, 韓明澮를 養育하였다.
  2. 김정행, 《無挑론》 (大寒미디어, 1997) 129페이지
  3. 이학래, 《韓國柔道發達史》 (보경文化史, 1989) 37페이지
  4. 朝鮮總督府 官報 1930年 1月 24日子
  5. "금조聯合會, 諮問機關 設置", 조선중앙일보 1934年 7月 22日子 4面
  6. "啓明俱樂部財團組織 十萬圓으로 會館新築", 東亞日報 1935年 2月 6日子 2面, 社會面
  7.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朝鮮功勞者명감’親日 朝鮮人 3百53名 記錄 - 現役 國會議員 2002年 發表한 親日名單 日치 相當數”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4月 22日에 確認함 .  
  8.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3百53名 中 2百56名 名單”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4月 22日에 確認함 .  
  9. 송건호, 《송건호全集 4: 韓國現代史 2》(한길사, 2002) 100페이지
  10. 윤치호, 《尹致昊 日記 1916-1943》 (김상태 驛, 역사비평사, 2001) 381페이지
  11. "中樞院參議 傷病兵慰問", 東亞日報 1938年 10月 7日子 2面, 社會面
  12. "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東亞日報 1939年 9月 26日子 2面, 社會面
  13. "貯蓄과 國民生活", 東亞日報 1940年 5月 30日子 5面, 生活/文化面
  14. “意見書 - 한규복” .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 2008年 4月 2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5. "愼鏞頊을 再拘束?", 東亞日報 1949年 04月 24日子 2面 社會面
  16. "한규복 等 檢擧", 自由新聞 1949年 4月 23日子 2面
  17. 박지향, 《尹致昊의 協力日記》 (圖書出版 이숲, 2012) 86페이지
  18. 박지향, 《尹致昊의 協力日記》 (圖書出版 이숲, 2012) 87페이지
  19. "週刊大衆" 創刊, 東亞日報 1960年7月 2日子 4面, 生活/文化面
  20. "古書藝와 秋史", 朝鮮日報 1959.03.06 4面 生活/文化面
  21. "讀者 가이드", 朝鮮日報 1967.09.16 3面 社會面
  22. “保管된 寫本” . 2017年 4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4月 17日에 確認함 .  
  23. “保管된 寫本” . 2017年 4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4月 17日에 確認함 .  
  24. 어몽룡(魚夢龍)李 그린 같은 題目의 다른 묵매도度 存在한다.
  25. 京鄕新聞 1964年 11月 28日子 7面, 社會面
  26. 人物과사상사, 《人物과 思想 2004年 7月號》 (人物과사상사, 2004) 212페이지
  27. 김학진·鄭雲鉉 驛, 《親日派罪狀機》(학민사, 1993), 353페이지
  28. 이미 춘 춤
  29. 김인덕, 《日帝時代 民族解放運動가 硏究》 (국학자료원 펴냄, 2002) 67페이지
前任
쓰쓰이 다케오
(朝鮮總督府 最後의 黃海道知事, 留任)
第2代 美軍政 黃海道知事
1945年 9月 2日 ~ 1946年 1月
後任
최창덕 (署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