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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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이탈리아語: Michelangelo
Buonarroti
身上情報
本名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出生 1475年 3月 6日 ( 1475-03-06 )
이탈리아 카프레歲
死亡 1564年 2月 18日 ( 1564-02-18 ) (88歲)
이탈리아 로마
職業 彫刻家 , 制度史 , 畫家 , 建築家 , 是認 , 技術者 , general contractor , 作家
國籍 이탈리아
스승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 Bertoldo di Giovanni , 안젤로 폴리치아노
弟子 Guglielmo della Porta
分野 조각 , 會話 , 建築 ,
思潮 古典主義
主要 作品
다비드 , 아담의 創造 , 피에타
影響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 이탈리아語 :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 文化語 : 미껠란젤로 部伍羅老띠, 1475年 3月 6日 ~ 1564年 2月 18日 )는 이탈리아 彫刻家 , 畫家 , 建築家 , 是認 이다. 르네상스 時期를 代表하는 巨匠으로, 피렌체, 로마 等 이탈리아 여러 地域에 居住하면서 수많은 傑作을 남긴 偉大한 藝術家로 손꼽힌다. 그의 作品은 人生의 苦惱, 社會의 不正과 對決한 憤怒, 信仰을 美的으로 잘 조화시킨 것으로 評價된다.

生涯 [ 編輯 ]

그림工夫 [ 編輯 ]

미켈란젤로는 幼年 時節부터 조토 마사치오 의 作品들을 習作하며 그림에 많은 關心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少年 미켈란젤로의 才能을 알아본 메디치가 에서 아버지를 說得한 德分에 美術 工夫를 할 수 있었다. [1] 13歲 때 畫家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4歲 때부터 메디치 家門의 保護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 를 통하여 도나텔로 作品을 배웠다. [2]

피에타 [ 編輯 ]

피에타

1499年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滯留 中이었던 프랑스 出身 樞機卿 張 드 빌레르 의 依賴로 後에 性베드로 大聖堂 에 놓일 피에타를 完成했다. 이 作品은 르네상스 時代 彫刻 藝術의 代表的인 名作으로, 그의 수많은 피에타 喪 中 最初의 作品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作品을 자랑스럽게 여겨 唯一하게 直接 自身의 이름을 새겼다.

다비드 [ 編輯 ]

다비드

1501年 피렌체로 돌아와 市廳의 委託으로 다비드 를, 卽 少年 다윗 조각을 3年에 걸쳐 完成하였다. 繼續하여 原形 浮彫인 性 帽子를 만들고, 原形火 性 家族을 그렸다. 1504年 피렌체 市廳의 委囑으로 大會場의 壁畫 카시나 水中 接戰度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便 壁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가 앙기아리 騎馬 接戰度를 그렸으므로 競爭을 하게 되었다.

시스티나 聖堂 天障畫 [ 編輯 ]

1508年 바티칸 사도 宮殿 의 시스티나 聖堂의 天障畫를 委囑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苦痛에도 4年 만에 完成하였다. 이효성 作家가 쓴 계몽사 그림偉人傳記《미켈란젤로》에 따르면, 當時 미켈란젤로는 비둘기의 허리처럼 허리가 굽혀지는 듯한 苦痛속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520年 피렌체의 메디치가 禮拜堂에 安置할 彫刻像을 10年에 걸쳐 彫刻하는 한便, 산 로렌초 聖堂 附屬 圖書館 入口를 建築하였다. 이효성 作家가 쓴 계몽사 그림偉人傳記《미켈란젤로》에 따르면, 피렌체 共和國을 사랑한 미켈란젤로는 1529年 獨逸 카를 5歲 君의 피렌체 包圍 때 防衛 委員으로 뽑혀 을 쌓았다. 하지만 피렌체를 占領한 카를 5歲 는 城을 쌓아서 自身과 싸운 미켈란젤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의 才能을 尊重하였기 때문이다.

시스티나 聖堂 大壁畫 [ 編輯 ]

後에 메디치 가의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와 사이가 나빠져, 1534年 카를 5歲가 侵略할 때에 防衛 議員으로서 城을 쌓아서 故鄕을 지키고자 할 程度로 사랑하는 故鄕인 피렌체 를 永遠히 떠나 로마에 定着했다. 피렌체를 떠날 때 그는 같이 일한 勞動者 들에게 自身의 作品 을 팔아서 賃金 으로 代身할 것을 付託했다고 한다. [1]

로마로 居住地를 옮긴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敎皇 바오로 3歲 로부터 시스티나 경당 의 正面 大壁畫를 委囑받고, 老齡으로 발板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年에 걸쳐 < 最後의 審判 >을 完成하였다. 바오로 3世는 미켈란젤로의 實力을 尊重하여, 어느 樞機卿이 미켈란젤로를 無知하다고 업신餘記者, "無識한 사람은 樞機卿님입니다. 樞機卿님은 미켈란젤로의 作品을 理解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 주었다 한다.(이효성(1996))

1550年 바티칸 파올리나 禮拜堂 프레스코 壁畫 < 바오로 의 灰心>(1549年)과 < 十字架의 베드로 >(1550年, 聖 베드로가 十字架에 거꾸로 매달려 處刑되는 殉敎 그림)를 完成했다. 1542年 敎皇 바오로 3世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出發點인 聖 베드로 聖 바오로 를 그려 줄 것을 付託했고, 미켈란젤로는 基督敎 共同體의 宣敎師 로서 敬虔하게 살아간 두 成人 의 그림을 그리면서 로마 가톨릭 의 指導者인 敎宗 들을 批判하는 뜻을 담아냈다. [3]

1550年代 以後 미켈란젤로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十字架에 매달린 예수 를 그린 열두 點의 드로잉을 남긴다. 이는 그의 晩年 스타일을 代表하는 것으로 評價된다.

미켈란젤로는 聖 베드로 大聖殿 의 돔, 聖 베드로 大聖殿 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 론다니니 等을 未完成으로 남긴 채 1564年 89歲를 一期로 긴 生涯를 로마에서 마쳤다.

율리오 2歲의 英妙와 <毛細> 1505~1545 [ 編輯 ]

1505年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任命된 敎皇 율리오 2歲 의 招待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敎皇의 墓를 짓는 일을 委囑받았다. 두 사람은 함께 巨大한 藝術 作品을 想像하는 同時에 世界의 여덟 番째 驚異를 만들 꿈을 꾸었다. 3層 높이에 實物大 彫刻像 40點, 壁龕 , 엔태블러처, [4] 怪異한 裝飾物, 靑銅 扶助 等이 包含된 巨大한 建築物 構想했다. [5]

르네상스 時期의 가장 雄壯하고 高尙한 葬禮 記念物 中 하나인 이 建築物은 厖大한 作業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平生의 負擔으로 남았다. 그의 電氣 作家이자 弟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나는 이 英妙에 묶여서 靑春을 다 보내고 말았다."라고 不平했다. [6]

毛細

敎皇의 後援을 받았으나, 미켈란젤로는 이 作業 外에도 수많은 作業을 맡아서 進行했기에 무덤을 完工하는 데 無慮 40年이나 걸렸다. 本來 城 베드로 大聖堂에 세워질 計劃이었으나, 나중에 율리오 2歲를 記念하는 敎會로, 베드로 가 投獄되었을 때 묶였던 쇠사슬이 保管된 산 피에트로 人 빈콜리 聖堂 에 세워졌다. 完成된 모습은 처음 構想과 달리 2層으로 構成되어 있었으나, 壯大하기는 如前히 마찬가지였다. [5]

바닥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의 古代 廢墟에서 가져온 60센티미터 높이의 '오래된 大理石' 조각 열세 個를 깔아 大佐로 삼았고, 그 위에 彫刻像을 놓아서 돋보이게 만들었다. 2層의 네 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아져서 觀覽者 視線을 저절로 하늘로 向하게 誘導한다. 기둥 위의 기다란 촛臺 네 個와 人間 形態의 文章은 建築物 全體가 하늘로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造成한다. 위에 뚫린 直四角形 窓門 넷과 오픈 아치에서는 敎會 안쪽의 合唱隊 목소리가 울려나와 마치 天使들이 靈魂을 迎接하는 것 같은 雰圍氣를 자아낸다. 地上에서 天上으로 自然스레 靈魂이 旅行할 수 있도록 奉仕하는 建築物을 이룩한 것이다. [7]

아래層 中央에 놓인 1545年에 完成한 <毛細>床이 가장 有名하다. [8] “덩치가 엄청나게 큰 堂堂한 人物이라는 느낌이 實際와 想像 兩쪽 側面 모두에서 作動한다. 그는 마치 하느님에게 말을 걸려는 것처럼 側面을 凝視한다. 그는 이미 神聖을 보고 온 사람이므로 그의 얼굴은 人間 以上의 얼굴이며, 따라서 平凡한 人間들로서는 敢히 쳐다볼 수 없는 얼굴이다. 相對方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 물결치는 얼굴 筋肉, 暴風雨 같은 머리카락, 짧은 두 뿔(모세가 시나이 山에서 下山할 때 그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後光을 象徵한다) 等이 <毛細>가 내뿜는 强烈한 表現力에 寄與한다. 기다란 오른손 손가락들은 묵직한 턱鬚髥의 끝部分을 잡아당기고 있다. 潛在意識 속 생각이 無意識的인 不安한 動作을 活性化한 것이다. 소매 없는, 느슨한 상의는 大理石 彫刻의 한 傑作으로, 모세의 筋肉 構造를 감추는가 하면 드러낸다. 한便 무릎 위로 흘러넘칠 程度로 過度해 보이는 옷자락이 豫言者의 獨特하면서도 느슨한 脚絆과 신발을 오히려 잘 드러낸다.” [9]

그 左右의 두 女人像 <라헬>과 <레아>는 미켈란젤로가 穩全히 完成한 最後의 彫刻像이다. 하늘에 呼訴하는 듯한 姿勢를 取한 라헬과 거울을 들여다보는 姿勢로 땅을 志向하는 레아는 서로 짝을 이루면서 各各 信仰과 先行, 冥想的 生活과 活動的 生活을 象徵한다. 本來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男子 捕虜들과 달리, 女性이 모세의 左右에 자리 잡음으로써 靈廟 全體는 이스라엘 民族의 解放을 위한 모세의 鬪爭(身體性)李 아니라 祈禱와 冥想이라는 靈的 言語(精神性)를 表現하게 되었다. 이는 이 英妙를 처음 構想했을 때인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와 이 英妙를 完成했을 때인 일흔 살의 미켈란젤로의 差異를 보여 주는 듯하다. [10]

2層 한가운데 누운 人物이 이 英妙의 主人인 敎皇 율리오 2歲이고, 서 있는 帽子上은 聖母 마리아와 아기 예수이다. 墓를 爲해 만든 彫刻像 中 6點은 最終的으로 排除했다. 그中 <反抗하는 奴隸>와 <죽어가는 奴隸>로 알려진 彫刻像 2點은 루브르 博物館 에 保管되어 있고, 나머지 4點은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갤러리에 있다. [11]

시스티나 경당의 天障 壁畫, 1508~1512 [ 編輯 ]

미켈란젤로의 天障畫 (시스티나 聖堂)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天障을 4年에 걸쳐 作業하였다(1508~1512). 1508年 敎皇 율리오 2歲 미켈란젤로 에게 시스티나 경당 의 天障을 그림 으로 裝飾할 것을 命한다. 콘디비의 說明에 따르면, 브라만테 聖 베드로 大聖堂 을 作業 中이었는데, 미켈란젤로가 敎皇의 墓 公社에 委囑되었다는 事實에 憤慨하다가 敎皇을 說得해 미켈란젤로가 失敗하도록 그에게 生疏한 課題를 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元來 天障을 支撐하는 三角 穹窿에 열두 弟子를 그리고, 天障 中央에 裝飾으로 處理하라는 委囑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世를 說得해 裁量權을 얻고, 天地創造, 人類의 墮落, 豫言者를 통한 救援의 約束, 그리스도의 系譜 等 다양하고 더 精巧한 作品을 提示했다. 이 作業은 가톨릭 敎理 大部分을 表現하는 그림들이다.

作品은 500평방미터의 天障 全體를 아우르며, 300名 以上의 人物을 包含하고 있다. 天障 한가운데에는 創世記에 나오는 아홉 가지 이야기로 構成되어 있고, 크게 세 部分으로 나뉜다. 하느님의 天地 創造, 하느님의 人間 創造와 하느님 恩惠 밖으로 墮落한 人間,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家族이 보여 주는 人間의 狀態이다. 天障을 支撐하는 三角 穹窿에는 예수 의 誕生을 豫言하는 人間 열두 名이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 豫言者 일곱 사람과 古典 世界에 나오는 巫女 다섯이다. 天井 壁畫에서 가장 有名한 그림은 아담의 創造,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洪水, 豫言者 예레미아 , 그리고 쿠마에 巫女 이다.

미켈란젤로는 4年 동안 발板 위에 누워서 作業해야 했고, 이로 因해 關節炎 筋肉 痙攣을 얻었다. 天障에서 떨어지는 물감 顔料로 因해 눈病 도 생겼으나 1512年 마침내 作品을 完成했다.

시스티나 경당의 <最後의 審判> 1535~1541 [ 編輯 ]

미켈란젤로의 <最後의 審判>

1535年 미켈란젤로는 敎皇 바오로 3歲 로부터 시스티나 경당 의 正面 大壁畫를 委囑받고, 6年에 걸쳐 <最後의 審判>을 完成했다.

作品 目錄 [ 編輯 ]

조각 [ 編輯 ]

그림 [ 編輯 ]

天地創造

미켈란젤로의 말 [ 編輯 ]

  • 그 안에 죽음의 씨앗이 없는 생각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생각이다.
  • 나는 老人이고 죽음은 내게서 靑春의 꿈을 빼앗아갔다. 老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老年이 되었을 때 自身이 動員할 수 있는 忍耐心을 품고 그 老年을 참을 수 있기를. 왜냐하면 老年이란 미리 想像할 수는 없는 일이니.
  • 나는 돌덩어리를 彫刻할 뿐이지만, 그女는 하늘의 藝術品, 人間이 아니라 新星입니다. (연인 비토리아 콜론나의 아름다움을 讚揚하면서)
  • 내 作業에서 믿을 만한 길잡이는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내 앞에 하나의 生得權으로 놓여 있으며, 두 藝術[그림과 彫刻]에는 거울이요, 燈불입니다.
  • 사랑이라는 것은/ 그 어떤 監督하는 스승도 必要 없고/ 사랑하는 자는 잠도 자지 않는다./ 連絡責 같은 것은 더더욱 必要가 없다.
  • 山에서 캐내 온 단단한 돌로 만든 생생한 石像은 그것을 만든 사람보다 더 오래간다.
  • 아름다운 것들에 對한 記憶 속으로 죽음이 찾아오네. 그 사람의 얼굴을 當身의 記憶으로부터 빼앗아 가기 위해.
  • 여러 해에 걸쳐 無數한 探索과 試圖 끝에/ 賢明한 藝術家는 그 自身의 멋진 構想에 忠實한,/ 단단한 알프스의 돌로 만들어 낸/ 어떤 살아 있는 이미지를 獲得한다./ 그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새롭고 高尙한 것들에 藝術家는 너무 늦게 到着하고,/ 그것도 暫時 持續될 뿐이다.
  • 藝術은 시샘하는 時間을 정지시키기 위한 鬪爭이다.]

미켈란젤로 評傳 [ 編輯 ]

로맹 롤랑이 쓴 《 미켈란젤로의 生涯 》(이정림 옮김, 범우사)가 있다.

參考 資料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효성 (1996). 《미켈란젤로》. 계몽사.  
  2. http://kcm.kr/dic_view.php?nid=39413 .   |題目= 이(가) 없거나 비었음 ( 도움말 )
  3. “‘敎皇의 密室’엔 敎皇에 警告하는 그림이…” . 《네이버 블로그 | 뮤즈muse》 . 2018年 7月 3日에 確認함 .  
  4. 古典 建築에서 기둥의 윗部分을 캐피털(capital)이라고 한다. 앤대블러처는 캐피털 中에서도 위쪽에 있는 上部 構造를 가리킨다. 위에서부터 次例로 코니스, 프리즈, 아키트레이브로 構成된다.
  5. 윌리엄 E. 월리스, 李宗仁 옮김 (2020). 《미켈란젤로, 生의 마지막 瞬間》. 冊과함께. 36쪽.  
  6. 윌리엄 E. 월리스(2022), 39쪽.
  7. 윌리엄 E. 월리스(2022), 43쪽.
  8. 「미켈란젤로의 毛細」에서 프로이트는 이 作品이 담고 있는 高度의 精神性을 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미켈란젤로는 모세가 火를 이기지 못해 律法 板들을 부순 것으로 描寫하지 않았다. 反對로 부서진 律法 판 모티브에 修正을 加해, 律法 板들이 부서질지 모른다고 憂慮해서 自身의 憤怒를 삭이는 모세를 描寫했다. 어쨌든 적어도 그의 憤怒는 行動으로 옮겨가는 途中에 抑制되고 만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뭔가 새롭고 超人的인 것을 모세상에 끌어들였다. 主人公의 强靭해 보이는 肉體的 볼륨과 힘이 넘쳐나는 듯한 筋肉質 等은 人間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水準의 精神的 成就에 對한 肉體的 表現인 것이다. 스스로를 바친 偉大한 使命을 위해 自身의 激情을 누르는 이 行爲는 人間으로서 到達할 수 있는 한 빼어난 成就인 것이다.” 『藝術, 文學, 精神分析』,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2020). 藝術이 表現해야 하는 精神性이란 憤怒가 아니라 憤怒를 抑制하는 힘에 있다는 뜻이다.
  9. 윌리엄 E. 월리스(2022), 44~45쪽.
  10. 윌리엄 E. 월리스(2022), 47~49쪽.
  11. 윌리엄 E. 월리스(2020), 37쪽.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