敦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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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 敦化門
(昌德宮 敦化門)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寶物
種目 寶物 第383號
( 1963年 1月 18日 指定)
數量 1棟
時代 朝鮮時代
所有 國有
住所 서울特別市 鍾路區 율곡로 99 (와룡동 2-71)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昌德宮 敦化門 (昌德宮 敦化門)은 昌德宮 의 正門이다. [1] 大韓民國의 寶物 第383號로 指定되어 있다. 昌德宮 完成 7年 後인 太宗 12年(1412年)에 처음 세워졌으며, 只今의 敦化門은 壬辰倭亂 때 불타버린 것을 光海君 元年(1608年)에 完工한 것이다. [2] 이때의 모습이 現在까지 남아있어, 敦化門은 現存하는 宮闕 正門 가운데 가장 오래된 聞으로 唯一하게 正面이 5칸 規模로 되어 있다. [2] 1963年 大韓民國의 寶物 第383號로 指定되었다.

敦化(敦化)는 '敎化를 敦篤하게 한다'는 뜻으로 《 重用 》 30章에서 가져온 것인데, [註解 1] '임금의 큰 德으로 百姓을 돈독히 敎化한다'는 意味이다. [3] [4]

歷史 [ 編輯 ]

昌德宮은 太宗 5年인 1405年에 創建되었으나, [5] 宮의 圈域을 나타내는 弓匠度 아직 지어지지 못한 狀況이었다. 行廊과 敦化門이 建立된 것은 太宗 12年인 1412年의 일이다. 이 때 行廊들은 各社에 分配하여 兆房(朝房)으로 삼았다. [註解 2] [6] 當時에는 敦化門 門樓에 功德을 새긴 鐘을 매달아두어 밤의 始作과 끝을 알리는 鐘이라 하여 변계량 이 新混種(晨昏鐘)이라 하였다. [7]

以後 文宗 卽位年인 1450年에는 明나라 皇帝의 司祭(賜祭)를 [註解 3] 위해 門을 改修하였고, [8] 朝鮮 燕山君 代에는 敦化門과 行廊 周邊 담 밑의 民家를 撤去하고 下馬碑를 세웠다. [9] 이 때 昌德宮 담을 景福宮 의 담과 비슷한 規模로 쌓으며 敦化門度 다시 지었다. [10]

壬辰倭亂 當時 消失되어 광해군 元年인 1608年에 다시 지어 8月 15日에 上樑하였다. [11] 이 事實이 밝혀진 것은 1976年으로 以前까지는 建築 樣式의 差異 等으로 斟酌만 해오던 것이 解體復元視 묵署名의 發見으로 確實해졌다. [12] 光海君 12年인 1620年에는 種을 다시 鑄造하여 달았다. [13]

構造와 機能 [ 編輯 ]

敦化門은 宮闕의 正門이나 昌德宮 西南쪽 모서리에 있는데, 그 理由는 山자락에 자리잡은 昌德宮의 地理的 特殊性 때문이다. [14] 宮闕 正面에는 北惡意 매봉이 連結되어 있고, 이곳에는 朝鮮의 가장 神聖한 空間인 宗廟가 있어 昌德宮의 正門이 들어설 수 없었다. [14] 또 正宮인 景福宮과 位置上 가까우며, 예부터 大門에서 內堂이 直接 보이지 않도록 配置하는 技法과도 關聯이 있다. [2]

正面 5칸, 側面 2칸의 隅진閣, 多包집으로 元來는 長臺石(長台石)의 基壇과 層階가 있었다. 初期의 崇禮門 에 비해 細部가 纖細化되어 그만큼 連帶를 내릴 수도 있겠으나 壬辰倭亂 때에 消失되어 再建되었는지의 與否는 가리기 힘들다. 壬辰倭亂 以後 光化門 代身 法宮(景福宮)의 正門으爐使用되었다가 高宗 2年 景福宮이 復元되자 다시 离宮(昌德宮) 正門으로 使用되었다.

敦化門은 華麗하게 丹靑된 二層집으로, 南쪽으로 길게 뻗은 두 段의 月臺(月臺)위에 서 있다. [14] 門 左右로 宮闕 門을 지키는 守門將廳(守門將廳)을 두었다 [14] 敦化門 月臺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노둣돌이 두 個 놓여있고, 가마를 올려 놓는 木馬 두 個가 버티고 있었다. [15] 階段을 밟고 月臺에 오르면 임금의 길인 魚道(御道)가 敦化門까지 한가운데로 뻗어있다. [15] 宮闕의 正門을 크고 華麗하게 지은 까닭은 門이라는 基本的인 機能과 더불어 이곳이 宮闕임을 나타내는 標示가 되기 때문이다. [15]

元來 敦化門에는 鐘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正午와 認定 [註解 4] 때에는 鐘을 울리고, 罷漏 [註解 5] 때에는 북을 쳤다고 하나 只今은 모두 없어졌다. [16] 昌德宮과 宗廟 사이를 가르는 道路는 1912年 日帝가 計劃하였으나, 宗廟가 毁損될 것을 憂慮한 順從이 反對하여 建設이 미루어졌고, 順從이 世上을 떠나자 곧바로 工事가 强行되어 1932年에 道路가 났다. 또 敦化門 兩 옆에 宮闕 門을 지키는 官廳인 守門將廳이 있는 行樂이 있었으나, 只今은 모두 돌담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元來 宮闕에서 빠져나온 金川의 시냇물이 門 오른쪽 담牆을 따라 흘러 나왔으나, 只今은 사라졌다. [16] 昌德宮 西쪽 담牆을 따라 南쪽에는 金虎門(金虎門), 北쪽에는 景秋門(景秋門)이 있는데, 敦化門은 임금의 出入이나 國家의 큰 行事 때 쓰이던 象徵的인 門이었으므로 平素에 臣下들은 金虎門으로 宮闕에 드나들었으며, 景秋門은 平素에 닫혀있다가 軍士를 動員할 때에만 쓰였다. [17]

敦化門 圈域 [ 編輯 ]

東闕圖 》에 나타난 敦化門 圈域

敦化門으로 들어서면 昌德宮의 첫 番째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西쪽으로는 金虎門을 中心으로 行廊이 늘어서 있고, 東쪽으로는 진선문(進善門)과 그 行廊, 北쪽으로는 內閣(內各)과 玉堂(玉堂)의 行廊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8]

月臺 [ 編輯 ]

敦化門 앞에는 宮中의 各種 意識 等에 利用되는 넓은 段인 月臺(月臺)가 存在한다. 日帝 强占期와 解放 以後에 車輛의 進入을 위해 道路가 거듭 包裝되면서 敦化門 月臺는 그 앞을 지나는 율곡로 에 막혀 있는데다, 月臺 앞 地盤을 높게 돋워 道路를 내는 바람에 月臺는 도로면보다 낮아 마사토에 파묻힌 모습이었다. [2] [16] 月臺는 2020年까지만 해도 旣存 율곡로 와 道路 높이가 같았고, 또한, 人道사이에 約 1.5m의 擁壁(擁壁)李 서 있어 月臺 階段을 통해 敦化門으로 오르는 게 不可能한 狀態였다. 이에 따라 2020年에 昌德宮管理所 서울特別市都市基盤施設本部 가 協業으로 月臺를 復元하였다. [19]

金虎門 [ 編輯 ]

金虎門(金虎門)은 敦化門 西便에 設置된 聞으로, 調整 官員들의 主 出入門이었다. 金虎門은 1926年 金虎門 依據 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丹鳳門 [ 編輯 ]

丹鳳門(丹鳳門)은 敦化門 東便 上方 區域에 設置된 聞으로, 內侍 와 女性들의 主 出入門이었다.

上方 [ 編輯 ]

遠域處所 [ 編輯 ]

內兵曹 [ 編輯 ]

行廊 [ 編輯 ]

金虎門을 中心으로 한 敦化門 西쪽 行廊은 宮闕 外部와 境界를 이루며 儀仗庫 (儀仗庫), 武備司 (武備司), 守門將廳 , 衛將所 (衛將所), 濫訴 (南所), 훈國軍파수직소 (訓局軍把守直所) 等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昌德宮과 金虎門 사이의 行廊을 領軍番所(營軍番所), 金虎門 北側의 行廊을 領軍處所(營軍處所)라고 했다. [20] 儀仗庫는 意識에 쓰이는 物件이나 兵仗器를 保管하는 곳이며, [18] 武備司는 闕內 巡察을 擔當한다. 衛將所와 濫訴는 軍士를 指揮하여 宮內를 巡視하거나 調整에서 宴會나 慶祝 行事가 있을 때 그 周圍에 整列하는 五衛將이 宿直하는 곳이며, 훈國軍파수直訴는 訓鍊都監의 軍士들이 宿直하는 곳이다. 이렇듯 宮闕의 첫 番째 마당에서 外部와 接한 行廊은 主로 宮闕의 護衛 任務를 맡은 將帥와 軍士가 머물렀으며, 外部의 侵入에 對備하는 緩衝 空間으로서 기능하였다. [21]

진선문 과 連結된 敦化門 東쪽 行廊에는 結束色 (結束色), 正色 (政色), 典設司 (典設司)가 마당쪽으로 들어서 있었다. 結束色은 임금이 行次할 때 周邊을 警護하여 사람들이 接近하지 못하게끔 막으며, 正色은 無關, 軍事, 雜職을 임명하는 일 等을 擔當한다. 典設司는 나라의 祭祀 때 必要한 帳幕을 供給하는 일 等을 맡았다. [21]

禁川橋 [ 編輯 ]

李王職 廳舍 [ 編輯 ]

日帝强占期 當時 朝鮮 王室을 위해 設置한 李王職 의 廳舍가 行廊 北側, 內兵曹 附近에 位置하였다.

갤러리 [ 編輯 ]

朝鮮時代 [ 編輯 ]

日帝强占期 [ 編輯 ]

現代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註解 [ 編輯 ]

  1. 《中庸》,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2. 助幇(朝房)이란 조신(朝臣)들이 照會 때를 기다리기 위하여 아침에 各社(各司)別로 모여 衣服을 갈아입는 房을 말한다. 大闕의 門 밖에 있었다. 직방(直房)이라고도 한다.
  3. 司祭란 中國 皇帝가 朝鮮의 王의 死亡時, 或은 朝鮮의 王이 臣下의 死亡時 내리는 祭祀를 말한다.
  4. 人定, 밤에 사람이 거리에 다니는 것을 禁하기 위해 밤마다 이경(午後 10歲)쯤에 種을 스물 여덟 番씩 치던 것.
  5. 破漏, 五經(새벽 4時頃)에 通行禁止를 解除하기 위해 鐘을 서른 세 番 치던 것으로 서울에서는 북을 쳐서 解除하였다.

各州 [ 編輯 ]

  1. 《迎接도감의궤》 (1610年)
  2. 異常해, 62쪽
  3. “[宮闕의 懸板과 柱聯-昌德宮_宮門]” . 文化財廳. 2010年 7月 12日 . 2021年 4月 7日에 確認함 .  
  4. 정현 孔穎達 等의 主席
  5. 太宗實錄 》 10卷, 太宗 5年 10月 19日 神社 2番째 記事
  6. 《太宗實錄》 23卷, 太宗 12年 5月 22日 乙巳 2番째 記事
  7. 許筠 (2010). 《서울의 古宮 散策》 初版. 서울特別市: 새벽社. ISBN   978-89-965088-0-9 .  
  8. 文宗實錄 》 2卷, 文宗 卽位年 6月 13日 乙酉 3番째 記事
  9. 燕山君日記 》 58卷, 年産 11年 6月 23日 病者 2番째 記事
  10. 《燕山君日記》 62卷, 演算 12年 6月 22日 경오 3番째 記事
  11. “산뜻韓제모습…復元마친「敦化門」” . 東亞日報. 1977年 1月 10日.  
  12. “敦化門은 光海君때 重建” . 東亞日報. 1976年 10月 19日.  
  13. 光海君日記 [中草本]》 158卷, 광해 12年 11月 15日 巫子 3番째 記事
  14. 최종덕, 24쪽.
  15. 최종덕, 25쪽.
  16. 최종덕, 27쪽.
  17. 최종덕, 26쪽.
  18. 최종덕, 29쪽.
  19. “昌德宮 觀覽志願센터 開所ㆍ敦化門 月臺 改善工事 完了” . 《文化財廳》. 2020年 11月 23日.  
  20. 《東闕圖型》
  21. 최종덕, 30쪽.

參考 文獻 [ 編輯 ]

  • 최종덕, "朝鮮의 참 宮闕 昌德宮", 서울: (週)눌와, 2006.
  • 異常해, "宮闕ㆍ儒敎建築", 서울: 솔 出版社, 2004.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