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在善 推戴 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李在善 推戴陰謀 事件 에서 넘어옴)

李在善 逆謀 事件 또는 李在善 謀逆 事件 , 李在善 쿠데타 事件 朝鮮 末期의 軍事 쿠데타로, 쿠데타 企圖 10日 前에 事前 摘發되었다. 1881年 8月 부터 9月 흥선大院君 의 側近 안기영 , 권정호 , 이철구 等이 軍士 쿠데타를 일으켜 高宗 명성황후 를 廢位하고, 흥선大院君 의 署長者 李在善 을 推戴하려 했다가 發覺된 事件이다. 여기에는 남인 의 黨員들, 衛正斥邪派 들도 謀議에 加擔했다.

事件은 光州 酸性의 將校들이 義禁府 에 密告했고, 이윤용 等은 直接 高宗 명성황후 에게 찾아가 發告하면서 事件이 알려지게 되었다. 陰曆 8月 29日 [1] 안기영 , 권정호 , 이철구 外 30餘 名에 逮捕되어 義禁府 에서 推鞠당한 後 처형당했다. 事件의 背後로 指目된 흥선大院君 高宗 의 生父라는 理由로 處刑되지 않았고, 李在善 은 처형당했다. 當時 事件을 두고 興宣大院君의 背後操縱 說이 있었다.

李在善 義禁府 에 갇혔다가 濟州道 濟州목 으로 流配된 뒤 四史 되었다. 그러나 흥선大院君 은 이를 契機로 이준용 을 王으로 擁立하기 위해 4次例의 쿠데타를 企圖했다가 失敗했다. 大院君은 以後에도 壬午軍亂 當時 月給과 差別로 일어선 軍人들을 利用하려 했고, 貪官汚吏 및 腐敗官僚 剔抉을 要求하는 勢力과 東學 의 信仰의 自由를 要求하는 勢力이 結集해서 일으킨 東學 農民軍 을 利用해서 政府 顚覆을 企圖했다가 失敗했다.

李在善 謀逆 事件에는 事實 李在善 自身보다 大院君이 더 깊이 連累되어 있었다는 所聞이 當時에 播多했고 [2] , 이 獄事를 王后 閔氏 가 꾸몄다고 말하는 者도 있지만, 안팎으로 운현, 興宣大院君이 禍根이라는 얘기가 藉藉했다. [2] 黃玹 은 自身의 著書 매천야록 에 市中에서 돌던 흥선大院君 이 使嗾했다는 說과, 명성황후 가 意圖的으로 捏造했던 事件이라는 설을 모두 傳했다.

原因 [ 編輯 ]

은신군 의 養子인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 흥선군 李昰應은 自身의 本心을 숨긴채 市場에서 中인, 閭巷人들과 어울려다니거나 空짜 술을 求乞하거나, 일부러 김좌근 , 金炳基 等의 安東金氏 勢道家問議 집에 出入하면서 求乞하거나 卑屈한 모습을 보이는 等의 行動을 했다. 심의면 等은 흥선군 을 가리켜 宮도령이라 嘲弄하였다.

그러는 한便으로 흥선군은 憲宗 , 哲宗 때에 憲宗과 哲宗에게 子息이 없다는 點과, 이들이 病弱하다는 點, 哲宗은 政治에 興味를 잃고 술과 宴會에 자주 빠졌다는 點에 注目하고, 驍名世子 빈이자 王大妃인 신정왕후 조氏에게 接近하였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順調費 순원왕후 가 大王大妃로서 王室의 政治를 다 主管하여 事實上 신정王后는 아무런 權限이 없었고, 순원王后는 王室의 序列을 默殺하고 憲宗과 哲宗을 모두 純祖의 대筒을 잇게 하여 그에게는 事實上 子女가 없는 셈이 되었다.

흥선군 신정왕후 에게 自身의 아들 中 한名을 養子로 주겠다고 約束했고, 그 中 가장 어린아들을 選擇했다. 野史에 依하면 萬一의 事態를 對備해 흥선군의 2者가 아닌 情實 所生 第2字 라고 具體的으로 明示했다하며, 이는 김동인 유주현 의 創作 小說에도 그대로 引用되었다. 1863年 12月 哲宗이 갑작스러운 體力惡化와 肺結核 으로 죽자, 趙大妃는 바로 哲宗의 後繼者로 翼宗의 대筒을 이은 흥선군의 第2者를 指目하여 高宗이 卽位했다. 신정王后는 名目上 垂簾聽政을 하다 얼마 뒤 興宣大院君에게 攝政職을 넘겼다.

閔妃 에게서 태어난 肛門이 없이 태어난 첫 아들이 시름시름 앓자 흥선大院君 人蔘 을 달여서 먹이라 했는데, 그대로 아기는 죽고 말았고, 閔妃 는 大院君이 첫 아들을 죽였다는 陰謀論을 믿게 되었다. 흥선大院君 은 高宗이 宮人 李氏에게서 얻은 아들 완화군 線을 깊이 寵愛했다.

閔妃는 開化派, 大院君의 書院 强制撤廢에 反感을 품은 老論 儒林 外에도 書院撤廢에 抵抗하다가 뭉치게 된 嶺南 南人 儒林까지 包攝하여 大院君 逐出을 企劃하고, 興宣大院君과 사이가 나빴던 大院君의 셋째 親兄 흥인군 까지 包攝하여 親庭을 建議한다. 1873年 최익현 의 大院君 彈劾上疏가 연이어 올라오자, 儒林들度 書院撤廢로 大院君에게 怏心을 품다가 黨派를 超越해 連帶하여 親庭을 請하는 上疏를 繼續 올렸다. 大院君派는 反駁하며 崔益鉉과 儒林들을 彈劾했지만, 高宗은 崔益鉉과 一部 儒林들을 流配보내는 線에서 그쳤다.

1874年 (高宗 11) 11月 雲峴宮 에서 王宮으로 出入하는 門들을 强制로 閉鎖했고, 興宣大院君이 탄 藍輿는 數時間을 기다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이로서 大院君은 失脚하게 되었다.

이재선을 推戴한 理由 [ 編輯 ]

正確한 理由는 알려져 있지 않다. 當時 有力 王族으로는 哲宗의 이福 兄인 영평군 이경응 等도 生存해 있었지만 高齡이었고, 未成年者이거나 靑年인 人物로는 이재면 , 李在善 이 있었으며, 大院君의 孫子 이준용 은 萬11歲로 아직 冠禮를 올리지도 않았고, 結婚하지도 않았다. [3]

黃玹 에 따르면, 李在善 이 多少 어리석은데다가, 머리가 나빠서 그를 推戴, 選擇했다는 說도 있다. 그에 따르면, 李在善 은 '甲子年(1864) 以後 別軍職에 있었지만 머리가 아둔하여 콩과 보리를 分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운현에게 庶子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2] '는 것이다. 黃玹 李在善 과 어떤 恩怨關係가 있었는지, 私的인 感情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黃玹 은 李在善에 對해 '本性이 융렬하다. [4] '는 評도 남겼다.

李在善 을 背後에서 操縱한 것이 흥선大院君 이라는 말도 있었다. 운현이 禍根이라는 얘기가 藉藉했다는 것이다. [2]

1881年 複合上疏運動 當時 衛正斥邪派가 쿠데타를 謀議할 때 高宗 代身 王으로 推戴할 수 있는 人物은 處地로 보거나 資質로 볼 때 再選보다 이재면이 適格이었다. [4] 李載冕은 名分上 正室夫人이 낳은 赤字였고 또 資質도 뛰어났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李載冕은 王으로 推戴될 수 없었다. 當時 衛正斥邪派나 興宣大院君은 高宗을 廢位한 後 허수아비 王을 내세워 政治와 外交를 自身들이 主導하려고 했다. [4] 그러려면 이재면보다 李在善이 적합한 人物이었다. [4] 이재선은 庶子였고 名分이 不足했지만 一旦 흥선大院君 의 아들이었다.

展開 [ 編輯 ]

楊州郡 時鈍면 직동리(가능동에 吸收되어 가능동 직동部落)의 山莊으로 隱退한 흥선大院君 은 憤慨했고, 興宣大院君은 걸어서 水落山 을 지나 洋酒 時둔(후대의 議政府市 )의 別莊으로 왔다. 興宣大院君의 一部 側近들은 政變을 準備했다.

大院君이 물러나고 閔氏 政權이 得勢한 後, 開放과 開化가 어느덧 朝鮮의 大勢로 자리잡자 大院君을 失脚시켰던 兩班 士大夫들은 豫期치 않은 事態 展開에 크게 唐慌했다. [5]

명성황후 는 開化派와 書院撤廢로 憤怒한 全國의 儒林, 記號系列의 老論유림과 嶺南系列의 嶺南南人儒林을 모두 包攝했다. 그러나 閔氏 一派의 一部 및 老論 北學派의 朴智元 의 後裔인 박규수 , 오경석 과 一部 中人 閭巷階層의 勸告로 徐徐히 開放, 開化를 推進해나갔고, 儒林들은 다시 憤怒했다. 特히 京畿地域의 近畿 老論에 비해 忠淸道의 老論, 少論系 및 嶺南 南人의 境遇는 不滿이 深刻하였다. 이러한 儒林들은 記號 老論은 記號 老論대로, 嶺南 南人은 嶺南 南人대로 連帶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西洋의 迷信과 低劣한 習俗을 排擊한다는 理由로, 朝廷에 反旗를 들기 始作했다. 이들 儒林들은 衛正斥邪派 로 發展했다. 唐慌함은 憤怒로 이어졌고, 開化를 中斷할 것을 請하는 上疏가 繼續 올라왔지만 高宗과 閔氏 政權은 이를 默殺했다.

兆·日修好條約 締結을 契機로 “바른 것은 지키고(衛正) 옳지 않은 것은 물리친다(斥邪)”는 衛正斥邪(衛正斥邪) 運動이 다시 全國的으로 고개를 들었다. [5]

1881年 봄에는 嶺南의 이만손,강진규 等이 中心이 된 1萬餘 名의 儒生이 開化政策을 糾彈하고 衛正斥邪를 要求하는 이른바 ‘嶺南萬人疏’를 올리기도 했다. 이 같은 衛正斥邪派의 行動에 對해 高宗은 懷柔策을 쓰기도 했지만 結局 ‘嶺南萬人疏’를 主導한 이만손 等의 儒生을 流配刑에 處했다. [4]

老論 內部에 朴智元 , 박제가 正祖 무렵, 或은 英祖 때부터 淸나라 베이징 等을 다녀온 貿易商 通譯官 等을 통해 望遠鏡, 地球본, 地圖, 胎葉機械 等을 接하게 되면서 老論 內部에는 西方의 學問을 배우자는 主張을 하는 北學派가 나타났다. 老論 碧波 老論 詩派 , 碧波, 詩派에도 關與하지 않고 原則論을 내세워서 淸流派를 自處한 老論 靑名當 이 있었다. 老論 內 같은 黨員이 親姻戚이라서 露骨的으로 逆賊으로 몰리지는 않았지만 北學派 는 老論 內에서 非主流, 極少數였고 異常한 思想을 가진 이들로 외면당했다.

박규수 , 오경석 外에 淸나라 , 日本 을 다녀온 通譯官, 貿易商, 僧侶 等을 통해 西歐 文物이 流入되면서 高宗의 個項 政策에 老論 內 北學派가 積極 參與했다. 非主流 派閥이었지만 老論의 黨員이었기에 老論 內에서는 一部 離脫派가 나타났지만, 開港政策에 反對하는 派閥이 있었다. 그러나 남인 系列은 大多數가 個項에 反對했고, 天主敎 道가 아닌데도 不利益을 當한 것에 對해 嶺南 남인 契는 極度로 反感을 가졌다.

衛正斥邪派는 多數의 嶺南南人 및 少數의 祕境棄權 老論 等이 聯合해서 參與했다. 衛正斥邪派는 漸次 더욱 强勁하게 對應했다. 1881年 가을로 접어들면서 八道의 儒生 數百 名이 漢陽으로 몰려들었다. [4] 이들은 集團으로 大闕 앞으로 몰려가 한 달이 넘도록 複合上疏運動(伏閤上疏運動)을 벌였다. 時間이 지날수록 示威의 樣相은 過激해졌고 論調도 激烈해졌다. [4]

衛正斥邪를 要求하는 儒生들은 開化派뿐 아니라 高宗까지 甚하다 싶을 程度로 거세게 非難했다. 예컨대 1881年 尹7月6日 江原道 儒生 홍재학 等이 올린 上疏文에는 高宗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聲討까지 있었다. [4] 이 上疏文에서 홍재학 等은 露骨的으로 高宗을 배우지 못하고 無識한 王이라고 非難했다. [4] 高宗이 배우지 못하고 無識해 開化政策을 主張하는 무리들에게 놀아난다고도 非難했다. [4]

홍재학은 開化政策을 推進하는 高宗이나 開化派는 絶對 認定할 수 없다고 主張한 셈이었다. 臣下가 王을 認定하지 못하겠다면 그것은 곧 逆謀나 마찬가지였다. [4] 高宗은 尹7月8日에 홍재학을 逮捕해 調査한 後 犯上不道(犯上不道)로 몰아 死刑에 處했다. [4]

衛正斥邪派의 쿠데타 企圖 [ 編輯 ]

衛正斥邪派는 衛正斥邪派 대로 李在善 의 어리석음을 利用해 쿠데타를 敢行하려고 했다. [4] 閔氏 政權의 開放政策에 反感을 품은 데다가, 閔氏 政權 內部에서도 親姻戚 登用 等, 過去 安東金氏 勢道政權, 풍양曺氏 勢道政權, 홍국영 勢道기와 같은 現象이 나타났다. 衛正斥邪派 亦是 機會를 노리고 있었다. 衛正斥邪派의 쿠데타 計劃은 1880年 3月 第2次 修信使로 日本에 갔던 金弘集이 歸國하는 길에 가져온 황준헌의 <朝鮮策略>을 契機로 本格化되었다. [4] 러시아의 南下政策에 對抗하기 위해 朝鮮이 日本과 中國 그리고 美國과 連帶해야 한다는 <朝鮮策略>의 主張을 衛正斥邪派는 受容할 수 없었다. [4] 흥선大院君 은 이러한 衛正斥邪派 의 움직임을 利用해 執權을 祈禱한다.

衛正斥邪派는 衛正斥邪派 나름대로 쿠데타를 計劃하고 있었다. 開化에 反對 上疏를 올린 儒林 몇名 中 過激한 上疏를 올린 人物들을 高宗 義禁府 投獄 後 형문과 斬首刑 , 死藥 刑으로 對應했다. 南人儒林 外에도 祕境棄權 老論儒林들의 不滿도 漸次 强化되었다. 민씨政權 退陣을 要求하는 衛正斥邪派와 彈壓으로 맞서는 高宗·민씨政權이 尖銳하게 對立하고 있을 즈음, 그동안 隱遁하고 있던 대원군파도 움직였다. [5]

複合上疏運動이 推進되는 狀況에서 衛正斥邪派 中 一部 過激派는 高宗을 廢位하려는 쿠데타를 謀議했다. 最初의 主謀者는 忠淸道 出身 儒生 강달선으로 [4] , 그는 남인 의 黨員이었다.

강달선은 홍재학과 함께 複合上疏運動을 主導하던 사람이었다. [4] 當時 27歲이던 강달선은 儒生들의 힘으로 高宗을 逐出하고 開化政策을 끝장내고자 했다. [4] 강달선은 이재선을 包攝해 興宣大院君의 協助를 받으려고도 했다. [4] 儒林들의 쿠데타 企圖를 注目한 興宣大院君 側近들은 이 衛正斥邪派를 利用하려 했다. 그러나 衛正斥邪派 亦是 강달선을 통해 흥선大院君 쪽 사람들과 接線해서 그들을 利用하려 했다. 複合上疏運動이 展開되던 7月 강달선 李在善 을 여러 次例 訪問해 顔面을 익혔다. [4] 자연스러운 만남을 假裝해 李在善 과 接線하면서 이런저런 示唆, 政治, 世上에 對한 談論을 하다가 親해지게 되었다. 그와는 別個로 雲峴宮 의 사람들 中 一部는 안기영 , 권정호 를 中心으로 사람들을 包攝, 끌어모으고 있었다.

벌왜, 토왜 [ 編輯 ]

매천야록이나 承政院日記에 依하면 이들의 쿠데타 名分은 벌왜(伐倭) 또는 토왜(討倭)였다. 日本을 討伐하겠다는 것이었다. 西歐의 文物이 流入되는 다양한 루트 中의 하나는 淸나라 燕京을 통해 開城 禮成江 , 陸路로 豆滿江 , 鴨綠江 을 넘는 길이 있었고, 다른 루트는 日本 에서 釜山 釜山浦 , 東萊 , 金海 等의 루트와 仁川 濟物浦 를 통한 루트였다. 1881年 7月 무렵 서로 익숙해진 어느 날 강달선은 벌왜(伐倭)에 關해 李在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打診했다. 벌왜는 衛正斥邪派가 高宗에게 開化政策을 取消하라고 上疏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衛正斥邪派가 直接 나서서 日本사람들을 쫓아내자는 主張이었다. 當時 朝鮮과 修交한 日本 公使館이 西大門 밖 천연정(天然亭)에 있었는데, 천연정을 襲擊해 그곳의 日本人을 모조리 쫓아내자는 主張이 벌矮였다. [4]

벌왜는 衛正斥邪를 名分으로 武力을 使用하겠다는 主張이었지만 實際로는 그 機會에 宮闕을 襲擊하고 事實上 高宗을 붙잡아 廢位하려는 쿠데타 名分이었다. [4] 이재선은 강달선의 벌倭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4] 黃玹 李在善 이 事物 分別도 못하는 人物이라 봤다. 그러나 甚하게 어리석지는 않았다. 벌倭를 名分으로 하는 쿠데타가 成功해 高宗이 廢位된다면 다음 王은 自身이라는 事實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4] 어리석고 權力에 눈이 먼 이재선은 그 자리에서 강달선에게 包攝됐다. [4] 以後 강달선은 안기영·권정호 等 興宣大院君의 側近들을 次例로 包攝했다. [4] 강달선에게 包攝되기 以前에 안기영, 권정호 等은 이미 쿠데타를 準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李在善 亦是 自身의 側近들을 包攝했다. [4] 8月에 접어들면서 쿠데타 謀議는 李在善·안기영·권정호·강달선을 中心으로 具體化됐다. [4] 李在善 은 自身의 側近들을 包攝할 때 "큰舍廊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4] 큰舍廊이란 바로 興宣大院君을 指稱한다. 이런 事實로 미루어볼 때 이재선은 강달선으로부터 ‘벌왜’ 計劃을 듣고 곧바로 흥선大院君 에게 알렸으며, 흥선大院君 은 ‘벌왜’를 利用해 다시 權力을 잡으려고 試圖했다고 推定된다. [4]

흥선大院君 이 直接 計劃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81年 7月 부터 儒林들이 쿠데타를 計劃한다는 것을 接한 大院君은 오히려 이재선을 督勵했다. 興宣大院君은 “네가 벌倭를 主張하면 큰 功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 [4] 흥선大院君 亦是 어리석은 이재선을 利用해 權力을 잡으려는 心算이었다. [4] 興宣大院君의 側近 안기영, 권정호 等도 別途로, 儒林의 接觸 前에 30餘名과 모여서 사람을 動員, 政變을 準備해나가고 있었다.

宮闕 掌握 計劃 [ 編輯 ]

李在善·강달선·안기영은 具體的 쿠데타 計劃을 세워놓았다. 그들은 1881年 8月 21日 로 豫定된 過去 試驗 을 利用해 擧沙하기로 했다. 그날 過去 試驗 을 보기 위해 雲集한 數千 名의 儒生을 煽動해 일을 벌인다는 計劃이었다. [4] 이를 위해 數千 兩의 居士資金과 1,000餘 名의 쿠데타軍을 募集하기로 했다. [4] 1千 名으로는 多少 無理라는 一部 見解가 있었지만, 쿠데타 指導部는 過去 試驗 戰後의 複雜하고 시끄러운 狀況을 利用해서 高宗과 閔妃를 拉致하겠다며 반드시 成功할 것이라며 放心했다.

1千餘 名의 쿠데타軍을 半으로 나누어 500名은 儒生들과 함께 西大門 밖 日本公使館을 攻擊하고, 나머지 500名은 儒生들과 함께 昌德宮을 攻擊하여 高宗을 廢位한다는 計劃이었다. [4] 昌德宮을 攻擊하는 쿠데타軍의 先鋒에 이재선을 앞장세움으로써 宮闕 警備兵들이 順順히 門을 열고 降伏하게 만들자는 計劃은 대단히 緻密하기까지 했다. [4] 그러나 1千 名으로는 無理라는 意見도 있었고, 생각보다 많이 動員되지 못한 것을 憂慮한 一部 加擔者들은 離脫하기 始作했다.

흥선大院君 은 비록 全面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쿠데타 主謀者들을 만나 進行過程을 보고받으며 成敗를 注視했다. [4] 興宣大院君은 失敗할 可能性이 있고 그렇다면 서자 李在善 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一部에서는 無理라는 意見도 少數 나왔다. 그러나 일을 推進했다. 그러나 準備된 兵力의 一部는 離脫했고, 8月 29日 에는 京畿道 光州山城 에서 動員하기로 한 兵力들이 離脫, 오히려 官軍에 붙는 일이 發生했다.

經過 [ 編輯 ]

흥선大院君 側近들의 不滿도 거세어졌다. 1881年 初부터 흥선大院君 의 側近들 中 안기영 , 권정호 , 이철구 等은 兵力을 動員, 軍士 쿠데타를 謀議, 事前에 準備하였다. 衛正斥邪派는 衛正斥邪派 나름대로 쿠데타를 時日을 具體的으로 定하지 않은 채 차근차근 準備해나가고 있었다.

안기영 , 권정호 , 이철구 等은 衛正斥邪派들의 不滿을 注目했다. 1801年 (純祖 1) 辛酉迫害 以後 오랫동안 權座에서 排除되었다가 흥선大院君 執權 以後 登用된 남인 , 그 中에서도 天主敎 와는 全혀 無關했던 嶺南 남인 의 不滿이 甚했다. 이들은 正祖 때에도 思悼世子가 抑鬱하게 죽은 것을 上疏로 올렸는가 하면, 正祖의 各別한 待遇가 사라진 뒤에 甚하게 疏外된 狀態였다. 남인 黨員의 協力, 加擔을 이끌어 냈다. 興宣大院君의 側近들은 벌왜, 斥倭 라는 名分을 세웠다.

衛正斥邪派 가 된 全國 儒林들의 呼應, 擴大도 繼續되었다. 京畿地域의 近畿 老論이 아닌 忠淸道 全羅道 等 畿湖地域의 老論 衛正斥邪派, 思想的 側面에서 송시열 의 直系였던 李杭魯 의 文人들이 쿠데타에 呼應, 同調하기 始作하였다. 書院撤廢와 書院撤廢 後 集團上京한 儒林들을 鷺梁津 漢江 便 白沙場에서 侮辱을 주던 흥선大院君 에게 甚한 反感과 憤怒를 품었던 다른 黨派 儒林들은 淸나라 베이징 에서 陸路로, 日本 에서 釜山 이나 仁川 等으로 流入되는 西歐의 開化 文物이 社會를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1881年 부터 안기영 , 권정호 , 이철구 等 外에 30餘 名의 側近들은 慶尙道 사람 강달선 等 嶺南 南人 儒林을 包攝했고, 강달선은 같은 慶尙道의 嶺南 남인 儒林들을 包攝하는 한便, 衛正斥邪, 性理學 자라는 點을 利用 畿湖地域의 다른 黨派 老論 界 儒林들度 包攝했다. 그해 8月 이들은 9月 13日 或은 8月 21日 을 巨事日로 準備하고 兵力을 動員했다. 그리고 8月 21日로 確定했다.

巨事를 하루 앞둔 8月 20日 한밤中에 李在善·강달선·안기영 等은 한자리에 모여 擧事計劃을 最終 點檢했다. 그런데 問題는 豫定했던 擧事資金과 쿠데타軍이 거의 募集되지 않았다는 事實이었다. [4] 1千 名으로는 어렵다는 意見이 事前에 나왔고, 勝算이 없다고 본 一部는 祕密裏에 離脫했으며, 光州 南漢山城 의 兵力들은 離脫한 狀態였다. 그럼에도 쿠데타 主導者들은 過去試驗을 보기 위해 雲集한 儒生들을 煽動한다면 充分히 勝算이 있다고 判斷하고 그대로 推進하기로 決定했다. 擧事時間은 해시(亥時, 午後 9~11時)로 잡았다. [4] 8月 21日 아침 7時쯤 흥선大院君 에게 傳達됐다. [4] 報告를 接한 興宣大院君은 軍事力의 뒷받침이 없어 成功 可能性이 거의 없다고 判斷했다. [4]

흥선大院君 강달선 等을 불러 事實을 確認했다. 그 結果 강달선 等은 正말로 쿠데타軍을 거의 募集하지 못한 狀況이었다. [4] 興宣大院君은 강달선 等을 ‘金品을 喝取하려고 사람들을 煽動한 詐欺꾼’으로 몰아 逮捕했다. 이들을 逮捕함으로써 興宣大院君은 萬若의 境遇 쿠데타 謀議가 漏泄되더라도 빠져나갈 口實을 만들었다. [4]

그間 自身이 이들과 接觸한 理由는 逆謀를 偵探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4] 이렇게 해서 8月 21日로 豫定되었던 쿠데타 謀議는 흐지부지됐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番에는 李在善·안기영·권정달 等이 中心이 되어 以前보다 훨씬 具體的으로 쿠데타 謀議를 推進했다. [4] 안기영과 권정달, 이철구를 비롯한 興宣大院君의 側近들은 儒林들과 接線하기 前부터 別途의 쿠데타 計劃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들은 쿠데타의 成敗는 軍事力에 있다고 보고 軍士를 모으기 위해 全力을 기울였다. [4] 흥선大院君 의 側近들은 먼저 300名 程度의 軍士를 모아 江華島 를 占領한 後 江華島 의 軍士들과 함께 漢陽을 奇襲攻擊할 計劃을 세웠다. 巨事日은 8月 29日 로 잡았다. [4] 하지만 問題는 資金이었다. 300名 程度의 軍士를 모아 江華島 를 攻擊하려면 數萬 兩의 資金이 必要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募金되지 않았다. [4] 날짜를 9月 13日 로 變更하고 一旦 潛潛하게 時間을 보고 있었다.

8月 28日 光州酸性의 將校 이선풍 또는 이풍래가 義禁府 에 自首했다. 告變에 依해 쿠데타 全貌가 드러났다. 이선풍의 告變書에는 勿論 李在善 도 들어 있었다. [4] 光州酸性의 將校들은 이미 義禁府 에 自首한 狀態였다. 半信半疑하던 義禁府 는 調査에 着手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大院君은 失敗를 豫想하고 逆謀勢力의 입막음을 試圖했다. [5] 다른 罪名을 씌워 刑曹에 넘긴 것이다. [5] 이재선은 8月 29日 捕盜廳 으로 自進出頭했다. [4] 이재선은 抑鬱하다고 하소연했고 證據가 없음을 빌미로 풀려났다. 그러나 祕密은 곧 들통나 1881年 8月 29日 , 이재선을 비롯한 關聯者 30餘名이 逮捕됐다. [5] 9月 3日 擧事에 參與하기로 한 光州山城 의 將校들이 義禁府 에 自首했고, 이윤용 은 入闕, 高宗 명성황후 를 直接 찾아가 告變하였다. 이들은 興宣大院君의 側近 안기영, 권정달 外 30名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自白했다.

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關한 內容은 全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自身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精神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圖謀할 만한 人物이 아닐뿐더러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主張했다. [4] 하지만 關聯者들과 對質訊問을 통해 하나둘 眞相이 밝혀졌다. [4] 이철구 等 一部만이 李在善이 無辜하다고 主張했다. 調査 結果 쿠데타의 主謀者는 李在善으로 歸結됐고, 興宣大院君은 빠져나갔다. [4]

結果 [ 編輯 ]

이들 中 一部는 李在善 을 推戴하려 했다고 自白하였다. 그러나 이철구 等 少數는 끝까지 李在善과의 關聯性을 認定하지 않았다. 곧이어 李在善 이 逮捕되어 義禁府 로 投獄되었고, 對質審問이 있었다. 이재선은 끝까지 모른다고 했지만, 彈劾은 繼續되었다. 흥인군 李最應도 이재선을 彈劾했고, 이재면 은 스스로 罪를 請하고 辭職을 請하기도 했다. 여러番의 彈劾을 거쳐 李在善 濟州道 濟州목 으로 流配되었다.

흥선大院君 은 國王의 生父라는 理由로 死刑을 면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 는 以後 壬午軍亂 當時 大院君이 介入하자, 그를 契機로 淸나라 위안스카이 를 시켜서 大院君 拉致 計劃을 짜게 된다.

9月 13日 권정호 , 안기영 外 30名은 義禁府에서 陵遲處斬 으로 處刑되었다. 1千餘 名 中 事前에 離脫한 兵力도 많았고, 光州 南漢山城 의 兵力은 擧事 前에 離脫한데다가 興宣大院君의 側近들이 動員한 約 3百餘 名의 兵力은 大部分 解散시키는 線에서 마무리지었다. 地方의 儒林들은 선비를 待接한다는 名分으로 死藥 을 보내 私私시켰다. 한便 李在善에 對한 彈劾은 繼續되었다. 10月 28日 李在善 濟州목 에서 死藥 을 받고 賜死되었다.

閔氏 政權에는 衛正斥邪派와 大院君派를 一擧에 制壓할 수 있었던 絶好의 機會가 되었다. [5]

興宣大院君의 아들 利用 論難 [ 編輯 ]

흥선大院君 이 權座에 復歸하기 위해서 自身의 아들을 利用했다는 疑惑이 있다. 黃玹 은 市中에 도는 興宣大院君의 아들 이용설을 매천야록에 싣기도 했다.

기타 [ 編輯 ]

이 中 이철구 等은 義禁府 에서 拷問을 當하면서도 끝까지 李在善 과의 關聯性을 否定, 拒否하였다.

  • 大院君은 閔 氏 勢道에 對한 廣範圍한 反感에 便乘해 政權을 손에 넣으려 하였다.
  • 1882年 壬午軍亂 이 發生, 月給을 받지 못하고 處遇도 劣惡한 것에 憤慨한 軍人들과, 月給으로 支給된 쌀 祿俸에 모래가 多數 섞인 것에 憤怒한 軍人들이 聯合해서 亂을 일으켜 宣惠廳 으로 달려가 宣惠廳 堂上 민겸호 와 擔當者들을 他殺했고, 賂物을 甚하게 받은 흥선大院君 의 셋째 兄 흥인군 도 잡아 죽이려 했다가 흥인군 은 逃走하던 中 墜落해서 죽었다. 大院君은 壬午軍亂 當時 月給과 差別로 일어선 軍人들을 利用해서 明成皇后 暗殺을 計劃했지만 失敗했다.
  • 흥선大院君 은 貪官汚吏의 搾取에 抵抗하는 勢力과 天道敎 의 布敎許容을 要求하기 위해 일어선 그룹이 連帶하여 일으킨 東學 農民 運動 의 農民軍의 一部와도 接線하여 高宗, 閔妃를 廢位시킬 計劃을 세웠지만 모두 失敗하고 말았다.

各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