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容甲 (193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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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容甲
出生 1936年 9月 28日 ( 1936-09-28 ) (87歲)
日帝 强占期 慶尙南道 密陽郡 초동면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瑞草區 盤浦洞
本館 金海
學歷 國防大學院 行政學 석사
經歷 中央情報部 檢察局長
國家安全企劃部 監察室長
國家安全企劃部 企劃調整室長
靑瓦臺 民政首席
第22代 總務處 長官
새누리黨 常任顧問
自由韓國黨 常任顧問
國民의힘 常任顧問
配偶者 김하야
子女 膝下 3男
軍服務 陸軍少領 轉役
宗敎 佛敎
議員 選手 3
議員 臺數 15·16·17
正當 國民의힘
地域區 慶南 밀양시·昌寧郡
黨內 職責 常任顧問
웹사이트 金容甲 - 大韓民國헌정회

金容甲 (金容甲, 1936年 9月 28日 ~ )은 大韓民國 政治가 이다.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金容甲은 1936年 9月 28日 慶尙南道 密陽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京城 麻浦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61年 25歲에 陸軍士官學校 를 17期로 卒業하면서 少尉로 任官되며 軍 生活을 始作하였다. 以後 1966年부터 이듬해 1967年까지 베트남 戰爭 에 參戰하였으며 1971年 35歲에 陸軍 少領으로 豫編하였다. [1] 그 뒤 公職者가 되어 中央情報部 安企部 에서 勤務하였다. 維新 後半 中央情報部 監察國葬으로 昇進하고 1981年 安企部 監察室長을 거쳐 企調室長이 되었다. 1981年 5共 出帆 後에도 企調室長에 留任되었다. 1985年 2月 에 後輩 養成을 위해 自進辭退를 大統領에게 報告. 그後 美버클리大學 數學中 靑瓦臺 民政首席 任命을 받고 다시 歸國한다. 以後 노태우政府 總務處 長官 을 지냈다. [2] 靑瓦臺 民政首席 時節 現場을 다니며 아래에서 올라오는 報告를 綜合해 大統領에게 報告하면 되는 일도 直接 現場을 찾아다니며 活動하기도 했다.

1986年 에 野黨인 宸翰민주당 直選制改憲 推進 行事場에 潛入 情勢를 把握 전두환 大統領에게 報告하였고 1987年 에 發生한 6月 民主 抗爭 當時 그는 明洞聖堂 의 籠城場 한가운데에 들어가 催淚彈을 뒤집어쓰면서 蒐集한 現場의 생생한 목소리를 全斗煥 大統領에게 傳達하며 直選制 受容을 强하게 主張하였다 얼마 뒤 全斗煥 은 直選制를 受容하겠다고 밝혔고 盧泰愚 는 大統領 直選制를 骨子로 하는 6·29 宣言 을 發表한다.

長官 在職 中에 그는 公務員 處遇 改善에 앞장섰으며 民俗의 名節인 설날 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아이디어를 直接 提案하여 公務員 出勤簿를 廢止하고 圓卓會議를 導入했다. 와이셔츠 차림 會議 또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그는 第一 人氣 있는 長官이었으며 總務處 職員들에게 柔軟하고 奇拔한 長官이라는 評價를 받기도 하였다.

1988年 8月 總務處長官在職時에 記者會見을 열어 "現在 與小野大 구로는 左傾化를 막기 不可能하고 大韓民國 은 越南式 共産化 統一이 될 수밖에 없다."는 發言을 하였다. 이 發言이 問題가 되어 國會에 불려가 記者會見 內容을 問題삼은 野黨 議員들로부터 追窮을 當했지만, 오히려 國會 質疑에서 그는 이 땅의 右翼은 죽었느냐며 맞받아쳤다. 그는 以後 '右翼의 期數' '右翼의 代辯人'이라는 別名이 그를 따라다녔다.

1989年 3月 에 金容甲은 左翼 剔抉을 名分으로 長官職을 辭退하였다. 長官職 辭退로 右翼과 相對 陣營에 剛한 印象을 남기기도 했다. 그 뒤 保守性向의 市民團體인 民主改革 汎國民運動協議會를 組織하여 活動하였다.

1996年 에 實施된 第15代 總選 에서는 無所屬 으로 自身의 故鄕 慶南 밀양시 에 出馬하여 當選되며 國會에 入城하였다.

國會議員이 되고 이듬해 金容甲은 신한국당 에 入黨하였으며 黨 內에서 그는 '나라의 安保를 걱정하는 國會議員 모임'을 組織하며 代表가 됐다. 當時 그의 先輩들이 더 많았지만 할 말은 한다는 所信 德分에 아무도 그가 代表를 맡는 데 異議를 提起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0年 第16代 總選 에 出馬하여 再選에 成功하였다. 그해 國會 對政府質問에서 與黨인 새千年民主黨 을 가리켜 조선로동당 2中隊라고 非難해 波紋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김대중 政府 의 햇볕政策을 가리켜 對北 퍼주기 政策이라며 剛하게 批判하였다. 强勁한 對北路線을 主張하여 叱咤를 많이 받았지만 信念을 一貫되게 지키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 國會 內에서 所信波 議員으로 記憶되었다.

2002年 한나라黨 에서 민정系인 '5·6共 人士 勇退論'李 黨 內에서 提起되었다. 그러자 金容甲은 5·6共 人士 勇退論에 나는 5·6共 때의 내 役割에 自負心을 가진다고 發言하여 論難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以後 勇退論에 反撥하는 모임을 가졌다가 記者들의 出入으로 다른 議員들이 자리를 避했으나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少壯派의 勇退論을 反駁하였다.

2004年 2月 韓國·칠레 自由貿易協定(FTA)批准 同意案을 積極的으로 反對하는 活動을 하기도 했다. 이때 한나라黨 內 少壯派들은 金容甲의 公薦을 反對하였으나 金文洙 公薦審議委員長은 그를 公薦하였다.

2004年 에 第17代 國會議員에 當選되며 3線에 成功하였다. 한나라黨 이 野黨이었던 期間 동안 그는 金大中 , 盧武鉉 의 政策을 批判하기도 하였고, 또한 李明博 이 執權하며 한나라黨 이 與黨이 되었음에도 不拘하고 李明博 에게도 쓴소리를 繼續하여 保守 人士의 代名詞로 一部 人士들의 攻擊을 받기도 하였다. 2008年 第18代 總選 을 앞두고 總選 不出馬를 宣言하였다. 以後 한나라黨 의 常任顧問으로 委囑되었다.이후에도 새누리黨 . 自由韓國黨 . 未來統合黨 常任顧問을 거쳐 只今은 國民의힘 常任顧問이다.

著書 [ 編輯 ]

  • 1999年 '아내 얼굴을 化粧하는 男子'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92年 總選 14代 國會議員 서울 瑞草區 을 無所屬 21,497票
22.08%
3位 落選
1996年 總選 15代 國會議員 慶南 밀양시 無所屬 18,146票
28.55%
1位 初選
2000年 總選 16代 國會議員 慶南 밀양시·昌寧郡 한나라黨 54,530票
54.74%
1位 再選
2004年 總選 17代 國會議員 慶南 밀양시·昌寧郡 한나라黨 43,685票
50.32%
1位 3選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장기오
第22代 總務處 長官
1988年 5月 25日 ~ 1989年 3月 6日
後任
김용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