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城南民權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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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城南民權運動 은 서울市의 板子村 住民들을 只今의 城南 受精丘와 中院區로 强制 이주시키는 過程에서 政府와 서울特別市 의 一方的, 暴力的 行政行爲에 抗拒하여 1971年 8月 10日 부터 8月 12日 까지 京畿道 廣州郡 (只今의 景氣도 城南市 ) 開發 地域 住民 數萬 名이 公權力을 解體시킨 채 都市 를 占領하고 暴動 을 일으킨 事件으로, 익히 光州大團地 事件 으로 불리는 事件이며, 2021年 6月 28日에 現在의 이름으로 名稱 變更했다. [1] 光州大단지란 서울市의 貧民街 整備 및 撤去民 移住事業의 一環으로 計劃된 衛星都市로 只今의 京畿道 城南市 中院區 · 壽井區 一帶이다.

事件 發生 初期에는 3萬 名의 示威隊가 몰렸으나 그날 5萬名이 城南出張所를 占據한 뒤 10萬 名 以上으로 暴動 參與 市民이 暴增하면서 朴正熙 大統領 內務部 長官과 서울特別市葬 , 京畿道知事 를 派遣하여 住民들에게 謝過하고 要求條件을 受容함으로써 3日만에 鎭靜되었다.

原因 [ 編輯 ]

朴正熙 政權은 조금씩 膨脹하던 人口 와 工場을 分散 收容하기 위해 서울 中心部에서 東南方 半徑 20km 地點에 位置한 京畿道 廣州郡 중부면 中·後에 城南市 壽井區 · 中院區 에 編入된 地域 一帶 350萬餘 坪에 6個年에 걸쳐 新興 衛星都市를 建設할 計劃을 推進하고 이 地域에 京畿道 廣州郡 城南出張所를 設置했다가, 詩·郡과 같은 格의 京畿道 城南出張所를 設置했다. 1960年代 後半에 서울特別市는 都市 再開發 計劃에 依하여 생겨난 撤去民들의 移住를 위해 京畿道 廣州郡에 大規模 移住團地를 造成하였다.

1968年 부터 35萬 坪 規模의 大團地를 造成하여 [2] 1969年 부터 大多數가 淸溪川 , 永登浦 龍山 等地의 無許可 板子村 强制 退去 住民 出身인 21,372家口, 101,325名을 强制 이주시켰고, 1971年 8月까지 25,267世代 124,356名에게 土地 分讓과 일터를 約束하고 이주시켰다.

當時 農村에서 서울로 移住한 사람들 가운데 一部는 大企業이나 中小企業에서 일했지만, 大多數는 建設 日傭勞動職, 非正規職, 下層 販賣職, 單純 臨時勞動者들이었다. [2] 그러나 撤去民들의 住居地 造成 過程에서 땅投機, 分讓權 分配와 入住 過程에서 土地 投機가 蔓延하거나, 生計手段 未備 等의 問題가 發生하였다. 이러한 狀況은 서울市가 不足한 團地造成 財源을 開發 差益을 통해 確保하고자 했던 것에서 비롯했고, 結果的으로 수많은 不動産業者와 投機꾼들이 몰리게 되었다.

經過 [ 編輯 ]

1970年 12月 光州 大團地 事件 現場을 訪問한 金大中 新民黨 大統領 候補

그 뒤 서울特別市 撤去 移住民에게 于先 分讓權이 주어진다는 計劃과는 正反對로 撤去移住民의 分讓權이 不法轉賣되는 事態가 發生했다. 中間에서 投機꾼과 業體들이 몰려 撤去 移住民 優先 分讓權은 外地人에게 넘어갔고, 當時 不法轉賣된 分讓權으로 移住한 家口가 團地 內 21,372家口의 約 30%에 達하는 6,343家口였다.

移住地域 內에는 大部分이 都市貧民이던 住民의 生計手段이 全혀 마련되지 않았다. 當初 일터 提供을 約束하겠다는 政府와 서울特別市의 約束과는 다르게 周邊에는 工場 地域도 없었고 商街 團地도 全혀 造成되지 않았으며, 버스와 交通便 亦是 擴充되지 않고 旣存의 農村 마을버스 만이 數 臺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交通이 不便해 生計手段이 있는 서울市內를 往來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大部分이 손수레와 行商으로 어렵게 生計를 維持하는 處地여서 車輛으로 移動할 程度로 먼 거리에 居住하는 것 自體가 不可能했다. 서울로 나가는 車便도 없는 荒凉한 곳에서 먹고 살아갈 터전도 提供되지 않아 이들의 生活 形便은 最惡의 狀況으로 치달았다. 山川草木만 茂盛한 野山과 들판에 無作爲로 내쫓겨 내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事前에 이러한 事情을 考慮한 撤去民은 移住分讓權을 不法轉賣하고 서울市內의 다른 地域에 다시 無許可로 定着했다.

光州 大團地는 아직 基盤 施設조차 未備해서 食水나 化粧室 조차 建立되지 않아 제대로 準備되지 않은 狀態였다. [2] 行政當局은 이러한 問題들에 對한 監督과 監視에 태만하였고, 住民의 意見 收斂 方案이나 根本的인 對策을 마련하지 않은 채 光州 大團地 建設을 無理하게 强行했다.

行政當局은 轉賣入住者들에게 移住民 分讓價의 40~80倍에 該當하는 坪當 8,000~16,000원의 地價를 一時에 拂入할 것과 移住 初期 團地 內 住民들에게 過重하게 賦課된 各種 稅金納付를 督促했고, 住民들의 憤怒는 暴發하였다. 일터를 要求하는 撤去民 및 入住民들의 强한 不滿과 交通便을 于先 提供해달라는 要求는 徹底히 默殺되었고, 水道, 電氣, 電話, 道路 等의 社會 基盤 施設의 計劃量의 20% 水準도 미치지 못한 狀況이었기 때문이다.

占據 籠城 [ 編輯 ]

1971年 7月 7日 에 移住民들에게 처음 約束한 坪當 2,000원으로 拂下했던 땅 값을 坪當 8,000원에서 最大 16,000원까지 大幅 올린 뒤 土地 代金을 一時拂로 納入하라고 通知했고, 이는 入住民들의 憤怒를 폭발시키는 起爆劑가 되었다.

政府와 서울特別市 當局은 비싼 分讓價, 撤去民 優先權이 無視되고 外地人들의 分讓 增加, 땅 投機, 周邊 地域 일자리 不足 等의 問題 解決과 政策의 市政, 生計手段의 마련 等 住民의 切迫한 要求를 番番이 默殺했다. 8月 10日 에 5萬 名의 移住民이 京畿道 城南出張所 앞에 集結했다. 이들은 朴正熙 政府를 向해 無償分讓 및 分讓價 引下, 稅金減免, 工場과 商街 等의 建設, 作業場 斡旋, 住民 口號事業 推進 等을 要求하면서 城南出張所에 불을 질렀고, 出張所 所屬 器物과 車輛을 破壞했다.

같은 날에 最高責任者인 서울市長이 住民과의 對話 約束마저 一方的으로 어기자 이에 激忿한 住民들은 都市를 占領 地域 內 土地 拂下 價格 引下, 取得稅 減免, 稅金 賦課 延期, 緊急 救護 對策 마련, 就役腸 斡旋 等을 要求하며 都市를 占領하였다. 示威隊가 數萬 名으로 增加하자 內務部와 서울市는 700~800餘 名의 警察 機動打擊隊를 光州大團地로 投入했으나, 이들의 騷擾事態를 鎭壓하는 데 失敗하고 말았다. 참다 못한 市民 一部는 버스 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와 集團으로 抗議 示威를 벌였다. [2]

事件을 報告받은 中央 政府는 行政安全部 次官과 京畿道知事를 現場으로 派遣해 移住民들의 要求를 全幅的으로 受容한 것은 勿論, 住民代表에게 正式 謝過하고 移住民들의 火를 달랬으며, 8月 12日 에 서울市長이 放送 談話를 통해 移住團地의 城南市 昇格과 함께 住民의 要求를 無條件 受容할 것을 約束함으로써 市民들이 自進 解散한 끝에 事態는 3日만에 最終 鎭靜되었다.

評價 [ 編輯 ]

1960年代 의 産業化와 都市化 그리고 그에 따른 農業 의 解體와 失業問題 等 資本主義 社會의 構造的 虛點인 都市貧民問題를 드러낸 事件이었다는 評價가 많다. 政府와 서울特別市의 一方的인 行政行爲에 對한 抵抗이었다는 評價도 있다.

影響 [ 編輯 ]

전태일 事件 以後 學生들은 "大學生들은 勞動運動을 學生運動과 결부시켜 推進하자!"고 主張하게 되었고, 光州 大團地 事件이 일어나자 學生運動圈을 鼓舞시켰다. 8月 10日 에 光州 大團地 事件이 일어나자 서울대학교 法大生 들은 "이제 民衆은 過去의 諦念과 挫折을 딛고 民衆의 새로운 歷史를 創造하기 始作하였다. ...(以下 中略)... 5적의 橫暴, 買辦大企業의 橫暴, 外國資本의 橫暴, 租稅의 黃布에 抗拒하기 始作하였다. [3] "라고 宣言하였다.

서울로 繼續 流入되는 人口를 遮斷하려 서울 移住를 制限하자던 前職 서울市長 윤치영 의 主張이 다시 社會一角에서 提起되었다가, 事件 以後 言及되지 않게 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최찬흥 (2021年 6月 28日). ' 8·10 城南民權運動' 名稱 宣言式…光州大團地事件서 變更” . 聯合뉴스 .  
  2. 曺喜昖 , 《朴正熙와 開發獨裁時代》 (역사비평사, 2007) 121페이지
  3. 송건호, 《송건호全集 1》 (한길사, 2002) 138페이지

參考 및 關聯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