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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等 中退 ‘工事판 아지매’, 나이 60에 看護助務士 된 事緣은[서영아의 100歲 카페]|東亞日報

初等 中退 ‘工事판 아지매’, 나이 60에 看護助務士 된 事緣은[서영아의 100歲 카페]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9月 2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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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醫院에서 人生2幕 이숙희 氏

20年 間 工事場 日傭職 勤勞者 生活
現場에선 ‘設備 아지매’로 불려
57歲에 初中高 檢定考試 通過
온家族이 똘똘 뭉쳐 엄마의 熱工 應援

“하이고, 제가 뭐라고, 이렇게 멀리까지…”

그를 搜所聞해 인터뷰 約束을 잡을 때 이숙희(64) 氏가 되뇌었던 말은 ‘제가 뭐라고’였다. 그는 4年 前부터 딸 권기순(40)氏가 院長인 韓醫院에서 看護助務士 일을 하고 있다.

李 氏는 지난해 慶尙南道가 主催한 ‘人生二毛作 成功手記’ 公募展에서 最優秀賞을 받았다.

偶然히 이 手記 ‘굳세어라 숙희야’를 읽고,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韓國의 高度成長 時節, 犧牲만 하고 살았던 우리 누이들의 해피엔딩 스토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11~12日 慶南 巨濟의 韓醫院을 찾았다.

患者가 한番 寢牀에 누우면 몸에 닿았던 手巾들은 無條件 洗濯室로 간다. 그래서 韓醫院 한쪽에서는 洗濯機 3代, 乾燥器 2臺가 쉴새없이 돌아간다. 巨濟=서영아 記者 sya@donga.com

일할 때는 徹底하게 ‘院長 先生님’과 ‘숙희 쌤’이다. 患者 차트를 보며 이숙희 氏에게 무언가를 指示하는 권기순 院長. 巨濟=서영아 記者 sya@donga.com


“내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洞네에선 아무도 몰랐어요”
1959年 生인 李 氏의 學歷은 오랜 歲月 初等學校 4學年에서 멈춰 있었다.14세부터 20代 初盤까지는 工場에서 보냈다. 23歲 때 只今의 男便 권오언(68) 氏와 結婚하며 工場을 떠났지만 가난은 如前했다.

27歲부터는 혼자가 된 媤어머니(當時 57歲)를 모셨고, 30代 後半부터 工事場 日傭職 勤勞者, 俗稱 ‘노가다’로 20年 가까이 일했다. 病弱한 媤어머니와 아들딸 5食口가 살아가려니 男便의 외벌이로는 不足했다.

現場에서는 ‘設備 아지매’로 불렸다. 아파트 工事 初期에 水道管이나 수전, 洋便器 等을 設置하는 일이 主 業務였다. 洞파이프 鎔接 程度는 식은죽 먹기로 해냈다.

“設備는 骨格만 만들어진 建物에 올라가 作業하는 일이 많아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家族에게도 正確히 제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얘기 안했어요. 이웃들에겐 더욱 숨기는 데 汲汲했죠. 猖披했으니까요.”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던 시절의 사진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의무안전교육을 받은 뒤 단체로 ‘증거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너도나도 뒤로 가 얼굴이 안 나오게 하려 애썼다고. 유일하게 그 시절의 흔적으로 남은 게 카드 형태의 이 교육이수증이다.   이숙희 씨 제공
工事場 日傭職 勤勞者로 일하던 時節의 寫眞은 全혀 없다고 한다. 義務安全敎育을 받은 뒤 團體로 ‘證據寫眞’을 찍어야 했는데, 너도나도 뒤로 가 얼굴이 안 나오게 하려 애썼다고. 唯一하게 그 時節의 痕跡으로 남은 게 카드 形態의 이 敎育履修症이다. 이숙희 氏 提供
20代 初盤, 工場에서 일하던 時節의 이숙희 氏. 工場時節 寫眞은 이게 唯一한데, 이것도 會社에서 弘報用으로 찍었던 것들 中 한 張을 준 것같다고 記憶한다. 이숙희 氏 提供


그 많던 女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가 工場에서 일하던 1970年代 寫眞을 보며, 그 많던 ‘産業役軍’ 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했다. 낮은 賃金에 人生의 꿈과 可能性을 抵當 잡혔던 그女들은 아마도 工場을 벗어난 卽時 이 記憶을 黑歷史로 묻어버리지 않았을까. 그가 只今도 아파트 建設現場에서 땀흘린 그 수많은 나날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하듯이.

韓醫院에 到着하니 男便 權氏도 와 있었다. 아내에게 重要한 날이니 記事 노릇을 自處했다고. 無言의 應援이 느껴졌다. 저녁 7時, 診療가 끝나자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權院長度 合流했다.

“내는 죽어도 大學은 가보고 죽을 끼라”
‘못 배웠다’는 것이 그의 平生 恨이었다. 男便에 對해 “착한 사람”이라며 “못 배운 저를 받아줬다”고 몇番이나 말했다.

結婚할 때 媤아버지께 ‘中卒’이라고 거짓말 했고, 學校에 보내는 書類에도 ‘中卒’이라고 써보냈다. 이 男便에게조차 끝내 ‘實은 初等學校를 卒業하지 못했다‘는 말은 못했다고 한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權氏가 한마디 거든다. “못 배웠어도 사람이 똑똑하면 되는기라. 當身은 똑똑하잖아.”

平生의 恨을 푼 실마리는 61歲 知人이 인터넷 講義로 工夫해 心理相談士 資格證을 땄다는 消息.

“귀가 번쩍 뜨였죠. 學院에는 猖披해서 못 가지만 認講이라면 혼자 얼마든지 工夫할 수 있겠구나…”

밤마다 밥床 펴놓고 男便에게서 數學課外 받아
딸에게 처음으로 “내가 실은 初等學校 卒業資格이 없다”고 커밍아웃했다.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程度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告白한 거였는데, 딸은 “그게 뭐 대수라고, 檢定考試 보면 되지”라며 집 近處 初等學校에 問議해 解決策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1年 4個月 만에 이 氏는 初中高 檢定考試를 모두 通過했다. 初等學校는 한달 餘 獨學으로 工夫한 뒤 2015年 3月에, 中學校는 5月에 合格證을 받았다. 高校 合格證은 이듬해 5月에 받았다.

“高等學校 過程은 獨學만으로는 벅차서 學院에서 工夫했지요.”

基礎가 없는 數學이 問題였다. 救援投手는 가까이에 있었다. 公告와 폴리텍을 나온 ‘理科系’ 男便 權 氏가 밤마다 밥床을 펴놓고 數學課外를 해줬다.

待望의 高校 卒業證書는 손에 넣었지만 修學能力試驗을 볼 自身은 없었다. 딸은 公認仲介士 資格證을 따보라고 勸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大學에만 向해 있었다. 그러다 檢定考試 學院에서 ‘晩學徒들이 가는 2年制 週末大學’ 情報를 얻게 된다.

李 氏가 2015年 5月부터 2016年 8月 사이에 받은 初等學校 中學校 高等學校 卒業學歷 檢定試驗 合格證. 寫眞이 작아 獨自 便宜를 위해 發給日時만 人爲的으로 擴大했다.


나에게도 同窓이 생겼다!
“2年制件 4年制件, 그냥 大學에 한番 다녀보는 게 所願이었어요. 週末에 終日 몰아서 授業하는 學校였는데 保育福祉相談科로 들어갔어요.

리포트도 써보고 MT도 가고, 學士帽 쓰고 卒業寫眞도 찍었습니다.

저는 平生 同窓이 없었잖아요. 남들이 學窓時節 얘기하면 낄 수가 없었죠. 그런 제게도 大學同窓에 敎授님까지 생긴 거예요.”

事實 ‘晩學徒를 위한 選擇肢’는 하나 더 있었다. 國立창원대에 開設된 4年制 ‘資産管理學科’가 그것. 며느리가 英語敎師란 點도 考慮해 아들 夫婦에게 相談을 請했더니 2年制 쪽을 推薦해줬다고.

“資産管理는 저로서는 別로 써먹을 데가 없지요. 하하.”

醫療奉仕 現場 도우며 남 돕는 일의 기쁨 맛봐
卒業班(2學年) 올라갈 때 미션 하나가 追加됐다. 딸의 勸誘로 看護學院에 登錄한 것. 권기순 院長의 回顧다.

“그 즈음 加助島에 醫療奉仕를 갔는데 엄마가 와서 도와줬어요. 敎室을 빌려 地域 어르신 30餘 名을 治療해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氣分 좋아하시는 거예요.

韓醫院에서도 일손이 不足하면 엄마가 가끔 허드렛일을 도와주셨는데 一 把握도 잘 하시고 正말 믿음직했어요.

‘看護學院 1年이면 看護助務士 資格證 딸 수 있는데, 그거 따서 우리 韓醫院에서 일하시면 어떠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1年 間 週中에는 看護學院, 週末에는 大學講義를 듣는 强行軍을 벌인 끝에 2019年 봄, 滿 60歲에 李 氏는 看護助務士 資格證과 大學卒業狀을 모두 따냈다.

“看護學院 相談 課長님이 ‘學院 創立 以來 60歲 넘어 合格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너무 고맙다’고 하셨어요. 제가 고맙죠. 안 받아주셨으면 제가 어떻게… ”

事實 看護學院 入學할 때 여러 군데에서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이 學院 相談課長은 後날 “여러 사람 만나다 보니 나름 사람보는 눈이 생겼는데, 이 분은 해낼 것 같았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大學卒業式에서 學士帽를 쓴 이숙희 氏와 同期同窓들. 이숙희 氏 提供
2019年 이숙희 氏의 大學卒業式에는 온 家族이 祝賀에 나섰다. 왼쪽은 蔚山에서 달려온 아들 권도욱 氏 家族. 이숙희 氏 提供


家族의 無關心에 初4에 中斷된 學業
1960年代에도 初等學校는 義務敎育이었다. 李 氏는 왜 卒業하지 못했을까.

“2男 4女 中 막내딸이었어요. 初等學校 4學年 무렵 집이 시골에서 安東으로 移徙를 갔어요. 아버지가 學校에 轉學手續을 밟아줘야 하는데 時機를 놓쳤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언니오빠들은 모두 出嫁하거나 집을 나갔고 어느 틈에 제가 少女家長이 돼 있더군요. 父母님 모두 예순이 넘으셨고요. 열넷 程度부터 집近處 菓子工場에 다니기 始作했죠.”

그뒤로는 아무도 學校 얘길 꺼내지 않았다. 19歲 때에는 親戚의 紹介로 龜尾의 纖維工場에 就職했다.

이 무렵 全南 光州에서 空軍 中士로 勤務하던 男便 權 氏와 펜팔로 連結됐고, 權氏가 昌原의 技能大(現在의 폴리텍臺)에서 工夫하면서 昌原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 사람이 이렇게 멋있었다니까요.” 이 씨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이 펜팔로 연애하던 시절 공군 중사 모습의 남편 권 씨 사진을 보여줬다. 이숙희 씨 제공
“이 사람이 이렇게 멋있었다니까요.” 이 氏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이 펜팔로 戀愛하던 時節 空軍 中士 모습의 男便 權 氏 寫眞을 보여줬다. 이숙희 氏 提供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일도 있는데 왜 ‘노가다’ 일이었나요?

“제 마음 속에 定해둔 原則이 있었어요.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家族 저녁밥은 내가 차려야 한다는 原則이죠. 해질녘 歸家할 수 있으면서 學歷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選擇肢가 없었지요.”

이 일은 當時에도 벌이가 쏠쏠했다. 男便보다 많이 벌 때도 적지 않았다.

2002年, 最惡의 試鍊이 닥쳐왔다. 딸이 大學入試에서 떨어져 서울로 留學을 떠났다. 學院費寄宿舍費를 대야 했는데 男便은 다니던 大企業에서 ‘잘렸다’. 어머니 病勢는 더욱 나빠져 大小便 수발이 必須가 됐다. 집을 사며 얻은 貸出도 있었다.

모든 不幸이 다 내게로 왔던 時節
“모든 不幸이 제게로만 오는 것같았어요 . 그때 제가 43살. 只今 생각하면 참 젊었는데, 當時에는 제가 무척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를 療養病院에 보낼 돈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끝까지 모시겠다는 마음도 컸지요.”

當時 그는 늘 不安했다고 한다.

“새벽 6時에 어머니 點心까지 차려놓고, 요강 準備 다 해놓고 나가요. 高校生이던 아들이 할머니 要綱수발을 많이 도와줬어요.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心臟이 두근거렸어요. 或是라도 나 없는 사이 어머니 혼자 돌아가셨을까봐…

玄關에서부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불러서, ‘그래 에미냐’ 對答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내렸죠.”

2003年 初 딸이 한의대에 合格한 直後 할머니가 他界했다. 걱정과 달리 媤누이 두 분과 李氏까지 집에 있는 狀況에서 돌아가셨다.

葬禮式에 온 親戚이 ‘자네는 父母한테 잘해서 福 받은 거’라고 했다.

院長 先生님이 鍼灸治療를 마치고 가면 看護助務士人 숙희 쌤이 뒷處理를 맡는다. 鍼을 뺀 患部를 消毒하는 이 씨. 붉은 빛은 赤外線 治療光線이다. 巨濟=서영아 記者 sya@donga.com
李 氏가 韓醫院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줬다. 모든 韓藥은 이곳에서 直接 다리는데 누구나 볼 수 있게 公開돼 있다고 한다. 巨濟=서영아 記者 sya@donga.com


‘設備 아지매’에서 ‘숙희 쌤’으로
요즘 이 氏는 週 3日 慶南 昌原의 집에서 韓議員이 있는 巨濟까지 市外버스로 出勤한다. 2015年 開院한 韓議員은 地域에서 자리를 잡아 손님들이 줄을 선다.

일터에서 母女는 서로 ‘院長先生님 ’ ‘숙희 쌤’이라고 부른다. 다른 4名의 看護助務士度 이름에 ‘쌤’을 붙여 부르기는 마찬가지.

20年 間 工事 現場에서 ‘設備 아지매’라 불리던 그가 ‘숙희 쌤’으로 自身의 이름을 되찾았다.

權 院長이 韓醫師를 志望한 理由도 家族생각이 컸다.

“于先 우리 家族 健康을 제가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여기저기 아프고, 엄마는 40代부터 얼굴이 퉁퉁 붓고 잘 걷지도 못했어요.

收入도 생각했죠. 父母님 苦生이 모두 돈 때문인데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우리 집에 좀 도움이 되겠다….물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보람도 크죠.

只今 엄마에게 月給 兼 用돈 兼 돈을 드릴 수 있어 너무 좋아요.”(권 院長)

無理해서 일 하다 스테로이드 副作用까지
權 院長은 工夫하다보니 李 氏의 症狀이 스테로이드 副作用으로 인한 ‘쿠싱症候群’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날 그날 일을 나가야만 벌이가 있으니 藥 먹고 注射 맞아가며 無理를 했는데 스테로이드를 너무 맞았다는 것.

-그렇게 苦生했는데 가끔 男便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

“제가 모자라 그 일을 擇했는데 男便 탓할 立場이 아니죠. 率直히 제가 잘났다면 그런 데 갔겠어요. 다른 거 했겠지.”

夫人이 번듯한 職業을 가진 男便 同僚들을 보면 이 氏는 男便에게 未安해했다. 그때마다 權氏는 “當身이 工夫 더 했으면 나 못 만나. 날 만나줬겠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 어떤 일도 제가 다 이겨내야겠다는 責任感이 굳어지곤 했지요.”

媤어머니를 中心으로 찍은 家族寫眞. 어머니는 몸이 弱해 자주 쓰러지셨지만 착하고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이숙희 氏 提供


世代間 犧牲과 도움의 善循環
世代 葛藤이니 世代間 搾取니 하는 말이 亂舞하는 世上이지만, 李 氏 家族은 犧牲을 한 世代德에 잘 된 아랫世代가 다시 윗世代를 도와서 함께 잘 되는 ‘윈윈’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家族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엄마, 그 엄마의 마음을 아는 딸은 問題에 부닥칠 때마다 答을 찾는데 힘을 보탰다.

特히 平生 李氏를 가둬둔 學歷 콤플렉스를 떨치고 世上에 나오도록 마음 썼다. 李氏가 手記를 통해 世上에 모든 걸 公開하겠다는 勇氣를 낸 것도 딸의 劇藥處方 德이다.

“(手記 쓸 때) 처음에는 初等學校 中學校 못 간 얘기는 빼고 高等學校 中心으로 썼어요. 남들 보기 猖披하니까요. 그런데 딸이 막 뭐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다 넣었어요.”(이 氏)

엄마가 初等學校도 卒業하지 못했었다는 얘기는 아들조차 手記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

“엄마의 境遇 제 눈에는 世上에서 말하는 學歷은 別 意味가 없었어요.

엄마는 손에서 冊을 놓은 적이 한番도 없어요.저희가 學校를 卒業할 때마다 엄마는 함께 卒業한 셈이예요. 저희가 읽는 敎科書, 參考書, 漫畫冊, 제 專攻書籍까지 모두 읽었거든요.

化粧室에 앉으면 新聞조각이라도 읽으세요. 늘 조그마한 거 하나에도 배울 게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저희도 熱心히 工夫할 수 있었지요.” (權 院長)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所重하죠”
公募展 最優秀賞 賞金은 50萬 원. 이 賞金을 分配한 얘기에서 李 氏에게 가장 重要한 게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苦生은 누구나 하는 거고 本人 運命일 뿐이죠. 남탓할 必要 없어요. 그래서 더더욱 옆에 있는 사람이 所重해요.

우리 男便은 그 賞金 받을 充分한 資格이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큰 힘이 돼 줬어요. 그래서 10萬 원 더해서 60萬 원 줬고, 사위 딸 며느리 아들에게도 10萬 원씩 딱딱 줬어요.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完成品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이番엔 權氏에게 60萬 원 받아서 뭐하셨냐고 하니 “딱 半 갈랐지”라며 킥킥 웃는다. 이 夫婦는 뭐든 생기면 卽時 折半으로 나눠 갖는다는 것.

68歲, 64歲인 夫婦는 모두 現役.李 氏는 韓醫院 일을 힘닿는데까지 繼續할 생각이다. 男便 權 氏도 電氣技師 資格으로 每日 會社에 出勤하는 生活을 이어가고 있다.

먼길을 돌긴 했지만 健康한 家庭을 일구고 子女 잘 키우고 60歲 넘어 自身의 이름으로 일하기 始作한 李氏.

그의 原動力은 本人의 懇切함, 그리고 自身이 안간힘 다해 지켜낸 家族의 뜨거운 應援이었다. ‘굳세어라. 숙희야!’

어려운 일이 많아도 늘 ‘서로가 最高’라고 북돋으며 살아온 이숙희 권오언 夫婦가 함께 포즈를 取했다. 뒤에 권기순 院長의 寫眞이 걸려 있다보니 家族寫眞 느낌이 난다. 巨濟=서영아 記者sya@donga.com

巨濟=서영아 記者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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