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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에서 料理 訓鍊을 받아 서울서 開業하다”[주성하 記者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북한군에서 料理 訓鍊을 받아 서울서 開業하다”[주성하 記者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8月 14日 09時 00分


코멘트
2014년 한식대첩에 북한 대표로 출전했을 때의 안영자 사장
2014年 韓食大捷에 北韓 代表로 出戰했을 때의 안영자 社長


#料理 訓鍊兵

“이제부터 동무들은 偉大한 首領 김일성 同志의 配慮로 朝鮮人民軍의 食事를 責任지는 料理師로 訓鍊을 받게 되었습니다.”

一場演說을 하는 少佐 앞에 트럭에서 내린 10代 後半 靑少年들은 차렷 姿勢로 바짝 緊張한 채로 서있었다. 入所食餌 끝나고 軍服으로 갈아입은 뒤부터 이들은 손에 칼을 들고 猛訓練에 突入했다. 當時 滿 16歲 少女 안영자 氏도 그들 中 한 名이었다.

1983年 平安南道 은산군 수良役 隣近의 北韓軍 後方總局 基地에서 이들은 無慮 2年 동안 스파르타式으로 各種 料理를 하는 訓鍊만 받았다. 軍部 所屬이라 食材料는 豐足하게 供給됐다. 平壤商業大學에서 派遣된 敎授들이 學生들을 對象으로 1代1로 料理 敎育을 해주었다. 敎育生들은 軍人 身分이라 가끔 銃을 메고 달리는 訓鍊도 받았고, 무거운 麻袋를 메고 高地를 오르내리기도 했다. 有事時 料理師들도 飮食을 메고 戰場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理由 때문이었다.

처음 入所했을 때 敎育生은 男子 6名, 女子 42名으로 모두 48名이었는데, 2年 過程을 버티고 卒業한 사람은 26名에 不過했다. 2年 敎育 過程이 끝나자 新義州飛行場과 순안비행장에 派遣돼 6個月 實習過程度 거쳤다. 實習 過程을 거치자 이들에겐 平壤商業大學 卒業生 資格과 함께 1級 料理師 資格證도 함께 주어졌다.

北韓軍은 一般 部隊엔 料理師가 따로 있지 않다. 그러나 各種 將星級 招待所(別莊)와 特殊 任務를 遂行하는 招待所에 專門 料理師를 配置할 必要가 있어 當時 軍部 直屬 料理師를 特別히 키워낸 것이다.

卒業과 同時에 安 氏는 軍服을 입고 1986年 空軍司令部 所屬 咸鏡北道 鏡城郡 溫飽招待所 料理師로 派遣됐다. 그곳은 그女의 故鄕이기도 했다.

#1號 行事 料理師

安 氏는 京城에서 나름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林業大學을 卒業하고 現地 林産事業所 技師長을 했고, 어머니는 人民學校 敎師였다. 그女에겐 오빠 두 名과 男동생 1名이 있었는데, 4男妹 中 唯一한 딸이라 父母의 사랑도 獨차지했다.

그女는 工夫도 곧 잘했다. 中學校 卒業하기 前 그의 抱負는 醫師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地方인 京城에선 醫學大學에 推薦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結局 卒業하는 해 平壤商業大學에 試驗을 칠 資格을 얻게 됐다. 平壤商業大學도 北韓에선 女性들에겐 매우 羨望 받는 大學으로 나쁘지 않은 條件이었다.

하지만 試驗 치러 가기 前 아버지가 찾았다.

“영자야, 요즘 軍에서 料理師를 뽑고 있는데, 平壤에서 工夫하기보단 거기에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平壤商業大學 卒業 資格도 주고, 入黨도 빨리 되고, 物資도 豐富한 좋은 招待所에서 服務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 故鄕에 돌아올 수도 있고…. 平壤에서 商業大學 나와도 이런 곳에 들어가기 어렵다.”

16歲 少女는 當然하게 아버지 勸告를 따랐다. 北에서 料理師란 職業은 韓國과 달리 매우 貴한 職業이다. 當時엔 地方의 어느 郡에 가봐야 食堂이 서너 個 程度에 不過했다. 都市도 마찬가지. 食堂은 出張을 다니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으로 認識되던 때였다. 料理師가 되려면 大學을 나와서 國家에서 任命狀을 받아야 可能했다. 먹을 것을 다루는 料理師는 配給에 依存해 살지 않아도 되니 女性들에게 特히 人氣가 있었다.

어느 날 집에 한 軍官이 찾아와 安 氏를 만나 面談을 하고 돌아갔다. 身元朝會 過程은 6個月이나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집에 찾아온 少佐와 함께 列車를 탔다. 所謂 ‘1號車’로 불리는 高級 列車였다. 平壤으로 가는 줄 알고 들떴으나 평양역에서 數十㎞ 떨어진 修養驛에서 내려 깊은 山골에서 訓鍊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卒業하자마자 兵士 中에선 가장 階級이 높은 特務上士 肩章을 받고 故鄕에 있는 空軍 招待所로 돌아올 수 있어 多幸이었다.

咸鏡北道 京城飛行場은 北韓軍 空軍 操縱士를 키워내는 主要 基地이다. 北韓軍 飛行士들은 操縱士 過程 中 1年 동안은 이곳에 와서 飛行機를 탄다.

安 氏가 配置를 받은 溫飽招待所는 有名한 朱乙溫泉 곁에 있는 景致 좋은 곳이었는데, 가보니 이곳엔 아프리카人들이 正말 많았다.

當時 아프리카 外交에 힘을 기울이던 김일성은 軍事 援助의 하나로 아프리카 各國에서 選拔된 軍人들을 北에 불러 飛行士로 養成하고 있었다. 짐바브웨, 탄자니아, 잠비아, 레소토 등 아프리카 各國에서 黑人 靑年들이 몰려왔다.

安 氏의 첫 任務는 이들에게 料理를 해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人들의 株式은 빵과 牛乳, 버터였지만, 料理도 잘 먹었다. 가장 많이 使用하는 食材料는 돼지고기와 닭고기, 감자와 토마토였다. 감자는 푹 삶아 肉類와 섞어 各種 料理를 만들었다. 돼지고기와 토마토를 함께 볶은 料理도 매우 人氣가 있었다.

가끔 平壤에 差出돼 갈 때도 있었다. 1980年代 짐바브웨 大統領, 레소토 總理 등 아프리카 貴賓들이 北韓을 찾아와 김일성을 만나는 ‘1號 行事’를 할 때면 平壤에 가서 宴會場 晩餐 料理를 함께 만든 적도 있다.

1993년 평양에서 찍은 사진. 옆의 아이는 상관의 아들이다.
1993年 平壤에서 찍은 寫眞. 옆의 아이는 相關의 아들이다.


#幸福과 不幸은 종잇張 差異

安 氏가 軍 料理師로 成長할 동안 집안엔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于先 1986年에 아버지가 對外經濟委員會로 자리를 옮겨 外貨벌이를 하려 어머니와 함께 外國에 派遣된 것이다. 처음 蘇聯에 勤務하다가 나중에 루마니아에 가서 勞動黨 資金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北韓에서 父母 모두 外國에 갈 수 있는 資格은 出身成分이 좋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安 氏는 아버지의 出身成分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빠들도 出身成分이 좋아야 가는 位置에서 빠르게 昇進했던 것을 보면 나쁘지 않은 出身成分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오빠는 큰 病院의 院長까지 지냈고, 둘째 오빠는 扈衛局 少佐로 있었다. 父母가 보내주는 돈으로 兄弟들도 豐足하게 살았다.

安 氏는 1994年 咸鏡南道 마展에 있는 對南連絡所 敎官과 結婚했다. 男便의 아버지는 保衛部 高位 幹部였고, 北韓에서 最高의 出身 成分으로 꼽는 抗日鬪士 家門이기도 했다. 結婚 直後 馬田으로 옮겨 그곳 招待所 料理師를 지냈다. 男便을 따라 移徙를 다니며 元山과 奸吏 招待所 等 南派 間諜들이 主로 使用하는 招待所에서 料理師를 지냈다.

結婚 生活은 그리 幸福하眞 않았다. 男便은 한番 나가면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둘 사이에 아이도 없었다. 그래도 잘 나가는 男子와 結婚했다고 周邊에서 부러워했다.

그러나 海外에 派遣된 父母를 둔 裕福한 生活, 잘 나가는 오빠들을 두었던 安 氏의 幸福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年 男동생의 死亡과 더불어 그의 집은 風池박살이 나기 始作했다.

두 살 어린 男동생은 高等學校를 卒業하던 해 父母와 헤어졌다. 父母가 海外에서 돈을 벌고 兄들도 누나도 다 집을 떠난 뒤라 統制를 할 사람도 없어졌다.

父母가 보내주는 돈으로 동생은 日本 歸國者 出身 等 富裕한 靑年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이들은 틈만 나면 北韓에서 許容되지 않은 不法 海外 비디오를 돌려보며 時間을 보내기 일쑤였는데, 當時 北韓에서 돈 많은 靑年들이 살았던 典型的인 日常이었다.

하지만 北韓은 그런 式으론 絶對로 安定的으로 살 수 없는 곳이다. 늘 생각지 못한 變數와 危險이 瞬息間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동생도 그랬다. 1991年 12月 蘇聯이 崩壞되는 것에 衝擊을 받은 金正日은 “썩어빠진 資本主義 날라리 現象을 徹底히 뿌리 뽑으라”는 指示를 내렸다. 全國에서 무시무시한 檢擧旋風이 벌어졌고, 男동생도 逮捕됐다. 함께 禁止된 映像을 보았던 親舊가 逮捕돼 그가 主謀者라고 告發한 것이었다.

동생은 1992年 5年型을 宣告받고 惡名 높은 咸北 錢거리敎化所에 끌려갔다. 그렇지만 5年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28살에 肺炎으로 死亡했다.

北韓에서는 監獄에서 收監 生活을 하는 것과 收監 中에 죽은 것은 하늘땅 差異이다. 刑期를 마치고 풀려나면 罪를 씻었다고 보지만, 刑期 中 死亡하면 共和國의 法에 依해 審判을 받다가 죽었다고 評價해 온 家族의 出身成分이 反動 家族으로 바뀐다. 刑期 中 死亡하면 屍身을 家族에게 돌려주지 않고 敎化所 內에서 燒却하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緘口한다.

동생이 錢거리收容所에서 收監됐을 때 安 氏의 兄弟들은 外國에 나간 父母들에게 이런 消息을 알리지 않았고, 동생과 連絡이 되지 않는 理由를 거짓말로 둘러댔다. 父母가 걱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北韓 當局도 마찬가지이다. 心境에 變化를 일으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安 氏의 父母는 아들이 監獄에 끌려간 줄도 모르고 海外에서 지냈다.

하지만 동생이 死亡하고, 1997年 황장엽 亡命事件까지 터지자 北韓 當局은 安 氏의 父母를 北으로 召喚시켰다.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막내아들이 監獄에 끌려가 죽은 것을 알게 된 父母는 큰 衝擊을 받았다. 아버지는 悲痛해 하던 끝에 腦出血로 쓰러졌다.

醫師였던 첫째 오빠는 病院에서 繼續 일할 수 있었지만, 둘째 오빠는 軍服을 벗어야 했다. 安 氏 亦是 마찬가지였다. 1997年 그는 男便과 强制 離婚을 하고, 軍服도 벗어야 했다.

집으로 와보니 그토록 자랑스럽던 아버지는 半身不隨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엄마도 病에 걸렸다. 그동안 벌어놓은 財産을 팔아 藥값은 겨우 充當했지만, 漸漸 돈이 말라갔다. 當時는 國家에서 配給도 나오지 않았던 苦難의 行軍 時期라 먹을 것조차 漸漸 없어져갔다. 아버지를 살리려면 麝香배꼽이 特效라는 말을 들었지만, 當時 價格이 1萬 달러나 돼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 있던 시절의 안영자 사장.
韓國에 到着해 하나院에 있던 時節의 안영자 社長.


#脫北

보다 못한 그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선 中國의 親戚집에 가서 도움을 要請하는 것이 最善이라고 判斷했다. 그렇게 그는 1998年 처음으로 豆滿江을 몰래 넘어 中國으로 갔다. 그런데 親戚이 그런 巨額을 줄 理가 없었다. 그는 中國에서 몇 달 있으면서 바느질 等 온갖 雜일을 하며 돈을 벌어 北에 돌아갔다. 當然히 麝香배꼽은 살 수가 없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除隊된 그에게 양강도 惠山에 司令部가 있는 9軍團 料理師 提案이 왔다. 특별한 사람들만 身元照會를 거쳐 들어가는 招待所 料理師에서 民間人 中에 뽑아 들어가는 一般 軍部 料理師로 身分이 바뀐 것이다. 惠山에 들어온 그는 軍部 食堂 料理師로 있다가 以後 여러 食堂을 옮겨 다녔다.

猝地에 아버지와 男동생을 잃고, 男便과 이혼당한 뒤 安定的이고 豐足한 職業까지 잃은 그는 北韓에선 더 以上 未來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番 다녀온 豐饒로운 中國 생각이 繼續 머리에 떠올라 日常生活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01年 또다시 職場을 옮길 機會를 만나 中國에 넘어갔다. 中國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어 다시 北에 갔다. 그러다가 2005年엔 살던 집까지 팔고 아예 中國으로 넘어왔다. 中國에서 알았던 脫北한 親戚 中 몇 名이 韓國에 到着해 “北에서 살지 말고 南쪽으로 오라”고 電話를 했던 것이다. 그리곤 그들의 案內를 받아 韓國으로 오는 브로커와 接線해 그해 9月 다른 脫北民 8名과 함께 一行을 이루어 韓國으로 向했다. 몽골을 거쳐 韓國으로 오는 루트였다.

# 生死가 갈린 몽골 國境

몽골 國境까지 이들을 引率한 案內者는 헤어지기 前에 “繼續 가면 鐵條網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始作해 東쪽 方向으로 鐵條網 여러 個를 次例로 넘어 繼續 가면 마을이 나온다”고 알려주고 돌아갔다.

몽골은 廣闊한 沙漠의 나라다. 자칫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도 하고, 몽골 內陸으로 들어가는 方向 感覺을 喪失하면 다시 中國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一行은 多幸히 中國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沙漠에서 無慮 엿새나 헤맸다. 낮에는 얼굴을 찌르는 듯한 太陽熱에 皮膚가 타들어갔고, 저녁엔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렸다. 各自 9甁씩 背囊에 넣고 떠난 물은 너무 일찍 바닥이 났고, 食糧으로 準備한 빵은 도무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8日 동안 얼굴이 4番 벗겨졌어요. 하루 終日 動物 뼈밖에 나오지 않는 모래沙漠을 헤매다가 갑자기 푹푹 빠져드는 진흙탕이 나오기도 해요. 그래도 거기에 물氣라도 있으면 그 더러운 물을 허겁지겁 마셨죠.”

닷새째 되는 날 一行이 갈라졌다. 東쪽으로 向해 繼續 가야 한다는 意見과 다른 方向으로 가야 된다는 意見이 갈라진 것이다. 論爭할 힘도, 强制할 힘도 없었다. 結局 30代 中盤 두 女性은 一行과 떨어져 다른 方向으로 갔다.

엿새째 저녁 安 氏의 一行은 沙漠에서 말라 죽은 나무 가지 3個를 發見했다. 더는 갈 힘도 없어 죽기 前에 불이라도 피우고 죽자고 意見을 모았다. 불을 피우고 一行은 빙 둘러 쓰러졌다. 몇 時間 지났을까.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몽골軍 騎馬兵 5~6名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一行에게 眼帶를 씌우더니 軍 哨所로 데리고 가 어디론가 電話를 걸었다. 暫時 뒤 트럭이 나타났고, 이들은 收監施設로 옮겨졌다. 소금과 밥이 나왔다.

다른 方向으로 向했던 두 女性은 不運했다. 그들도 한참을 가다가 나무를 發見해 불을 피웠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온 軍人들은 中國 軍人들이었다.

한 名은 逮捕되자 自殺하려고 正統便이라는 中國 感氣藥을 24알이나 한꺼번에 삼켰다. 거품 물고 쓰러지자 中國 軍人들이 그를 病院으로 옮겼다. 그女는 入院했던 病床에서 도망치는데 成功했다. 以後 여러 試鍊이 있었지만 그女 亦是 結局 韓國에 왔다.

하지만 다른 女性은 北으로 끌려갔다. 一行 中 第一 아름다웠던 女人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北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 그女가 北送된 뒤 여러 次例 脫北했다는 罪로 終身刑을 宣告받았다고 傳해 들었다. 北에서 終身刑은 곧 死刑이나 마찬가지다.

# 裁斷師가 된 料理師

2006年 3月 安 氏는 하나圓을 거쳐 京畿道 富川에 집을 받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寞寞했지만, 北에서 繼續했던 料理는 하고 싶지 않았다.

北에 있을 때 그女의 꿈은 남들처럼 華麗한 옷을 입는 것이었다. 軍 料理師로 勤務하다보니 16살 때부터 줄곧 特務上士 肩章이 달린 軍服만 입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서울 鍾路 5價의 한 洋服店에 就職했다. 그렇게 옷을 디자인하는 法을 배우고 財團과 縫製 技術을 익혀나갔다. 가끔 그가 만든 料理를 먹어보곤 “正말 맛있다”며 食堂을 차리라고 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無視했다. 韓國에 온지 얼마 안돼 韓國 出身 男性과 結婚도 했다. 媤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平凡한 며느리이자, 옷 만드는 데 熱心인 女性으로 살았다.

그런데 運命은 그를 裁斷師로 사는 것을 許諾지 않았다. 2014年 韓食大捷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競演에 參加할 北韓 出身 料理師를 찾다가 그女에게 連絡이 온 것이다. 처음엔 拒否를 했는데 집에 繼續 찾아오는 바람에 應하게 됐다. 그는 北韓팀으로 競演에 參加했는데, 프로그램에서 最終 5位를 했다.

“떡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北韓式과 韓國式은 飮食이 많이 差異가 나죠. 그런데 只今 생각해보면 그게 正말 重要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게 뭔지 모르니 그냥 대충했는데…”

韓食大捷 出演 以後 四方에서 그女를 찾는 電話가 왔고, 講演과 放送 出演 要請이 이어졌다. 脫北民 中에 北에서 料理를 했다는 사람은 많지만, 正規 敎育을 履修하고 國家가 認定하는 正式 料理師로 있다 온 사람은 많지 않다. 安 氏는 講演을 準備하느라 머리 속에 들어있는 北韓 料理 레豺皮를 120個나 整理해 資料로 만들었다. 北에서 제대로 料理師로 訓鍊받고, 現職에 있던 사람과 아닌 사람의 差異인 것이다.

얼떨결에 얻은 人氣로 여기저기 講演도 다니고 TV에도 나가다보니 같이 事業을 하자는 提案도 들어왔다. 처음에 一山에서 ‘장수각’이라는 食堂을 同業으로 經營하다가 2020年 8月 서울 강서구 마곡에 ‘안영자面玉’이라는 自身의 이름을 내건 食堂을 開業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낸 안영자면옥 내외부 모습. 2018년 북한 음식으로 받은 조리명인 자격과 안영자면옥의 평양냉면.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낸 안영자面玉 內外部 모습. 2018年 北韓 飮食으로 받은 調理名人 資格과 안영자面玉의 平壤冷麵.


#脫北 料理師의 꿈

안영자面玉은 平壤冷麵을 基本 메뉴로 하고, 그外 여러 飮食을 곁들인다. ‘돼지발쪽양념醬찜’이라는 그女의 固有 메뉴도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다.

平壤冷麵 만드는 方法은 어디서 배웠냐고 묻자 “예전 軍에서 料理師 敎育을 받을 때 冷麵 만드는 方法도 當然히 배우고, 玉流館에도 보름동안 實習을 갔다 오기도 했다”고 對答했다.

“서울에선 옥류관 冷麵 맛을 만들 수가 없어요. 材料가 벌써 다르거든요. 비슷하게 만들려면 물冷麵 한 그릇 價格을 只今보다 두 倍 더 받아야 하는데, 그럼 팔리지 않아요.”

第一 自信 있는 北韓 料理가 무엇이냐고 묻자 ‘추포湯’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料理 이름을 말했다. 1年 未滿의 小 애기집으로 만드는 料理라고 한다.

北韓에서 그런 貴한 材料를 가려서 쓰냐고 묻자 그는 “北韓 最高位級 幹部들이 먹는 材料는 韓國과 比較할 수 없이 좋은 材料를 쓴다”고 했다. 大多數 人民들은 옥수수밥도 없어 먹지 못하지만, 極少數 特權層은 材料의 微細한 맛까지 가려 먹는다는 것.

韓國 飮食과 北韓 飮食의 差異를 묻자 그는 “韓國 料理는 材料 맛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달고, 맵고, 차고 이런 剛한 맛이 爲主인데 北韓은 材料 맛을 그대로 살리는 데 特化돼 있다. 代身 北韓은 傳統 밖에 쓸만한 것이 없지만, 현대 料理와 飮食 文化의 多樣性은 北韓이 絶對 韓國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對答했다.

그가 門을 연 안영자面玉은 알음알음 입所聞을 거쳐 찾아온 손님들 德分에 코로나 渦中에도 赤字를 보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早晩間 江南에 2號店을 낼 꿈도 가지고 있다.

成功한 事業家가 꿈이냐고 묻자 그女는 손사래를 쳤다.

“脫北者 이미지를 가지고는 大舶을 쳐도 무섭고, 장사가 안돼도 무서워요. 適當하게 家計 月貰 내고 職員들 月給을 주고 남은 것으로 내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滿足입니다.”

정작 그女의 꿈은 北에서 온 脫北民 中에 料理에 才能이 있는 사람을 찾아 料理師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自身이 나이가 들어 隱退한 뒤에도 北韓 料理 方法이 繼續 傳授돼 韓國에서 또 하나의 飮食 文化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 어엿한 食堂 社長도 됐고, 飮食店도 잘 자리 잡았으니 幸福한 人生이 아니냐고 하자 그女는 暫時 말을 멈추고 살아온 人生을 돌아보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힘들게 입을 열었다.

“平生 便安한 때가 없이 힘들었어요. 北에서도 힘들었고, 韓國에 와서도 너무 힘들었고, 只今도 힘들어요.”

철없던 時節 아버지 때문에 始作한 料理師라는 굴레는 全혀 다른 體制에 와서도 如前히 그女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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