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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號線 機關士가 된 脫北 兵士의 꿈[鑄成하 記者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2號線 機關士가 된 脫北 兵士의 꿈[鑄成하 記者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8月 21日 09時 00分


코멘트
지하철 2호선 기관사 한용수 씨.
地下鐵 2號線 機關士 한용수 氏.
1995年 初겨울.

北韓 江原道 金剛郡과 金化郡 사이에 있는 우두산(948m) 頂上의 陣地에서 北韓軍 兵士들이 南쪽에서 날아온 삐라 한 張을 놓고 論爭을 벌이고 있었다.

삐라에는 ‘大韓民國 國民所得 1萬 달러 時代. 自動車 登錄臺數 1000萬 臺 以上. 4名 中 1名이 自動車를 所有’라는 글이 寫眞과 함께 적혀 있었다. 自動車 1000萬 臺는 알겠는데, 1萬 달러가 都大體 어느 程度 額數인지 가늠할 수 있는 軍人이 없었다.

“어이, 上等兵 한용수 여기 오라. 너는 집에서 달러를 좀 만져봤다니 1萬 달러면 어느 程度 額數인지 알 수 있갔지?”

1990年代 初盤만 해도 北韓에선 달러를 구경해본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山이 많고 먹을 것이 없어 惡名 높은 江原道 駐屯 1軍團과 5群團엔 北韓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子息들이 많이 服務했다. 金剛郡 駐屯 1軍團 13社 所屬 한용수 上等兵은 그런 部隊 環境 속에서 달러의 價値를 아는, 많지 않은 兵士 中 한 名이었다.

그가 入隊하기 前 살았던 咸興의 外貨商店 앞에선 1달러가 北韓 돈 100원으로 暗去來됐다. 當時 平凡한 勞動者 月給이 100원 程度였으니 이는 곧 1달러가 勞動者 한 달 月給과 맞먹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萬 달러는 우리 돈으로 바꾸면 100萬 원이고, 勞動者 1萬 個月 치 月給이니까 830年쯤 일해서 꼬박 모아야 되는 돈입니다.”

想像이 안돼 눈을 끔뻑거리는 古參들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제가 入隊하기 前에 咸興에서 아파트를 1萬5000원이면 샀는데, 1萬 달러면 아파트 70채 程度 사겠네요.”

“야 임마, 후라이까지 말라우. 저 南朝鮮 아새끼들이 一年에 그렇게 많이 번다고? 거짓말도 그럴 듯해야 믿지.”

古參들은 都統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韓 氏 亦是 南朝鮮이 그렇게 잘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脫北을 꿈꾸다
漢 氏가 勤務하는 곳에선 韓國의 華川댐이 멀리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댐을 基準으로 韓國軍 7社와 21社가 北韓軍을 警戒하고 있었다.

南쪽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몰라도 北韓軍보단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證據는 發見할 수 있었다.

于先 아무리 敵陣을 살펴봐도 韓國軍은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北韓軍은 勤務 時間을 빼곤 진지 整理니, 鐵條網 整理니, 길 整備니 하며 삽과 곡괭이를 메고 다녔다. 또 北韓軍은 物資를 등짐으로 메고 2時間 동안 高地로 올라오는데 비해 韓國軍 陣地엔 헬기로 物資를 싣고 오고 그걸 車로 다시 싣고 갔다.

雙眼鏡을 通해 본 韓國軍의 營養 狀態 亦是 아주 좋아보였다. 南朝鮮은 헐벗고 굶주리는 社會라고 敎育을 받았는데, 그건 北韓軍에 該當되는 말 같았다. 當時 苦難의 行軍이 始作된 北韓軍에선 무리로 營養失調 患者들이 發生했다. 1992年 8月 入隊한 漢 氏의 動機들은 入隊 後 1年 동안 新兵 訓鍊을 한다는 핑계로 兵營 工事만 시켰다. 江原道 그 嚴冬雪寒 强추위에도 12月에야 겨울 冬服을 支給받기도 했다.

軍人들이 營養失調로 픽픽 쓰러져갔지만 아버지 職業에 따라 處理도 달랐다. 그의 入隊 同氣 中엔 平壤의 勞動黨出版社 文獻國葬 아들도 있었다. 平壤外國語學院을 나와 入黨하기 위해 어려운 곳으로 自願入隊했지만 한 달도 버티지 못했다. 그가 營養失調에 걸리자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動機는 다시 볼 수 없었다. 反面 가난한 집 子息들은 죽어도 너무 외진 곳에 部隊가 있어 집에서 屍身을 찾으러 오지도 못했다.

이걸 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니, 幹部 집 子息일수록 黨과 守令에게 더 충성해야 하는데 自己들은 먼저 도망치고 쉬운 곳에 가다니. 그리고 이런 特惠를 너무도 當然하게 받아들이는 軍과 社會가 問題가 아닌가.”

韓 氏는 南쪽을 바라보며 “저기는 어떤 곳일까, 저기에 한番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警戒 勤務를 서러 나가서는 “내가 間諜이라면 어디로 浸透할까. 내 눈에 안 보이는 그런 곳이 도망가기도 좋은 곳이 아니겠나” 싶어 周邊 地形을 繼續 有心히 觀察해보는 習慣도 생겼다.

귀순 직후인 1996년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은 한용수 씨.
歸順 直後인 1996年 太極旗 앞에서 寫眞을 찍은 한용수 氏.


脫北을 實行하다
1995年 6月 12日.

드디어 機會가 왔다.

北韓軍 最前方 境界는 3人1兆 또는 2人1組로 移動한다. 이런 까닭에 逃亡을 치면 卽時 發覺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달엔 갑자기 진지 防禦工事와 內務班 工事가 겹쳤다.

兵士들은 夜間潛伏에서 撤收하면 낮엔 工事를 해야 했다. 日課表대로라면 낮엔 낮잠을 자야 하지만 日課가 제대로 지켜지는 境遇는 드물었다.

古參이 불렀다.

“한용수, 오늘은 山에 올라가 나물을 뜯어와.”

副食物이 없어 兵士들이 交代로 올라가 山에서 나물을 뜯어 活用했는데, 이것도 平素라면 組를 짜서 移動해야 했지만 作業 人員이 不足해 그럴 餘裕가 없었다.

그는 點心龍 쌀이 든 背囊을 메고 午前 9時쯤 혼자 山에 올랐다. 最前方은 나물을 뜯을 때도 銃과 手榴彈 等 完全武裝으로 움직여야 했다.

山에 오르며 생각해보니 入隊 後 3年 동안 혼자 兵營을 나온 것이 처음이었다. 나물 캐러 갔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가 찾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機會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前方 鐵柵 쪽으로 向했다.

鐵柵 近處에서 그는 南쪽을 바라보며 苦悶했다. 脫北을 하려면 境界가 解弛해지는 낮이 훨씬 安全했다. 夜間엔 警戒 勤務를 서는 兵士들의 神經이 훨씬 날카로워진다. 그의 入隊 動機는 同僚들의 銃에 맞아죽기도 했다. 警戒勤務를 서던 中 用便을 보려고 暫時 자리를 離脫했다가 돌아오던 中이었는데, 밤에 間諜으로 誤認 받았던 것이다. 배고파 쌀을 꺼내 軍用 밥桶에 밥을 해먹으며 繼續 생각을 해봤지만 쉽게 決斷이 서지 않았다.

갑자기 골짜기에 對南放送 擴聲器가 울리기 始作했다. 午後 3時였다. 時計가 없어 時間을 알 수가 없는 前方에선 對南放送이 곧 時計 役割도 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는 遲滯할 餘裕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平素 봐두었던 골짜기로 내려갔다. 장마 때 鐵條網이 휩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溪谷 개울 위 鐵柵은 일정한 높이를 두고 들려있었다. 鐵條網을 通過하면 地雷밭이 나타난다. 그는 江가의 돌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或是 몰라 갈대도 꺾어들었다. 언젠가 古參이 갈대를 먼저 휘두르면 말뚝地雷를 連結한 線에서 기타줄 소리가 난다고 알려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튕’하는 소리가 울리면 操心히 줄을 찾아 넘어갔다.

한참을 溪谷을 따라 내려가자 最前方 民警 哨所와 警戒 勤務를 서는 兵士가 보였다. 民警 哨所는 200m 程度 빙 에돌아 通過했다. 마침내 北漢江 앞에서 마지막 鐵條網을 만났다. 장마에 쓰러져 있는 채로 補修도 하지 않은 狀態였다. 그 앞에서 그는 다시 30分 程度 앉아있었다. 이제 江을 헤엄쳐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家族 생각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2007년 한용수 씨가 제주도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찍은 사진.
2007年 한용수 氏가 濟州島에서 休暇를 즐기던 中 찍은 寫眞.


點心은 北에서, 저녁은 서울에서
韓 氏는 咸鏡北道 延社郡 신양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周邊을 둘러봐도 山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大多數 사람들은 林業에 從事했다.

그렇지만 그의 父母는 北韓에서 좋은 大學을 나온 엘리트였다. 父親은 평양의대를 卒業했고, 母親은 萬景臺혁명학원을 거쳐 元山農業大學을 나왔다. 이들 夫婦는 어렵고 힘든 곳에 靑年들이 支援해야 한다는 勞動黨의 方針에 呼應해 平壤에서 멀리 떨어진 山골로 自願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山골마을 齒科醫師였고, 어머니는 中學校 生物 先生이었다.

漢 氏가 5살 때인 1980年에 當局에서 리비아에 派遣할 意思를 募集했다. 父親은 여기에 支援해 1987年까지 리비아에 醫師로 나가 있었다. 그동안 母親 홀로 누나와 兄, 그와 男동생 4男妹를 키웠다.

漢 氏가 12살 나던 1987年 아버지가 歸國했다. 歸國하면서 咸興口腔豫防院 醫師라는 職業을 얻은 뒤 家族을 불렀다. 韓 氏 家族은 大都市 咸興에서 살게 됐다.

아버지가 벌어온 外貨 德分에 食口는 나름 豐足하게 살았다. 달러를 들고 外貨商店에 가서 外國製 物件을 사오기도 했다.

韓 氏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리비아 이야기를 들으며 바깥世上엔 잘 사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 亦是 6.25戰爭 때 萬景臺혁명학원을 다니다 中國으로 避難을 가 1957年까지 살았는데, 中國에서 살 때가 가장 幸福했다고 追憶했다. 漢 氏의 學校엔 父母가 다 外國 經驗을 해본 學生은 없었다. 父母의 影響으로 韓 氏는 자라면서 外國에 對한 憧憬을 품게 됐다.

1992年 中學校를 卒業하고 軍에 가게 됐을 때 집에선 軍事動員部(兵務廳)에 별다른 로비를 하지 않았다. 一般的으로 돈이 좀 있는 집은 賂物을 써서 子息을 軍 服務하기 便한 곳에 보내려하지만 한 氏 父母들은 그런 努力을 하지 않았다. 韓 氏는 돌을 열 個 던지면 일곱 個가 軍人 머리에 떨어진다는 江原道 1軍團에 가게 됐다. 그리고 入隊 3年 만에 自由의 世上을 向해 部隊를 脫出한 것이다.

江 앞에서 家族 때문에 30分을 머뭇거렸지만 다시 돌아가자니 그것도 不可能해보였다. 地雷밭을 다시 通過해 部隊까지 가기도 너무 어려웠고, 또 發覺이라도 되면 人生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까짓 거. 그냥 가지 뭐”

韓 氏는 메고 왔던 銃과 手榴彈을 江가에 벗었다. 여기까지 올 동안엔 或是 있을 모를 交戰을 覺悟하며 武器를 携帶했지만 江을 넘어 南쪽에 到着하면 武器를 갖고 있다는 理由로 銃알이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非武裝 狀態라면 훨씬 安全할 것 같았다. 江을 헤엄치기엔 銃이 무거운 理由도 있었다. 韓國軍 哨所에 到着하면 흰 綿內衣를 벗어 흔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北漢江에 뛰어들었다. 江을 無事히 건너 韓國軍 最前方 監視哨所(GP)를 向해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 南쪽은 地雷밭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精神없이 올라만 갔다. 韓國軍 哨所에 到着했는데 사람이 없었다.

門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는데도 사람이 나올 幾微가 없었다. 그는 돌을 들어 門을 두드렸다. 軍人 한 名이 門을 열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軍人은 안에다 뭐라고 소리쳤고, 그제야 兵士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는 兵士들과 함께 內務班에 들어갔다. 捕縛하지도 않았다. 젖은 옷을 벗게 하고 運動服을 주며 입으라 했다.

그때가 저녁 6時頃이었다. 좀 있더니 헬기가 날아왔다. 그가 北韓軍 哨所에서 늘 보며 부러워하던 헬기였다. 막상 헬기를 타니 좋을 줄 알았는데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헬기가 向한 곳은 京畿道 城南의 飛行場이었다. 서울 上空에 이르렀을 때 政訓將校가 물어봤다.

“서울 上空이 멋있죠?”

“평양도 이래요.”

그는 퉁명스럽게 對答했다.

나중에 車로 63빌딩 앞을 지날 때 調査機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第一 높은 빌딩이라고 說明하자 그는 “平壤에도 105層이 있어요”라고 對答했다.

對答해 놓고 보니 北韓이 싫어서 왔는데, 그 渦中에 北韓을 편드는 듯한 말을 하는 自身이 스스로 생각해도 理解되지 않았다.

성남에서 내린 뒤 서울 동작구에 있는 調査機關까지 到着하니 밤 9時가 됐다.

그제야 기다리던 밥이 나왔다. 點心은 北韓에서 먹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밥이 조그마한 空器에 쪼끔 나왔다.

食板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幼稚園生徒 아니고, 요것만 주다니. 배고파 죽겠네.”

열차 기관실에 앉아 있는 한용수 씨.
列車 機關室에 앉아 있는 한용수 氏.


地下鐵公社에 就職하다
調査 過程은 無慮 7個月이나 걸렸다. 그때는 韓國에 오는 脫北民度 거의 없을 때라 北韓軍에서 勤務한 사람은 調査機關에 오래 붙들어두고 情報를 캐물었다. 가끔 國精院이나 國軍, 美軍部隊에 가서 물어보는 것들을 對答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 調査를 받은 뒤 1996年 1月 社會로 나오게 됐다. 只今은 脫北民이 하나圓이라는 定着 支援 敎育機關을 거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어느 地域에 가고 싶냐고 묻자 韓 氏는 “서울만 빼고 아무데나 보내주세요”라고 對答했다. 그가 7個月 經驗한 서울은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配定된 것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賃貸아파트였다. 調査機關을 나올 때 住所地가 서울 방배동으로 돼 있어서 身邊 保護는 傍輩警察署가 擔當했다.

처음 마주 앉았을 때 擔當刑事는 “이제 大韓民國 國民이 됐으니 就職해 돈을 벌고 살아야지. 어떤 일을 第一 잘 하냐”고 물었다.

마침 둘이 만났던 建物 밖에 高架道路가 建設되고 있었다. 工事場을 바라보다가 韓 氏는 “삽질, 곡괭이질 잘 합니다”고 對答했다. 實際로 北韓軍에 入隊해서 脫北하기 前까지 가장 많이 했던 일이기도 했다.

擔當刑事는 그를 데리고 高架道路 現場所長에게 찾아갔다. 現場所長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쉬는 時間마다 刑事가 찾아가 事情하니 와서 일을 하라고 했다.

一旦 ‘노가다’ 자리는 얻었지만 이걸 平生 할 수는 없었다.

마침 傍輩 管轄地域에 서울地下鐵公社(現 서울交通公社) 本社가 있었다. 刑事는 이番엔 工事를 찾아가 工事 試驗 때 書類를 내라는 答辯을 받았다.

試驗을 치고 5個月 기다린 끝에 마침내 한 氏는 서울地下鐵公社 2號線 驛務員으로 入社하게 됐다. 첫 業務는 賣票所에서 일하며 票를 팔거나 機器를 修理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入社할 때 工事 幹部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工事 職員이 1萬2000名인데, 當身이 그中에서 第一 어려요.”

實際로 그랬다. 韓 氏는 大學에 가고 싶었지만 登錄金이 비싸 抛棄했다. 周邊 사람들이 敎會에 熱心히 다니면 奬學金을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自尊心이 내키지 않았다.

“敎會는 하나님 믿으려 가는 곳이지 도움 받으려 敎會 다니면 부끄러운 일이죠. 내가 거지도 아니고.”

그는 그렇게 勞動을 選擇했다.

그는 北에서 社會 經驗이 없었다는 것이 어쩌면 多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배우는 것이 곧 그가 겪어야 할 社會 生活이기 때문이다.

350원짜리 눈물의 딸기牛乳
韓國 定着은 쉽지 않았다. 돈에 對한 槪念이 없었던 것이 第一 問題였다. 社會에 나올 때 定着金 2500萬 원이 든 通帳을 받았지만, 돈을 虛套로 쓸 것 같아 信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통째로 맡겼다. 그러고 나니 手中에 돈이 하나도 없어 일해서 벌어야 했다.

한 番은 社會에서 알게 된 親舊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手術費가 없다고 했다. 그때 그의 月給이 100萬 원이었는데, 手術費는 250萬 원이나 됐다. 그는 선뜻 私債를 빌려 手術費를 마련해줬다.

그런데 이게 問題가 됐다. 利子가 무섭게 늘어나더니 繼續 私債業者가 찾아와 督促했다. 堪當하기 어려운 狀況으로 몰리자 그는 直接 私債業者 事務室로 찾아갔다.

“난 歸順 兵士인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갚을 程度의 利子를 받아야지 이렇게 하면 나를 때려 죽여도 돈을 갚지 못 합니다.”

社長이 그를 어이없이 쳐다보다 생각하더니 “너 이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 썼냐. 앞으로 私債는 絶對 쓰지 마라. 그리고 빌려간 돈은 每달 나눠서 元金만 갚으라”고 했다. 事務室을 나오며 그는 “私債業者는 組暴인줄 알았더니 이런 사람도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 돈은 10個月에 걸쳐 다 갚았다.

北韓에서 온 兄도 알게 됐다. 依支할 데 없었던 그들은 兄弟처럼 가까워졌다. 兄이 어느 날 事業을 한다고 해 2000萬 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그 兄의 事業은 亡했고, 그는 監獄에 갔다. 出所해 나온 그의 몰골을 보고 마음이 아파 또 500萬 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 亦是 漢江에 돌 던지기였다. 以後에도 繼續 事業을 한다며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곤 또 監獄을 가는 일이 反復되던 兄은 結局 끝내 外國으로 逃走했다. 나중에 그에게 빌려준 돈을 計算해봤더니 1億2000萬 원이나 됐다.

돈을 빌려줄 程度로 餘裕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職場에 다니기 始作한지 1年 뒤 外換 危機가 찾아왔다. 1998年 어느 날 月給이 나올 때까지는 1週日이 남았는데 주머니에 2000원 밖에 없었다. 2000원을 들고 그는 1週日을 어떻게 살지 생각했다.

退勤할 때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양동 집까지 가야 했다. 當時 버스料金이 350원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면 먹을 것을 살 돈이 없다. 苦悶 끝에 그는 슈퍼에서 350원에 파는 딸기牛乳를 샀다. 每日 딸기牛乳 1팩을 먹는 代身 堂山에서 가양 집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周邊에서 돈을 좀 빌려 그 危機를 克服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性格이었다. 只今까지도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본 일이 없다.

한용수 씨의 표정에선 당당한 사회 일원으로 자리 잡은 자부심이 배어나온다.
한용수 氏의 表情에선 堂堂한 社會 一員으로 자리 잡은 自負心이 배어나온다.


26年 동안 2號線에서만 勤務하다

韓 氏는 1996年 서울地下鐵公社에 入社해 只今까지 26年째 한 職場에서 勤務하고 있다. 驛務員 時節에도 구로공단역을 始作으로 方背驛, 蠶室驛 等을 옮겨 다니며 勤務했지만 2號線을 벗어난 적이 없다.

2000年 公社에 循環補職制가 導入됐다. 外換危機 때 構造調整을 한 까닭에 人力이 모자라자 驛務員人 運輸事務職도 運轉職에 支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鐵道의 꽃은 機關士라고 생각해 運轉職에 支援했다.

2003年 마침내 次長으로 拔擢됐다. 車掌은 맨 뒤 機關室에 타고 있다가 乘客들이 다 오르면 機關士에게 出發 信號를 보내는 일을 한다. 次長을 하면서 熱心히 工夫를 해 機關士 資格을 땄고, 2017年 마침내 2號線 機關士 補職을 附與받았다.

2號線은 路線을 한바퀴 도는데 1時間 半이 걸린다. 그는 每日 出勤해 3바퀴를 運轉한다. 2號線 機關車만 20年 가까이 타다보니 이젠 터널 위에 박힌 甓돌 位置까지 記憶할 程度다. 機關士에겐 運轉하다가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면 그건 뭔가 잘못됐다는 意味다. 恒常 같은 風景을 보며 어두운 터널을 도는 일이 지겨울 法도 하지만 2號線에 對한 그의 自負心은 대단하다.

“2號線의 하루 輸送 人口는 200萬 名이 넘어요. 單一 路線으로 이렇게 많은 乘客을 輸送하는 地下鐵은 도쿄 地下鐵에 이어 世界 2位일 겁니다. 2號線에서 機關士를 하면 全 世界 어딜 가서도 機關士를 할 수 있어요. 서울交通公社가 適者라고 하지만 2號線만 떼어내 보면 黑字 企業입니다. 우리가 工事를 먹여 살린다는 自負心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딴 路線에 옮겨간 사람들이 여기가 便하다고 오라고 해도 이런 自負心 때문에 그는 2號線을 繼續 지키고 있다.
機關車를 몰고 北으로
韓國에 처음 왔을 때 그는 軍人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調査 過程에 그 이야기를 하자 調査要員이 “너 또 逃亡가면 어떻게 하냐”며 웃었다. 脫北한 北韓 兵士가 韓國軍에 服務할 規定도 없었다. 그래서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딸에게 옮겨갔다. 韓 氏는 2000年 같은 脫北民 出身의 女性을 만나 家庭을 이뤘다. 2002年 唯一한 子息인 딸이 태어났다. 只今 그 딸은 大學 2學年으로 成長했다. 軍事學科를 다니며 副士官 任用考試를 準備하고 있다. 韓 氏는 아버지의 꿈을 딸이라도 이룰 수 있어 多幸이라고 했다.

처음 定着했을 때 學緣, 地緣, 血緣 等으로 連結된 韓國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깨물었다.

“이런 사람들과 競爭하려면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것으론 안 되겠구나. 더 熱心히 살아야겠군.”

會社에 다니며 生活이 安定됐지만 恒常 마음엔 大學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願하던 補職도 얻었고, 家庭도 꾸렸고, 집도 샀지만 韓國에서 배우고 싶은 熱望은 漸漸 더 커졌다. 마침내 그는 2010年 명지專門對 鐵道電氣學部 電氣科에 入學했다. 서울交通公社와 명지전문대가 서로 敎育協約 關係이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다. 그는 2年 班을 다녀 卒業한 뒤 내친김에 專攻深化 過程을 2年 더 다녀 學士 資格을 얻었다.

學士 資格을 딴 뒤 한양대 鐵道시스템 大學院에 入學해 2017年 碩士學位도 받았다. 그의 배움에 對한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0年엔 東洋大 經營學 博士課程에 入學해 只今 3學期 째 다니고 있다.

굳이 機關士를 하면서 博士까지 獲得하려는 理由가 뭘까.

“生活이 安定되니 내가 여기에 밥만 먹고 살려 왔냐는 생각이 들었죠. 목숨 걸고 온 길인데 意味 없이 살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고, 제가 機關士다보니 그 意味를 鐵道에서 찾게 됐습니다. 只今도 南北 間에 會談을 하면 鐵道 連結 問題가 繼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鐵길을 連結한다고 列車가 바로 運行되는 것이 아닙니다. 運營 시스템까지 統合해야 하는데, 萬若 統一 以前에 南北 鐵道가 連結된다고 하면 그 일에 參與하고 싶습니다. 南北 政治 狀況이 나빠져 서로 往來가 斷絶돼도 鐵道는 멈추지 않고 持續的으로 運營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事實 그의 眞짜 꿈은 機關車를 끌고 北에 올라가는 것이다. 脫北民이 韓國의 機關士로 汽車를 몰고 北韓 땅을 다시 밟아보는 것이 希望인 것이다.

“제가 機關車를 몰고 北에 가는 것이 全혀 實現 不可能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어쨌든 그러려면 南北 鐵道가 于先 連結돼야겠죠. 그런 作業부터 參與하고 싶어 博士까지 工夫하며 차근차근 準備하고 있습니다.”

2號線은 每日 數百 萬 名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많은 꿈을 싣고 列車는 빙빙 돌고 또 돈다. 漢 氏의 꿈도 오늘 어느 列車에 함께 타고 있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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