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豆滿江을 건넌 10살 少年, 辯護士가 되다[주성하 記者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豆滿江을 건넌 10살 少年, 辯護士가 되다[주성하 記者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7月 31日 09時 00分


코멘트
자신이 살았던 북한 시절을 담담하게 추억하는 임철
自身이 살았던 北韓 時節을 淡淡하게 追憶하는 임철


임철(33)은 떨리는 心臟을 부둥켜안고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11살 때인 1998年 겨울 豆滿江을 넘어 脫北한 以後 이렇게 떨렸던 적이 언제 있었나 싶었다.

숨을 깊게 내쉬고 法務部 第11回 辯護士試驗 合格者 名單을 確認하기 위해 사이트에 接續했다. 그런데 서버가 다운돼 接續이 되지 않았다. 五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임철에겐 이番이 다섯 番째, 卽 마지막 試驗 機會였다. 로스쿨 辯護士 凝視 試驗은 5年 內 5回로 制限된다. 앞서 두 次例 試驗에서 아쉬운 點數 差로 탈락했는데, 이番까지 떨어지면 그는 法曹人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때 카톡 알람이 떴다.

“철아, 合格 祝賀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놀리는 文字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時差를 두고 4~5名의 祝賀 文字가 連續으로 날아왔다.

그제야 임철은 自身이 合格했다는 事實을 徐徐히 實感할 수 있었다. 痲痹됐던 서버는 40分이 지나서야 열렸다. 合格者 이름은 가나다順으로 配列돼 있었다.

‘ㅇ’에서 다시 커서를 내려 임철이란 이름을 찾은 瞬間 쿵쿵대던 心臟이 멎는 듯 했다.

임철은 韓國에 入國한 脫北民 3萬5000餘名 가운데서 두 番째로 辯護士 資格을 받았다.

試驗 合格 消息이 傳해 진 뒤 記者는 임철과 마주 앉았다.

그는 “統一에 이바지하는 辯護士가 되고 싶다”고 했다. 統一이 되면 第一 먼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거듭 물었다.

“어머니 무덤 찾아야 해요. 墓地를 찾지 못할까봐. 繼續 그 생각만 떠올라요….”

울먹울먹하던 임철은 머리를 숙였다.

# 苦難의 行軍


1990年代 수많은 餓死者를 招來한 ‘苦難의 行軍’ 時期 가장 큰 被害를 입은 사람들은 炭鑛과 鑛山, 軍需工場 從事者들이었다. 都市 사람들은 장사라도 할 수 있었고, 農村 사람들은 農事라도 지을 수 있었지만, 肩章을 달고 嚴格한 統制를 받던 鑛夫들과 軍部 所屬 軍需工場 勞動者들은 함부로 職場을 離脫할 수 없었다.

咸鏡北道 恩德郡(아오지가 位置한 곳)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咸鏡南道 南쪽 金野郡의 한 炭鑛으로 移徙해 成長한 임철은 철도 들기 前에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임철의 父親은 石炭大學을 卒業한 엘리트였고, 어머니도 咸鏡北道 藝術團에서 社會를 보던 藝術人 出身이었다. 炭鑛에서 配給이 나올 땐 임철도 나름 學校도 熱心히 다녔고 成跡도 優秀했다. 세 살 아래 女同生 修鍊(假名)이도 노래와 춤을 좋아해 온 食口의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1990年代 中盤부터 家勢는 急激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炭鑛에서 配給이 나오지 않자 임철의 父母는 신발 修理所를 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루 終日 신발을 修理하고, 自轉車를 타고 다니며 遠征 修理까지 했지만, 그래 봤자 옥수수밥이나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他地에서 살던 外할아버지와 外할머니까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딸의 집을 찾아와 얹혀서 살기 始作했다. 밥床엔 옥수수밥 代身 풀粥이 오르기 始作했고, 이것도 없어 굶을 때가 많아졌다.

임철이 10살 때인 1997年 5月 아버지가 食糧을 求해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背囊에 마른 풀떡 몇 個를 넣어주며 배웅했다.

아버지가 없자 家勢는 더욱 기울었다. 엄마 혼자 아무리 熱心히 일해 봐야 버는 것도 限界가 있었다. 엄마는 신발 修理를 끝낸 뒤 10里 程度 떨어진 炭鑛에 올라가 石炭을 주어 背囊에 메고 어둑어둑한 저녁에 돌아왔다.

그렇게 모질게 살아갔지만 굶주려 누워 있던 外할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도 먹지 못해 굶어죽는 渦中에 힘없고 營養失調까지 온 老人이 더 버티지 못한 것이다.

外할아버지까지 돌아가자 집안에 男子는 10살 밖에 안 되는 임철 하나만 남게 됐다.

먹을 것이 생기면 父母와 子息에게 讓步하고, 늘 힘이 없는 모습으로 신발을 修理하고 石炭을 가져오는 엄마를 보다 못해 임철이 나섰다.

“엄마, 제가 石炭을 가져오겠어요.”

엄마는 처음엔 挽留했지만, 임철의 固執에 그럼 한番 갔다 오라고 承認했다. 10里길을 걸어서 炭鑛마을에 到着하자 숱한 사람들이 炭鑛에서 버린 버력더미에 달라붙어 石炭을 찾아 背囊에 담고 있었다. 임철도 그들 틈에 끼워 熱心히 까만 돌을 찾아 背囊에 담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첫 걸음은 失敗였다. 엄마가 말했다. “이건 石炭이 아니란다.”

임철은 다음날 호미를 가지고 다시 炭鑛으로 올라갔다. 이番엔 眞짜 石炭을 찾아 갖고 올 수 있었다. 저녁에 엄마는 빨갛게 벗겨진 아들의 어깨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10대의 임철.
韓國에 到着한 지 얼마 안 된 10代의 임철.


# 엄마의 죽음


家族을 扶養할 짐을 걸머진 엄마는 하루 몇 時間도 자지 못하고 繼續 일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기 始作했다. 病院을 찾아가니 ‘肋膜炎’이라는 診斷을 내렸다. 그러나 풀粥度 먹기 힘든 집에 藥을 살 돈이 있을 理가 없었다. 그렇다고 休息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쓰러지면 온 집안이 굶어죽을 판이었다.

外할아버지가 돌아간 지 얼마 뒤 外할머니도 낮에 누워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잘 먹지 못해 結核으로 死亡한 것이다.

外할머니가 돌아갔지만, 임철의 집엔 棺을 만들 나무도 없었다. 結局 집 앞의 倉庫를 허물어 썩은 板子로 가까스로 棺을 만들어 할아버지 山所 옆에 묻었다.

外할머니가 돌아간 뒤 엄마의 病勢는 急激히 惡化됐다. 食糧을 求하려 간다고 떠난 아버지에게선 아무런 消息도 없었다. 10살, 7살 밖에 안 된 아들딸을 두고 누워있을 수는 없었던 엄마는 아무리 아파도 繼續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임철도 石炭을 繼續 메고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임철을 부르더니 病院에 가서 醫師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尋常치 않은 雰圍氣를 느낀 임철은 쏜살같이 病院에 달려가 엄마가 많이 아프니 빨리 집에 좀 와달라고 말하고 다시 혼자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왜 그래”라고 소리쳐봐야 엄마는 손을 힘없이 내저을 뿐이었다. 갑자기 엄마의 손이 축 처졌다. 가쁜 숨소리도 멎었다. 임철과 修鍊이 엉엉 울며 매달렸지만 엄마는 눈을 뜬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린 오누이의 울음소리에 洞네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棺을 救하기 위해 온 마을을 헤맸지만,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狀況이라 棺을 求할 수가 없었다. 겨우 썩은 板子들을 다시 求해와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을 덮어 安葬할 수 있었다. 먹을 것이 없는 洞네에서 변변한 祭祀도 치르지 못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엄마의 棺을 싣고 外할아버지와 外할머니 옆에 묻었다. 엄마의 나이는 겨우 30代 中盤.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不過 1年 사이에 임철 오누이에게 닥쳐온 運命이었다. 이제 10살과 7살 난 오누이만이 瘠薄한 炭鑛 마을에 남겨졌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임철
서울에서 高等學校를 다니던 時節의 임철


# 脫北


엄마가 돌아가자 먹고 사는 일이 오누이의 어깨로 넘어왔다. 임철은 어린 女同生과 山에 풀을 뜯으려 다녔다. 때로는 둘이 炭鑛에 올라가 石炭을 캐서 메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배고픔을 면하긴 어려웠다. 배고플 때는 동생과 함께 場마당에 나갔다. 옆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안의 家具들을 하나씩 팔면서 場마당에서 조금의 飮食을 求할 수 있었다.

炭鑛 마을에선 하루가 멀다하게 사람이 죽어나갔다. 임철이 다닌 人民學校 4學年度 人員이 3個 學級에 90名이었지만, 나중에 1個 學級 20名으로 줄었다. 굶지 않고 學校에 다닐 수 있었던 人員이 그 程度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渦中에 炭鑛 幹部들이 찾아와 집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國家 집이기 때문에 너희는 孤兒院에 가고 이 집은 바쳐야 한다는 것.

옆집 아저씨가 보다 못해 할머니를 찾으라고 말해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北中 국경인 咸北 새별(慶源)에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어떻게 할아버지를 찾아가야 할지 몰랐다. 옆집 아저씨가 電報를 세 番이나 보냈다.

當時엔 電氣 事情도 劣惡해 새별에서 今夜까지 列車가 오려면 닷새 넘게 걸렸다. 列車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지붕에도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가던 時節이었다.

그런 어려움에도 電報가 到着했는지, 몇 달 뒤 할머니가 마침내 집에 到着했다.

임철은 故鄕을 떠나기 前 場마당에서 옥수수 국수 한 그릇을 사서 엄마 墓에 올라갔다.

“엄마 잘 있어. 꼭 다시 올게. 기다려. 수련이는 내가 잘 봐줄게.”

그렇게 그들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故鄕을 떠났다.

할머니 집이라고 豐足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아오지 옆 洞네인 慶源 亦是 炭鑛마을인데, 할아버지는 신발 修理를 해주고 僅僅이 먹고 살았다. 임철의 三寸과 姑母들도 같은 洞네에서 살고 있었다.

새별의 形便 亦是 今夜와 別 差異가 없었다. 이곳에는 아예 學校 다니는 애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場마당 周邊에서 놀다가 機會만 되면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났다. 임철 亦是 다시 꽃제비들과 어울리며 살기 始作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사라졌다가 열흘쯤 지나 다시 나타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임철의 姑母가 脫北해 中國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먼 親戚도 中國에 산다고 했다.

中國에 다녀온 할아버지는 눈에 띄지 않게 집 財産을 팔기 始作했다. 中國으로 脫北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임철 오누이, 中國에 간 姑母의 2살 된 딸 玄美(假名), 이렇게 5名이 脫北길에 올랐다. 새별 옆을 흐르는 豆滿江은 너무 깊어 어린 애들이 건너기엔 無理가 있었다. 그래서 汽車로 열 時間 넘게 移動해 江이 比較的 얕은 穩城郡 三峯으로 脫北하게 됐다. 마을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오면 疑心을 받을 까봐 汽車驛까진 따로따로 移動했다.

三峯에서 미리 江을 건네주기로 約束한 사람 집에 숨어 이틀을 있다가 마침내 豆滿江에 들어섰다. 아무리 깊지 않다고 해도 11살, 8살 어린 애가 건너기엔 無理가 있었다. 목까지 물이 차오를 때가 있었지만, 임철은 悲鳴을 지르지 않고 견뎌냈다. 현미는 할머니 등에 업혔지만, 수련이는 오빠 손을 잡고 건너야 했다. 모두들 狀況을 아는지 이를 악물고 江을 건넜다. 그때는 11月이었다.

江을 건너자 온 몸이 추위로 덜덜 떨렸지만,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앞장서 길을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마을에 到着하자 할아버지가 여기에 먼 親戚이 산다며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到着해서 第一 먼저 한 일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자라며 구경도 못해 본 쌀밥이 나왔고, 기름진 飯饌도 가득했다. 밥을 먹은 뒤 中國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구들에 누우니 地獄에서 天國으로 온 것 같았다.

고려대 법대를 다니던 시절의 임철
고려대 法大를 다니던 時節의 임철


# 아버지와의 相逢


아침이 되자 할머니가 말했다.

“철이야, 아버지가 여기로 온다는구나.”

“할머니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어요?”

하지만 얼마 안 돼 門이 열리더니 웬 사람이 들어왔다. 눈을 비비고 찬찬히 살펴보니 아버지가 맞았다. 정작 만나고 보니 人事만 했을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女同生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엄마가 돌아간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는 너무 슬퍼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食糧을 求하러 떠났다가 도무지 求할 方法이 없자 中國에서 돈을 벌어오려고 脫北한 것이었다. 하지만 中國에서 숨어 사느라 집과 連絡을 하지 못해, 自身이 떠난 뒤 어떤 悲劇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몇 時間 동안 懷抱를 나누었을까. 아버지가 일어나더니 떠나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國境 附近에 살지 않고 헤이룽장(黑龍江) 어느 農村에 자리를 잡고 지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汽車를 타고 하루 終日 移動했다. 마침내 어느 驛前에 내리니 웬 女子가 마중 나왔다. 다가가서 보니 姑母였다.

姑母는 어린 玄米를 보더니 “이게 내 딸이야”라고 물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엄마와 헤어진 현미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避하기만 했다.

汽車에서 내려 다시 車를 타고 한참을 달려 어느 집에 到着했다. 이곳에서 이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찾았지만 中國에서의 삶도 不安하긴 마찬가지였다. 여느 脫北者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살던 곳에서 身分이 들킨 것 같으면 재빨리 다른 집을 求해 移徙를 가야 했다. 몇 달에 한番씩 居處를 옮기며 사는 不安한 生活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韓國으로 갈 決心을 했다. 하지만 當時엔 韓國으로 오는 길이 僞造旅券을 만들어 就業으로 가는 方法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熱心히 돈을 모았고(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침내 僞造旅券과 就業비자를 마련했다. 임철 一行이 到着한 이듬해 아버지는 마침내 韓國으로 갔다. 몇 달間의 調査를 마치고 나온 뒤 아버지는 돈을 마련해 다시 姑母의 비자를 만들어 韓國으로 데리고 갔다. 姑母가 떠나기 前 할아버지가 中風에 걸려 돌아갔다.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前 “너희들은 꼭 韓國으로 가라”고 遺言을 남겼다.

이제 中國엔 할머니와 임철 오누이, 玄米만 남았다.

임철이 서울대 로스쿨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임철이 서울大 로스쿨 卒業式에서 꽃다발을 안고 寫眞을 찍었다.


# 韓國 到着


2000年 11月 末 마침내 아버지가 韓國으로 오는 루트를 찾아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임철 家族 4名은 헤이룽장에서 北中 국경인 투먼(圖們)까지 다시 汽車를 타고 갔다. 거기엔 이미 많은 脫北民이 韓國으로 가기 위해 待機하고 있었는데, 임철 一行까지 包含해 모두 15名이었다.

투먼에서 一行은 汽車를 타고 베이징(北京)으로 떠났다. 베이징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몽골 國境으로 갔다. 가는 途中에 다른 脫北民들이 合勢해 몽골 國境에 내렸을 땐 모두 20名이나 됐다. 當時엔 脫北民이 中國에서 韓國으로 오는 通路가 없을 때였다. 그러다가 이즈음부터 몽골을 통해 韓國으로 오는 通路가 最初로 開通됐다. 나중에 東南亞 쪽으로 脫北 루트가 開拓됐는데, 2008年까지도 몽골을 통해 오는 脫北民이 많았다. 임철 一行은 몽골을 통해 韓國에 온 最初의 脫北民들에 屬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임철 一行은 추운 12月의 어느 밤 鐵條網 5個를 넘어 몽골로 넘어갔다. 沙漠을 헤매다가 불빛을 發見했을 때 軍人들이 다가왔다. 이들은 監獄에 收監됐다. 며칠 동안 監獄生活을 한 끝에 버스 2臺가 와서 이들을 태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몽골 軍人들이 中國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나중엔 몽골 國境警備隊度 指針을 받아 國境을 넘어 온 脫北民은 首都로 보냈는데, 當時만 해도 제대로 된 脫北民 處理 方針이 없었던 듯 하다.

끌려 나가는 脫北民들은 痛哭을 했다. 그러나 方法이 없었다. 中國에 到着해 中國 軍人들에게 引繼됐을 때 失神하는 사람도 나왔다. 中國에서 逮捕되면 北宋을 免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奇跡이 일어났다. 한 中國軍 將校가 오더니 “當身들이 잡혀 가면 監獄에 가는 걸 뻔히 아는데, 왜 보내겠냐. 願하는 곳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當時만 해도 中國에는 脫北民을 同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將校의 約束은 事實이었다. 中國軍 護送車에 一行을 태우고 汽車驛으로 가더니 가겠다고 말하는 地域까지 車票까지 끊어주었던 것이다. 임철의 家族은 長春(長春)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아버지가 紹介한 사람을 만나 투먼으로 갔다. 한 달 만에 떠난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투먼度 安全하지 못해 그 옆 훈춘(琿春)으로 가서 숨어 2001年 설날을 맞았다.

설 다음날 집에 누군가가 왔다. 그는 앞서 몽골로 가다 逮捕돼 뿔뿔이 흩어졌던 一行이 다시 몽골로 들어가 이番엔 無事히 韓國에 到着했다고 알려주었다. 勇氣를 얻은 임철 一行은 다시 길을 나섰다. 지난番처럼 투먼에서 汽車를 타고 베이징에 到着해 몽골 國境까지 가는 코스였다. 베이징에 到着하자 지난番에 案內해 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이番 一行은 모두 11名. 다섯 個의 鐵條網을 헤치고 몽골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軍人들에게 逮捕됐다. 이番엔 묶지도 않고 눈을 싸매지도 않았다. 護送車가 달리기 始作했을 때 이番에도 中國으로 보낼지 몰라 몹시 조마조마했지만, 多幸이 이番엔 울란바토르로 向했다. 이곳에서 임철 一行은 韓國行 飛行機에 오를 수 있었다. 2001年 1月 13살 임철은 드디어 韓國에 到着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當時 韓國의 한 月刊誌에 紹介돼 많은 사람들의 心琴을 울렸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의 임철·수련 오누이와 사촌동생 현미(가운데)
韓國에 到着한 直後의 임철·修鍊 오누이와 四寸동생 玄美(가운데)


# “法을 工夫해야겠다.”


合心 調査는 석 달이나 걸렸다. 以後 다시 3個月의 하나圓 生活을 거쳐 임철은 2001年 7月 社會에 나왔다. 마침내 서울 양천에 아버지와 함께 食口가 모여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철은 中學校 1學年에 올라갈 나이이지만, 工夫를 못했기 때문에 初等學校 6學年에 入學했다. 거기서 半 年 程度 工夫한 뒤 中學校 過程은 檢定考試를 쳐서 通過했다. 2003年 高等學校에 入學했고, 2006年 在外國民 特別銓衡으로 고려대 法大에 入學할 수 있었다.

왜 法大를 選擇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對答했다.

“北韓의 社會制度 때문에 엄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制度를 바꾸어야 사람이 살 수 있는데, 制度를 어떻게 바꿀까 생각해보니 法臺가 떠올랐어요. 法治主義를 세워야 獨裁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大學 過程은 쉽지 않았다. 途中에 彷徨하던 期間도 있었고, 休學도 했고, 알바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또 司法考試를 보기 위해 1年 程度 大學을 다니지 않아 2013年 8月에야 大學을 卒業할 수 있었다. 3年 더 大學을 다닌 것이다.

2008年 로스쿨이 導入됐지만, 거기에 갈 돈이 없었다. 法曹人이 되려면 四時를 通過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2012年쯤 되니 로스쿨에도 各種 奬學制度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目標를 司試에서 로스쿨로 變更했고, 大學을 卒業한 이듬해인 2014年 서울大 로스쿨에 入學할 수 있었다. 로스쿨에 入學하여 辯護士가 되기까지의 旅程도 決코 쉽지 않았지만, 多幸히도 로스쿨의 奬學金 制度가 잘 되어 있었고 敎授님들의 關心과 指導가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卒業 後 辯護士 試驗에 쉽게 通過하지 못하면서 임철의 自信感은 漸漸 떨어져만 갔다. 雪上加霜으로 辯護士 試驗이 漸漸 어려워지면서 해가 갈수록 試驗에 붙는 確率도 낮아졌다.

連거푸 試驗에서 떨어져 意氣銷沈해질 때마다 옆에서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大 法大 卒業生 멘토들은 落榜할 때마다 보양食을 사주면서 다음에는 꼭 合格할 거라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試驗을 準備하는 過程에서 南北하나財團을 비롯한 여러 財團들의 敎材費 等 受驗料 支援도 實質的인 도움이 되었다.

2022年 11回 로스쿨은 임철에게 마지막 機會였다. 로스쿨 卒業生 3400名이 試驗을 쳐서 折半 程度인 1700名이 辯護士 資格을 받았다. 그中엔 임철도 包含됐다. 그는 韓國 社會의 뜻있는 분들의 따뜻한 關心과 支援이 있었기에 辯護士가 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철은 辯護士 試驗 通過 後 서울 瑞草의 한 法務法人에서 收拾 期間을 밟고 있다가 最近 서울대 公益法律센터에서 勤務를 始作했다. 社會 少數者들의 法的 問題를 함께 苦悶하고 解決하기 위해서다. 特히 앞으로 다가올 統一을 對備하기 위한 統一法의 硏究와 脫北民들의 法的 問題들을 解決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저희는 無事히 韓國에 왔지만, 只今도 中國에는 많은 脫北民이 코로나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숨어살고 있습니다. 法的으로 難民 地位를 받으면 저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法曹人이 됐으니 앞으로 脫北民들의 處遇 改善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努力을 기울일 것이고, 또 김정은 體制가 崩壞된 뒤에 北韓 法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도 硏究할 생각입니다.”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하는 임철
辯護士 試驗 工夫를 하는 임철


# 마음에 묻은 엄마


임철과 함께 入國한 修鍊이도 연세대를 나와 한 出版社에서 일하고 있다. 동생을 생각하면 恒常 7살 때 손을 잡고 豆滿江을 넘던 일이 떠오른다.

옛날 北韓에서 함께 工夫하던 炭鑛마을 同窓들, 배고파서 學校도 다닐 수 없었던 그들은 그 嚴酷한 苦難의 行軍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北韓에서 成功할 수가 없는 出身이다. 脫北한 아버지 德分에 서울에 와서 辯護士까지 된 임철은 斷然 그들 中 가장 成功한 境遇에 該當된다고 할 수 있다. 北韓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묻을 關조차 없어 서럽게 울던 炭鑛마을 어린 少年이 서울에서 辯護士가 됐다는 消息을 傳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充分히 意味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임철은 韓國에 와서 幸福했던 瞬間으로 고려대에 入學했을 때, 로스쿨에 붙었을 때, 辯護士 試驗에 붙었을 때를 꼽았다. 그러나 只今 그는 겨우 33살 靑年일 뿐이다. 앞으로 人生에서 幸福한 瞬間은 繼續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날, 가장 기쁜 瞬間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음에 묻은 엄마 생각이다. 그토록 고왔다는 엄마는 地獄의 땅에서 태어난 罪로 只今의 임철의 나이에 꽃다운 삶을 마감해야 했다. 10살, 7살 오누이를 두고 世上을 떠날 때 엄마의 心情은 果然 어땠을까. 이제 임철은 그 心情을 느낄 수 있을 만큼 成長했다.

“엄마 墓地에 마지막으로 人事를 하고 떠날 때가 벌써 23年 前입니다.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只今쯤 痕跡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故鄕에 돌아가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恒常 엄마 墓에 가 있어요.”

몸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임철의 마음은 如前히 11살 때 벗어난 地獄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 머물고 있다. 그 땅에서 태어난 罪로 그가 平生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는 아닐까.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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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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