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鑄成하|記者 購讀|東亞日報
주성하

鑄成하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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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 關聯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平壤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運營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取材分野

2024-03-31~2024-04-30
칼럼 44%
南北韓 關係 33%
産業 10%
經濟一般 7%
社會一般 3%
기타 3%
  • AI 앞세워 ‘未來 먹거리’ 水産業 스마트化 推進 拍車

    海洋水産部(長官 강도형)는 올해에도 水産業을 未來 成長産業으로 育成하기 위해 다양한 支援 政策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고 16日 밝혔다. 스마트化와 漁業 分野 革新을 통해 水産業을 未來 먹거리 産業으로 育成하고, 水産食品 輸出 擴大 및 漁村 活性化를 推進하는 것이다. 水産業 스마트化를 위해서 人工知能(AI), 事物인터넷(IoT), 情報通信技術(ICT) 같은 尖端 科學技術을 漁船(魚船)漁業, 養殖業 및 水産食品 等 全 分野에 椄木해 推進한다. 漁船漁業 分野에서는 AI를 活用해 效率的이고 安全한 漁船을 設計할 수 있는 플랫폼을 開發하고 있다. 이를 通해 漁業人 및 造船所 負擔은 낮추면서 同時에 漁船 全般의 變化를 꾀할 計劃이다. 養殖業은 2019年부터 스마트 樣式 클러스터 造成 事業을 重點的으로 推進하고 있다. 尖端 海水循環濾過시스템(RAS)을 基盤으로 하는 스마트 樣式은 最適의 樣式 環境을 構築해 生物을 安定的으로 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生産單價를 節減해 價格 競爭力을 높이고 環境 保護에도 도움이 된다. 現在 釜山 講院 全南 같은 全國 主要 據點에 스마트 樣式 클러스터를 造成하고 있다. 釜山은 올 3月 竣工됐고 江原 클러스터度 올해 末 竣工을 앞두고 있다. 漁業 分野 規制도 果敢히 革新하고 있다. 5t 未滿 漁船에 適用되는 漁船 機關 非開放 精密 檢査 對象을 지난해 末 10t 未滿 沿岸漁船 全體로 擴大했다. 規制 1500餘 件을 2027年 以後 折半 가까이 廢止하고 모든 漁船에 漁獲量(TAC)을 全面 適用할 計劃이다. 이와 함께 水産資源 管理를 强化하기 위해 國際 漁業管理 方式에 符合하는 官吏·監督(모니터링) 體系를 構築하고 ‘韓國型 漁獲證明制度’를 導入해 國內外 不法 水産物 流入을 事前에 遮斷할 수 있도록 할 方針이다. 水産食品産業 育成 및 輸出 支援도 積極的으로 擴大할 計劃이다. 水産食品 加工과 輸出, 硏究開發(R&D) 等이 集約된 水産食品輸出團地를 全南 木浦와 釜山 西毬에 만들고 있다. 新鮮度가 生命인 水産食品 輸出을 늘리기 위해 海外 流通網 確保에 對한 支援도 强化하고 있다. 이를 위해 水産食品 物流 인프라 構築을 위한 國內外 共同物流센터 確保 및 海外 콜드체인 構築 等을 推進하고 있다.주성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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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 사이]無法國家와 法治國家

    無法國家의 標本으로 삼기엔 北韓만 한 곳도 없다. 過去 脫北했다가 北送됐던 個人的 經驗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當時 난 敎化所에 끌려갈지, 管理所(政治犯收容所)에 끌려갈지 感을 잡을 수가 없었다. 調査官들은 “너는 김일성대 卒業生이라 훨씬 크게 處罰받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韓國에서 “넌 서울대 卒業生이라 더 큰 處罰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면 “무슨 精神 나간 소리냐”고 할 게 뻔하다. 社會主義 國家라는 中國에서도 베이징대를 나왔기 때문에 같은 罪가 더 重하게 處罰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北韓에선 經歷에 따라 處罰이 달라진다는 말이 너무 當然하게 들린다. 周邊 收監者들을 봐도 어떤 處罰을 받을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 番의 裁判으로 宣告를 받고 卽時 끌려가기 때문에 經驗을 얘기해줄 사람도 없었다. 法이 있다고는 하나 아는 사람은 없었다. 刑事訴訟法은 法曹人들이나 보는 줄 알았다. 法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冊으로 팔지도 않았고, 圖書館에서 빌릴 수도 없었다. 泄瀉 法을 알아도 裁判廷에서 따질 사람도 없을 것이다. 判檢事의 氣分을 나쁘게 하면 훨씬 더 重한 處罰을 받기 十常이다. 北韓에선 金氏 一家의 말이 곧 法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事實이다. 當時 脫北했다 北送된 사람들만 봐도 김정일이 “관대히 봐주라”고 하면 우르르 풀려났고, 反對면 우르르 敎化所로 끌려갔다. 김정일이 “社會 紀綱이 解弛해졌으니 銃소리를 울리라”고 하면 크지 않은 罪로도 公開 銃殺됐다. 遺訓統治란 槪念은 說明조차 어렵다. ‘金日成著作選集’만 봐도 聖經만큼 두꺼운 冊이 100卷을 넘는다. 金正日, 金正恩의 말을 적은 冊까지 모아놓으면 數十 트럭은 족히 된다. 여기선 이 말을 하고, 저기선 저 말을 했지만 상관없다. 處罰할 땐 必要한 句節만 引用해 “首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罪를 만들면 된다. 그렇다고 遺訓이 絶對的인 것도 아니다. 얼마 前 金正恩이 統一이란 單語를 削除하라며 各種 記念物을 爆破해도 金正恩이 遺訓을 違反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無法國家에선 法官이 그다지 權勢 있는 職業이 아니다. 北韓에선 企業들 털어 賂物을 먹고 살 수 있는 檢事 程度만 좀 威勢가 있지만, 그들도 黨 幹部 앞에선 머리를 숙여야 한다. 所信 判決이 不可能한 곳에서 判事는 허수아비일 뿐이고, 辯護士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北韓에서 살다 韓國에 오니 무슨 法이 그리 많은지 놀랄 때가 많다. 守令의 氣分에 따라 고무줄 잣대로 處罰받는 일이 不可能하다. 그만큼 法治國家가 훨씬 더 좋은 社會인 것은 分明하다. 法이 힘이 있으니 法曹人의 威勢도 좋다. 判檢事, 辯護士가 되는 게 人生의 成功 잣대다. 그런데 韓國에 왔던 20餘 年 前과 比較해 보면 漸漸 더 法이 得勢한다. 뭔 일만 터지면 法을 만들겠다고 떠들고, 政治的 問題도 法院 判決로 解決하려 한다. 그러다가 判事가 總理가 되더니, 檢事가 大統領까지 됐다. 며칠 前까진 兩黨 首腦도 法曹人 出身이었다. 이런 ‘法曹人 得勢 時代’가 一時的인 것 같지는 않다. 法이 많아질수록 法曹人의 힘이 빠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法案들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많은 法들은 國會에서 만들어지고, 地方 議會에서도 法들을 만들어낸다. 注目할 것은 21代 國會에서 더불어民主黨이 180席을 掌握한 뒤로 法案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點이다. 지난달 29日 基準 21代 國會가 發議한 法案이 無慮 2萬6637件이라고 한다. 參考로 20年 前인 16代 國會에선 1615件, 그 다음의 17代 國會에선 5728件의 法案이 發議됐다. 國會議員들의 專門性은 漸漸 떨어지는 것 같은데 오히려 法은 그에 比例해 늘어나니 問題다. 게다가 法案을 많이 만들면 優秀 議員이라고 表彰까지 한다. 半世紀 前의 낡은 法들도 미처 整理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速度로 새 法들이 나오다간 法의 무게에 깔려 窒息할 판이다. 민주당은 現 政權을 ‘檢査 獨裁政權’이라고 糾彈하지만, 法을 이리 많이 쏟아내면서 檢事의 힘을 빼겠다는 것은 矛盾이 아닐까. 22代 國會가 새로 構成됐다. 法부터 만들겠다고 벼르던 사람들도 大擧 當選됐으니 이番 國會는 初盤부터 法이 쏟아질 것이다. 이제부턴 法을 만들었다고 賞을 주지 말고, 過去 法을 다듬고 整理하고 줄이는 議員에게 賞을 주면 어떨까. 같은 民族인데 한쪽은 法이 없어 죽고, 한쪽은 法에 깔려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다. 鑄成하 콘텐츠企劃本部 記者 zsh75@donga.com}

    •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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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兒童幸福支援事業, 危機兒童 627家庭 支援

    福祉 死角地帶 危機假定을 發掘하고 支援하기 위한 國際口號開發 非政府機構(NGO) 월드비전(會長 조명환)과 韓國社會保障情報院의 ‘e兒童幸福支援事業’李 成果를 보이고 있다. 월드비전과 韓國社會保障情報院이 지난해 6月 맺은 業務 協約에 따라 施行 中인 이 事業은 e兒童幸福支援시스템을 活用해 危機兒童을 빨리 發掘하고 生計 醫療 住居 敎育을 비롯한 맞춤型 福祉 서비스를 支援하고 있다. e兒童幸福支援시스템은 韓國社會保障情報院의 44種 社會保障 빅데이터를 活用해 福祉 서비스가 必要할 것으로 豫測되는 家庭을 專擔 公務員이 訪問하고 兒童과 保護者의 福祉 欲求 및 養育 環境을 確認한 後 適切한 福祉 서비스를 支援한다. 電氣, 水道, 가스 供給 中斷 및 滯納 情報 28種과 嬰幼兒 檢診 未實施, 長期 缺席, 養育手當 및 保育料 未申請 等 危機兒童 情報 16種을 綜合해 全國 危機 兒童 및 家庭을 把握할 수 있다. 월드비전과 韓國社會保障情報源은 全國 364個 機關에서 申請한 危機兒童 627假定을 生計 醫療 住居 敎育 領域에서 支援했다. 또 兒童의 健康한 成長을 위해 必要한 文化 體驗 活動, 家族 和睦을 위한 活動, 進路 探索 活動까지 支援하고 있다. 올해는 家口當 支援金을 50萬 원에서 100萬 원까지 늘렸다. 지난달부터 받은 1次 申請을 審査해 112家口에 支援金을 傳達했다. 다음 달부터 住民登錄上 居住地 邑面洞 行政福祉센터(住民센터)를 통해 2次 申請을 할 수 있다. 월드비전 危機兒童支援팀 박아람 次長은 “特히 民間 機關과 保健福祉部 傘下機關, 그리고 各 地域 住民센터까지, 民間과 公共이 協力할 수 있다는 點에서 意義가 크다”고 말했다. 월드비전과 韓國社會保障情報院이 實施한 2023年 e兒童幸福支援事業 優秀 事例 公募展에서는 京畿 議政府 松山2棟 住民센터 保健福祉팀 異常은 主務官이 優秀賞을 받았다. 이 主務官은 지난해 6月 稀貴難治性 疾患을 앓는 아버지, 知的障礙 어머니, 7歲 남아 家庭을 꾸준히 訪問 相談하고 이 事業의 支援金뿐 아니라 民間 財團 및 地域 福祉館과 連結해 生計費를 支援했다. 또 월드비전 中央위期兒童支援事業을 통해 支援金 1000萬 원을 傳했다. 韓國社會保障情報員 이성호 代理는 “危機 發生 後 死後藥方文처럼 對應하는 것이 아니라 事前 豫測을 통해 危機兒童을 發見하고 월드비전 같은 危機兒童 支援事業 專門機關과 連繫해 必要한 支援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長點”이라고 말했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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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김주애는 女王이 될 수 있을까?

    김주애 偶像化가 漸漸 露骨的으로 進行되고 있다. 15日 勞動新聞과 朝鮮中央通信에 3次例에 걸쳐 ‘香徒의 偉大한 분들께서’라는 表現이 登場했다. 北韓에서 ‘嚮導者’는 指導者를 意味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等 3名에게만 許諾된 修飾語이다. 이를 주애에게 썼다는 것은 金正恩이 11歲 딸을 次期 指導者로 確實히 밀고 있다는 證據다. 2022年 11月 아버지 손을 잡고 나타난 주애의 첫 呼稱은 ‘사랑하는 自制분’이었다. 以後 ‘尊貴하신’ ‘尊敬하는’ ‘朝鮮의 샛별女將軍’ 等으로 漸漸 높여졌고, 1年 半도 안 돼 及其也 嚮導者 班列에 올려졌다. 金正恩 代身 駐애를 浮刻시킨 寫眞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金正恩은 正말 그를 次期 女王으로 키울 생각일까. 여러 意見이 엇갈리겠지만, 누가 되든 나중에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여도 別問題는 없다. 분명한 點은 金正恩이 딸을 9歲 어린 나이부터 露出시킨 것은 健康에 自信感이 없다는 證據라는 것이다. 正常的인 오너라면 40世도 되기 前에 9歲 子息에게 後繼 世襲을 始作하고, 自身의 權力을 分散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다. 金正恩이 “언제든 죽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면 “내가 죽은 뒤 家門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가장 큰 걱정일 것이다. 後繼者 없이 金正恩이 急死하면 混亂이 벌어지고, 金 氏 家門이 滅門之禍를 當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後繼者를 내세우고 權威를 높여 萬一을 對備하는 일은 重要하다. 그런데 家父長的인 北韓에서 5代까지 내려가면 星氏가 바뀔 危險을 甘受하고 女王을 내세울 수 있을까. 朝鮮 王朝 500年 歷史에도 없던 일이다. 金正恩은 願하면 언제든 아들을 얻을 수 있다. 이미 只今도 여럿 있다. 어쩌면 그 아들들이 너무 어려 클 때까지 駐애를 ‘非常用’ 後繼者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주애가 後繼者가 絶對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金正恩의 생각에 따라 充分히 可能한 얘기다. 다만 몇 가지 事前條件이 必要하다. 첫째, 金正恩이 딸을 너무 사랑한다면 後繼者로 삼을 수 있다. 金正恩은 權力을 威脅하는 兄 김정남을 世界의 面前에서 殘酷하게 毒殺했다. 姨母夫 張成澤度 悲慘하게 끌려가는 場面을 演出하며 處刑했다. 그것은 金正恩의 뜻일 수도 있고, 김경희 等 패밀리의 强力한 要求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血肉을 죽인 金正恩의 마음이 便했을 理는 없다. 萬若 나중에 아들로 後繼者가 바뀐다면, 더구나 아들의 어머니가 李雪主가 아니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正統性을 가진 本妻의 子息들부터 除去하려 들 것이다. 金正恩부터 맏兄을 죽여 兄弟의 피를 손에 묻혔다. 歷史 속 無數한 王朝에서 이런 일은 흔했다. 金正恩이 딸을 너무 사랑한다면 이런 危險을 甘受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다른 後繼者로 交替한다는 것은 結局 自己 손으로 딸을 죽이는 結果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애에게 權力을 넘기거나, 가장 아끼는 子息임을 誇示함으로써 함부로 駐애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認識을 심어줄 必要가 있다. 둘째 理由도 金正恩의 體驗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2010年 10月 새파랗게 젊은 25歲의 金正恩이 처음 나타나자 北韓 住民들은 깜짝 놀랐다. 金正恩의 經歷이나 能力은 全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어린애가 알면 뭘 알겠냐”고 수군거렸다. 金正恩도 여러 次例 참을 수 없는 受侮를 經驗했을지 모른다. 執權 初期 自己를 無視했다고 죽인 사람도 많다. 그것이 恨에 맺혀 “내 後繼者는 불쑥 튀어나오게 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自然스럽게 統治者임을 認識시키겠다”고 다짐했을 수 있다. 셋째 理由는 海外 물을 먹은 金正恩이 5代 世襲은 可能하지 않다고 判斷했을 可能性이다. 人工知能을 앞세운 科學技術의 急激한 發達로 20∼30年 뒤를 내다볼 수 있는 專門家도 없다. 나이를 勘案하면 주애는 最小 半世紀 以上의 期間 동안 統治할 수 있다. 只今의 北韓처럼 社會主義를 詐稱한 畸形的인 王朝는 그리 오래갈 수는 없다. 이미 北韓 住民의 마음은 金氏 王朝를 떠났다. 다만 極端的 恐怖統治로 現在 狀況을 維持할 뿐이다. 經濟的 비전도 밝지 않다. 金正恩은 주애에게 自身이 죽을 때까지만 統治하고 以後엔 北韓을 正常國家로 되돌리는 부드러운 引繼者 役割을 期待하고 있진 않을까. 勿論 이는 希望的인 시나리오일 뿐이다. 金正恩이 누굴 後繼者로 指名하든 只今 當場 우리에게 重要한 일은 아니다. 나중에 일어날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봐도 充分하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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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한줌의 牌거리가 만든 地獄

    北韓은 한줌도 못 되는 牌거리가 똘똘 뭉쳐 나라를 那落으로 끌고 간 歷史的 事例다. 한때의 鬪爭 經歷을 勳章으로 내건 人間들이 어디까지 墮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事例도 北韓에서 찾을 수 있다. 김일성이 蘇聯 88旅團 大隊長日 때 거느렸던 韓人 部下는 60餘 名이었다. 김일성은 光復 後 蘇聯의 庇護와 빨치산 出身들에 依支해 權力을 掌握했다. 그때부터 北韓은 80年 넘게 물갈이가 되지 않았다. 빨치산 牌거리들의 特徵은 첫째로 形便없이 無識했다는 것이다. 김일성보다 鬪爭 經歷이 더 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金日成이 大將 노릇을 한 것은 그나마 글을 알았다는 理由가 컸다. 빨치산 出身 가운데 中學校 卒業 以上의 學歷者는 손꼽을 程度였고, 大多數가 글을 읽지 못했다. 6·25戰爭 때 빨치산 出身 北韓軍 將星 多數는 指導도 볼 줄 몰랐다. 1960年代 初 모든 靜寂을 除去하고 빨치산 出身들이 權力을 掌握했지만 長官級 자리에 오른 者들이 글을 몰라 金日成高級黨學校에서 ‘가나다라’부터 工夫해야만 했다. 하지만 머리가 굳어 끝내 배우지 못한 者도 많았다. 그들을 가르친 校長은 日帝 때 工夫했다는 理由로 나중에 양강도 奧地로 追放됐다. 머리가 텅 빈 人間들이 權力을 잡았으니 北韓은 絶對 잘 살 수가 없었다. 여기에 “首領님 하는 일은 無條件 좋다”고 歡呼를 지르는 無識한 머슴과 勞動者 出身들을 승진시켜 나라의 核心으로 삼았다. 無識한 牌거리들이 온 나라를 無知한 땅으로 만든 것이다. 빨치산 牌거리들의 두 番째 特徵은 剛한 權力慾과 無慈悲한 政敵 肅淸이었다. 한때 四智를 함께 넘었던 이들은 危機 때마다 똘똘 뭉쳐 때로는 暗殺로, 때로는 會議場에 銃을 들고 들어가 脅迫도 하면서 反對派를 次例로 除去했다. 그나마 工夫를 했던 남로당파, 沿岸波, 蘇聯派, 國內派 等은 無識하고 勇敢한 빨치산파를 當하지 못했다. 빨치산 牌거리는 全國에 政治犯收容所를 만들고 靜寂은 勿論이고 不平하는 사람과 有識한 사람들까지 모두 가둬 버렸다. 빨치산 牌거리들의 세 番째 特徵은 性的으로 紊亂했다는 것이다. 女性은 그들에게 補償과 戰利品에 不過했다. 金日成부터 例外는 아니었다. 光復 後 김일성과 함께 일을 하다가 나중에 蘇聯으로 亡命한 數十 名의 前 北韓 高位 官僚들이 이에 對해 仔細한 證言들을 남겼다. 代表的으로 北韓軍 作戰局長을 지낸 유성철 前 中將의 手記에는 이런 句節이 있다. “김일성의 女性 遍歷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滿洲와 蘇聯을 떠돌며 嚴格한 規律 속에서 生活하다 北韓에 돌아와 無所不爲의 權力을 갖게 된 김일성은 그동안 抑制해 온 欲求를 噴出하듯 女子關係가 紊亂했다. 김일성은 한 人民軍 高級軍官의 夫人을 籠絡하고 그 軍官을 蘇聯으로 留學 보낸 일도 있으며 人民委員會 委員長을 할 때는 午餐服이란 打字手에게 키스를 하려다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김일성은 그의 獵色 行脚이 部下들 사이에서도 不滿을 사게 되자 1號, 2號 等 一連番號가 붙은 祕密邸宅을 곳곳에 마련하고 아리따운 處女들을 불러들여 隱密히 즐기기도 했다.” 兪 前 中將의 手記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김일성의 公式 夫人 김성애度 安全部 副部長 김성국의 打字手였다는 것이다. 偶然히 김성애를 본 金日成이 다음 날 自己 房에 打字手가 必要하다고 連絡했다. 다른 手記들에도 비슷한 證言이 많은데, 金剛山으로 놀러가면서 車 뒷座席에서 女祕書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짓을 벌였다는 內容도 있다. 윗물이 이러니 아랫물이 맑을 理가 없는 法. 最側近인 崔晛은 江界에서 木材商의 딸을 劫奪하려다 拒絶當하자 “우리가 싸울 때 便히 살던 反動”이라며 木材商을 쏴 죽였다. 그가 38餘團長 時節 看護師를 건드려 낳은 私生兒가 최룡해이다. 崔晛은 處罰받을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頭目부터 犯罪者인데, 누가 누구를 處罰할 수 있단 말인가. 빨치산 牌거리들은 1970年代 김정일이 別莊을 잔뜩 지어 20代 美女들을 祕書와 看護師 名目으로 上納하자 그의 後繼者 世襲을 絶對的으로 支持했다. 빨치산 牌거리의 네 番째 特徵은 祖國과 民族 따윈 眼中에 없었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權力과 享樂을 실컷 누리고도 모자라 代代孫孫 代물림하는 體制를 만들었다. 2021年 마지막 빨치산 1世가 死亡했다. 김주애는 빨치산 牌거리의 4歲이다. 現在 北韓은 빨치산 2∼4歲의 世上이다. 이들은 代를 이어 ‘祖國과 人民’을 입에 달고 산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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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金正恩의 砲彈箱子 收奪事件

    지난해 10月 中旬 北韓 各 機關, 企業所의 勞動黨 責任者와 行政 責任者들이 밤 10時에 市郡 黨委員會에 緊急 呼出됐다. 이들에게 下達된 것은 最高司令官 名義의 緊急 命令이었다. 內容은 學生과 年老保障(隱退) 老人을 除外한 모든 成人 男性에게 24時間 안에 砲彈 箱子 2個씩을 만들어 바치라는 것이었다. 黨委員會에선 砲彈 箱子 見本品까지 보여주면서 한 치의 誤差도 없이 製作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箱子의 規格은 가로 30cm, 세로 120cm, 높이 30cm로, 直徑 120mm 以上의 砲彈 2發과 裝藥을 넣을 수 있는 크기다. 또 砲彈 箱子는 無條件 幅 15cm, 두께 1.5cm의 이깔(잎갈)나무 板子로 製作해야 한다는 條件도 붙었다. 命令이 下達된 瞬間부터 全國에서 이깔나무 板子가 瞬息間에 동나기 始作했다. 木材 加工 工場과 加工業者들이 발 빠르게 市場에서 이깔나무 板子와 木材를 사들였다. 그리고 밤새 砲彈 箱子를 製作했다. 뒤늦게 指示를 받은 사람들이 市場에 나갔을 때에는 이미 該當 規格의 砲彈 箱子 2個가 中國 돈 500위안(藥 7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直接 만들기도 어려웠다. 아침에 該當 規格의 板子는 m當 2.8달러에 팔렸고, 이걸 사서 木工에게 付託해도 資材값만 28달러에 加工費 5달러가 붙어 33달러나 들었다. 市場에서 砲彈 箱子 2個를 사는 것과 比較하면 差額은 고작 4달러 程度에 不過했다. 命令은 獨裁的이고, 下達 方式은 社會主義的인데, 執行한 사람들은 完璧하게 市場經濟의 論理로 움직였다. 허나 아무리 最高司令官의 命令이라고 해도 없는 이깔나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法이다. 男性들은 命令을 遂行한 者와 遂行하지 못한 者로 나뉘었다. 當然히 後者는 두고두고 史上 檢證을 받아야 한다. 北韓 內部 消息通에 따르면 이렇게 모은 砲彈 箱子가 全國的으로 約 200萬 個라고 한다. 命令이 下達된 時點은 北韓이 本格的으로 러시아에 砲彈 支援을 始作한 때와 一致한다. 70달러면 北韓 一般 4인 家庭이 最小 두 달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北韓 人民의 膏血을 짜낸 手製 砲彈 箱子는 只今쯤 어느 우크라이나 벌판의 진창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砲彈 箱子 收奪 事件은 北韓의 僞善과 虛勢를 赤裸裸하게 보여주는 代表的 事例다. 김정은은 지난달 政治局 擴大會議에서 “地方 人民들에게 基礎食品과 食料品·消費品을 비롯한 初步的인 生活必需品조차 圓滿히 提供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黨과 政府에 있어서 到底히 外面할 수 없는 深刻한 政治的 問題”라며 反省하는 척했다. 最近 몇 年 동안 人民들의 生活을 改善하지 못했다며 울먹인 적도 여러 次例다. 民心이 惡化되면 人民들에 對한 收奪을 하지 말라며 몇몇 幹部를 本보기로 호되게 處罰하는 척하기도 했다. 정작 本人은 人民이 두 달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을 24時間 만에 꿀꺽하고 입을 싹 씻었다. 砲彈 箱子도 生産할 能力이 없어 最高司令官 命令으로 全國 男性들이 톱과 망치를 들고 뛰어다녀야 하는 게 現實이지만 金正恩은 偵察衛星을 쏘고 核潛水艦을 만들겠다고 虛勢를 부리고 있다. 새해 들어서도 連日 新型 미사일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試驗發射 寫眞을 公開했고, 軍需工場에 찾아가 수많은 미사일과 發射 車輛을 背景으로 찍은 寫眞을 뿌렸다. 只今 北韓의 軍需産業은 金正恩이 虛勢를 부릴 수 있는 몇몇 샘플用 武器 製作과 러시아에 보낼 彈藥 製作에 모든 걸 쏟고 있다. 最近 金正恩이 戰爭을 云云하며 連日 對南 强勁 發言을 내뱉고 있지만, 정작 헐벗은 北韓 軍人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民家를 掠奪하고 있다. 燃料 不足에 機甲部隊와 艦艇들은 對策 없이 綠이 슬고 있고, 空軍 飛行機는 墜落이 무서워 訓鍊도 못 하고 있다. 一角에선 金正恩이 正말 戰爭을 벌이려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지만, 쓸데없는 杞憂이다. 제대로 戰爭 準備를 하기도 前에 北韓 人民들부터 죽어갈 것이다. 彈藥 箱子는 勿論 非常食糧을 만들어 내라, 掌匣을 내라, 軍靴를 내라, 디젤유를 내라 等과 같은 指示가 數十 番 넘게 떨어질 것이다. 甚至於 銃砲를 닦을 千까지 내라고 할 것이다. 이건 個人的 想像이 아니라, 實際 北韓에서 이미 다 일어났던 일이다. 이런 軍隊를 갖고 金正恩은 “南朝鮮 領土 平定”을 운운하고 있다. 말라갈수록 虛勢는 거꾸로 커지기만 하는 게 참 안쓰럽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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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統一部 6級 公務員이 된 脫北靑年…“故鄕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2004年 8月 白頭山으로 自由旅行을 떠났던 脫北靑年 강원철에게 人生의 目標가 생겼다. 韓國 國籍을 따면 中國 旅行을 하겠다는 생각은, 그가 中國에 숨어 지낼 때부터 가졌던 오랜 꿈이었다. 그는 韓國에 오자마자 旅券을 만들었고, 大學 入學을 記念해 中國에서 함께 지냈던 脫北 親舊와 함께 떠났다.인천공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大韓民國 國民의 自負心을 느껴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中國 延邊에 到着하자마자 일부러 公安을 찾아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3年 前엔 公安 服裝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줄行廊을 치느라 바빴지만, 韓國 旅券을 보여주니 敬禮까지 받았다. 삶이 하늘땅 差異로 바뀌었음을 體感하니 너무나 신이 났다.다른 韓國 觀光客들과 함께 道問議 豆滿江에서 배를 타고 北韓을 구경할 때였다. 건너便에서 삐쩍 마르고 헐벗은 北韓 國境警備隊 軍人들이 江가에서 觀光客들을 쳐다보며 無聊함을 달래고 있었다.부산에서 왔다는 한 夫婦가 姜 氏와 親舊를 보더니 “너희들은 北韓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正말 多幸으로 생각해야 돼. 저렇게 젊은 靑年들이 너무 苦生하고 있잖아”라고 말을 건넸다. 夫婦는 이들이 脫北 靑年인줄 모르고 있었다.그 말을 듣는 瞬間 姜 氏는 北韓 軍人들이 달리 보이기 始作했다.“그래, 내가 北에 繼續 살았다면 只今 저렇게 보내고 있었을건데….”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버스는 그의 故鄕 霧散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 떠날 때와 全혀 달라지지 않은 故鄕땅을 건너다보며 姜 氏는 아직 거기에서 살고 있는 親舊들을 떠올렸다.“나는 運이 좋아 韓國에 와서 大學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外國 旅行까지 다니는데, 아직 저기 살고 있는 똑똑했던 親舊들은 저 땅에서 태어났다는 罪 하나로 얼마나 苦生을 할까. 統一이 돼 故鄕에 돌아갔을 때 親舊들이 ‘우리가 힘들게 살 때 너는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무슨 對答을 해야 할까.”그의 故鄕에서 白頭山은 車로 3時間 距離였지만, 北韓에 살 때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白頭山을 서울에 살게 됐을 때에야 비로소 가볼 수 있었다. 白頭山에서도 그는 親舊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며 무엇을 해야 할지 苦悶했다. 統一이 돼도 그들에게 떳떳한 對答을 하고 싶었다.서울로 돌아온 그는 그때부터 北韓 人權問題에 穿鑿했다. 只今 그는 統一部 6級 公務員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의 軌跡은 20年 前에 세운 目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直進 中이다.● 태어나는 瞬間 決定된 運命北韓에서 姜 氏의 運命은 태어나는 瞬間부터 定해져 있었다. 그가 1982年 豆滿江 옆 咸北 巫山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霧散鑛山 勞動者로 일하고 있었다.자라면서 學校에 갈 때마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猖披했다. 北韓 學校에선 學生들에게 아버지가 黨員인지, 非黨員인지를 적어오라고 한다. 父母의 勞動黨 加入 與否에 따라 아이들 속에서도 階級이 나뉘었는데, 父母 모두 黨員이 아닌 姜 氏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강원도 平康 出身인 姜 氏의 아버지는 北韓軍에서 10年 넘게 服務를 했지만, 黨員이 되지 못했다. 除隊 後엔 어렵고 힘든 霧散鑛山 勞動者로 發令이 나 緣故도 없는 咸北 奧地로 오게 됐다. 姜 氏가 13살 때인 1995年 아버지가 病死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出身成分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出身成分을 보면 아버지도 비슷했을 것으로 斟酌할 뿐이다.강 氏의 外할머니는 江原道 通川의 地主집 딸로 이화여전을 卒業한 인텔리였다. 外할머니는 種種 “현대 정주영 會長이 우리 洞네에서 살았어. 참 못살았는데”라고 回想하곤 했다.그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姜 氏가 大學에 갈 可能性의 거의 없었다. 中學校를 卒業하고, 軍에 入隊해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공병국 같은 곳에서 10年 동안 建設腸을 轉轉하다가, 除隊해 霧散鑛山 勞動者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주어진 運命이었다.그의 故鄕은 무산읍에서 通勤列車로 20分 程度 떨어진, 霧散鑛山 勞動者들을 위한 集團部落 性格의 마을이었다. 모두들 가난했다. 脫北할 때 豆滿江에서 처음으로 헤엄을 쳤다.그가 살던 4層 아파트는 苦難의 行軍 時期에 北韓에서 가장 먼저 텅텅 빈 아파트로 꼽힌다.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자고 나면 사람들이 中國으로 도망쳐 사라졌다.그나마 姜 氏의 집은 洞네에선 比較的 굶지 않고 사는 축에 屬했다. 咸鏡北道는 1990年代 初盤부터 配給을 잘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姜 氏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巫山에서 中國 物品을 받아다 黃海道 같은 앞쪽 地域에 나가 쌀을 바꾸어왔다. 그 德分에 1995年부터 本格的으로 苦難의 行軍이 始作됐을 때 姜 氏의 집은 풀粥이나마 먹고 살 수 있었다.당시 姜 氏의 學年은 40~50名 規模의 學級 5個로 構成이 됐는데, 苦難의 行軍 막바지에는 學年에서 學校에 나온 學生을 다 모아야 30名 程度밖에 되지 않았다. 姜 氏는 學校 때 工夫를 잘해 幹部를 도맡았는데, 學校에 가면 先生이 늘 나오지 않은 學生들을 찾으려 보냈다.친구들 집에 가면 얼굴이 퉁퉁 부은 父母들이 맞아주었다. 그나마 그런 집은 父母가 굶어죽은 輯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 장사 밑천 마련하려 脫北1998年 姜 氏는 卒業班이 됐다. 半 年만 있으면 軍에 나가야 했다. 그때 어머니의 장사도 잘 되지 않아 집안이 힘들었다. 軍에 나가 10年 있는 동안 어머니와 5살 아래의 女同生이 굶어죽지는 않을지 너무나 걱정이 됐다.강 氏는 다른 親舊들처럼 中國에 건너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해 주기로 決心했다. 이미 學校는 門을 닫을 地境이었고, 學校에 나가지 않는 것이 正常일 때였다.“입대하기까지 半年 남았으니 그동안 中國에서 일하면 인민폐 100위안은 벌어오겠지.” 16살 少年이 집을 떠난 動機는 單純했다.당시만 해도 霧散에는 國境警備가 그다지 森嚴하지 않았고, 特히 아이들은 團束이 甚하지 않았다. 通勤列車를 타고 霧散으로 간 그는 豆滿江 上流를 따라 걸어갔다. 軍人들이 어디 가냐고 물으면 나무 하러 간다고 둘러댔다.어둑어둑해졌을 때 그는 無酌定 豆滿江에 뛰어들었다. 當時는 5月이라 豆滿江이 깊지 않았다. 江을 건너자마자 그는 豆滿江에서 草幕을 치고 있는 朝鮮族 男性들을 만나게 됐다.이들은 겉으론 고기잡이를 한다고 했지만, 實은 北韓과 密輸도 하고, 女性들이 건너오면 팔아먹기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은 키가 작은 16살 少年이 쓸모가 있어보였는지 함께 움幕에서 살자고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姜 氏는 이들의 提案을 受諾해 3個月 동안 함께 지내며 農事를 거들어주었다.이 期間 姜 氏는 北에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돼 衝擊을 받았다. 朝鮮族들은 대놓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辱했다. 그런데 姜 氏가 듣기엔 그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北에 있을 때 姜 氏는 苦難의 行軍이 날씨가 좋지 않아 凶作이 들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江을 하나 건넜을 뿐인데 中國은 1年 農事해 3年을 먹고 살았고 이밥에 고기가 빠지지 않았다.조선족들은 자주 그를 마을로 데려가 韓國 TV와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姜 氏는 軍에 가는 目的이 헐벗고 굶주린 南朝鮮 同胞들을 解放하기 위해서라고 敎育을 받았다. 하지만 TV 속 南朝鮮은 너무나 풍요로웠다. 함께 있는 朝鮮族 靑年들도 韓國을 침이 마르게 極讚하며 韓國에 갈 꿈만 꾸고 있었다.“내가 郡에 가야 할 理由가 없어졌네.”강 氏는 中國으로 건너온 지 3個月 만에 北韓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決心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었다. 朝鮮族 靑年들은 돈을 주진 않았다. 姜 氏는 市內에 가서 돈을 벌어 집에 보내주려고 決心했다. 朝鮮族 靑年들에게 車費를 빌린 그는 延吉로 向했다.● 北送 飛行機에서 느낀 幸福키 작은 16歲 少年이 中國에서 일자리를 求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敎會들을 다니며 하루하루 延命했다. 當時 延邊의 敎會들엔 그와 비슷한 身世의 脫北民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過程에 그는 自己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脫北 少年들을 알게 됐다. 어쩌다 보니 30代 脫北靑年 한 名과 10代 또래 靑少年 3名이 한 팀이 돼 서로 依支하며 살게 됐다.30대 兄이 늘 이들에게 “南朝鮮에 가면 배고프지 않고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目標는 韓國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몰랐다. 이들은 漠然하게 中國 港口에 가서 韓國으로 가는 배에 몰래 타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共有하다보니 이들의 行先地도 中國의 港口都市를 向하게 됐다. 처음 大連에 가서 港口에 碇泊한 수많은 배들을 보며 “저걸 어떻게 탈 수 있을까” 苦悶했지만 如意치 않았다. 다시 이들은 上海로 向했다. 上海는 훨씬 더 큰 都市니 거기에선 方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해를 넘겨 1999年 6月 上海에 到着한 이들은 도움을 要請하러 韓人敎會를 찾아 들어갔다. 當時에는 脫北民들이 上海까지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敎會에 들어간 直後 公安이 들이닥쳐 이들을 逮捕했다. 敎會에 들어가기 前에 말을 나눈 助敎(北韓 國籍을 가진 朝鮮族)가 이들을 申告했던 것이다.김일성대를 卒業했다는 公安이 들어와 이들을 審問했다. 처음에는 朝鮮族이라고 우겨도 봤지만 그때마다 苛酷한 매질이 加해졌다. 姜 氏가 調査室에 들어갔을 때 여러 名의 公安이 달라붙어 그를 거꾸로 세우고 발로 마구 때렸다.이들에게서 脫北民이란 自白을 받은 公安은 다음날 4名을 車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點心時間이 되자 큰 食堂 앞에서 車가 멈췄다. 그리곤 이들에게 豪華로운 點心을 먹였다. 姜 氏는 태어나 그렇게 좋은 食堂을 처음 봤다. 큰 圓形 테이블에 飮食을 가득 올려놓고 실컷 먹었다.점심을 먹은 뒤 公安이 다시 이들을 車에 태우고 가면서 “이제 너희들은 飛行機를 타고 單동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飛行機를 탄다는 것을 想像도 못했던 姜 氏는 속으로 “犯罪者를 飛行機를 타게 한다는 것이 말이냐 되냐”고 생각했지만, 車는 實際로 어느 空港에 到着했다. 飛行機에 태우기 前엔 手匣도 풀어줬다.강 氏는 잠깐이나마 北宋의 恐怖에서 벗어나 너무 幸福했다.“나는 飛行機를 타봤으니 成功한 人生이구나. 이젠 죽더라도 餘恨이 없다.”비행기에선 機內食까지 주었다. 飛行機에서 주는 빵이 너무 비싸 보여 아끼느라 품속에 몰래 감추었다.2시간 지나 飛行機는 단둥에 到着했다. 마중 나온 中國 邊方臺 軍人들은 傷害 公安들과 달리 이들을 거칠게 對했다. 姜 氏는 숨겼던 빵을 빼앗길 때 들었던 아까웠던 마음을 오래오래 記憶했다. “그냥 먹을 걸….”● 자고나면 사람이 죽었다단둥에서 一週日 程度 收監生活을 마치고 이들은 新義州로 送還됐다. 多幸히 新義州 保衛部는 어른들에게 關心이 있었지 17살 靑少年은 酷毒하게 取調하지 않았다. 그때는 苦難의 行軍 直後라 姜 氏처럼 中國에서 求乞하다 잡혀온 아이들이 數없이 많았던 것이다.이들 4名은 中國에 갇혀 있을 때 韓國으로 가려던 것, 敎會에 갔던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자고 約束했다. 그걸 말하면 어떤 代價가 따르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보위부 調査가 끝나 新義州 集結所로 移動했다. 이곳은 新義州에서 1次 審問을 끝낸 脫北民들이 살던 地域으로 護送되기 前 머물며 하루 12時間 以上씩 强制勞動을 하는 곳이다. 그가 갔을 때 300~400名이 收監돼 있었다. 姜 氏는 集結所로 가기 前 일이 힘들 것보단 빈대가 더 걱정이 됐다. 그만큼 新義州 集結所는 빈대가 많기로 所聞이 났는데, 姜 氏는 빈대에 弱한 體質을 갖고 있었다.불행 中 多幸으로 姜 氏는 이 곳에 하루만 머물렀다. 마침 다음날에 咸鏡北道 護送員들이 到着했기 때문이다. 姜 氏는 數十 名과 함께 手匣을 차고 列車에 올랐다. 이들이 到着한 곳은 咸北 淸津의 농포集結所였다. 이곳에서 强制勞動을 하며 道 內 各 軍에서 護送員들이 오길 待機하는 것이다.그의 故鄕 霧散은 淸津과 汽車로 不過 3時間 程度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巫山에서 護送員이 오지 않았다. 安全員들이 護送이란 귀찮은 出張이 싫어 서로 미루다보니 集結所에 온 많은 脫北民들은 期約없이 기다려야 했다.기다리는 동안엔 酷毒한 强制勞動을 해야 했다. 姜 氏도 甓돌을 찍고, 시멘트를 만들고, 풀을 뜯는 따위의 일에 내몰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더러는 複道에 앉아 자야 했다.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기 때문에 이곳에선 半 年 以上 버티기 어렵다. 姜 氏가 있던 5個月 期間에도 농포集結所에서 13名이 營養失調로 죽었다. 姜 氏 옆에서 자던 사람이 아침에 屍體로 發見돼 끌려 나간 일도 있었다.시신들은 集結所 마당에 거적으로 덮어 放置해 둔다. 食事 時間이면 安全員이 나와 屍體들을 가리키며 “祖國을 背信한 놈들은 이렇게 죽어도 싸다”고 一場 訓示를 했다. 屍身이 腐敗하기 始作하면 收監者 中 몇 名을 불러내 손달구지에 屍身을 싣게 한 뒤 뒷山에 올라가 대충 묻어버린다. 集結所에선 이걸 ‘直播’한다고 말했다. 屍身을 깊이 묻지 않아 큰 비가 오면 山 여기저기에서 遺骨들이 露出돼 뒹군다. 地獄이 따로 없었다.● 어머니도 몰라본 아들의 모습기다리던 霧散 護送員은 11月 末이 돼서야 나타났다. 이 때쯤 姜 氏도 營養失調에 걸려 더는 運身하기 어려운 狀態였다. 한 달만 더 있었더라면 姜 氏도 뒷山에 直播될 뻔했다.무산으로 가는 脫北民들과 함께 列車에 탔을 때 姜 氏는 逃亡갈 기운도 없었다. 多幸히 集結所에서 알게 된 霧散 親舊가 있었는데, 그는 北送된 지 얼마 안 돼 氣力이 남아있었다. 그는 귓속말로 “내가 가다가 틈을 타서 도망칠 것이니 집住所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곤 正말 밤中에 列車에서 뛰어내려 姜 氏의 집을 찾아갔다.다음날 姜 氏 一行은 霧散驛에 내렸다. 이들은 다시 무산군 集結所로 移動했다. 그런데 途中에 갑자기 어머니가 나타나 아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이렇게 回想했다.“네 親舊한테서 네가 잡혀 온다는 連絡을 받고 길에 나갔어. 그런데 사람 몰골이 아닌, 여름옷 차림의 새까만 맨발의 無理가 나타나 머리를 숙이고 지나갔어. 내 아들이 저기 있는데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겠는 거야. 一行이 지나가고, 다시 뒤돌아서 한 名 한 名 뜯어보았지.”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할 程度로 姜 氏는 뼈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여름에 逮捕됐을 때 입었던 옷을 6個月 내내 입고 온갖 險한 일에 내몰렸기 때문에, 옷을 입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狀態였다.어머니는 온 집안 財産을 다 털어 安全部에 賂物을 주었다. 姜 氏는 成人도 아니었던 터라 賂物이 쉽게 먹혔다. 集結所에 끌려간 다음날 그는 바로 病保釋을 핑계로 집에 왔다.이후 3~4個月 동안 몸이 부었다 내리기를 反復했다. 잠을 잘 때엔 集結所의 惡夢이 떠올라 가위에 눌렸다. 保衛部에선 隨時로 찾아와 그가 집에 있는지 監視하고 갔다.● 몽골을 거쳐 韓國에 入國2000年 봄이 왔다. 霧散에 USA라는 글씨가 붙은 옥수수 麻袋들이 들어오기 始作했다.북한 當局은 講演을 통해 “우리 將軍님의 배짱에 美國 大統領이 납작 엎드려 빌었고, 美國을 살려주는 代價로 食糧을 바치고 있다”고 宣傳했다.북한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中國에서 1年 넘게 지낸 姜 氏는 이것이 모두 거짓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몸이 回復되자 그는 다시 中國으로 갈 생각을 했다. 이미 外部世界를 經驗한 그는 北韓에서 到底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그는 어머니에게 “中國에서 일하며 벌었던 돈이 3000위안 있는데 그걸 찾으러 가야겠다”고 말하곤 집을 나섰다. 中國에서 살면서 아는 사람들도 생겼기 때문에 이番에 넘어가면 잡히지 않을 自身이 있었다.다시 예전처럼 豆滿江을 넘은 그는 延吉에 가서 韓國 牧師를 찾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安全하다는 것을 이미 體驗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韓國 牧師를 만나 그의 保護를 받으며 隱身處에 머물게 됐는데, 聖經工夫를 하면서 1年 程度 지냈다. 勿論 完璧하게 安全했던 것은 아니어서 한 番은 中國 公安에 함께 工夫하던 一行과 함께 逮捕되기도 했다. 이들은 大連 邊方臺 廳舍 6層에 收監됐는데, 밤에 男子들은 排水管을 타고 逃亡쳤다. 女性들도 다음날 돈을 주고 풀려났지만, 北에서 各各 科學者와 醫師였던 한 老夫婦는 끝내 풀려나지 못해 北送됐다. 이들이 北韓에 가서 얼마 안돼 死亡했음이 나중에 脫北한 뒤 韓國에서 韓醫師가 된 夫婦의 딸을 통해 알려졌다.변방대에서 도망치는데 成功한 그는 敎會가 運營하는 隣近의 다른 宿所로 찾아갔다. 그런데 姜 氏 宿所 사람들이 모두 잡혔다는 消息은 이곳에도 이미 傳해졌다. 가뜩이나 緊張한 채 살던 이들은 姜 氏가 門을 두드리자 窓門에 밧줄을 드리우고 逃亡쳤다. 洞네 사람들이 이걸 보고 申告하는 바람에 이들은 또 公安에 逮捕될 뻔했다. 한 親舊는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손바닥에 火傷을 입었는데, 그 傷處는 몇 年 지나도 낫지 않았다.이렇게 숨을 조이며 살던 渦中에 다른 곳에 있던 韓國 宣敎師가 “只今 韓國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連絡을 해왔다. 이들은 躊躇 없이 길을 나섰다.2001년 2月 그는 6~7名의 脫北民과 함께 몽골로 向했다. 이때가 脫北民들이 韓國으로 오는 루트가 開拓되던 初期여서 中國과 몽골 國境 警備도 森嚴하지 않았다. 鐵條網 5個를 넘어 몽골 땅에 들어갔지만, 軍人들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列車驛이 있는 작은 마을에 到着했다. 驛務員에게 “울란바토르로 가고 싶다”고 하자 그제야 申告를 받은 軍人들이 나타났다. 울란바토르에서 보름 程度 머무르다 드디어 韓國行 飛行機를 탔다. 두 番째 機內食은 빡빡 다 먹어치웠다. 2001年 3月 姜 氏는 그렇게 韓國에 到着했고 調査機關과 하나圓을 거쳐 9月 社會에 나왔다.탈북민들은 서로 만나면 “하나圓 몇 期냐”고 묻는다. 언제 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원이 생긴지도 올해로 25年. 每달 한 騎手씩 排出되니 이제는 하나圓 騎手가 300基를 肉薄하는데, 姜 氏는 하나圓 13基이다. 이 程度면 빨리 온 것으로 따졌을 때 ‘레전드’級에 들어간다.● 人權에 눈을 뜬 靑年江 氏가 처음 韓國 社會에 나왔을 때 나이는 滿 19歲였다. 未成年者로 區分돼 賃貸住宅도 받지 못하고 비슷한 또래의 脫北 靑少年 2名과 함께 서울에서 天主敎가 運營하는 한 職業學校 寄宿舍로 보내졌다. 이곳은 少年院 出身도 여럿 있는 等 學生들이 大槪 거칠었다. 이들과 脫北 學生들은 자주 싸웠다. 한동안 싸우다가 나중에 싸우면서 情이 들어 親해졌다.아이들은 서로 “우리야 말로 眞正한 南北統一을 했다”고 自負했다. 職業學校에서 1年 半 程度 머물며 姜 氏는 선반技術을 배웠다. 돈을 벌어 家族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독한 마음으로 工夫해 선반 2級 資格證 等을 따냈다.2003년 3月 그는 學校를 卒業하고 서울 衿川區 독산동에 있는 한 金型會社에 就職했다. 하지만 會社 生活은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이 差別이었다. 그가 일하는 會社엔 東南亞 勞動者들이 많았는데, 工場 사람들은 姜 氏도 外國人과 똑같이 取扱했다. 堂堂한 韓國人이라고 생각했던 姜 氏는 적잖게 傷處를 입었다.그는 大學에서 工夫를 해야 몸값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 6個月 만에 工場을 그만두었다. 成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번 돈을 齷齪같이 모아 北韓에서 어머니와 女同生을 韓國에 데리고 온 것이다. 工場을 그만 둔 姜 氏는 熱心히 大學準備에 邁進해 이듬해 한양대 經營學科에 했다.대학생활을 막 始作하려던 때에 市民團體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連絡이 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人權委員會에서 北韓人權決議案을 통과시키려 하는데, 여기에 參加해 北韓 人權을 證言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그가 韓國에 올 때 費用을 支拂해 준 因緣이 있었다. 스위스에 로비를 하러 떠나는 代表團 10名 中 姜 氏 혼자만 脫北民이었다. 이미 家族도 韓國에 와 꺼리길 것이 없었던 그는 선뜻 應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世界 各國 代表團을 相對로 自身이 北韓 集結所에서 겪었던 慘酷한 實相을 證言했다.그때만 해도 그는 人權이란 槪念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世界人權宣言文을 읽으면서 自身이 얼마나 地獄 같은 삶을 강요당하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더구나 北韓이 유엔人權理事會에 加入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을 수 없는 憤怒를 느꼈다. 그가 겪은 北韓은 人權宣言文의 條項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곳이었다.몇 달 뒤 떠난 中國 背囊旅行은 人權에 눈을 뜬 그에게 目標를 만들어준 契機가 됐다. 파란 旅券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짐승 取扱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體感한 그는 中國에서 돌아오자마자 北韓 人權 活動에 뛰어들었다.그는 大學에서 北韓人權동아리를 만들었고, 다른 大學의 北韓 人權 모임과 連繫해 各種 캠페인과 세미나를 열었다. 나중엔 北韓人權脫北靑年聯合을 만들어 代表로 活動하기도 했다. 北韓 人權을 改善하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보니 大學 卒業도 늦어 2010年에야 卒業證을 받았다.● 理想과 現實 사이大學을 卒業한 뒤 그는 2010年부터 2013年까지 3年 동안 民間團體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로 옮겨가 北韓의 實相을 알리는 雜誌 發刊 일도 했다.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北韓 人權團體들은 劣惡한 資金難에 시달렸다. 月給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姜 氏는 故鄕을 바라보며 親舊들을 向해 다졌던 盟誓에 充實하려 애썼다. 2013年엔 고려대 北韓學 碩士 課程에 入學해 2017年 碩士學位도 받았다.북한 人權을 알리는 活動도 繼續 이어나갔다. 2014年 8月 15日 脫北靑年 40名이 歌手 이승철과 함께 獨島에서 ‘홀로아리랑’과 ‘그날에’를 合唱했던 일은 只今도 記憶에 생생하다. 그는 當時 이 行事를 企劃한 脫北靑年聯合 ‘위드유’의 事務局長이었다.하지만 使命感 하나로 버티기엔 現實은 碌碌치 않았다. 2015年 1月 그는 돈도 벌지 못하는 自身을 默默히 支持해주고 應援해주던 脫北民 出身 女性과 結婚했다. 곧 아이도 생겼다.이제 家長의 役割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苦悶 끝에 就職을 생각했고, 2015年 하나銀行 入社試驗에 應試해 堂堂히 合格했다.연수와 고려대 支店 生活을 거치며 徐徐히 銀行員의 삶에 익숙해갈 무렵 그는 統一部에서 脫北民을 對象으로 公務員 募集을 한다는 公告文을 보게 됐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統一部에 가면 自身이 願하는 일을 月給을 받으며 할 수 있는 것이다.통일부는 朴槿惠 政府 時節 脫北民에게도 一部 採用의 門을 열었는데, 2016年 12月 그가 支援했을 때가 두 番째 公告였다. 脫北民 中에서 碩士 以上 學歷의 7級 公務員 1名과 9級 公務員 2名을 募集했다. 많은 脫北民이 志願해 競爭이 나름 熾烈했는데, 試驗을 통해 最終的으로 姜 氏가 選拔됐다.● 統一部에서 만들어가는 未來2017年 初부터 그는 統一部로 出勤하기 始作했다. 公務員 生活을 始作하기엔 적지 않은 35살이었지만, 姜 氏는 첫 出勤이 너무나 興奮되고 설렜다.“광화문 政府廳舍로 出勤할 때 너무 큰 感動을 받았습니다. 北韓에 있었다면 平壤도 가보지 못했을 제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統一 政策을 다루는 公務員이 돼 일하게 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故鄕에 가도 親舊들 앞에서 堂堂하게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생긴 것 같은 自負心이 생겼습니다.”자부심과 달리 新入 公務員 生活은 쉽지 않았다. 西廡, 豫算, 事業 等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라 낯설고 익숙하진 않았다. 部署도 자주 바뀌었다. 統一敎育院에서도 일했고, 2021年엔 京義線 出入事務所에서도 일했다. 閑散한 事務所를 지키며 그는 統一이 自身의 생각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2022년 그는 6級 主務官으로 昇進했다. 脫北民 中에서 公務員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別定職이 아닌 公採 出身으론 6級이 現在 第一 높다. 지난해엔 統一部 長官賞을 받는 等 部處 內에서도 認定받고 있다.현재 姜 氏는 統一敎育院에서 公務員 對象 統一敎育 擔當 主務官으로 일하고 있다. 안내, 敎育資料 作成 支援, 講師 日程 調律 等이 그의 日課다. 2019年부터 公務員 對象 統一敎育이 法廷義務敎育이 됐다. 安定的인 公務員 生活은 長點도 많다. 家庭에 돌아와서도 딸 둘의 才弄을 보며 幸福感을 느낀다.그럼에도 活動加刑인 그에겐 할 수 있는 일들이 限定된 公務員 生活이 完全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인터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記者가 直接 統一部에 正式 要請을 넣어야 可能하다. 하지만 그는 自負心으로 버티고 있다.“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는 只今도 統一돼 故鄕에 돌아가는 날만 꿈꾸고 삽니다. 오늘 熱心히 배워 統一된 뒤 北韓에 行政組織을 만들 때 저의 經驗을 살려 이바지하려 합니다. 저는 出勤할 때마다 굶어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故鄕의 親舊들을 떠올립니다. 그것이 제가 하루하루를 사는 原動力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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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正恩의 荒唐한 現實 認識 ‘20×10 政策’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

    새해 劈頭부터 對外的으로 ‘同族·統一’ 槪念을 지우겠다고 호기롭게 宣言한 金正恩이 內部的으로는 ‘地方 發展 20×10 政策’으로 人民生活을 改善하겠다고 公言했다. 具體的으로 “每해 20個 軍에 앞으로 10餘 年間 現代的인 地方工業工場을 建設해 10年 안에 全國의 모든 市郡과 全國 人民들의 物質文化 生活水準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北韓에선 이를 ‘20勝10 政策’이라고 읽는데, 노동신문은 “80年을 가까이 하는 우리 黨의 歷史, 75年을 經過한 共和國의 將星 發展史에서 처음으로 되는 巨大한 變革, 巨創한 革命”이라고 치켜세웠다. 金正恩은 23日부터 이틀間 平北 妙香山에서 黨 政治局 擴大會議를 열고, 幹部들을 剛하게 叱咤하면서 “課題를 遂行하지 못한 擔當者들에게 責任을 묻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金正恩의 發言을 보면 現實 認識이 너무 荒唐해 會議場 幹部들이 ‘자다가 잠꼬대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속으로 疑心했을 것 같다. 報道를 接한 住民들도 氣가 막혀 唐慌하지 않을까 싶다. 金正恩은 “반드시 하겠다”고 決議했지만, 그게 實現 不可能한 目標라는 것은 김정은만 빼고 모두가 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責任을 묻겠다”면서 “목을 내놓으라”고 하니 무서워서 말을 못 할 뿐이다. 金正恩의 發言을 條目條目 反駁하려면 冊 하나도 모자랄 판이지만, 그의 演說을 듣고 北韓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를 가장 原初的 反駁이라도 代身 해주고 싶다. 金正恩은 말했다. “地方 人民들에게 基礎食品과 食料品, 消費品을 비롯해 初步的인 生活必需品조차 圓滿히 提供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黨과 政府에 있어서 到底히 外面할 수 없는 深刻한 政治的 問題다.” 北韓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그 深刻한 政治的 問題가 언제부터 始作됐는지 알고는 있을까. 된醬, 간醬, 齒솔, 齒藥 等을 供給하지 못한 것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年이 훌쩍 넘었는데, 긴 歲月을 모르는 척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到底히 外面할 수 없는 問題라니. 자다가 깬 것인가? 그나마 드디어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 타령을 하지 않으니 多幸스러운 건가?” 工場 200個를 짓는다고 住民 生活이 얼마나 좋아질지는 알 수 없다. 정작 住民들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워낙 半世紀 넘게 시달려서 이럴 때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너무 잘 알고 있다. “工場 建設 人力은 軍人들을 動員한다 해도, 建設費는 누가 垈地? 輸入에 依存할 수밖에 없는 生産設備, 資材, 原料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돈도 안 주고 責任을 묻겠다면 또 우리 주머니를 齷齪같이 털겠다는 말이구나.” 工場을 지어도 問題다. 이미 있던 工場들도 電氣, 生産設備, 原料, 競爭力 等 各種 問題 때문에 망가진 지 오래인데, 새로 또 짓는다고 이런 問題가 解決될 理도 萬無하다. 그들의 궁금症 몇 個는 이미 金正恩이 對答을 주었다. 建設資材, 設備, 原料 基地를 該當 地方 黨 幹部들이 책임지고 解決하라는 것이다. 甚至於 國策事業으로 解決해야 할 電氣, 鐵道 問題까지 幹部들에게 責任을 轉嫁했으니, 그들도 기막힐 것이다. “차라리 偵察衛星, 미사일에 빠져 있을 때가 그립겠군. 於此彼 앞으로도 돈이 생기면 武器 만드는 데 蕩盡할 거면서, 自己가 못 한 일을 最强의 對北 制裁 渦中에 우리보고 解決하라니.” 實際로 金正恩이 直接 나서서 國策事業으로 推進하다가 망친 事例는 不知其數다. 廢墟로 放置된 元山葛麻觀光地區, 껍데기만 完工된 平壤綜合病院, 파리만 날리는 馬息嶺스키場, 竣工式을 성대히 열고도 5年째 제대로 稼動하지 못하는 順天人肥料工場…. 돈을 다 틀어쥐고도 失敗만 거듭한 指導者가 勸한 없는 部下들에겐 失敗를 容納하지 않겠다고 하니 幹部들도 눈앞이 캄캄할 것이다. “電氣와 史料가 없다”고 말했다가 條件타발을 한다며 處刑된 자라工場 支配人 身世가 되지 않기를 懇切히 祈禱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몇몇 工場이 돌아가도 生産 持續 可能性과 品質은 또 다른 問題다. 그때 가서 모든 生必品을 中國産에 依存해왔던 住民에게 粗惡한 品質의 北漢山을 쓰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할지도 궁금하다. 市場經濟만 導入해도 簡單히 解決될 問題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金正恩은 앞으로도 社會主義 채찍을 10年 더 휘두르겠다고 宣言했다. 幹部나 百姓이나 머릿속에 共通으로 떠오를 말은 이것밖에 없다. “希望 없네. 亡했군.”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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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室內 年平均 超微細먼지 世界 5位

    韓國이 年平均 超微細먼지 數値가 가장 높은 나라 順位에서 5位를 記錄했다. 글로벌 技術企業 다이슨이 全 世界 39個國, 44個 都市를 對象으로 進行한 ‘世界 空氣 質’ 硏究에 따르면 韓國은 印度, 中國,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UAE) 다음으로 超微細먼지 數値가 높았다. 이番 硏究는 2022∼2023年 約 1年 동안 調査 對象國 家庭에 分布된 約 250萬 臺 以上의 다이슨 空氣淸淨器가 蒐集한 5000億 個 以上의 데이터에 依해 이뤄졌다. 硏究 對象 全 國家에서 年平均 室內 超微細먼지 數値는 世界保健機構(WHO)의 年間 指針(m³黨 5μg) 水準을 超過했으며, 特히 印度는 11倍, 中國은 6倍, 튀르키예와 UAE는 4倍, 韓國 루마니아 멕시코 이탈리아는 3倍를 超過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年平均 超微細먼지 數値가 가장 높은 都市 5곳은 델리(印度), 베이징(中國), 상하이(中國), 宣傳(中國), 釜山(韓國)으로 모두 아시아에 屬했다. 都市別 順位에서 서울은 이스탄불(튀르키예), 두바이(UAE)에 이은 8位에 올랐다. 이番 硏究 結果 全體 調査 對象國 中 大部分의 國家가 1年의 折半 以上은 室外보다 室內 超微細먼지(PM2.5) 數値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韓國은 2022年 基準 6個月 동안 月平均 室內 超微細먼지 數値가 室外 數値를 超過했다. 特히 韓國과 日本을 包含한 7個國에서 2月이 室外 對比 室內 超微細먼지 數値가 가장 높은 水準을 記錄했다. 韓國의 境遇 室內 年平均 超微細먼지 數値는 m³黨 18.17μg으로, 室外 數値(17.24μg) 對備 5%假量 더 나쁜 것으로 나타났다. 이番 硏究에 活用된 다이슨 空氣淸淨器 데이터에 依하면, 全 世界的으로 空氣 汚染이 가장 甚한 季節은 겨울로 나타났다. 겨울철 날씨가 추워질수록 사람들이 室內에 머무는 時間이 많아지고, 窓門을 닫은 채 燃燒 作用을 하는 暖房 시스템을 稼動하기 때문이다. 閉鎖된 空間에서 燃燒 作用이 持續的으로 이뤄질 境遇 空氣 汚染을 誘發하는 物質이 室外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蓄積되면서 室內 空氣 質이 惡化된다. 韓國은 空氣 汚染 數値가 가장 높은 달이 1月로, 가장 낮은 8月 對比 2.6倍 以上 높았다. 맷 제닝스 다이슨 環境制御部門 엔지니어링 디렉터는 “이番 調査를 통해 다이슨 空氣淸淨器가 解決해야 하는 問題와 技術的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며 “다이슨 空氣淸淨器를 使用하고 있는 사람들은 MyDyson™ 앱에서 實時間 및 月刊 報告書로 空氣 質을 確認할 수 있다”고 밝혔다.주성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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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 로저스 會長의 隨行祕書가 된 脫北女性[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2018年 11月, 世界 3大 投資者로 꼽히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會長이 정유나 氏에게 電話를 걸어왔다. “유나, 너를 補佐官으로 迎入하고 싶다.”앞서 로저스 會長은 鄭 氏에게 몇 次例 메일을 보냈다. 鄭 氏는 장난 메일인줄 알고 無視하다가 마지막 메일에 “萬若 會長님이 맞다면 電話를 걸어달라”고 했다.“세계적인 大學을 나온 秀才들度 많고, 英語를 잘 하는 韓國 사람들도 많은데 왜 何必 저를 補佐官으로 迎入하려 합니까?”정 氏의 質問에 로저스 會長은 이렇게 對答했다. “I saw your dazzling brain through your eyes.(네 눈을 통해 너의 눈부신 頭腦를 봤다)”그리곤 說明을 이어나갔다.“나 같은 投資者들은 사람을 볼 줄 아는 能力이 있다. 나는 고맙게도 그 能力을 30代 初盤에 가진 것 같다. 너는 매우 熱情的이고, 北韓 出身임에도 英語도 아주 잘한다.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너의 力量을 봤다. 내가 왜 너를 굳이 迎入하려는지 只今은 理解를 하지 못하겠지만, 나랑 같이 일을 하면 알게 될 것이다.”전화가 오기 얼마 前 로저스 會長은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와 畫像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鄭 氏가 英語로 그와 對話를 나누었다.※ 정유나와 짐 로저스 會長과의 첫 만남 映像 =>며칠 뒤 鄭 氏는 로저스 會長의 招待를 받아 釜山으로 내려갔다. “北韓에 全 財産을 投資하고 싶다”는 發言으로 話題를 모은 로저스 會長은 當時 3年 任期로 對北投資企業인 ‘아난티’의 社外理事로 이름을 올렸다.부산에 내려간 鄭 氏는 어리둥절했다. 검은 正裝에 선글라스를 낀 7~8名의 男性이 그를 迎接하더니 映畫에서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호텔 複道를 지나 커다란 門을 열었다. 로저스 會長이 그를 맞아주었다.그날 鄭 氏는 로저스 會長의 隨行祕書로 任命돼 以後 함께 世界를 누볐다. 로저스 會長이 만나는 사람들은 世界的인 巨物들이었다. 記憶에 남는 일로 鄭 氏는 2019年 釜山에서 열린 韓-아세안 頂上會談 晩餐 때를 꼽았다. 當時 로저스 會長의 紹介로 그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 國家拷問, 리셴룽 싱가포르 總理, 쁘라윳 짠오차 泰國 總理 앞에서 北韓의 實相을 이야기했는데, 모든 頂上들이 그의 말을 傾聽하며 拍手를 보냈다.윤석열 大統領이 大選 候補 時節이던 2022年 2月 짐 로저스 會長과 만날 때 이들의 對話를 通譯한 사람도 鄭 氏였다. ● 北韓 奧地에서의 어린 時節世界的인 巨物 投資者의 個人祕書室長(Personal executive secretary)으로 活動하고 있는 鄭 氏는 1988年 北韓에서도 가장 奧地로 꼽히는 慈江道 前川郡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當時 아버지는 北韓 最精銳 特殊部隊인 스키部隊 大隊 參謀長이었다. 스키部隊는 特性上 祕密 流出 防止와 特殊訓鍊을 위해 山間奧地에 駐屯한다.정 氏의 어린 時節 追憶은 온통 山과 關聯된 것이다. 軍部隊 駐屯地엔 同甲내기度 없어 두세 살 나이 많은 오빠들과 鬱蒼한 山에서 五味子, 다래, 두릅을 따고 溪谷과 瀑布水에서 水泳을 하고 가재를 잡고, 허리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學校에 가던 삶이 日常이었다.어린 유나가 꽁지머리를 촐랑이며 걸어가면 軍人들이 ‘새끼 參謀長’이라고 놀렸다.정 氏는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았다. 工夫도 學級에서 第一 잘했고, 노래나 詩朗誦 大會가 열리면 늘 1等을 獨차지했다. 擔任先生이 그에게 늘 “유나는 커서 人民俳優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그가 人民學校에 다니던 때는 北韓에서 苦難의 行軍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나 特殊部隊에는 供給이 좋았던 터라 유나는 배고픔을 몰랐다.어느 날 “鷄卵 후라이를 왜 안주냐”고 투정을 부리는 유나를 아버지가 부르더니 “負袋 바깥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못 먹는데, 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魂을 냈다.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漸漸 時間이 지나면서 유나도 現實을 깨달았다. 軍部隊 마을 아이들은 隣近 農村마을 애들과 같은 學校를 다녔는데, 그의 班에서도 세 名이나 굶어죽었다. 능쟁이 독에 올라 눈사람처럼 퉁퉁 부었다가 죽은 같은 班 男學生을 그는 아직도 記憶한다.어느 날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밤에 조용히 나누는 對話도 엿들었다.“여보, 이러다가 우리도 配給이 끊기는 것 아닙니까. 그럼 나도 山에 가서 길짱구(질경이)를 캐야 하는데 名色이 參謀長 아내이고 職盟委員長이니 달밤에 몰래 나갈 수밖에 없네요.”다행히 어머니가 풀을 뜯으러 나가는 일은 없었다.공부를 잘했던 鄭 氏는 人民學校를 卒業한 뒤 慈江道 所在地에 있는 秀才學校인 江界1高等 中學校에 入學했다. ‘慈江道는 將軍님의 第2의 故鄕’ ‘江界精神’ 等의 빨간 看板이 곳곳에 걸려있는 風景이 낯설기는 했지만, 都市 生活은 나름 나쁘진 않았다.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있진 못했다. 1997年 旅團 參謀長(對坐) 職責으로 白頭山에 冬季訓鍊을 나갔던 아버지가 스키에 손가락들이 切斷되는 事故를 當해 1年 넘게 病床에 누워 있었다. 部隊에선 父親에게 旅團 顧問으로 남아달라고 要請했지만, 父親은 故鄕인 咸北 會寧으로 가겠다고 固執을 부렸다. 1999年 鄭 氏는 아버지와 함께 會寧으로 移徙를 왔다.● 國境都市에서 받은 衝擊 國境都市인 會寧은 그가 자라며 알던 世上과 너무 달랐다. 꽃제비度 많았고, 同窓들은 黨과 指導者에 對한 忠誠心도 全혀 없는 것 같았다.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치는 同窓들에게 그가 “아니, 將軍님께서는 쪽잠에 줴기밥(주먹밥)을 드시며 現地 指導를 나가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도둑질이나 하면 되냐”고 하자 아이들이 그를 寒心하게 쳐다보더니 “너 멍충이 아니야? 宣傳部에서 나온 것 같구나. 배가 불러야 將軍님 지키지 않겠어”라고 對答했다. 慈江道에서 ‘우리는 將軍님이 記憶하는 사람들’이란 集團 催眠 속에서 살던 그는 衝擊을 받았다.정 氏는 轉學 오자마자 스타가 됐다. 獨特한 慈江道 抑揚 때문이기도 했지만, 數學과 英語도 學校에서 恒常 1等을 차지했다.정 氏에겐 두 살 위 오빠가 있었는데 그 亦是 學校에서 늘 1等을 도맡았다. 오빠는 北韓 最高의 秀才들에게 授與하는 ‘7.15最優等賞’을 받았다. 이 賞을 받으면 無條件 김책공대 等 中央大學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오빠는 大學에 가지 못하고 김정일 親衛部隊人 974部隊에 入隊했다. 理由는 오빠가 173㎝로 學校에선 큰 키에 屬했고, 出身 成分도 좋았기 때문이다. 北韓은 各 地域마다 中央黨 5과 選拔 對象을 割當하는데, 5과 指導員들은 黨에서 내리 먹인 割當 人員을 채우기 위해 中學校를 돌면서 人員을 選拔해 管理한다. 오빠가 卒業한 뒤 父母들이 김책공대에 보내려하자 5과 指導員이 “會寧에서 7名을 뽑아 이미 黨에 名單을 보냈는데, 이를 拒否하면 政治的으로 걸린다”고 脅迫했다. 나중에 들으니 秀才 오빠가 親衛隊라는 974軍部隊에 入隊해 한 일은 외진 山골에 있는 김정일의 別莊을 修理하는 일이었다.정 氏도 中學校를 卒業하고 金正淑敎員大學 敎員學部 音樂科에 入學했다. 이곳은 人民學校 音樂敎師를 養成하는 곳이었다.아버지는 그가 大學에 入學하자 “날라리 같은 애들과 어울리지 말고 南朝鮮 드라마 같은 것은 絶對로 보지 말라”고 當付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理解되지 않았다. 아버지야말로 밖에 나가 누구보다 많이 南朝鮮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신사동 그 사람’을 흥얼거렸다. 조금 더 取하면 “只今이 어느 때인데 終身 大統領이냐. 金正日 저 ××가 나라를 다 망친다”고 辱을 퍼부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을 막으며 “우리가 當身 때문에 管理所에 갈 거다”고 푸념했다. 事實 아버지는 軍에 있을 때부터 집에 들어와 TV를 보다가도 쩍하면 “軍隊도 안 가본 게 最高指導者라니. 우리가 나라를 지키는 軍隊이지, 김정일을 지키는 軍隊냐”고 辱을 퍼부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에게 南朝鮮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하니 그 當付가 귀에 들어올 理가 萬無했다.● 韓國 드라마에서 받은 衝擊大學에 入學한 鄭 氏는 伽倻琴을 專攻하는 親舊를 사귀게 됐다. 그런데 그 親舊가 南朝鮮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鄭 氏는 난生 처음 接하는 韓國을 보면서 衝擊을 받았고, 아버지가 늘 말하던 “壁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李 무엇인지 알았다.‘가을동화’를 始作으로 ‘皇太子의 첫 사랑’ ‘沐浴湯집 男子들’ ‘순풍산부인과’ ‘이브의 모든 것’ 等 숱한 韓國 드라마가 會寧에서 돌고 있었다. ‘이브의 모든 것’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느꼈다.“장동건이 채림에게 告白했다가 差異는 場面이 있어요. 그 뒤 그는 집에 가서 파란 手帖을 꺼내들고 美國으로 날아가요. 그걸 보면서 아니 나라의 許諾도 받지 않고, 國家 公務도 아니면서 個人 事情으로 飛行機를 탄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생각했죠. 인천공항에 各種 飛行機가 엄청 많았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죠. 北韓 애들은 飛行機를 그리라면 다 똑같이 그려요. 飛行機라곤 映畫에서 본 6.25때 미그15 戰鬪機가 唯一했거든요. 그리고 南朝鮮은 美國의 植民地라고 배웠는데, 美國을 마음대로 가고, 美國人들과도 너무 잘 지내는 겁니다. 저는 南朝鮮 사람들은 美國 사람들을 보면 日帝 惡質 巡査를 만난 것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 숙여야 하는 줄 알았어요.”드라마는 거짓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會寧에는 드라마 外의 映像도 많이 돌았다.“총리에게 鷄卵과 밀가루를 뿌리는 映像도 봤는데, 北韓 같으면 家族까지 다 잡혀갈 건데 저런 일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돌도 아닌 먹을 것을 마구 던진다는 것도 놀랐어요. 演藝人 施賞式도 봤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TV를 向해 ‘엄마 보고 있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모든 榮光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말도 나왔어요. 會寧에선 迷信을 믿었다는 理由로 種種 사람을 公開處刑했는데, 저긴 저렇게 神을 自由롭게 믿어도 되는구나 싶어 놀라웠죠.”드라마를 接한 뒤 鄭 氏는 더는 北韓에서 살 생각이 없어졌다. 大學에서 배워주는 革命歷史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꿈속에서도 元嬪이나 송승헌이 나올 때쯤 그는 脫北을 決心했다. 그때가 2006年 1月이었다.● 韓國을 向해 떠나다정 氏는 搜所聞을 통해 江을 넘겨줄 사람을 찾다가 한 國境警備隊 中隊長을 紹介받았다.“얼마 주면 中國에 보내줄 거냐”고 묻자 中隊長은 100달러라고 했다. 當時 警備隊에 度糠粃로 주는 돈은 10달러 程度가 一般的이었지만, 鄭 氏는 그런 事情을 몰랐다.그는 집에 와서 집 天井에 숨겨둔 아버지의 祕資金을 훔쳤다. 外貨를 돌돌 말아둔 덩어리가 3個 있었는데 그中 하나를 꺼냈더니 1200달러였다. 그 돈이면 當時 會寧에서 집 서너 채를 살 수 있었다.중대장에게 100달러를 주니, 그는 直接 鄭 氏를 데리고 自身이 兵士 時節 勤務했던 먼 地域으로 데리고 가서 豆滿江을 건넜다. 그날이 2006年 3月 2日이었다.강을 건너는 데는 大略 3分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山을 타니 落葉이 워낙 많이 쌓여 소리가 搖亂했다. 이때 등 뒤에서 銃소리가 7番 터졌다. 當時는 國境을 건너는 사람을 射殺하라는 김정일의 指示가 下達됐다고 한다. 多幸히 追擊은 없었다.중대장이 自己가 親하게 지낸다는 中國의 한 村長 집에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그리곤 “이 아가씨한테 1000달러가 있으니 絶對 人身賣買犯에게 넘기지 말고 韓國行 브로커에게 바로 引繼하라”고 當付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中隊長이 다시 江을 건너왔다.“유나야. 너를 보내고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보니,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南朝鮮에 꼭 가야 되겠냐. 내가 집이 平壤이고 집도 잘 사는데, 나랑 結婚해 平壤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중대장의 告白에도 鄭 氏의 뜻은 斷乎했다. 說得시키지 못한 中隊長은 돌아가면서 “東南亞까지 無事히 到着하면 꼭 村長의 집에 電話해 달라”고 當付했다. 村長에게 500달러를 주니 다음날 멋진 乘用車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떠났다.옌지, 베이징, 쿤밍 等을 거치면서 鄭 氏는 신이 났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멍이 난 靑바지를 입으니 드디어 내가 願하던 世界가 가까이 오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노래房에 가서 마음 놓고 南朝鮮 노래를 부르니 喜悅도 솟구쳤다.베이징에서 韓國으로 가는 다른 脫北民들과 合勢해 一行은 11名으로 늘어났다. 泰國에 到着해 警察에게 團束되기도 했지만, 이때 유나의 英語가 通했다. “100달러 줄 테니 우리를 풀어 달라”고 하자 警察이 돈을 받고 사라졌다. 一行을 이끌고 韓國 食堂으로 찾아간 것도 유나였다. 門 밖에서 보니 食堂 女主人의 머리 스타일이 韓國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같았다.그 食堂 主人 內外의 도움으로 一行은 방콕으로 와 韓人敎會에서 도움을 받았다.● 調査機關에서 만난 아버지방콕에서 3個月 동안 聖經工夫를 하며 머물던 그는 마침내 韓國行 飛行機에 올랐다. 드라마에서 보던 飛行機를 타보니 너무 떨려 신발을 벗고 타려 했고, 韓國 땅이 아래에 보일 땐 눈물이 절로 났다.인천공항은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멋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大理石을 처음 보는 그는 미끄러질까봐 얼음판을 걷듯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年 뒤의 未來로 간 것 같았다.조사기관에 들어갔을 때 그의 手中에는 200달러가 남아 있었다. 調査官들은 北에서 脫北해 곧바로 어린 少女의 품에서 큰 돈이 나오자 아버지가 뭐하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8월 初 調査도 끝나고 自由로운 狀態가 되자 마당에 나가 運動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유나야”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瞬間 소름이 끼쳤다.올려다 보니 4層 窓門에서 머리가 길고, 鬚髥이 덥수룩한 아버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니, 會寧에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지?”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도망간 딸을 잡겠다고 中國에 넘어왔다가 公安에 逮捕됐다. 하지만 北韓 最精銳 特殊部隊 指揮官이었던 아버지는 달리는 車에서 公安을 制壓하고 脫出했다. 以後 딸이 韓國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37日 동안 山을 타고 3000里를 行軍해 大連까지 온 뒤 僞造旅券을 求해 韓國으로 오는 배를 타고 건너왔다. 鄭 氏가 방콕에 머무는 3個月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정 氏는 아버지가 크게 火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보고 “너 살아 있었구나. 健康히 지내다가 社會에 나가서 보자”고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정 씨는 하나圓을 거쳐 2006年 11月 社會로 나왔다. 아버지는 調査 期間이 길었다. 祕密을 많이 알고 있다 보니 하나圓을 거치지 않고 韓美日의 合同 調査만 6個月을 받은 끝에 이듬해 3月 社會로 나왔다. 鄭 氏는 아버지와 함께 京畿道 분당에 賃貸住宅을 받고 살게 됐다.정 氏는 아버지와 함께 熱心히 돈을 모아 强制勞動收容所로 끌려간 어머니를 2年 뒤에 救出해 韓國에 데리고 왔다. 鄭 氏가 脫北한 뒤 974軍部隊에 服務했던 오빠는 奧地로 쫓겨났다. 어머니를 데려온 이듬해 오빠도 韓國에 데려왔다.처음 오빠와 通話했을 때 軍에서 洗腦된 오빠는 “내 앞길을 막은 유나를 銃으로 쏴죽이겠다”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婦女가 돈을 보내지 않자 6個月 뒤 中國으로 脫北해 “나도 데려가달라”고 連絡해왔다. 以後 오빠는 연세대와 海外 留學을 거쳐 現在 有名 外國系 企業에서 일하고 있다.● 美容師로 始作한 定着 鄭 氏의 韓國 定着은 쉽지 않았다. 南朝鮮에만 가면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며칠도 되지 않아 끝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첫 職業은 커피숍 알바였는데, ‘카라멜 마키아토’ ‘블랙티 레모네이드’와 같은 生疏한 單語에 쩔쩔 매며 失手를 連發하다가 一週日 만에 쫓겨났다.두 番째로 찾은 職業은 便宜店 알바였는데, 저녁 8時에 나가 새벽 타임을 勤務했다. 아침에 들어와 4時間 程度 자고 美容學院을 熱心히 다녀 8個月 만에 美容師 資格證을 받았다.하지만 여기저기 履歷書를 넣어도 回答이 없었다. 그는 直接 洞네 美容室을 찾아나섰다.“원장님, 저는 北에서 왔는데요. 시키면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就職 좀 시켜주십시오.”하지만 20歲도 안된 그를 선뜻 받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니온美容室’ 김태연 院長을 만났다. 鄭 氏를 안쓰럽게 여긴 金 院長은 그를 키워주기로 했다.처음 몇 달은 너무 힘들었다. 샴푸毒이 올라 손에서 피가 줄줄 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버스費조차 아끼다보니 7~8個 停車場 距離를 걸어 다녔다. 退勤길에 너무 힘들어 벤치에 앉아 혼자 슬피 운적도 많았다.나중에 한 藝術大學 文化藝術專攻 學部에 入學하기도 했지만, 일과 竝行하기 힘들어 2學年 때 自退했다. 그는 外國에 나가기를 꿈꿨다.그래서 隣近 地球村敎會에 나가 4年 넘게 外國人들과 하루에 2時間씩 工夫하고 對話를 나누었다. 英語 實力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중에 海外 留學을 간 오빠를 따라가 半 年 동안 캐나다에서 語學硏修도 했다.● 정유나의 꿈 10年 동안 美容室에서 일하며 이제는 韓國에서 잘 살 수 있는 自信感이 붙었을 때 人生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이만갑 製作陣이 搜所聞 끝에 그에게 出演해달라고 要請을 해온 것이다. 2017年 이만갑에 처음 나간 그는 固定 出演者가 되게 됐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講演 要請도 많이 들어왔다. 苦悶 끝에 그는 美容室 일을 그만두고 放送人으로 살기로 했다.2018년 짐 로저스 會長과 畫像 인터뷰를 한 것은 그의 人生을 바꾼 또 다른 契機였다.코로나가 퍼지기 前까지 1年 남짓 期間 그는 全 世界를 누비며 隨行祕書 兼 北韓을 알리는 弘報大使로 活動했다.코로나 以後 로저스 會長은 그에게 “난 이제 海外에 거의 다니지 않고 必要하면 부를 것이니 너는 韓國에서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라”고 말했다.이때부터 그의 끼가 本格的으로 發揮되기 始作했다.강연, 公演, TV, 라디오 出演으로 스케줄이 빈틈없이 가득 찼다. 1月 初에도 釜山에서 三星生命, KB 損害保險 FC들을 對象으로 꿈과 動機 附與에 關한 講演을 3日 連續 한 뒤 곧바로 美國 公演길에 오른다. 公演은 그가 좋아서 選擇한 일이다. 바이올린과 손風琴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그는 脫北藝術人 公演團에서 없어서는 안 될 存在가 됐다. 하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어쩌다 보니 제가 世界 有名 政治人, 經濟人, 金融人들을 많이 만나보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自信感과 꿈이 커졌어요. 앞으로 제 꿈은 韓半島를 위해 公的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脫北 女性 政治人도, 外交官도 없잖아요. 저는 로저스 會長님과 同行하면서 어떻게 外國 投資者들과 頂上들이 投資를 하게 만드는지도 배우게 됐습니다. 統一되면 저는 韓半島를 世上에 널리 알리고, 海外 投資를 積極 誘致하는 그런 役割을 하고 싶습니다. 南北이 統一되면, 그때에야 말로 統一部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인데, 統一部 長官을 脫北民이 못할 理由가 없죠. 길지 않은 人生을 살아왔지만, 只今까지 삶을 통해 꿈을 꾸는 사람에게 길이 보이고, 努力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정유나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지켜봐주시고 應援해주십시오.”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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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挑發의 時間이 다가오고 있다

    ‘징검다리’ ‘돈줄’ ‘洞네북’. 氣分 나쁘지만 北韓에 韓國의 用途는 위의 세 單語로 要約할 수 있다. 징검다리는 美國에 接近하기 위해 韓國을 利用한다는 意味다. 代表的 事例가 2018年이다. 도널드 트럼프 前 美國 大統領이 執權한 뒤 關係 回復 可能性을 엿본 北韓은 韓國을 징검다리로 利用하려 했다. 1991年 蘇聯이 崩壞된 뒤 北韓에 가장 重要한 戰略的 生存 課題는 美國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蘇聯과 中國 사이에서 兩다리 外交로 數十 年을 살아오다가 한 軸이 부러지자, 이番엔 中國과 美國 사이에서 兩다리를 타려 한 것이다. 北韓은 蘇聯 崩壞 直後부터 美國과의 關係 改善을 위해 줄기차게 門을 두드렸다. 1次 北核 危機도 美國의 視線을 끌기 위한 試圖의 延長線에서 나온 것이다. 2000年 末 北韓은 그토록 願하던 北-美 修交라는 目標에 거의 近接했지만 조지 W 부시 行政府 出帆과 9·11테러로 美國의 關心을 中東에 빼앗겼다. 中東이 어느 程度 整理되고, 트럼프 前 大統領이 執權 後 첫 外交的 業績을 쌓을 곳으로 北韓을 注目하자 金正恩은 大膽하게 門을 열고 나왔다. 2018年 急作스러운 平昌 겨울올림픽 參加와 4月 板門店 會談 모두 美國에 보내는 러브콜이었다. 北韓은 美國과의 修交 없이는 對北 制裁를 풀 수 없고 經濟難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正常 國家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基督敎的 價値觀이 支配하는 美國에서 大統領이 人權 彈壓으로 惡名 높은 北韓 世襲 獨裁者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再選을 抛棄하는 自殺 行爲나 마찬가지다. 北韓의 試圖는 體制의 劃期的인 變化 없이 이뤄지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北-美 修交나 對北制裁 解除, 國際社會 進出 等 北韓에 切實한 것들은 모두 美國이 쥐고 있다. 그 代身 韓國에는 對北 經濟 支援을 할 能力 程度는 있다. 2002年부터 始作해 2009年까지 北韓은 每年 食糧 40萬 t, 肥料 10萬 t 等 各種 經濟的 支援을 받았다. 北韓은 ‘밥값’은 하려고 努力했다. 支援 期間 人命 被害를 招來하는 어떠한 挑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두 用途로 使用하기 어렵거나, 內部에 더 重要한 일이 생기면 北韓은 韓國을 假借 없이 洞네북으로 使用했다. 2011年 12月 김정일 死亡 直前 3年이 그랬다. 2008年 8月 腦卒中으로 쓰러진 金正日은 죽음이 다가옴을 直感했다. 그는 死亡 前까지 3年 남짓을 오로지 後繼 構圖를 完成시키는 데 沒頭했다. 大門을 열고 비밀스러운 집안일을 處理할 수는 없는 法. 李明博 政府가 對北 支援을 中斷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지만 金正日은 韓國의 用途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2010年의 天安艦 攻擊과 延坪島 砲射擊은 內外部의 視線을 돌리기 위한 意圖的인 挑發이었다. 사람들은 북소리가 搖亂한 곳을 쳐다보기 마련이다. 2010年의 挑發은 金正恩이 業績을 쌓기 위해 한 짓이라는 分析들도 있지만 北韓 시스템에서 김정일의 指示 없이 後繼者가 單獨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이런 挑發의 結果 北韓은 스스로 內部 빗장을 걸어 잠그고 世襲에 必要한 時間을 벌고, 김정은을 强力한 指導者로 美化시켰다. 北韓 사람들이 戰爭이 터질까봐 걱정하는 사이 金正日은 아들에게 黨과 軍, 祕密警察과 金庫 等을 次例로 물려주었고, 世襲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肅淸했다. 올해 北韓은 다시금 韓國을 洞네북으로 活用하려 한다. 金正恩은 새해 劈頭부터 韓國을 主敵, 敵對的 交戰 國家로 規定하고 加用한 武力을 總動員해 焦土化하겠다며 威脅 水位를 끌어올리고 있다. 意圖는 뻔하다. 6年째 이어지는 史上 最强의 對北制裁, 3年間의 코로나 셀프 封鎖로 經濟가 破綻 난 狀況에서 金正恩은 김주애로의 後繼 構圖를 完成시키려 하고 있다. 民生이 塗炭에 빠졌는데 열한 살짜리 어린 딸을 위한 4代 世襲에만 執着하고 있느냐란 怨聲을 누르기 위해 김정은에게 必要한 것은 非常戒嚴令과 視線을 돌리기 위한 북소리다. 戰爭 危機를 高調시켜야 ‘準戰時 狀態’ ‘戰時 狀態’로 內部 統制 水位를 높일 수 있다. 그러면 金正恩은 駐애를 위한 時間도 벌고, 住民들의 視線도 돌리며, 4代 世襲에 反對하는 ‘눈빛이 不良한 者’들을 展示 狀態에 準하는 卽決處分으로 除去할 수 있다. 새해 劈頭부터 金正恩은 그 方向으로 판을 깔기 始作했다. 大韓民國이 北韓이 울릴 砲聲에 對備해야 할 瞬間도 다가오고 있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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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티 專門家로 變身한 北韓 女性 突擊隊員[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2000年 10月 平壤과 南浦 사이 42㎞ 區間에 往復 10車線의 靑年英雄道路가 建設됐다. 北韓은 이 道路를 ‘偉大한 將軍님 時代의 靑春 敍事詩’라고 讚揚했다. 北韓은 約 2年 동안 10萬 名이 넘는 靑年들이 動員돼 ‘機械의 힘을 빌리지 않고 人力만으로 完工한 高速道路’라며 激讚했다.도로가 完成된 지 한 달 뒤 金正日은 現場을 둘러보고 “靑年英雄道路는 우리 黨의 靑年 重視 思想이 낳은 偉大한 創造物이다”라는 長文의 談話를 發表했다. 一部만 言及하면 이렇다.“청년들이 이 高速道路를 建設하면서 强盛大國 建設의 大通路라고 하였다는데 그럴 만합니다. 이렇게 넓고 시원한 高速道路는 世界的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靑年英雄道路는 우리 黨의 靑年 重視 思想이 낳은 偉大한 創造物입니다. 黨의 靑年 重視 思想은 靑年들에 對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黨은 언제나 靑年들을 貴重히 여기고 사랑하며 靑年들을 믿고 내세워 어려운 課業들을 遂行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黨은 高速道路工事 全 期間 여기에 깊은 關心을 쏟았으며 靑年 건설자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습니다.”지금은 다니는 車도 거의 없고, 管理도 안 돼 여기저기 패인 이 道路를 建設하기 위해 奴隸勞動을 强要 當했던 靑年 中에는 咸鏡北道 會寧에서 나서 자란 16歲 김연희(假名)도 있었다.● 2000年 靑年英雄道路金 氏는 2000年 3月 같은 工場에서 일하던 同僚 2名과 함께 이 道路 工事場에 差出됐다.그가 가다 서다를 反復하는 列車를 타고 10餘日 만에 現場에 到着했을 때 그가 所屬된 中隊는 100名 庭園 中 33名만 남아 있었다. 자고 나면 逃走者가 續出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눈이 휑하게 들어간 채로 넋이 나간 表情들이었다.냉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흙甓돌로 쌓은 臨時 宿所에서 잠이 들자마자 氣象소리가 울렸다. 그날부터 그는 새벽 5時30分에 일을 始作해 저녁 6時까지 흙 麻袋를 날랐다. 이틀에 한 番씩은 夜間作業이라며 1時까지 일했다.100㎏짜리 麻袋에 흙을 담은 뒤 두 名이 번쩍 들어 金 氏의 어깨에 얹어주면 數十m 떨어진 道路까지 가서 퍼부어야 했다. 흙이 쌓이면 큰 망치를 들고 땅을 내리쳐 다졌다.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시키면서도 하루 食事 定量은 400g에 不過했다. 집에서 옥수수를 볶아 넣어간 주머니는 한 알, 한 알 세면서 먹었어도 今方 바닥이 났다.겨울에는 추워서 苦生했고, 여름엔 모기에 뜯기며 더워서 苦生했다. 샤워室도 없었다. 며칠에 한 番씩 어둑어둑해지면 隣近 貯水池에 사람들을 引率해 간 뒤 씻으라고 했다. 이쪽엔 女性들이, 건너便엔 男子들이 團體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金 氏는 너무 굶주리면 부끄러움 따위는 없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湖水에 들어간 누구나 머리 속에 먹을 생각만 가득할 뿐 異性에 對해 關心도 없었다.공사장엔 事故도 잦았다. 그의 作業場에서도 한꺼번에 7名이 車에 치여 죽은 大型 事故도 發生했다. 實際 北韓은 나중에 道路 建設過程에 수많은 人命 被害가 났음을 直間接으로 認定하기도 했다.그래도 무서워 도망갈 생각도 못했다. 허약해져 겨우 걸을 수 있는 狀態에서 逃亡을 쳐봐야 얼마 안 돼 잡힐 것이다. 指揮官들이 사람들 앞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매 맞는 逃走者들의 悲鳴이 道路 工事長 어디에서나 每日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살려면 逃亡쳐야 했다. 얼마쯤 지나니 그와 함께 差出돼 온 工場 同僚 2名도 보이지 않았다. 逃走에 成功한 것이다.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며 恨歎했다. “난 왜 태어났을까?”다행히 그는 2個月 뒤 中隊 食堂 食母로 發令이 났다. 食母들度 다 달아나니 밥을 지을 女性이 不足했던 것이다.밥을 짓는 일이다보니 배고픔에선 一旦 벗어났다. 今方 怨望하던 마음이 달라졌다.“집에서 배곯는 것보다 여기서 일하는 게 차라리 낫구나.”● 1990年代 故鄕金 氏는 태어나서 배고픈 記憶밖에 없었다. 그는 13살 때부터 故鄕에서 빵 장사를 始作했다. 빵을 만드는 집에서 외상으로 받아와 팔면 얼마쯤 남았다. 그것으로 自己 배를 채우기도 버거웠지만 學校를 다니며 굶주리는 것보단 나았다.그가 태어난 故鄕은 豆滿江 國境都市인 咸北 會寧 市內에서 걸어서 3時間쯤 떨어진 農村마을이었다. 脫北民들에게 惡名 높은 ‘錢거리敎化所’가 걸어서 3時間쯤 距離에 있었다.김 氏가 1984年에 4男妹 中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鑛山 鑛夫였다. 金 氏가 人民學校 4學年 때인 1995年 苦難의 行軍이 本格的으로 始作됐다. 家庭의 生計는 어머니가 책임졌다. 山에 올라가 밭을 일구어 農事를 지었지만, 折半은 도둑을 맞고 折半만 겨우 건져오면 多幸이었다. 집도 세 番이나 도둑을 맞아 건질 것이 없었다.그는 學校에 가면 12個 科目을 空冊 한 卷에 받아 적었다. 冊 살 돈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學校에 나오면 多幸이었다. 學校에 오는 學生들은 갈수록 줄어들었다.“잊을 수 없는 記憶이 있어요. 한 番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아버지가 쥐가 들어온 줄 알고 어둠 속에 파리채를 들고 나가 휘둘렀는데, 燈盞을 켜고 보니 앞집에 살던 6살짜리 아이가 들어와 밥을 훔쳐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營養失調가 甚하니까 울지도 못하는 겁니다. 감자밥이라도 먹여서 보냈는데 이틀 뒤에 죽었어요.”김 氏의 집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多幸인 것은 아버지가 故鄕이 中國이어서 延邊에 親戚들이 살았다는 것이다.가난한 집안 形便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는 1995年 몰래 中國에 건너가 親戚들의 도움을 받아서 왔다. 그러나 그걸로 밀린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1997년 아버지가 다시 中國에 들어가려 할 때 13살 金 氏는 無條件 아버지와 함께 中國으로 가겠다고 졸랐다. 中國에 가면 며칠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딸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豆滿江을 몰래 넘었다. 中國에 가서 닷 새 동안 머물며 난生 처음 幸福하게 살았다. 延邊에 사는 親戚들은 가난했다. 金 氏 父女가 나올 때 170위안을 모아 주었는데, 그걸 갖고 오다 그만 國境警備隊에 逮捕됐다. 多幸히 金 氏의 機智로 20위안만 빼앗기고 150위안은 숨길 수 있었다. 安全部에선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祖國으로 돌아왔다며 큰 處罰을 하지 않았다. 150위안으로 빚을 갚고 나니 딱 한 끼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시간은 흘러 그는 2000年 中學校를 卒業해 시멘트工場 勞動者로 發令이 났다. 工場에 가자마자 高速道路 建設現場에 끌려가 6個月 동안 苦生을 했고, 다시 工場으로 돌아왔다.● 2005年 豆滿江金 氏는 工場에서 21歲 때인 2005年까지 일하다가 다시 中國으로 몰래 건너갔다. 그가 中國에 간 動機는 어머니에게 齒牙를 해줄 돈을 求하기 위해서였다.너무나 苦生을 한 어머니는 이가 하나둘 빠지다가 이때쯤 남은 이가 없게 됐다. 飮食을 씹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그는 추운 겨울 豆滿江을 넘었다.12월 말이 돼도 豆滿江은 가운데가 얼지 않았다. 몰래 江을 넘던 그는 中間쯤에서 물에 풍덩 빠졌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옷이 瞬息間에 얼어붙었다. 關節을 굽힐 수가 없으니 펭귄처럼 엉큼엉큼 움직여 겨우 中國에 갔다.그렇게 찾아갔지만 中國 親戚들에게선 도움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다시 나오다가 또 江에 빠졌다. 기어서 北韓 기슭에 到着했지만 지쳐서 얼음판 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침 巡察을 돌던 警備隊가 그를 發見하고 업고 갔다. 北韓에서 發見됐기에 큰 處罰을 면할 수 있었지만, 얻은 所得은 없었다.집에서 얼마쯤 있다가 다시 中國으로 넘어갔다. 이番엔 中國에서 就職해 直接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집에는 장사를 간다고 말하고 떠났다. 中國에서 일자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때는 延邊에서 脫北民들에 對한 檢擧旋風이 불고 있었고, 더구나 2008年 베이징 올림픽까지 앞둔 터라 境界도 森嚴했다.그렇게 中國에서 제대로 된 職業도 못 求하고 親戚집을 轉轉하는 가운데 歲月이 하염없이 흘렀다. 親戚의 親舊 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봐주며 몇 달을 보내고 있을 때, 그 언니가 “그러지 말고 男親이라도 사귀라”며 한 男子를 紹介해주었다.그 男子는 自己 事務室에 와서 밥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男子 事務室에는 컴퓨터 여러 臺가 있었고 職員 여러 名이 常住했다. 드디어 컴퓨터 業種에 從事하는 男子를 만나 中國에서 자리를 잡나 싶어 기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事務室에 公安이 들이닥쳤다.그는 뒷門으로 도망쳐 逮捕되진 않았지만, 男親을 包含해 事務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男親의 職業은 보이스피싱犯이었다. 그는 그때 처음 보이스피싱이라는 詐欺 手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金 氏는 中國에 있을 때 韓國에 가려는 생각을 全혀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齒牙를 해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公安의 追跡을 받는 막다른 골목에 빠지니 다른 方法이 없었다. 그는 親舊 언니가 紹介한 韓國의 脫北民 모임 사이트에 接續해 여기저기 도움 要請을 보냈다. 그렇게 連絡한지 사흘 만에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브로커의 指示에 따라 다른 脫北民 16名과 함께 韓國에 到着했던 때가 2009年 5月이었다. ● 2009年 平澤仁川空港에 내릴 때 그는 많이 무서웠다. 引率者가 너무 무섭게 統制하다보니 “내가 拉致당해 가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있었고, 空港에 내려서 記者會見을 할까봐 걱정도 됐다. 그때까지 그는 韓國에 가면 無條件 記者들이 달라붙어 물어보는 줄 알았다. 그러면 故鄕에 있는 家族이 被害를 입을 것이라 憂慮했지만, 多幸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합동조사는 比較的 쉽게 끝났다. 그는 故鄕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줄 몰랐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調査는 比較的 빠르게 進行된다.2009년은 脫北民들이 가장 많이 韓國에 入國한 해이다.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移動이 遮斷됐던 脫北民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그해에만 3000名 가까이 入國했다. 그가 하나院에 갔을 때 같은 氣에 女性만 無慮 245名이나 됐다. 하나院에선 每달 4萬 원씩 用돈을 주었는데, 그는 社會에 나가면 돈이 없을 것을 憂慮해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齷齪같이 모았다.그해 9月 그는 하나圓을 나와 平澤에 定着했다. 먼지가 뽀얀 賃貸住宅을 淸掃하고 있을 때 브로커가 맨 먼저 찾아왔다. 그래도 그 브로커는 착한 사람이었다.초기 定着金으로 300萬 원이 나왔는데, 中國에서 맺은 브로커 費用 契約이 300萬 원이었다. 브로커는 “내가 다 가져가면 먹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며 280萬 원만 받아갔다.20만 원으로 그의 첫 韓國 定着이 始作됐다. 돈이 없어 初期 3個月은 먼저 韓國에 온 親舊가 준 옷을 입고 지냈다. 나흘 만에 그는 벼룩市場을 뒤져 아르바이트 자리를 求했다.휴대전화 部品에 땜을 하는 作業이었는데,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今方 適應했다. 그런데 그 일자리에서도 텃勢가 장난이 아니었다. “新入이 너무 빨리 컨베이어에 섰다”며 每日같이 온갖 驅迫을 하는 한 中年 女性 때문에 6個月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컴퓨터 學院을 다니며 엑셀 資格證을 따고 한 會社 經理로 入社했는데 이곳에서도 3個月을 버티지 못했다. 用語도 잘 모르는 그에게 山더미 같은 일감을 들이밀며 無作定 魂을 내는 部長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職場 經理가 每日 같이 散策路에 나와 우는 그에게 “이곳에서 버틴 사람이 없다”고 슬그머니 귀띔을 해주었다. 結局 그 일도 3個月 뒤 그만두었다.일을 그만둘 때마다 앞길이 寞寞했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선 13살 때 빵을 팔려 다니던 일, 16살 때 흙 麻袋를 메고 달리던 時節이 떠올랐다. ● 2024年 醴泉어느덧 14年이 흘렀다. 金 氏는 安東에 있는 慶北道廳에서 걸어서 10分 距離에 있는 醴泉郡의 한 거리 都心에 皮膚 管理室을 運營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서비스를 한다고 所聞이 나 顧客들도 많아졌다.그는 이제 뷰티 專門家로서 韓國 社會에 堂堂히 자리 잡았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2011年 結婚해 家庭을 이루고 오누이를 낳아 키우던 專業主婦 時節도 있었지만, 어느 瞬間 집에서 마냥 놀고만 있는 것도 마음이 便치 않았다. 平生을 할 수 있는 職業을 搜所聞하다가 皮膚 美容을 選擇했고, 已往 始作하려면 제대로 배우고 始作하겠다는 決心으로 2017年부터 4年制 大學 課程을 마쳤다. 卒業 直後 皮膚管理室을 연 뒤에도 2年制 碩士課程까지 내처 마쳤다. 碩士課程을 마칠 때는 每週 3日을 往復 3時間씩 車를 몰아 授業을 듣고 왔다.“피부미용을 하겠다고 決心하고 5年 동안은 하루도 休息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每日 9時에 出勤해 밤 11時까지 일했어요. 그렇게 熱心히 살아 皮膚 管理室을 열면서 받았던 貸出도 이미 다 갚았습니다. 요즘은 周邊에서 하도 말려서 日曜日엔 가끔 쉬긴 합니다.”서비스직에 從事하는 脫北民들은 普通 自身의 身分을 숨긴다. “北에서 온 사람이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냐”는 偏見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을 始作한 뒤로 自身의 故鄕을 숨긴 적이 없다. “처음엔 저도 無視를 當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잘해주려 努力하니 어느 瞬間부터 顧客들도 認定하고, 다른 顧客을 紹介해 데려오기도 합니다. 韓國은 努力한 것만큼 이룰 수 있는 社會라서 滿足합니다.”그는 요즘 사이버大를 또 다니고 있다. 社會福祉士 資格證을 따기 위해서다.“사회가 高齡化되면서 高齡 人口가 늘고 있고, 老年에도 自己 管理의 重要性을 느끼는 분들이 漸漸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老人 皮膚 美容을 專門으로 하려는데, 그러자면 社會福祉度 꼭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그가 老人 皮膚 美容을 專門으로 하려는 것은 單純히 市場이 擴大돼서만은 아니다.“북에 사시던 父母님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돈을 벌어 어머니에게 齒牙를 해드리고, 맛있는 飮食을 社드리려 脫北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제 마음 속에 平生의 恨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父母님께 하지 못한 孝道를 이제 父母님 또래의 어르신들에게 하고 싶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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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濟州島에 뿌리 내린 北韓 새宅…‘伏羲네農場’ 김복희 代表의 所願[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濟州島는 우리나라에서 第一 처음 颱風을 맞는 곳이다. 濟州 사람들에게 이곳에서도 가장 바람이 센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躊躇없이 南西쪽 松嶽山과 山房山 아래에 位置한 大正과 安德面을 꼽는다.몇 年에 한 番 큰 颱風이 오면 숱한 나무들이 꺾여 쓰러지는 이곳 山房山 아래에 한 脫北 女性이 꿈을 꾸고 살고 있다.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안덕면에서 柑橘農場人 ‘伏羲네農場’을 運營하는 김복희 氏는 1978年 南浦에서 태어나 2018年 韓國에 定着했다. 濟州島 土박이인 男便을 만나 2020年 濟州로 옮겨와 現在 4000坪 規模의 柑橘農場을 運營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始作에 不過하다.“저는 잠잘 때도 늘 꿈을 꿉니다. 머리 속에 앞으로 해야 할 일만 가득한 것 같아요. 親舊도 안 만나고 놀려 다닐 時間도 없습니다. 돈을 벌면 모두 植物과 裝備를 사는데 씁니다.”제주 定着 3年 만에 金 氏는 이미 柑橘 栽培를 위한 一般 技術을 모두 習得했고 造景樹 事業도 성공시켰다. 周邊에서 모두 “橘 農事나 잘 짓지 뭘 엉뚱한 일을 벌이냐”고 할 때 그는 決心을 굽히지 않았고, 只今은 조경수 販賣로만 一般 農家의 所得이 나온다. “뭘 몰라서 그런다”고 하던 周邊의 視線은 이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머리가 참 좋다”라는 感歎으로 變했다.“저는 5個年 計劃이 있어요. 伏羲네綜合테마農場을 만들 겁니다. 山房山에 놀려오면 꼭 들리게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해요. 只今의 橘 農場은 누구나 無料로 와서 돌아볼 수 있고, 實費로 과일을 따는 觀光體驗農場으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이 周邊에 누구나 와서 寫眞을 남기고 싶은 예쁜 椰子樹 숲을 만들고요, 동물농장度 만들 겁니다. 그러면 雅淡한 돌담을 두른 民泊집도 있어야겠죠. 그 집은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庭園으로 둘러싸게 될 겁니다. 이곳을 머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름다운 庭園과 果樹園은 濟州에 와서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어린 時節 머리 속 어딘가에 貯藏된 아득히 먼 追憶이기도 하다.● 平凡했던 學窓時節金 氏가 태어난 故鄕은 悠悠히 흐르는 大同江 옆에 복숭아꽃, 살구꽃, 沙果꽃이 滿發한 마을이었다.부지런한 어머니와 中國에 있는 아버지 親戚들의 도움 德分에 兄弟가 여럿이었어도 배고픔을 몰랐다. 學窓時節 金 氏는 놀기를 좋아하고 工夫엔 큰 關心이 없었던 學生이었다. 1994年 中學校를 卒業하게 되자 아버지는 軍에 入隊하라고 勸했다. 軍에 나가 勞動黨에 入黨해야 出身成分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그의 父親은 中國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변대학까지 卒業한 엘리트였지만, 1960年代 北韓으로 넘어와 定着했다. 그러나 出身成分 때문에 勞動黨員이 될 수가 없었다.아버지는 自身의 굴레를 子息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理由 때문에 金 氏의 두 오빠는 卒業과 同時에 躊躇 없이 軍에 나갔고, 언니도 銃을 메는 保衛隊에 入隊했다.김 氏는 軍에 나가 靑春을 虛費하고 싶지 않았다. 軍隊에 가지 않으면 社會에 進出해야 했다.북한 當局이 金 氏에게 任命한 職場은 한 聯合企業所의 旋盤工이었다. 막상 가서 일하고 보니 그곳도 진저리나게 싫은 일터였다. 뜨겁게 加熱된 쇳밥이 얼굴에 튀어 오르고, 精神을 集中하지 않으면 선반에 말려들어가 身體가 잘리는 事故가 隨時로 發生했다.그가 社會에 나갔던 1994年을 起點으로 北韓은 苦難의 行軍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저기서 配給을 못 받았다는 아우聲이 터지더니 及其也 1995年엔 金 氏의 職場에도 配給이 끊겼다.직장에선 어린 勞動者들을 選拔해 西海 바다에 조개잡이를 내보냈다. 特히 어린 女性 職員들이 大擧 拔擢됐는데, 金 氏도 17歲에 조개잡이 兆에 差出돼 나갔다.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으면 먹을 것은 주기 때문에 家庭의 食糧 負擔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地獄의 조개잡이조개잡이는 큰 배에 50~60名을 태우고 나가 進行했다. 바다로 한동안 달려 어디인가 碇泊하면 썰물 때 물이 빠져 배가 갯벌 위에 올라앉게 된다.그러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갯벌을 熱心히 波高 大蛤이나 百合과 같은 조개를 洋동이에 주워 담는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시 배에 올라간다. 이 生活이 3個月이나 反復됐다. 조개를 판 돈은 모두 當局에서 걷어갔다. 석 달을 作業했지만 月給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奴隸 生活이었다.“그때는 正말 地獄이었어요. 여름에 나갔는데 석 달 동안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沐浴을 하지도 못하고 소금에 쩐 作業服을 그대로 입고 살아야 했습니다. 추운 밤에도 물이 빠졌다고 추운 갯벌에 내몰았어요. 한 배에서 男女가 함께 生活하는데, 化粧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病이 나도 治療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김 氏가 北韓을 떠올리면 가장 몸서리치게 記憶되는 惡夢이다. 金 氏는 멀미를 甚하게 해 물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악몽 같은 조개잡이 動員을 마치고 돌아오니 工場에 出勤하는 勞動者들이 顯著히 줄어들어 있었다. 配給을 받지 못하게 되니 모두 場마당에서 장사를 하기 始作한 것이다.그즈음 집안 形便도 어려워졌다. 金 氏도 뭔가 집안에 도움이 될 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지는 못했다. 場마당은 밑천도 經驗도 없는 17歲 少女가 뛰어들기 너무 危險한 곳이기도 했다.김 氏는 조개를 잡아 팔면 食糧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期待를 품었다. 結婚한 지 얼마 안 된 언니도 갓난아이를 父母에게 맡기고 동생과 함께 西海바다로 向했다.1995년 12月 두 姊妹는 長靴도 없어 맨발로 살얼음이 낀 갯벌에 뛰어들었다. 배가 없으니 海邊에서 조개를 캘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收穫은 神通치 않았다. 周圍를 돌아보면 굶주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다에 나와 조개를 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戰爭터였다.20일 남짓 바다에서 헤맸지만 벌어들인 밀가루는 2~3㎏ 밖에 안 됐다. 金 氏 姊妹는 다시 집으로 向했다. 돈이 없어 추운 날에 車도 잡아타지 못하고 하루 終日 걸어와야 했던 일도 金 氏에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追憶이다.봄이 되자 金 氏는 隣近 밭에서 시래기와 이삭줍기를 하면서 끼니를 維持해야 했다. 山을 開墾해 農事를 지을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種子를 살 돈도 없었다.이런 일을 겪으며 金 氏는 더는 北韓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1996年 겨울 金 氏는 家族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北部 國境으로 向하는 列車에 올랐다.● 銅像을 입고 脫北金 氏는 中學校 卒業班 때 中國에 가본 일이 있었다. 苦難의 行軍 以前부터 아버지는 몇 年에 한 番씩 兄弟들이 살고 있는 中國으로 가서 도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合法的인 證明書를 떼고 가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豆滿江을 도강해 갔다. 金 氏의 姑母가 사는 집과 四寸오빠가 사는 아파트는 豆滿江 건너便 北韓 쪽에서 빤히 바라보였다. 1990年代 中盤까진 豆滿江에 國境警備隊가 거의 없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쉽게 江을 건널 수 있었다.김 씨가 컸을 때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咸北 穩城으로 가 中國 姑母네 집으로 몰래 넘어갔다. 아버지는 中國에 다녀올 때마다 그곳이 너무 빠르게 發展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金 氏가 直接 가보니 次元이 다른 世界였다. 食糧과 고기, 間食, 과일이 豐富했고, 各種 채널을 통해 신기로운 世上을 接할 수 있었다. 中國을 한 番 다녀온 北韓 사람들은 絶對로 그 經驗을 잊지 못한다.중학교 卒業 後 地獄 같은 삶을 2年이나 살다보니 金 氏는 中國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懇切했다. 떠날 때는 脫北을 決心하진 않았다. 中國에서 도움을 받고 오자는 마음이었다.집에 말을 하지 못하니 旅費를 받을 순 없었다. 代身 그는 아버지가 中國에서 가져온 예쁜 옷들을 잔뜩 껴입고 떠났다. 가다가 옷을 팔면, 먹을 것은 살 수 있다고 打算한 것이다.그러나 이 計劃이 誤算이었음은 얼마 안 돼 알게 됐다. 南浦에서 穩城까지 無慮 한 달이나 걸렸던 것이다. 汽車는 며칠에 한 番씩 다녔고, 停電 때문에 가다 서다를 反復했다. 汽車 天井에까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매달렸다. 허허벌판에 汽車가 서면 옷을 팔 곳도 없었다. 汽車가 서면 周邊 農村 洞네에서 이때라 생각하고 各種 飮食을 만들어 달려 나와 乘客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農村 사람들에겐 옷은 奢侈品이었다. 金 氏는 눈물을 머금고 터무니없이 싼 값에 옷을 넘기고 먹을 것을 사먹었는데 며칠도 되지 않아 팔 옷도 떨어졌다.이때부터 그는 꽃제비가 됐다. 어린 少女라고 불쌍하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다. 발 디딜 틈도 없는 汽車 안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잠을 잤지만,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特히 발이 얼어들어가 銅像을 입었다.그 한 달의 旅程은 金 氏에게 또 하나의 惡夢이었다. 마침내 咸北 온聖域에 내렸을 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어느 農家의 나무 울바자 밑에서 어두울 때까지 기다렸는데 銅像을 입은 다리는 더 얼어 感覺이 없었다.그 다리를 끌고 그는 豆滿江으로 나갔다. 그리고 無酌定 기어가기 始作했다. 몇 年 前 아버지와 江을 건널 때도 밤에 江에 나가 기어갔다. 그가 겨울에 떠난 理由도, 只今쯤 떠나면 얼어붙은 江을 기어가기 쉬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두만강을 건너 姑母가 사는 마을에 들어갔지만, 쉽게 찾을 것이라 생각했던 姑母의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늘어선 洞네를 서너 時間 헤맨 끝에야 마침내 姑母의 집을 찾았다. 갑자기 나타난 조카의 行色에 姑母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움직일 수도 없어 大小便도 받아내야 할 狀態였다. 그러나 가지를 다린 물에 다리를 씻으며 各種 藥을 쓰고 나니 한 달이 되자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는 1997年 설날을 姑母집에서 맞았다. 처음으로 家族과 떨어져 보낸 슬픈 설날이었다.● 中國에서의 삶金 氏가 回復되자 姑母는 “朝鮮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그런 곳에 너를 다시 내보낼 수가 없다”고 집에 돌아가는 것을 頑强하게 反對했다. 하지만 北韓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나 中國 國境 統制도 强化됐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고모는 그를 하얼빈에 사는 親戚집에 다시 보냈다. 그곳에서 金 氏는 親戚집 아이를 봐주는 保姆로 3年을 지냈다.하지만 아무리 親戚이라도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데는 限界가 있었다. 結局 그는 22살 때인 2000年 親戚들의 紹介로 朝鮮族 男性과 結婚했다. 男子 쪽에서 合法的인 虎口(身分證明書)를 僞造로 만들어줘 北送될 걱정도 덜었다. 그해 딸도 태어났다. 나가서 일을 해야 했기에 中國語도 熱心히 배웠다. 周邊 사람들이 다 한족이라 言語 實力도 쑥쑥 늘어 몇 年 지나서 어디에 就職을 해도 疑心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中國에서 2018年까지 無慮 21年을 살았다.어쩔 수 없이 選擇한 結婚生活은 幸福하지 않았다. 일當直 勞動을 하는 男便이 워낙 말이 없어 둘 사이 疏通이 잘 되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갈 곳도 없어 모든 不滿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했다. 그는 漸漸 더 일에 沒頭하기 始作했다. 中國에서 그는 한 職場에 就職해 10年 동안 매니저로 살기도 했고, 食堂을 차려 運營하기도 했다.1년에 많이 쉬어야 1週日을 넘긴 적이 없을 程度로 熱心히 일만 하고 살다보니 돈도 적잖게 벌었다. 勿論 그래봐야 한족 洞네의 平均 水準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支障이 없었다.● 짐을 가장 많이 갖고 온 脫北者어느덧 딸이 17살이 돼 學校를 卒業할 나이가 됐다. 그런데 딸이 韓國으로 留學을 가겠다고 決定했다. 金 氏는 工夫를 더 할 수 없었던 自身의 處地를 悲觀했던 터라 더 工夫하겠다고 하는 딸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中國에서 버는 돈으로는 딸의 學費를 堪當하기 어려웠다. 金 氏는 決斷을 내렸다.“내가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 딸의 뒷바라지를 하자. 딸 때문에 억지로 살았는데, 딸이 中國을 뜨면 이걸 機會로 希望이 없는 이 삶도 淸算하자.”2017년 末 金 氏는 韓國 領事館에 電話를 걸었다.“저는 事實 脫北者인데 韓國에 가도 되나요? 韓國에 가서 北韓말을 하게 되면 間諜으로 잡힐지 몰라서요.”그는 그때까지 韓國에 數萬 名의 脫北者가 사는 것도 몰랐다.대사관에선 “當然히 韓國에 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對答했다. 딸이 서울에 들어온 지 1週日 뒤 金 氏도 飛行機票를 끊고 하얼빈 空港을 떠나 仁川空港에 내렸다. 中國 戶口가 있기에 飛行機를 타고 直接 오는 것이 可能했던 것이다. 韓國으로 떠날 때 金 氏는 “저기는 物價가 비싸니 아무 것도 사지 말고 여기서 다 챙겨가자”고 생각했다. 仁川空港에 내렸을 때 그는 커다란 캐리어를 서너 個 갖고 내렸는데 마중 나온 要員들이 “이렇게 짐을 많이 갖고 온 脫北者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김 씨를 태운 버스는 合同調査센터에 들어갔는데, 모든 物品은 勿論 携帶電話도 押收된 채 獨房에 들어갔다. 金 氏는 韓國에 가면 調査를 받는다는 事實을 몰라 逮捕된 줄로만 알았다. 며칠 동안 金 氏는 “왜 이런 곳에 잡아넣지? 내 人生은 여기서 끝나겠구나. 바보처럼 내가 발등을 스스로 찍었구나”하는 생각에 끝없이 홀로 自責했다. 차츰 時間이 지나면서 그는 이것이 通常的인 過程임을 알았다.하나원을 거쳐 金 氏는 大韓民國 國民으로 第2의 人生을 살게 됐다. 幸運도 따랐다. 以前까진 中國에서 10年 以上 산 脫北民에겐 집을 주지 않았는데, 그가 올 즈음엔 法이 바뀌어 賃貸住宅을 주었다. 2018年 3月 金 氏는 仁川에 집을 받고 韓國 社會에 첫발을 내디뎠다.● 濟州島에 새 둥지를 틀다사회에 나오자마자 金 氏는 한 食堂에 就職해 돈을 벌기 始作했다. 일도 쉽지 않았지만, 韓國語 疏通도 어려웠다. 中國의 한족 洞네에서 20年 넘게 살다보니 韓國語도 많이 서툴렀다.중국에서 새벽 2時에 出勤하며 食堂까지 運營했기에 어느 程度 自身이 있었지만, 韓國 食堂 서빙의 强度는 훨씬 더 높았다.돈을 아끼려고 겨울에 暖房도 틀지 않고 살았지만 남는 돈이 없었다.한국 社會에 어느 程度 눈을 뜨자 知人이 東灘에 있는 골프場 食堂이 더 좋다고 紹介해주었다. 그 食堂에서 그는 먹고 자면서 熱心히 일했다. 쉬는 날엔 다른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食堂일을 繼續하니 다리가 끊어질 程度로 아파오기 始作했다.“내가 韓國에서 죽을 때까지 이렇게 虛妄하게 살다 죽는 건 아닐까”이렇게 懷疑하던 瞬間 知人이 “아직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혼자 熱心히 살기보단 서로 依支해 사는 것이 좋다”며 오래 前에 喪妻한 한 男性을 紹介해주었다.둘은 몇 달 동안 電話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男子는 서울에서 30年 가까이 살면서 海外에서 會社를 運營했는데, 코로나로 與件이 惡化돼 모든 것을 접고 父母가 사는 濟州島로 내려가 橘 農事를 하며 새롭게 살려고 決心하던 次였다. 男子의 多情多感한 風貌에도 끌렸지만, 金 氏의 마음을 무엇보다 끌어당긴 것은 ‘果樹園’이란 單語였다. 나무를 키우며 사는 삶은 金 氏의 오랜 所願이기도 했다.둘은 餘生을 함께 하자고 言約을 하고 濟州島 서귀포시 안덕면에 둥지를 틀었다.“남편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濟州島에 오자마자 그게 이뤄질 수 없는 約束임을 알았습니다. 勿論 男便은 絶對 힘든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나요. 내려와서 果樹園 整理를 하면서 돌을 옮기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男便이 참 잘해주니 힘든 것들을 잘 넘깁니다.”남편은 橘 農場에 ‘伏羲네農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金 氏는 드디어 뭔가 이룰 수 있는 目標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趣味로 始作한 造景植物 事業4000坪의 橘 밭을 가꾸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꽃과 열매솎기, 가지치기, 收穫 等의 日程이 365日 동안 쳇바퀴처럼 돌아갔다.열심히 農事일을 하는 渦中에도 예쁜 農園을 만들고 싶은 金 氏의 꿈은 지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꽃과 植物을 좋아한 그는 5日場에 가면 다른 가게에 가지 않고 植物을 파는 곳에만 가서 時間을 보냈다. 꽃나무들은 생각보다 비쌌다. 그가 植物 가게에서 웅크리고 앉으면 男便이 비싼 植物을 사서 키우는 것은 浪費라며 자꾸 잡아끌었다.그런 속에서도 그는 한라봉, 레드香, 千蕙香, 황금향 等의 橘 苗木들과 레몬나무, 낑깡나무, 金木犀, 銀木犀, 冬柏나무 等 數十 種類의 庭園樹 苗木을 사와 키우기 始作했다. 과일 밭에 四季節 꽃香氣가 퍼지기 始作했다. 金 氏의 氣分도 덩달아 좋아졌다. 周邊에서 “시골에 왔으면 農事나 잘 하지 쓸데없는데 時間을 팔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植物들이 너무 많아지자 金 氏는 昨年 10月부터 남는 植物을 인터넷에 올려 팔았다. 그런데 너무 잘 팔렸다. 理由를 알아보니, 濟州島에선 住宅이나 宿泊施設 等을 지어 許可를 받으려면 나무를 얼마 심어야 한다는 規定이 있었다. 隣近에서 建設工事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造景樹나 꽃나무를 販賣하는 곳이 周邊에 없었던 것이다.처음에 그럴 意圖가 아니었지만, 뜻밖에 趣味로 始作한 植物 栽培에서 可能性을 發見한 金 氏는 이제는 造景樹 事業에 本格的으로 뛰어들었다. 橘을 販賣한 돈보다 造景 植物을 판 輸入이 더 많아지자, 이젠 男便도 아내를 積極 應援하기 始作했다. 周邊에서 이제는 “初步農夫가 머리가 좋다”는 말이 들려오기 始作했다.“돈을 버는 것도 勿論 重要합니다. 그런데 저는 正말 植物을 가꾸고 키우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사는 濟州道 여기저기서 이 손으로 키운 植物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숲으로 成長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氣分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구슬땀을 흘리며 키운 植物이 아름다운 庭園도 만들고, 地球도 살리고 있으니 얼마나 幸福한 일입니까.”● 濟州島에 남길 삶의 痕跡造景 植物 事業을 하면서도 本業인 橘 農事도 놓치지 않고 있다. 柑橘 栽培 方法도 熱心히 배워 지난해엔 黨도 16브릭스의 高品質 柑橘을 生産하는데 成功했다. 濟州島에서 나는 平均 橘 糖度보다 2브릭스나 높았는데, 이런 優秀한 柑橘을 生産하는 農場은 많지 않다. 이런 努力을 인정받아 金 氏는 올해 ‘壯한 安德面민상’ ‘西歸浦市 市場上’을 잇따라 受賞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음 目標는 濟州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優秀한 柑橘을 生産하는 것이다.과원 周邊에 아름다운 庭園樹들을 심고, 濟州道 傳統의 雅淡한 民泊집을 갖춘 ‘伏羲네綜合테마農場’을 만들려면 아직 할 일이 泰山이다. 自然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처럼 救援을 안겨주는 農場이 그가 그리는 꿈이다.“제가 자꾸 일을 만들어서 男便도 덩달아 苦生이죠.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來年에는 더 바빠질 거니까요.”김 氏는 親舊도 만나지 않고, 놀려 다니지도 않으며 꿈을 實現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남들이 버린 家具나 家電製品을 가져다 쓰고, 옷도 거의 사지 않는다. 그렇게 아낀 돈은 모두 裝備와 植物을 사는데 쓴다.“예전에 삶의 目標가 없을 때는 ‘사람이 잘 먹고 즐기면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꿈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足跡을 濟州島에 남기고 죽는 것이 目標입니다. 언젠가 統一도 되겠죠. 그때가 되면 北韓 사람들도 濟州島로 놀려올 겁니다. 그들이 山房山 아래의 아름다운 農場이 南浦에서 온 김복희 氏가 갈 수 없는 故鄕에 對한 그리움을 품고 平生을 바쳐 가꾼 것이라고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그 꿈을 위해 오늘도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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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不惑을 맞은 ‘아버지 金正恩’에게 [鑄成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

    올해 설날은 김정은에게 例年보다 큰 意味가 있을 것 같다. 一週日 뒤면 金正恩은 滿 40歲 生日을 맞이한다. 孔子는 마흔을 世上일에 精神을 빼앗겨 判斷을 흐리는 일이 없는 ‘不惑(不惑)’의 나이라고 했지만, 그가 2500餘 年의 歲月을 지나 現代 社會에 온다면 分明 自己 말을 修正했을 것이다. 요즘은 너무나 빠르게 變하는 文明을 따라가느라 여든이 돼도 如前히 精神없이 사는 게 當然하다. 公子라고 例外일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孔子가 世上을 다니다가 北韓에 이른다면 너무 익숙한 風景들이 많아 分明 크게 반길 것 같다. 거기선 소가 밭을 갈고, 논에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손으로 雜草를 뽑는다. 女人들이 얼음을 깨고 손빨래를 하며 물동이를 이고 다닌다. 밤엔 燈盞 기름도 없어 관솔(소나무 옹이)불 아래서 옥수수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孔子가 社會主義란 요상한 이름을 對하고 갸웃거릴 순 있어도, 거기엔 分明 ‘王族’이 살고 있고 이에 反抗하면 滅門之禍를 當하는 시스템이 地球上에 唯一하게 存在해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이 金正恩이 다스리는 北韓의 現實이다. 金正恩은 이미 人生의 折半을 살았고, 子息들도 두었다. 설날에 김정은은 아버지로서 딸 주애의 未來를 생각하길 바란다. 金正恩에게도 人民을 잘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다. 가끔이긴 하지만 人民들 앞에서 自我批判을 하며 보인 눈물이 모두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金正恩 統治 12年 동안 人民들의 生活 形便은 더 어려워졌고, 스스로 門을 걸어 잠가 世界 最惡의 孤立 地域을 自請했다. 金正恩은 只今까지 自身의 安寧과 人民의 幸福이 存在하는 方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肅淸으로 統治 基盤을 鞏固히 했음에도, 如前히 ‘제로섬(Zero-Sum)’ 統治를 固執하고 있다. 내가 安全해지려면 人民의 自由와 幸福을 더 많이 뺏어야 하고, 人民이 富裕하고 幸福해지면 내가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統治의 結果로 北韓이 漸漸 破滅의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보인다. 마흔을 넘긴 김정은에게 이제 ‘윈윈’의 統治 方式을 찾아보라고 勸하고 싶다. 찾으면 方法은 分明히 있다. 한때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웃 나라들만 봐도 答을 찾을 수 있다. 中國을 보라. 거의 半世紀 前에 改革 開放으로 市場經濟를 導入했지만 共産黨은 如前히 굳건하다. 數千 年 동안 飢餓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中國 人民은 只今 배고픔이 뭔지 모르고, 外國 旅行도 마음대로 다니고 있다. 러시아를 보라. 經濟 開放은 勿論이고 多黨制까지 許容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20年 넘게 權座를 지키고 있고, 아마 죽을 때까지 大統領職을 維持할 것이다. 러시아 人民들의 삶도 北韓과 比較할 수 없을 程度로 富裕하다. 쿠바를 보라. “願하면 언제든 쿠바를 떠나라”는 政策을 維持하면서도 피델 카스트로는 半世紀를 統治했고 동생에게 權座를 물려주었다. 그 동생이 13年을 統治하다가 血統이 아닌 사람에게 權力을 물려주었지만, 悲劇的인 結末은 맞지 않았다. 社會主義가 아니더라도 權力을 維持하면서 世襲과 經濟成長을 同時에 達成한 싱가포르의 리콴유度 있다. 그 外에도 世界를 돌아보면 金正恩이 參考할 나라는 참으로 많다. 金正恩이 發想만 바꾸면 北韓에 비해 壓倒的인 經濟力을 가진 韓國도 積極 도울 것이다. 韓國은 威脅이 아니다. 南쪽의 大多數 사람들은 가난한 北韓을 먹여 살리는 責任을 떠안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南北은 얼마든지 經濟的으로 윈윈할 수 있다. 北韓이 每年 10%의 經濟成長만 이루면 人民은 ‘金正恩 萬歲’를 부를 것이다. 世界에서 가장 發達된 善戰으로 이러한 北韓의 急速한 繁榮은 오직 金正恩만 이룰 수 있다고 세뇌시킬 수도 있다. 强力한 리더십이 없으면 나라가 分斷돼 悲劇이 온다는 恐怖를 끊임없이 注入해 長期 執權에 成功한 中國과 러시아를 본받아도 된다. 그러나 經濟가 끝없이 墜落해 人民이 貧窮의 原因을 오로지 김정은 執權에서 찾게 된다면 强力한 鐵拳統治度 더는 안 먹히는 날이 온다. 이미 北韓은 臨界點으로 가고 있다. 子息을 위해 犧牲하는 것이 아버지의 美德이 아니던가. 주애에게 悲劇의 末路를 물려줄지, 밝은 未來를 물려줄지는 오로지 김정은에게 달렸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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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工場 社長이 된 北韓 女醫師… “統一乾杯酒를 만듭니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南朝鮮은 月給을 잘 줍니까?”치료하던 患者의 딸이 自身에게 脫北을 勸했을 때 김성희 氏가 했던 첫 質問이었다.환자 家族과 함께 豆滿江을 넘어 석 달 뒤 韓國에 到着한 뒤에도 金 氏는 韓國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인천공항에서 調査機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金 氏는 생각했다.“이제 拷問을 어떻게 견뎌야 하지? 除隊軍人 出身에 勞動黨員이고 醫師까지 한 나는 惡質 빨갱이라고 拷問을 더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조사기간 내내 金 氏는 언제 古文章으로 끌려갈지 두려웠다. 밥을 먹을 때도 毒藥이 들어있진 않는지 걱정했다. 健康檢診 받으러 간 날은 더욱 恐怖스러웠다. 注射藥에 毒藥을 넣어 平生 苦痛 속에 살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조사기관을 退所해 하나圓을 갈 때도 ‘여긴 새로운 形態의 監獄인가’라고 생각했다. 하나圓을 나올 땐 江原道 江陵으로 居住地를 定했다. 戰爭이 나면 얼른 배를 타고 바다로 脫出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남조선에 逃亡가면 拷問을 해 祕密을 뽑아낸 뒤 죽인다고 끝없이 注入했던 勞動黨의 洗腦는 그만큼 오래갔다.그랬던 金 氏가 只今은 “韓國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든 술을 더 많이 마시고 醉하게 만들까”를 苦悶하는 主流會社 社長으로 變身했다. 苦難과 逆境을 헤쳐 只今까지 걸어온 길은 마냥 順坦하지만은 않다.● 金泉 出身의 아버지金 氏는 1974年 咸鏡北道 豆滿江 隣近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出身成分이 좋은 집안은 아니었다.아버지의 故鄕은 慶北 金泉이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北間島로 가서 콩 農事를 짓겠다고 家族을 끌고 떠나는 바람에 中國에서 컸다. 그러다 20代 中盤인 1960年代 初盤 ‘朝鮮 사람은 朝鮮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決心해 親舊 3名과 함께 北韓으로 나왔다.아버지는 北韓에서 運轉 關聯 大學을 卒業하고, 김일성의 指示로 ‘農村機械化運動’이 벌어질 때 農村으로 自願해 進出했다. 그곳에서 土박이 女性을 만나 結婚해 家庭을 꾸렸다.남조선 出生에 中國에서 成長한 아버지는 더는 出世하지 못했다. 北韓에선 이런 사람들을 ‘動搖階層’으로 區分하고 幹部로 쓰지 않았다. 事實 아버지는 ‘童謠’라는 單語와 全혀 어울리지 않는 뚜렷한 所信의 所有者였다. 누군가 “故鄕이 南쪽으로 돼 있으면 絶對 出世할 수 없으니 故鄕을 中國으로 바꾸라”고 勸告했지만, “내가 태어난 故鄕을 어찌 바꾸겠냐”며 慶北 金泉 出生임을 堂堂하게 여겼다. 아무리 높은 幹部 앞에서도 不當한 것을 참지 못하고 直說的으로 말했다. 하지만 살면서 自己보다 훨씬 못한 幹部들의 指示를 받으며 人生이 꼬여가고, 子息들까지 自身 때문에 出世길이 막히자 漸漸 性格이 乖僻해지고 술에 依存하기 始作했다.이런 環境에서 태어난 金 氏는 자라면서 아버지보다는 두 오빠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컸다. 아래 男동생까지 합쳐 6名이나 되는 食口의 生計는 어머니 몫이었다. 咸北은 1980年代 末부터 配給을 제대로 주지 않은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山을 開墾해 밭을 만든 뒤 거기서 農事를 지었다. 콩과 옥수수를 栽培해 豆腐와 술, 엿을 만들어 팔았다. 豆腐를 만든 찌꺼기는 돼지를 먹여 키웠다. 버리는 것이 없었다.김 氏는 어렸을 때부터 밭에 가서 돼지에게 먹일 세투리(씀바귀)를 뜯어 오는 일을 맡았다. 體育을 좋아해 學校에선 跆拳道와 籠球 特技生(選手)으로 뛰었다. ● “오빠, 나 代身 工夫해”김 氏는 1991年 軍에 入隊했다. 元來는 專門學校 推薦을 받았지만, 家庭形便을 생각하니 學校에 갈 수가 없었다.김 氏의 두 오빠는 出身成分을 바꾸려면 勞動黨에 入黨을 해야 한다며 모두 學校를 卒業하자마자 軍에 갔다. 金 氏가 中學校를 卒業하고 進路를 決定해야 하는 그 해에 공교롭게 軍에 갔던 맏오빠가 除隊해 道 所在地에 있는 大學에 入學했다. 두 名의 大學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狀況인 것을 뻔히 아는 金 氏는 軍 入隊를 擇했다.군에 入隊해 가던 中 道 所在地에 列車가 한동안 멎었다. 이때 맏오빠가 汽車驛으로 찾아왔다. 그가 列車에서 내렸을 때 오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百萬 마디의 말이 눈물을 타고 땅에 흘러내렸다.열차가 떠날 때 오빠는 列車를 따라 한참을 달려오다가 자갈에 걸려 넘어졌다. 後날 집에 와보니 오빠의 손바닥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때 생긴 것이었다. 사랑하는 女同生이 오빠 때문에 大學을 抛棄하고 險한 苦生이 기다리는 軍에 가서 靑春을 바치려 決心했다는 消息을 들었을 때 오빠는 밤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열차에서 오빠가 넘어지는 모습을 봐야 했던 記憶은 金 氏의 一生에서 가장 마음 아픈 瞬間으로 남아있다. 只今도 그 瞬間만 떠오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다행인 點은 金 氏가 學校 때 體育 選手였던 點을 認定받아 軍團 體育團에서 軍 服務를 했다는 點이다. 그는 軍團 跆拳道 選手 兼 籠球 選手로 活躍했다.그가 軍 服務를 했던 1991年부터 1999年 사이는 苦難의 行軍 期間이었다. 軍團에서 營養失調 患者와 餓死者가 무리로 發生할 때였다. 그러나 體育團은 虛弱에 걸리지 않을 程度에 不過하긴 했지만, 그나마 밥은 주었다.군단 對抗 競技는 1年에 몇 次例씩 열렸다. 金 氏가 屬한 籠球팀은 軍 服務하던 8年 동안 4番 程度 優勝을 했다. 最上位級의 籠球팀이었던 것이다.원래 女性은 軍에서 5~6年만 服務하면 됐다. 하지만 1997年 김정일은 軍 兵力이 모자란다며 男性은 旣存 10年에서 13年으로 軍 服務 期間을 늘였다. 女性도 8年으로 늘었다.김 氏는 17歲에 入隊해 滿 25歲를 꽉 채우고서야 除隊證을 받았다. 軍團 體育團에서의 活躍이 認定돼 除隊할 때 그는 3年制 醫學專門學校 推薦書를 받았고 내친 김에 入學까지 成功했다.● 술을 만드는 處女醫師8年이나 工夫를 하지 않던 金 氏가 專門學校 學業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工夫했다. 出身成分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機會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의전을 卒業하면 準醫師 資格을 받았다. 北韓에선 準醫師를 噂議라고 하지만, 患者들은 醫師 先生님이라고도 한다.준의는 醫師와 看護師 中間쯤에 位置한, 이를테면 補助 醫師라고 볼 수 있는 職制다. 집집마다 찾아가 診療를 하는 往診 醫療 시스템을 標榜하는 北韓에선 醫師들이 힘들어 모든 擔當區域을 커버할 수가 없다. 그리 甚하지 않은 病은 噂議가 맡는다. 準意圖 往診을 다니고, 處方을 내줄 수 있다.2002년 金 氏는 故鄕으로 가 病院 噂議로 일했다. 그동안 두 오빠 모두 大學을 卒業해 자리를 잡았다. 大學 및 專門學校 入學率이 15~20%에 그치는 北韓 實情에서 3男妹가 모두 大學, 專門學校를 卒業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병원에 가보니 藥이 없었다. 醫師가 하는 일은 診察을 하고 處方을 떼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患者가 場마당에 가서 處方대로 中國製 藥을 사고, 다시 病院에 오면 醫師가 注射를 놔주었다.병원에 入院室이 있긴 하지만, 入院하려면 患者가 먹을 것을 모두 집에서 가져와야 했다. 겨울엔 入院室 暖爐의 땔감도 保障해야 했다. 病院은 寢牀을 빌려주고, 觀察하고, 患者가 가져온 藥을 注射하는 일만 했다.의사라고 해도 配給도, 月給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出勤하지 않으면 處罰하니 어쩔 수 없이 出勤은 해야 했다.점점 醫師들은 돈 많은 집 家庭 醫師처럼 變했다. 只今은 돈을 낼 수 있는 집에서 醫師를 부르면 찾아가 診斷을 내린 뒤, 醫師가 直接 場마당에서 藥을 求해 每日 찾아다니며 治療를 한다. 이 過程에 용하다는 所聞이 나면 저마다 該當 意思를 찾게 된다. 그러면 醫師 몸값도 높아져 잘 살 수가 있게 된다.반면 醫師를 부를 수 없는 가난한 집은 旣存처럼 病院을 찾아 處方을 받는다. 病院에서 자리를 지키는 醫師는 能力이 없어서 불려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2023年 現在의 北韓 醫療 制度의 實態다.김 氏가 噂議로 일했던 2008年까지는 醫療 制度가 위처럼 變해가는 過渡期的 段階였다. 아무리 熱心히 治療해봐야 補償도 없으니 醫師들은 往診을 나가기 싫어했다. 漸漸 金 氏에게 往診 負擔이 轉嫁되기 始作했다. 낮에는 醫師로 往診을 다니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먹고 사는 問題에 매달려야 했다. 金 氏는 名色이 醫師였지만, 退勤 뒤에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돼지를 먹일 뜨물을 걷어오는 것이 日課였다. 늦은 밤엔 團束을 避해 어머니와 함께 술을 빚었다.● 故鄕에서 받은 衝擊들의전을 卒業하고 故鄕에 온 그는 여러 番 衝擊을 받았다.첫 番째 衝擊은 11年 만에 故鄕에 오니 가까운 親舊들이 거의 다 사라진 것이다. 물어보니 中國에 시집갔다고 했다.두 番째 衝擊은 衛生檢閱을 가다가 길에서 본 女人들이었다. 北韓 當局은 數十 名의 女性들에게 手匣을 채워 거리를 行進하게 했다. 中國에 갔다 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意圖였다. 奴隸처럼 끌려 다니는 女人들을 보며 그는 같은 女性으로서 참을 수 없는 羞恥와 憤怒 한便으로는 恐怖도 느꼈다.세 番째는 往診을 갔다가 본 北送 女人이었다. 房에 들어갔을 때 그는 山 미라가 누워있는 줄 알았다. 北送돼 錢거리 收容所에서 1年을 服役하다가 죽기 直前 病保釋으로 풀려났는데, 骸骨에 눈만 붙어있는 줄 알았다. 每日 가서 樹液을 놔주었는데 한 달 뒤 또 한番 놀랐다. 미라가 女人으로 變身한 것이다. 집안 形便이 넉넉하지 않아 옥수수粥에 된醬국만 먹었는데도 놀랍게 달라졌다. 治療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衝擊의 連續이었다.북한 保衛部에서 拷問받던 日, 錢거리 收容所에서 벌어지는 차마 人間의 짓이라고 할 수 없는 虐待들…. 特히 妊娠한 女性들은 배를 걷어차 어떻게 하든 流産하게 만든다는 末에 齒를 떨었다. 錢거리에 가면 1年을 버티기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지 理解하기 어려웠다. 治療를 끝내고 얼마쯤 있다가 그 女人은 다시 中國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김 氏는 2005年 31歲에 結婚했다. 北韓 女人들은 20代 中盤에 結婚한다는 것을 勘案하면 늦은 나이였다. 男便은 除隊軍人이었고, 大學을 나왔는데 職業은 藥草 管理師였다. 每日 病院을 찾아와 告白하는 男子가 싫지는 않았다. 이듬해 딸도 태어났다.그러나 新婚生活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年 3月 山에 갔던 男便은 盜伐꾼들이 벤 나무에 깔렸다. 韓國 같으면 목숨까지 잃지 않았겠지만, 山에서 업어 내려오고 달구지에 태워 病院에 오느라 時間을 너무 遲滯하는 바람에 숨을 거두었다.졸지에 靑孀寡婦가 된 金 氏는 두 살이 된 딸을 안고 울었다.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 딸을 위해 決行한 脫北아무런 삶의 意欲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던 때 往診을 다니던 집의 딸이 그의 表情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先生님 함께 南朝鮮에 가요”라고 提案했다. 딸의 女同生이 이미 韓國에 가 있는데 어머니와 自己도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우리 어머니가 아픈데 醫師 先生님이랑 가면 治療도 해줄 수 있으니 좋잖아요. 여기에 무슨 未練이 더 있어요. 함께 가요.”김 氏는 그들과 함께 떠나기로 決心했다. 金 氏는 醫師 生活을 하면서 韓國 드라마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南朝鮮이 어떤 곳인지 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그렇게 가려고 애쓰는 곳이니 當然히 北韓보다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내 運命은 壯談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린 딸은 나처럼 살지 않겠지.”2008년 11月 金 氏는 豆滿江을 넘었다. 서울에 있는 患者의 딸이 브로커를 包攝하는 等 모든 準備를 했다.두만강을 넘을 때 萬感이 交叉했다. “故鄕을 平生 그리워하며 살던 아버지처럼 나도 平生 故鄕을 그리워하며 살아야겠구나. 果然 살아서 다시 故鄕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를 땐 울컥 했지만 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11월의 豆滿江 물은 몹시 차가웠고, 깊은 곳은 가슴까지 왔다. 두 살 남짓 딸을 木馬 태우고 비틀거리며 江을 건널 때 아이가 울까봐 第一 걱정이 됐다. 건너는 地點의 警備隊 哨所는 돈으로 買收했지만, 아이가 울면 隣近 哨所에서 軍人들이 달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딸도 危急한 瞬間임을 感知했는지 찬물에 잠겨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金 氏는 只今 생각해도 그것이 理解가 되지 않는다.강을 건너니 서울 딸이 보낸 브로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때부터 東南亞 某 國家까진 不過 20日 만에 빠르게 移動했다. 汽車를 타고 버스를 타고 中國 大陸을 橫斷하면서 金 氏는 “내가 只今까지 우물 안에 갇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중국은 停電되는 일도 없었고 어딜 가나 먹을 것이 豐富했다. 옷 사러 市場에 나가니 보지 못한 온갖 商品이 山더미처럼 쌓여있었다.‘악어강’을 넘어 간 東南亞 國家에서 3個月을 기다린 끝에 金 氏는 2009年 3月에 飛行機를 타고 韓國으로 왔다. 韓國에 와선 拷問을 받을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調査機關에 들어갔을 때 “當然히 딸과 나는 따로 가두고 審問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딸도 함께 지내게 했다.“남조선은 고마운 일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自身을 보고 微笑를 지어주는 調査官들의 웃음이 거짓이 아닌 眞心이었음을 그는 韓國 社會에 나와서야 알았다.강릉에서 만난 첫 身邊保護 擔當官은 女刑事였는데, 私心없이 너무나 親切하게 잘 對해주었다. 女刑事 德分에 韓國 社會에 對해 많이 알게 되고, 마음도 열게 됐다.● 忠北 陰城에 자리잡다강릉에선 3個月밖에 살지 못했다. 딸이 問題였다. 食堂 補助로 첫 職業을 얻었는데 어린이집은 일찍 門을 닫았다. 아이를 데려와 食堂 구석에 앉히고 일을 하면서 늘 마음이 내려가지 않았다.이때 忠北 陰城에 사는 동생이 같이 살자고 提案했다. 北韓 한 洞네에서 컸던 3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가 故鄕에 왔을 때는 中國에 가서 없었다. 金 氏가 中國에서 韓國으로 오는 過程에 한 一行과 合勢했는데, 거기서 동생을 만났다. 몇 年 동안 동생은 中國에서 結婚해서 아들을 낳고 살다가 뒤늦게 韓國으로 떠난 것이다.음성의 한 産業團地에서 일하는 동생은 “우리 둘이 같이 살면 아이를 번갈아가며 볼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했고, 그 말에 金 氏는 선뜻 짐을 싸고 音聲에 왔다. 工場에서 일하니 退勤 時間이 있어 아이를 돌보긴 좋았다.동생에겐 中國에 남겨둔 아들이 있었는데, 金 氏의 딸과 同甲이었다. 둘은 돈을 벌어 第一 먼저 아들을 데려왔다. 15坪짜리 집에서 두 家族의 同居가 始作됐다. 나중에 金 氏가 집을 받아 分家하려 하니 이미 男妹처럼 살던 아이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 亂離였다.그래서 조금 더 큰 18坪 아파트로 移徙가 房 하나씩 쓰면서 共同住宅처럼 살기 始作했는데, 只今까지 13年 동안 이렇게 살고 있다. 아이들은 커서 高等學校 2學年이 됐다. 동생 아들은 서울의 한 代案學校에 入學했는데 얼마 前 女子親舊가 생겼다고 한다. 딸이 이 消息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진짜 祝賀해. 女親한테서 머리털 뽑히지 않으려면 正말 잘해야 해.”김 氏가 創業한 뒤 동생도 함께 옮겨왔다. 只今도 둘은 같은 會社에서 함께 會社를 키워가고 있다.● “내가 술을 만들어 팔자”음성에 와서 金 氏는 自動車部品會社에서 일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創業을 하겠다는 決心을 버리지 않았다. 週末마다 創業敎育을 받으러 가서 많은 職業을 알아봤지만 音聲이란 地域에서 土着民들과 競爭해선 勝算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술 工場을 만드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본 것이 술독이었고, 脫北하기 前까지 했던 것이 술을 만드는 일이었다. 脫北民들 中에 술을 만들어 成功한 사람이 있는지 調査해보니 없었다.“그래, 그럼 내가 술을 한番 만들어보자.”하지만 決心에서 實行까진 꽤 오랜 時間이 걸렸다. 韓國에선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술 工場에 就職하려 했지만 女職員을 받지 않아 成功하지 못했다.김 氏는 집에 술독을 들여놓고 北에서 만들던 方式으로 繼續 試驗 製造를 해봤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술 빚는 方法은 金 氏의 집에서 3代째 내려오는 方式이었다.김 氏의 外家는 나름 地域에서 오래 산 土着民이었다. 다른 北韓 家庭은 工場에서 만든 술로 祭祀를 했지만, 金 氏 外家는 祭祀술은 꼭 집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傳統을 固守했다. 그 집에서 자란 어머니가 祭祀술을 만드는 方法을 傳受받았다. 엄마가 만든 술은 술맛이 좋기로 有名해 만들기만 하면 洞네에서 부리나케 팔렸다. 그 方法을 金 氏가 배운 것이다. 술 工場으로 目標를 세운 金 氏는 차곡차곡 準備를 하기 始作했다.2016년 사이버大에 入學해 經營學을 專攻했다. 술 工場을 만드려니 資格證들도 많이 必要했다. 韓國에서 술을 만들려면 술 種類마다 資格證이 다 달랐다. 알코올이 나오게 醱酵하면 濁酒, 濁酒에서 앙금을 가라앉힌 맑은 술은 藥酒, 찌꺼기를 짜서 蒸溜하면 蒸溜酒, 藥酒와 蒸溜酒를 섞으면 其他 主流에 屬했는데 各各의 免許가 다 달랐다.열심히 努力해 술 專門家를 찾긴 했지만 免許를 따려면 400萬 원씩 달라고 했다. 4個를 따는데 1600萬 원이 들었는데, 創業資金을 억척스럽게 모으던 金 氏에겐 如干 큰 돈이 아니었다.이럴 바엔 내가 眞짜로 工夫해 資格證을 따겠다고 생각해 서울의 家釀酒硏究所에 登錄해 工夫를 始作했다. 部品工場에서 退勤해 두 時間 넘게 運轉해 서울에 가서 7時 半부터 10時까지 授業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12時가 넘었다. 그리고 아침 6時 半에 다시 出勤길에 나섰다. 이런 生活이 每週 2回씩 反復됐다.그는 끝내 술 製造 免許 4個를 따는데 成功했다. 그리고 2019年 마침내 建物을 賃貸해 술 工場을 만들었다. 韓國에 온지 10年 만에 目標를 이룬 것이다. 洞네의 宗親會 會長이 北에서 와서 딸을 키우며 힘들게 사는 그를 눈여겨봤다가 自身의 建物을 싸게 빌려주었다.건물을 술 工場으로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專門 施工業體를 부르려니 너무 비쌌다. 그래서 直接 에폭시 時空을 배워 바닥부터 깔았다. 어린 딸도 學校에서 돌아오면 함께 엄마를 도왔다. 바닥을 漆하고 天井을 修理하고, 蒸溜器와 醱酵槽 等 設備를 사서 들여오는 等 갖은 努力 끝에 2019年 4月 마침내 첫 材料를 醱酵組에 채웠다. 이것을 6個月 동안 熟成시켜 10月에 마침내 첫 製品을 出市했다.● 코로나 危機를 이겨낸 힘첫 술을 뽑던 그날 밤 金 氏는 正말 많이 울었다.“북에서 엄마가 술을 뽑아 우리 子息들을 키웠는데, 이젠 내가 南쪽에서 딸을 키우려고 술을 만드네요.”집에서 술을 뽑을 때마다 처음으로 마셔보며 술맛을 評價했던 아버지 생각도 났다.김 氏는 처음으로 生産된 술에 ‘胎座週’라는 이름을 붙였다. 事實 北에서 술을 만들 때는 브랜드라는 것을 몰랐다. 그냥 第詐術이라고 불렀는데, 韓國에서 그렇게 팔 순 없는 일이었다.김 氏는 祭祀 때마다 하던 外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렸다. 外할아버지는 一家 男子들이 모여 앉으면 늘 “男子는 술을 마실 때 올방자(冊床다리)를 크게 틀고 앉아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着眼해 金 氏는 胎座주란 브랜드를 술에 붙였다.술을 만들었으니 이젠 販賣處를 찾아야 했다. 金 氏는 各 地域 祝祭場을 타켓으로 定했다. 술을 싣고 가 어르신들에게 맛보시라고 勸하며 “제가 北에서 왔는데 술을 만들어봤습니다. 한番 드셔보십시오”라고 熱心히 勸했다. 元來 술을 잘 못 마시는 體質이지만, 술 工場 社長이 술도 못 마시냐는 소리를 여러 番 듣고 나서 혼자 술도 많이 마시며 鍛鍊했다.“탈북자가 만들었으면 毒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하고, “어디서 이따위 술을 마시라고 하냐”며 面前에서 술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맛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그러나 모두가 그를 박대하眞 않았다.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이 훨씬 많아 힘이 났다. 電話를 해서 自己 洞네 賣場에 가져다 팔게 해주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렇게 2019年 석 달 동안 行事場 等을 돌면서 1000萬 원의 賣出을 올렸다.너무 기뻤다. 첫 해에 “100萬 원만 벌어도 내가 이기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始作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팔린 것이다. 自信感이 솟구쳤다.그러나 世上은 그에게 호락호락하게 成功을 膳物하지 않았다. 2020年 本格的으로 술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그만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노인들이 많이 사는 音聲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祝祭도 다 取消됐고, 슈퍼에 入店해도 슈퍼를 찾는 사람들이 없었다.임대료와 電氣稅, 水道稅 等 固定費는 繼續 나가는데 어떻게 팔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工場 門을 닫을 수도 없었다. 술은 6個月 또는 1年間의 熟成期間을 거치는데,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술을 繼續 빚어 醱酵組에 채워야 했다.이 期間 그는 無酌定 알바를 뛰었다. 한 番에 새벽 配送과 事務補助, 學校 給食 配送 等 다섯 가지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하루 1時間도 자지 못하고 일했다.고마운 도움도 많이 받았다. 南北하나財團에서 그의 술을 받아 名節 膳物로 돌렸고, 固城통일전망대에서 販賣해주겠다고 承認했다. 忠北은 텃勢가 甚한 洞네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洞네 사람들이 그를 대견하게 여겨 일부러 술을 사서 周邊에 膳物했다.가장 힘든 時節을 그는 周邊의 도움으로 이겨냈다.매출은 조금씩 成長했다. 2021年 賣出 3900萬 원을 記錄했고, 2022年엔 6000萬 원, 2023年엔 9000萬 원을 記錄했다. 많이 남지는 않지만, 成長하고 있다는 것에 意味를 둔다.태좌주로 始作한 브랜드도 弄胎機, 三八紬, 過夏酒 等으로 擴大됐고 ‘하나道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販賣도 하고 있다. 金 氏는 來年에는 韓國에 없는 77度짜리 술도 出品해 市場을 開拓하려 한다. 하나道家의 目標는 40代 以上이 집에서 마실 수 있는 묵직한 各種 傳統酒를 만드는 것이다.● “統一乾杯酒는 우리 술이 最高입니다”김 氏는 地域社會에서 받은 도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高齡者가 많은 洞네엔 農事 때마다 일손이 不足했다. 그래서 2019年 無作定 딸을 데리고 農事 奉仕를 나서기 始作했다. 딸에게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봉사가 제겐 生疏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北에서 醫師로 일했던 6年이 저에겐 奉仕였어요. 돌봐줄 사람이 없이 重病으로 앓는 患者를 업고 江으로 나가 沐浴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그렇게 始作한 奉仕는 以後 ‘소금봉사會’라는 脫北民 奉仕團으로 成長했다. 現在 奉仕團員은 20名인데, 이中 18名이 脫北民이다.“한국에 定着하는 初期 ‘너희는 우리 稅金으로 定着金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받은 稅金을 地域 社會에 돌려준다는 意味로 奉仕를 始作했어요. 처음엔 洞네 어르신들 農事일을 돕다가 사람들이 合勢하면서 정기화했어요. 우린 ‘週末 하루는 故鄕에 두고 온 父母님께 바치는 날이다’고 생각하고 奉仕해요.”소금봉사회의 스케줄은 나름 精巧하다. 每月 첫 番째 土曜日은 老人福祉센터에서 마사지 奉仕를 하고 마지막 週 月曜日은 隣近 利川에서 치킨집을 하는 脫北民의 寄附로 ‘學校밖 靑少年센터’에 가서 치킨 奉仕를 하는 式이다. 農繁期엔 每週 土曜日에 農事일을 도우러 나간다. 이들의 努力으로 音聲에선 脫北民에 對한 視線이 漸漸 좋아지고 있다. 金 氏는 300名이 所屬된 大韓赤十字봉사會 陰城地區 協議會 事務部長度 맡아 熱心히 奉仕하고 있다.이렇게 熱心히 살아온 삶을 認定받아 金 氏는 2023年 南北韓 社會統合事例 發表大會에서 對象인 國會議長上을 받았다.김 氏는 술 工場으로 成功하면 脫北한 한父母 家族을 돕는데 힘을 쏟을 計劃이다.“제가 韓國에 와서 아무런 緣故 없이 혼자 애를 키우니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저는 애를 다 키웠지만, 周邊을 돌아보면 正말 애를 키우며 힘들게 사는 脫北 女性이 너무 많아요. 제가 겪어봤으니 形便이 되는 限 이런 脫北 女性들을 物心兩面으로 키우고 싶습니다.”술 製造業體 代表로서의 그의 꿈은 무엇일까.“우선은 認定받는 술을 만드는 거죠. 韓國이 아닌 世界에서 稱讚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술이 맛있어 알아봤더니 北에서 온 脫北 女性이 만들었다 이렇게 알려지길 願해요. 그리고 第一 큰 所願은 統一이 되면 우리 하나道家에서 만든 술이 統一乾杯酒가 되는 겁니다. 우리 술은 材料는 南쪽의 것이지만, 製造方法은 北쪽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훌륭한 統一乾杯酒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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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平壤 金策工大 나온 測量技士 “南海 海底터널 建設합니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허수현은 韓半島 最北端 炭鑛마을이 낳은 秀才였다. 그는 高等學校 卒業 直前 北韓 全體에서 700名에게만 授與하는 ‘7.15 最優等賞’을 受賞했다. 7.15最優等賞은 김정일이 平壤 남산고급중학교를 卒業한 날인 1960年 7月 15日을 記念해 1987年에 만들어진 賞이다. 只今은 이 賞이 特權層 子息들을 大學에 보내기 위한 발板이 돼 各種 非理와 賂物로 얼룩져 있지만, 賞이 制定된 初期 몇 年은 正말 工夫 잘하는 사람에게만 授與됐다. 賞을 받게 되면 곧바로 中央級 大學에 進學할 수 있었다. 北韓에선 高等中學校 卒業生 中 20% 未滿이 大學이나 專門學校에 갈 수 있다는 것을 勘案하면 엄청난 特惠였다.허 氏도 김책공업종합대학(金策工大)에 入學해 8年이나 工夫했다. 그리고 그때 배운 知識을 活用해 只今은 韓半島 最南端인 慶南 馬山의 海底터널 工事場에서 施工品質을 管理하는 工事次長으로 일하고 있다. 金策工大 卒業生이 네 番의 脫北을 反復한 뒤 健康이 惡化돼 남의 등에 업혀 東南亞 정글을 넘어 韓國까지 오게 되고, 以後 南과 北에서 同時에 測量技士 資格을 받은 最初의 技術者가 돼 海底터널 工事場에서 일하게 되기까지 삶의 過程은 決코 順坦하지 않았다. ● 身分 上昇의 꿈그가 태어난 韓半島 最北端 穩城郡은 오랜 歷史를 가지고 있다. 世宗 22年인 1440年에 金宗瑞 將軍이 이곳을 平定한 뒤 軍을 設置하고 穩城이라 부르기 始作했다. 穩城에는 平安南道 按酒 炭田에 이은 北韓 最大의 褐炭 炭田이 있다. 1980年代까지만 해도 穩城에는 年間 50萬 톤 以上의 褐炭을 生産하는 炭鑛이 여러 個 있었다. 許 氏는 이런 大型 炭鑛 中 하나인 주원 炭鑛마을에서 1974年에 태어났다.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大槪 出身成分이 나빴다. 許 氏의 父親도 마찬가지였다. 父親은 1960年代 後半까지 中國에서 살다가 文化大革命 等의 激變期를 거치며 北韓으로 넘어왔다.부친은 늘 許 氏에게 “너는 工夫를 잘해 꼭 身分 上昇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許 氏가 13歲 때 父親은 갱이 崩壞돼 死亡했다. 炭鑛마을에선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아버지가 死亡하자 許 氏는 1年 程度 彷徨했다. 學校에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父親의 所願대로 身分 上昇을 하기로 決心했다. 3年을 熱心히 工夫해 高等學校 卒業班이 됐을 때 許 氏는 7.15 最優等賞을 받을 程度로 工夫를 잘하게 됐다. 北韓도 大都市의 敎育 環境이 매우 좋기 때문에 외진 炭鑛마을에서 受賞者를 輩出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하지만 賞을 받아도 問題였다. 平壤에서 大學을 다닌다는 것은 家族들에겐 엄청난 犧牲이 必要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김책공대에 入學한 1992年엔 炭鑛마을에 配給이 제대로 供給되지 않았다. 平壤에서 大學을 다닐 돈이 나올 理 萬無했다.허 氏는 大學 代身에 軍隊에 가려고 試圖했다. 大學을 갈 事情이 못되니 軍에 入隊해 勞動黨員이 되면 身分이 그나마 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7.15 最優等賞 受賞者는 軍隊에 보내지 않는다는 指針이 있어 結局 갈 수는 없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金策工大 地質探査學部에 入學했다.그해 穩城에서 中央大學에 入學한 사람은 單 두 名이었다. 許 氏 外에 理科大學 入學生이 한 名 더 있었다. 穩城郡은 그런 洞네였다.● 돈에 成跡을 뺏기던 時節北韓의 다양한 産業現場에서 活躍하는 人材들을 키우는 金策工大는 學制가 길어 7年을 다녀야 卒業證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大學을 다니며 各種 工事現場에 끌려 다니다 보니 進度가 밀려 7年 안에 卒業하기가 어렵다. 許 氏도 學制보다 1年을 더 다녀 2000年에야 卒業할 수 있었다.그가 大學을 다니던 1990年代 中盤은 北韓에서 苦難의 行軍 時期라 四方에서 餓死者가 續出할 때였다. 大學 寄宿舍에서 주는 밥을 먹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탄광마을에서 태어나 김책공대에 入學한 許 氏와, 漁村마을에서 태어나 김일성대에 入學한 記者는 平壤에서 大學을 다닌 時期가 正確히 겹친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떠올리기 싫은 追憶들이 召喚됐다. 몇 個를 紹介하면 이런 式이다.“1993년 共和國 創建 行事 때 김일성代 學生들은 旗발을 들고 金日成廣場을 通過했습니다. 그 練習만 3個月 하면서 너무 힘들어 죽을 뻔 했죠.”“김책공대는 촛불을 들고 김일성대를 따라갔죠. 저도 죽을 뻔 했어요.”“제대군인인 學級 小隊長, 靑年團體祕書 이런 사람들은 가난한데 工夫 잘하는 學生들을 곁에 한둘씩 끼고 있죠. 그리곤 試驗 때마다 自己 것도 좀 써달라고 事情하죠. 그걸 拒絶하기 어려워 저는 試驗 칠 때마다 試驗紙 3個를 써주었어요. 多樣한 볼펜을 準備해서 한 張은 正字로 쓰고, 다른 腸은 흘겨 쓰고, 이런 式으로 答을 적어 敎授가 뒤돌아서 있을 때 工夫 못하는 除隊軍人들에게 몰래 건네주었죠. 代身 그들은 各種 費用을 걷을 때 나를 빼주기도 했고, 가끔 도시락도 두 個를 갖고 와서 허기진 배도 채워주었습니다.”“저도 그랬어요. 國家卒業試驗 때까지 남의 試驗紙를 作成해주었어요. 代身 저는 돈을 받았습니다. 放學 때 집에 가지도 않았지요. 穩城까지 汽車로 一週日 넘게 걸리는데 왔다갔다 時間 浪費가 크고, 또 가봐야 집에서 보태줄 수도 없으니 放學 때는 除隊軍人들 課外를 해주고 돈을 받았습니다.”“저는 卒業狀을 받고 나니, 3點짜리 科目이 몇 個 있었어요. 저는 大學 내내 3點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5點 滿點에 3點은 落第를 겨우 면한 水準인데, 大學 敎務部에 찾아가 싸우지도 않았어요. 於此彼 이 體制가 싫어서 脫北하려 決心한 마당에 3點이 대수냐고 생각했죠.”“저도 卒業證에 받지 않은 3點들이 있었어요. 權力者 父母를 둔 學生들은 좋은 곳에 가기 위해 大學 敎務部 職員들에게 賂物을 주고 컴퓨터에서 點數를 바꾸었어요. 5點 最優等生과, 4點 優等生, 3點 普通生의 全體 比率을 바꿀 수 없으니 5點으로 操作하려면 누군가의 點數를 빼앗아야 했죠. 第一 힘이 없는 우리가 點數를 빼앗긴 거였죠.”최우등을 하고도, 돈과 權力이 없으면 3點 卒業證을 받아야 했던 時代. 許 氏와 記者는 그 時代에 平壤에서 大學을 다녔다. 寄宿舍에서 밥을 몇 숟가락만 주던 때라 大學 時節을 떠올리면 배고팠던 記憶밖에 없다. 卒業證을 받은 것만으로도 奇跡이었다. 賂物로 成跡을 造作하고, 남의 卒業論文을 베껴 써서 提出하는 狀況은 只今도 別般 나아지진 않았다.● 北韓의 測量技士들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炭鑛마을 出身의 金策工大 卒業生에게 좋은 職業이 기다릴 理 萬無했다. 北韓은 職業 選擇의 自由가 없다. 大學을 卒業하면 中央에서 어디로 가라고 임명한다.권력과 富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면 大學 때 실컷 놀고도 中央黨이나 外貨벌이 業體, 保衛部 等 權力機關에 發令을 받는다. 가난한 者들의 運命은 그와 反對이다.허 氏는 2000年 3月 大學을 卒業하면서 卒業證과 함께 測量技士 資格을 附與받았다. 그리고 平壤 隣近 大同郡 市政勞動者區에 있는 中央側兩斷으로 發令을 받았다. 모두가 忌避하는 職業이었다.측량기사는 20㎏이 넘는 裝備를 메고 每日 같이 山을 오르내려야 했다. 1000分의 1 誤差 範圍 內에서 地圖에 點 하나를 찍는데 사나흘이 걸렸고, 한 區域을 測量하는데 2~3個月이 걸렸다. 깊은 山속에 天幕을 치고 野人生活을 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現場記事는 配給을 받을 수 있어 多幸이었다.북한은 測量을 하는 機關이 두 個가 있다. 하나는 中央側兩斷이고, 다른 하나는 人民武力部(軍) 測地國이다. 그런데 眞짜 座標는 側支局이 갖고 있다. 中央測量段의 座標는 일부러 正確한 座標와 다르게 作成한다. 座標가 高級 祕密이기 때문에 外部에 情報가 새나가면 안된다는 理由 때문이다.허 氏는 韓國에 온 뒤 큰 虛脫感을 느꼈다. 衛星으로 GPS를 찍는 時代를 보니 그 무거운 裝備를 메고 다니며 點 하나를 찍겠다고 며칠씩 바친 過去가 너무 虛妄하게 생각됐기 때문이다. 北韓도 2005年頃부터 러시아 衛星航法體系인 ‘글로나스’의 도움을 받아 衛星 測量을 試圖했다고는 알려졌지만, 어느 程度 活用되는지는 아직 把握되지 않고 있다.● 原始的 石炭採掘虛 氏는 2001年 末에 穩城으로 돌아왔다. 賂物이 없으면 移職도 힘든 世上이지만, 아버지도 없는데 어머니마저 아파서 쓰러졌다고 하니 집으로 보내준 것이다. 實際로 어머니를 看護할 사람은 許 氏 밖에 없었다.새로 發令받은 職場은 風人炭鑛 技術課였다. 그러나 할 일은 없었다. 1990年代 中盤 苦難의 行軍 時期 穩城 炭鑛들은 모두 沈水됐다. 電氣가 없어 물을 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年을 放置하다보니 羹을 다시 使用할 수가 없었다.탄광에 다니던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方法을 찾았다. 日帝 때 했던 方式대로 얇은 炭層 採掘을 始作한 것이다. 삽과 곡괭이로 垂直窟을 파들어 가는데, 運이 좋으면 8m에서 炭層을 만나기도 하지만, 運이 나쁘면 25m까지 파들어 간다. 炭層을 만나면, 그걸 따라 이番엔 가로로 파 들어간다. 炭層의 두께는 普通 0.8~1.2m였다. 洋동이를 매단 도르래를 타고 垂直窟에 들어가 몸을 돌리기도 어려운 좁은 空間에서 石炭을 파서 다시 洋동이로 끌어올렸다. 도무지 現代人이라고 볼 수 없는 原始的 採炭方式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石炭을 캐서 팔아야 場마당에서 먹을 것을 사올 수 있었다. 이런 垂直窟을 穩城에선 ‘露頭’라고 불렀다. 穩城에는 이런 노두가 數없이 많았다. 老頭當 家族, 親戚, 親舊 等 5~7名이 팀을 이뤄 作業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老枓栱’이라 불렀다. 北쪽은 날씨가 춥기 때문에 먹는 것 못지않게 石炭도 貴하다. 캐내면 파는 것은 큰 問題가 안됐다. 노두度 1年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땅이 어는 1~3月에만 할 수 있었고, 봄이 와서 땅이 녹으면 垂直坑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버려야 했다. 구멍을 放置해서도 안됐다. 團束機關 사람들이 찾아와 羹을 다시 메웠는지 調査한다. 團束할 權限이 있다는 것은 賂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穩城 全體에 이런 노두가 數없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겨울이면 할 일이 없는 農民들도 이 일에 매달렸다. 安全은 뒷전이라 崩壞와 墜落, 가스窒息 等으로 죽는 사람들이 繼續 생겨났지만 큰 問題가 되진 않았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於此彼 굶어죽기 때문이다.허 氏가 所屬된 技術과는 늘 各種 工事에 動員됐다. 道路 工事, 發電所 工事 等等 人力을 差出하는 工事는 끊이질 않았다. 金策工大에서 배운 知識을 쓸 곳은 없었다.이렇게 살다가 어느새 結婚할 나이가 됐다. 그래도 許 氏는 名色이 炭鑛마을이 輩出한 秀才이고, 平壤에서 金策工大까지 나왔던 터라 女性들에게 나름 人氣가 있었다.32살 때인 2006年 그는 10살 어린 女性과 結婚했다. 아내는 炭鑛 宣傳隊 歌手로 나름 人氣가 좋았다. 理性的인 知識人과 感性的인 藝術人의 組合이었다.그렇지만 魅力과 結婚生活은 別個였다. 結婚한 直後부터 둘은 다투는 일이 많았다. 서로가 서로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4年間의 結婚生活 끝에 둘은 離婚하기로 合意했다. 어린 딸은 아내가 키우기로 했다. 이때부터 그는 中國으로 눈을 돌렸다.● 豆滿江을 넘나들다강 건너 延邊 왕청에는 아버지의 三寸과 四寸 等 親戚들이 살고 있었다. 國境 近處라 많은 사람들이 中國을 드나들 때도 許 氏는 名色이 金策工大 卒業生인데 祖國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離婚 後 世上이 달리 보이기 始作했다. 離婚까지 한 마당에 눈치 볼 일도, 무서울 일도 없었다.2010년 겨울 그는 國境警備隊에 돈을 쥐어주고 豆滿江을 넘었다. 脫北한 것은 아니고, 親戚에게 도움만 받자는 目的이었다. 저녁에 넘어가서 親戚에게 電話를 하고 새벽이 되기 前에 다시 北으로 넘어왔다.2012년 2月 그는 두 番째로 中國으로 갔다. 當時는 김정일이 死亡한지 얼마 안됐던 때라 境界가 매우 甚했다. 그는 北韓軍 軍服을 입고 길을 떠났다. 軍人은 哨所에서 잘 團束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江을 따라 난 道路로 한참을 가다가 어둠이 내릴 때 바로 豆滿江을 넘었다. 中國 部落의 아무 집이나 들어가 왕청 親戚에게 電話를 좀 하고 싶다고 했다. 電話를 하고 몇 時間 程度 머물렀는데 갑자기 公安이 들이닥쳤다. 집主人이 그를 도와주는 척하고는 申告를 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中國은 그즈음부터 脫北者를 申告하면 褒賞金을 주는 制度를 運營하고 있었다. 特히 北韓軍 國境警備隊가 隨時로 건너와 사람까지 죽이며 擄掠질을 했기 때문에, 中國에서 北韓軍은 最高의 忌避對象이었다.탈북자들이 北送 前 待機하는 到門邊方收容所에 끌려갔는데 며칠 뒤 保衛部에서 車를 갖고 건너와 그를 싣고 갔다.그렇지만 그는 豫想과는 달리 20日 程度 街收監됐다가 釋放됐다. 書類를 보니 中國에 親戚이 다 있는 것도 確實하니, 도움 좀 받으려 넘어갔을 뿐이라는 그의 말이 認定됐다. 脫北은 背反이지만, 그의 境遇엔 逸脫 程度로 看做됐다.보위부라고 해봐야 於此彼 한洞네 사는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地域이 輩出한 人材의 經歷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는지 그다지 酷毒하게 對하진 않았다.하지만 許 氏 立場에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잡혀오니 火가 났다. 保衛部 監房에서 그는 江 건너便에서 일하다 잡혀왔다는 사람을 알게 됐다. 그는 自己가 일했던 中國 훈춘의 한 슈퍼의 이름을 알려주면서, 다시 건너가 自己 이름을 대면 社長이 雇用해 줄 것이라고 했다.감방에서 나온 許 氏는 다시 豆滿江을 넘었다. 세 番째 脫北이었다. 그는 監獄 動機가 알려준 슈퍼로 갔다. 왕청에 가지 않은 理由는 親戚들은 別로 도와줄 意向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슈퍼는 中國과 羅津선봉을 連結하는 道路 옆에 있었는데, 豆滿江 건너 許 氏네 洞네가 約 10㎞ 밖에 빤히 바로 보였다. 許 氏가 內陸 깊이 들어가지 않은 理由는 딸을 데려오고 싶어서였다. 故鄕 가까이 있어야 집과 連絡이 수월하다고 判斷했다. 許 氏가 일하는 슈퍼에는 北韓을 오가는 運轉技士들이 隨時로 드나들었다. 이들을 통해 그는 前妻에게 携帶電話를 傳達할 수 있었다. ● 自首해 監獄에 가다그렇게 1年쯤 지났는데 事故가 생겼다. 中國 携帶電話를 받은 前妻가 그걸 利用해 돈 벌려고 브로커 일을 하다가 保衛部에 逮捕된 것이다. 前 男便마저 失踪되니 保衛部는 그女에게 韓國行을 企圖했다는 陋名을 씌웠다.그 消息이 許 氏에게도 傳達됐다. 그래도 4年 間 살았던 程度 있고, 어린 딸까지 있으니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北에 나가기 위해 自首하기로 決心했다. 自身이 나타나야 前 男便이 韓國에 갔다는 陋名을 벗길 수 있을 것 같았다.슈퍼 主人은 前科者 出身이었는데, 그가 北으로 가겠다고 하자 監獄에서 나오는 自己의 祕法을 傳授해주었다. 肺 周邊에 黃酸鐵을 注射하면 高熱이 나고, 炎症이 생긴다면서, 自身은 그 方法으로 病院에 護送됐다가 도망쳤다고 했다. 但 이 方法의 短點은 한 달 안에 黃酸鐵을 洗滌하지 못하면 生命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허 氏는 그의 助言에 따라 肺에 黃酸鐵을 네 군데나 注入했다. 그리고 스스로 公安에 自首한 뒤 2014年 4月 13日 北送됐다. 그런데 이番은 保衛部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不幸하게도 그가 自首한 뒤 公安이 그의 宿所를 뒤져 所持品을 北送할 때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 속에는 韓國 領事館, 韓國人 傳道師 等의 電話番號가 적힌 手帖이 있었다. 이게 禍根이 됐다. 拷問이 始作됐다.중국 社長이 알려준 方法은 確實히 效果가 있었다. 肺가 곪아가기 始作했던 것이다. 炎症으로 甚한 熱까지 나 擧動을 못할 程度가 됐다. 保衛部는 監房에서 죽이긴 싫었는지 그를 假釋放으로 집에 보냈다.그때가 5月 末이었다. 中國 社長이 當付한 弊를 씻어야 하는 한 달이 지난 것이다. 집에 가서 이러저런 治療를 해봤지만 漸漸 惡化됐다. 이렇게 지내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는 黃酸鐵 注射를 맞은 지 네 달이 지난 8月 23日 다시 中國으로 넘어왔다. 이番엔 하얼빈에 들어가 食堂에 就職해 治療에만 專念했다. 하지만 몸은 漸漸 더 衰弱해졌다.몸을 運身하기 어려워지자 許 氏는 죽더라도 故鄕에 가서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11月末 그는 다시 延吉에 왔다. 延吉에서 或是나 도움을 받지 않을까 싶어 처음으로 敎會에 찾아갔는데, 거기서 집도 提供하고 治療도 해주었다. 12月 末 許 氏는 酸素 呼吸器에 依支하는 身世가 됐다. 쇼크도 隨時로 왔다. 敎會에선 韓國에 가서 治療를 받아야 살 수 있다며 韓國行先을 周旋해주었다.● 最初로 南北 測量技士 資格 모두 獲得2015年 2月 그는 여러 脫北民들과 함께 韓國으로 떠났다. 東南亞 정글에서 一行을 따라갈 수 없을 때 親한 동생이 그를 업고 山을 넘었다. 迂餘曲折 끝에 韓國에 到着했지만 다음날 赤十字病院에 실려갔다. 이곳에서 4個月 동안 治療를 받다보니 하나院度 나오지 못했다. 許 氏는 仁川에 居住地가 配定됐다. 健康이 너무 惡化돼 일을 할 수 없는 狀態라 2016年末까지 病院에 다니며 通院治療를 받았다. 하나圓을 나온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就職해 일자리를 얻는 것을 보고 躁急한 마음에 鷺梁津에서 公務員 試驗을 準備하기도 했지만, 健康이 惡化돼 다시 病院에 실려 가기도 했다. 韓國의 醫術은 亦是 대단했다. 2年이라는 오랜 時間이 걸리긴 했지만, 끝내 許 氏를 完治시켰다.치료 받는 期間에 許 氏는 牧會者의 길을 걸어볼까 싶어 1年 남짓 聖經工夫度 했고, 化粧品 會社에 就職해 일도 해봤지만 適性에 맞지 않았다.많은 苦悶 끝에 北에서 배운 測量記事 일을 다시 해보려 알아보니, 南쪽도 測量技士는 일도 힘들고 補償도 적었다. 그렇지만 適性에 맞지 않는 곳에서 時間을 浪費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自信있는 分野를 파보자는 생각에 2018年 한 엔지니어링 會社에 就職했다. 就職은 했어도 아무런 建設技術人 等級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會社에서 가장 많은 나이임에도 허드레 일만 해야 했다. 年俸은 2300萬 원이었다. 그는 앞으로 살아가려면 資格證이 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資格을 갖고 있고, 어떤 經歷을 쌓는가에 따라 年俸도 決定됐다.허 氏는 會社에 다니며 1年 동안은 土木係側에 對한 用語부터 手帖에 적어 基本的인 知識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 大邱科學大에 入學했다. 일도 하면서 大學 工夫까지 하려니 夜間班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全國의 測量 關聯 夜間班 中에 大邱가 그나마 가까웠다.가깝다고 해도 當時 일을 하던 浦項의 建設現場에서 150㎞나 떨어져 있었다. 一週日에 서너番씩 往復 300㎞를 달려 授業을 듣고 오는 일은 決코 쉽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너무 疲困해 졸음 쉼터에서 쪽잠을 自己 일쑤였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해가 中天에 걸릴 때까지 盞적도 있다.허 氏는 大學 工夫와 竝行해 資格證 試驗도 準備했다. 3年 동안 晝耕夜讀의 삶을 끈질기게 이어나간 끝에 그는 2022年 大學을 優秀한 成績으로 卒業하고, 同時에 測量 및 地形空間情報記事와 土木技士 資格證을 받을 수 있었다. 許 氏는 南과 北에서 測量技士 資格을 各各 받은 最初의 事例다.이러한 資格證과 經歷을 인정받아 現在 許 氏는 建設技術人協會에서 高級技術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300億 원 規模 以上의 土木工事를 책임지고 할 수 있다. ● “배워야 살 수 있다”허 氏는 金策工大에서 無慮 8年이나 工夫를 했지만 여기선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남쪽에 오니 用語는 勿論, 裝備나 資材 等 모든 것이 北韓과 달랐습니다. 比喩하면 北에서 통나무로 집을 짓는 法을 배웠는데, 南쪽에 오니 시멘트로 아파트를 짓는 格이죠. 그럼 집 짓는 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하죠. 勿論 北韓 金策工大 過程이 全혀 意味 없는 것은 아닙니다. 北韓에선 가장 基本的인 것, 卽 工夫하는 方法을 배운 것 같습니다.”그는 南北은 統合性에서도 差異가 크다고 했다.“여기는 한 가지를 하려면 열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것들이 서로 連結돼 있어 全體的으로 進行되죠. 反面 北韓은 職務가 매우 細分化돼 있고, 맡겨진 것만 하면 됐어요.”자격증과 經歷을 쌓고 나니 年俸도 빠르게 올라갔다. 金策工大까지 入學했던 北韓 시골 水災가 다시 自身의 頭腦와 才能을 發揮하는 데는 오랜 時間이 걸리지 않았다. 2300萬 원에서 始作했던 年俸은 6年 만에 3倍 以上 높아졌다.그는 여기에 滿足하지 않았다. 그는 올해 3月 다시 大邱大 空間情報專門技術 碩士課程에 入學했다. 土質 및 基礎技術社 資格을 取得하기 위해서다. 다른 資格證과는 달리 이 資格은 받기가 매우 어렵다. 許 氏의 計劃은 向後 5年 안에 碩士와 함께 技術史 資格을 獲得하는 것이다.그렇다고 工夫만 할 수는 없는 일. 요즘 許 氏는 馬山灣에서 스팀配管 附設을 위한 海底터널을 뚫는 作業을 하고 있다. 그의 職責은 工事次長. 터널 施工 品質을 總括하는 重要한 자리다. 建設 現場은 매우 거칠고 다툼도 많다. 外國人 勤勞者들도 많아 意思疏通의 問題도 많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許 氏는 抛棄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가고 있다.“거친 現場이라서 그런지 北에서 왔다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직도 저는 ‘나는 如前히 異邦人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實力은 남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곳에서 移職 提案도 많이 받습니다.”2023년 南北하나財團이 主管한 定着事例 發表大會에서 그는 最優秀賞인 統一部 長官賞을 받았다. 하지만 許 氏는 只今은 定着의 첫 발자국을 뗀 것에 不過하다고 했다.그는 自身의 이름으로 會社를 만들어 키우는 것을 다음 目標로 定했다. 그 目標가 達成되면 또 할 일이 있다. 나아가 統一이 되면 할 計劃도 미리 생각해두었다.“저는 北에 돌아가 여기서 배운 技術을 北에 傳授할 겁니다. 韓國은 土木 工事를 할 때 測量, 施工, 品質까지 다 알아야 합니다. 統一 되면 交通인프라를 다시 整理해야 할 것인데, 北韓에서 大學을 다녔던 同窓들은 統合性에 있어 크게 떨어집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야죠. 그리고 南北에서 모두 測量技士 資格을 받은 唯一한 사람이니 다른 꿈도 있습니다. 南北空間情報 統合指導體系를 만드는 것도 重要한 目標입니다.” 꿈을 말할 때 그는 가장 幸福한 表情이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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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26番의 失敗 끝에 始作된 제임스 다이슨의 革新

    글로벌 技術 企業 다이슨의 創業者이자 首席 엔지니어인 제임스 다이슨의 自敍傳 ‘제임스 다이슨: 5,126番의 失敗에서 배운 삶(사람의집)’이 國內에서 出刊됐다. 이番 自敍傳에는 제임스 다이슨이 失敗와 成功을 거듭하며 革新의 아이콘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담았다. 英國의 노퍽州에서 藝術을 사랑하며 자라온 幼年 時節과 英國 런던의 王立 藝術學校에 入學해 디자인의 魅力에 빠지게 된 靑少年期, 大學을 卒業한 後 高速 上陸정인 時트럭 開發을 契機로 엔지니어링 世界에 入門하게 된 이야기가 書頭에서 펼쳐진다. 이어 1993年 사이클론 技術을 適用한 眞空淸掃器로 첫 成功을 거두기까지의 숱한 失敗의 經驗이 詳細히 紹介된다. 다이슨의 ‘베스트셀러’ 먼지 封套 없는 眞空淸掃器는 5127番째 試製品이었다. 1993年 작은 倉庫에서 出發한 다이슨은 全體 職員 1萬4000名 中 折半假量이 엔지니어인 ‘技術 企業’이다. 淸掃機 扇風機 헤어드라이어 等 高價 家電 分野에서 頭角을 나타내온 다이슨은 이제 農業, 醫學으로 步幅을 넓히고 있다. 제임스 다이슨은 본 自敍傳에서 敎育, 멘토링, 自己 自身에 對한 信賴, 現 時代의 엔지니어 및 科學者의 重要性에 對해 敍述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未知의 世界에 挑戰하는 態度와 不屈의 企業家 精神에 對해 力說한다. 著者 제임스 다이슨은 “이 冊이 젊은이들에게 失敗를 두려워하지 않고 挑戰하는 勇氣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世上은 그들의 獨創性을 切實히 必要로 하며, 디자인, 엔지니어링, 科學 等 多樣한 分野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創意性을 發揮할 때 우리가 直面하고 있는 어려운 社會的 問題들을 解決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주성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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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韓 砲彈은 왜 不良일 수밖에 없을까[주성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

    金日成綜合大學 2學年 때인 1994年 겨울, 나는 平壤枯死砲兵司令部 122旅團 5大隊 1中隊 隊員이 됐다. 北韓 大學生들은 2學年 때 對空砲 部隊에서 6個月 동안 軍 服務를 하고 豫備役고사포병指揮官 資格을 받는다. 내가 간 重大엔 57mm 對空砲 8門이 있었다. 첫 補職은 裝彈手였다. 4發이 든 彈藥箱子를 들고 뛰는 訓鍊부터 받았는데 如干 무거운 게 아니었다. 다음은 砲彈 外部의 ‘그리스’(潤滑油)를 벗기고 信管을 끼우는 訓鍊이었다. 그리스가 어찌나 두꺼운지 벗겨 내는 데 時間이 참 많이 들었다. ‘戰爭이 나면 砲彈 그리스 벗기다 時間 다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抛 옆에 砲彈 몇百 발을 保管한 砲彈倉庫가 있었다. 夜間 勤務 때 추우면 그리스가 녹아 흘러내린 砲彈倉庫에 들어가 잠을 잤다. 砲彈箱子와 壁 사이 空間은 約 80cm 程度 됐는데 그 틈에 들어가 同窓들과 揮發油 곤로로 찌개를 끓여 먹었던 일도 있다. 술까지 마시고 醉해서 자고 말았는데, 只今 생각하면 아찔하다. 彈藥箱子에 불이 옮겨붙었다면 온 中隊가 날아갈 뻔했다. 그만큼 彈藥 管理가 허술했다. 敎導隊엔 第一 낡은 포가 配定된다. 그걸 勘案해도 우리 中隊 對空砲 中엔 1942年에 生産돼 6·25戰爭 때 參戰했던 것도 있었다. 砲彈은 當時 基準으로 生産年度가 約 30年 程度 된 1960年代 初盤 製品이었다. 砲彈倉庫는 겨울이면 冷氣 때문에 허연 성에가 壁에 두껍게 끼는데, 果然 戰爭이 나면 이 砲彈들이 제대로 發射될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얼마 前 구글어스로 살펴보니 그때의 中隊 砲陣地는 勿論이고 病室과 돼지우리까지 그대로였다. 80年째 같은 脯를 使用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있을 때 砲身 淸掃를 한 番도 하지 않았는데 果然 그 砲身은 穩全할지, 砲板은 돌아갈지 疑問이다. 2010年 延坪島 砲射擊 때 北韓이 發射한 砲彈의 折半이 바다에 떨어지고, 섬에 떨어진 것들 中에도 不發彈들이 大量 發生한 것을 보고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砲와 砲彈 管理가 寒心한데 제대로 날아오면 오히려 異常한 일이다. 北韓 砲彈은 러시아에 가서도 亡身煞이다. 最近 報道에 따르면 러시아軍이 北韓産 砲彈을 解體해 봤더니 部品이 빠져 있고, 充電된 火藥의 色깔도 달랐으며, 密封돼야 할 部分이 毁損돼 濕氣에 露出돼 있었다고 한다. 北漢山 砲彈을 使用하다 砲身과 砲塔이 完全히 날아갔다는 러시아 自走砲 寫眞도 公開됐다. 러시아에 준 砲彈이 在庫品인지, 神品인지에 對해 論爭도 있지만 내가 볼 땐 意味 없는 짓이다. 確實한 것은 北韓 砲彈은 不良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北韓 砲彈은 1994年을 起點으로 그 以前에 生産한 것과 以後에 生産한 것으로 區分할 수 있다. 1994年 以前 것은 그나마 生産 指導書臺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以後 30年 넘게 保管 管理가 안 되면서 不良이 될 수밖에 없다. 1990年代 中盤의 苦難의 行軍은 軍需工場 勞動者들의 大量 餓死부터 始作됐다. 그게 1994年 가을이었다. 이때부터 生産은 둘째고, 살아남는 게 重要했다. 當然히 누구도 品質 같은 것을 問題 삼지 않았다. 그럼 苦難의 行軍이 끝난 뒤엔 제대로 生産될까. 이때부턴 幹部들과 勞動者들이 原資材들을 빼돌려 팔기 始作했다. 위에서 要求하는 것은 數量이지 品質이 아니다. 數量 課題를 못 하면 處罰받지만, 質 때문에 處罰받는 일은 거의 없다. 品質 檢査員들度 다 한통속이라 대충 넘어간다. 이건 軍需工場의 問題가 아니라, 北韓 全體의 問題다. 게다가 上部에선 設備와 資材도 제대로 주지 않고 無條件 自力更生하라고 한다. 할 수 없다고 하면 條件타발을 앞세운다고 處罰한다. 그러니 幹部라면 數量부터 맞추는 데 汲汲할 수밖에 없다. 이番에 러시아에서 큰 亡身을 當했으니 아마 砲彈 工場 幹部들은 處罰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은 數十 年에 한 番 있는, 運 나쁜 天災地變에 該當한다. 數量 때문에 處罰받을 確率이 如前히 數十 倍 더 높으니 앞으로도 繼續 不發彈이 나올 수밖에 없는 構造다. 韓國에선 中國産의 品質이 寒心하다고 非難하지만, 내가 볼 땐 北漢山은 그보다 열 倍는 더 粗惡하다. 金正恩이 閱兵式 때마다 한두 個씩 선보이는 身上 武器도 한두 番은 굴러가거나 날아가긴 하겠지만, 品質이나 耐久性은 형편없다고 確信한다. 率直히 난 金正恩이 核武器를 쏘면 그게 제대로 暴發할지도 疑問이다.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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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地下鐵 環境美化員이 된 北韓 女敎師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地下鐵 歷史에서 環境美化員 服裝을 입은 젊은 女人이 쓰레기를 잔뜩 담은 밀車를 밀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 뒤를 몇몇 老人들이 따라 탔다. 그女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한 女性 老人이 끝내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아니, 그쪽은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곱상한데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하세요?”“네, 사람마다 다 事情이 있습니다.”그런데 말套가 많이 異常하다. 老人이 再次 물었다.“고향이 어디세요?”“저, 北韓입니다.”노인은 머리를 끄덕였다.“아, 그래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구먼.”서울지하철 5~8號線 淸掃 및 防疫 消毒業을 擔當하는 ‘서울都市鐵道그린環境’ 所屬 環境美化員 전명숙 氏가 2019年 入社 初期 심심치 않게 겪었던 일이다. 서울 地下鐵 環境美化員은 入社 나이 基準이 50歲 以上이다. 그래서 普通 나이가 많은 美化員들이 大部分인데, 全 氏가 入社했을 때 나이는 44歲였다.매일 새벽 醉客들이 남긴 吐瀉物과 씨름하는 全 氏는 北韓 專門學校에서 被服디자인을 가르치던 敎師였다. 밖을 나서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던 魅力이 넘치던 處女 先生 時節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서울 地下鐵에서 淸掃를 하게 됐을까.● 소리없이 울던 어머니田 氏는 1975年 양강도 惠山에서 다섯 男妹 中 막내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김책공업대학 1期 卒業生이지만, 出身成分이 나빠 惠山에서도 約 20㎞ 떨어진 山골에서 電氣技師로 일했다.북한에서 出身 成分이 나쁘다는 意味는 解放 前에 잘 살았다는 意味이기도 하다. 全 氏의 할아버지는 咸北 無産軍에서 잘 나가는 醫師였다. 그런데 6·25戰爭이 터진 뒤 失踪이 됐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人民軍 服裝을 한 兵士들이 와서 負傷者가 있다며 할아버지를 데려갔는데 그 以後 사라졌다는 것이다.북한에서 失踪者은 ‘未解明子’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出身 成分上 下位그룹에 屬한다. 아버지가 失踪되면 아들은 幹部가 될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三寸까지 ‘處斷者’로 記錄이 됐다. 軍艦을 만드는 工場인 淸津造船所에서 일하던 三寸은 어느 날 갑자기 保衛部에 連行됐고 以後 消息을 알 수 없었다. 成分 文件에 處斷者로 記錄됐다는 것은 保衛部에서 處刑됐다는 意味다.이런 家庭 履歷 때문에 全 氏의 아버지는 외진 農村마을의 機械工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熱心히 일해도, 國家的인 發明을 해도 成果는 늘 幹部들이 가로챘다.전 氏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마당 구석에서 홀로 우는 모습을 正말 많이 보고 자랐다. 아버지에게 抑鬱한 일이 있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홀로 서러운 눈물을 닦아냈다.그렇다고 어머니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 亦是 親戚들이 모두 中國에 있는, 出身成分이 나쁜 階層에 屬해 있었던 것이다.어머니의 오빠는 中國에서 살다가 6·25戰爭 때 中共軍에 差出돼 韓半島에 나왔다. 같은 마을에서 5名이 入隊했는데 熾烈한 戰鬪가 거듭되면서 4名이 죽고 오빠만 살아남았다. 오빠는 故鄕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을 볼 面目이 없다면서 中國에 돌아가지 않고 北韓에 남았다. 中國에서 成長한 어머니는 나중에 오빠를 만나겠다고 北韓에 나왔다가 國境이 막혀 돌아가지 못했고 以後 全 氏의 父親을 만나 結婚했다.● 22살에 女先生이 되다무시당하는 父母를 보면서 全 氏는 “나는 남보다 훨씬 더 努力해야 成功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래서 工夫도 熱心히 했고, 各種 校內 活動에도 積極的으로 參與했다. 그 德分에 學級班長도 하고, 超級團體 祕書도 하는 等 學校에서 알아주는 優等生이 됐다.중학교를 卒業하던 17歲에 全 氏는 꼭 軍隊에 入隊해 勞動黨員이 돼야겠다고 決心했다. 하지만 그는 選拔되지 못했다. 1年 뒤 다시 軍에 支援했는데 또 떨어졌다.자신이 왜 軍人이 될 수 없는지 抗議하러 惠山의 軍事動員部에 찾아갔는데 偶然히 幹部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다. 일부러 들으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門을 열어놓은 채 “명숙이는 土臺가 걸려 軍에 入隊하지 못하는데, 저렇게 자꾸 찾아와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다”고 하는 것이었다.그 이야기를 들은 全 氏는 살면서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衝擊을 받았다. 눈물을 닦으며 집까지 50里 길을 무슨 精神으로 왔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나라에 對한 怨望이 생기기 始作했다.그는 마을 隣近의 探査技能工學校에 이름을 걸어놓고, 家族과 함께 農事를 짓기 始作했다. 山비탈을 開墾해 밭을 만들고 穀食을 심었지만, 食口가 많은 탓에 늘 배고프게 살았다.이런 全 氏의 家族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惠山에 사는 親戚 女人이 찾아와 “명숙이는 우리 집에 데려가 일도 시키고 먹여주겠다”고 提案했다. 선뜻 提案에 應해 惠山으로 가 親戚집에서 먹고 자며 事實上 家政婦처럼 일했다.친척 女人은 北韓에서 食糧을 다루는 配給所 責任者여서 權力이 있었다. 親舊 中에 警工業專門學校 校長도 있었는데 하루는 校長에게 “우리 명숙이를 그 學校에 좀 入學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校長이 힘을 쓴 德分에 全 氏는 3年制 警工業專門學校 피福課에 入學하게 됐다.그때는 ‘苦難의 行軍’ 時期라 學校에 나오지 못하는 學生들이 太半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學校까지 하루 往復 5時間씩 걸어 다녔다. 只今 생각해도 무슨 精神으로 그렇게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1997년 學校를 卒業한 뒤 農業幹部學校의 被服 디자인 敎員으로 任命됐다. 當時엔 많은 女人들에겐 옷을 만들어 場마당에서 파는 것이 重要한 生計手段이 됐던 터라 被服과 敎員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도 親戚이 나서서 힘을 쓴 德分에 50對 1의 競爭을 뚫고 敎員으로 任命됐다. 3年制 專門大 卒業生은 敎員이 될 수가 없어 6個月 동안 平壤에 있는 김보현大學 敎員 養成班을 또 다녀야 했다.● 失敗한 結婚, 그리고 脫北한창 예쁜 나이인 22살에 敎員이 되니 周邊에서 모두가 부럽게 바라봤다. 사귀자며 다가오는 男子들도 많았다.하지만 그는 뜻밖의 選擇을 했다. 平凡한 軍人과 結婚했던 것. 男便은 故鄕 마을에 駐屯했던 偵察中隊 分隊長이었다. 偵察中隊는 10年 동안 擊術 訓鍊을 하는 特殊部隊였다. 名節이면 軍人들은 駐屯地 住民들 앞에서 擊術 示範을 했다.“그때는 왜 그렇게 그 男子가 멋있어 보였는지 몰랐어요. 1代9 擊術 大連度 하고, 배에 氣合을 준 뒤 車가 지나가게도 했고, 甓돌을 주먹으로 부수고. 偵察中隊에서도 第一 뛰어난 實力을 가졌던 것 같아요. 제가 軍隊에 가려다 못 갔던 限이 있어서 더욱 軍人을 選好했던 것 같기도 해요.”따라다니는 男子들이 많았지만 全 氏는 그 軍人을 男便으로 選擇했다. 그가 除隊한 뒤엔 惠山에 남게 했고, 2002年 結婚式을 올렸다.하지만 自身의 選擇이 失手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긴 時間이 걸리지 않았다. 男便은 술만 마시면 暴力性을 드러냈다. 걸핏하면 마을 사람들과 싸웠고, 及其也 아내에게도 주먹을 휘두르기 始作했다. 그래도 敎員이라는 職業 탓에 洞네가 떠나갈 듯 騷亂을 피울 수도 없었다. 當時 北韓은 制度的으로 離婚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참으니 男便은 漸漸 더 暴力的으로 變했다. 그 渦中에 2004年 딸이 태어났다.술주정뱅이 男便 때문에 漸漸 어려워지던 家庭 形便은 及其也 2005年을 起點으로 더 기울었다. 그때부터 中國에서 旣成服이 쏟아져 나오기 始作한 것이다. 自體 製作해 場마당에서 파는 옷이 더 以上 팔리지 않았다. 被覆 디자인과의 人氣도 急激히 下落했고 志願者도 거의 없었다. 弟子들이 없으니 先生도 먹고 살기 어려운 事情에 내몰렸다.그 즈음부터 周邊에서 한두 名씩 사라지고 이들이 中國으로 건너갔다는 말이 돌았다. 全 氏는 鴨綠江 옆을 지날 때마다 中國을 바라보았다. 鴨綠江 바로 건너便에 外四寸 姑母가 하는 큰 工場이 있었다. 姑母는 場工場을 運營했는데 가끔 北韓에 親戚을 만나려 왔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돕는 것도 限界가 있으니 너희가 交代로 와서 우리 집에서 일해라”고 提案했다. 場工場 製作 祕法을 남에게 알려주기도 싫으니 北韓 親戚이 와서 해주면 自己도 든든하겠다고 말했다. 以後 全 氏의 언니들이 交代로 건너가 일해주고 돈을 벌었다.전 氏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敎員 身分이라 선뜻 決斷을 내리지 못했다. “學生들이 사라지고 中國으로 갔다는 말이 나오면 저는 先生님이니까 祖國을 배반해선 안 된다고 敎育했거든요. 그런 제가 어떻게 脫北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딸이 크면서 생각은 漸漸 바뀌었다. 딸을 안고 지나다니는 마을 入口에 작은 市場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린 딸이 沙糖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 어떤 날엔 沙糖을 쥐고 놓지 않아 그걸 빼앗느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딸의 고사리 같은 손에서 沙糖을 뺐어야 했던 어머니의 心情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正말 沙糖 한 알 사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決心했죠. 나도 中國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겠다.”마침 그때는 그가 다니던 學校도 學生이 없어 門을 닫기 直前이었다. 先生이 나오지 않으면 알아서 잘됐다고 하는 눈치였고 찾지도 않았다. 2007年 12月 31日 漆黑 같은 어둠을 뚫고 全 氏는 國境警備隊에 賂物을 주고 鴨綠江을 넘었다. ● 집을 팔아 마련한 脫北 費用 全 氏가 國境警備隊에 준 賂物은 집을 팔아 마련한 것이었다. 事實 그의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狀態였다. 理由가 있었다.2000년대 初盤 北韓은 삼수發電所를 建設한다면서 猝地에 前 氏의 故鄕마을 사람들을 내쫓았다. 隣近 3個 洞네가 强制로 故鄕을 떠나야 했는데, 아무런 補償도 없고 甚至於 살 집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山中턱에 土窟을 만들고 살아야 했다.선생인 全 氏는 多幸히 學校 寄宿舍에 작은 空間을 마련해 살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살았는데 어느 날 北韓 當局이 갑자기 水沒 마을 住民들에게 집을 지어준다고 나섰다. 삼수發電所 建設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이 土窟에서 사는 것이 美國 人工衛星에 捕捉돼 뉴스가 되기도 했다.돌격대가 들어와 몇 달 만에 날림式으로 집들을 지었다. 집을 지을 마땅한 敷地가 없어 집을 지으면 안 되는 땅에 住宅들을 지었다. 濕氣가 많은 그곳은 겨울에는 땅이 얼었다 봄에는 땅이 녹으면서 움푹 들어가는 곳이었다.전 氏도 집을 받았는데, 다음해 봄부터 壁에 금이 가기 始作했다. 中國에서 보면 멋지게 새로 지은 마을처럼 보이지만, 事實 마을은 徐徐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언제 무너질지 몰라 가슴을 조이고 있던 참인데 마침 隣近 國境警備隊 將校가 提案을 해왔다. 北韓돈 80萬 원에 집을 사겠다는 것. 事實 惠山에서 그 程度 面積의 집이면 價格이 10倍는 됐지만, 崩壞 危險 때문에 歇값을 부른 것이다. 그 將校는 집을 사서 倉庫로 쓰겠다고 말했다. 脫北해야 할 處地에서 그렇게라도 집을 판 것이 다행스러웠다. 눈을 감아줄 경비대원의 손에 그가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이 고스란히 넘어갔다.● “우린 왜 이리 못살까”강을 건너 姑母네 工場에 當到하니 姑母가 반가워했다. 親戚이라고 돈을 더 주는 것은 아니었다. 中國 職員들의 月給은 1200~1800慰安이었지만 全 氏에겐 月 600위안만 주었다. 먹여주고 숨겨주는 費用을 差減한 것이었다.그것도 北韓의 基準에선 엄청 큰 돈이었다. 中國에서 잘 먹어도 딸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熱心히 돈을 모아 北韓으로 보냈다.숨어 사는 處地라 外出도 거의 하지 못했다. 아주 가끔 밤에 몰래 거리에 나갈 때도 있었다. 惠山에서 中國을 건너다 볼 때는 그냥 잘 살 것이란 漠然한 생각만 들었었는데, 거리에 直接 나가 쇼핑도 하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못살지”하는 생각이 每番 들어 서러웠다.그렇게 1年 半쯤 살았는데 北韓에서 連絡이 왔다. 黃海道에 살던 媤아버지가 死亡했다. 그래도 며느리로서의 道理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2009年 가을 다시 江을 넘어 北韓으로 돌아왔다.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黃海道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汽車가 며칠에 한 番씩 다녔다. 道를 지날 때마다 列車 安全員들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安全員들은 每番 全 氏에게 눈을 부라리며 身分證을 要求했다. 너무 抑鬱해 列車員에게 왜 그런지 아냐고 물어보자 列車員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중국 女子처럼 생겼잖아요.” 中國에 사는 동안 全 氏는 저도 모르게 ‘때깔’李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葬禮를 치르고 돌아오다가 平壤 隣近 平成에서 또 발이 묶였다. 列車를 갈아타야 하는데 票를 求할 수가 없었다. 이番 列車를 타지 못하면 또 언제 汽車가 올지 알 수 없었다. 急迫하게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어떤 女人이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아지미(아줌마를 뜻하는 北韓말) 中國에서 왔지요? 中國 가는 線을 좀 알려주면 제가 車票를 求해드릴게요.”급한 狀況이라 생각할 것도 없었다. 全 氏는 그女에게 惠山에 오면 中國으로 넘어가는 線을 알려주겠다고 約束하고 住所도 적어주었다. 女人은 約束대로 列車票를 求해왔다.며칠이 지난 뒤 女人이 惠山에 왔다. 全 氏의 집에 찾아와 實際로 中國에 넘겨 보낼 수 있는지 把握한 뒤 “다시 나가서 넘겨 보낼 사람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몇 달 동안 消息이 없었다.● 猝地에 人身賣買犯이 되多그동안 全 氏는 많은 일을 겪었다. 北韓 體制가 새롭게 보이기 始作했다.“길을 갈 때마다 서른 살이 넘은 아줌마가 生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糾察隊가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正말 다시 나온 것을 죽도록 後悔했어요.”그가 北에 있을 때 마침 貨幣改革이 斷行됐다. 2009年 11月 30日 北韓 當局은 貨幣改革 措置를 公布하면서 “앞으로 外國돈을 쓰다 잡히는 境遇 銃殺에 處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전 氏는 北韓에 나와서도 몰래 갖고 온 中國 電話로 姑母와 通話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保衛部員이 두 名 찾아왔다. 電波探知機에 걸린 것이다. 그는 携帶電話를 이불에 둘둘 말아 숨겼다.보위원 한 名은 양강도 保衛部 所屬이었지만, 다른 한 名은 平壤에서 派遣 나온 保衛員이었다. 서로를 監視하게 地方과 中央이 合同條를 짠 것이다.보위원들은 집에 들어와 다짜고짜 携帶電話를 찾는다고 뒤졌다. 그런데 携帶電話를 찾지 못한 代身 全 氏가 벌어서 갖고 온 中國돈 6000慰安과 數百 달러의 달러가 發覺됐다. 양강도 보위원이 먼저 中國돈을 찾아냈는데, 온갖 상辱을 퍼부으며 돈을 빼앗더니 來日 保衛部에 와서 經緯를 解明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사이에도 繼續 집을 뒤지던 平壤 보위원이 이番엔 달러를 찾아냈다. 全 氏는 양강도 보위원이 보지 못하게 平壤 保衛員의 손을 꽉 잡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달러를 슬며시 놓고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나갔다.평양 보위원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全 氏는 아직도 알지는 못한다.동정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조용히 찾아와 다른 要求를 할 수도 있었다. 눈을 감아준 代價로 賂物을 要求하거나 甚至於 性 上納까지 要求하는 일이 非一非再했던 때였다.보위부에 돈을 빼앗기고 猝地에 調査까지 받게 된 前 氏는 달러를 갖고 집을 나가 숨었다.그런데 化는 한꺼번에 닥쳐왔다. 全 氏 代身 中國 姑母의 집에 가서 일하던 언니가 逮捕돼 新義州 細管으로 北送된다는 消息이 또 날아왔다.전 氏는 新義州로 언니를 求하러 떠났다. 쉽지 않았지만 갖고 간 달러를 다 賂物로 쓴 德分에 언니를 꺼낼 수 있었다. 언니를 救하고 한숨 돌리려던 刹那 惠山에서 連絡이 왔다. 이番엔 平成 保衛部에서 그를 잡으려 왔다는 것.알고 보니 몇 달 前 도와주었던 女人이 脫北할 女人을 데려오다가 잡혔다고 한다. 脫北할 女人은 이미 北送 經驗이 있어 現地 平成 保衛部에서 集中 監視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汽車에 탔다가 逮捕된 것이다.보위부에 끌려가 拷問을 받은 끝에 이들은 모든 것을 實吐했다. 平成 保衛部는 卽時 脫北 幇助者로 指目된 全 씨를 잡으려고 사람들을 派遣했다.졸지에 全 氏는 양강도와 平成 保衛部에서 쫓기는 몸이 됐다. 不過 몇 年 前까지 洞네에서 羨望 받던 女先生은 銃殺刑에 處할 수 있다는 不法 外貨 保有 罪와 사람을 中國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人身賣買罪가 同時에 該當되는 手配者가 됐다.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는 다시 中國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졌다”다시 脫北했던 날은 2010年 2月 28日이었다. 江을 넘을 때 전 氏는 돈을 좀 벌어 살 곳을 마련한 뒤 딸을 데려오려고 생각했다. 마지막 作別 人事를 하려 한밤中에 몰래 집에 갔을 때 6살 딸은 뭔가 豫感한 듯 엄마에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엄마, 다시는 沙糖 사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가지 마세요.”그렇게 우는 딸을 겨우 떼어내고 나왔다. 手配犯의 處地라 먼저 中國에 가서 安息處를 마련하는 것이 더 急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가 江을 넘고 3日이 지난 3月 3日 집에서 電話가 왔다. 딸이 사라졌다는 것. 200m 程度 떨어진 四寸 집에서 놀다가 6時頃 다시 할머니집에 간다고 나섰는데 어느 집에도 오지 않았다. 繁華街도 아닌데다 두 집이 直線距離로 보이는 곳이어서 어른들은 放心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惠山에서 幼兒 拉致가 일어난 일도 없었다.딸의 失踪 消息에 全 氏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當場 北韓으로 다시 나가고 싶지만, 自身이 나가봐야 結果는 뻔했다. 重犯罪者로 手配가 떨어진 그는 北에 나가는 瞬間 逮捕돼 監獄에 가야 할 몸이기 때문이다.그는 中國에서 北韓의 家族들을 닦달질했고, 번 돈을 모두 보내 딸을 찾게 했다. 그렇게 全國의 孤兒院들을 다 돌아봤지만 끝내 딸은 찾지 못했다.딸이 사라진 뒤로 全 氏는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더는 살 생각이 없었다. 9個月쯤 지나니 60㎏이 넘던 몸이 42㎏가 돼 뼈만 남았다. 하루 終日 눈물만 흘리는 前 氏를 보다 못한 姑母네 食口가 “이대로 더 있다간 네가 죽겠다”며 그를 强制로 베이징에 避身시켰다. 그곳에 갔다고 해도 마음이 安定된 것은 아니지만, 건너便 惠山이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多幸이었다.전 氏는 이듬해가 돼서야 精神을 차렸다. 문뜩 내가 죽으면 더는 딸을 찾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覺悟가 든 것이다.베이징에서 몇 年 定着하고 사는데, 어느 날 불쑥 아는 언니가 찾아왔다. 中國에서 살다가 韓國에 간 脫北民었다. 그는 全 氏에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있지 말고 韓國에 가서 살자고 提案했다. 그렇지 않아도 周邊에 漸漸 身分이 露出돼 不安했던 터라 선뜻 應했다.언니의 도움으로 全 氏는 2015年 4月 韓國行 길에 올랐고, 東南亞를 經由해 5月 末 韓國에 入國했다. 調査와 하나圓 生活을 마치고 2015年 11月 서울 陽川區에 賃貸아파트를 받아 定着했다.● 環境美化員이 되다다른 脫北民들처럼 그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學院을 다녔고 資格證도 땄다. 첫 職場은 障礙人들과 함께 運營하는 가게였다. 脫北民과 障礙人이 組를 짜서 物件을 파는 일이었는데 月給이 너무 적었다.2018년엔 家具를 파는 會社로 옮겨갔다. 月給이 140萬 원에서 190萬 원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番엔 양천에서 競技도 龍仁까지 每日 出勤해야 했다. 다른 일자리를 熱心히 찾아보던 刹那 南北하나財團 就業擔當者가 連絡을 해왔다.“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이란 곳에 脫北民 募集 公告가 떴는데 한番 支援해봐. 公企業이고 公務職이라고 하니 좋을 것 같아요.”그곳에 支援하려는데 擔當者가 다시 電話가 왔다.“알아보니 地下鐵 淸掃하는 일이래요. 北韓에서 敎師를 했던 영숙 氏가 하기엔 적합지 않아 보이네요.”그런데 當時 全 氏는 龍仁까지 出退勤할 힘이 더 남아있지 않은 狀態였다.“아닙니다. 北에서 敎師였던 걸 누가 알아주나요. 제가 支援할게요.”2019년 설날 入社 첫 出勤을 하기 前까진 잠깐 期待感도 있었다.경쟁률이 無慮 10代 1이나 됐고, 體力試驗까지 치는 것을 보니 좋은 職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 月給도 220萬 원이었고, 65歲 停年이 保障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정작 다녀보니 後悔도 많이 들었다. 客車를 淸掃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歷史를 淸掃하는 일이었다. 새벽에 出勤하면 歷史 구석구석에 吐瀉物과 大小便이 남아있었다. 每日 汚物과의 戰爭을 치르면서 “내가 이 일을 繼續할 수 있을까” 懷疑感도 많이 들었다. 同僚 언니들도 거들었다.“아니, 名宿 氏는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해? 그 얼굴에 참치 집에 가서 팁만 받고 살아도 30~40萬 원은 벌겠네….”입사 當時 全 氏는 44歲로 會社에서 가장 어렸다. 서울都市鐵道그린環境은 入社 年齡 基準이 50歲 以上이었다. 50歲 未滿 入社는 脫北民이나 障礙人 等 社會脆弱階層에게만 例外的으로 許容됐다. 會社 所屬 環境美化員 1700餘 名 中 60歲 以上만 63%나 됐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淸掃일을 하는 全 씨를 다들 안쓰러워할 法도 했다.청소를 마친 뒤 쓰레기를 排出하려 山더미 같은 쓰레기 封套를 옮기고 있으면 地下鐵을 타던 사람들이 다들 불쌍하게 바라보는 듯했다.결단이 必要했던 때 傲氣도 생겨났다. 6個月쯤 지났을 때 전 氏는 社長을 찾아갔다.“사장님. 北韓離脫住民度 팀長이 될 수 있나요?”25명~30명 程度의 職員을 管理하는 팀長이 되면 現場 淸掃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社長이 對答했다.“자격증도 따고 能力도 認定받으면 될 수 있지요. 그런데 名宿 氏는 어려서 5年은 지나야 해요.”규정에는 現場 經驗이 2年 以上 되면 팀長으로 支援할 수는 있지만, 全 氏의 境遇 나이가 많은 팀員을 管理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意味였다. 그러나 그는 抛棄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의 目標는 팀長이 되는 것이었다.● “單 하나의 꿈만 갖고 삽니다”2년이 지났을 때 전 氏는 팀長 志願書를 냈다. 그러나 結果는 脫落이었다. 面接官들은 가장 높은 點數를 주었지만 任員들이 反對했다는 것이다.임원들의 論理는 “너무 어려서 팀長을 달면 다른 사람이 팀長을 할 機會를 여러 番 뺏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支援이 全혀 意味가 없지는 않았다. 點數가 좋았던 터라 그는 첫 支援 以後 副팀長으로 任命됐다.2022년 全 氏는 다시 팀長에 支援했고 優秀한 成績으로 面接을 마쳤다. 이때엔 運도 따랐다. 社長이 새로 오면서 나이와 相關없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팀長으로 임명하자는 것으로 方針이 바뀌었다. 全 氏는 入社 3年 만에 마침내 팀長이 됐다. 會社가 創立된 以來 最年少 팀長이기도 했다.2023년엔 내친 김에 總括팀長 자리에 支援했는데, 亦是 最優秀 成績을 받아 任命이 됐다. 現場 最高職級人 總括팀長은 4個 팀을 管理하는데, 現在 122名의 環境美化員이 所屬됐다.총괄팀장이 되니 작지만 自己 事務室도 생기고, 月給도 올랐다. 그러나 이 亦是 쉬운 일은 아니었다.팀원들이 다 나이가 많다보니 사람들과 調和를 이루는 것이 第一 어려웠다. 現場 巡廻를 나갔다가 더러운 곳을 보면 먼저 가서 淸掃해야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북에서 온 脫北民이 5年 만에 總括팀長이 된 것을 猜忌하는 사람도 있고, 指示를 내려도 따르지 않는 境遇도 있다. 50~60代 女人들의 上司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每日每日 體感하고 있지만, 全 氏는 抛棄할 생각은 없다.“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는 꼭 버틸 겁니다. 스트레스가 많긴 하지만, 大韓民國은 살면 살수록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전 氏는 2023年 南北하나財團이 主管한 定着事例發表 大會에 支援해 定着 優秀事例로 選定해 賞도 받았다.그는 統一을 그 누구보다 懇切히 바란다.“저는 딱 한 가지 꿈만 갖고 살아갑니다. 하루빨리 故鄕에 돌아가 딸을 찾아야죠. 只今 18살이 됐겠네요. 제 딸 이름은 김순정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共同企劃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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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韓軍의 致命的 弱點을 攻掠하라[주성하 記者의 서울과 平壤사이]

    南北 사이엔 軍備競爭이란 表現은 適合하지 않다. 競爭은 비슷한 相對끼리 하는 것이다. 지난해 貿易額 1兆4151億 달러를 記錄하고, 國防費로도 500億 달러 가까이 쓰는 大韓民國과 지난해 貿易額 15億 달러를 記錄한 北韓은 競爭 相對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北韓은 如前히 韓國을 挑發하기 위해 自身들로선 堪當하기 어려운 돈을 國防費로 쓴다. 偵察衛星이 代表的이다. 그게 얼마나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金正恩은 앞으로 여러 氣를 더 쏘겠다고 豪氣를 부린다. 北韓 偵察衛星이 아무리 許接하다고 해도 그들의 形便에선 어마어마한 支出을 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9·19 軍事合意 破棄를 宣言한 金正恩은 前方에 强力한 武力과 新型 軍事 裝備들을 前進 配置하겠다고 宣言했다. 社團 하나만 再配置해도 兵營과 진지, 新型 裝備를 숨길 坑道를 數없이 지어야 한다. 百姓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겨우 1年에 1萬 家口 아파트를 짓는 北韓에는 堪當하기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勿論 우리도 뒷짐만 지고 있진 않는다. 來年 國防豫算은 59兆5885億 원으로 4.5% 增加했다. 올해 國內總生産(GDP) 增加率 2.2%의 두 倍를 넘는 水準이다. ‘韓國型 3軸 體系’ 强化에만 7兆1565億 원을 投入하며 그 外 各種 武器 導入과 有·無人 複合戰鬪體系 構築 等에 莫大한 投資를 한다. 스텔스 戰鬪機 F-35A 20代 追加 導入에도 3兆3010億 원을 쓰는데, 單純 計算으로 1代에 1650億 원씩 주고 사오는 셈이다. 强力한 國防力은 當然히 重要하다. 그러나 國防 豫算을 보면 한 가지 크게 看過하는 것이 있다. 죽이고 부수는 것에만 汨沒하다 보니 新型 武器를 사 오는 데만 焦點이 맞춰져 있을 뿐, 北韓軍의 致命的인 弱點을 攻掠하는 데는 疏忽하다. 北韓軍은 그들의 古物 裝備보다 더 致命的인 弱點 두 가지를 갖고 있다. 于先 指揮 體系이다. 모든 部隊에 部隊長과 그 部隊長에 對한 解任 權限을 가진 政治委員이 各各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다 자를 수 있는 保衛部長度 있다. 이렇게 서로 牽制하고 監視하기 위해 만들어진 北韓軍은 쿠데타를 막는 데는 最適이지만 戰爭을 치르기엔 致命的 弱點을 갖고 있다. 比喩하면 社長 3名을 둔 會社가 危機 狀況에서 絶對 잘 굴러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 致命的인 弱點은 따로 있다. 바로 軍人들의 心理이다. 北韓軍은 守令을 위해 죽는 게 口號인 金正恩의 家兵 集團이다. 世界 어느 나라나 戰爭에서 敗北하면 잃을 게 많다. 그런데 北韓은 김정은과 側近 몇 名만 잃을 게 많다. 北韓軍은 場마당 世代가 主軸이다. 키가 142㎝만 넘어도 8年 以上 軍에 끌려가야 하는 北韓 靑年들은 統一되면 自身들이 배불리 먹고살 수 있으며, 海外旅行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降伏하면 本人뿐만 아니라 家族까지 幸福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世代다. 그들은 겉으론 충성하는 듯 보여도, 實際로 김정은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건 脫北해 온 사람들만 인터뷰해도 알 수 있다. 韓半島에서 戰爭이 나면 北韓軍을 죽이는 데 集中하기보단 이들을 投降하게 만드는 데 더 集中해야 한다. 抵抗하면 죽음뿐이지만, 降伏하면 黨 幹部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有事時 “投降하면 中隊長 30萬 달러, 小隊長 10萬 달러, 兵士 5萬 달러씩 褒賞金을 준다”는 傳單을 數없이 뿌린다면, 數十萬 달러짜리 미사일로 陣地를 부수는 것보다 훨씬 나은 結果를 얻게 될 것이다. “밤에 警戒陣地에서 흰 발싸개(北韓軍 洋襪)만 흔들어도 當身들 陣地를 내려다보던 無人機가 卽刻 安全한 歸順 루트로 案內할 것이다”라는 式의 具體的인 安全保障冊도 세워야 한다. 北韓과의 戰爭에선 同族 靑年들의 屍身이 널려 있는 塹壕를 占領하기보단 ‘四面楚歌’를 불러주어 손을 들고 投降하는 兵士들을 맞는 게 最善이다. 國軍의 피도 훨씬 적게 흘리고, 統一 以後의 敵愾心도 最少化해 眞正한 마음의 統一을 이룰 수 있다. 北韓軍의 心理를 精密 硏究해 가장 效果的으로 마음을 움직일 方法을 찾아야 한다. 韓國에 脫北民이 3萬5000名이나 와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國防豫算에서 心理戰 豫算은 찾아보기 어렵다. 스텔스 戰鬪機 하나를 사오는 돈만 心理戰에 쓸 수는 없을까. 戰爭은 武器로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주성하 記者 zsh75@donga.com}

    • 20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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