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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萬2000年 前에도 ‘破墓’…西洋은 遺骨, 韓國은 터 重視[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東亞日報

1萬2000年 前에도 ‘破墓’…西洋은 遺骨, 韓國은 터 重視[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3月 14日 23時 4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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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石器時代 遺物에도 破墓 痕跡

《무덤은 참 逆說的인 存在이다. 사랑하는 家族을 눈물로 떠나보내는 離別의 場所인 同時에 鬼神이나 心靈現象이 떠오르는, 人間이 두려워하는 場所이기 때문이다. 最近 映畫 ‘破墓’가 人氣를 얻으면서 무덤을 둘러싼 이야기가 다시 注目받고 있다. 무덤을 里長하거나 몰래 다른 棺을 묻는 等 낯설어 보이는 수많은 風習은 數千 年 人間의 歷史와 함께한 것이다. 破墓라는 금기시되어 있는 風習의 起源을 人間의 삶을 探索하는 考古學의 觀點에서 살펴보자. 》

중국 산시성에 있는 춘추시대(기원전 800년∼기원전 500년) 예국 귀족 부인의 무덤(위 사진). 이곳에서는 무덤 축조 시기보다 훨씬 앞선 홍산 문화(기원전 4500년∼기원전 3000년) 시기 옥기가 발굴되었다. 과거 무덤을 파묘해 거기서 꺼낸 옥기를 함께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에도 파묘와 이장이 흔했는데, 무덤방이 작은 고인돌은 대부분 이차장 된 경우다. 경남 창원시 진동리 고인돌 무덤방(아래 사진). 강인욱 교수 제공·사진 출처 ‘예국’ 보고서(산시성고고연구소·2007년)
中國 산시省에 있는 春秋時代(紀元前 800年∼紀元前 500年) 濊國 貴族 夫人의 무덤(危 寫眞). 이곳에서는 무덤 築造 時期보다 훨씬 앞선 홍산 文化(紀元前 4500年∼紀元前 3000年) 時期 玉機가 發掘되었다. 過去 무덤을 破墓해 거기서 꺼낸 玉肌를 함께 묻은 것으로 推定된다. 新石器 時代에도 破墓와 里長이 흔했는데, 무덤房이 작은 고인돌은 大部分 李次長 된 境遇다. 慶南 昌原市 진동리 고인돌 무덤房(아래 寫眞). 강인욱 敎授 提供·寫眞 出處 ‘濊國’ 報告書(산시省孤高硏究所·2007年)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慶熙大 史學科 敎授
人間이 무덤을 만든 歷史는 約 10萬 年 前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사피엔스의 歷史와 함께하는 셈이다. 무덤을 썼다는 것은 人間이 죽음 以後에도 來世가 있다고 믿는 셈이니 宗敎와 祭祀의 起源도 된다. 멀쩡한 무덤을 다시 파헤치는 破墓의 風習도 적어도 約 1萬2000年 前부터 始作되었다. 巨大한 石造 記念物로 有名하여 世界遺産으로도 指定된 튀르키예 怪베클리에서는 祭壇에 걸었던 骸骨이 發見되었다. 甚至於 그 위에는 華麗한 色漆을 하기도 했는데, 祭祀에서 影幀 寫眞을 올려놓듯이 해서 祖上을 記憶했다는 뜻이다. 怪베클리 以後에 發達한 車脫會위크의 新石器時代 마을 사람들은 집 안 마루 밑에 무덤을 만들던 風習이 있었다. 그 過程에서 그 以前에 만들었던 무덤을 건드리면 急하게 덮어버리거나 따로 꺼내서 祭壇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렇게 破墓를 하는 風習은 世界 곳곳에서 只今까지도 이어진다. 考古學과 人類學에서는 專門 用語로 ‘李次長(second burial)’이라고 한다. 한番 묻은 무덤을 다시 파헤쳐서 人骨을 收拾하여 化粧하고 骨壺(뼈를 담는 缸아리)에 담아서 따로 묻는 風習을 말한다. 韓國에서도 그러한 證據는 고인돌과 독무덤(甕棺墓)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의 境遇 그 밑에 만든 무덤의 크기로 李次長의 痕跡을 斟酌한다. 무덤의 길이가 30cm 程度도 안 되는 작은 것들이 種種 發見된다. 이는 어딘가에서 무덤을 만들었다가 後에 破墓하고 다시 꺼내어 그 뼈를 모아서 넣어둔 것이다. 또한 빗살무늬土器를 使用하던 新石器時代부터 登場한 독무덤度 같은 原理이다. 이렇듯 破墓라는 風習은 事實 人間의 歷史와 함께한 오랜 傳統이다.

아스테카문명에서는 무덤에서 꺼낸 해골을 보석과 황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해 숭배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스테카文明에서는 무덤에서 꺼낸 骸骨을 寶石과 黃金으로 華麗하게 治粧해 崇拜하기도 했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成人 遺骨 파내 崇拜한 中世 西洋

人骨 自體를 崇拜하는 風習은 中世 西洋이나 中南美로도 이어졌다. 特히 骸骨 崇拜 思想이 特別히 發達한 아스테카文明에서는 骸骨에 華麗한 寶石과 黃金을 붙여서 아름답기까지 한 藝術品을 만들었다. 西洋 中世 時代는 더욱 劇的이다.

書記 9世紀에 基督敎를 普及한 프랑크 王國의 카롤루스 王은 偶像을 믿던 異敎徒들의 改宗을 爲해서 成人의 遺骨에 믿음의 誓約을 하도록 했다. 그 結果 各 敎會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聖人의 遺骨’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競爭하고 훔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聖人이 갑자기 늘어날 理 없으니 나중에는 共同墓地에서 엉뚱한 遺骨을 파서 成人으로 둔갑시켰다. 只今 같은 遺傳子 檢査가 있는 時節이 아니었으니 可能한 일이었다.

그런 骸骨의 崇拜로 하나의 都市가 만들어진 境遇가 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828年頃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 成人(마가복음의 著者)의 遺骨을 훔쳐온 것을 起點으로 크게 興盛하여, 수많은 敎會 建物과 廣場이 지어졌다. 베네치아를 代表하는 산마르코 廣場도 바로 마르코 聖人의 遺骨을 記念하여 지어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聖人의 遺骨이 世界的인 都市를 탄생시킨 格이다.

西洋의 여러 나라들은 主로 骸骨에 執着하는 反面에 韓國은 땅에 執着한다. 祖上의 遺骸 自體는 터부視하고 그 代身에 좋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서 屍身이 곱게 自然으로 돌아가면 後孫들이 發福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人骨보다는 그들의 幽宅(幽宅)을 重視하는 風水 思想이 發達하는 背景에는 韓國만의 獨特한 지리 地形의 條件도 無視할 수 없다. 韓國과 러시아 極東 地域은 酸性이 매우 剛한 土壤인지라 埋葬을 하면 人骨은 빠르게 風化한다. 三國時代 古墳의 境遇도 數百 個를 파도 제대로 된 人骨은 거의 없는 境遇가 大部分이다. 風水 思想은 韓國이라는 風土에서 獨特하게 發達해 온 歷史를 가진 셈이다.


다른 사람 묫자리 가로채기까지

무덤과 人骨에 對한 믿음은 甚至於 다른 사람의 묫자리를 가로채거나 다른 무덤을 함께 넣는 風習으로도 이어진다. 有名人이나 貴族의 무덤을 再丹粧할 때 슬쩍 自己의 祖上 人骨로 바꿔치기하거나 自己 家族의 使嗾를 넣어서 子孫이 興했다는 이야기도 種種 들린다.

‘帖裝’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風習도 世界 곳곳에 널리 퍼져 있어서 考古學에서는 ‘追加醬’ 또는 ‘配臟’이라는 專門 用語가 있다. 例컨대, 約 2500年 前 알타이 草原에서 살던 族長들이 남긴 쿠르간(大型 古墳)의 近處에서는 例外 없이 작은 무덤들이 發見된다. 스키타이文化가 사라지고 1000年 가까이가 지난 直後 小規模로 쪼개져서 살던 튀르크(突厥) 系統의 住民들이 만든 것이다. 自己들이 巨大한 무덤을 만들 能力이 없으니 큰 古墳의 영험한 能力에 기대어서 自身들의 무덤을 끼워 넣은 것이다. 反面에 높은 權力을 지닌 王들은 다른 사람의 무덤을 빼앗기도 한다. 18歲의 어린 나이에 죽은 이집트의 투탕카멘 王이 그러하다. 王權이 弱했던 투탕카멘은 自己의 묫자리度 제대로 못 만들고 죽었다. 그 바람에 다른 貴族이 잡아놓고 準備했던 무덤에 代身 들어가기도 했다.

‘配臟’이라는 風習도 있는데, 이것은 王이나 主君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그 副官들을 周邊에 함께 묻는 것을 말한다. 匈奴의 王인 선우의 大型 무덤에는 周邊에 數十 個의 배葬墓가 함께 發見된다. 죽어서도 主君을 지키라는 바람인 것이다.


破墓, 里長… 죽음 體化하는 過程

무덤에서 꺼내 온 遺物에 神靈한 힘이 있다고 믿는 境遇도 많이 있다. 그러한 傳統은 5000年 前 홍산 文化의 玉肌에서도 볼 수 있다. 홍산 文化의 玉肌는 5000年 前의 作品이라고 믿기지 않을 程度로 只今의 玉肌와 比較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홍산 文化의 玉肌는 그보다 2500年 後인 中國 春秋時代의 산시省 輛多이춘(梁?村)이라는 곳에서 發掘된 春秋時代 ‘濊國’이라는 나라의 貴族 夫人 무덤에서 發見되었다. 어쩌다 數千 年이 지난 後에 直線距離로 1000km나 떨어진 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女의 몸 周邊에는 홍산 文化는 勿論이고 양쯔江 流域과 商나라에서 가져온 수많은 玉祈禱 함께 묻혀 있었다. 아마 이 夫人은 店肆를 치던 사람으로 옛 무덤에서 發見된 玉肌에 神靈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해서 모아서 治粧한 것 같다. 當時에도 옛 무덤을 골라서 盜掘하여 玉肌를 꺼내는 風習이 있었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죽음에 對한 憂慮 때문이다. 죽음과 消滅에 對한 두려움이 크다면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 그래서 人間은 죽음이 삶의 延長이라는 생각을 담아 무덤을 만들고, 먼저 간 이들을 記憶하는 祝祭인 祭祀를 지내며 社會는 維持되고 發展할 수 있었다. 바로 人間의 죽음을 賣場과 祭祀라는 過程을 통해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者들에게 體化시키는 過程이 무덤이다. 우리가 때만 되면 무덤에서 祭祀를 지내고 또 破墓를 해서 移葬을 하는 理由는 窮極的으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記憶하기 위함이다. 무덤의 發掘이 古代人들의 삶에 接近하는 1次 資料가 되는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 畫家 플라빈스키는 中央아시아의 버려진 이슬람 墓地를 거닐면서 “共同墓地의 언덕 위에서 永生을 渴求하던 靈魂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무덤을 만들고 다시 破墓를 하는 그 죽음을 對하는 過程의 本質은 結局 삶에 對한 渴望이 아닐까.

강인욱 慶熙大 史學科 敎授


#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 #破墓 #遺骨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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