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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廉-說得의 힘… 30年 흔들림 없었던 페리클레스 政治[조대호 神話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思想]|東亞日報

淸廉-說得의 힘… 30年 흔들림 없었던 페리클레스 政治[조대호 神話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思想]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3月 7日 23時 3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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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30년경 제작된 페리클레스(기원전 495?∼기원전 429) 흉상. 그는 절대적 권력자였지만 그리스 민주정을 꽃피운 역설적 인물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紀元前 430年頃 製作된 페리클레스(紀元前 495?∼紀元前 429) 胸像. 그는 絶對的 權力者였지만 그리스 民主政을 꽃피운 逆說的 人物이었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民主政은 市民 大衆의 政治다. 하지만 그런 停滯도 多數의 力量을 모아 共同善을 이뤄내는 政治家의 能力 없이는 제대로 作動할 수 없다. 아테네의 直接 民主程度 다르지 않았다. 市民의 意見 結集에 뛰어나야 훌륭한 政治家였고, 페리클레스는 그런 일을 가장 잘한 政治家였다. 그 時代의 政治에 對한 투키디데스의 評價가 이를 證言한다. “이름은 民主政이지만, 實際로는 第一人者에 依한 統治가 이루어졌다.” 페리클레스가 ‘民主的 權力者’였다는 말인데, 이는 形容矛盾이 아닐까?》









怜悧함과 道德性 兼備한 指導者


네덜란드 화가 로런스 알마타데마의 1868년 그림. 파르테논 신전 재건을 맡은 아테나이의 유명 조각가 페이디아스(왼쪽에서 세 
번째)가 페리클레스(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일행들에게 공사 현장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테나이의 ‘민주적 권력자’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재건을 추진했고, 아테나이 정치와 문화는 이곳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畫家 로런스 알마타데마의 1868年 그림. 파르테논 神殿 再建을 맡은 아테나이의 有名 彫刻家 페이디아스(왼쪽에서 세 番째)가 페리클레스(오른쪽에서 두 番째)와 一行들에게 工事 現場을 說明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테나이의 ‘民主的 權力者’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戰爭으로 인해 廢墟가 된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神殿 再建을 推進했고, 아테나이 政治와 文化는 이곳을 中心으로 最全盛期를 謳歌한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30代 初에 政治에 入門한 페리클레스는 30年 넘게 權力의 核心에 있었다. 아테나이의 黃金期였지만, 平和가 江물처럼 흐르는 時期가 아니었다. 아테나이의 勢力 膨脹은 이웃 나라들과의 葛藤, 植民地 開拓, 武力 衝突을 낳았다. 이 모든 일에 페리클레스가 職·間接 關與했기에 그의 功過를 評價하기는 쉽지 않다. 現實政治家로서 페리클레스가 그리스 世界에서 아테나이의 霸權을 追求한 것은 否定할 수 없는 事實이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조대호 연세대 哲學科 敎授
페리클레스 時代의 對外 政策이 ‘干涉하고 돈을 뜯고 自由를 빼앗은 것’이라는 評價가 있을 수 있다. 當時 이웃 나라들이 實際로 不滿을 吐露했고, 페리클레스 自身도 그런 속셈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오직 한 가지, 卽 自由가 아닌 隸屬을 避하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싸우는 것은 支配力의 喪失과 그 支配力에 依해 抑制된 危險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統治期에는 멜로스 虐殺이나 詩켈리兒 遠征 같은 無謀한 賭博이 없었던 것도 事實이다. 스파르타에 맞서 戰爭을 擁護한 것이 그의 致命的 失手일지 모르겠다. 破局的 結果를 낳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戰爭이 나고 2年 뒤에 病死했다. 그가 더 살았더라도 戰爭이 똑같은 樣相을 보였을까? 25年 뒤 敗戰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옳을까?

페리클레스의 力量을 다른 쪽에서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實踐的 智慧’를 갖춘 사람으로 여겼다. 怜悧함과 道德性을 함께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實踐的 智慧’가 發揮되는 領域은 셋이다. 個人事, 家庭, 政治. 그렇다면 페리클레스는 修身(修身), 齊家(齊家), 治國(治國)의 모든 일에서 實踐的 智慧를 發揮했을까?

페리클레스가 道德的이고 賢明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청렴하기로 有名했고 知識人들과의 交流와 배움을 즐겼다. 하지만 家庭事는 平坦치 않았다. 그의 嚴格한 道德性이 家族의 不滿거리였다. 特히 큰아들과의 不和가 甚했다. 아버지와 달리 씀씀이가 헤픈 아들은 아버지 이름을 팔아 그의 親舊에게 돈을 빌려 遊興費로 썼다. 나중에 이 親舊가 빚 갚기를 要求하자 페리클레스는 함부로 돈을 꿔준 그를 告訴했고 그 뒤 富者 關係는 完全히 틀어졌다. 智慧로운 아버지에게도 말썽쟁이 아들은 괴로운 存在였다!

‘말 많았던’ 大衆에 휘둘리지 않아


政治에서는 어땠을까? 페리클레스는 對外的으로 아테나이의 霸權을 擴大하면서, 內部的으로는 民主政을 完成시켰다. 그는 財産 有無에 相關없이 公職을 市民들에게 開放했고, 公職者들에게 給料를 支給했다. 生計 때문에 公的인 일에 無關心하지 않게 하려는 配慮였다. 아테나異人 父母를 가진 사람에게만 市民權을 許容한 것도 그의 政策이었다. 開放性에서 後退한 것 같지만 아테나이 女性의 權利를 保護하기 위한 措處였다. 只今도 그리스 文明을 象徵하는 아크로폴리스를 再建한 사람도 페리클레스다. 그 일은 單純한 土木工事가 아니라 가난한 市民들에게 일자리를 提供하기 위한 ‘뉴딜 政策’이었다.

結局 페리클레스의 智慧는 政治에서 가장 두드러진 셈이다. 그런 엄청난 成就가 어떻게 可能했을까? 市民들에게 政治 參與가 許諾된 ‘말 많은’ 時代에 페리클레스는 어떻게 그토록 强力한 權力을 行使할 수 있었을까? 투키디데스의 對答은 이렇다. “그는 公的인 名聲과 評判을 갖춘 能力者로서 청렴함이 世上에 알려져 大衆을 자유롭게 制御했으며, 그가 大衆에 依해 引導된 것이 아니라 그가 大衆을 引渡했다. 그는 不適切한 手段으로 權力을 얻기 위해 歡心을 사는 말을 하지 않았고, 自身의 높은 名聲에 힘입어 大衆의 憤怒를 무릅쓰고 反對 主張을 폈다. 그는 사람들이 때를 모르고 過慾을 부리며 自慢하는 것을 보면 두려움을 주는 말로써 진정시켰고, 두려움에 말을 잃고 挫折한 것을 보면 自信感을 북돋웠다.”

공정한 政治 위해 家族 不和도 監修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市民 大衆을 이끈 페리클레스의 힘은 칼의 힘이 아니라 말의 힘이었다. 그는 演說을 통한 說得에 卓越했다. 그가 입을 열면 천둥, 번개 같은 演說이 쏟아져 그의 別名이 ‘올림포스의 主人’, 卽 제우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演說이 流暢해도 그것이 强制的 脅迫이나 狡猾한 者의 甘言利說이었다면 大衆은 說得되지 않았을 것이다. 百 사람을 한 番 속일 수는 있어도 百 사람을 百 番 속일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묻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아테나異人들을 相對로 그런 脅迫과 거짓이 통했을 理 없다.

大衆을 說得하면서도 子息 하나 다독이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하지만 이 아이러니 안에 우리 삶과 政治의 眞實이 담겨 있을 것이다. 家族과의 不和를 甘受하는 의로움이, 家族 關係보다 公的 責任을 앞세우는 姿勢가 페리클레스에게 없었다면, 그를 向한 市民 大衆의 絶對的 信賴도 없었을 테니까. “똑같은 處地에서 子息들을 빼돌려 危險을 벗어나게 하는 사람들은 國政을 議論하는 데 公平할 수도, 공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信條였다. 그런 道德的 信念과 眞짜 實力이 없이 어느 누가 30年 동안 大衆의 信賴와 權力을 維持할 수 있겠는가.

權力을 위해 大衆에 阿諂하지 않는 것, 大衆의 憤怒를 무릅쓰고 옳고 그름을 堂堂히 따지는 것, 過慾을 制御하고 落膽을 希望으로 바꾸는 것. 페리클레스를 ‘民主的 權力者’로 만든 것은 바로 그런 能力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點에서 페리클레스는 後代 政治家들과 달랐다. “그의 後繼者들은 서로 똑같아서 저마다 一人者가 되려는 欲心에 사로잡혀 大衆의 歡心을 사기에 汲汲했고 重大事를 大衆의 氣分에 내맡겼다.” 詩켈리兒 遠征도 그런 處世에서 비롯된 잘못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政治的 主導權을 잡기 위해 私的인 陰謀를 꾸미느라 遠征隊 業務의 발목을 잡았고 처음으로 國政을 四分五裂의 混亂에 빠뜨렸다.”

페리클레스의 事例는 좋은 政治의 길을 보여준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나쁜 政治다. 道德이 없는 怜悧함의 政治, 市民들의 意見을 傾聽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前에 입을 막는 政治는 아주 나쁜 政治다. 페리클레스 以後의 아테나이 民主政은 그런 나쁜 政治 때문에 破局으로 치달았다. 怜悧하면서도 道德的인 사람들의 政治, 그런 政治家들을 찾아내는 市民의 力量만이 類似한 破局의 反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이番 칼럼을 끝으로 ‘神話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思想’의 連載를 마친다. 지난 3年 동안 關心을 갖고 칼럼을 읽어준 讀者 여러분께 感謝드린다. 그리스 思想과의 對面이 우리의 삶을 더 깊고 더 넓게 省察하는 契機가 되었기를 바란다.



조대호 연세대 哲學科 敎授


#페리클레스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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