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幕府에 250年 눌려 있던 天皇, 帝王敎育 받고 ‘깜짝 反旗’[박훈 韓國人이 본 日本史]|東亞日報

幕府에 250年 눌려 있던 天皇, 帝王敎育 받고 ‘깜짝 反旗’[박훈 韓國人이 본 日本史]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2月 1日 23時 3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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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 천황이 머물렀던 천황궁 교토 고쇼. 사진 출처 ‘리브 저팬’ 홈페이지
헤이안 時代부터 에도 時代 末期까지 天皇이 머물렀던 天皇宮 교토 고쇼. 寫眞 出處 ‘리브 저팬’ 홈페이지
《1858年 初 日本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當時 에도에서는 美國 總領事 타운센드 해리스가 幕府에 通商條約 締結을 强하게 壓迫하고 있었다. 反對 輿論을 撫摩하고자 幕府 쇼군은 로주(老中·總理)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를, 그동안 政治에는 干與하지 않던 교토의 天皇에게 보내 勅許를 얻으려 했다. 도쿠가와 時代 내내 天皇은 幕府의 命令에 順從해 왔으니, 이番에도 簡單히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메이(孝明) 天皇이 이를 보기 좋게 拒絶한 것이다.》





天皇, 幕府의 條約 勅許 要求 拒絶


막부의 대미 통상조약 칙허 요구를 거부한 고메이 천황(재위 1846∼1867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幕府의 對美 通商條約 勅許 要求를 拒否한 고메이 天皇(在位 1846∼1867年).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天下가 이를 目睹했고, 그 衝擊에 따라 政治 地形이 急速히 바뀌었다. 鐵甕城 같던 幕府의 權威에 생채기가 생겼고, 鐵壁처럼 보였던 調整-幕府 關係도 흔들리기 始作했다. 境遇에 따라서는 둘이 對立할 수도 있음을, 나아가 이 작지만 衝擊的인 龜裂이 엄청난 機會가 될 수도 있음을 눈치 챈 勢力들이 감춰뒀던 발톱을 손질하기 始作했다. 元來 도쿠가와 時代의 調整과 天皇은 政治·軍事·經濟的으로 幕府와는 比較가 안 되는 微弱한 存在였다. 外交를 비롯하여 모든 政務는 幕府가 專擔했으며, 調整(天皇)은 幕府의 經濟 援助를 받아야 體統을 維持할 수 있을 程度였다. 尊號(尊號) 事件 같은 幕府에 對한 자그만 挑戰도 없지 않았지만 늘 調整 側의 完敗로 끝나고 말았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박훈 서울대 歷史學部 敎授
狀況이 이랬으니 幕府가 가벼운 생각으로 홋타를 교토에 보낸 것도 異常한 일은 아니었다. 敢히 天皇이 幕府의 要求를 拒絶한다는 것은 想像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天皇 宮闕이나 天皇 親戚의 일 같은 問題도 아니고 美國과의 條約 締結이라는 政務的 일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도 幕府뿐 아니라 萬人의 豫想을 깨고 고메이 天皇이 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그間 日本史에서는 ‘幕府의 通商條約 勅許 要求를 고메이 天皇이 拒絶해서 幕府는 곤란한 立場에 處하게 되었다’는 式으로만 敍述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疑訝한 일이다. 250餘 年間 幕府에 찍소리도 못 하던 天皇이 어떻게 이렇게 重且大한 時點에 反旗를 드는 것이 可能했을까. 그間 교토의 朝廷 內에서는 어떤 일들이 展開되어 온 것일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水面으로 올라온 것이 1858年 初의 事態가 아니었을까.

歷史서 學習, 君主意識 培養


多幸히 最近의 硏究들로 이런 疑問들이 많이 解消되었다. 斟酌대로 調整의 變化는 하루아침에 드라마처럼 생긴 일은 아니었다. 멀리는 18世紀 末부터 늦어도 19世紀에 들어서 天皇과 調整은 自身이 日本의 치자(治者)라는 ‘君主 意識’에 눈뜨기 始作했다는 것이다(김형진, ‘도쿠가와 後記 朝廷의 負傷과 學問의 役割’·‘막말 朝廷의 學習園과 空家社會의 政治化’). 1780年부터 在位하던 高카쿠(光格) 天皇은 ‘孝經’ 같은 基礎敎育을 넘어 ‘十八史略’ ‘貞觀政要’ 같은 歷史나 통치 理念과 關聯된 四書를 學習했다. 이것들은 자칫 天皇의 政治的 覺醒을 招來할 수도 있는 冊들이었다. 비슷한 時期 高사쿠라마치狀況(後櫻町上皇)도 ‘論語’ ‘孟子’ ‘上書(尙書)’ ‘禮記’ 같은 經書와 ‘貞觀政要’ 같은 帝王學, ‘左傳’ 같은 四書를 工夫하는 學習會를 數十 年間 繼續했는데, 여기에는 20餘 名의 空家(公家·調停 臣下)도 參與했다. 이 무렵 봄·가을에 農民이 狀況의 宮闕(仙洞御所)에 들어와 모내기와 收穫하는 示範을 보이고, 이것을 天皇이 觀覽하는 意識이 年中行事로 定着되었다. 이는 東아시아 君主들의 親耕(親耕·왕이 農業 奬勵에 率先하는 뜻으로 敵前에 나가 몸소 갈고 씨 뿌리는 儀式)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天皇의 ‘君主 意識’ 培養과 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김형진은 닌코(仁孝) 天皇(在位 1817∼1846年) 때가 되면 歷史서 講讀은 定例化되었고, 運營 方式, 커리큘럼도 體系化되어 가는 것을 發見했다. 只今까지는 거의 中國 司書를 읽는 한魚會(漢御會)만 있었던 데 비해, 1830年代 中盤에는 日本 四書를 講讀하는 火魚回(和御會)도 곧잘 開催되었다. 여기서는 ‘日本書紀’ ‘속일본기’ ‘日本 後記’ 等 日本 정사인 六國師(六國史) 學習이 이뤄졌다. 치자 意識과 함께 自國의 歷史에 對한 認識도 本格化하기 始作한 것이다. 닌코 天皇期의 學習會에는 더 많은 恭敬들이 參席했고, 때로는 皇族도 들어왔다. 이런 雰圍氣는 마침내 公暇를 위한 敎育機關 設立 움직임을 불러일으켜 1847年 學習園의 創設이 實現되었다. 이를 통해 天皇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上級 恭敬뿐 아니라 多數의 下級 공家들도 經書, 사서 學習에 뛰어들었고, 그 過程에서 다양한 ‘學的(學的) 네트워크’가 形成되게 되었다.

天皇-臣下, 討論 통해 政治的 覺醒


19세기 에도의 학습원에서 회독 학습법으로 공부 중인 사무라이들을 그린 당시 삽화의 일부. 참가자들이 글을 읽고 각자의 해석을 
나누는 회독 학습법은 자연스레 정치 토론과 비평으로 이어졌고 천황과 조정 신하들의 정치적 각성에 기여했다. 사진 출처 마에다 
쓰토무 ‘에도의 독서회’ 일본판 표지
19世紀 에도의 學習園에서 會毒 學習法으로 工夫 中인 사무라이들을 그린 當時 揷畵의 一部. 參加者들이 글을 읽고 各自의 解釋을 나누는 灰독 學習法은 自然스레 政治 討論과 批評으로 이어졌고 天皇과 調整 臣下들의 政治的 覺醒에 寄與했다. 寫眞 出處 마에다 쓰토무 ‘에도의 讀書會’ 日本版 表紙
注目할 것은 灰독(會讀)이라는 學習 方法을 採擇했다는 것이다. 會讀은 參加者들이 같은 텍스트를 읽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解釋하는 工夫 方式이다. 解釋이 끝나면 各各 質問과 對答, 討論 等이 活潑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各自가 텍스트에 對해 明確한 立場을 갖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든 工夫 方法이었다. 筆者가 硏究한 사무라이들의 會毒에서는 이 討論이 곧잘 政治批評으로까지 이어지곤 해 사무라이들의 政治化에 重要한 觸媒 役割을 했다. 天皇과 空家의 會毒에서 敏感한 政治問題가 얼마나 言及되었을지는 確言할 수 없지만, 그 可能性까지 排除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過程에서 그들의 ‘政治的 覺醒’도 上程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過程을 통해 도쿠가와 後期의 天皇들은 强烈한 ‘君主 意識’ 乃至 ‘皇統 意識’을 갖게 되었고(藤田?, ‘江?時代の天皇’), 공家들도 日本의 眞正한 主人이 누구인가에 對한 苦悶을 새로 하기 始作했을 것이다.

幕府와 사무라이들이 天皇과 공家들을 ‘긴소매(長袖) 입은, 留約하고 世上 物情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기며 自慢에 들떠 있는 사이, 교토는 느리지만 着實하게 變하고 있었다. 幕府가 通商條約 勅許를 얻기 위해 홋타 마사요시를 派遣했던 1858年 고메이 天皇은 在位 12年째를 맞는 37歲 靑年 君主였다. 以上과 같은 雰圍氣 속에서 成長하고 學習해 온 이 젊은 天皇과 空家들이 開港이라는 國家의 大危機를 맞아 獨自的인 政治 行步를 보인 것은, 이렇게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래 쌓여온 變化가 水面 위로 드러나는 瞬間, 世上이 驚愕하는 일은 歷史에서 드물지 않다. 平素 눈여겨 살펴볼 일이다.

박훈 서울대 歷史學部 敎授
#幕府 #天皇 #帝王敎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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