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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아내 위해 始作한 飯饌가게 ‘大박’… “60부터는 나를 위한 삶”[서영아의 100歲 카페]|東亞日報

아픈 아내 위해 始作한 飯饌가게 ‘大박’… “60부터는 나를 위한 삶”[서영아의 100歲 카페]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1月 11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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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人生2幕] 60歲에 첫 理髮所 낸 조동근 氏

理髮料 7000원 착한 價格… 奉仕와 後繼養成에 邁進
“理髮은 機械로 代替할 수 없어”

아내 治療費 마련 위해 始作한 副業이 13年만에 本業으로
“時代 潮流 읽으며 職業 바꿔야”

착한 가격이 자랑인 ‘착한남성컷’ 매장 앞에 선 조동근 씨. 60세에 이발사 자격증을 딴 뒤 연고 없는 평택 안성 일대에 매장을 내고 후계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고령 시대에 누구나 편히 와서 머리 깎을 수 있는 실용적 이발소를 꿈꾼다. 평택=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착한 價格이 자랑인 ‘着韓男性컷’ 賣場 앞에 선 조동근 氏. 60歲에 理髮師 資格證을 딴 뒤 緣故 없는 平澤 安城 一帶에 賣場을 내고 後繼者들을 養成하고 있다. 高齡 時代에 누구나 便히 와서 머리 깎을 수 있는 實用的 理髮所를 꿈꾼다. 平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京釜線 平澤驛에서 걸어서 4分, ‘着韓男性컷’ 看板이 눈에 띈다. 지난해부터 조동근(63) 氏가 혼자 運營하는 理髮所다. 메뉴는 크게 컷과 染色 두가지. 컷 7000원, 染色도 1萬 원의 破格的 價格을 자랑한다. 代身 머리는 本人이 감아야 한다. 말 그대로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便하게 찾는 實用的 理髮所다.

그는 安定된 職場으로 소문난 한국전력을 50歲에 그만두고 飯饌專門店 社長을 거쳐 理髮所 社長님이 됐다. 그의 事緣을 들으러 3日 京畿道 평택시의 理髮所를 찾았다.

20代 後半, 아내가 癌 宣告를 받았다
전선을 고치기 위한 작업은 높은 곳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조동근 씨 제공
電線을 고치기 위한 作業은 높은 곳에서 進行되는 境遇가 많다. 조동근 氏 提供
기술직으로 일하던 시절. 조동근 씨 제공
技術職으로 일하던 時節. 조동근 氏 提供
50歲까지 그의 本業은 韓國戰歷 職員이었다. 19歲에 韓電職業訓鍊所를 거쳐 技能職으로 入社했다. 所謂 ‘前紀元’이라 불리던, 鐵塔에 오르고 電報대를 타며 故障을 고치는 그 일을 했다. 32歲 때 會社 內 系列 轉換 試驗에 挑戰해 技術職 職員이 됐다.

年俸 높고 安定的인 職場으로 有名한 韓電이지만 그는 未來가 不安했다. 일찌감치 結婚해 아들딸 낳고 잘 살던 아내가 그의 나이 29歲에 非長岩 宣告를 받았다. 悲壯은 잘못 건드리면 出血이 멈추지 않아 死亡한다는 長期. 手術이 안 돼 抗癌治療에 希望을 걸었다.

“病名을 알기까지, 入院해서 두 달이 걸렸어요. 만 한 살, 네 살 된 아들딸을 親戚 집에 맡기고 會社도 一時 休職하고 아내 看病에 매달렸죠. 治療費에 가진 것 全部 쏟아붓고 一山의 외양間 같은 곳을 얻어 살았어요. 退院 後에는 집 앞 밭 200坪을 얻어 온갖 作物을 길러 自然食을 아내에게 해 먹였지요.”

그의 나이 37歲, 夫人이 完治判定을 받았을 때 그는 거의 無一푼이 돼 있었다.

“‘이런 狀態에서 아내의 病이 再發한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제가 아내를 看病하는 渦中에도 1年을 工夫해 技術職에 挑戰한 것도 或如 아내가 죽고 저마저 일하다가 事故로 죽으면 아이들이 孤兒가 될 수 있다는 切迫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발소에는 헤어스타일 샘플 사진이 붙어 있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 고객들이 선택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평택=서영아 기자 sya@donga.com
理髮所에는 헤어스타일 샘플 寫眞이 붙어 있고 番號가 매겨져 있다. 顧客들이 選擇하기 便하게 하기 위해서다. 平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飯饌專門店으로 ‘大박’
반찬전문점 주방에서 조리하는 조동근 씨. 정신없이 사업이 커지고 돈이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조동근 씨 제공
飯饌專門店 廚房에서 調理하는 조동근 氏. 精神없이 事業이 커지고 돈이 들어오던 時節이었다. 조동근 氏 提供
돈을 벌기 위해 副業에 나섰다. 낮에는 한전에서 勤務하고 밤이면 食堂에서 일하며 補身湯집 오리로스구이 가든食堂 김치工場 等 닥치는 대로 손댔지만 모두 失敗했다. 食堂은 그의 事情을 理解하는 職場 同僚들의 會食 場所로 愛用되곤 했다.

1997年 무렵, 5日場에 가서 김치를 팔던 그에게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다른 飯饌은 없어요?” 閃光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飯饌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外食 장사도 사람들의 生活方式의 變化가 重要하다는 걸 讀書를 통해 알고 있었다. 外換危機( IMF)事態가 오면서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는 時代가 왔다. 需要가 적지 않을 것 같았다.

商家 한구석에서 始作한 飯饌가게는 時代 흐름과 맞아떨어져 ‘大박’을 쳤다. ‘名家 찬房’이란 看板을 달고 商家 前面으로 進出했고 賣場은 세 군데로 늘었다.

盛業의 背景에는 끊임없는 硏究가 있었다. 그에게는 讀書를 통해 얻은 새로운 飯饌 레시피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예컨대 食材料를 包裝해서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되게 한 淸麴醬, 部隊찌개 等의 反應이 뜨거웠다. 요즘으로 치면 밀키트다.

“製造業에 從事하는 오너는 그 製造過程을 다 알고 있어야 해요. 제가 直接 廚房에 들어가 飮食을 배웠어요. 名節 때 부침개 같은 건 正말 어마어마하게 팔렸어요. 3日間 賣出이 3000萬 원을 넘겼죠. 제가 直接 綠豆 갈고 아주머니 10名이 終日 부치고….”

50歲, 本業보다 副業 收入이 더 많아지자 그는 한전을 7年餘 당겨 명예퇴직했다.

時代가 變해도 ‘鎭火’할 職業을 찾아
이 飯饌가게를 그는 2015年까지 모두 접었다. 時代가 빠르게 變했고 飯饌가게度 時流를 탔다. 1人 家口가 늘고 1人當 所得 3萬 달러 時代가 되니 飯饌을 사다 먹는 사람이 줄었다. 올라가는 人件費, 大企業들의 市場進出度 설 자리를 좁게 만들었다.

그는 老後 自身의 進路를 놓고 硏究를 거듭했다. 多幸히도 아내의 健康은 괜찮았고 아들딸 모두 家庭을 이뤘다. 平生 먹고 살 것은 어느 程度 마련돼 있지만 스스로가 놀 수 없는 體質임을 알고 있었다. 世上과의 疏通도 이어가야 했다. 바야흐로 世上은 4次 産業革命과 人工知能(AI)李 支配하는 時代를 豫告하고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게 理髮인가요?

“理髮, 設備, 重裝備運轉 等 몇가지를 놓고 檢討했어요. 未來 職業을 △없어질 職業 △代替될 職業 △進化할 職業으로 分類해봤지요. 사람마다 頭相이 다르고 毛髮 質도 다른데, 이 일은 機械가 할 수 없다는 確信이 들었습니다. 高齡時代에 싸고 簡便하게 理髮할 곳을 찾는 需要도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利用學院에 登錄하고 6個月間은 마침 學院 위層에 있던 考試院에서 지내며 工夫에 邁進했습니다.”

理髮師는 어떻게 進化할 수 있을까. 그는 高齡者가 더 늘어나면 出張 理髮 需要도 增加할 거라고 보고 있다. 只今은 理髮師가 家庭을 訪問해 理髮해주는 것은 法으로 禁止돼 있다.

“頹廢理髮所에서 聯想되는, 그런 憂慮 때문이겠죠. 그런데 直接 理髮所에 오기 어려운 高齡者들이 더 늘어나면 그에 맞게 法도 整備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나이가 많은 理髮師들도 負擔 없이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時代가 열릴 수 있지요.”

나이 60에 理髮師 資格證 따고 平澤에 자리 잡아
어디에서 開業할 것인가. 自宅이 있는 一山 一帶를 檢討했지만 新都市는 젊은이가 많다. 나이 든 理髮師에게 젊은 손님이 오지 않으리라는 게 自明했다. 人口 密度와 年齡帶 等을 따져 서울에서 멀지 않고 交通이 便利한 京畿道 平澤과 安城 舊市街地를 노렸다. 高齡者도 流動人口度 많아 틈새市場이 있다고 봤다.

조동근 씨가 어르신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손이 빨라 대개 5~7분이면 커트를 완성한다고. 조동근 씨 제공
조동근 氏가 어르신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손이 빨라 大槪 5~7分이면 커트를 完成한다고. 조동근 氏 提供
그가 2019年 아무런 緣故도 없는 安城에 ‘着韓男性컷’ 1號店을 연 理由다.

“저는 어떤 머리라도 5~7分이면 다 깎습니다. 不必要한 動作을 모두 排除합니다. 패턴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죠.”

平澤에는 시니어層도 많지만 軍部隊도 많아 休暇 나온 軍人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理髮所에는 飮食店 메뉴처럼 머리模樣 샘플 寫眞이 있고 顧客은 그中 番號를 고르면 된다.

“平澤에는 外國人 勤勞者도 많아요. 그분들이 머리 깎으러 와서 願하는 스타일을 說明하는 건 쉽지 않죠. 그림을 보며 番號를 고르게 하니 서로 便했어요.”

나아가 이 分野에서 일하기 願하는 사람들의 멘토 役割을 自處했다.

“한사람 몫의 利用社가 되려면 1)資格證을 따고 2)實習 750餘 時間을 거쳐 3)創業 或은 就業하는 세 段階를 거쳐야 해요. 資格證은 學院에서, 創業 就業은 本人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實習을 堪當해줄 곳이 마땅치 않죠. 그걸 제가 돕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奉仕活動과 機能硏磨 두 마리 토끼 잡아
이발소 휴무일인 매주 화요일에는 제자들을 이끌고 인근 요양원과 정신병원 등에서 이발 봉사를 한다. 제자들에겐 실기를 연마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조동근 씨 제공
理髮所 休務日인 每週 火曜日에는 弟子들을 이끌고 隣近 療養院과 精神病院 等에서 理髮 奉仕를 한다. 弟子들에겐 實技를 硏磨할 좋은 機會이기도 하다. 조동근 氏 提供
그는 週末이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 弟子들을 가르치고 每週 火曜日이면 함께 理髮 奉仕를 나가 實習 機會를 만들어준다. 카카오톡에 ‘着韓男性컷 學習房’을 만들어 隨時로 日程과 情報를 共有하고 參考할 만한 知識을 傳達해준다. 이 카톡房에는 現在 40名이 들어와 있다.

“隣近 療養院이나 精神病院 等에 아침 9時부터 7~8名이 가서 100餘 名 程度 理髮해드립니다. 奉仕는 그 自體로도 氣分이 좋기도 하지만 理髮 技術이 熟鍊되는 좋은 機會예요. 이분들은 조금 밉게 깎아도 相關 않으시잖아요.

特히 高齡 男性들은 大槪 빡빡 밀어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弟子들에게 理髮 機械로 밀기 前에 상고머리 커트하는 練習을 해보라고 하지요. 練習用 假髮 한 個에 7~8萬 원인데, 絶好의 機會죠.”

유튜브에 이 발技術 資料 映像을 80餘 個 올렸는데, 理髮을 工夫하다가 이 映像을 發見하고 찾아오는 弟子들이 間或 있다. 그의 信條는 ‘最高보다 最初가 돼라’는 것. ‘크몽’이라는 專門家 登錄 電子冊 포털 사이트에 ‘理髮의 定石’ 敎材를 登錄하고는 “男性헤어컷 分野 敎材로는 最初”라며 자랑한다.

現在 ‘着韓男性컷’은 全國에 5곳이 있다. 1號店이 자리가 잡히자 弟子에게 넘기고 2號店을 平澤 서정리에 열었다. 그 뒤 2號店도 다른 弟子에게 넘기고 지난해 平澤驛에 둥지를 튼 게 只今의 3號店이다. 서울 봉천동과 光州廣域市에도 50代, 60代 弟子들이 ‘着韓男性컷’을 열었다.

“1號店은 58歲 前職 美容師가 맡았는데 센스가 좋아 盛業 中이에요. 2號店은 60歲 女性인데 거기도 잘 되지요. 3號店은 아직 完全히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後날 여길 根據地로 하려고 합니다.”

“사는데 大學은 그리 必要하지 않더라구요”
음식 장사를 하며 그가 공부하고 실천한 흔적들을 메모로 남겼다. 이런 수첩이 몇 상자는 된다. 조동근 씨 제공
飮食 장사를 하며 그가 工夫하고 實踐한 痕跡들을 메모로 남겼다. 이런 手帖이 몇 箱子는 된다. 조동근 氏 提供
그는 讀書狂이자 메모狂이다. 인터뷰 途中 그는 두卷의 冊을 내놓으며 ‘가장 좋아하는 冊’이라고 했다. 特히 ‘茶山 先生 知識經營法’은 10次例 以上 읽었다며 一讀을 勸했다. 平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베이비붐 世代의 特徵 中 하나가 極度로 어려운 家庭環境에서 태어난 사람이 적지 않다는 點, 또 그렇게 바닥에서 始作했어도 左衝右突 부딪히며 어려움을 克服하고 큰 跳躍을 해낸 境遇가 적지 않다는 點이다.

曺 氏 또한 本人 表現에 따르면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8男妹 中 일곱째로 태어났다. 煉炭 한 張 한 張 사다가 때우며 生活하는 어려운 環境이었다.

中學校 1學年 때 月謝金 낼 돈이 없어 中退하고 印刷所에 就職하면서 社會生活을 始作했다. 工場을 轉轉하다 18歲가 되자 ‘이렇게 살면 未來가 없겠구나’는 ‘現打’가 찾아왔고, 夜學에 다니기 始作하면서 韓電 職業訓鍊所에 들어갔다.

1985年 첫 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檢定考試 學院에 있었다. 그해 高入 檢定에, 이듬해 大入 檢定에 合格해 1987年 방송통신대 法學科에 入學했지만 2年 뒤 아내의 病으로 休學하면서 그의 學業은 끝났다.

-왜 나중에라도 學業을 마치지 않으셨나요.

“사는데 大學이 그리 必要하지 않더라구요. 10年間 冊을 2000卷쯤 읽었어요. 特히 自己啓發書에 빠져들었지요. 冊 內容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늘 메모하고 時間 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나름 時代를 조금은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事實 學閥과는 相關없이 그는 只今도 熱心히 工夫한다. 飮食 장사를 하던 時節에는 外食業 關聯 冊을 涉獵하고 어떻게 하면 成功할지 苦悶한 痕跡들을 手帖에 빽빽이 남겼다. 飯饌가게를 할 때도, 只今의 理髮 일을 할 때도 늘 메모하고 읽고를 反復한다. 다만 요즘은 手帖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貯藏한다고.

“韓國 靑年 걱정되지만…앗! 내色은 안 합니다”
오후 7시에 이발소 문을 닫으면 주 3일은 배드민턴을 치러 인근 고등학교 체육관에 간다. 동호회원들이 6시부터 10시 사이에 수십명이 모여든다고.  조동근 씨 제공
午後 7時에 理髮所 門을 닫으면 株 3日은 배드민턴을 치러 隣近 高等學校 體育館에 간다. 同好會員들이 6時부터 10時 사이에 數十名이 모여든다고. 조동근 氏 提供
마음 같아서는 靑年들의 앞길도 열어주고 싶은데 靑年世代에는 아직 그의 眞心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電鐵에서 젊은 아이들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요. 그 貴한 時間을 시시한 게임이나 하며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막상 表情을 보면 世上에서 自己 役割을 찾지 못해 주눅 들어 있고요.”

火曜日 奉仕 모임에도 가끔 靑年 理用司 志望生이 오는데 疏通이 쉽지 않다.

“奉仕 다녀오면 後記를 쓰라고 해도 안 써요. 하나라도 배우려는 姿勢가 잘 안 보여 답답합니다. 그래도 내色하면 ‘꼰대’가 되니까 참아야죠.”

-或是 나이 든 멘토와 疏通이 語塞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저는요, 平生 世上에 들이댔어요. 제가 世上에 들이댄 것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저에게, 世上에게 들이대기를 懇切히 願합니다.”

“60歲부터 아내는 가끔 만나는 게 반갑고 좋아요”
10여 년 전에 찍은 가족사진.  그 사이 자녀들은 모두 가정을 이뤘고 부인은 일산에서 아들네 가족과 함께 산다. 조동근 씨 제공
10餘 年 前에 찍은 家族寫眞. 그 사이 子女들은 모두 家庭을 이뤘고 夫人은 一山에서 아들네 家族과 함께 산다. 조동근 氏 提供
이 世上 많은 家長이 그러하듯 平生 그를 움직인 動力도 家族이었다. 아내가 鬪病하던 當時에는 어딜 가도 손을 붙잡고 다녔다. 癌으로 인해 血小板이 줄어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出血이 멎지 않을 憂慮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週 1~2回 程度 一山에 올라가 만나는 程度로 쿨하게 지낸다. 子女들은 다 出嫁했고 아들과 함께 사는 夫人은 敎會活動에 熱心이라고. 조氏는 主로 平澤에 얻은 오피스텔에서 生活한다. 그는 “60歲 넘으면 夫婦는 가끔 만나는 게 第一 반갑고 좋다”며 웃는다.

“平生 일해 家族을 지켰습니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이 일은 제가 世上과 만나는 窓門 같은 겁니다. 人生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이 일을 하길 正말 잘했죠. 아니었으면 世上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 싶은 이 마음을 傳할 方法을 어디서 찾았을지 모르겠어요.”

平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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