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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身의 몸 속에도 莊嚴한 山脈이 있다…삶에서 胚胎된 황재형의 藝術[韓國美術의 딥 컷]|東亞日報

當身의 몸 속에도 莊嚴한 山脈이 있다…삶에서 胚胎된 황재형의 藝術[韓國美術의 딥 컷]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9月 24日 16時 29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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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496×206.5㎝, 캔버스에 유채, 1993년~2004년
白頭大幹, 496×206.5㎝, 캔버스에 油彩, 1993年~2004年

가로 5m, 세로 2m에 達하는 이 大作은 황재형 作家(68)의 作品 ‘백두대간’이다. 作家는 이 그림을 1993年 始作해 數十 年에 걸쳐 그리고 있다. 單純히 보기 좋은 風景을 鑑賞하려는 그림이라면 오랜 歲月을 들일 必要가 없다. 우뚝 솟아 굽이치는 山脈의 힘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人間事를 두터운 물감에 담은 그림은 이렇게 말한다. 當身의 몸속에도 莊嚴한 백두대간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러니 勇氣를 내라고.

世上은 황재형을 太白과 炭鑛村의 畫家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山은 山이 아니고, 鑛夫도 鑛夫가 아니다. 單純한 記錄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現代美術의 門을 연 畫家 폴 세잔(1839~1906)의 ‘生 빅투아르 산’이 ‘個別性의 산’이라면, 황재형의 山은 ‘韓國人의 땀과 살과 주름’에서 배어 나온 山이다.

○ 時代의 민낯을 찾아가다.

1982年 9月 作家는 家族과 함께 江原道 太白 炭鑛村으로 移住했다. 眼鏡을 쓰면 鑛夫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콘택트렌즈를 끼고 일을 했다.

황지330, 175X130cm, 캔버스에 유채, 1981년
荒地330, 175X130cm, 캔버스에 油彩, 1981年

畫家 황재형을 世上에 알린 것도 이 作品이다. 太白 荒地炭鑛에서 坑道 埋沒 事故로 死亡한 鑛夫 김봉춘 氏의 作業服을 極度로 擴大했다. 낡아서 헤어지고 구멍 난 옷 그림자 아래 金 氏의 證明寫眞 속 얼굴이 보이는 作品이다. 作家는 이렇게 썼다.

“鑛夫의 아내가 라면을 끓여 내온 밥床 틈에 박힌 고춧가루와 흰 밥알을 보며 남보다 더 苦生하며 살았다 自負한 自身에게 嘔逆질이 났다. … 그 暫時의 經驗으로 作品을 試圖했지만 鑛夫의 作業服을 통해서는 鑛夫의 作業服 밖에 表現할 수 없음에 남들이 보지 않는 便所에서 눈물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샘터, 1985年 3月號)

렌즈를 끼고 일하다 視力을 잃을 뻔하는 等 이어진 삶이 强烈해 그의 作品을 ‘炭鑛 勞動者의 現實 告發’로만 記憶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가 炭鑛을 轉轉한 理由는 都市를 비롯한 各種 包裝을 벗겨낸 時代의 민낯을 보기 위해서였다. 炭鑛村에 왜 갔냐는 물음에 對해 황재형은 ‘眞情性을 찾고 싶어서’라고 했다.

“1980年代 社會나 現實에 對한 絶望感이 너무 깊었다. 眞情性, 眞實을 알고 싶었지만 그것은 누가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선 밤낮 술만 먹으며 世上 뒤집어지는 이야길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4.19 世代들의 變節도 봤다. 가장 뜨거운 眞實은 現場에 있다니 그것을 찾겠다고 直接 虎狼이 窟에 들어간 것이다.”

황재형은 現代 社會 人間의 勞動이 놓인 條件, 그 민낯을 보기 위해 온갖 包裝을 벗겨낸 벌거벗은 막장으로 向했다.
식사 II, 130×194㎝, 캔버스에 흙과 유채, 1985~2007년
食事 II, 130×194㎝, 캔버스에 흙과 油菜, 1985~2007年

“鑛夫, 그들과 함께 生活하며 사치스런 感傷은 무너졌다. 구경하며 짬짬이 한 일과는 全혀 다른 作業量. 渴症, 呼吸 困難, 作業 場所에서 不適當한 큰 키. 내게 重要한 첫 經驗은 點心 時間에 이루어졌다. 부옇게 炭塵이 날리는 坑道에서 버려진 坑木을 놓고 安全燈을 서로에게 비추며 앉아 먹었던 點心은 삶의 憐憫과 眞實이었다.” (샘터, 1985年 3月號)

이 過程에서 警戒했던 것은 ‘對象化’, 鑛夫의 삶을 그림의 素材로 利用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鑛夫로 일하던 어느 날 황재형은 炭鑛 옆 板子 建物 속 沐浴하는 先炭夫들의 소리를 듣는다. 땀 흘려 일하고 난 ‘崇高한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欲望이 솟아 門고리를 붙잡았다. 數十 分을 苦悶했지만, ‘황재형, 너 只今 이 사람들을 對象化하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끝내 抛棄했다.

일이 끝난 뒤, 112.1x162.2cm, 캔버스에 머리카락, 2016년
일이 끝난 뒤, 112.1x162.2cm, 캔버스에 머리카락, 2016年

詩人 신경림은 그에 對해 이렇게 썼다.

“황재형은 목에 힘을 주고 鑛夫들을 指導하겠다고 設置는 畫家가 아니라 그들 속에 들어가 거꾸로 그들로부터 삶의 眞實을 배워 畫幅에 옮겨 놓는 畫家임을 確認했다.”(1991년 가나아트센터 ‘쥘 흙과 뉠 땅’展 圖錄)

시계(속박된 시간), 58×58㎝, 캔버스에 유채, 1984년
時計(束縛된 時間), 58×58㎝, 캔버스에 油彩, 1984年

이데올로기的 視角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면 그림 속 鑛夫의 삶은 現代 資本主義 社會를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누구나 自我를 實現하기 위해 社會 속에서 살고 職場을 다니지만, 때때로 그 삶에 埋沒되다 보면 自我나 本性을 잃어버린다. 그런 世上 속 鑛夫들에게 이야기와 慰勞를 건네고 싶다고 作家는 말한다.

“世上 어디든 希望 없는 곳이 바로 ‘막장’이다. 鑛夫는 서울이나 釜山에 더 많을 수 있다.”

도마, 60×50㎝, 캔버스에 유채, 1979년
도마, 60×50㎝, 캔버스에 油彩, 1979年


○ 當身의 몸속에 백두대간이 있다

산을 베고 산을 덮고, 227.3X162.1cm,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 1997~2005년
産을 베고 山을 덮고, 227.3X162.1cm, 캔버스에 흙과 混合材料, 1997~2005年

大作 ‘백두대간’의 始作은 鑛夫 同僚들과 炭鑛 일을 마친 어느 날이었다. 하루의 勞動을 술 한 盞으로 달래고 헤어지던 어두운 밤, 황재형은 산골을 타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회오리 바람을 마주했다.

“바람이 깊은 溪谷을 타고 나오며 눈보라 치는 場面이 눈에 들어왔다. 海底에서부터 地殼 變動을 타고 솟아나온 카르스트 地形이다. ‘이것이야 말로 속에서 力動的으로 끌어 올려지는 湧솟음이 아닌가, 내가 正말 그려볼 場所를 만났구나. 저 生命力을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作家는 畫具를 들고 다시 山에 올랐다. 캔버스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려는 瞬間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젯밤의 에너지는 온데 간데 없고 차분하고 고요한 아침 風景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이러면 一般 風景畫 달曆 그림이지 뭐야 이게! 내가 느꼈던 건 이게 아닌데 안되겠어.’

가져온 짐을 다시 꾸려 하산하려던 作家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건 內在되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狂亂度 暴風雨도 自然이 담고 있다. 밖으로 나왔을 땐 現象에 不過한 데, 왜 겉모습만 보고 失望해서 가려 하나?’

이 때의 깨달음은 ‘백두대간’에 20年이 넘는 時間을 매달리게 만들었다. 오랜 時間의 苦惱와 씨름은 作品 속 空間이 太白山脈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그림은 産을 記錄한 것이 아니다. 그 山은 우리가 休養하러 찾는 彼岸의 自然이 아닌 人間의 條件이다. 바닷속 땅이 湧솟음 칠 때부터 人間이 默默히 흘려온 땀과 歷史가 담긴 巨大한 몸이다.

사람의 몸으로서 自然은 어떤 意味일까? 作家는 구부러진 山脈과 丘陵을 할머니의 손에 比喩했다.

“그 손을 보면 마디가 지고 丘陵이 진다. 내 코 앞에 손을 놓고 보면 바로 그것이 山의 모습이다. 나의 祖上으로부터 흘러 내려와 골골이 사무치고 丘陵으로 내닫는 默默한 生命力이 山인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 227.3X162.1cm, 캔버스에 유채, 2011~2013년
아버지의 자리, 227.3X162.1cm, 캔버스에 油彩, 2011~2013年

그림 속 아버지의 얼굴에는 백두대간의 山脈의 丘陵처럼 만들어진 주름이 졌다. 그 주름 속엔 그가 겪은 삶의 屈曲들이 있다. 그럼에도 맑은 눈은 希望과 生命力을 말한다.

“階級의 間隙도 삶의 주름이요, 瘠薄한 막장 環境을 便安해 하는 屈辱的인 適應力도 삶의 주름이라는 억지가 언제부턴가 피어 올라왔다…온갖 삶의 주름은 얼굴의 주름처럼 앙금으로 남았다. 놀라운 건 삶의 주름이 그렇다 해도 그것은 주름일 뿐 存在와 本質은 變함없이 希望을 이야기 한다.” (2013年 光州市立美術館 個人展 ‘삶의 주름 땀의 무게’ 윤범모의 글에서 황재형 作家의 말)

그림 ‘백두대간’은 말한다. 삶과 歷史의 모든 屈曲에도 不拘하고 當身의 몸 속에는 백두대간이 있다고. 太古부터 흘러 내려온 生命力이 內在되어 있다고.

어머니, 227×162cm,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 2005년
어머니, 227×162cm, 캔버스에 흙과 混合材料, 2005年


○ 아름다움은 삶에서 나온다

그는 1997年 ‘太白美術硏究所’를 만들고 每年 美術 캠프를 열고 있다. 처음 열었을 땐 敎師 7名에 學生 2名이 찾았지만, 只今은 40餘 名이 찾는다. 이는 觀念이나 裝飾을 위한 藝術이 아닌 삶과 맞닿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作家의 作業 世界와도 맞닿아있다.

“오랜 歲月 동안 藝術이 特權的인 것으로 이야기 되어 왔다. 特히 韓國에서는 現實과 상관없는 ‘唯美主義’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西歐의 藝術 觀念이 日本을 통해 韓國으로 오면서 屈折되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國際 美術史는 特定 階層의 歷史를 벗어나 普遍的 人權의 擴張을 基準으로 再編되고 있는 中이다. 이 過程에서 女性은 勿論 아프리카, 南美, 아시아 等 各 地域別 主體의 脈絡이 더욱 重要해지고 있다.

하모니카 나고야 (ハ_モニカ なごや), 100x240cm, 캔버스에 머리카락, 2017년
하모니카 나고야 (ハ_モニカ なごや), 100x240cm, 캔버스에 머리카락, 2017年

國內 美術史는 日帝時代와 美術手帖을 통해 制限的으로 받아들여진 美術史, 이 때문에 觀念的으로 藝術을 接近한 觀點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어디에도 ‘韓國’을 찾을 수 없었던 作家들이 저마다의 길을 찾아 나서기 始作했다. 이 中 황재형 作家는 삶의 悽絶한 現場을 찾아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現實의 人間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다.

美術史家 전하현은 그의 作業에 對해 “삶에서 胚胎된 藝術을 追求하는 韓國 美術史에서 보기 드문 예”라며 “이런 作家가 있다는 것은 韓國의 큰 文化的 資産”이라고 말했다.

金敏基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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