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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閨秀·女流 呼稱에 拒否感”…‘세 個의 눈을 가진 성난 女人’ 최욱경[韓國美術의 딥 컷] <4>|東亞日報 </4>

“閨秀·女流 呼稱에 拒否感”…‘세 個의 눈을 가진 성난 女人’ 최욱경[韓國美術의 딥 컷] <4>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7月 16日 11時 49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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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화랑에서 전시를 위해 일시 귀국했을 때의 최욱경 / 국제갤러리 제공
新世界 畫廊에서 展示를 위해 一時 歸國했을 때의 최욱경 / 國際갤러리 提供
“30代 中盤부터 女性畫家들 이름 앞에 붙는 ‘閨秀’ ‘女流’라는 呼稱에 조금씩 拒否感을 갖게 되었다. 男性의 境遇는 ‘畫家 ○○○’이면 되는데 女性作家는 꼭 女子를 붙이는 것은 무슨 理由인가.”(1983년 7月 2日 日刊紙 칼럼 中)

최욱경,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 1966년, 종이콜라주에 잉크, 106X106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나는 세 個의 눈을 가졌다, 1966年, 종이콜라주에 잉크, 106X106cm /國立現代美術館 提供

畫家 최욱경(1940~1985)은 1966年 ‘나는 세 個의 눈을 가졌다’는 글句가 적힌 作品을 내놨다. 캔버스 위에 종이를 콜라주로 붙이고 잉크로 그린 黑白 作品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3 EYES I DO HAVE’라고 적혀 있고 上段에는 조그마한 검은色 點 세 個가 나란히 박혀 있다. 이 點이 눈이라면 아래쪽 줄무늬는 옷과 일그러진 몸일 것이다. 왼쪽에는 自身의 이름을 英語로 쓴 듯한 ‘WOOK’ ‘KYUNG’ ‘ROOK’李 적혀 있다. 그림 속 形體는 그 自身인 것처럼 보인다. 최욱경이 가진 세 個의 눈은 무엇일까.

세 個의 눈을 가진 성난 女子
美術史家 진휘연은 이 作品을 두고 “그가 美國에서 外國人 女性이라는 特別한 正體性에 對해 느끼고 觀察하는 過程과 密接한 聯關을 갖는다”고 分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1963年 美國으로 留學한 뒤 平生 異邦人처럼 살았다. 아시아人이자 女性으로. 韓國에서도 낯선 ‘美國 스타일’ 그림을 그리는 作家로 여겨졌다.
최욱경, 세 악사, 1959년, 종이에 포스터컬러, 102X72cm
최욱경, 세 樂士, 1959年, 종이에 포스터컬러, 102X72cm

그에겐 ‘夭折한 天才’ ‘엘리트 코스를 밟은 畫家’란 修飾語가 붙기도 한다. 敎學圖書株式會社를 創立한 최상윤과 조하진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0歲 때 金基昶(1914~2001) 박래현(1920~1976) 夫婦의 畫室에서 첫 美術 敎育을 받는다. 서울예고와 서울대 美大를 卒業하고 美國 크랜브룩대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作品과 記錄 속 그의 모습은 엘리트보다는 孤獨한 異邦人에 가깝다. 남들이 보지 못한 不條理를 捕捉하는 ‘세 番째 눈’을 가진 사람으로 自身을 表現한 것처럼 말이다.

최욱경, 성난 여인, 1966년, 캔버스에 오일, 137X174cm / 국제갤러리 제공
최욱경, 성난 女人, 1966年, 캔버스에 오일, 137X174cm / 國際갤러리 提供

최욱경이 美 뉴멕시코 로스웰美術館 레지던시에서 作業할 무렵. 親舊였던 作家 마이클 애커스는 그가 韓國社會에서 要求하는 女性性에 맞지 않는다며 자주 弄談을 했다고 回顧한다. 自身의 意思를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韓國에선 성난 女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1966年 ‘성난 女子’를 그린 최욱경은 1971年 以後 國內에 머무를 때도 女性으로서의 主體的 認識에 對해 日刊紙 寄稿나 對談을 통해 分明히 밝혀 나갔다.

최욱경 드로잉
최욱경 드로잉

“李(男尊女卑) 慣習을 고쳐가는 方法은 女子 自身에게 있다고 봅니다. 女性다움을 잃지 않고 自己의 똑똑함을 내세울 수 있어야 어디서든 男女가 同等한 位置에 서서 待遇를 받을 수 있습니다. 女權 伸張은 憲法을 고쳐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解決點은 우리 女性 自身에게 있습니다.”(최욱경 조미미 박미성 對談, 1979年 2月)

“아직은 幼兒期的인 狀態지만 女子로서의 感性과 體驗에서 걸러져 나온, 女性의 意識에 關聯된 表象을 創出시켜 直接的으로 驅使한 視覺的 用語로 表現, 傳達하고 싶다.”(‘공간’ 1982年 5月)

‘色彩 抽象’만으론 담을 수 없는 이야기
그에게 붙는 또 다른 數式은 ‘抽象化가’. 特히 抽象表現主義 影響을 言及하는 境遇가 많다. 다만 폴록과 로스코, 고르키의 抽象이 感情과 無意識을 表現하는 데서 出發했듯 최욱경도 모더니즘的인 抽象만을 위해 作品을 展開하진 않았다. 그는 自身의 삶을 表現하는 方式이 繪畫라고 말한다.
최욱경, From My Photo Album, 1964년, 종이에 차콜, 51.5X66.5cm /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최욱경, From My Photo Album, 1964年, 종이에 차콜, 51.5X66.5cm / 김달진美術資料博物館 提供

“나는 내 人生에 對해 끝없는 好奇心과 期待를 갖고 그림을 통해 삶의 意味를 追求하고자 한다. 내 그림들은 그러한 追求의 結實이다. 나는 가끔 그림이 創造되는 過程이 내 生活과 꼭 같다고 느낀다.”(여성동아 1982年 3月)

최욱경,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1968년, 푸른 종이에 파스텔, 118X63cm/국제갤러리 제공
최욱경,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勝者는 누구인가, 1968年, 푸른 종이에 파스텔, 118X63cm/국제갤러리 提供

또 그가 美國에 머무르기 始作한 1960年代는 反轉(反戰)運動과 페미니즘, 民權運動 等 다양한 欲望이 衝突했던 時期다. 그는 그림을 위한 그림에 갇히지 않고, 時代的 雰圍氣를 그림 속에 담는 것도 躊躇하지 않았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勝者는 누구인가?’(1968) 속 人物은 젊은 나이에 死亡한 親오빠를 象徵한다.

‘무無黨’과 ‘生의 歡喜’
최욱경, 환희, 1977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27X456cm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환희, 1977年, 캔버스에 아크릴릭, 227X456cm / 國立현대미술관 提供

1960年代 抽象 繪畫에서 최욱경은 强烈한 色彩 對比를 통해 空間의 活性化를 試圖한다. 그런데 1970年代 末에 이르면 그림 속 形態의 質感이 좀 더 살아나는 모습을 觀察할 수 있다. 흐드러진 꽃이나 깃털 같은 形態다. 1977年 大作 ‘歡喜’에 對해 作家는 이렇게 말했다.

“自然이나 事物에서 내가 瞬間的으로 느끼는 對象은 時間이 지나는 동안 마음속에서 花草처럼 자라기 마련이다. 나는 길을 걷다가도 하찮은 꽃 이파리나 새 깃털, 부서진 나비 날개 같은 것들을 줍는다. 보잘것없는 이 對象들이 나에겐 모두 興味롭고 神祕해 보일 때가 많다. … 假令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의 非常에서 내가 歡喜와 기쁨을 맛보고 事物의 移入을 聯想하며 움직임의 連結에서 느끼는 자유스러움. 그것을 나는 歡喜라고 말하고 싶다.”(여성동아 1980年 3月號)

최욱경, 그림자놀이, 1983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97.5X130cm / 서울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그림자놀이, 1983年, 캔버스에 아크릴릭, 97.5X130cm / 서울대美術館 提供


이 무렵 그는 서울 汝矣島 아파트를 作業室 兼 집으로 쓰면서 그곳을 ‘무無黨’(無無堂)이라 이름 붙였다. 社會가 定해놓은 基準으로는 좀처럼 規定할 수 없는 自身의 正體性, 現實과의 乖離에서 오는 虛無가 느껴진다.

虛無를 克服하려는 몸부림은 바로 몸으로 느끼는 感覺이었다. 꽃잎과 새의 깃털, 그리고 韓國의 곳곳을 旅行하며 보았던 山과 바다의 모습을 畫幅에 담았다. 그러나 1985年 心臟痲痹로 갑작스럽게 짧은 生을 마감했다.

최욱경, 자화상(푸른 모자를 쓰고), 1967년, 종이에 파스텔, 61X46cm / 국제갤러리 제공
최욱경, 自畫像(푸른 帽子를 쓰고), 1967年, 종이에 파스텔, 61X46cm / 國際갤러리 提供

1972年 최욱경은 詩集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發刊했다. 詩集 속 詩 ‘나의 이름은’에서 그는 自身을 ‘이름 없는 아이’라 했다. 그러나 孤獨할지언정 스스로에게 率直했던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걸맞은 이름을 찾아가고 있다.

“… 한 때에/나의 이름은/ … 무지개 꿈 쫓다가/‘길 잃은 아이’였습니다./결국은/생활이란 굴레에서/아주 조그마한 채/이름마저 잊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나의 이름은/‘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최욱경 作家(1940~1985)
△1940年 서울 出生
△1963年 서울대 繪畫科 卒業
△1968年 美國 프랭클린 피어슨臺 助敎授
△1971年 서울 新世界갤러리 個人展
△1977年 美國 뉴멕시코 로스웰美術館 個人展
△1985年 別世
△1987年 서울 國立현대미술관 個人展
金敏基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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