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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거란 牽制 德에 宋, 統一 大業 이뤄내다|신동아

現職 外交官이 쓴 韓中 5000年

高麗의 거란 牽制 德에 宋, 統一 大業 이뤄내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總領事, 政治學博士

    入力 2017-10-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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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永遠할 것 같던 帝國 黨(唐)李 무너지기 始作했다.
    • 안·社의 亂은 內亂이면서 東아시아의 國際戰이었다.
    • 渤海와 거란이 虎視眈眈 黨의 빈틈을 노렸으며
    • 新羅는 黨이 混亂期에 접어들자 絶體絶命의 危機에 逢着했다.
    쿠틀룩 빌게를 首領으로 한 몽골高原의 위구르族은 745年 바스밀, 카를룩 等 餘他 部族과 함께 아쉬나 部族의 後突厥을 멸망시키고 위구르帝國을 세웠다. 위구르帝國은 東으로는 다링허 流域, 西로는 카스피 海까지를 領土로 해 840年까지 蕃盛했다. 747年 쿠틀룩 빌게가 죽은 後 모옌超르가 承繼했는데, 모옌超르 統治器인 751年 高仙芝의 唐나라軍과 사라센群 間 탈라스 戰鬪가 벌어졌다.



    唐의 沒落

    위구르帝國은 안·사의 亂(755~763) 때 唐나라를 支援했으며, 唐나라가 弱化된 틈을 타 간쑤(甘肅)와 신장(新疆)으로 進出했다. 840年 飢饉과 內亂으로 弱化된 위구르帝國은 같은 突厥界 키르기스族에게 정복당했다. 간쑤와 신장 一帶로 大擧 移住한 위구르人들은 農耕民化했다. 오늘날 신장-위구르 地域엔 1000萬 名에 達하는 이슬람系 위구르人이 居住하며 中國 中央政府와 對立한다.

    黨(唐)은 618年 이연(李淵)이 建國해 907年 哀帝(哀帝) 때 後涼(後梁) 朱全忠(朱全忠)에게 滅亡하기까지 290年間 20代의 皇帝가 統治했다. 黨의 墜落을 재촉한 안·社의 亂의 展開 過程을 살펴보자.

    755年 11月 中央아시아 부하라(安國) 出身을 先祖로 둔 범양(허베이)-平爐(랴오시)-河東(산시·山西) 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은 部長(部長) 史思明(史思明)과 함께 오늘날의 베이징인 委讓(漁陽)에서 反旗를 들었다. 안록산의 兵力은 唐나라 兵力의 3分의 1人 15萬 名에 達했다. 안록산은 銅鑼突厥(5代 10國 時代 때 主人公이 되는 沙陀突厥이 屬한 不足), 거란·해(奚), 室韋(室韋) 等 北方民族을 包含한 15萬 大軍을 이끌고 12月 初 荒墟를 건너 12月 中旬 長安으로 進軍하다가 郭子儀(郭子儀)가 이끄는 突厥群 主軸 삭방군(朔方軍)에 敗하자 一旦 委讓으로 後退했다.



    이즈음 渤海는 안록산이 唐나라 攻擊에 失敗할 境遇 自國을 攻擊할 수도 있다고 判斷해 首都를 北滿洲 上京(上京)으로 옮겼다. 渤海의 憂慮와 달리 756年 初 다시 西쪽으로 進軍한 안록산軍은 農牛·河西 節度使 哥舒翰(哥舒翰)李 이끄는 唐나라軍을 長安 東쪽 關門 동관(潼關) 밖에서 大破했다. 안록산軍이 長安에 接近해오자 玄宗은 쓰촨으로 播遷했다.

    顯宗을 代身해 아들 肅宗(肅宗)이 卽位한 後인 756年 8月 唐나라는 위구르君의 支援을 받아들였다. 757年에 들어서면서 안록산君의 狀況도 急變했다. 안록산의 큰아들 안경서(安慶緖)는 異腹同生이 後繼者로 指名될 可能性이 커지자 1月 안록산을 毒殺하고 皇帝에 登極했다. 안경서軍은 그해 4月 唐나라軍을 擊破했다.


    안·社의 亂에 介入한 위구르

    위구르의 카를룩 街韓銀 아들 타르두슈 빌게에게 4萬 基(騎)의 말을 주어 唐나라를 救援하게 했다. 757年 9月 唐나라-위구르 聯合軍은 眼鏡徐君을 攻擊해 6萬 名을 斬首(斬首)하는 大勝을 거두고 海族(奚族) 群團이 지키던 長安을 빼앗았다.

    長安과 洛陽을 잃은 안경서는 허베이의 業(?)으로 後退했다. 758年 9月 郭子儀가 指揮하는 20萬 唐나라-위구르 聯合軍이 業으로 進擊해오자 안경서는 史思明에게 救援을 要請했다. 中央아시아 샤흐리 샤브즈(史國) 出身 史思明은 이때 13萬 名의 大軍을 거느리고 있어 眼鏡서보다 勢力이 컸다. 史思明은 안경서를 危機에서 求해줬으나 이듬해 3月 안경서로부터 兩位를 받은 다음 그를 殺害했다. 不過 2年 後인 761年 3月 史思明度 아들 思潮의(史朝義)에게 被殺돼 사조의가 皇帝로 卽位했다.

    762年 4月 唐나라 肅宗이 宦官에게 弑害되고 아들 이숙이 大宗(代宗)으로 卽位했다. 大宗은 討伐軍을 일으키면서 위구르를 說得하고자 使臣을 보냈다. 뵈귀 加한(타르두슈 빌게)이 思潮意義 提案을 받아들여 오히려 唐나라를 攻擊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大宗은 渤海에도 使臣을 보내 渤海王을 王(王)으로 正式 認定하는 等 關係 改善을 圖謀했다. 唐나라는 迂餘曲折 끝에 뵈귀 可汗을 說得해 同盟을 다시 맺는 데 成功했으며 唐나라-위구르 聯合軍은 사조의君을 大破했다.

    그해 10月 다시 洛陽에 入城한 위구르軍은 掠奪과 放火, 殺戮을 恣行했다. 763年 1月 사조의는 달아나다가 안록산의 部下이던 이회선에게 죽임을 當했다. 안록산의 亂은 唐나라의 內戰인 同時에 위구르, 突厥, 거란·海, 渤海, 吐蕃 等이 關聯된 國際戰이기도 했다. 唐나라가 안·社의 난 後遺症에 시달리던 763年 10月 간쑤 方面에서 南進해온 吐蕃軍은 長安을 約 보름間 占領했다가 後退했다.

    안·社의 亂으로 因해 시라무렌 江-다링허 流域의 거란 勢力이 急成長했다. 안·社의 亂 以後 德宗(德宗), 憲宗(獻宗), 武宗(武宗), 腺腫(宣宗) 等은 唐나라의 急速한 衰落을 막는 데는 一旦 成功했다. 德宗은 均田制에 기초한 租庸調(租庸調)를 代身해 1年 2回 貨幣로 稅金을 걷는 兩稅法(兩稅法)을 導入하면서 財政을 再建하는 데 成功했다. 憲宗은 819年 高句麗系 平路値淸切道社(平盧淄靑節度使) 移徙도(李師道)의 亂을 平定한 後 節度使의 權限을 大幅 줄이는 等 軍事力을 再建하는 데 어느 程度 成功을 거뒀다.



    渤海·거란, 唐의 빈틈 노리다

    안·社의 亂 渦中이던 761年 이사도의 祖父 이회옥(李懷玉)은 叛亂軍의 攻勢를 避해 姑從四寸 후희일과 함께 2萬餘 兵力을 이끌고 다링허 流域(平路)에서 보하이(渤海)를 건너 산둥半島에 上陸해 10餘 個 株를 確保하기에 이르렀다. 黨 調整은 이회옥(黨 調整이 ‘定期’라는 이름을 下賜)을 平爐·치청(랴오시·산둥)節度使에 임명했다.

    이정기는 산둥(齊)의 經濟·軍事·外交權을 掌握했으며 漸次 班當(反唐) 路線을 걸었다. 이정기는 777年 康男과 華北을 連結하는 要衝地 쉬저우(徐州)를 包含한 5個 州를 追加 占領해 齊나라(치청)를 最强 번진으로 만들었다. 아들 이납(李納)을 거쳐 806年 孫子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憲宗은 投降해 온 藩鎭들을 앞세워 815年 12月 이사도의 제나라 攻擊에 나섰다. 이사도는 唐나라가 軍需物資를 貯藏해놓은 하음窓을 불사르는 等 先制攻擊을 敢行했다. 하지만 장화이(江淮)와 허베이 번진 거의 全部가 黨 調整에 加擔하자 이사도는 四面楚歌에 빠졌다. 挾攻을 받은 이사도는 819年 危迫(魏博) 번진 전홍정과의 산둥省 西部 運籌·동아 戰鬪에서 大敗했으며 部下 遊娛(劉悟)가 이사도를 죽이고 投降했다. 이로써 765~819年 55年間이나 持續되던 이정기 一家의 齊나라는 滅亡했다.

    德宗, 憲宗, 武宗 等의 努力에도 唐나라는 巫祖(武照·則天武后) 初期나 顯宗 前半期와 같은 盛世(盛世)를 回復할 수 없었다. 吐蕃, 위구르, 거란, 南朝, 渤海 같은 隣接國이 기울어가는 唐나라의 빈틈을 노렸다.

    이렇듯 極度의 危機狀況임에도 黨에서는 優勝油價 代表하는 新進 官僚와 이덕유가 代表하는 保守 官僚 間 對立인 禹·李(牛·李) 黨爭이 나날이 激化됐다. 40年間 繼續된 禹·李 黨爭은 宦官의 政權 掌握을 惹起했다. 顯宗 때부터 影響力을 키워온 宦官은 禁軍(禁軍)을 背景으로 皇帝를 擁立하기도 하고 敝笠·毒殺하기도 할 만큼 强力한 힘을 자랑했다.


    황소의 蜂起

    새롭게 經濟 中心地가 된 화이허-창장 流域의 장화이와 허베이를 連結하는 쉬저우의 藩鎭들에서 軍亂(軍亂)이 種種 發生했다. 868年 南朝와의 國境地帶인 구이저우(貴州)에서 始作돼 화이허 流域까지 擴散된 방훈(龐勛)의 蘭은 突厥 社타부(沙陀部)와 설匹夫(契苾部)의 支援을 받아 겨우 鎭壓됐다.

    방훈의 亂이 끝난 지 不過 7年 뒤인 875年 산둥 出身 황소(黃巢)는 農民을 煽動해 班當(反唐) 蜂起를 일으켰다. 소금과 車(茶) 密賣業者가 叛亂軍의 核心 役割을 했다. 唐나라는 財政을 再建하고자 소금과 車에 對한 專賣制度를 實施했으며, 이는 소금과 車 商人들을 破産으로 몰고 갔다.

    황소는 北伐을 斷行해 880年 落陽과 長安을 占領하고 제(齊)를 세웠다. 황소는 氣品 있는 人物이었으나 雜多한 背景을 가진 60萬 大軍을 統制할 能力은 갖지 못했다. 明나라 末期 순(順)을 세운 이자성과 같이 황소에게는 特히 人材가 不足했다. 황소가 統制力을 잃어감에 따라 割據하던 節度使들의 反擊이 심해졌다. 황소는 部長 주온(朱溫)의 背反과 沙陀돌궐족 出身 안門節度使(雁門節度使) 李克用(李克用), 티베트系 탕구트族(黨項族) 首長 托鉢沙工(拓跋思恭) 等의 聯合 攻擊을 받고 占領한 지 2年 4個月 만인 883年 4月 長安을 빼앗겼다. 황소는 結局 884年 故鄕인 산둥의 泰山 隣近 狼虎山(狼虎山)에서 自決했다.

    黃巢의 亂으로 節度使들의 獨立은 되돌릴 수 없는 地境에 이르렀다. 머슴 出身 주온은 競爭者이던 兵卒 出身 棒狀節度使 이무정(李茂貞)과 沙陀돌궐족 首長 李克用을 制壓한 다음인 907年 소선제(昭宣帝)로부터 禪讓받아 카이펑(開封)을 首都로 兩(梁)나라를 세웠다.



    太祖 王建과 海上勢力의 連繫

    唐나라에 密着해 渤海를 牽制하던 新羅도 黨이 混亂期에 접어든 9世紀 初 以後 危機에 逢着했다. 王位에서 밀려난 武烈王系 김헌창(金憲昌)李 熊州(公主)에서 叛亂을 일으켰다가 中央軍에 鎭壓됐다. 王位 爭奪戰은 더 激化돼 민애왕이 弑害된 僖康王을 이어 卽位하고, 神武王은 閔哀王을 죽인 後 王位에 올랐다.

    王權 不安定은 新羅의 混亂을 加重시켰으며 中央權力이 弱化되자 軍陣(軍鎭)을 根據로 한 海上勢力이 登場했다. 軍陣은 海賊이 跋扈(跋扈)하면서 이에 對處하고자 設置한 것으로 淸海鎭(莞島), 당성진(南陽), 혈구진(强化), 패강진(黃海道 평산)李 代表的이다. 軍陣들은 唐나라 藩鎭들 및 왜, 渤海 等과의 交易을 통해 富(富)와 勢力을 함께 키웠다.

    828年 唐나라에서 돌아온 張保皐는 1萬餘 軍士를 거느리고, 淸海鎭을 中心으로 西海와 東中國海 一帶 海上權을 掌握했으며 中央에 進出해 閔哀王을 弑害하고 神武王을 卽位시키는 等 軍事力을 誇示했다.

    中央權力이 繼續 弱化되는 狀況에서 地方軍閥 진훤(甄萱·甄萱)은 韓半島 西南部에 後百濟를 세웠으며 新羅 傍系王族 出身 金弓裔(金弓裔)는 韓半島 中部에 후고구려를 세웠다. 後百濟는 江南의 五月, 南堂과 通交했으며 후고구려는 後周(後周) 等 中院 國家들과 通交했다.

    918年 金弓裔의 部長 王建(王建)李 金弓裔를 몰아내고 考慮를 세웠다. 高句麗系 海上勢力으로 推定되는 王建 一族은 혈구진과 패강진을 包含한 海上勢力과 緊密한 連繫를 갖고 있었다. 王建이 後百濟 背後地 羅州를 占領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背景이 있다. 혈구진, 패강진 勢力은 이렇듯 高麗 建國과 後三國 統一 過程에서 重要한 役割을 遂行했다.

    慶州 周邊으로 領域이 縮小된 新羅의 敬順王은 935年 高麗에 投降했다. 考慮는 936年 진훤과 맏아들 眞身檢(甄神劍) 間 葛藤으로 內亂 狀態에 處한 後百濟마저 멸망시키고 後三國을 統一했다. 高麗가 後三國을 統一할 수 있었던 것은 韓半島 北部와 滿洲를 領域으로 하는 渤海가 衰弱한 狀態에서도 强力해진 거란의 동진을 一定 期間 막아줬기 때문이다.


    五代十國

    朱全忠(朱全忠)李 黨 王室을 무너뜨린 後 中國 最後의 大分裂器인 5代 10國 時代가 열린다. 주온에서 改名한 朱全忠이 세운 後涼은 華北을 支配했으나 中國 350週 가운데 5分의 1人 70週밖에 支配하지 못하는 半쪽 政權이었다.

    4世紀 初 西晉(西晉) 末期와 같이 死海(四海)가 삼발 솥 안의 물처럼 끓어올랐다. 거란은 랴오허 流域을 中心으로 나라를 세워 몽골高原과 滿洲, 腎腸을 統合했으며 中原道 노렸다. 沙陀돌궐족 李克用의 아들 後唐(後唐) 章宗(莊宗) 이존욱(李存?)은 朱全忠의 後涼에 이어 이무정이 산시(陝西)省 西部를 中心으로 세운 氣(岐)와 王建(王建)이 쓰촨에 세운 前蜀(前蜀)을 滅했다. 後唐(沙陀突厥)은 석경당의 後進(沙陀突厥)에, 後進은 유지원의 厚한(사타돌궐)에, 後漢은 郭威(郭威)가 세운 後周(한족)에 滅亡했다.

    高麗 光宗 때 過去祭 導入에 功을 세운 雙機(雙冀)가 바로 後周 出身이다. 後唐, 後晉, 後漢 等 沙陀突厥 王朝들이 皇帝 直轄 禁軍(禁軍)을 한족 出身 爲主로 充員하다가 마침내 한족에 依해 逐出돼 한족 王朝 後周(後周)가 誕生한 것이다.

    5代(907~979) 王朝는 荒墟 流域 카이펑을 中心으로 삼았으며, 10國(國)은 地方에서 힘을 길러 중원의 사슴을 노렸다(逐鹿·축록·사슴을 쫓는다는 뜻으로 政權 또는 地位를 얻기 위한 다툼을 이르는 말).

    10國은 양저우의 오(吳), 난징의 南唐(南唐), 청두의 前蜀(前蜀)과 後蜀(後蜀), 광저우의 南韓(南漢), 타이위안의 北韓(北漢), 創社(長沙)의 初(楚), 항저우의 五月(吳越), 푸저우의 민(?), 장링의 남평(南平) 等으로 南堂이 오를 繼承하고, 前鏃이 亡하고 後蜀이 세워진 것에서 알 수 있듯 같은 時期 存在한 것은 아니다. 地理的 側面에서 볼 때 5代 王朝는 荒墟 流域, 10國 中 北韓은 산시(山西)省 中北部, 箭鏃과 後蜀은 창장 中上流, 남평과 初는 창장 中流, 吳와 南堂은 창장 下流, 五月과 민, 南韓은 各其 沿岸(沿岸)인 貯藏, 푸젠, 광둥에 位置했다.



    ‘마지막 皇帝’ 이욱의 詞

    10國 中 가장 强盛한 나라는 吳(吳)-南唐(南唐) 政權이었다. 南堂은 社가(史家)들이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 唐나라의 後繼者라면서 黨(唐)을 自處했다. 南堂은 數(隋)나라 때 以來 經濟 中心地인 장화이를 領土로 삼았기에 經濟力은 莫强했으나 軍事力은 脆弱했다. 南堂은 945年 민, 951年 秒를 倂合하는 等 한때 江南乙 統一하는 氣勢를 보였으나 955年부터 後周 世宗 市營(柴榮)李 자주 南쪽 征伐에 나서 守勢에 몰렸다. 시영은 種種 親庭(親征·賃金이 몸소 나아가 征伐)해 958年에는 양저우까지 進擊해왔다. 戰爭에 敗한 南堂은 창장 以北 14株를 後註에 割讓할 수밖에 없었다. 南堂의 歷代 君主들은 지나치게 文弱(文弱)했다. 南堂의 마지막 皇帝 李煜은 아버지 이경과 함께 사(詞)의 名人이었다. 李煜은 975年 宋나라君의 捕虜가 돼 카이펑으로 끌려가 유폐당한 뒤 故國을 그리워하는 虞美人(虞美人·YuMeiRen)이라는 題目의 社를 지었다. 虞美人은 現在 中國人이 좋아하는 紗의 하나다.

    春花秋月何時了 (봄꽃과 가을 달은 언제 끝날까)
    往事知多少 (눈에 삼삼하니 모두 지난 일이던가)
    小樓昨夜又東風 (작은 樓閣에는 어젯밤에도 東風이 불었다)
    故國不堪回首月明中 (故國으로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건 밝은 달뿐)
    雕欄玉?應猶在 (아름다운 欄干과 玉을 깎아 만든 階段은 그대로 있겠지)
    只是朱顔改 (어이 이리 靑春만 가버렸는가)
    問君能有幾多愁 (묻건대 그대 마음속 水深이 얼마더냐)
    恰似一江春水向東流 (東쪽으로 흘러가는 봄 江물과 같아)


    唐나라 末期-5代 時代 간쑤(河西回廊) 統治權은 한족 張氏와 조氏가 次例로 掌握했다. 唐나라 末期 節度使 장의조(張義朝)는 河西回廊을 占領한 吐蕃 勢力을 몰아내고 ‘唐나라의 臣下’를 自處했다. 張氏에 이어 920年 河西回廊을 掌握한 弔意金은 漿液(張掖)의 위구르 公主와 政略 結婚했다. 弔意金은 신장(新彊)의 오아시스 國家 호탄(和田)과의 友好를 위해 딸을 시집보내 호탄왕과도 親姻戚의 緣을 맺었다. 弔意金을 繼承한 조원충 時代에 조氏 政權은 最高의 全盛期를 누렸다. 조원충 亦是 弔意金과 마찬가지로 호탄과의 關係를 重視했다. 조氏 政權은 撞球트族 暑夏가 蕃盛하기 始作한 10世紀 말 以後 衰落의 길을 걸었다.


    渤海-거란 20年 戰爭

    이런 가운데 後周 世宗 시영은 中央軍을 强化하고 地方軍을 약화시킴으로써 節度使의 自立性을 줄여나가는 政策을 取했다. 그는 “攻取(攻取)의 길은 반드시 容易한 것을 먼저 한다”는 王朴(王朴)의 先以後亂(先易後難) 戰略에 따라 西쪽으로는 後蜀(後蜀)李 占居하던 산시(陝西)의 晋州, 封賞을 奪取하고 南쪽으로는 南堂을 攻擊해 창장 以北 14個 株를 確保했다.

    中國이 5代 10國의 亂世에 접어들기 直前 다링허-랴오허 流域에서 거란(契丹)李 興起했다. 거란은 4世紀 初 毛用선비에게 滅亡당한 우문선非 勢力이 시라무렌 江 流域에서 퉁구스系와 突厥(투르크)系 不足을 統合해 形成된 民族이다. 거란은 朝鮮(古朝鮮을 말함)과 같은 8兆 法琴(法禁)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 解禁(奚琴)을 傳해준 海族(奚族)은 거란 系列의 種族으로 內몽골 쯔펑(赤峰) 一帶에 居住했다.

    시라무렌 江-다링허 流域의 거란족 首長 耶律阿保機(872~926)는 907年 거란을 建國하고, 해(奚)와 室韋(室韋)를 征伐한 다음 랴오둥에 對한 支配權을 놓고 渤海와 20年 戰爭에 突入했다. 耶律阿保機는 몽골高原에서 키르키스族을 逐出했으며 926年 渤海를 멸망시켰다. 耶律阿保機는 거란 文字를 創製하는 等 거란족의 民族意識을 鼓吹하는 데도 힘썼다.

    거란의 王妃 不足은 위구르 系統 乙室氏(乙室氏)와 발리氏(拔里氏)였다. 을실씨와 발리氏는 스스로를 한나라 丞相 蕭何(蕭何) 家門에 비겨 邵氏(蕭氏)라 했다. 考慮를 侵攻한 蕭遜寧과 蕭排押이 왕비족인 邵氏 出身이다.

    耶律阿保機를 繼承한 野率덕광은 936年 석경당을 도와 後唐(後唐)을 멸망시키고, 後進(後晋)을 세워줬으며, 그 代價로 베이징 附近 연운 16株를 割讓받았다. 그는 석경당의 後繼者 席中귀가 約束을 지키지 않자 946年 카이펑을 占領하고 後進을 멸망시켰다.
     
    野率덕광 事後(死後) 거란은 內紛에 빠졌다. 遊牧國家로 남을 것인가. 韓華(漢化)의 길을 걸을 것인가. 國家 進路와 皇帝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內亂 中에 世宗과 穆宗이 殺害됐다. 국수派(國粹派)는 ‘거란(契丹)’이라는 國號, 韓華派(漢化派)는 ‘요(遼)’라는 한족式(漢族式) 國號를 選好했다. 어느 쪽이 政權을 잡느냐에 따라 國號가 ‘거란’과 ‘요’를 왔다갔다 했다. 後날 女眞族의 金나라가 13世紀 初 몽골의 大攻勢로 인해 큰 混亂에 빠지자 랴오허 流域 거란족은 그 틈을 타 大遼收國(大遼收國)을 세웠다. 몽골에 投降하는 것을 反對한 大遼收國 一部 勢力이 1216年 鴨綠江을 건너왔다가 1219年 現在의 平安南道 江東城에서 高麗軍, 몽골軍, 동진군(東眞軍)에 包圍당한 끝에 5萬~6萬 名이 生捕됐으며, 그中 一部가 原州, 堤川, 忠州 等으로 集團 移住됐다. 忠北 堤川 朴達재 近處에 거란족 集團村 거란場(契丹場)의 痕跡이 남아 있다.



    宋, 天下 統一 完成하다

    黨(唐) 中企 탕구트族은 吐蕃에게 밀려나 東北쪽으로 移動해 간쑤와 산시(陝西) 西北部 地域에 定着했다. 部族長 托鉢沙工은 黃巢의 亂(875~884) 때 長安 奪還을 支援해 唐나라의 節度使로 任命됐으며 李氏(李氏)를 下賜받았다. 5大 10國 時代를 거치면서 탕구트는 獨立했다.

    宋나라 初期 西夏와 송은 沙陀突厥界 北韓(北漢), 요(遼), 吐蕃(吐藩) 等과의 關係에서 利害關係가 一致했다. 暑夏는 宋나라가 北韓(北漢) 수도 진양(타이위안)을 攻擊했을 때 軍事的으로 支援하기도 했다. 暑夏는 이계천 時代에 宋나라 一邊倒에서 벗어나 오르도스와 간쑤, 신장 方面으로 勢力을 뻗어온 거란과도 關係를 맺었다. 이계천은 遼나라의 冊封을 받아들여 下國王(夏國王)에 封해졌다. 이계천은 尿意 後援을 背景으로 吐蕃, 宋나라와 자주 싸워 領土를 넓혔다.

    遼나라가 西夏를 支援한 것은 宋나라와의 戰爭 때문이었다. 宋나라는 西夏에 옆구리를 攻擊당할까봐 不安을 느꼈다. 1004年 요(遼)와 송(宋)李 ‘全然(?淵)의 맹(盟)’을 締結하자 吐蕃, 宋나라와의 戰爭에 지친 暑夏는 宋나라에 接近했다. 이에 앞선 958年 後周 世宗은 창장 以南을 征服하기에 앞서 背後의 威脅을 除去하고자 內亂 狀態이던 거란을 向해 北進했다. 後朱君은 연운 16株에 屬한 와교관, 益鎭管 等을 突破하는 等 進擊이 순조로웠다. 이때 갑자기 世宗이 發病했으며 카이펑으로 回軍했다가 959年 39歲의 나이로 死亡하고 말았다.

    趙匡胤(趙匡胤)은 世宗이 死亡하기 直前 귀덕(歸德) 節度使 兼 總司令官에 任命되는데, 귀덕은 春秋戰國時代 송(宋)나라가 있던 地域이다. 世宗乙 繼承한 것은 7歲에 不過한 始終勳(柴宗訓)이었다. 趙匡胤은 軍部의 支持를 받아 始終훈을 밀어내고 宋나라를 세웠다. 不過 53年 만에 後涼(後梁)-後唐(後唐)-後進(後晋)-後漢(後漢)-후주(後周) 다섯 王朝가 歷史의 舞臺 뒤로 사라졌다. 當時 거란은 內戰 狀態이던 까닭에 後周-宋 交替期를 利用할 수 없었다.

    송태조(宋太祖) 趙匡胤은 따뜻하면서도 결氣(決氣)가 있는 人物이었다. 趙匡胤은 現代 中國人이 좋아하는 指導者 中 하나다. 外孫子 우문천(宇文闡)을 비롯한 우문氏 皇族들을 虐殺한 隋文帝 良犬과는 달리, 趙匡胤은 始終훈과 그의 親姻戚을 極盡히 待遇했다. 宋나라의 시씨 保護는 趙匡胤 當代뿐만 아니라 北宋과 南宋 300年間 이어졌다. 이러한 까닭인지 시씨의 後孫은 南宋 最後에 벌어진 원(元)나라 軍隊와의 마카오 西쪽 礙産도(厓山島) 戰鬪에서 宋나라 皇室과 運命을 같이했다.

    趙匡胤은 後周 世宗 시영이 깔아놓은 天下 統一의 길을 着實히 걸어갔다. 宋나라는 “軍事力이 弱한 南쪽을 먼저 치고, 軍事力이 剛한 北쪽은 나중에 친다”는 뜻의 善男後北(先南後北) 戰略으로 弱한 고리부터 次例로 끊어나가면서 中國을 하나로 묶어냈다. 趙匡胤은 남평(963), 後蜀(965), 南韓(971), 南唐(975)을 次例로 征伐했다. 趙匡胤을 繼承한 동생 조광의(趙匡義)가 統一 大業을 完成했다. 宋나라의 中國 統一은 △거란의 內紛 △吐蕃의 弱化와 吐蕃-西夏 戰爭 △高麗의 거란 牽制 等 國際 情勢가 宋나라에 유리하게 展開된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백범흠
    ● 1962年 慶北 醴泉 出生
    ● 연세대 新聞放送學科 卒業, 政治學博士
    ● 駐中國大使館 總領事
    ● 現 駐프랑크푸르트總領事館 總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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