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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 모으는 게 佛敎 리더십”|新東亞

INTERVIEW

“사람의 마음 모으는 게 佛敎 리더십”

佛敎TV 되살린 聲優 스님의 內功

  • 최호열 記者|honeypapa@donga.com

    入力 2017-10-0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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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曹溪宗 ‘前戒大和尙’ ‘元老議員’
    • 佛敎TV 136億 원 負債 解決…總 300億 社屋 마련도
    • “풀숲에 가려진 작은 바위처럼 살고 싶었다”
    • 父母 靈魂 맑아야 좋은 因緣의 子息 얻어
    • 經은 眞理 案內 指導, 禪은 그 길을 걷는 隨行
    스님은 遂行者다. 利益을 탐하는 物慾과는 距離가 먼 存在다. 反面 ‘經營’은 慈善事業이 아닌 以上 利益을 追求해야 한다. 더구나 株式會社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職員 100名이 넘는 株式會社를 經營하는 스님이 있다. 게다가 負債가 136億 원이나 되는 廢業 直前의 會社를 맡아 7年 만에 빚을 淸算했을 뿐 아니라, 江南에 300億 원臺에 이르는 社屋 2채를 所有할 程度로 經營을 頂上에 올려놓았다. 웬만한 經營專門家度 이루기 힘든 成功神話를 만든 BTN佛敎TV(以下 佛敎TV) 會長 석성우(76) 스님의 內功이 궁금했다.

    인터뷰 要請에 스님은 “別거 아닌 이야기로 ‘신동아’의 權威를 망가뜨릴까 걱정된다”며 婉曲하게 辭讓했다. 몇 番 懇請한 끝에 우격다짐하듯 佛敎TV 會長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은 職員들이 出勤한 後인 9時 20分쯤 出勤한다. 職員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打倒 할아버지 같은 微笑만 지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드물다. 그렇다고 사람을 忌避하는 性格은 아니다. 아무래도 會長이란 地位는 職員들에게 어렵고 不便한 存在다. 職員들이 不便하지 않게 하려는 스님의 配慮다. 길을 걸을 때도 幸여 작은 微物이 밟히지 않을까 操心스레 걷는 修道僧의 마음이 이런 것이리라.



    負債 136億 원

    1995年 케이블TV放送으로 開局한 佛敎TV는 經營 不實 等으로 5年 만인 2000年, 빚이 136億 원에 達했고 賃借料를 내지 못해 쫓겨날 狀況이었다. 150名이던 職員도 大部分 나가고 30餘 名만 남았다. 그해 末에 門을 닫을 것이란 所聞이 播多했다.



    어떤 緣由로 難破船 같던 佛敎TV를 맡으신 건가요.
    “慶尙道 말로 ‘우짜다’ 그렇게 됐어요(웃음). 當時 佛敎TV에서 胎敎 講義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擔當 PD가 ‘이제 더는 못 찍게 됐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放送局이 門을 닫게 됐다고 하더군요.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제가 住持로 있는 大邱 把溪寺에 돌아갔는데, 아는 분에게서 電話가 왔어요. 自己가 땅이 있는데 그 땅을 팔아 30億 원을 佛敎TV에 보시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佛敎TV 副社長과 함께, 當時 社長도 없었어요, 仁川에 있는 그분을 만나러 갔어요. 그리고 돌아오는데 문득 安養에 있는 한마음船員이 떠올랐어요. 副社長과 함께 無酌定 찾아갔죠.”

    한마음船員 住持이던 蕙園 스님과는 親分이 있었나요.
    “全혀 모르는 사이였죠. 事實, 比丘가 比丘尼에게, 그것도 처음 보는 比丘尼 스님에게 付託한다는 게 제 自尊心이 許諾하지 않는 일이에요. 하지만 佛敎TV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勇氣를 냈죠. 蕙園 스님에게 佛敎TV는 꼭 있어야 한다, 科學의 힘을 빌려 부처님 말씀을 世上에 傳해야 한다고 10分 程度 說明을 드렸어요. 그러자 스님께서 欣快히 5億 원을 布施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처음엔 귀를 疑心했죠. 500萬 원, 5000萬 원도 아니고 5億 원은 想像도 못 했거든요.”

    처음엔 單純히 ‘도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托鉢(托鉢)을 한 게 漸漸 더 깊이 關與하게 됐다고 한다. 副社長을 비롯한 任員들의 懇請을 뿌리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社規에도 없는 會長이란 감투를 쓰게 됐고, 2萬 名이 넘는 株主들도 스님을 믿고 株主總會에서 80% 감자(減資)를 議決하며 苦痛을 分擔하기로 했다.


    집집마다 法堂을

    株主들이 80% 감자에 쉽게 同意하던가요.
    “會社가 亡해 所有 株式이 休紙 조각이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實際 一角에선 佛敎TV를 廢業한 後 다시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그러면 負債 136億 원을 안 갚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죠. 因果가 있는 거니까 갚을 것은 다 갚고, 佛敎TV에 投資한 株主들의 불審도 保護해야 한다고 제가 못을 박았죠.”

    會社를 맡으실 때 具體的인 經營 靑寫眞이 있었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전 돈도 없고, 經營이 뭔지도 몰라요. 貸借對照表를 볼 줄도 모르고, 放送에 對해선 더더욱 몰라요. 하지만 左顧右眄할 일이 아니고 앞만 봐야 한다고 믿었어요. 願力(願力·부처에게 빌어 圓을 이루려는 意志)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제가 생각한 건 하나였어요. 사람들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全國 査察을 돌아다니며 法會를 열고 圓佛(願佛) 모시는 일을 始作했죠.”

    經營하시며 어려웠던 點은.
    “當時만 해도 스님들이 放送을 理解하지 못했어요. 言論에 오르내리고 放送에 나가는 것을 ‘床을 낸다’고 해서 터부視했어요. 법정 스님도 法文 모습을 撮影하려니까 ‘카메라 나가라’고 소리치셨죠. PD가 그래서 못 찍고 돌아왔다고 하기에 제가 ‘스님이 法會하다 말고 카메라 뺏으러 뛰어 내려오지는 않을 것 아니냐. 끝까지 찍어라’고 다시 보냈어요. 그렇게 해서 法定 스님 法文을 28時間 錄畫해 放映했는데, 그게 佛敎TV에 큰 도움이 됐죠. 海印寺 住持스님에게도 그랬어요. 海印寺 佛事에 信徒가 가장 많이 모여도 2000~3000名입니다. 하지만 스님의 法文을 放送으로 내보내면 最小 50萬 名에서 100萬 名이 봅니다. 집집마다 法堂을 만드는 것이라고 說得했죠.”



    佛敎의 리더십

    職員들이 잘 따르던가요.
    “처음엔 못미더워했죠. 한 몇 달 있다 나갈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會社 收入과 支出 內譯을 每달 社員들에게 公開했어요. 그리고 月給 한 푼 안 받고, 法人카드도 안 썼어요. 運轉技士가 休暇를 가 택시를 탈 때만 썼죠. 2年을 그렇게 하니까 勞組에서 먼저 經營陣을 믿으니까 그만 公開하라고 하더군요. 윗물이 맑으면 아래는 저절로 맑아져요.”

    放送은 廣告가 重要한데, 그러려면 스님께서 直接 營業도 뛰어야 하잖아요.
    “放送을 만들고, 廣告를 受注하는 일은 다 擔當者들이 있으니 그들을 믿고 맡겨야죠. 믿고 맡기면 그걸로 끝이에요. 사람을 못 믿으면 父母兄弟도 못 믿게 되고, 모든 게 不安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안 돼요. 제가 職員을 믿으니 職員들도 저를 믿게 되고, 그러니까 함께 佛敎TV를 살리기 위해 힘을 合하게 되더라고요.”

    經營이 믿음만으로 되는 건 아닐 텐데.
    “그게 世上과 절間의 差異에요. 俗世는 돈을 벌 計劃을 잘 세우는 게 經營리더십이라지만 佛敎는 完全히 달라요. 절은 믿음이 形成되면 저절로 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 절의 스님이 遂行이 깨끗하고 信行이 바르면 저절로 信徒가 늘어나요.”

    佛敎TV 發展을 위한 앞으로 構想이 있다면.
    “그런 것 없어요. 그저 부처님 말씀만 따라 하면 돼요. 부처님 말씀을 忠實히 따르면 現實에 다 適應이 돼요. 視聽率? 그런 건 神經 안 써요. 우리가 잘 만들면 많은 사람이 보고, 시원찮게 만들면 佛子도 안 보는 法이니까요.”


    文人 스님

    聲優 스님은 고송 스님을 恩師로 出嫁해 1963年 把溪寺에서 沙彌戒, 1967年 海印寺에서 具足戒를 守志했다. 梵魚寺 佛敎專門講院을 卒業하고 해인叢林 律員을 修了, 曹溪宗의 代表的 學僧으로 손꼽힌다. 把溪寺 住持, 홍콩 홍법원 院長 等을 歷任했으며, 現在 桐華寺 율週로 있다. 曹溪宗 前戒大和尙이자 元老議員으로 宗團의 큰 어른이기도 하다. 文學에도 造詣가 깊어 月刊文學 新人賞과 中央日報 新春文藝에 當選됐으며 여러 卷의 詩集과 ‘다와 선’ 等 佛敎 著書를 펴냈다. 정운時調文學賞과 多寸文學賞을 受賞했다.

    스님에게 佛家에 歸依하게 된 契機를 묻자 “正말 오랜만에 듣는 質問”이라며 웃었다. 事實, 스님에게 出家 前 이야기를 묻는 것은 例가 아니다.

    “1963年, 高等學校를 卒業하자마자 歸依했죠. 절에 온 理由는 한 世上을 태어나지 않은 듯 살고 싶었어요. 풀숲에 가려진 작은 바위처럼 살고 싶었어요. 그런 方法으로 절에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前부터 절에 다니셨나요.
    “그렇지 않아요. 참 異常한 게, 어느 날인가부터 꿈에 스님이 나타났어요. 제가 活潑한 性格인데, 그런 날은 하루 終日 마음이 시무룩해져요. 敎室에 앉아 있어도 先生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멀리 窓밖만 멍하니 보게 되고…. 그런데 처음엔 스님이 멀리 지나가듯 보였는데 時間이 지날수록 漸漸 가까워지는 거예요. 卒業할 때쯤 되니까 스님 얼굴이 보일 程度로 가까워졌어요. 귀의 前 佛敎와의 因緣은 그게 다예요.”

    出家하겠다고 했을 때 父母님 反應은.
    “어느 父母님이 子息이 出家하겠다는데 ‘그래라’ 하겠어요. 當然히 말 안 하고 몰래 逃亡 나왔죠. 當時만 해도 出家한 사람 大部分이 그랬어요. 只今은 父母에게 許諾을 받았는지 確認해서 許諾을 못 받았으면 돌려보내요.”



    苦惱의 時間

    집에서 많이 찾았을 텐데.
    “먹고살기 힘든 時節이라 찾아다닐 엄두를 못 냈겠죠. 저 말고도 먹여 살려야 할 子息이 많았고, 慶南 밀양읍에서도 40里는 떨어진 산내면의 작은 마을에 살았으니 찾을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出嫁한 지 한참 後에 어머니가 찾아오셨어요. 僧侶 生活을 못 하게 하려고 온 건 아니고 동생이 結婚하는데 알고는 있으라며 알리러 온 것이었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字도 모르시는 분이었어요. 하지만 마음이 맑은 분이었죠. 出家 前 일인데, 하루는 兄嫂와 누나가 아침을 하다가 다퉜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둘을 房으로 불러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는 當身이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지으시는 거예요. 제가 ‘왜 어머니가 밥을 짓느냐’고 물으니까 ‘화내는 마음으로 밥을 지으면 그 밥을 먹는 사람이 일할 때 제대로 일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出嫁한 저를 찾아오셨을 때도 곧바로 저를 찾지를 않으셨어요. 當身 혼자 境內를 다 밟아보며 度量의 기운을 느껴봤다고 하시더군요. 中間에 저를 보시고서도 부르지 않고 제가 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제 房에서 기다리셨더라고요. 그렇게 생각이 깊고 마음이 맑은 분이셨어요.”

    出家를 後悔한 적은 없나요.
    “率直히 처음엔 煩悶이 많았죠. 한番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供養 가는 것도 빠지고 一週日 넘게 울기만 했어요. 漠然하게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다른 代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열흘 程度 그런 苦惱의 時間을 보내고 나니까 마음이 平穩해지더군요. 그 後로는 그런 생각을 한 番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면서 깨달음을 얻은 건가요.
    “그 나이에 무슨 깨달음을 얻었겠어요. 但只 ‘아, 佛經 工夫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本格的으로 工夫를 始作했죠.”



    學僧과 禪僧

    學僧의 길에 들어선 건가요.
    “처음 절에 들어가면 3年 동안 經典을 工夫해요. 저는 通度寺에서 始作해 1967年 범어사에서 卒業을 했죠. 그리고 海印寺로 갔어요. 漠然하게 一馱 스님이 戒律의 代價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서 工夫하자 해서 찾아간 거죠. 聖哲 스님도 거기 계셨고요. 때마침 海印寺에서 叢林을 만들었어요. 叢林이 構成되려면 ‘江原’ ‘船員’ ‘律員’ ‘念佛院’이 있어야 하는데, 율원이 없던 次에 저를 包含해 4名이 律藏을 工夫하겠다며 왔으니 欣快히 받아주었죠. 그런데 工夫할 冊이 없다고 하니까, 律師인 字韻 스님이 海印寺 大寂光殿에서 3000倍를 올린 後 聖哲 스님에게 冊을 빌리라고 하더군요. 當身이 聖哲 스님에게 말을 해놓겠다고 하면서. 4名이 모두 3000倍를 하고 聖哲 스님에게 갔더니 冊을 빌려주시더군요.”

    聖哲 스님이 冊을 많이 所藏하고 계셨나봅니다.
    “聖哲 스님은 백련암에 書庫를 만들어 5000卷 以上 保管하고 계셨어요. 大部分이 珍貴本이었죠. 저희에게 續藏經(續藏經)을 빌려주셨는데, 當時 우리나라에 2卷밖에 없는 冊이었어요. 한 卷은 國立圖書館에 있고 나머지 한 卷을 聖哲 스님이 갖고 계신 거죠. 그걸 하루 終日 死境(寫經·佛敎經典을 베껴 쓰는 일)하며 工夫했죠. 모르는 글字가 있으면 玉篇을 찾아보고, 뜻을 모르면 一打 스님에게 여쭈어보면서 2年間 戒律만 工夫했어요.”

    戒律을 工夫한 뒤에는 뭘 하셨나요.
    “律員을 마치고 善防 生活을 始作했어요. 어느 程度 배움이 닦이면 線(禪)으로 가게 돼 있어요. 警(經)李 眞理의 길을 案內하는 地圖라면, 線은 그 길을 直接 걷는 遂行이죠. 길을 아는 것과 直接 가는 것은 다른 것이니까요.”
    當時 스님이 道를 깨치기 위해 얼마나 熾烈하게 精進했는지 스님의 손에 그 痕跡이 남아 있다. 스님은 왼쪽 검指손가락을 蓮池(燃指)供養한 것으로 有名하다. 緣由를 물었지만 “한창 젊었을 때 철없을 때 한 일”이라며 拈華微笑만 지었다.



    ‘밥 먹으러 가자’

    스님은 天生 學僧의 길을 걸어야 할 運命이었던 模樣이다. 1979年 最初의 佛敎專門敎育機關인 中央僧伽大學을 만든 것.
    “當時 佛敎界가 젊은 스님들의 知的 欲求를 充足시킬 與件이 안 되어 있었어요. 큰 절에 講院이 있지만 그걸 卒業하면 더 以上 배울 機會가 없어요. 東國大에 佛敎學科가 있긴 하지만 돈이 없는 스님, 學歷이 안 되는 스님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죠. 그래서 講院을 마친 스님들이 좀 더 工夫할 수 있는 場을 마련하자고 몇몇 스님이 意氣投合해 學院을 열었죠. 場所를 내주는 절이 없어 헐리기 直前의 比丘尼 査察을 빌려 始作했죠.”

    學院으로 登錄해 始作한 中央僧伽大學은 젊은 스님들끼리 꾸려가기엔 너무 벅찼다.
    “當時 曹溪宗 總務院長이 聖水 스님이었어요. 범어사에 있으면서 因緣을 맺어 잘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같이 點心을 먹자고 해요. 그래서 찾아가 ‘내 원을 들어주면 같이 點心을 먹고 아니면 點心을 먹을 必要도 없다’고 어깃장을 놓았죠. 스님께서 ‘뭔데’ 그러時機에 事情을 말씀드리고 中央僧伽大學을 曹溪宗에서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웃으시며 ‘밥 먹으러 가자’고 하시더군요(웃음).”

    다른 스님들은 關心도 없는 일에 왜 그렇게까지 한 건가요.
    “使命感이죠. 前 이건 꼭 해야 한다고 하면 하는 所信이 있거든요. 工夫하려는 젊은 스님의 欲求를 充足시켜야 佛敎가 發展하니까요.”

    중앙승가대학은 只今 大學敎育機關이 되었을 뿐 아니라 碩·博士 學位를 授與하는 大學院까지 두고 있다. 동국대 佛敎學科보다 더 많은 스님을 輩出해 曹溪宗을 이끌고 있다.


    業報所生 願力所生

    스님은 中央僧伽大學을 曹溪宗에 넘긴 後 1981年 臺灣으로 건너갔다. 1984年부터는 홍콩 홍법원에 머물며 布敎 活動을 했다. 홍법원은 韓國人을 위해 만든 布敎院이다. 그런데 스님은 胎敎 專門家이기도 하다. 37年째 胎敎를 講義하고 있다. 冊도 여러 卷 펴냈다.

    結婚하지 않은 스님과 胎敎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제가 어이없어 웃을 때가 있어요. 比丘가 웬 胎敎냐고. 어느 날 臺灣의 書店에 갔는데, 冊 한 卷이 눈에 들어왔어요. ‘胎敎와 衛生學’이란 冊인데, ‘胎敎’란 글字를 보는 瞬間 온몸이 感電된 듯 찌릿한 戰慄이 느껴졌어요. 只今부터 내가 할 것은 저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世上에 第一 重要한 게 사람이 태어나는 일이잖아요.”

    硏究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胎敎라는 話頭는 잡았는데, 아무리 精進을 해도 解答이 안 나왔어요. 臺灣에 있는 胎敎에 關한 冊과 放送을 다 보고 日本까지 가서 胎敎에 關한 것을 工夫했지만 마음이 시원하지가 않았어요. 世上 知識이 옳고 그름을 떠나 마음에 차지 않은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禮佛을 하고 坐禪을 하는데, ‘아, 이거다’ 싶은 게 떠올랐어요. 輪廻業報를 바탕으로 胎敎를 보니까 확 풀리는 거예요. 그때부터 本格的으로 硏究하기 始作했죠.”

    스님의 胎敎學을 要約한다면.
    “胎敎라는 게 IQ와 EQ가 높은 아이가 태어나게 하는 일이잖아요.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自己 業으로 태어나는 것이고(업보소생),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원(願)으로 태어나는 것이죠(원력소생). 子息은 自身 業의 힘으로 父母를 選擇해요. 業은 서로 당기는 힘이 있거든요. 그렇게 맺어지는 父母와 子息의 聯銀 크게 4가지가 있어요. 前生에 서로 은혜로운 因緣으로 태어난 境遇, 빚을 갚기 위해 子息으로 태어난 境遇, 反對로 빚을 받기 위해 태어난 境遇, 마지막으로 前生의 惡緣으로 태어난 境遇죠. 따라서 妊娠 後에 하는 胎敎는 늦어요. 業으로 태어난 아이는 이미 前生의 業이 定해져 있거든요.”



    맑은 마음

    父母가 願力所生으로 좋은 因緣의 子女를 얻게끔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내 靈魂이 맑으면 過去 因緣에서 맑은 靈魂이 子息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맑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게 冥想이에요. 그렇게 하면 佛敎로 말하면 業이 적은 사람이 많이 태어나는 것이고, 그게 犯罪가 적은 좋은 社會를 만드는 것이죠.”

    妊娠 中 胎敎도 必要하지 않나요.
    “重要하지요. 父母의 맑은 마음이 아이의 마음을 맑게 하니까요. 産母가 물을 한 盞 마시면 5分 程度 지나서 胎兒에게 傳達돼요. 마찬가지로 産母가 먹은 마음도 胎兒에게 卽時 傳達돼요. 그러니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생각을 해야 胎兒도 健康하고 좋은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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