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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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 英語 : Trot )는 大韓民國 音樂 장르 이다. 定型化된 反復的인 리듬과 펜打토닉 스케일 音階 (五音音階), 그리고 韓國 民謠 의 影響을 받은 떠는 唱法이 特徵이다. 또한 트로트는 美國 의 춤曲인 폭스트롯 ( 英語 : Foxtrot )이 어원 [參考 1] 이며, 韓國, 日本 , 美國 , 그리고 유럽 國家들의 다양한 音樂들이 混合하여 誕生했다 [2] .

歷史 [ 編輯 ]

日帝 强占期 [ 編輯 ]

韓國 大衆歌謠 의 歷史는 1920年代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 草創期에 있어서는 《辭意 讚美》(1926)의 윤심덕 을 비롯해 《落花流水》(1927, 김서정 作詞/作曲)의 이정숙 이나 《세동무》(1928)의 채동원 , 《暗路(暗路)》(1930)의 김연실 , 그리고 《봄노래 부르자》(1930, 김서정 作詞/作曲)의 채규엽 等이 代表的인 歌手였다. 한便 日本 엔카 의 飜譯·飜案 노래도 流入해서 1930年代 中盤에 大衆歌謠 의 樣式으로 定着된 것이 트로트다 [4] . 特히 ‘라시도美派’의 短調 5音階를 使用하거나, ‘도레미솔라’의 莊祖 5音階를 ‘라’의 比重을 높여 使用하는 特徵은 日本의 影響을 받아 形成된 것이다 [4] . 이 새로운 樣式은 臣民요 와 더불어 日帝强占期 大衆歌謠의 兩大山脈이 되었는데 日帝强占期에 트로트라는 名稱은 없이 ‘ 流行歌 ’, ‘流行小曲’ 等으로 불렸다. 트로트라는 名稱이 定着한 것은 1960年代 中盤이다 [4] .

1930年代 中後半으로 이르러서는 音盤産業과 라디오 放送으로 대표되던 巨大 媒體가 자리 잡게 되었다. 主要 作品으로는 30年代 中後半 트로트의 主流化를 決定한 이난영 의 《木浦의 눈물》이나 남인수 의 《哀愁의 小夜曲》, 《감격시대》 以來 황금심 의 《알뜰한 當身》이나 김정구 의 《눈물 젖은 豆滿江》 等이 있다.

日帝가 民族抹殺政策을 施行하며 親日 歌手들의 活動과 함께 엔카 性向을 띤 노래들이 늘어나게 되었지만 韓國 固有의 情緖를 담은 노래 또한 維持되고 있었다.

光復 以後 ~ 1950年代 [ 編輯 ]

光復 以後 韓國에서는 日帝殘滓 淸算이라는 雰圍氣 속에서 解放 前의 大衆歌謠는 倭色 歌謠로 非難의 對象이 되었다 [5] . 1949年 大韓民國 政府는 倭色歌謠와 低速歌謠를 退治하고 愛國精神을 鼓吹할 노래를 普及할 目的으로 國民歌謠普及運動을 展開하였다 [6] . 그리고 1956年에는 문교부와 國民開創運動 推進會議 共同主催로 《倭色風 歌曲 排擊, 啓蒙 講演會》가 開催되었다 [5] .

이러한 渦中에서도 1947年 에 데뷔하여 《新羅의 달밤》을 크게 히트시킨 賢人 1950年代 까지 活潑한 活動을 통해 많은 名曲을 發表하였다.

1950年 韓國 戰爭 이 勃發하면서 戰爭 期間 동안 賢人의《전우여 잘 자라》, 신세영 의《전선야곡》과 같은 戰爭歌謠가 流行하기도 했지만, 休戰 以後에는 戰爭의 아픔과 失鄕民의 悲哀를 그린 賢人의 《 굳세어라 金錞아 》, 남인수 의 《 離別의 釜山停車場 》과 같은 曲이 流行했다. 特히 1954年 이해연 이 發表 한 《 斷腸의 彌阿里고개 》는 韓國 戰爭의 아픔을 깊이 담아 냈다는 評價를 얻어 크게 히트 했다.

韓國 戰爭 前後로 越北한 作家들의 作品은 發行禁止措置가 取해지기도 했는데, 作曲家·作詞家나 歌手의 많은 曲도 發行禁止處分을 받았다. 代表的으로 朴在鴻 의 《惟政 千里》와 같은 曲을 비롯해 많은 曲이 1988年 까지 發行되지는 않았으나, 人氣를 끌어 노래는 불리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1957年 에는 ‘엘레지의 女王’이라는 別名을 가진 大韓民國의 代表 歌手 李美子 가 데뷔했으며, 1959年 頃부터 LP판의 時代가 始作되었다. 1950年代 後半에는 高學歷의 歌手가 登場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 出處 必要 ] 또한 트로트는 왈츠 , 블루스 , 탱고 , 맘보 , 룸바 , 부기우기 等과 더불어 ‘리듬’의 하나로 看做 돼 앞에 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例를 들어 當時에 發表 된 《늴리리 맘보》, 《비의 탱고》, 《其他 浮氣》와 같은 曲들은 트로트 리듬을 基礎로 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1950年代까지 트로트를 하나의 形式이나 장르로 보지 않았던 것은 分明하다.

1960年代 ~ 1970年代 [ 編輯 ]

트로트는 1960年代 以後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이 장르가 뽕짝이라는 別稱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다. 1960年代 中盤 新聞이나 雜誌에서는 트로트와 뽕짝이라는 말이 混用되고 있었고, 이 가운데 뽕짝은 卑下하는 性格이 剛해서 漸次 트로트라는 말로 代替됐음을 알 수 있다. LP판의 時代로 접어들면서 트로트는 한層 더 發展되어 갔다. 特히 1959年 에 데뷔한 李美子 는 1960年代 旺盛한 活動을 하는 歌手 中 하나로 손꼽히며 이 時期에서 頂上으로 올라 트로트의 中心에서 서 있던 歌手다. 그리고 최희준 , 金相姬 等 高學歷 歌手들이 登場 하면서 學士 出身 歌手들이 注目을 받았다. 美8軍 舞臺에서 活動하다가 데뷔한 玄美 의 《밤안개》가 人氣를 끌었다. 또한 1961年 韓明淑 이 發表韓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크게 人氣를 끌었으며, 프랑스 의 샹송 歌手 이베트 지로 日本 河馬무라 미치코 等이 리메이크하면서 大韓民國 뿐만 아니라 東南아시아圈까지 크게 流行하기도 하였다 [7] . 1966年 에는 《同宿의 노래》로 데뷔한 文珠蘭 이 있었는데 허스키한 목소리가 魅力的인 歌手로 손꼽혔다.

1967年 에는 南珍 이 부른 《가슴 아프게》가 크게 히트했고, 같은 해에는 그의 라이벌이자 後日 國民歌手로 불리는 羅勳兒 가 데뷔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두 名의 新人歌手가 登場하였다. 그런가 하면 姊妹 歌手들도 많은 活動을 했는데 《워싱턴 廣場》, 《鬱陵島 트위스트》等을 부른 鄭氏스터즈 를 비롯 해 《男性 禁止區域》, 《花津浦에서 맺은 사랑》等을 부른 李氏스터즈 , 《麻布終點》, 《三千浦 아가씨》等을 부른 銀방울 姊妹 가 有名하다.

1970年 代에는 新人 歌手였던 南珍 , 羅勳兒 가 라이벌 2人 體制를 이루어 大韓民國 歌謠界를 주름 잡았다. 이 時期에는 筒기타 歌手, 포크송 歌手 等 여러 장르의 歌手들이 大擧 登場하였지만 트로트 歌手였던 南珍, 나훈아의 人氣가 더 많았기 때문에 트로트가 아직까지 掌握하고 있었다. 特히 南珍은 팝 스타일과 빠른 템포의 트로트를 선보였으며 나훈아는 正統 트로트를 主로 노래하였기에 이때부터 트로트는 正統과 正統에서 벗어 나 다양한 音樂的 要素로 細分化되어 가고 있었다. 文珠蘭 은 〈空港의 離別〉, 〈空港의 부는 바람〉, 〈空港 待合室〉 等 空港 시리즈가 人氣를 얻었다. 1975年 에는 송대관 이 直接 作詞한 《해뜰날》이 많은 사랑을 받아 歌手王에 登極 하기도 하였고 1976年 에는 조용필 의 《돌아와요 釜山港에》가 크게 히트 하면서 트로트의 影響力을 行使 했다. 1977年 에는 그룹사운드 '히식스', '최헌과 檢銀나비' 等을 結成 해 보컬과 기타리스트로 活動 하던 최헌 의 《梧桐잎》李 後半에 히트 하였고 異性愛 日本 에서 데뷔 하면서 트로트를 紹介했다. 以後 조용필 이나 김연자 , 계은숙 等의 歌手가 日本에서 活動하는 契機가 되었고, 많은 트로트 曲이 히트 하기도 했다.

1980年代 [ 編輯 ]

트로트 歌手 薛雲道 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

1970年代 末에 조용필 이라는 大型 歌手가 登場하여 《미워 미워 미워》, 《一片丹心 민들레야》 等의 트로트 歌謠를 히트 시켰다. 이 時期에도 다양한 國內 音樂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무엇보다 트로트가 主流를 이루었다. 特히 트로트界 女性 歌手들이 大擧 登場하였는데 김수희 , 심수봉 , 주현미 가 代表的이다.

김수희 는 作曲家 出身으로 美8軍 部隊에서 '블랙켓츠'의 보컬로 活動하여 《남포동 부르스》, 《멍에》, 《잃어버린 鄭》 等 느린 曲調의 트로트를 히트 시켰고 다양한 唱法을 트로트에 椄木視키祈禱 하였다. 1986年 에 大韓民國의 國民歌謠이자 應援歌로 有名한 《南行列車》로 많은 人氣를 얻기도 하였다.

심수봉 은 第2回 大學歌謠祭 에서 처음으로 트로트 로 出戰해 立像 한 契機로 데뷔 한 大韓民國의 代表的인 싱어송라이터 였고 《當身은 누구시길래》, 《無窮花》, 《사랑밖엔 난 몰라》 等 自作曲들을 히트 시켰는데 1984年 , 《男子는 배 女子는 港口》는 2萬 餘張의 音盤 販賣量을 記錄하였다.

주현미 는 藥師 出身으로 第 2回 江邊歌謠祭 로 데뷔 하여 《 비내리는 永東橋 》, 《울면서 後悔하네》,《눈물의 부르스》等을 히트 시켜 1988年 , 《신사동 그 사람》으로 MBC 10代 歌手賞, 第18回 KBS 歌謠大賞 對象, 第 3回 골든 디스크 大賞을 受賞 하였다.

1980年 代 後半에는 트로트의 最高 頂點을 찍는 時期였다. 1987年 에는 當時 女高生이던 문희옥 이 《사투리 디스코 메들리》로 360萬 腸을 販賣하는 驚異的인 記錄을 세우면서 데뷔했으며, 1989年 에는 當時에 새로운 都市로 떠오르던 남서울 嶺東 을 노래 한 《사랑의 거리》를 發表했다.

文珠蘭 이 男便과 아내의 삶을 表現 한 《男子는 女子를 귀찮게 해》를 히트 시키면서 여러 世代層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日本에서 엔카 歌手로 크게 成功 한 김연자 의 《水銀燈》, 美8軍 部隊에서 活動하던 김지애 의 《물레야》가 히트되어 트로트를 活性化 시켜주었다.

문성재 1982年 에 《釜山 갈매기》를 불렀고 이 노래는 롯데 자이언츠 野球代表팀의 應援歌로 쓰이면서 더욱 히트하였다. 그 해 薛雲道 는 KBS 新人誕生으로 데뷔하였고 데뷔曲 《잃어버린 30年》李 離散家族 찾기 運動의 主題歌로 쓰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賢哲 1989年 에 《鳳仙花 聯政》으로 KBS 歌謠大賞 本賞을 受賞하면서 트로트 皇帝의 威力을 全國에 電波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태진아 는 임종수가 作曲 한 《옥경이》로 歌手로써의 두 番째 데뷔를 하였고 歌謠차트에서 上位圈을 차지 하고 全盛期를 맞이 하였다.

1990年代 [ 編輯 ]

1980年代 末에 美國에서 歸國하여 大成功을 이뤄낸 송대관 태진아 는 트로트 新銳로 急上昇한 薛雲道 , 오랜 無名時節을 거쳐 人氣를 얻은 賢哲 과 함께 트로트 社國時代를 形成하여 트로트 音樂의 復活을 主導하였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正統 트로트를 固守하는 方式과는 若干의 다른 音樂的 要素를 접미 시켜 새로운 方式의 트로트를 大衆들에게 선보이기도 하였다. 배일호 는 農民 出身의 歌手로 《身土不二》를 불러 韓國産 農産物을 弘報하는 契機가 되어 한동안 코리아 드림 烈風이 불기도 했다.

한便, 女性 歌手들 中에서 서울 시스터즈로 데뷔했던 방실이 가 솔로 歌手로 轉向하여 音盤을 낸 《서울탱고》가 歌謠界 頂上圈을 차지하며 트로트의 位相을 떨쳤다. 또한 최유나 의 《痕跡》, 韓惠軫 의 《褐色追憶》, 박윤경 의 《浮草》 等 抒情的이고 단조로운 雰圍氣의 트로트들이 主로 人氣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年代 中盤에 들어설 무렵 , 발라드 . 댄스 팝 , R&B , 힙합 이 大韓民國 歌謠界를 主導 하면서 트로트는 相當히 疏外되었고 트로트를 固執하던 歌手들은 한동안 沈滯期에 놓이게 되었다. 이 時期에 댄스歌手였던 김혜연 이 登場하여 旣存의 正統 트로트에 여러 音樂的 要素를 加味 시킨 세美 트로트를 선보였다. 김혜연 은 《서울 大田 大邱 釜山》으로 "서울 大田 大邱 釜山 烈風" 을 일으켜 젊은 層들을 確保하며 新世代 트로트 歌手로 자리 잡았다.

2000年代 以後 [ 編輯 ]

來日은 미스터트롯 》에서 6位를 記錄한 트로트 歌手 장민호

트로트는 어른들의 노래 (一名: 成人歌謠), 時代에 뒤떨어진 노래로 認識되어 왔는데 김혜연 이 새로운 세美 트로트를 試圖하게 되면서 大部分의 트로트 歌手들도 正統 트로트에서 벗어나 트로트의 多邊化를 이끌고 있다. 2004年 張允瀞 이 데뷔 함과 同時에 《 어머나 》로 "어머나 烈風" 을 일으키면서 漸漸 트로트가 新世代들에게 親近感이 느껴지게 되었다. 이 餘波로 트로트 音樂은 繼續 正統이 아니라 퓨전으로 大衆에 널리 普及化되었다. 그리고 2005年 박상철 이 發表韓 《無條件》은 男性들이 會食 자리 等 여러 行事에서 選曲되는 트로트曲 1位로 자리 잡았다. 2006年 에는 박현빈 이 《곤드레만드레》로 트로트界 新銳로 浮上 하면서 이 세 歌手는 트로트界 새로운 3人者로 急浮上했다. 이들의 誕生으로 많은 젊은 歌手들이 트로트에 挑戰狀을 내밀고 있는데 윙크 , 홍진영 , 김수찬 , 白水晶 等 젊은 트로트 歌手들이 輩出되고 있다.

特히 正統 트로트에 他장르의 音樂과 結合시켜 트로트를 再照明하는 音樂 프로그램 〈 트로트 엑스 〉가 2014年 에 放送되었으며, 2019年 부터 TV조선 에서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等의 旋風的인 人氣를 얻었다. 또한 金信英 이 트로트 歌手 둘째 姨母 김다비로 人氣를 얻었다. 하지만 正統 트로트 系譜도 이어 가고 있는데 代表的으로 주현미 , 문희옥 , 김용임 , 유지나 等이 있다.

年代別 히트曲 [ 編輯 ]

1950年代까지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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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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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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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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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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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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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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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年代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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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編輯 ]

註解 [ 編輯 ]

  1. 그렇지만 韓國 大衆歌謠에서의 트로트 樣式과 폭스 트로트는 單純한 2拍子라는 共通點을 빼고는 關聯性이 없다고 한다. [1]

各州 [ 編輯 ]

  1. “트로트” . 《韓國民族文化臺白化事前》 . 2022年 5月 25日에 確認함 .  
  2. Lie, John (2014). 《K-Pop: Popular Music, Cultural Amnesia, and Economic Innovation in South Kore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7쪽. doi : 10.1017/S0021911815001424 .  
  3. “大衆歌謠(大衆歌謠)” . 《韓國民族文化臺白化事前》 . 2022年 5月 22日에 確認함 .  
  4. “트로트” . 《韓國民族文化臺白化事前》 . 2022年 5月 25日에 確認함 .  
  5. 고바야시 다카유키 "‘엔카’와 韓國 ‘트로트’ 比較를 위한 基礎的 觀點", 아시아文化硏究 第47輯, 2018年
  6. 禁忌와 自律 - 國家記錄院
  7. 〈박성서의 7080歌謠 X파일〉佛 샹송歌手, 韓國歌謠 부르다 , 서울新聞, 2007年 2月 8日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