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相姬 (歌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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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姬
2016年 8月 7日 《釜山 賢人歌謠祭》에서 金相姬
基本 情報
本名 최순강
出生 1943年 3月 29日 ( 1943-03-29 ) (81歲)
日帝强占期 京畿 京城府 鍾路 청진정
(只今의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淸進洞 )
性別 女性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職業 歌手
放送人
뮤지컬 俳優
活動 時期 1961年 ~
學歷 高麗大學校 言論大學院 言論學 碩士 (卒業)
配偶者 유훈근
家族 詩賦 류청
아버지 최예득
어머니 차금덕
막내 時祭 유민근
子女는 膝下 2男
宗敎 無宗敎

金相姬 ( 韓國 漢字 : 金相姬, 本名 최순강, 韓國 漢字 : 崔順江, 1943年 3月 29日 ~)는 大韓民國의 歌手 이자 放送人이다. 高麗大學校 法學科를 卒業하여 學士 歌手 1호로도 알려져 있고, 女性 MC 1號이기도 하다.

高麗大學校 法科大學 法學科 1學年에 在學 中이던 1961年 美8軍 舞臺에서 歌手 로 첫 데뷔, 1965年 부터 活動하였다는 [1] 等의 內容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1962年 發表한 ‘三五夜(三五夜) 밝은 달’이 데뷔曲이다. 卒業 무렵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 없는 歌手로 活動하였는데, 當時 고려대학교는 在學生의 歌手 活動을 許容하지 않았고, 家族들도 願치 않았기 때문이다. [2]

서울 풍문여고에서 全校 1等을 도맡아 했던 秀才였다. 法官이 되기를 希望했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61年 고려대 法大에 入學했지만 結局 노래가 좋아 歌手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서울 中央放送局(現在의 KBS)의 合唱團 募集에 支援하려다 失手로 同時에 公募한 專屬 歌手 部門에 申請하여 歌手 試驗을 보고 1等으로 合格했다. [2]

1971年 TBC 歌謠大賞, 1973年 第1回 大韓民國放送歌謠大賞 女子歌手部門, 1977年 도쿄 拗腰技 公園 에서 열린 東京 國際 歌謠祭에서 〈즐거운 아리랑〉을 부르며 特別賞을 受賞했다. 2000年 1月 1日 부터 2003年 10月 18日 까지 KBS 3라디오 " 사랑의 希望音樂 "의 DJ로도 活動했으며, 現在는 韓國放送藝術振興院 의 學長으로 在職 中이다.

1966年 韓國 뮤지컬의 嚆矢인 ‘살짜기 옵서예’에서 애랑 役을 맡아 뮤지컬 俳優로도 活動했다. [2]

아쉽게도 1980年代에는 暫時나마 活動하지 못하였다. 1986年 3月에 MBC(문화방송)를 마지막으로 退社한 男便 유훈근 [3] 前職 MBC 記者가 後날 1998年 10月 當時 國民의 政府 時代의 그 當時 김대중 前職 大統領 때의 DJ 靑瓦臺 祕書室의 公報祕書官 出身이라서, 한때 放送 出演 等을 할 수 없어 1988年에는 暫時 美國으로 逃避하기도 했다. [2]

1999年 3月에는 아들의 兵役非理에 間接的으로 加擔한 것으로 알려져 物議를 빚었다. [4] [5]

히트曲으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蔚山 큰애기〉, 〈대머리 總角〉, 〈慶尙道 靑年〉, 〈錦山 아가씨〉, 〈즐거운 아리랑〉, 〈빨간 仙人掌〉, 〈참사랑〉 等으로, 트로트가 大勢인 時節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여 注目을 받았다. [2]

事件 事故 [ 編輯 ]

  • 1972年 12月 2日 서울市民會館火災 에서 電氣 過熱로 인한 合線으로 歌手 김상희는 왼손과 왼발에 가벼운 負傷을 입었다.

學歷 [ 編輯 ]

各州 [ 編輯 ]

  1. 처음 리사이틀 갖는 金相姬, 《경향신문》, 1970.1.17.
  2. 法官 꿈 접고 歌手의 길 “79歲 現役, 나에겐 隱退란 없어” 文化日報, 2021年 5月 7日子.
  3. 1940年 12月 19日 日帝 時代 全北 全州 出生으로, 1965年부터 放送 製作 PD로 첫 出發하여, 한때 1977年부터 1978年까지는 前職 KBS(한국방송공사)의 PD 出身.
  4. 돈으로 때운 國防義務 "1999年 4月 28日 東亞日報 參照"
  5. <焦點> `有錢免除' 兵役免除 非理 實態 "1999年 4月 27日 聯合뉴스 參照"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