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연
(李海燕,
1924年
6月 13日
[1]
~
2019年
12月 10日
)은
日帝强占期
에 데뷔하여 1960年代까지 活動한
大韓民國
의
歌手
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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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年
日帝强占期
黃海道
海州
에서 태어났다. 學歷에 對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41年
10月
콜럼비아레코드
에서 軍國家要因 <白蓮 紅蓮>을 吹入하며 데뷔하였다. 이해연은 當時 活動하던 다른 歌手들에 비해 比較的 늦은 時期에 데뷔했다. 以後 <뗏木 二千 리>, <燒酒 뱃沙工>, <아리랑 豐年>, <黃海道 노래> 等을 發表하며 一躍 人氣 歌手가 되었다. 또한
日帝强占期
에 <靑鸞의 꽃> 等 軍國家요를 여러 曲 吹入하였다.
新民謠를 主로 불렀으며 解放 後에는 樂劇團 舞臺에서 活躍하였는데
1956年
에
6.25 戰爭
의 悲劇的인 아픔을 그린
반야월
作詞,
이재호
作曲의 <
斷腸의 미아리 고개
>를 불러 大히트를 記錄했다.
1950年代
後半에는 作曲家
박춘석
과 같이 作業을 하였으며
1950年代
말에
美國
으로 移民을 갔다.
1960年代
初까지 音盤을 吹入하였으며
1984年
에는
손인호
와 함께 히트曲集을 發賣하였다.
이해연의 女同生
백일희
는
1955年
<黃昏의 엘레지>를 부른 歌手이고, 男便 베니 金은 齒科 醫師 出身이며 1950年代 美8軍 舞臺에서 트럼펫 演奏者로 活動하면서 有名稅를 떨쳤다.또한 子女들은 金트리오라는 밴드를 結成하여 <
沿岸埠頭
>를 불러 히트시켰다.
1979年
에 發表한 <沿岸埠頭>는 應援歌로도 많이 쓰이며 오늘날까지도 많이 불리는 國民 歌謠이다. 生前에는
美國
에 居住하였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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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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