悚憫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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悚憫도
宋旻道
Song Min-do
基本 情報
本名 송민숙
藝名 白眞珠
出生 1923年 4月 3日 ( 1923-04-03 ) [1]
京畿道 水原市
死亡 2023年 2月 28日 ( 2023-02-28 ) (99歲)
美國 로스앤젤레스
性別 女性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職業 歌手
活動 時期 1947年 ~ 1960年代
宗敎 改新敎
代表作
고향초 1947年
나 하나의 사랑 1955年
靑실紅실 1956年
카츄샤의 노래 1960年
幸福의 日曜日 1958年

悚憫도 (宋旻道, 1923年 4月 3日 ~ 2023年 2月 28日 )은 大韓民國 의 歌手이다. 송민숙 , 白眞珠 라는 藝名을 暫時 使用했다.

生涯 [ 編輯 ]

京畿道 水原市 에서 監理敎 牧會者의 딸로 出生했다. 成長期에는 아버지의 赴任地를 따라 자주 移徙를 다녔다. 平安南道 에서 三火普通學校를 卒業한 後, 서울에서 李花女子高等普通學校 를 나왔다.

學校 卒業 後 滿洲 룽징 에서 暫時 幼稚園 保姆로 일하다가 結婚하여 옌지 로 移徙했다. 延吉에서 太平洋 戰爭 終戰을 맞아 1945年 에 家族과 함께 서울 로 돌아왔다. 歌手 活動은 1947年 韓國 放送 公社 의 前身인 서울 中央 放送局 專屬 歌手 募集에 應試하여 1期로 拔擢된 것이 始作이다.

데뷔曲으로 吹入한 〈고향초〉가 널리 알려지면서 송민度의 代表曲이 되었다. 이 노래는 音盤社 側에서 一方的으로 女性스럽게 바꾼 송민숙이라는 藝名으로 發表되었다. 故鄕을 그리워하는 內容의 〈고향초〉는 當時의 時代的 雰圍氣와 맞아 떨어졌고, 先輩 歌手인 腸洗淨 이 다시 吹入하여 널리 알려졌다.

韓國 戰爭 中에는 大韓民國 國軍 政訓工作臺에 所屬되어 慰問 公演 活動을 하였고, 終戰 後 〈나 하나의 사랑〉과 〈靑실 홍실〉李 크게 히트하여 1950年代 後半을 代表하는 與 歌手로 浮上하였다. 이 가운데 〈靑실 홍실〉은 大韓民國 드라마 主題가 第 1戶이다. 1960年代에도 〈카츄샤의 노래〉, 〈목숨을 걸어놓고〉, 〈여옥의 노래〉, 〈서울의 지붕 밑〉, 〈하늘의 黃金 馬車〉, 〈靑春 牧場〉, 〈幸福의 日曜日〉 等의 히트作을 繼續 내놓았다.

假聲을 使用하지 않는 唱法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며, 목소리는 잔잔한 西洋式 低音이다. 美聲의 歌手들이 많던 時期라, 송민度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獨特한 雰圍氣를 자아내며 젊은 層과 知識人들의 사랑을 받았다. 大韓民國 歌謠의 水準을 한 段階 올려놓았다는 評價를 받기도 한다. [2]

1963年 부터는 쇼단을 京城하고 團長을 맡아 活動하기도 했다. 1960年代 後半에 長男이 베트남 戰爭에 參戰한 것을 契機로 사이공 에 食堂을 차리고 머물렀다. 사이공을 떠나면서 1971年 美國 으로 移民하였고, 로스앤젤레스 에 定着해 生活하였다.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https://m.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m&sm=mtb_etc&mra=bjky&x_csa=%7B%22fromUi%22%3A%22kb%22%7D&pkid=1&os=136875&qvt=0&query=%EC%86%A1%EB%AF%BC%EB%8F%84 에는 1925年生으로 表記되어 있다.
  2. 박성서 (2006年 12月). “歌謠人物 再照明 [001] - ‘나 하나의 사랑’의 悚憫도 女史, 11年 만에 母國 訪問”. 韓國音樂著作權協會步.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