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
Simeon-Francois Berneux
,
1814年
5月 14日
~
1866年
3月 7日
)는
파리 外方傳敎會
所屬의 프랑스人
宣敎師
로
朝鮮
의
天主敎
迫害
때에
殉敎
한
韓國 天主敎
의
103位 成人
中에 한 사람이다. 韓國 이름은
張敬一
(張敬一)이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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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뇌는
1814年
에
프랑스
르망
敎區
所屬의
샤토 뒤 壘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르망 敎區의
小神學校
와
神學大學校
에서 工夫했고,
1837年
5月 20日
에
私製
敍品
을 받은 뒤, 르망 大神學校에서
哲學
敎授
로 在職하던 中
1839年
에
파리 外方傳敎會
에 立會하였다.
그는
1840年
에 프랑스를 떠나
베트남
의
통킹
과
淸나라
의
滿洲
에서 14年 동안을
宣敎
하였다.
1841年
에 통킹에서 한 次例
逮捕
되어
死刑
을 宣告 받았지만, 2年間의 收監生活 끝에 釋放되었다. 그 後
淸나라
로 가서
滿洲
敎區
에서 12年을 宣敎하였다. 그는
1854年
에 滿洲 敎區의
補佐 主敎
로 任命되었고, 그 해 12月 27日에
主敎
로 聖省되었다.
그는
1853年
朝鮮 天主敎會
敎區長
페레올
主敎
가 병들어 죽음으로 그 後任으로 베르뇌 主敎가 제4대 敎區長(
카프社
의 名義主敎)이 되었고,
1856年
에
朝鮮
으로 入國하였다. 그 後 10年 동안
朝鮮
敎會
의 發展을 위해 獻身 하였는데,
베론 神學校
를 設立하였고,
漢陽
에 2 個의
印刷所
를 차리는 等
天主敎
의 敎勢 擴張에 커다란 貢獻을 하였다.
迫害
받는 敎會인 朝鮮
天主敎會
의 特殊性에 비추어 베르네 主敎에게는
敎皇廳
의 批准 없이도
私製
敍品
乙 줄 수 있는 權利가 있었다. 그는
뮈텔
主敎,
리델
神父 等과 함께 天主敎의 勢力을 넓혀,
高宗
이 卽位하기까지에는 信徒數가 2萬餘 名에 이르렀으며, 王室 안까지
福音
을 傳播하였다.
그는
1866年
丙寅迫害
로
1866年
2月 23日
에
漢陽
에서
逮捕
되었고,
3月 7日
에
새남터
에서
브르트니에르
新婦
와
道理
新婦
그리고
볼리외
新婦
等과 함께
軍門梟首刑
을 받고
殉敎
하였다.
[3]
그를 비롯한
프랑스
宣敎師
들의 處刑은
프랑스
가
丙寅洋擾
를 일으켜 朝鮮을 侵略하는 구실이 되었다. 勿論 프랑스가 丙寅洋擾를 일으킨 眞짜 理由는 天主敎 彈壓을 口實로
戰爭
을 일으켜 勢力을 넓히려는
帝國主義
였다. 그가
殉敎
한 後 그의 電氣가 프랑스에서 發刊되었다.
諡福 · 詩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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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뇌 시메온
主敎
는
1968年
10月 6日
에
로마
聖 베드로 大聖堂
에서
敎皇
바오로 6歲
가 집전한 24位
[4]
諡福式
을 통해
福者
품에 올랐고,
[5]
1984年
5月 6日
에
서울特別市
汝矣島
에서
韓國 天主敎
創立 200周年을 記念하여 訪韓한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가 집전한
미사
中에 이뤄진 103位
諡聖式
을 통해
成人
품에 올랐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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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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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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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