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판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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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 戰鬪
後漢末 의 一部
날짜 208年 10月
場所
형주 當陽 장판派
(現在 후베이省 징먼 時 南쪽)
結果 曹操의 勝利, 그러나 劉備一行은 놓침
交戰國
曹操軍 劉備軍
指揮官
曹操
趙淳
劉備
裝備
조운
兵力
125000 名
追擊戰에는 起兵 5千
不明
避難하는 百姓 10餘萬

장판 戰鬪 (長坂戰鬪)는 中國 後漢 末期 建安(建安) 13年( 208年 ) 曹操 가 晨夜(新野)의 劉備 를 10萬의 兵士를 이끌고 攻擊한 것을 말한다.

兩軍의 戰鬪가 벌어져 一連의 이야기의 舞臺가 된 곳이 형주 (荊州) 南軍(南郡) 當陽縣(?陽?)의 장판(長坂; 或은 장판派(長坂坡))였기에 장판派 戰鬪 , 或은 當陽 戰鬪 라고 부른다.

背景 [ 編輯 ]

建安 12年( 207年 ) 後漢의 丞相인 曹操는 華北을 平定하고, 형주地域으로 그 눈을 돌렸다. 當時 형주는 一帶 勢力을 構築한 荊州 自社 遊標 (劉表)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형주의 霸權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曹操는 형주地域에 自身의 一族이자 重臣인 하후돈 을 大將으로 삼고 移轉 과 같이 別動隊로 派遣했으나 朴網派 戰鬪 에서 劉備에게 大敗하고 말았다.

이러한 危機狀況에서 갑자기 유표가 病으로 쓰러졌다. 生前에 後繼者 問題에 禍根을 남긴 遊標였기에 그의 死後 家門의 分裂이 招來되었고, 曹操에게 쉽게 형주가 넘어가는 結果를 낳았다.

遊標 死亡後 형주의 有力豪族이었던 菜氏家門의 首長인 菜某 (蔡瑁)를 筆頭로 형주 有力豪族은 策動을 始作했다. 그들은 菜某의 누이이며, 遊標의 後室이었던 채氏夫人과 共謀하여 遊標의 次男인 油種 (劉琮)을 擁立하고 代身 遊標의 遺言으로 本來 家門을 相續받아야 했던 長男 遺棄 (劉琦)를 버리고, 유종을 正式 後繼者로 삼아 家門을 繼承시켰다. 이때 형주의 內紛을 지켜본 曹操는 約 10~15萬에 達하는 大軍을 이끌고 南下하기 始作한다.

情事의 장판 戰鬪 [ 編輯 ]

家門을 繼承하여 曹操에 對해 對抗意思가 없던 유종은 劉備와 함께 曹操를 막아봐야 結局 형주는 劉備의 차지가 된다는 부손 (傅巽)의 進言에 따라 曹操가 晨夜에 到達하자 降伏했다. 蕃盛(樊城)에 駐屯하던 劉備는 不時에 兩쪽에 包圍당한 形局이 되자 몹시 當惑하여 油種이 있던 襄陽 (襄陽)으로 向했다. 諸葛亮 (諸葛亮)은 유종을 攻擊하여 형주를 支配하자고 進言했으나, 劉備는 遊標의 恩惠를 생각해 이 提案을 拒絶했다. 그리고 劉備는 유종을 불렀으나 유종은 두려워하며 나가지 않았다.

이에 有終의 側近 및 多數의 형주사람들은 劉備에게 歸順했다. 많은 百姓들이 劉備를 따라 움직였기에 劉備는 하루 10餘里(4-5km)밖에는 前進하지 못했다. 여기서 劉備는 關羽 (?羽)에게 數百隻의 배에 그들의 一部를 搭乘시켜 江陵(江陵)으로 보내고 미리 接線準備를 하게 하였다.

曹操는 劉備가 軍需物資가 豐富한 江陵을 占據하는걸 두려워해 輸送部隊를 後方에 配置하고 迅速하게 襄陽을 占據했다. 曹操는 趙淳 (曹純)과 함께 몸소 5千 精銳騎兵臺 好表記를 이끌고 하루 밤낮으로 劉備를 追擊하였고, 이들은 當陽縣 杖板에서 劉備軍의 後尾를 急襲하게 된다.

劉備가 이끌던 避難民 무리는 急襲에 崩壞되어 흩어져 곧 曹操軍에게 사로잡혔다. 曹操가 이렇게까지 서둘러 急襲할 거라 생각을 못한 劉備는 妻子를 버리고 諸葛亮과 함께 數十基의 兵力만을 데리고 逃走했으며 이때 避難民 사이에 있던 劉備 家臣들의 親族들과 劉備 自身의 家族들도 無事하지 못하였다. 劉備의 가신 서서 (徐庶)의 母親이 사로잡혀 그가 劉備에게 離別을 告하고 曹操 陣營으로 投降했으며 趙淳은 劉備의 두 딸을 鹵獲하였다. 이런 混亂속에서 조운 (趙雲)은 好表記 사이로 들어가 아두(阿斗;後에 有線 (劉?))와 감婦人을 救해내어 지키면서 그들의 追擊을 뿌리쳐 無事히 合流하였으며 以後 아문장군(牙門?軍)이 되었다.

한便 裝備 (張飛)는 後軍을 맡아 曹操軍의 追擊을 막기위해 20餘基를 이끌고 講을 防牌삼아 다리를 끊어버린 後 "나는 장익덕이다. 누가 나와 죽기를 覺悟하고 싸우겠는가! "라고 외쳐 曹操軍은 怯을 먹어 누구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고, 劉備는 貴重한 時間을 벌 수 있었다. 이렇게 劉備를 놓친 曹操는 追擊을 斷念하고 곧바로 江陵을 占據한다.

劉備는 韓進(漢津)에서 關羽가 이끌던 船團을 만났고, 또한 遊標의 長男 降下太守 鍮器의 軍士와 만나 함께 鍮器의 本據地인 河口(夏口)에 到達했다. 劉備는 孫權의 家臣 露宿 (魯?)을 만났고 諸葛亮을 吳나라에 派遣해 孫權 (孫?)과 同盟을 맺었다. 孫權은 數萬名의 軍隊를 派遣해 劉備와 함께 赤壁 (赤壁)에서 曹操軍을 擊退한다.

三國志演義 속의 장판 戰鬪 [ 編輯 ]

當時 選對 遊標의 庇護下에 있으면서 客場(客?)으로서 晨夜를 守備하던 劉備는 有終의 降伏으로 因해 最前線에서 孤立되게 되었다. 이것을 好機로 본 曹操軍의 攻擊 앞에 앞뒤가 包圍된 晨夜는 風前燈火가 같았다.

曹操는 自身을 反對하던 臣下 共融 을 處刑하고 50萬 大軍을 일으켜 제1대는 調印 조홍 , 第2代는 匠料 와 장합, 第3代는 하후돈 下後燕 , 第4代는 于今 移轉 , 自身은 제5대를 이끌었고 各其 10萬의 軍士를 指揮했으며 盲腸 허저 를 折衝將軍으로 봉하고 軍事 3000名을 주어 先鋒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제1대 大將 調印 (曹仁)과 조홍 (曹洪)을 劉備가 도망쳐 守備兵度 散散이 흩어져 文字 그대로 텅빈 性이 된 晨夜에 意氣揚揚하게 入城했다. 그러나 이것은 劉備麾下의 參謀 諸葛亮의 計略이었다.

事前에 計策을 내어, 巧妙하게 빈性으로 僞裝한 新野性으로 誘引된 曹操軍은 성안의 伏兵과 만나 混亂에 빠져 보기좋게 擊退되고, 氣勢가 鈍化된 曹操軍은 一時 後退했다. 劉備는 曹操軍을 一時에 후퇴시켰지만, 繼續해 第2波, 第3派에 對해 晨夜의 守備는 不可能하다고 判斷해 曹操軍의 再侵入하기 前에 晨夜를 버리고 함께 油種令으로 後退하기로 決定했다.

家門을 繼承한 뒤 曹操에게 對抗할 醫師가 있던 유종도 逃亡친 兄 및 先代로부터 형주의 讓渡를 勸告받았던 客場 劉備의 動向을 생각하였고 亦是 曹操에게 歸順할 것을 主張한 功臣 怪月 , 부손 , 한숭 , 菜某 에게 說得되었다. 이에 遊標의 武裝이던 耳竅 가 反對했으나 菜某에게 처형당한다.

結局 曹操陣營이 戰線의 晨夜를 陷落시키자, 유종은 曹操에게 降伏할 것을 決定하기에 이르고 이로 因해 형주의 霸權은 曹操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劉備는 먼저 晨夜 背後의 蕃盛에 들어간 後, 有終의 巨星이자 형주統治의 據點인 襄陽으로 向했다. 그러나 性 附近에 到達할 때쯤 誠意 長壽 張潤 이 쏜 화살로 因해 油種이 入城을 拒否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油種 麾下의 장수이며 親諭琵琶 武裝인 위연 이 門을 열려고 했기에 城안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한便 油種이 曹操에게 降伏한 것을 알게 된 劉備는 進退兩難에 빠져 諸葛亮과 幕僚들과 함께 對應을 摸索해 諸葛亮의 進言에 依해 一旦 江陵을 目標로 나가자고 決定하는 同時에 義동생 關羽, 諸葛亮을 獅子로 세워 먼저 江陵으로 派遣해 鍮器의 協助를 求하게 된다.

한便 南下하는 劉備一行은 晨夜에서부터 쫓아온 百姓들과 合流했기에 進行이 매우 늦었다. 當陽縣 壯版에 到着할 때쯤 쫓아오던 曹操軍의 攻擊을 받게 되었다.

曹操軍의 先鋒 文憑의 攻擊과 繼續된 曹操軍의 攻擊을 劉備의 義동생 裝備가 後軍이 되어 防禦했으나, 曹操軍의 波狀攻擊 앞에 敗北할 수밖에 없었다. 劉備는 데려온 百姓과 處子들을 버리고, 먼저 後退해 勢力을 整備하여 再起를 노렸으나, 흩어진 麾下長壽는 몇 名인지 알 수 없고, 參謀 美軸 간옹 도 行方이 杳然했다.

여기서 混亂 中에 劉備의 아내 美婦人科 감夫人 및 劉備의 아들 아두는 위나라 兵士에게 생포되었으나, 이것을 본 劉備麾下의 長壽 조운이 말머리를 돌려 短期로 뛰어들어 夫人들을 救出했다.

그 後 조운은 曹操의 部下 純右島 를 죽이고 순우徒에게 붙잡힌 美軸과 감婦人을 救出해 張飛에게 보내고, 美婦人科 아두를 찾기 爲해 다시 曹操軍 陣營에 또 뛰어들었다. 途中에 앞을 가로막는 曹操의 部下 하후은 을 죽이고 돌아다니다가 民家附近에 쓰러진 美婦人을 發見했다.

美夫人은 重傷을 입어 움직일 수 없어 漕運에게 아두를 맡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自殺했다. 조운은 우물을 메우고, 아두를 품에 안고, 다시 曹操軍의 陣營을 突破했는데 조홍의 部長 安名 을 죽이고 장합 , 超觸 , 長男 , 馬煙 , 醬의 와도 싸우며 하후돈의 部長 종진 終身 兄弟도 죽였다. 이때 조운은 칼로 쳐서 基 2個를 쓰러뜨리고 빼앗은 창이 3자루였으며 베어버린 曹操軍의 이름 있는 장수만도 50名에 이르렀다.

劉備는 이것을 보고 매우 感激했고 장판교에서 威勢를 떨친 裝備의 氣魄과 諸葛亮의 計略에 籠絡당해 長壽 하후걸 이 쓰러지자 曹操軍은 追擊이 더以上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後에 장판派가 불탄것을 보고 劉備軍의 兵力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도 이것으로 曹操軍을 一時的으로 묶어두는 데 成功한 劉備一行은 먼저 보냈던 關羽, 諸葛亮의 水軍과 合流해 장강연안으로 南下했다. 겨우 虎狼이입에서 脫出한 劉備는 曹操에게서 어렵게 도망쳐 河口에 到達한다.

여기서 유기와 만나고 江南의 榮州 孫權의 命令으로 형주의 內部事情을 探索하러 온 露宿 (魯?)과 만나, 以後 事態는 有名한 赤壁大戰 으로 發展하게 된다. 앞서 장판派에서 活躍한 조운은 아문장군(牙門?軍)으로 昇進해 以後에도 촉나라의 忠臣으로 活躍하게 된다.

出處 [ 編輯 ]

三國志 》 蜀黍 船主展

《三國志》 蜀黍 裝備展

《三國志》 蜀黍 兆運轉

《三國志》 魏書 調馴前

《三國志》 魏書 조인전

資治通鑑

三國志演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