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 攻防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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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 攻防戰
後漢末 의 一部
날짜 219年
場所
後漢 형주 , 오늘날의 후베이省 一帶
結果 孫權의 決定的 勝利.
交戰國
劉備 軍閥 孫權 軍閥
指揮官
關羽
觀評
未方
妖花
府使인
王補
早漏
旅夢
육손
班長
徐渻 麻蟲 主演 右番 장흠

赤壁大戰 以後 注油는 公安을 劉備에게 주었고, 劉備는 이것이 不足하다 여겨 江陵을 賃貸하였다. 또한 劉備가 荊南 4軍을 먹는 것을 默認하였는데, 注油를 牽制하려던 孫權의 意圖로 보인다. 注油는 劉備가 세지는 것이 두려워 함께 익주를 攻掠해 劉備의 電力을 消耗시키는 作戰을 施行하려 하지만 뜻이 이루어지기 前에 病死하고 그 자리에 노숙이 任命된다. 노숙은 天下이분持戒를 主張하면서도 劉備의 必要性을 認定하였고, 江陵을 빌려준 것도 露宿이었다. 그러나 劉備가 익주를 占領하자 劉備에게 빌려준 根據地 江陵等의 형주를 돌려달라고 한다. 劉備는 옹兩主를 倂合하고 江陵을 돌려주겠다는 回信을 보냈고, 이에 兩國 間에 戰爭 雰圍氣가 감돌게 된다. 萬一 戰爭이 일어난다면, 劉備는 장사에서 孫權을 攻擊하면 되고 이러면 孫權이 곤란해지는 狀況이었기에, 孫權이 旅夢에게 영릉, 장사, 繼養을 빼앗게 한다. 이를 들은 劉備는 關羽를 돕기 爲해 5萬을 이끌고 益量으로 갔으며, 關羽는 露宿과의 對談에서 露宿의 論理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익양 對峙) 이즈음 曹操가 韓中을 먹었기에 劉備는 익주를 지키려 孫權과 强化하여 常數를 境界로 형주를 分割한다. 218年, 劉備는 韓中을 쳤는데, 初盤에는 苦戰했지만 曹操의 長壽 下後燕을 慘殺하고 장합 等을 패배시키면서 韓中을 占領하고 이 참에 北伐을 敢行한다. 그러나 關羽는 諸葛亮의 융중대冊에서 비롯된 이 計劃을 自身이 主人公인 軍事的 冒險으로 歪曲하고, 結局 初盤에는 때마침 쏟아진 洪水로 軍이 통째로 戰歿된 于今과 방덕을 이기고 蕃盛을 包圍했으나 調印과 萬銃이 그곳을 잘 지키자 형주病까지 動員하여, 兄주병은 孤立된 非正規軍 身世가 된다. 曹操는 이때 業으로 遷都하려 했지만, 章帝 四魔의 가 計策을 내어 吳君을 끌어들이게 하였고, 孫權은 旅夢을 시켜 于先 형주의 守備兵을 安心시키기 위해 少數의 兵力을 장사치로 變裝시키고 守備兵들을 안심시키게 한다. 이 때 未方은 關羽가 自身의 罪를 물을까 두려워 孫權과 內通하여 卽刻 降伏했고, 府使인은 降伏하지 않으려 했으나 右番의 懷柔와 旅夢의 壓迫으로 結局 울면서 降伏한다. 孫權은 曹操에게 書信을 보내 祕密(吳君 出征)을 지키라고 한다. 曹操는 蕃盛의 包圍를 풀기 위해 關羽에게 이를 알려주지만 關羽는 이를 默殺한다. 이 渦中에 觸甁들 사이에서 旅夢이 형주를 占領했다는 말이 퍼지자 群心이 動搖한다. 結局 몇 百 基밖에 남지 않은 關羽는 突破하여 맥성으로 後退하다가 林저에서 麻蟲,班長 等의 埋伏에 걸려 麻蟲에게 捕縛되어 吳나라王 孫權 앞에서 아들 觀評과 함께 斬首된다. 이 消息을 들은 劉備는 聖徒의 兵力(最大 10민)과 무릉만이들의 藩屛을 合해 형주를 收復하려 하나 효정에서의 작은 勝利 以後 陣을 잘못 쳐서 육손의 化工에 當해 몇百 欺瞞 이끌고 白帝城 으로 避身한다. 結局 他地에서 病이 든 劉備는 白帝城에서 文武百官이 보는 앞에서 遺言을 남기고 世上을 떠난다. 以後 諸葛亮의 융중대冊은 白紙化된다.

형주 攻防戰 直後 曹操는 死亡하고, 조비 後漢 獻帝 에게 煽揚을 받아 位 皇祖를 開創함으로써 30餘年間의 後漢 末 은 終焉을 告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