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야마 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시모야마 事件
下山事件
運搬되는 시모야마의 屍體
場所 朝飯 선 鐵路
날짜 1949年 7月 5日
死亡者 시모야마 社다노리
原因 시모야마 國鐵 總裁의 疑問死
結果 日本國鐵 勞組의 焦土化

시모야마 事件 ( 日本語 : 下山事件 )은 日本 美軍政 時代였던 쇼와 24年 7月 5日 에 벌어진 疑問詞 事件이다. 日本國有鐵道 招待 總裁 시모야마 社다노리 가 出勤길에 失踪 되어 다음날 아침 鐵路 위에서 토막난 屍體로 發見된 것이다.

事件 發生 直後부터 매스컴 에서 自殺說과 他殺說이 엇갈리는 가운데, 警察은 公式 搜査 結果를 發表하지도 않고 搜査를 中斷했다. 시모야마 事件이 있고 約 1個月 間隔으로 잇달아 일어난 未妥카 事件 , 마쓰카와 事件 과 함께 묶어 ‘ 日本國鐵 3大 未濟 事件 ’(??三大ミステリ?事件)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事件 槪括 [ 編輯 ]

1949年(쇼와 24年) 6月 1日 에 發足한 日本國有鐵道 (略稱 日本國鐵)의 初代 總裁에 就任하게 된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7月 5日 아침 午前 8時 20分頃에 會社 車를 타고 誤打毬 카미이케다이 의 自宅을 出發했다. 出勤 途中, 運轉手에게 니혼바시 미쓰코시 百貨店 으로 가라고 指示한다. 미쓰코시에 到着했지만 아직 百貨店 門을 열기 前이었기 때문에, 一旦 國鐵 本社 에 있는 동경역 前에 가서 지요다 銀行(現 미쓰비시 도쿄 UFJ 銀行 )에 들르는 等, 複雜한 루트로 이곳저곳 다닌 뒤 再次 미쓰코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午前 9時 37分頃, 會社 車에서 내린 시모야마는 “5分이면 되니까 기다려 주게”(五分くらいだから待ってくれ)라고 運轉手에게 付託하고는 急하게 미쓰코시에 들어가더니 그대로 蹤跡이 사라졌다.

平素 시모야마는 午前 9時 前까지는 國鐵 本社에 出勤했기 때문에, 每日 아침 祕書 가 玄關으로 그를 마중을 나갔다. 失踪 當日은 國鐵의 職員 減縮을 둘러싼 緊張된 狀況 하였고, 午前 9時에는 重要한 鐵道管理局腸 會議가 豫定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出勤을 하지 않아 自宅으로 電話를 했는데 “平素처럼 會社 車를 타고 나갔다”는 對答에 國鐵 內部는 大騷動이 일어나 警察에 連絡, 失踪 事件으로서 搜査가 始作되었다. 다음날인 7月 6日 午前 0時 30分이 조금 넘은 時點, 아다치구 아야세 의 國鐵 朝飯 선 기타센主役 ~ 아야세역 사이의 鐵路 위에서 汽車에 치여 토막난 시모야마의 屍體가 發見되었다.

失踪 後의 行跡 [ 編輯 ]

失踪 後, 시모야마 總裁로 보이는 人物이 미쓰코시 百貨店에서 나왔고, 그 뒤 營團 地下鐵 (現 도쿄 메트로 ) 긴자 선 아사쿠사 行 列車 안에서 目擊되었다. 百貨店 안에 있었을 때는 數 名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目擊談도 있다.

午後 1時 40分이 지나서, 그 사람은 驛團 [註解 1] 地點과 가까운 도부 鐵道 이세사키 선 高彈盧 驛 改札口에서 改札係 職員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 뒤, 午後 2時부터 5時 넘어서까지 그 驛에 가까운 ‘스에히로 旅館 ’(末?旅館)에 滯留했다. 午後 6時頃부터 8時 사이에, 高彈盧 驛에서 南쪽으로 내려가 驛團 地點에 이르는 東部 이세사키 線에서, 服裝과 體格이 總裁를 닮은 사람을 目擊했다는 證言이 多數 나왔다. [註解 2] .

生體驛團인가 事後驛團인가 [ 編輯 ]

시모야마 總裁를 친 機關車 D51 651號의 調査.

시모야마 總裁는 東部 이세사키 선 管理下의 國鐵 朝飯 선 下行 方面(미토 方面) 線路 위에서, 그 附近을 0時 20分에 通過한 貨物列車 第869列車( D51 651號)에 依해 驛團 當한 것으로 밝혀졌다. [註解 3] 屍體의 司法 解剖 (剖檢)의 指揮를 맡은 도쿄대학교 法醫學 敎授主任 候樓하타 多네모토 (古畑種基) 敎授 는 回收된 시모야마 總裁의 屍體에 새겨진 傷處를 ‘ 生體 反應 ’(生活反?)으로 認定하지 않고 事後逆段으로 判定했다. 解剖의 執刀는 東 解剖學 敎室의 쿠와시마 나오키(桑島直樹)講師가 맡았다.

또한, 屍體의 損傷이 極甚하기는 했지만, 屍體 및 驛團 現場에서 血痕 이 거의 發見되지 않아, ‘失血死’ [註解 4] 의 可能性이 提起되었다. [註解 5] 게다가 屍體의 陰部 等 特定 部位에서만 內出血 等의 ‘生體 反應’이 있는 傷處가 確認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살아 있을 때 該當 部位에 相當한 힘이 加해졌다는 것을 豫想할 수 있었기에 사타구니를 걷어차였다거나 하는 暴行의 可能性도 提起되었다.

한便, 現場 檢證으로 屍體를 檢屍 했던 도쿄都 監察義務원 耶蘇시마 신노스케(八十島信之助) 監察의는, 只今까지의 歷史體 [註解 6] 檢屍 經驗으로 미루어 생각하고, 이미 現場 檢證 段階에서부터 自殺이라고 斷定을 내리고 있었다. 屍體의 陰部 等 特定 部位에 나타난 內出血의 ‘生體 反應’을 나타낸 傷處는 로드킬 屍體에서 흔히 發生하는 表面 現象이고, 血液 反應이 너무 적은 것도 屍體 發見 當時 現場 周邊에 내린 에 씻겨 내려가 確認할 수 없었던 것에 不過하다고 診斷하며 他殺의 根據가 될 수 없다고 主張했다.

게이오기주쿠 大學 의 나카다테 큐헤이(中?久平) 敎授도 生體逆段을 主張(다만, 나카타테 敎授는 시모야마 總裁의 屍體를 直接 본 적이 없다)했다. 自殺의 根據가 되는 ‘生體驛團’ [註解 7] 으로 볼 것인가, 他殺의 有力한 根據인 ‘事後驛團’ [註解 8] 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意見 對立이 일어났다. [註解 9] 1949年(쇼와 24年) 8月 30日 에는 候樓하타 敎授, 나카다테 敎授, 고미야 쿄카이 (小宮喬介; 當時 나고야 醫科大學 敎授)의 세 사람의 法醫學者가 衆議院 法務委員會에 參考人 으로 불려가 國會 法醫學 契가 얽힌 大論爭이 벌어졌다. 法務委員會의 質問에 對해 候樓하타는 “解剖를 執刀한 쿠와시마 博士는 아직 公式的으로 他殺, 또는 自殺 與否를 밝히지 않았다. 事後驛團이라는 解剖所見을 밝힌 것 뿐이다. 硏究는 繼續中이며, 硏究 結果도 모르는 사람이 마음대로 推論하는 것은 學者的 態度가 아니다.” [註解 10] 라고 말했다. [3]

기름, 染料, 血痕 [ 編輯 ]

아사히 新聞 》(朝日新聞)의 記者 야다 키미오 (矢田喜美雄)와 東臺(동경대) 法醫學 敎室에 依한 屍體 및 遺品의 分析으로는, 시모야마 總裁의 와이셔츠 속옷 , 洋襪 에 大量의 기름(이른바 ‘ 시모야마 기름 下山油’)李 묻어 있었지만, 겉옷이나 신고 있던 가죽구두 안에는 기름이 묻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기름의 成分도 機關車 整備에 使用되지 않는 植物性의 姜瑜(糠油; 쌀겨 기름)였던 點이나, [註解 11] 衣類에 4種類의 鹽基性 染料 가 묻어 있던 點, 발은 穩全하게 남아있는데도 가죽구두가 列車에 치여 驛團되어 있던 點 等, 遺品과 屍體의 損傷·汚染 狀況에 極히 부자연스러운 事實들이 續續 水面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特히 剛柔는 시모야마 總裁의 監禁 ·殺害場所를 指目하는 重要한 端緖일 可能性이 있다고 하여 注目을 받았다.

게다가, 聯合國 軍 憲兵 司令部·犯罪 搜査 硏究室(CIL)에서 美軍 所屬의 포스터 中士 [註解 12] 가 驛團 地點 附近에서 얼마 되지 않는 血痕을 發見했었다는 情報를 入手한다. 그 地點에서, 微細 血痕을 어둠 속에서 發光시켜 肉眼 確認을 可能하게 하는, 루미놀 藥을 利用한 檢證을 實施했다. [註解 13] 그 結果 役團 地點으로부터 上行 方面(우에노 方面)의 枕木에서 微細한 血痕을 發見했다.

그 後, 警視廳 鑑識課와 함께 再次 루미놀 檢證이 行해져서, 驛團 地點으로부터 上行 方面의 아라카와 鐵橋(荒川?橋)까지의, 數百 미터 間隔의 枕木들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繼續되는 數많은 血痕을 發見했다. 血痕은 上行 方面의 線路 위에서 中斷되었지만, 問題의 堤防 아래에 있던 ‘로프 오두幕’(ロ?プ小屋)이라는 廢家의 文科 마루에서도 血痕이 確認되었기 때문에, 이 핏자국들이 시모야마 總裁의 屍體를 運搬한 經路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여 注目을 받았다. [註解 14]

迷宮에 빠지다 [ 編輯 ]

自殺이라고도 他殺이라고도 結論을 내리지 않은 채, 1949年(쇼와 24年) 12月 31日 에 ‘시모야마 事件 特別搜査本部’(下山事件特別?査本部)는 解散되었다. 搜査 第1課는 自殺으로 結論내려 發表하려 했지만, 아무런 發表도 없었다. 그리고 剛柔의 出處 等 疑問點에 對한 執拗한 追跡을 繼續하며 他殺을 念頭에 두고 搜査를 하고 있던 警視廳 搜査 第2과도 1950年 (쇼와 25年)에 搜査官들이 突然 轉任되어 큰 幅으로 規模를 縮小, 事實上 搜査는 中止되었다.

警視廳 시모야마 事件 特別搜査本部가 1949年 12月 15日에 作成한 內部資料 〈시모야마 國鐵 總裁 事件 搜査 報告〉(下山???裁事件?査報告, 이른바 〈시모야마 白書下山白書〉)」는 1950年 1月에 《 분게이슌주 》(文藝春秋)와 《 카이兆 》(改造) 地上에 揭載되었다. 白書의 內容은 自殺로 몰아가는 것이었지만, 야다 키미오나 마쓰모토 세이초 (松本?張) 等은 報告書 內容의 矛盾點들과 사실 誤謬를 줄곧 指摘했다.

1964年 (쇼와 39年) 7月 6日 , 殺人 事件이었을 境遇의 公訴時效 15年이 滿了됨으로써, 이 事件은 永久 未濟 事件으으로 남게 되었다.

事件의 時代的 背景과 推理 [ 編輯 ]

1949年, 中國 大陸 에서는 國共 內戰 에서의 中國 共産黨 君의 勝利가 確實視되었고, 韓半島 에서도 北緯 38度 線을 境界로 共産政權과 親美政權이 一觸卽發의 緊張狀況下에서 對峙하고 있었다. 이러한 國際情勢 가운데, 日本을 占領하고 있던 美國軍을 中心으로 한 聯合軍軍은, 大戰後 對日 政策을 日本을 民主化 시키는 從來의 方針에서 反共 의 防波堤로 使用하는 立場으로 轉換했다. 于先 高 인플레 에 시달리는 經濟의 再建이 時急했기에, 所謂 닷지 라인 에 根據한 緊縮 政策을 實施한다. 이어 日本 美軍政 은 같은 해 6月 1日 에는 行政機關 職員 정원법을 實施해 公務員 約 28萬名, 그리고 같은 날 發足한 日本國有鐵道 (略稱 國鐵)의 10萬名에 가까운 前無後無한 人員整理 를 强要했다.

시모야마 社다노리 .

같은 해 1月 23日 에 實施된, 2次大戰 後 3番째인, 第24代 衆議院 總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의 民自黨 이 單獨 過半數 264席의 議席을 차지했는데, 일본공산당 도 4席에서 35席으로 躍進했다. 共産黨 系列인 前日本産業別勞動組合會議 (全日本産業別??組合?議, 略稱 産別會議)나 國鐵勞動組合 (????組合, 略稱 국노)도 그 餘勢를 몰아 人員整理에 頑剛한 抵抗意志를 내비치며 요시다 內閣의 打倒와 ‘人民政府’(人民政府) 樹立을 公公然히 외치고 다녔고, 政治판은 시끄러워졌다. 시모야마 總裁는 人員整理의 當事者로서, 勞組와의 交涉의 陣頭에 섰고, 事件 前날인 7月 4日 에는 3萬 名의 職員에 對해 제1차 整理通告(解雇通告)를 斷行했다.

國鐵의 幹部들은 人員整理를 둘러싸고 勞組와의 葛藤에 銃대를 메야 할 것이 自明한, 消耗品的 存在인 初代 總裁 자리를 回避했고, 技術 分野 出身이었던 시모야마가 이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技術者 出身이었던 시모야마는 現場 職員들과 勞組 問題에 나름의 理解가 있었기에 勞組와 對立하는 同時에, 10萬 名 解雇라는 無知莫知한 人員減縮을 要求하는 美軍政에도 抵抗했다. 시모야마가 解雇 斷行을 此日彼日 미루자, GHQ 民間 輸送部(CTS) 擔當者 섀그넌 中尉가 시모야마의 집에 쳐들어와 拳銃을 들이대며 亂動을 피운 일도 있었다. 卽, 시모야마 總裁는 前後 混亂期의 日本에서 共産主義 系列인 國鐵 勞組와 日本 美軍政 사이에 끼여 있었는데, 이런 難處한 狀況에서 國鐵 總裁職을 맡으면서도 政治的 도움을 約束받지도 않았다. 技術者 出身이라 政治問題에 無知했던 시모야마는 美軍政의 大量解雇 命令이 緊縮 政策으로 인한 經濟問題라고만 생각했지, 日本 最大의 勞組였던 國鐵勞組에 鐵槌를 加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勞動者들을 溫情的으로 對했다. 마쓰모토 세이초 는 이 點이 시모야마의 悲劇의 端初라고 指摘한다.

시모야마 自殺說 [ 編輯 ]

事件 發生 直後부터 《 마이니치 新聞 》(?日新聞)은 自殺을 主張했다. 같은 新聞의 記者 다이라 쇼이치 (平正一)는 取材 記錄을 모아 《生體 單》(生?れき?)을 1964年 에 出刊했다. 여기서 그는 시모야마의 죽음을 大規模 人員整理를 進行해야 하는 責任者 자리에 놓여졌기 때문에 初老期 憂鬱症에 걸렸고, 그로 인해 發作的으로 自殺했다고 推理했다.

1976年 (쇼와 51年)에는 사토 하지메 (佐藤一)가 自殺說의 集大成이라고 할 수 있는 《시모야마 事件 完全 硏究》(下山事件全?究)를 出刊한다. 사토는 마쓰카와 事件 의 容疑者로 陋名을 쓰고 逮捕·起訴되어 14年間의 法廷鬪爭 끝에 無罪判決을 爭取해낸 사람이다. 사토는 시모야마 事件도 聯合軍 最高司令官 總司令部 (GHQ; 日本 美軍政) 或은 日本 政府에 依한 謀略과 그로 인한 他殺으로 생각하고, ‘시모야마 事件 硏究會’(下山事件?究?)의 事務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調査를 繼續하면서 他殺說에 疑問을 가지게 되어 發作的 自殺說을 主張하게 되었고, 他殺의 根據로 여겨진 여러 證據들에 對한 調査와 反論을 加했다.

自殺說의 論據
  • 總裁가 되기 以前, 運輸 次官이었을 적부터 시모야마는 “그만두고 싶어”(?めたい)라고 不平하고 다녔다.
  • 事件 前날, 시모야마는 이곳저곳의 要因들을 面會하거나 面會를 要請했는데, 그래 놓고는 正確한 用件도 없이 “집에 歎願이나 脅迫 電話가 온다” [註解 15] 라고 하소연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밖에도, 前날부터 當日 아침(美軍政에게 재촉받은, 解雇 發表 期限)까지의 시모야마의 行動에 鬱火와 憂鬱로 생각할 수 있는 部分이 많이 있다(꼼꼼히 쓰고 있던 手帖이 6月 28日로 中斷되어 있고, 도시락을 먹지 않고 갖고 다니면서 交通會館의 아무도 없는 房에서 혼자 먹는 等).
  • 鐵道 自殺 等 瞬間的으로 목숨이 끊기는 事故의 境遇, 逆斷面에 出血이 없을 수도 있다. 胸部는 驛團되지 않았지만 內部 臟器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는데, 이것은 列車에 깔렸다기보다 서 있다가 들이받힌 痕跡으로 보아야 한다.
  • 結果的으로, 警察이나 매스컴에 依한 自殺說 發表는 GHQ에 依해 中止되었고, 勞組에 依한 他殺이라는 헛所聞이 떠돌았다. 그리고 後의 總選에서 共産黨이 敗北하고 日本의 共産化가 沮止되었다. 때문에 시모야마가 自殺했다고 해도, 美軍政의 謀略이 있었음은 變함이 없다.
  • 루미놀 檢査는 現場에서 廢家까지밖에 行해지지 않았다. 當時의 列車 化粧室은 大小便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에, 線路라면 어디서든 女性의 生理血 때문에 血痕이 생길 수 있다는 意見도 있다. 또 問題의 廢家는 좁고 긴 建物이라서 大部分 壁이 없고, 犯行을 저지르기에는 不適切하다.
  • 시모야마 總裁 家族과 親한 關係였던 요시마쓰 後尾非(吉松富?)의 證言 [4] 에서는, 總裁 死亡 며칠 前에 直接 本人에게서 “美軍政에서 國鐵 職員 大量解雇 指示가 내려와서 弱해져 있다” [註解 16] 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고, 死亡 當日에는 總裁 夫人에게 “自殺했던 것 같다” [註解 17]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시모야마 他殺說 [ 編輯 ]

1960年, 마쓰모토 세이초 (松本?張)가 《 日本의 검은 안개 》(日本の?い霧)를 發表한다. 이 未濟 事件 追跡집에서 세이초는 當時 日本을 占領하고 있던 聯合軍의 中心的 存在였던 美軍의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 防諜部隊 )가 事件에 聯關되어 있다고 推理했다. 시모야마 事件의 公訴時效가 滿了되자 세이초를 始作으로 ‘시모야마 事件 硏究會’가 發足했고, 資料의 蒐集과 關係者들의 證言 聽取를 實施했다. 이 硏究會에서는 美軍政이 介入한 他殺 可能性을 主張했다. 硏究會의 成果는 미스즈 西方 (みすず書房)을 통해 《資料·시모야마 事件》(資料?下山事件)으로 出版되었다.

《아사히 新聞》 記者 야다 키미오는 1973年 (쇼와 48年)에 오랜 歲月 동안 取材한 結果物인 《모살 시모야마 事件》(謀殺下山事件)에 整理한 取材 過程에서 “美軍 內의 防諜機關의 命令으로 死體를 옮겼다” [註解 18] 라고 主張하는 人物과 接觸하여, 그 人物과의 對話를 記錄했다.

1999年 ( 헤이세이 11年), 《 슈칸 아사히 》(週刊朝日) 誌에서 〈시모야마 事件―50年 後의 眞相〉(下山事件-50年後の?相)李 連載되었다. 그 뒤, 共同으로 取材를 進行하고 있던 모로나가 유우지 (諸永裕司)가 쓴 《파묻힌 여름》(葬られた夏), 모리 타츠야 (森達也)가 쓴 《시모야마 케이스》(シモヤマ?ケ?ス), 시바타 테츠打카 (柴田哲孝)가 쓴 《시모야마 事件―最後의 證言―》(下山事件-最後の?言-)李 次例로 出版되었다. 모두 區 一齊 陸軍 軍務員 들이 만든 組織과 阿只아 産業 (?細?産業) 關係者들에 依한 他殺로 結論내리고 있다. 또 시모야마의 親舊, 知人들은 “그 사람의 性格上, 解雇事態를 앞에 두고 自殺한다면 遺書라도 한 張 남겼을 것이다.” [註解 19] 라며 他殺說을 支持하고 있다.

他殺說의 論據
  • 시모야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鐵道 일을 하니까 幸福해” [註解 20] 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汽車로 自殺을 하는 것은 納得할 수 없다.
  • 國鐵 同僚인 緦麻 히데오 (島秀雄), 카가야마 유키오 (加賀山之雄), 아베 죠지(安部?二)는 誠實하고 청렴했던 시모야마가 遺書도 없이 죽었을 理가 없다고 말한다.
  • 失踪 當日 시모야마가 들른 곳 中에는 銀行도 있었다. 시모야마의 金庫에는 春化 가 있었는데, 시모야마는 돈만 引出해 갔다. 自殺을 決心한 사람이 不名譽가 될 수 있는 物件을 處分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세이초의 知的).
  • 逆斷面이나 事故 現場에 出血 痕跡이 없는 것은, 汽車에 치이기 前에 이미 죽었다는 것을 意味한다(동경대 法醫學팀의 意見).
  • 시모야마가 事件 前에 들렀다는 旅館의 主人은 前職 特雇 (日帝 祕密警察)이기에 證言에 信憑性이 없다.
  • 美軍政 陰謀說. 시모야마를 친 列車 앞에 지나간 列車는 聯合軍 專用 車輛이었고, 現場을 지나는 도부 이세사키 先導 聯合軍이 자유롭게 使用할 수 있는 狀況下에 있었다.
  • 시모야마의 속옷과 洋襪에는 大量의 기름이 묻어 있었는데, 겉옷과 구두는 멀쩡하다. 이것은 시모야마가 죽은 뒤 옷을 입혔다는 證據다.
  • 비가 많이 왔는데도 不拘하고, 시모야마가 누워 있던 자리의 흙은 말라 있었다.
  • 現場에 남은 얼마 되지 않는 血痕을 美軍들이 긁어 가는 것을 目擊한 사람이 있다.
  • 失踪 當日 시모야마로 생각된 사람이 眞짜 시모야마인지 疑心스럽다.

後日談 [ 編輯 ]

事件 以後, 시모야마 總裁의 驛團 地點 近處의 도부 이세사키 선 鐵橋 아래, 國鐵 朝飯 선 下行 方面의 堤防 곁에 시모야마 總裁 追慕碑가 세워졌다. 그 뒤, 朝飯 선 改良 公使와 營團 地下鐵 지요다 선 敷設 工事 때문에 場所를 移動했다. 現在는 逆團 支店에서 約 150 미터 東쪽, 니시兒野勢(西綾?) 1街 附近의 JR 朝飯 선 鐵橋 아래의 道路 西쪽에 있다. 追慕碑 글씨는 제2대 國鐵 總裁로 就任한 카가야마 유키오가 썼다. 現在 碑石이 位置해 있는 場所는 高彈盧 方面에서 南쪽으로 흐르는 水路와 거기에 나란한 옆길이 도쿄 拘置所 (舊 고스게 刑務所) 方向으로 쭉 가다가 朝飯 線을 건너는 地點에서 한때의 야고老身덴(?五?新田) 건널목(通稱 高彈盧 건널목)에 該當한다. 시모야마 總裁의 屍體 彫刻들은 도부 이세사키 선 鐵橋에서 이 건널목까지 흩어져 있었다. 現在 數로는 ‘高彈盧 親水 步行者 專用道路’(五反野親水?道) 事業의 一環으로 整備되고 있다.

시모야마 總裁를 친 D51 615號 機關車는 1943年 (쇼와 18年) 10月 26日 에 死亡者 110名과 負傷者 107名을 發生시킨 朝飯 선 쓰치우라 驛 列車 衝突 事故 를 일으킨 車輛이기도 하다. 또, 시모야마를 치었을 때의 機關士는 시모야마가 센다이 機關 球場으로 있을 적의 部下이기도 했다. 機關士는 이 事件 以後 鬱火症으로 招來된 스트레스性 胃潰瘍 으로 몇年 뒤 死亡했다.

보다 巨視的으로 보았을 때, 시모야마 事件은 大量의 人員整理를 둘러싸고 激烈히 달아오른 國鐵 勞組의 鬪爭을 瓦解시켰다. 시모야마가 죽고 勞組活動이 주춤해지자 國鐵, 도시바 를 비롯한 日本의 公企業·大企業들은 美軍政의 命令과 다름없는 勸告에 따라 엄청난 數의 勞動者들을 解雇했다. 시모야마의 後任 카가야마 國鐵 總裁나, 도시바 社長 이시자카 다이조 는 自身들이 시모야마의 ‘犧牲’에 힘입어 企業을 再建할 수 있었다고 回顧했다. [5] 그리고 시모야마 事件에 이어 터진 마쓰카와 事件 , 未妥카 事件 . 이른바 日本國有鐵道 3大 未濟 事件 으로 日本 內 最大 勞組였던 國鐵 勞組를 비롯한 日本의 勞動運動은 鐵槌를 맞았다. 連鎖的으로 터진 未解決 事件들을 통해 美軍政은 日本의 民主化 勢力을 制御하고, 共産 勢力에게 暴力的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우려 했다. [6]

시모야마가 非命에 죽자 國鐵 勞組는 “眞心 어린 追慕의 말씀을 올립니다. …意見은 對立된 채로 暗礁에 걸렸고, 저희는 當身의 얼굴에 苦衷의 빛이 스친 것을 알고 있습니다. …60萬 前 組合員은 오늘 當身의 人品을 그리워하며 哀悼의 뜻을 바칩니다. …國有鐵道를 위한 永遠한 주춧돌로서 便히 잠드시길 빕니다.”라는 調査(弔辭)를 썼다. 그러나 이 調査는 끝내 靈前에서 읽히지 못했다. [7]

關聯 大衆 媒體 [ 編輯 ]

書籍
  • 마쓰모토 세이초 (松本?張) 著, 《 日本의 검은 안개 》(日本の?い霧), 문춘文庫 (文春文庫) 發行. 韓國語版 ISBN   978-89-7696-623-0
  • 야다 키미오 (矢田喜美雄) 著, 《모살 시모야마 事件》(謀殺 下山事件), 1973年 講談師 (講談社) 發行.
    • 야다 키미오 著, 《모살 시모야마 事件》, 2004年 신풍사 (新風?) 發行.
    • 야다 키미오 著, 《모살 시모야마 事件》, 2009年 상전사 (祥?社) 發行. ISBN   4-396-33505-9
  • 사토 하지메(佐藤一) 著, 《시모야마 事件 完全硏究》(下山事件全?究), 1976年 示唆通信社 (時事通信社) 發行.
  • 刑事時代 히라쓰카 하치베의 쇼와 事件史 》(刑事一代 平塚八兵衛の昭和事件史), 신조문高 (新潮文庫) 發行. 警視廳 搜査 第1科에 所屬되어 있던 히라쓰카 하치베 가 取扱한 事件들의 인터뷰를 冊으로 만든 것.
  • 모리 타츠야 (森達也) 著, 《시모야마 케이스》(下山事件(シモヤマ?ケ?ス)), 2006年 신조문高 發行.
  • 시바타 테츠打카 (柴田哲孝) 著, 《시모야마 事件 最後의 證言 (完全版)》(下山事件 最後の?言), 2007年 상전사 發行. ISBN   4-396-33366-8
  • 사이토 슈코(?藤充功) 著, 《陸軍 나카노 學校의 眞實―諜報員들의 前後》(陸軍中野?校の?? 諜報員たちの?後), 2005年 恪踐書店 (角川書店) 發行(2008年 恪踐文庫 發行).
  • 사토 하지메 著, 《‘시모야마 事件’ 謀略論의 歷史》(「下山事件」謀略論の?史), 2009年 菜類社(彩流社) 發行.
  • 시바타 테츠打카 (柴田哲孝) 著, 《完全版 시모야마 事件―最後의 證言―》(完全版 下山事件-最後の?言-): 警視廳의 合同搜査會議의 內部 資料라고 생각되는 謄寫 印刷物을 묶은 것.
映像 미디어
漫畫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1. 轢?. 列車가 사람이나 動物을 깔아뭉개 切斷하는 事故.
  2. 警視廳 搜査 第1課는 스에히로 旅館에서의 目擊 證言에 依해 스트레스 等으로 因한 發作的 自殺로 意見이 기울었다. 하지만, 高彈盧 驛 周邊에서 스에히로 旅館에 이르기까지 目擊된 人物은 旅館에 있을 때와 旅館을 나와서 터널 堤防 에서 目擊되었을 18時 40分까지는 眼鏡 을 쓰고 있었는데, 저녁동안 ‘그 사람’을 目擊한 3個의 目擊談에서는 넥타이 와 眼鏡을 벗고 있었다고 하므로, 深刻한 近視 라 恒常 眼鏡을 쓰고 있었던 시모야마로서는 부자연스러운 行動이라는 指摘, 그리고 旅館에 滯留하고 있던 中 담배 를 한 개비도 피우지 않은 것도 愛煙家인 시모야마라기에 異常하다는 指摘이 存在한다. [1] 또한, 시모야마는 도부 鐵道 의 優待乘車券을 가지고 있었지만, 高彈盧 驛의 改札口에서 驛務員에게 車票 를 건네준 點 等의 疑問點도 多數 指摘되고 있다. 그렇기에 高彈盧 驛前에서 目擊된 人物이 시모야마 本人으로 볼 것인가, 假짜로 볼 것인가 意見이 紛紛하다. 後述할 마츠모토 세이초 는 이 人物이 變裝한 假짜라고 主張했다.
  3. 이 51 651號 機關車는 事件 當日 週 發電機 가 움직이지 않았다. 때문에 燈불들을 非常用 二次電池 로 發光시키고 있었지만, 前照燈 의 光量은 10 와트 에 不過했고, 그 때문에 乘務員들은 시모야마 總裁를 逆斷韓 瞬間에도 아무 것도 몰랐다.
  4. 失血死. 大量의 內出血 또는 外出血로 死亡에 이르는 것.
  5. 汽車에 치이기 前에 大量出血로 이미 死亡한 狀態였다는 뜻이다. 세이초 亦是 이 假說을 支持했다.
  6. 轢死?. 치어 죽은 屍體.
  7. 生?轢?. 살아 있을 때 汽車에 치여 죽었다는 뜻.
  8. 死後轢?. 죽고 나서 屍體가 汽車에 치여 토막난 것이라는 듯.
  9. 다만, 事後逆段이 곧 他殺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生體’(生?)의 ‘事後驛團’도 일어날 수 있다. [2]
  10. 原文: 「解剖執刀者桑島博士は、いまだかつて公式には他殺、自殺のいずれともいっていない。死後轢?という解剖所見を述べているだけである。?究は??中であり、?究結果も知らない者が勝手に推論することは、?者的態度ではない」
  11. 이 當時는 物資가 不足한 時節이라, 機關車의 기름 에 植物性 기름을 섞어 넣었을 수도 있다는 反論도 存在한다.
  12. 原文에는 군조軍曹.
  13. 시모야마 事件에서 루미놀이 使用된 것이 日本 歷史上 最初의 科學搜査에 該當한다. 現在도 루미놀 反應은 時間이 많이 經過한 犯罪 現場에서 오래되거나 或은 微細한 血痕을 檢出할 때 널리 쓰이고 있다.
  14. 그 後의 調査에서, 1946年(쇼와 21年) 2月부터 1948年(쇼와 23年) 5月까지 낚시줄 製造業者가 이 집을 빌려서 長斫을 패다가 負傷을 當한 일 때문에 血痕이 생겼다고 說明되었다.
  15. 原文: 「嘆願や脅迫が自宅に?る」
  16. 原文: 「GHQから??職員大量解雇の指示があって、弱ってるよ」
  17. 原文: 「自殺したのだと思う」
  18. 原文: 「アメリカ軍?の防諜機?に命じられて死?を運んだ」
  19. 原文: 「彼の性分からしてあれほどの首切りを前に自殺するというのであれば遺書の一つは?すはずである」
  20. 原文: 「?道の仕事に就けて幸せだ」
參照週
  1. 親同生 시모야마 츠네오(下山常夫) 證言, 《資料 시모야마 事件》(資料?下山事件) 573페이지
  2. 錫谷徹『死の法??―下山事件再考』(1983、北海道大??書刊行?)
  3. 야다 키미오(矢田喜美雄), 《모살 시모야마 事件》(謀殺下山事件), 講談師 , 1973年, 〈見解의 對立이 繼續되다〉(見解の?立は?く) 92쪽의 候樓하타 敎授의 見解 拔萃
  4. 吉松富?氏?言 よしなしごと - 全?究 下山事件
  5. 세이초, 《日本의 검은 안개 下》 360쪽
  6. 세이초, 《日本의 검은 안개 下》 362쪽
  7. 세이초, 《日本의 검은 안개 上》 98쪽 ~ 100쪽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