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民族靑年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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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民族靑年團
朝鮮民族靑年團
略稱 族靑
理念 民族主義
反共主義
스펙트럼 右翼
黨職者
團長 이범석
副團長 안호상
歷史
創黨 1946年 10月 9日
解産 1949年 1月 (事實上)
1954年 1月 (公式)
統合된 正當 大韓靑年團
後計定當 自由黨
議席
國會議員
(1948年)
6 / 200
朝鮮民族靑年團의 黨首인 이범석 의 寫眞

朝鮮民族靑年團 (朝鮮民族靑年團), 略稱 族靑 (族靑)은 이범석 을 中心으로 1946年 10月 9日 ‘國家至上, 民族至上’이라는 口號를 내걸고 創設한 反共主義 敵 右翼 團體이다. [1]

歷史 [ 編輯 ]

構成 [ 編輯 ]

이범석 1946年 10月 民族精神의 傳統을 繼承할 靑年運動의 母體로서 結成한 團體이다. 略稱 ‘足淸(族靑)’이라 한다. 李承晩 이 執權한 뒤 實施한 靑年團體 統合에 따라 大韓靑年團 (大韓靑年團)으로 統合, 解體되었다. 族靑의 初期 面貌를 보면, 團長에 이범석 , 副團長에 안호상 , 全國委員에 김관식(金觀植)· 金活蘭 ·이철원(李哲源)· 현상윤 ·이용설(李容卨) 外 32名, 移徙에 백낙준 · 崔奎東 外 10名, 常務理事에 김형원(金炯元)·노태준(盧泰俊)·박주병(朴柱秉)·설린(薛麟)·김웅권(金雄權) 等으로 構成되었다. [1]

강령 [ 編輯 ]

朝鮮民族靑年團의 綱領을 團地三칙(團旨三則)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民族精神을 喚起하여 民族至上·國家至上의 理念下에 靑年의 使命을 다할 것을 期한다. 우리는 宗派를 超越하여 對內自立·對外共存의 精神으로 民族의 力量을 集結할 것을 期한다. 우리는 現實을 直視하며 遠大한 곳을 바라보고(着眼遠大), 卑近한 것부터 着手하여(着手卑近) 件國道上의 靑年다운 純減(純感)을 바칠 것을 期한다." 等을 宣布하며 내세웠다. [1]

歷代 政治 系派 構成員 및 關聯 事案 [ 編輯 ]

活動 [ 編輯 ]

朝鮮民族靑年團은 美軍政 當局의 支援을 받아 1946年 11月 水原 에 訓鍊所를 設置하고 1個月 過程인 靑年幹部訓鍊에 着手하였다. 當時 訓鍊支援子 數는 2萬餘 名에 이르렀으며, 그들 中에서 200名을 選拔, 1946年 12月 第1期 訓鍊生 入所式을 가졌다. 第7妓生부터는 女性幹部訓鍊生徒 入所시켰으며, 訓鍊은 理論部·實踐部·기술부 等 5個 部門으로 나누었다. 理論 部門에서는 정인보 · 안호상 ·배성룡(裵成龍)·설린 等 20餘 名이 講論을 맡고, 實踐 部門에서는 이범석 스스로가 1週 12時間의 講論을 맡아 祖國의 現實과 새로운 靑年運動의 方案, 革命的 人生觀, 革命的 民族觀, 救國鉤足運動(救國救族運動) 等의 認識火 敎育에 힘썼다.

朝鮮民族靑年團은 靑年들의 特質, 卽 生命力·情熱·舊地褥(求知慾)·自意識·冒險心·純眞性 等을 靑年運動의 生産力과 鬪爭力으로 轉換시켜나갔다. 强訓鍊을 받은 修了生들은 李範奭의 麾下에서 뭉쳐, 各其 사는 고장과 所屬되었던 團體로 돌아가 族靑의 下部組織을 結成, 强化해 나감으로써 全國的인 莫强한 組織을 形成하였다. 이와 같이 組織이 擴張됨에 따라 政界와 社會의 一部에서는 光復軍 活動의 延長, 獨裁運動團體, 甚至於 容共團體라는 批判의 소리가 剛하게 일었다.

朝鮮民族靑年團은 1951年 12月 新黨으로서 이기붕 中心의 自由黨 이 結成될 때, 別途로 避難 中이던 釜山 東亞劇場 에서 發起人大會를 갖고 綱領·黨憲 等을 採擇함으로써, 結局 같은 이름의 두 自由黨이 誕生하였다. 이른바 ‘院外自有黨(院外自由黨)’이다. 이 族靑系의 院外自有黨에서는 1952年 5月의 情·副統領選擧에 즈음하여 院內自由黨의 機先을 制壓, 李承晩 을 大統領候補로, 이범석 을 副統領候補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落選하고 無所屬 함태영 이 當選되었다.

自由黨 의 全黨大會는 鄭副統領 選擧 後 40日 內에 召集하게 되어 있었는데, 全黨大會에서 選擧 結果에 따른 論功이 豫想되어 族靑系列은 類例 없는 政治的 激憤에 휩싸였다. 族靑系는 選擧에 非協調的이던 人士들을 糾彈하는 한便, 黨外로도 攻勢를 폈다. 當時 國務總理 장택상 과 內務部長官 김태선 을 選擧法 違反으로 告發하는 同時에 政治的 鬪爭을 宣言하기까지 하였다.

김태선은 失脚하여 서울特別市葬 으로 물러앉고, 장택상은 ‘考試事件(古市事件)’이라는 政略에 휘말려 總理職에서 물러났다. 情·副統領選擧 後 肅淸을 위한 族靑系 主導의 全黨大會가 1953年 5月에야 大田에서 열렸다. 이 大會는 自由黨 안에서 그 宗派的 鬪爭으로 族靑系가 黨權을 傳單(專斷)韓 最高絶頂期였으며, 이것을 當時에는 朝鮮民族靑年團의 自滅을 招來한 發惡的인 橫暴機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李承晩 은 같은 해 9月 族靑派 除去에 關한 談話를 發表하였다. 李承晩은 特別分付라 불리는 이 談話를 통하여 “自由黨 안에 舊民族靑年團을 中心으로 하는 勢力扶植者들이 있어서, 내 意圖에 對立하여 黨內의 統一을 해치며 全 國民의 統一精神을 危險하게 하여 分裂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團地(斷指)의 아픔’을 當하더라도 肅淸되어야 한다.”는 前例 없는 强勁한 決斷을 보였다.

이를 고비로 하여 이범석은 自由黨 안에서 이기붕과의 權力鬪爭에서 敗北, 大韓靑年團으로의 統合原則을 決意하고 統合交涉을 위한 5名의 代表者를 뽑았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954年 1月 “우리 靑年運動의 功過에 對하여는 우리 民族이 復興하였을 때 正當한 歷史的 評價를 받게 될 것”이라는 聲明을 마지막으로 解體되었다. [1]

背景 [ 編輯 ]

朝鮮民族靑年團의 모습

이범석 은 靑年들을 光復된 새 나라의 役軍으로 組織化하고 訓鍊하는 것이 第一 時急한 일이라 判斷하고, 美軍政의 支援을 받아 ‘足淸’을 創設했다.

美軍程度 靑年團體를 活用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하여 1946年 中盤 祕密裏에 約 500萬 달러와 美軍 裝備를 支援하고 訓鍊 顧問으로 美軍 大領 한사람 等을 特派하여 族靑 結成을 支援하였다. [2]

問題의 素地를 없애기 위해 資金은 軍政廳이 아닌 日本 도쿄 맥아더 司令部로부터 나왔다. 맥아더 司令部는 車輛 支援에서부터 制服까지 모두 支援해 주었다. [3] [4] [5] [6] 안호상 은 族靑의 理論的 根據를 提供해 주었다. [7]

族靑은 金活蘭 , 백낙준 , 崔奎東, 현상윤 等으로 理事會를 構成하였고 京畿道 水原에 있는 舊 日本軍陸軍病院 建物에 族靑 中央本部를 設置하고 이곳에 訓鍊所를 마련하였다. 蘇聯의 抗議를 避하기 위해 祕密裏에 水原 訓鍊所에서 約 7萬名이 訓鍊을 받았다. 敎育 目的은 將來에 軍隊였으며 이中 相當數가 國軍에 編入되어갔다. [3] [6]

族靑은 1946年 10月 9日 創設 當時 300名에 不過했으나, 1年 뒤인 1947年 11月 에는 30萬 名으로, 2年 後에는 8月 115萬名, 그해 가을 120萬 名으로 늘어났다. 1947年 4月 韓國光復軍 總司令官이던 지청천 이 歸國해 大同靑年團 을 結成하면서 足淸에 對해서도 合流를 要請했지만, 이범석 은 合流를 拒否하고 大同靑年團 과 競爭關係에 들어갔다.

國粹的이고 甚하게 全體主義的 發想이라는 批判도 있었다. [7]

1948年 5月 10日 大韓民國 制憲國會 總選 에선 6名이 族靑을 標榜하여 當選되었으며, 나중엔 院內交涉團體를 構成할 程度로 勢力이 커졌다. 그러나, 1948年 11月부터 모든 靑年 團體를 統合, 單一化하라는 李承晩 大統領 의 指示에 依해 靑年團體 統合이 推進되어, 族淸道 抵抗 끝에 1949年 結局 大韓靑年團 에 吸收, 解體되었다.

大韓靑年團 과의 吸收 過程에서 李承晩 의 命令에 段階的인 合流安을 내놓는 等 抵抗을 하자, 李承晩은 1949年 1月 5日 談話文을 내 族靑의 解散을 公式 促求하였다. 1949年 1月 20日 族靑은 公式的으로 解散되었고 이범석은 國防長官에서 解任되었다. [8]

그러나, 解産 뒤에도 族靑 出身들은 ‘族靑系’라고 불리는 勢力을 形成해 自由黨 創黨 過程에서 中心的인 役割을 하기도 했지만 1953年 12月에 李範奭을 中心으로 한 이들이 自由黨에서 除名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歷代 總選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國會庭園 當選者 現況
(地域區 當選/候補)
得票 得票率
1948年 1代 總選 200 6 / 16 144,791 2.1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民族文化大百科》, 朝鮮民族靑年團(朝鮮民族靑年團) , 韓國學中央硏究院
  2. 康俊晩 ,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卷〉( 人物과사상사 , 2004) 266쪽
  3.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卷〉( 人物과사상사 , 2004) 266~267쪽
  4. 최장집 外, 《解放前後事 認識 4》(한길사, 1989) 74, 94쪽
  5. 안호상 , <안호상 博士 回顧錄: 族靑 解散>(문화일보) 1995年 3月 23日子 19面
  6. 그레고리 핸더슨, 박행웅·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韓國政治》(한울아카데미, 2000) 224~225쪽
  7.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卷〉( 人物과사상사 , 2004) 268쪽
  8.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 人物과사상사 , 2004) 168쪽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