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次 高句麗-水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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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次 高句麗-水 戰爭
高句麗-水 戰爭 의 一部
날짜 612年
場所
結果 高句麗의 決定的 勝利
交戰國
隋나라 高句麗
指揮官

數 煬帝
于仲文
宇文述

내호아

영양왕
高巾舞

을지문덕
兵力
記錄 上 113萬 3800餘名 不明
被害 規模
30萬名 以上 不明

第2次 高句麗-水 戰爭 (第二次高句麗-隋戰爭)은 612年 隋나라 (隋)의 煬帝 高句麗 를 攻擊해 일어난 戰爭 이다. 高句麗와 抗爭한 中華帝國의 軍事動員 中 最大 規模였으나 요동성 에서 발이 묶이고 水軍은 平壤城 에 上陸했다가 敗退하였으며 別動隊가 薩水大捷 에서 몰살당하는 等 隋나라는 深刻한 被害만 입고 撤收했다.

背景 [ 編輯 ]

607年 數 煬帝는 突厥 界民 加한 의 幕府를 訪問하였고 마침 界民意 幕舍에는 高句麗의 영양왕 이 보낸 使臣이 마침 界民에게 가 있었다. 界民이 우리 使臣을 敢히 숨길 수 없었다. 이 때 皇門 시랑 排球 가 隋 煬帝에게 말했다.

"高句麗는 元來 記者에게 烽下였던 땅이며, 한 나라와 진 나라가 모두 郡縣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只今은 臣下의 나라로 行動하지 않고, 別途의 地域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先制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征伐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量 輛에게 軍士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不肖하여 功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陛下의 時代이니, 어찌 그들을 征伐하지 않고, 禮節의 땅이 오랑캐의 巢窟로 變하도록 放置할 것입니까? 오늘 高句麗 使臣은, 界民이 나라를 바쳐 王化에 服從하는 것을 直接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機會를 利用하여, 高句麗가 우리에게 朝貢하도록 威脅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數 煬帝는 이에 따라 高句麗 使臣에게 自己의 뜻을 傳하도록 우홍에게 命令하였다. "界민은 誠心으로 우리 中國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直接 界民意 幕府에 온 것이며, 明年에는 應當 濁軍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王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時間 內에 入朝하되, 스스로 疑心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王을 保護하기를 界民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萬若 入朝하지 않는다면, 界民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討伐하리라."하였다.

하지만 嬰陽王은 使臣으로부터 이를 보고 받았으나 數 煬帝의 脅迫에 屈服하지 않았다. 따라서 高句麗는 이제 數 煬帝가 張差 侵攻할 것을 對備하게 된다.

數 煬帝 는 突厥의 界民家韓에게 忠誠을 盟誓 받은 뒤인 611年, 高句麗 征伐을 決定했다. 이에 엄청난 量의 稅金을 거둬야 했으며, 戰線을 하루終日 建造하느라 열에 서너 名이 배에 구더기가 생기는 病에 걸렸다고 한다. 또한 온 나라의 말과 食糧, 兵器等의 物資를 濁軍 으로 옮겼다. 이에 곳곳에서 叛亂이 일어났는데, 煬帝는 이를 모두 鎭壓하였다.

戰爭 始作 [ 編輯 ]

611年 2月 數 煬帝는 詔書를 내려 討伐키로 하였다. 여름 4月 巨加가 濁軍(?郡)의 臨朔宮에 當到하여 四方의 軍士들이 濁軍으로 모였다.

612年 正月 數 煬帝가 다음과 같은 詔書를 내렸다.

"하찮은 高句麗 무리들이 어리석고 佛供하여 渤海와 갈석 사이에 모여들고, 요(遼)와 예(濊)의 境界를 거듭 蠶食하였다. 비록 한(漢), 위(魏) 때 誅戮을 거듭 當하여 그들의 巢窟이 暫時 엎어졌어도, 亂離로 막힘이 많자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어 只今은 지난 時代보다 더 많아졌다. 돌아보니 中國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 땅이 되었다. 歲月이 흐르면서 惡이 쌓이고 가득차니, 하늘의 도는 淫亂한 者에게 災殃을 내리므로, 이미 亡할 徵兆다. 道를 어지럽히고 德을 무너뜨림이 헤아릴 수 없고, 惡을 가리고 奸邪함을 품은 것이 하루를 세어도 다 헤아릴수 없을 程度다. 일찍이 詔書를 내려보내 高하여도 詔勅을 받아들인 적이 없고, 조근도 몸소 하지 않았다. 도망간 者들을 받아들임이 그치지 않고, 邊方의 봉화자를 수고롭게 하며, 關門과 딱다기가 조용할 날이 없으니, 그로 인하여 百姓들은 生業을 廢하게 되었다. 옛날에 征伐하면서 하늘의 그물에서 빼주어, 사로잡힌 者의 죽음을 늦추어주고, 後에 降伏한 者도 죽이지 않았는데, 그 恩惠를 생각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 무리를 합쳐 바다의 戍자리 軍士들을 죽이고, 靺鞨의 習慣을 익혀 夭逝를 侵犯하였다. 또 請求의 바깥에서 모두 職工을 닦고, 함께 正朔을 받드는데, 다시 往來하는 길을 막아 寶物을 빼앗고, 罪없는 사람들에게 殘虐한 짓을 하였으니, 精誠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도리어 禍를 當하였다. 수레를 탄 使臣이 解凍에 이르러, 藩國의 境界를 지나려 해도 길을 막고 使臣을 拒絶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떻게 臣下의 例라고 할 수 있느냐? 이를 참는다면 무엇인들 容恕 못하랴? 또 法令이 苛酷하고 租稅가 무거우며, 힘센 臣下와 豪族들이 國政을 틀어쥐고 朋黨을 이루고, 賂物을 주고받음이 마치 市場에서 物件을 사고파는 것과 같으니, 百姓들의 抑鬱함이 풀어지지 않는다. 해마다 거듭된 災殃과 凶年으로 飢饉이 들고, 兵士들은 討伐로 쉬지 못하며, 賦役의 期限이 없고, 軍糧 運搬으로 힘이 다하여, 몸뚱아리는 구덩이나 골짜기에 구른다. 苦痛스러운 百姓들은 누구를 따를 것인가? 境內의 百姓들이 그 弊害를 견디지 못하여 슬프고 두려워도. 生命을 圖謀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돌리니, 老人과 어린이도 酷毒함에 歎息한다. 나는 風俗을 살피려 柳州, 朔州에 왔는데, 弔問하고 罪를 묻는 것을 두 番 걸음할 수 없어, 親히 6軍을 거느리고 舊罰을 펴서, 危急한 者를 求해주며, 하늘의 뜻에 따라 달아난 무리를 滅하여 宣祖의 가르침을 이을 것이다. 이제 마땅히 軍律에 따라 行軍하되 隊伍를 나누어 目的地로 向할 것이니, 우레같은 眞군소리는 渤海를 뒤덮게 하고, 扶餘를 지나 번개같이 휩쓸 것이다. 防牌를 가지런히 하고 甲옷을 살피고, 軍士들에게 警戒하여 일러둔 後에 出行하며, 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必勝을 基한 後에 싸우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正月부터 數 煬帝는 直接 征伐軍을 發進시켰다. 왼쪽 12軍은 樓房, 壯蠶, 解明, 介馬, 建安, 濫訴, 搖動, 玄도, 扶餘, 朝鮮, 沃沮, 樂浪 等 길로 進軍하고, 오른쪽 12軍은 點線, 함자, 昏迷, 臨屯, 후성, 除해, 答돈, 肅愼, 갈석, 東이, 대방, 楊平 等 길로 進軍하되 앞뒤 部隊끼리 서로 連絡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 모두 高句麗의 首都 平壤에 集結하도록 하였다. 모두 1,133,800名이었는데 200萬 名이라고 일컬었다. 軍糧을 나르는 者는 그 배가 되었다. 南쪽의 上件數 위에서 祭祀를 지내고, 臨朔宮 南쪽에서 喪制에 祭祀지내고, 계성 北쪽에서 마調에 祭祀지냈다. 제가 親히 竊盜를 除授하여 軍隊마다 賞狀과 아장을 各各 1名씩 두고, 騎兵은 40代로 하고, 各 臺는 100名, 10臺가 1段이 되게 하였으며, 步兵은 80代로 하고 나누어 4段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各各 便將 1名을 두었다. 그 甲옷, 투구, 갓끈, 印章끈, 旗발은 단마다 色깔을 다르게 하였다. 하루 1軍씩 40里 間隔으로 英(營)을 이어 漸進케 하니 40日만에 出發이 모두 끝났다. 머리와 꼬리가 繼續되고 高角이 서로 들리며 旗발이 960里에 뻗쳤다. 어영 內에는 모두 12位, 3代, 5星, 9時가 있었는데, 내 外 前 後 左 禹 6軍에 나누어 屬하게 하고 그 뒤에 출발시키니 또 80里를 뻗쳤다.

遼河 戰鬪 [ 編輯 ]

612年 3月 15日, 數 煬帝 가 直接 軍士를 指揮하며 隋나라의 大軍은 腰下에 이르렀고 隋나라 大軍이 모두 모여 物價에 이르러 큰 陣을 이루었으나, 東쪽으로 進軍하는 수 나라 軍事와 이를 防禦하는 高句麗 軍事間에 첫 戰鬪가 벌어졌고, 이곳에서 隋나라 軍士와 高句麗 軍事間에 2달 동안에 걸쳐 熾烈한 戰鬪가 벌어졌다. 高句麗 軍士가 江을 막고 지켰으므로 隋나라 軍士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數 煬帝 가 工部尙書 愚問個 에게 命하여 遼河 西쪽 언덕에서 3個의 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完成되자 끌어다 東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每番 高句麗 軍士들이 크게 닥치자 隋나라 軍士로서 날래고 勇敢한 者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接戰하였다. 高句麗軍 約 2萬餘名이 높은 곳에 올라 攻擊하니, 隋나라 軍士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者가 매우 많았다. 記錄上 約 3萬餘名이 射殺되었다. 3月 19日, 隋나라 軍은 總攻擊을 하여 도하에 나섰으나 高句麗軍의 大反擊에 크게 敗하여 맥鐵杖 (麥鐵杖), 戰士웅 (錢士雄), 猛差 (孟叉) 等 勇猛한 將帥들이 죽었다. 이에 軍士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西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數 煬帝는 크게 憤怒하여 다시 小府監 下調 에게 命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完成하였고, 이에 隋나라 大軍이 一齊히 次例로 이어서 나아가 東쪽 언덕에서 크게 激戰을 치뤘고, 이에 高句麗 軍士들이 크게 敗하여 죽은 者가 萬名을 헤아렸다.

마침내 처음 腰下에 到着한지 2달만에, 5月16日, 隋나라 大軍은 遼河를 건너는데 成功하였다. 허나 이過程에 隋煬帝는 도하에 成功한 友軍 11군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包圍하게 하였고 左軍 10군으로 하여금 요동 各 城을 包圍케 했다. 性들間의 支援을 끊기 위함이었다. 허나 數個月 間 搖動 20女性 中 한곳도 陷落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호아가 이끄는 2軍 12萬의 1000餘隻의 艦隊로 하여금 水軍基地 비사성(遼東半島 끝. 百濟 關彌城)李 아닌 平壤을 職工케 했다.

遼河를 건넜으나 다시 高句麗軍이 몰려와 遼河 동안(東岸)에서 高句麗 軍士와 큰 戰鬪를 치른 後 手製가 夭壽에 이르자 詔書를 내려 天下에 赦免을 베풀고, 兄父上書 慰問勝 等에게 命하여 夭壽 東쪽의 百姓들을 慰撫하게 하고, 10年 동안 租稅를 免除해주고 郡縣을 두어 서로 通涉하게 하였다,

요동성 戰鬪 [ 編輯 ]

5月 16日 隋나라 軍士들은 高句麗 軍士의 抵抗을 뚫고 夭壽를 건너 그날 요동성 을 包圍하였다. 遼東城은 漢나라 때의 楊平性이다. 平地城이며 高句麗 歷代 城 가운데 5손가락 안에 드는 大聲이었다.

여름 5月 初 요동성 軍士가 자주 나와 싸웠으나. 不利하게 되어 城門을 닫고 굳게 지키니 手製는 모든 軍士에게 命令하여 攻擊케 하였다. 遼東省이 陷落되려 하자 城 안에 있던 사람들이 외치며 降伏하기를 請하였으나 처음 여러 將帥가 東으로 내려올 때 手製가 이르기를 "軍事行動은 모두 아뢰고서 行하여라" 하였으므로 여러 將帥가 그 勅旨를 받들어 敢히 應해 가지를 못하고 먼저 달려가 아뢰었다. 그에 對한 會報가 왔을 때에는 城 中의 防禦 또한 갖추어져 抗拒하며 싸웠다. 이 같이 하기를 두세 次例 거듭하였으나 手製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고, 姓은 降伏하지 않았다.

6月 手製가 요동성 南쪽에 行次하여 그 城址와 形勢를 觀察한 뒤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으며, "그대들이 힘을 다하지 아니해도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가 다 벌벌 떨며 낯빛이 變하였다. 手製는 城 西쪽 修理에 머물러 陸合成에 馭車하였다.

數 煬帝는 夭壽 戰鬪에서 隋나라 軍士들이 大量으로 戰死함으로써 縱隊隊形으로 進軍이 어렵자 後軍路와 補給路가 遮斷당하지 않기 위하여 數 煬帝가 거느린 御營軍은 요동성을 攻擊하고 座로군 11軍 長壽에게는 進軍로 周邊 要旨(要地)에 있는 高句麗 城을 占領하라고 命令을 내렸다. 이때부터 12軍은 進軍로 周邊 要地에 있는 高句麗 姓 攻擊에 나섰다. 허나 數個月 間 搖動의 20餘 城 中 單 한곳도 陷落시키지 못하였다. 이 過程에 水軍 3個 軍이 몰살당하였다.

平壤城 戰鬪 [ 編輯 ]

高句麗의 여러 性이 굳게 지키고 降伏하지 아니하니 좌익위대장군 내호아와 走法床이 剛懷疑 水軍(2度行軍 12萬 兵力. 艦隊 1000餘隻)을 거느리고 數百 里에 뻗쳐 兵船으로 바다를 떠서 먼저 4萬餘 兵力이 패수로부터 들어와 平壤과 60里 距離의 地點에서 우리 軍士와 만나 進擊하여 크게 부쉈다. 虎牙가 勝勢를 타서 그 性을 肉薄하려 하자 副摠管 走法床이 말리며 諸君의 到着을 기다려 함께 進擊하자고 請하였다. 虎牙는 듣지 아니라고 淨甁 4萬名을 뽑아 곧장 城 밑으로 달려들었다. 우리 장수는 나곽 안의 빈 절 속에 伏兵海 놓고 軍士를 내어 虎牙와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 敗하였다. 虎牙가 쫓아서 城 안에 들어와 軍士를 풀어 사람을 사로잡고 物件을 掠奪하느라 隊伍가 흩어지게 되자 伏兵이 터져 나오니 虎牙는 크게 敗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가고 살아 남은 軍士는 數千名에 不過하였다. 이때 高句麗 指揮장수는 稅制 高巾舞 로 推定되고 平壤城의 守備軍은 3萬餘名으로 推定된다. 이 中 大部分이 乙支文德을 따라간것으로 보이고 그 記錄에 따르면 巾舞를 따랐던 軍士는 500名 남짓으로 보인다. 허나 4萬의 兵力을 沒殺시킨것으로 미루어보아, 2萬~4萬餘名으로 推定되는 高句麗 水軍道 大部分 上陸하여 戰鬪에 投入된것으로 推定된다.

高句麗 軍士는 兵船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으나 州法床이 陣營을 團束하고 있으므로 물러났다. 虎牙는 軍士를 끌고 돌아가 해포에 駐屯하고 敢히 다시 諸君을 應接하지 못하였다.

薩水大捷 [ 編輯 ]

좌익위대장군 宇文述은 扶餘度에서 나오고, 右翼偉大將軍 于仲文은 樂浪度에서 나오고, 左孝위大將軍 兄院項은 요동도에서 나오고, 右翼偉大將軍 설世雄은 沃沮度에서 나오고, 愚鈍위將軍 신세웅은 현도度에서 나오고, 偶語위將軍 장근은 양평도에서 나오고, 우무後將軍 조효재는 갈石島에서 나오고, 濁郡太守 檢校좌무위將軍 최홍승은 수省都에서 나오고, 檢敎友어위호분낭장 位문승은 症地圖에서 나와 모두 압록수의 西쪽에 모였다. 宇文述 等의 軍事는 滷蝦, 會員 2眞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日分의 軍糧을 주고, 또 甲옷, 武器와 아울러 椅子, 戎具, 火막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3席 以上이 되어 무거워 능히 運搬할 수 없었다. 群衆에 命令을 내려 “軍糧을 버리는 者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士卒들이 모두 軍幕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行軍이 겨우 中路에 이르자 樣式이 이미 떨어지게 되었다.

王은 代身 乙支文德을 시켜 그 陣營에 나아가 거짓 降伏케 하니 이것은 實狀 그의 虛實을 觀察하려 함이었는데 于仲文이 먼저 받은 手製의 密書에 "萬若 王이나 문덕이 오는 機會가 있거던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文德을 잡으려 하던 次 慰撫使 尙書右丞 유사룡이 굳이 말리어 中門은 못내 그 請을 들어 주었다. 문덕이 돌아가자 이내 後悔하고 사람을 시켜 文德을 속이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文德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압록수를 건너가 버리니 于仲文, 宇文述 等은 文德을 놓치고 마음이 便하지 못하였다. 宇文述은 軍糧이 다 되어 가므로 돌아가려 했으나 于仲文의 意見은 "淨甁으로써 文德을 追擊하면 成功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宇文述이 굳이 말리니 于仲文은 怒하여 "將軍이 10萬의 兵力을 가지고서 능히 소적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무쓴 낯으로 祭를 뵙겠소 나도 이 걸음이 반드시 成功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옛날의 名將이 능히 成功한 것은 決定權이 한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소 이렇듯 사람마다 各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떻게 敵을 이긴다 말이요" 하였다. 그때 手製가 于仲文이 計劃性이 있다 하여 諸君으로 하여금 節度를 稟해서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宇文述 等은 하는 수 없이 應鐘하여 여러 將帥와 더불어 江을 건너 乙支文德을 追擊하였다. 文德은 宇文述의 軍士가 굶주린 氣色이 있는 것을 보고 지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달아나기만 하니 이로 말미암아 宇文述 等은 하루 사이에 일곱 番 싸워 다 勝利하였다. 이미 손쉽게 勝利한 것을 믿고 또 뭇 사람의 議論에 밀려 及其也 東으로 나아가 薩水를 건너 平壤城과 30里 距離에서 産을 依據하여 陣營을 만들었다.

乙支文德은 이때 于仲文에게 使者를 보내 詩를 한 篇 보냈는데, 이 詩가 바로 "與隋將于仲文詩"이다. 또한 宇文述에게도 使者를 보내어 영양왕이 皇帝에게 降伏을 할 것이라는 거짓 情報를 흘렸다. 宇文述은 于仲文을 說得하여 搖動으로 退却할 것을 指示했다. 문덕이 다시 使臣을 보내어 거짓 降伏書를 올리고 宇文述에게 請하기를 "萬若 軍士를 撤回한다면 마땅히 王을 모시고 行在所에 가서 照會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宇文述은 自己의 兵卒이 지쳐서 다시 싸울 수 없음을 보았고 또 平壤城이 險하고 굳어 猝地에 陷落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斟酌하여 마침내 거짓 降伏을 口實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防塵을 만들어 行軍瑕疵 문덕이 四方으로 遊擊해 宇文述 等은 싸우다 가고 가다 싸웠다.

가을 7月 撒水에 到着하여 軍이 半쯤 건넜을 무렵 우리 軍士가 뒤로부터 그 後軍을 攻擊하니 신세웅 李 戰死하였다. 乙支文德은 退却하는 隋나라 軍에게 攻擊할 것을 命했다. 結局 隋나라 軍은 撒水 (薩水, 只今의 淸川江 으로 推定, 淸川江)에서 물을 만나 退却 速度가 더디게 되었다. 高句麗 軍은 이를 노려 總攻擊을 開始하였다. 이에 모든 軍士가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남은 兵士가 달아나 압록수에 當到하고 보니 하루 낮 하루 밤에 4百 50里를 걸은 幅이었다. 처음 9軍이 요에 到着할 때는 無慮 30萬 5千名이었는데, 요동성에 되돌아 왔을 때는 겨우 2千 7百 名뿐이었고 數만으로 計算되는 機械와 物資도 거의 다 蕩盡되었다.

手製는 크게 怒하여 宇文述 等을 쇠사슬에 묶어 가지고 돌아갔다. 隋나라 軍隊가 夭壽를 건너자, 백제도 亦是 國境에 軍士를 嚴히 配置하고 말로는 隋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兩다리를 걸치었다. 隋나라는 이番 軍事行動으로 오직 夭壽의 西쪽에 우리의 無慮라를 陷落시켜 요동군과 桶精進을 設置하였을 따름이었다.

數 나라 개황 年間에 煬帝가 詔書를 내려 高句麗를 攻擊하자, 左翊衛 大將軍 宇文述은 扶餘도로 나오고 右翊衛 大將軍 禹 中門은 樂浪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鴨綠江에 이르렀다. 문덕이 王의 命을 받들고 敵陣으로 가서 降伏하는 체하였으나, 이는 事實 그들의 虛實을 보려는 것이었다. 술과 中門은 이 보다 앞서 皇帝의 祕密 校誌를 받았었다. 이에는 高句麗의 王이나 文德을 만나거든 逮捕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따라 中門 等은 文德을 抑留하려 하였는데, 慰撫使로 있던 上書 優勝 有 死龍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結局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許諾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後悔하여 사람을 보내 文德을 속여서 말하기를 "再次 議論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하였으나, 文德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鴨綠江을 건너왔다. 술과 中門은 文德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不安하게 생각하였다. 술은 軍糧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는데, 中門은 精銳部隊로 文德을 追擊하면 功을 이룰 수 있다고 主張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中門이 火를 내어 말했다. "將軍이 10萬의 兵力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敵을 擊破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皇帝를 뵈옵겠는가?" 술 等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鴨綠江을 건너서 文德을 追擊하였다. 文德은 水軍에게 굶주린 氣色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疲勞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每番 敗北한 척하며 逃走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番을 싸워 모두 勝利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重義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東쪽으로 나아가 薩水를 건너 平壤城 30里 밖에서 山을 등지고 陣을 쳤다.

을지문덕 于仲文 에게 다음과 같은 詩를 보냈다.

"그대의 신기한 計策은 天文에 通達했고, 妙한 計略은 땅의 理致를 알았도다. 戰鬪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滿足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于仲文 이 答書를 보내 曉諭하였다. 을지문덕 이 또한 使者를 보내 降伏을 假裝하고 술에게 要請하였다. "萬一 軍士를 撤收한다면 틀림없이 王을 모시고 行在所로 가서 早見하겠다." 宇文述 은 軍士들이 疲困하고 기운이 衰盡하여 더 以上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平壤城은 險하고 堅固하여 갑자기 陷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判斷하여, 거짓 降伏이라도 받은 狀態에서 돌아가기로 決定하고 防禦陣을 만들며 行軍하였다. 문덕이 軍士를 출동시켜 斜面으로 攻擊하니 술 等이 한便으로 싸우며 한便으로는 쫓겨 갔다. 그들이 撒水에 이르러 軍士가 折半쯤 江을 건너 갔을 때, 문덕이 軍士를 몰아 그들의 後軍을 猛攻하여 愚鈍위將軍 神 世雄을 죽였다. 이렇게 되자 모든 敵軍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軍 將卒이 달려서 敗走하였는데,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鴨綠江에 이르니 그들은 4百 50里를 간 셈이다. 처음 押收를 건너 올 때 그들은 30萬 5千 名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千7百 名뿐이었다.

結果 [ 編輯 ]

平壤을 職工하는 陸軍 別動隊와 海軍 上陸軍이 모두 敗頹하고, 數 本國에는 叛亂이 일어나자 隋煬帝는 어쩔수없이 退却하고 만다. 被害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高句麗側의 被害도 만만치 않았을것으로 推定된다. 淸野戰術로 인해 搖動벌부터 平壤 깊숙히까지 모든 논밭이 불탔다.

人命被害만 보더라도 적지 않았다. 搖動벌에서만 1萬의 軍士가 죽었고, 요동성 攻防戰 中에도 적어도 2~3萬의 高句麗軍이 戰死했을것으로 보인다. 隋나라 軍士들은 搖動의 各 性을 同時多發的으로 攻擊했기에 各 性의 被害狀況까지 합친다면 亦是 數萬名을 헤아릴것이다.

隋나라側에는 얻은게 없이 돌아갔기에 隋나라에게는 滅亡에 影響을 줄 程度로 打擊을 입힌 戰爭이었다. 正確히는 糖이 數의 高句麗 遠征軍을 懷柔하는 名分으로 쓰였다.

記錄上 推定 [ 編輯 ]

記錄上의 兵力에 對해서 이기훈 博士, 데이빗 앤드류 그라프 프린스턴 大學校 敎授는 60萬 程度로 推定 [1] [2] [3] 하였고 韓國歷史苦戰소 任用한 博士는 實際 兵力 30萬에 나머지 補給兵 包含하여 113萬으로 推定 [4] 하였으며 學界 定說은 113萬이며 60萬 推定은 少數이다. [5]

그러나 被引用 回數를 檢索하면 100萬을 主張하는 論文 大多數가 學界에서 아무 影響力이 없다. 事實 隋나라가 갑자기 淸나라 같은 後期의 王朝에 맞먹을 程度로 耕作 面積과 같은 統計 [6] 가 急上昇했고 固守戰爭 以後 벌어진 內戰에서도 적지 않은 兵力이 動員되기 때문에 그렇다.

各州 [ 編輯 ]

  1. 이기훈 ki-hun Lee. (1997). 《戰爭으로 보는 韓國 歷史》.  
  2. 戰爭으로 보는 韓國 歷史
  3. Graff, David A. (2001).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ROUTLEDGE. 148쪽. ISBN   978-0-203-20671-3 .  
  4. 國防TV 토크멘터里 戰爭史 - 高句麗-隋나라 戰爭 便(43部)
  5. 國史編纂委員會
  6. 淸나라 耕作 面積 , 梁方仲 《中國歷代戶口、田地、田賦統計》,上海人民出版社,第6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