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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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2013年 9月의 임권택.
出生 1934年 12月 8日 ( 1934-12-08 ) (89歲)
日帝强占期 全羅南道 長城郡 장성읍
職業 映畫監督
活動 期間 1962年~
宗敎 天主敎 (洗禮名: 바오로)
學歷 光州將星中學校 卒業
光州숭일高等學校 中退
配偶者 채령 (1979年 結婚)
子女 임동준(長男), 권현상 (次男)
受賞 第55回 칸映畫祭 監督賞 (2002),
第55回 베를린國際映畫祭 名譽黃金곰賞 (2005) 外 多數

임권택 (林權澤, 1934年 12月 8日 [1] ~)은 大韓民國 映畫 監督 , 映畫 脚本家 , 映畫 製作者 이다.

本貫은 羅州 (羅州)이며 全羅南道 將星 出生이다. 1953年에 小品補助로 映畫界에 入門하였으며, 1962年 映畫 豆滿江아 잘 있거라 》의 監督으로 데뷔했다. 朝鮮後期 畫家 장승업 의 生涯를 그린 《 吹花癬 》을 통해 칸 映畫祭 監督賞을 受賞했으며, 2011年까지 101篇의 映畫를 演出, 監督했다.

2002年 金冠文化勳章 (1等級)을, 2005年 베를린 映畫祭 에서 名譽黃金곰賞을 受賞했으며, 2008年에는 東西大學校 에서 2008學年度 隨時2學期 募集부터 全國最初로 임권택 監督의 이름을 붙인 임권택 映畫藝術大學 이 新設되었다. 임권택 映畫藝術大學은 釜山國際映畫祭 , 韓國映畫아카데미 와 共同으로 아시안필름 아카데미 를 推進하고 있다.

2014年에는 大韓民國 仁川에서 열린 第17回 아시안게임 個·閉幕式 總監督으로 藝術監督 장진과 함께 演出을 맡기도 하였다.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映畫界 데뷔 前 [ 編輯 ]

생각이 달랐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 編輯 ]

1934年 12月 8日 全南 將星에서 태어나 富裕한 할아버지를 비롯한 家族들 사이에서 豐饒로운 어린 時節을 보내는 듯 했으나, 社會主義 運動에 加擔했던 아버지를 못마땅해했던 할아버지가 警察 에 아버지를 申告하는 等 家族關係는 매우 좋지 않았고, 植民 治下와 解放, 韓國 戰爭 以後로 집안은 더욱 힘들어졌다. [2] 어머니가 佛敎 信者였으나, 집안 雰圍氣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임권택은 20歲에 釜山 으로 家出했다. [3] 韓國戰爭이던 當時 釜山이 臨時 首都였고 큰 都市에 가야 成功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밑바닥 生活 [ 編輯 ]

家出 當時 아무런 돈도 들고오지 못했던 임권택은 사흘을 굶으며 街販臺에서 잠을 자는 等 어려움을 겪었다. 當時 釜山은 避難民들로 북적였고, 모두가 不幸했던 時期였다. 임권택은 生計를 위해 지게꾼 일을 했는데 힘도 弱했고, 처음 해보는 일이라 일감을 받지 못했다. 하루 벌었던 푼돈으로 술을 사서 밤을 보냈던 임권택은 20살에 手顫症 을 겪는 等 肉體的, 精神的으로 힘든 時期를 보냈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임권택은 영도다리로 가서 2次 世界大戰 때 使用했던 軍靴를 改造해서 팔아 生計를 꾸려나가기 始作했다. [4] 當時 軍靴는 品質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軍靴장수들도 많은 돈을 벌었고, 韓國軍의 收復으로 首都 서울이 다시 돌아온 後 軍化粧水를 하던 몇몇 이들은 서울로 올라가 映畫 製作에 參與하기 始作했다. 이들이 서울로 떠나면서 임권택에게 釜山國際市場 앞에 軍靴 몇 켤레를 주며 露店을 차려주었다. 그러나, 장사에 素質이 없던 임권택은 얼마 안가서 資金難에 시달리게 된다. [5]

映畫界에서 活動 [ 編輯 ]

映畫 薔花紅蓮傳 [ 編輯 ]

임권택을 두고 서울로 올라간 軍靴長壽 出身들은 《薔花紅蓮傳》을 製作하고 있었다. 當時 《春香傳》等이 興行하면서 映畫産業이 急速히 發達하던 時代였다. 映畫製作을 하던 軍靴장수들은 人便으로 임권택에 連絡해 映畫製作 撮影現場에서 심부름을 해달라는 付託을 받고 雜일을 하게 된다. [6] 임권택은 映畫 일을 하면서 興味를 느끼게 되고 映畫系 入門 4~5年만에 정창화 監督 밑에서 演出部 일을 맡았다. [7]

좋아하는 일, 映畫 [ 編輯 ]

當時 映畫界에서 큰 話題를 불러모았던 事件에 임권택이 휘말리면서 頭角을 나타내게 된다. 安養 撮影所에서 映畫를 찍는데 셋트 撮影中 어떠한 理由로 俳優 가 扮裝室에서 映畫를 撮影 못하겠다며 나오지 않아 映畫 撮影이 中斷됐다. 아침부터 午後까지 撮影이 中斷됐고, 製作者들이 說得해도 통하지 않았다. 演出部 막내였던 임권택은 한 俳優가 撮影을 中斷시킨다는 事實에 憤慨해 說得에 나선다. 그러나 2番, 3番에 걸쳐서 說得해도 俳優가 拒絶하자 火가 난 임권택은 俳優의 뺨을 때렸다. 撮影場은 阿修羅場이 됐고 俳優는 서울로 가버렸다. 製作陣은 撮影을 繼續 하기 위해 俳優의 집에 찾아가서 謝過하고 겨우 撮影에 들어가게 된다. [8] 이 事件에 對한 消息은 映畫界 全般으로 퍼져나갔고 임권택度 注目을 받았다. 임권택은 映畫일이 재미있어서 밤낮없이 熱心히 일했고 정창화 監督은 撮影 全般에 걸쳐서 임권택의 意見을 묻는 等 매우 新任했고, 그동안 임권택은 映畫를 演出하는 法을 배웠다. 그러던중 1962年 獨立軍을 素材로 한 映畫 《豆滿江아 잘 있거라》 監督 提議가 들어오게 된다. 임권택은 “興行이 失敗하면 다시는 監督을 못하게 된다”는 憂慮가 있었다고 回顧했다. 이 映畫에는 김석훈, 장동휘, 박노식 , 독고성 , 김승호 , 최남현, 허장강 , 黃海 , 엄앵란 , 문정숙 等 豪華 俳優들이 出演했다. [9] 이 映畫는 설에 開封해 興行에 成功했다. 임권택은 1960年代에만 50餘篇의 作品을 내놓았는데 임권택은 이에 對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 時代에는 興行시키기 위해 수많은 映畫를 찍어댔고, 自身이 찍은 映畫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5]

그러던중 1973年 《 雜草 》라는 映畫를 製作하게 되었다. 1960年代까지는 美國映畫 배끼機 形式의 亞流作들이 많았기 때문에 임권택은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韓國政 文化와 情緖를 담아낸 映畫를 만들려했다. [10] 그러나 새로운 形式의 映畫의 興行을 壯談할 수 없었기 때문에 投資者들이 投資를 꺼려 어려움에 시달렸다. 임권택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地方으로 내려가 어렵게 投資者를 誘致했다. 이러한 美國映畫 배끼기식 體質을 改善을 하는데에는 10年이나 걸렸지만, 임권택은 興行에 연이어 失敗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5] 임권택은 後날 “雜草 以前의 映畫는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고 말하며 雜草에 對한 愛情을 드러냈다. [10]

1981年 藝術과 娛樂性 두마리의 토끼를 合께 잡은 映畫 《 曼陀羅 》를 製作하게 된다. 《曼陀羅》는 김성동의 原作 小說을 바탕으로 안성기, 전무송이 主演했다. 이는 大韓民國 最初로 베를린 映畫祭에 招請됐고 映畫가 더 많이 알려졌다. [11] 1971年 칼잡이 映畫 《尿檢》를 企劃하고 있던 임권택은 女子 俳優를 찾던 中 도도한 魅力이 느껴졌던 現在의 夫人 채령과 撮影을 하게 되고 이들의 戀愛가 始作됐다. [12] 當時 監督과 俳優에 對한 만남에 對한 안좋은 視線이 많았기 때문에 두 戀人은 이를 숨기며 生活해야 했다. 채령은 當時 MBC 3期 演技者로 뽑혀 오란氏 1代 모델로도 活動했다. 둘은 邊두리 순대국집 等을 轉轉하며 祕密戀愛를 이어갔고 8年間의 交際 끝에 1979年 結婚했다. [5] [13]

1986年 《 씨받이 》라는 映畫를 製作했다. 이 映畫의 主演을 맡았던 강수연 베니스 映畫祭 女優主演賞을 受賞했다. 임권택은 “男兒選好思想에 對해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며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映畫中 出産 場面은 夫人 채령이 實際로 出産하는 場面을 임권택이 보면서 느낀것을 映畫로 옮겨놓은 것이다. [14] 강수연과 임권택은 世界 映畫祭에서 受賞하리라는 期待를 하지 않았고 準備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임권택과 강수연 모두 施賞式에 參席하지 못해 映畫振興公社 職員이 代理 受賞했다. 강수연은 이로 因해 임권택과 因緣을 더 두텁게 쌓았고 《 將軍의 아들 》 오디션에도 審査委員으로 參席했다. [15] 1990年에 開封한 《將軍의 아들》은 176日만에 68萬 7千名을 動員하여 《 겨울 女子 》以後 13年만에 歷代 最高 興行記錄을 세웠다. [16] 1992年까지 3篇으로 製作되어 모두 興行에 成功했다. 이 映畫에서 박상민 , 김승우 , 申鉉濬 , 송채환 , 方銀姬 等이 스타로 떠올랐다. [5]

1993年 李淸俊 作家의 《南道사람》을 映畫化한 作品 《 西便制 》가 興行에 成功하여 當時 最高 記錄을 세웠던 《將軍의 아들》을 凌駕하게 된다. 《西便制》는 大統領을 비롯한 金壽煥 樞機卿, 法頂스님 等도 觀覽하여 話題를 끌었다. [17] 開封 初期에는 反應이 시큰둥했으나, 各種 言論媒體에서 판소리를 담은 健康한 映畫로 弘報되면서 漸次 입所聞이 퍼져 興行이 되었다. 當時 映畫館 한個에서만 觀客數가 集計되어(단일관) 100萬名이 突破하였으므로 다른 劇場들의 興行記錄을 包含하면 觀客數는 이보다 훨씬 많다. [18] 임권택은 《西便制》에 맞는 俳優를 찾던 中 미스春香 選拔大會에 出戰한 오정해 의 韓國的인 美貌와 뛰어난 판소리 實力에 感銘받아 《西便制》에 出演시키기로 決心했다. [5]

以後에도 1987年 《 아다다 》로 신혜수 가 몬트리올 映畫祭 女優主演賞 受賞, 1989年 《 阿弟 阿弟 바라아제 》로 강수연의 모스크바 映畫祭 女優主演賞 首相 等을 이끌어내며 世界的인 監督으로 발돋움을 하게 된다. 2000年 《 춘향뎐 》은 大韓民國 最初 칸 映畫祭에 招請됐으며, 아시아 最初로 베를린 國際 映畫祭 名譽 黃金곰賞을 受賞했다. 2001年 《 吹花癬 》으로 칸 映畫祭 監督賞을 受賞했다. 그의 業績으로 인해 임권택 銅像과, 임권택 映畫村(금곡 영화마을), 임권택 映畫 硏究所, 임권택 映畫 藝術大學(東西大學校)李 세워지는 等 여러 가지 形態로 大韓民國에 足跡을 남겼다. [5] [19]

家族 關係 [ 編輯 ]

임권택의 夫人은 俳優出身 채령 이며, 임권택의 두 아들도 映畫界에서 活動하고 있다. 첫째 아들 임동준은 映畫企劃 分野에서 活動을 하고있으며, [20] 둘째 아들 권현상 (임동재)은 俳優를 하고있다. 둘째 아들 권현상은 아버지의 도움 없이 俳優生活을 하고 있었으나, 임권택은 俳優로써의 資質을 보기 위해 《 달빛 길어올리기 》에 端役으로 出演시켰다. [21]

代表作 [ 編輯 ]

作品 [ 編輯 ]

鳶島 作品名 出演
1962 戰爭과 老人 최무룡 , 김혜정 , 김승호 , 申榮均
1962 豆滿江아 잘 있거라 김석훈 , 문정숙 , 엄앵란 , 黃海
1963 男子는 안 팔려 구봉서 , 이대엽 , 최지희
1963 望夫石 이경희 , 최남현 , 신성일 , 김운하
1963 申聞鼓 김진규 , 최남현 , 이경희 , 허장강
1964 欲望의 決算 신성일 , 김혜정 , 이경희 , 이대엽
1964 十姊妹 先生 김승호 , 주증녀 , 황정순
1964 十年勢道 申榮均 , 전계현 , 김동원 , 허장강
1964 映畫 마마 도금봉 , 김진규 , 김운하
1964 단장록 申榮均 , 도금봉 , 태현실
1964 단골 遲刻生 김승호 , 황정순 , 전영선 , 김석훈
1965 빗속에 지다 申榮均 , 허장강 , 엄앵란
1965 王과 床奴 申榮均 , 김지미 , 김승호
1966 戰爭과 女敎師 김진규 , 엄앵란 , 薄暗 , 이경희
1966 나는 王이다 태현실 , 신성일 , 김승호
1966 닐니리 김진규 , 김지미 , 트위스트金 , 독고성
1966 법창을 울린 옥이 문희 , 김운하 , 최남현 , 최무룡
1967 網향천리 申榮均 , 김지미 , 문희
1967 風雲의 劍客 남궁원 , 남정임
1967 靑紗초籠 申榮均 , 남정임
1968 妖花 張禧嬪 신성일 , 남정임 , 태현실 , 도금봉
1968 바람같은 사나이 申榮均 , 남정임 , 백영민 , 서영춘
1968 몽녀 김지미 , 박노식 , 남정임
1968 돌아온 왼손잡이 박노식 , 김지미 , 허장강
1969 뢰검 안길원 , 안日曆 , 김청자
1969 비나리는 고모령 김희갑 , 문희 , 박노식
1969 傷害 脫出 이순재 , 윤소라 , 김성옥
1969 荒野의 禿수리 장동휘 , 김희라 , 박노식
1969 身世 좀 지자구요 구봉서 , 김희갑 , 조미령
1969 十五夜 박노식 , 南珍 , 남정임 , 이낙훈
1969 사나이 三代 김희라 , 문희 , 박노식 , 장동휘
1970 이슬맞은 百日紅 문희 , 김희라
1970 月下의 劍 김지미 , 윤양하 , 김명진
1970 애꾸눈 朴 박노식 , 남정임 , 최봉 , 주란地
1970 속눈썹이 긴 女子 최무룡 , 문희 , 윤양하
1970 그 女子를 쫓아라 장동휘 , 윤정희 , 김희라
1970 匕劍 안日曆 , 안인숙 , 김희라
1970 비나리는 船艙街 장동휘 , 윤정희 , 김희라
1970 밤車로 온 사나이 박노식 , 윤양하 , 고상미 , 허장강
1971 怨恨의 두 꼽추 황백 , 윤양하
1971 怨恨의 距離에 눈이 내린다 박노식 , 문희
1971 尿檢 윤양하 , 岸傑원 , 채령
1971 明洞 三國志 최무룡 , 김지미
1971 둘째 어머니 김지미 , 신성일
1971 나를 더 以上 괴롭히지 마라 김희라 , 김창숙
1971 30年만의 對決 최무룡 , 박노식 , 김지미 , 윤양하
1972 三國대협 김희라 , 신영일
1972 明洞 殘酷史 박노식 , 윤정희
1972 돌아온 者와 떠나야 할 者 신성일 , 윤정희
1972 대추격 신성일 , 진도희 , 윤양하
1973 雜草 장동휘 , 최무룡 , 申榮均 , 박노식
1973 長安 明記 오백화 박노식 , 신성일 , 고은아 , 태현실
1974 證言 신일룡 , 김창숙 , 김희라 , 김요훈
1974 울지 않으리 이승현 , 박지훈 , 黃海 , 이영옥
1974 연화 이순재 , 박병호 , 이효춘 , 고은아
1974 속 연화 이순재 , 박병호 , 이효춘
1974 아내들의 行進 김희라 , 윤미라 , 최남규 , 徐煐錫
1975 왜 그랬던가 허장강 , 박근형 , 양광남
1975 어제 오늘 그리고 來日 최정훈 , 채령
1976 洛東江은 흐르는가 진유영 , 유영국 , 이해룡
1976 맨발의 눈길 이인옥 , 김희라
1976 아내 태현실 , 박근형 , 한은진
1976 往十里 신성일 , 김영애 , 백일섭 , 최불암
1977 옥례기 김윤경 , 이일웅 , 백일섭 , 한은진
1977 壬辰倭亂과 桂月香 정윤희 , 이일웅 , 신성일 , 윤양하
1978 가깝고도 먼 길 이진호 , 손지훈 , 방수일
1978 상록수 한혜숙 , 김희라 , 김형자 , 이일웅
1979 族譜 주선태 , 하명중 , 한혜숙 , 독고성
1979 저 波濤위에 엄마 얼굴이 이영수 , 채령 , 주선태 , 고상미
1979 來日 또 來日 이덕화 , 呈戱 , 주현 , 박은수
1979 神宮 윤정희 , 김희라 , 홍성민 , 방희
1980 旗발없는 旗手 하명중 , 김영애 , 주현 , 고두심
1980 福婦人 한혜숙 , 박원숙 , 윤양하 , 長鐵
1981 曼陀羅 안성기 , 전무송 , 방희
1982 偶像의 눈물 진유영 , 박근형 , 권기선 , 이구순
1982 나비 품에서 울었다 이영하 , 나영희 , 한지일 , 윤양하
1982 汚染된 子息들 안성기 , 방희 , 조남경 , 최성호
1982 안개 마을 정윤희 , 안성기 , 진봉진 , 오영화
1982 아벤高 空輸群團 신일룡 , 남궁원 , 정윤희 , 윤양하
1983 짝코 김희라 , 최윤석 , 방희 , 김정란
1983 불의 딸 박근형 , 방희 , 김희라 , 윤양하
1984 比丘尼 김지미
1984 흐르는 江물을 어찌 막으랴 한영수 , 조용원 , 윤양하 , 전무송
1985 길소뜸 김지미 , 신성일 , 한지일 , 이상아
1985 씨받이 강수연 , 이구순 , 윤양하 , 방희
1986 티켓 김지미 , 안소영 , 이혜영 , 진세영
1987 아다다 신혜수 , 한지일 , 이경영 , 전무송
1988 演算日記 유인촌 , 김진아 , 권재희 , 마흥식
1989 阿弟 阿弟 바라아제 강수연 , 진영미 , 유인촌 , 한지일
1990 將軍의 아들 박상민 , 申鉉濬 , 이일재 , 김형일
1991 開闢 이덕화 , 이혜영 , 김명곤
1991 將軍의 아들 2 박상민 , 이일재 , 송채환 , 申鉉濬
1992 將軍의 아들 3 박상민 , 오연수 , 이일재 , 申鉉濬
1993 西便制 김명곤 , 오정해 , 김규철 , 안병경
1994 太白山脈 안성기 , 김명곤 , 金甲洙 , 오정해
1996 祝祭 안성기 , 오정해 , 한은진 , 정경순
1997 신은경 , 한정현 , 최동준 , 정경순
1999 춘향뎐 李孝貞 , 조승우 , 이정헌 , 김성녀
2001 吹花癬 최민식 , 유호정 , 안성기 , 김여진
2004 下流人生 조승우 , 김민선 , 김학준 , 유하준
2007 천년학 조재현 , 오정해 , 임진택 , 장민호
2011 달빛 길어올리기 박중훈 , 강수연 , 예지원 , 안병경
2015 火葬 안성기 , 김규리 , 김호정 , 연우진

首相 및 徐薰 [ 編輯 ]

1970年代 受賞 目錄
1980年代 受賞 目錄
1990年代 受賞 目錄
2000年代 受賞 目錄
2010年代 受賞 目錄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戶籍上 1936年 5月 2日 出生.
  2. 西便制' 임권택, 女俳優에게 무릎꿇고 뺨 맞은 逸話 公開 東亞日報
  3. 임권택 “20살 때 釜山 家出, 사흘 굶었다” 危機 告白 뉴스엔
  4. 임권택 映畫監督 되기까지..20살 家出, 지게꾼-장사꾼 輾轉 뉴스엔
  5. MBC 黃金漁場 무릎팍道士 2011年 3月 16日
  6. 임권택 監督 “軍靴 장사 잘 됐으면 映畫 안 했다” Archived 2016年 12月 29日 - 웨이백 머신 맥스뉴스
  7. 임권택 監督 "60年代 演出作들, 불 타 없어졌으면…" 조이뉴스24
  8. 임권택 “톱스타 女俳優에게 뺨맞아"...누구길래? 헤럴드經濟
  9. 임권택 “풋내기 時節, 톱스타 統率 위해 얼음물 入手” tv리포트
  10. “映畫? 내 삶이고 내 全部다” 週刊東亞
  11. 강수연 "'씨받이' 베드신·露出만 關心, 傷處 받아" 머니투데이
  12. 임권택, 女俳優였던 18살 年下 채령과의 러브스토리 公開 마이데일리
  13. 임권택 監督 아내 채령 '無慮 16살 差異?'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示唆서울
  14. 강수연, "'씨받이' 때 베드신에만 焦點, 傷處받아" 스포츠조선
  15. 무릎팍道士’ 임권택 “‘將軍의 아들’에 乾達들도 出演했다” 事緣 밝혀 韓國經濟
  16. '90決算 映畫界「直配(直配)颱風」克服 邦畵(放火)거듭나기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90年 12月 23日 東亞日報
  17. 임권택, 오정해 '西便制' 主人公 캐스팅 理由? tv리포트
  18. 임권택 監督, '이番 映畫 興行할 수 있을까?' 苦悶 吐露 엑스포츠뉴스
  19. 임권택 "이름 딴 單科大, 銅像 헐리지 않았으면" tv리포트
  20. 임권택 監督, 채령-권현상 等 온 食口가 '映畫인 家族' tv리포트
  21. 무릎팍道士’ 임권택, “아들 권현상, 資質 보기 위해 ‘달빛..’ 端役 出演 시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메디컬투데이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