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守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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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 王守仁

王守仁 (王守仁, 聖火(成化) 8年( 1472年 ) 10月 31日 ~ 家庭(嘉靖) 7年( 1528年 ) 1月 9日)은 中國 明나라 政治人 · 敎育者 · 思想家 이다. 陽明學 의 創始者, 心學(心學)의 大成者로 꼽힌다. 浙江省(浙江省) 여요현 (余姚縣) 出身이다. 號(號)는 양명(陽明), 者(字)는 伯顔(伯安)이다.

背景 [ 編輯 ]

年報(年譜)에 따르면, 양명의 祖上은 산동(山東) 낭야(琅?) 出身 陳(晉)나라 光祿大夫(光祿大夫) 王람(王覽)이라는 사람이었다. 王람은 南쪽으로 移住해서 會計(會稽) 산음(山陰)에서 살았다.

有名한 書藝家 王羲之 (王羲之)는 王람의 曾孫子이다.

그 後 23代 王水(王壽)가 居處를 汝窯(余姚)로 옮겼으며 6代祖 王綱(王綱)은 狂同參의(廣東參議)가 되어 苗族(苗族)의 亂에서 죽었다.

高祖父 왕여준은 『禮記(禮記)』와 『易經(易經)』을 仔細히 硏究했으며 祖父 王胤 亦是 『죽헌高』와 『强豪잡고』를 刊行했다.

父親 王化(王華)는 自家 德輝이고 龍山공(龍山公)이라 불렸다. 聖火(成化) 17年(1481) 眞사(進士)에 장원(壯元) 及第하였고, 後날 男警吏部尙書(南京吏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王化의 祖上들은 벼슬자리에 나가고 물러나서는 學問이나 文藝를 즐기기도 하면서 地方의 有名한 有志로 生涯를 보냈다. 王化는 祖上들이 살았던 산음의 빼어난 景致를 思慕하여 다시 會計로 移徙했다.

王守仁은 10살 以後 이곳을 집안의 故鄕으로 삼았다. 양명의 號는 以前에 王化가 집을 增築한 적이 있는 會計의 東南쪽 20餘 里에 있는 양명동(陽明洞)의 地名을 따서 지은 것이다.

王陽明이 태어난 時期는 (明) 建國 以後 100餘 年이 지난 8代 憲宗(憲宗) 性話題 (成化帝) 卽位 8年次인 1472年이었다. 當時에 밖으로는 오이라트 (Oirat, 瓦剌), 타타르 (Tatar, ??), 투르판 (Turfan, 吐蕃), 苗族 (苗族) 等의 周邊 異民族의 侵入이 잦았고, 안으로는 各地의 盜賊들이 暴動을 일으켰다. 또한 宦官들이 朝廷에서 專橫과 不淨腐敗를 일삼았다.

學問과 思想도 南宋 (南宋) 以後 원(元)과 名을 지나며 官學(官學)으로서의 支配的 地位를 차지했던 朱子學 (朱子學)李 敎條化되었다. 特히 名 初期에 『사서대전(四書大全)』과 『五經大全(五經大全)』이 編纂되었고, 過去 試驗 時祭도 여기에서 出題되면서 學問과 思想은 固着化되었다. 大多數 學者들은 經典의 글字를 解釋하는 訓詁(訓?)나 文章과 媤家에 注力하였다. 名臺에는 설경헌, 胡敬齋, 羅欽順(羅欽順)과 같은 傑出한 朱子學者度 排出되었지만 全般的으로 萎縮과 沈滯를 보였다.

31歲까지 [ 編輯 ]

王陽明의 一生은 大略 다섯 時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日本 學者 곤도 野스노富(近藤康信)에 따르면, 첫째, 15~16歲까지의 幼年 晩學 時期, 둘째, 31歲까지의 會議와 昏迷의 時期, 셋째, 以後 38歲까지 작은 깨달음의 自立 時期, 넷째, 38歲에서 50歲 前까지 改悟하여 活躍하던 時期, 다섯째, 以後 56歲까지 隊伍하여 完成한 時期다.

이 解釋은 從來에 『明儒學案(明儒學案)』의 見解에 따라 채인후(蔡人厚)가 整理한 異質的인 세 番의 變化가 있다. 첫째는 社長에서, 둘째는 佛敎 와 노장思想-에 드나들다가, 셋째는 鬼誅(貴州) 勇將(龍場)에서 道를 깨우치는 過程과, 同質的인 發展과 完成으로서 세 番의 變化가 있다. 卽 첫째는 묵좌징심(默坐澄心), 둘째는 致良知(致良知), 셋째는 圓熟火鏡(圓熟化境)을 거친 生涯로 區分하는 것과는 다르다. 王陽明이 勇將에서 道를 깨우치기까지의 다섯 番의 變化를 그의 親舊인 感天(甘泉) 膽弱수 (湛若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첫째는 任俠(任俠)을 익히는 데 빠졌고, 둘째는 記事(騎射)를, 셋째는 社長(詞章)을, 넷째는 新鮮(神仙)을 익히는 데 빠졌고, 다섯째는 佛敎에 빠졌다" 이처럼 다양한 分野에 關心을 두었던 양명의 思想은 結局 自身의 "致良知" 의 가르침으로 成熟하게 됐다.

年譜에 依하면, 陽明은 어렸을 때 家庭에서 祖父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陽明은 5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北京 (北京)으로 向할 때 금산사를 지나가다가 號機어린 詩賦를 지었는데, 그 智慧가 他人을 놀라게 했다. 以後에는 主로 塾舍에게 배웠다고 한다. 陽明은 少年 時節부터 自身만의 눈으로 事物을 보는 批判精神이 있었고 獨創力이 있었다.

그런 獨創的인 精神을 보여주는 逸話가 傳해지고 있다. 어느날 12살 때 塾舍가 말했는데, "우리가 冊을 工夫하는 것은 過去에 及第하려는 것이고 이게 으뜸의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對해 陽明은 "첫째의 일은 冊을 工夫해 成人(聖人)이 되는 일" 이라 答했다고 한다. 13살 때는 어머니가 北京에서 病으로 죽자 喪을 치르는 동안 王守仁이 痛哭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고 傳한다.

陽明은 17살 때 夫人 諸氏(諸氏)를 男唱(南昌)에서 맞이했지만 結婚한 當日, 집을 나가 偶然히 近處 山中에서 道士(道士)와 養生說을 論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앉은 채로 밤 새우기도 하고 常識的인 規範을 벗어난 行動을 했다. 다음날 새벽에 사람들이 찾아내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봄, 神父와 故鄕으로 돌아와서 變한 態度로 讀書와 工夫 等 修養하는 일에 熱中했다고 한다.

陽明은 배를 타고 돌아오던 中에 江西(江西) 狂信에서 朱子學者人 累梁(婁諒, 1422~1491)을 만났다. 累梁은 王守仁에게 宋代 儒學者의 格物(格物) 學說을 얘기하고, 이렇게 알려 주었다. "반드시 工夫해서 成人에 到達할 수 있다" 21歲 때는 鄕試(鄕試, 본적 性省에서 보는 試驗)에 合格했으나 會試(會試, 鄕試 合格 後 北京에 올라가서 보는 試驗)에는 落第했다. 그때 北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朱子의 冊을 求해서 工夫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것 나름의 '理致(理)'가 있다는 朱子의 말에 對해 王守仁은 그 理致를 끝까지 캐묻는 것이 格物窮理(格物窮理)라는 말을 듣고 官署에 있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格物을 했다. 7日 동안 이 일을 持續하다가 病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朱子學을 不信하고 幻滅感을 느낀 原因이 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後에 陽明은 어귀나 文章을 暗記하는 社長(文章과 詩가)의 學問에 集中하기도 했고, 佛敎와 노장- 路資 長子 -에 빠지기도 했다. 26歲 때 北京에 갔는데, 變更 問題로 인해 시끄러운 時期였기에 武藝와 甁法學에 熱中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가 되자, 이제까지 없었던 膈한 不安感과 動搖가 佯名을 掩襲했다. 오랫동안 努力해 왔던 詩文의 도-時文(시문)의 道(道)-는 男子로서 一生을 바쳐 해야 하는 일인가? 무엇이 참된 學問인가? 어떻게 그런 것을 求할 것인가? 나는 成俔(聖人과 賢人)의 資質이 있는가? 이런 部類 疑問이었다. 이런 疑問에 시달린 後에는 留學을 버리고 山속으로 가서 道家의 養生說을 익히는 地境에 이르렀다.

그 原因을 思索의 結果로 單純히 보는 것이 從來의 主張이었지만, 아마도 會試 不合格과 健康 問題에 관계돼 있다고 곤도 野스노部가 主張했다. 그러는 사이에 王守仁은 다시 試驗에 精進하여, 紅치(弘治) 12年(1499) 28歲에 會試(會試)에 合格하였고, 이윽고 戰時(殿試)에도 合格하여 進士가 되었다. 처음에는 工夫(工部)에서 官庭(觀政, 硏修)을 하였고, 다음 해에는 刑部(刑部) 雲南靑리사(雲南淸吏司) 注射(主事)를 除授받았다. 紅치 14年(1501) 30歲에는 江北(江北)에서 刑罰을 받은 罪囚를 審議, 記錄하는 功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僧坊을 訪問하기도 하고, 道士에게 道를 묻기도 했다.

31歲에는 病을 理由로 官職을 그만두고 歸鄕하여 양명동에 집을 짓고 道家의 道人術을 修鍊하였다. 管理 生活이 期待에 미치지 못한 것, 同僚가 道를 追求하는 뜻이 없고 詩文-媤家와 文章-의 재주를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憤怒했던 적도 있었지만, 아마도 會議와 憤怒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健康 問題가 主要 原因이었을 것이다. 世俗을 떠나 家族과 떨어져서 양명동에서 獨居하던 中 한 番의 깨달음이 찾아온다.

父母님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人間 本來의 마음인데, 聖人의 가르침은 그 認定(人情)의 自然에 따르지만, 道敎 佛敎 는 그 자연스런 情感을 無理하게 끊고 다만 精神을 갖고 노는 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陽明은 多年間 가까이 했던 道敎와 佛敎를 決斷하고 떠나서 留學에 復歸했다. 20年 동안 繼續됐던 그의 懷疑와 彷徨의 時代도 양명동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終止符를 찍었다. 이로써 커다란 하나의 轉機를 맞이한다.

50歲까지 [ 編輯 ]

道敎와 佛敎의 虛妄함을 깨닫고 精神이 安定된 陽明은 다음해에 杭州 (杭州)의 西湖(西湖)에서 療養하며 가끔 周邊의 남兵科 戶布의 여러 寺刹에 놀러가기도 했다. 健康을 回復하고 나서, 官職 復歸를 決定하고 33歲에 北京으로 돌아갔다. 다음해에는 同志를 모아놓고 星學(聖學)을 講義했다. 儒家의 本來 趣旨를 깨달은 양명의 熱情은 會議의 時期가 길었을 뿐, 一時에 들끓어 卑弱했다. 王守仁이 急히 儒家의 理想을 說明했던 것도 많은 讀書人들에게는 特異함을 세워 이름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 當時에 일찍이 佯名을 理解하며 一生동안 忠言을 해주었던 先輩 淡藥水를 얻은 것은 量名에게 幸福이었다. 膽弱數는 百社(白沙) 진헌장 (陳獻章)에게 배운 高潔한 선비로서 藥水의 學問은 '自得(自得)'을 根本 趣旨로 해서 先學으로 評價받기도 했다. 그러나 油價의 理想을 잊은 사람은 아니었다.

陽明은 다음과 같이 述懷했다. "晩年에 감天先生을 만난 以後 나의 뜻이 더욱 確固해졌다" 當時에 陽明은 儒學의 本來 趣旨에 根本을 두고 學問은 成人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主張하는 程度였다. 아직 獨創的인 思想은 없었다. 陽明學의 出現에는 이 時期를 土臺로 한 더 큰 飛躍이 必要했다.

鬼誅(貴州) 勇將(龍場)에 流配된 일은 陽明이 獨創的인 思想을 품게 된 端初가 되었다. 勇將으로의 귀양은 當時 奸臣輩에 對한 反感과 腐敗한 政治에 對한 양명의 正義心 으로 招來되었다. 王陽明의 影響을 크게 받은 中國의 偉大한 思想家 이탁오 (李卓吾)는 奸臣輩들과 正面衝突한다.

35歲 때, 새로 卽位한 武宗(武宗) 정덕제 (正德帝)에게 言官(言官) 大選 (戴銑)과 박언휘 (薄彦徽)는 數年間 權力을 맘대로 휘두른 宦官 幼根 (劉瑾)을 警戒할 것을 常駐하였다. 이때 王守仁은 이 두 사람을 擁護했다. 그러나 天子의 뜻에 거역했다는 名目으로 두 사람은 監獄에 監禁됐다. 王守仁은 두 사람의 釋放을 歎願했지만 오히려 張兄 40臺를 받고 죽을 地境에까지 이르렀으나 回復하였고, 다시 勇將驛丞(龍場驛丞)에 任命됐다.

陽明이 勇將에 到着한 것은 다음해 봄, 37歲 때였다. 그때까지 約 1年間 出發을 망설이며 故鄕에 있었다. 그때 刺客의 威脅을 避해 바다로 도망쳤다가 幅巾 (福建)까지 漂流했다. 陽明은 돌아오던 길에 聖經의 山寺에서 鐵柱宮에서, 예부터 알고 지내던 스님의 勸誘에 따라 任地로 가겠다고 決心했다. 그때의 心境을 詩로 表現했다.

"險難하고 平易한 것은 元來 가슴에 걸리지 않는다네
떠도는 구름이 텅 빈 하늘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이 고요하니 바다의 波濤가 三 萬 리구나. 달이 밝으니 碑石이 天風을 내리네" 

勇將은 鬼誅 西北 地域에 位置하여 겹겹이 山에 둘러 싸여 있는 邊方이었다. 住民은 窟속에서 社는 滿足(蠻族) 아니면 流配되어 온 漢族이었다. 氣候는 不純하고 벌레와 뱀이 우글거렸다. 게다가 驛丞이라는 官職名만 있었을 뿐 居處할 官舍도 없었으며, 對話 나눌 親舊도 없고 工夫할 冊도 없는 完全한 귀양살이였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고달프고 寂寞한 邊두리에서 生活하며 王守仁은 思索을 거듭했다.

이러한 思索을 통해 王守仁은 참으로 依支할 수 있는 것은 한 몸의 主體인 自身의 '마음(心)'이라는 事實을 깨달았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日課 理致의 根源이었다. 마음은 모든 사람한테 있는 것이다. "聖人의 道는 나의 本性에 이미 넉넉한데, 예전에 外部 事物에서 理致를 救한 試圖는 잘못이었다" 陽明은 이렇게 깨달았다. 그 後에는 多年間의 疑問이 잇달아 풀리기 始作했다.

그것은 格物致知(格物致知)에 對한 朱子의 學說은 理致와 마음을 둘로 나누는 잘못을 犯했으므로 "心卽理(心卽理)" 라고 修正을 해야 했다. 앎(知)과 實踐(行)은 元來 分離할 수 없는 것이므로 知行合一(知行合一)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後者는 具體的 體驗에 基盤한 知識으로 到達을 하지 않으면 天涯(天涯)의 顧客(孤客)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痛感한 것이다. 陽明이 그렇게 후련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活力이 생겼다.

그래서 3年의 客地 生活을 忍耐할 수 있었고, 그런 生活을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無知한 오랑캐조차도 양명한테 가서 서원(書院)을 建設하는 일에 協力하기도 했다. 가르침까지 받았다. 양명의 이름이 隣近에 퍼져서 鬼誅 提學府使(提學副使, 脂肪 學事를 管理하는 管理) 석서[席書]가 來訪해서 學問을 묻고 새롭게 귀양서원(貴陽書院)을 修理해서 王守仁을 學長으로 맞이했다.

以後 王守仁을 嫉妬하고 牽制하고 迫害하던 유근이 죽자, 王守仁은 江西(江西) 餘陵(廬陵) 지현(知縣)으로 任命되었다. 以後 約 10年 동안 陽明은 官吏로 일하면서 順坦한 길을 걸었다.

陽明은 南京, 北京, 會計, 濟州, 男唱, 莊周 等 各地로 轉任되고 昇進했다. 이 時期는 陽明이 一生에서 가장 活潑하게 活躍했던 時節이다. 特히 45歲부터 3年 동안 江西, 幅巾의 各地에서 설치던 武裝도둑 무리를 討伐하고, 男唱에서도 猛威를 떨쳤다. 有能한 兵法家로서 軍事業務를 處理하였다. 또한 明나라에 反旗를 들었던 영왕(寧王) 주신호 (朱宸濠) 平定 業務에 힘썼다. 그러나 軍事, 政治에 나타난 功績보다 더 重要한 것이 있다. 軍事 業務 때문에 매우 나쁜 狀況에서도, 工夫하는 일과 몸과 마음을 修養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陽明은 그 사이에 "思想마련" (일이 있는 現場에서도 工夫하고, 修養하는 일)을 講義하고, 千里를 간직하고 人慾[人欲]을 除去하라고 主張했다. 陽明은 말했다. "道文學[道問學]은 존德性[尊德性]의 工夫이다. 박문[博文]은 約禮[約禮]의 工夫이다" 陽明이 主張한 學說의 頂點에 있는 致良知說度 그러한 過程 속에서 무르익어 갔다. 推測컨대 敎育者로서 發揮한 양명의 成果가 좋았던 理由는 양명의 學說과 態度와 性格이 主體的이었고 그 自由奔放한 魅力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師弟 關係를 그리 따지지 않고 함께 工夫하고 즐기는 自由奔放한 雰圍氣가 가득찬 學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大槪 양명先生이 同志[同志]를 點火시키는 것은 많은 境遇에 山에 오르고 물에서 노니는 사이에 얻게 되었다" 이렇게 傳한다. 스승과 弟子가 서로 어울려 自由奔放하게 놀고, 野外에서 잔치를 베푼 적이 자주 있었다. 甚至於 歡聲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고 傳한다. 이러한 王陽明 敎團의 特異한 雰圍氣는 嚴肅함을 爲主로 하는 一般的인 朱子學의 觀點에서 보면 그 自體가 異端의 學問으로 取扱되기에 充分했다.

영왕 信號의 亂離를 平定한 양명의 功勳을 時期嫉妬韓 宦官 허충[許忠], 이태[李泰]의 謀陷으로 도리어 한때 陽明이 威脅받기도 했다. '無能'을 '유능'으로 둔갑시키는 社會의 癌덩어리같은 奸臣輩들의 陰謀에 對한 양명의 苦惱는 軍事 業務보다 몇 倍나 힘들었다고 傳한다.

그러나 武宗이 죽고 世宗이 卽位하자 形勢가 完全히 變해서 양명의 功勳이 再評價 되었다. 社會의 癌덩어리를 處理하고 佯名을 後援해줄 統治者가 생긴 것이다. 정덕제가 死亡하고 嘉靖帝가 卽位한 1521年 陰曆 11月 9日, 陽明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男警兵部尙書[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양명의 이 때 나이는 50歲였고 가장 괜찮은 時期였다. 그 이듬해에 事態가 또 變해서 양명의 아버지는 죽고, 양명의 功勳을 時期嫉妬하던 奸臣輩 무리들, 社會의 癌덩어리들 때문에 다시 王陽明의 身邊이 위태로워진다.

部下 將卒에 對한 論功行賞을 中止한 것, 異說(異說)(事實은 獨創的인 思想)을 主張하고 定說(正說)을 妨害한 것, 過去에 凝視했던 弟子가 故意로 落第했다는 이런 몇 가지 謀陷에서 비롯 되었다. 이 社會의 癌덩어리(奸臣輩)들은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한 思想"을 "定說 "로 둔갑시키는 種族들이었다.

暗記를 아주 熱心히 해서, 獨創性이라고는 全혀 없는 '바퀴벌레보다 더 社會에 害를 끼치는'(사실상 그랬다) 奸臣輩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이러한 陰謀 때문에 王陽明은 分明히 苦生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 상기[喪期](葬禮를 치르는 期間)를 지난 뒤에도 復職하라는 名이 없었다. 以後 56歲까지 6年이라는 歲月 동안 故鄕에서 아무 任務도 없이 지냈다. 이처럼 强力한 '社會的 벌레'(事實上 바퀴벌레보다 나쁜 짓을 많이했다)들한테 王陽明은 當한 것이다.

萬年 [ 編輯 ]

그러나 陽明은 뜻밖에도 餘裕롭게 學問을 講義하고 弟子를 養成하는 機會를 얻었다. 公式的인 것은 아니었지만, 各地에서 구름처럼 밀려든 弟子들이 宿所에 넘치고 講義所에 가득차서 全盛期에 이르렀다. 王陽明의 立場에서는 學者, 敎育者로서는 오히려 좋은 時期였다.

그 사이에 陽明은 陽地[良知]의 學說을 樹立했는데, 人間의 羊脂는 是非, 善惡을 判斷하는 主體이므로 賤人일리[天人一理] 萬物一切의 觀念에 根本을 두고 活潑하게 天道에 통하는 것이 되었다. 講學에 沒頭해서 餘念이 없던 佯名을 다시 世上事에 빠트리고 悲慘한 運命으로 이끌은 것은 56歲가 되던 5月에 光緖(廣西)의 盜賊을 討伐하라는 命令이었다. 그보다 앞서 光緖의 謝恩(思恩)과 電柱에서 일어난 大規模로 벌어진 討賊의 騷亂은 極度로 甚해서 네 군데 誠意 軍隊가 討伐을 試圖했지만 敗北하고 말았다.

危機에 몰린 調整은 陽明이 해냈던 軍事的 功勳을 떠올렸다. 王陽明은 事實上 當代의 매우 有能한 兵法家였고 軍人으로서 有能한 資質이 있었다. 調整은 苦生해서 辭讓하는 佯名을 無理하게 起用했다. 9月에 出發해서 江西, 廣東(廣東)을 거쳐 光緖에 到着하자 아픈 몸으로 無理하게 任務에 熱中했다. 陽明은 任務를 遂行하기 前에 文人(文人) 錢德洪, 왕기와 千天驕에서 道를 論하고 社舊敎(四句敎)로써 學術의 종지를 槪括했다. 陽明은 軍事 活動에서 土賊(土賊, 地方의 도둑떼)李 蜂起한 原因이 朝廷의 不條理하고 末葉的인 政策에 있다고 생각했다. 根本的인 政策과는 距離가 먼 것이다.

따라서 軍隊를 動員하여 武力으로 討伐하는 것보다는 恩惠를 베푸는 方法을 써서 强盜 무리를 진정시켰다. 배움터를 建立해서 敎化 事業을 始作했다. 게다가 提督陽光群舞(提督兩廣軍務)를 겸하며 7月에는 팔色團等協議 移籍을 討伐했는데, 그 巢窟을 掃蕩해서 多年 間의 憂患을 한放에 除去했다. 그러나 奬勵(??)의 땅에서 極히 힘든 일에 服務하는 것은 병든 몸에 致命打였다. 病勢는 차츰 나빠졌다. 여러 番 休暇와 辭職願을 올렸으니 不許됐다. 그래서 命令을 기다리지 않고 歸路에 올랐다. 廣東省 境界에서 光緖로 들어가던 途中에 結局 肅謝[宿舍]-宿所-에서 他界했다. 이 때가 家庭 7年(1528) 10月 29日이었다. 57歲의 나이였는데, 臨終의 遺言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史上 [ 編輯 ]

當時 名은 오이라트, 타타르, 苗族과 같은 周邊 異民族의 侵入이 잦았고, 안으로는 各地의 盜賊들이 暴動을 일으켰다. 또한 奸臣輩같은 宦官들이 朝廷에서 腐敗 政治를 主導 하던 時期였다. 學問, 思想도 南宋 以後 원, 名을 거쳐 官學으로서의 支配的 地位를 차지했던 朱子學 의 敎條化로, 名 初期에 編纂된 사서대전 , 五經大全 안에서 過去 試驗 問題가 出題됨으로써 學問과 思想은 固定되었다. 大多數 學者들은 訓詁와 文章, 媤家에 빠져 들어 虛妄한 知識을 갖고 놀며 겉으로만 꾸미려는 일에 努力했다. 이들은 朱子學의 根本이 되는 自己 修養도 게을리하였다.

陽明學에서 主導 動機가 되는 것은 人間의 自然的 心情에 對한 信賴의 正祖이다. 人間의 '마음'을 把握하는 方法에서 朱子의 性卽理(性卽理)가 人間의 마음을 性(性, 이理)과 鄭(情, 現實의 마음의 作用)으로 나누고 情은 性을 眩惑시킬 可能性이 있는 것으로서 城을 實現하기 위해 情을 規制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비해, 王守仁은 人間은 이미 정 안에 '陽地(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自然의 心情으로 行動하면 城을 實現할 수 있다는 心卽理(心卽理)를 主張했다. 여기서 羊脂는 《 孟子 》의 "깊은 窮理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陽地이다. 2, 3歲의 어린이도 父母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라는 글에서 나온 것으로, 王陽明은 그것을 하늘(天)이자 하늘의 理致(天理)인 同時에 人間의 마음의 本體로서 是非善惡의 判斷을 갖추고 있는 先天的으로 具備된 思慮(思慮) 以前의 自然스러운 것 卽 '良心'에 가까운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朱子의 實踐論에 比하면 자유로운 解放感이 隨伴되는 것이었다.

王陽明의 著作은 後날 《왕문성空轉서(王文成公全書)》로 모아졌다. 陽明學의 學說을 담은 《 傳習錄 》(傳習錄)·《走者萬年正論》(朱子晩年定論)·《大學古本》(大學古本)은 그의 思想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重要한 著書이다.

影響 [ 編輯 ]

陽明學은 事後 여러 方向으로 展開되어 實踐하는 主體를 疏忽히 하는 觀念的·空想的인 理論으로 흘렀는가 하면, 着實한 勉學修養(勉學修養)을 輕視하는 風潮까지 빚어냈지만, 明代의 思潮는 양명史上(陽明思想)의 展開(右派/右派와 左派/左派로 나뉜다)에서 個性이 發揮된 것은 歷史的 事實이다. 王陽明의 影響을 받은 代表的 人物은 이탁오 가 있다. 이탁오의 有名한 著作物은 《 焚書 》와 그 續篇 格인 《 속 焚書 》가 있다.

韓國 에서도 朝鮮 (朝鮮) 中期 以後의 思潮에 큰 影響을 주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著書 [ 編輯 ]

  • 傳習錄
    • 한정길, 정인재 役 / 청계
    • 김동휘 役 / 身元
    • 정차근 役 / 平民史
  • 遺言錄(양명先生遺言錄) - [소나무出版 / 정지욱 옮김]
硏究서
  • 박은식 / 王陽明 實技
  • 최재목 / 退溪 心學과 王陽明
  • 최재목 / 내 마음이 燈불이다
  • 황갑연 / 王陽明 읽기
  • 김세정 / 傳習錄 읽기
  • 김세정 / 王陽明의 生命哲學
  • 임홍태 / 主體的으로 산다
  • 有名種 / 王陽明과 陽明學
  • 박정련 / 王陽明의 마음의 藝術 音樂 그리고 音樂敎育論
  • 마노센류 / 朱子와 王陽明
  • 둥핑 / 칼과 冊
  • 日本 陽明學 [요시다 코헤이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