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남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남이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남이 將軍 에서 넘어옴)

南怡(南怡)
別名 시호: 忠武(忠武)
出生日 1443年
出生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468年 10月 27日 (25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經歷 李施愛의 亂 征伐, 女眞族 征伐
父母 남빈(簿), 南陽 洪氏 夫人(某)
配偶者 初吹 安東 權氏
契聚 固城 李氏
그 以外 側室 2名
子女 1女
宗敎 儒敎 ( 性理學 )
服務期間 1457年 ~ 1468年

남이 (南怡: 1443年 ~ 1468年 11月 11日 ( 陰曆 10月 27日 ) [1] )는 朝鮮 時代 電氣의 無關 , 戚臣이다.

할아버지는 醫山君(宜山君) 남휘 (南暉)이고, 할머니는 太宗 원경왕후 의 넷째 딸인 旌善公主 (貞善公主) [2] 이며, 夫人은 左議政 권람 (權擥)의 딸이다. 本貫은 宜寧 이다. 武藝에 能하였으며 世祖 의 寵愛를 받아 20代의 나이에 兵曹判書 에 이르렀으나 解任당한 것에 不滿을 품던 中 그가 지은 漢詩 한 數를 問題삼은 유자광 (柳子光)과 한명회 (韓明澮), 신숙주 (申叔舟) 等의 攻擊을 받고 處刑되었다.(남이의 玉) 順調 때인 1818年(純祖 18年) 後孫 右議政 남공철 (南公轍) 等의 上疏로 復權되었다. [3] 諡號는 忠武(忠武)이다. 남구만 은 그의 6代 再從孫이다. [4]

生涯 [ 編輯 ]

初期 [ 編輯 ]

朝鮮 의 開國功臣으로 領議政府使를 지낸 南在 (南在)의 玄孫으로 醫山君 남휘 의 孫子이다. 아버지는 郡守 남빈(南?)이며, 어머니는 縣監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後日 中宗 때의 領議政 을 지낸 南袞 (南袞)은 그의 一族이다. 世祖 의 功臣 권람의 딸과 結婚하였으나 夫人 權氏는 夭折했고, 권람度 일찍 죽었다. 再婚한 夫人과 첩 2名이 더 있었으며, 再娶 夫人은 後日 그가 處刑될 때 함께 處刑되고 두 名의 妾은 南怡의 獄事 直後 奴婢로 끌려갔다.

1460年 (世祖 6年) 武科(武科)에, 1466年 (世祖 12年)에 拔英試(拔英試)에 及第했다. [5]

1467年 (世祖 13年) 京畿道 抱川 (抱川), 영평 (永平) 等地의 길목에서 旅行客과 商人들을 掠奪하는 盜賊떼를 討伐했다.

李施愛의 亂과 女眞族 討伐 [ 編輯 ]

登臨詠懷도(登臨詠懷圖)

1467年 (世祖 13年) 咸鏡道 一帶에서 李施愛의 亂 이 일어났을 때 討伐隊 大將이 되어 龜城君 준 , 康純 (康純), 어유소 等과 함께 討伐에 參與, 先鋒으로 出征하였다. 그 뒤 出征 中 그의 勳功이 朝廷에 알려져 바로 堂上官으로 昇進하여 行 副護軍(行副護軍)을 거쳐 行 護軍 이 되었다. 亂이 平定된 뒤 敵愾功臣(敵愾功臣) 1等館에 책록되고 의산軍에 封君되었다. [6] 이어서 西北邊에 出沒한 建州衛 (建州衛) 女眞族 을 征伐할 때에도 平安道宣慰使 윤필상의 指揮下에 우상대腸이 되어 先鋒으로 敵陣에 들어가 滿浦 로부터 勳江 (파저강)을 攻擊하여 女眞族의 首魁 이만주 富者를 慘殺하고 되돌아왔다. 이러한 功勞로 2等 軍功에 冊封되었다.

그 뒤 工曹判書를 거쳐 1468年 (世祖 14年)에는 五衛都摠府 都摠管을 겸했으며, 그해 27歲의 나이로 兵曹判書 가 되었다. 그러나 世祖가 죽자 韓明澮, 申叔舟의 露骨的인 牽制를 받기 始作했다. 그해 南怡의 昇進과 勢力 擴張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牽制하던 申叔舟, 韓明澮 等이 李施愛의 亂 平靜으로 登場한 新勢力을 除去할 때 兵曹判書 에서 解職되어 兼司僕將(兼司僕將)으로 轉任되었다.

韓明澮, 申叔舟 等이 강희맹 (姜希孟), 한계희 (韓繼禧) 等의 勳舊 大臣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兵曹判書職을 遂行할 能力이 없다고 批判하자, 睿宗은 그를 兵曹判書에서 解任하고 兼司僕長職에 임명했다. [7]

유자광과의 葛藤 [ 編輯 ]

柳子光은 庶孼 出身이며 南怡와 마찬가지로 李施愛의 亂에서 功을 세워 登用된 人物인데 茅沙에 能하고 計略에 뛰어난 人物이었다. 그런데 自身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世祖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猜忌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完全히 除去해버릴 計劃을 세웠다. [8]

죽음 [ 編輯 ]

睿宗 은 元來 南怡를 좋아하지 않았다. 武藝에 뛰어나고 性格이 剛直할 뿐 아니라 아버지 世祖의 사랑을 獨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睿宗은 政事 處理에도 能하지 않았으며 世祖의 信賴度 두텁지 않았다. 睿宗은 그 때문에 그를 猜忌하고 嫉妬했다. [8] 睿宗이 卽位한 지 얼마 안 된 1468年 (世祖 14年, 睿宗 元年) 어떤 사람이 그가 公主와 姦淫하였다고 所聞을 捏造하여 困辱을 치렀는데, 그해 宿直을 서면서 彗星 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徵兆”라고 했다. 이것을 엿들은 柳子光은 그가 領議政 康純 等과 모여 逆謀를 꾸민다고 謀陷하여 下獄되었다. 남이는 丈人 권람의 親舊들인 大臣들에게 救命을 要請했지만 韓明澮와 申叔舟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外面하였다. 권람의 아들들은 누이가 일찍 죽어서 睿宗 初 남이 집안과 아무런 關聯도 交流도 없음을 들어 劇的으로 滅門之禍를 면하였다. 1468年 10月 27日 남이는 軍器監 앞 저자거리에서 康純 等과 함께 효수당했다. 또한 그를 辯護하던 早熟(趙淑) 等도 처형당했고, 그가 逆謀의 陋名을 쓰고 處刑되자 그의 母親 亦是 連坐되어 喪中에 고기를 먹고, 아들인 그와 姦通하였다는 罪로 凌遲處死 되었다.

事後 [ 編輯 ]

이 事件은 壬辰倭亂 以前까지는 逆謀 事件이라고 認識되었지만, 그 以後 一部 野史에서는 柳子光의 謀陷으로 捏造된 獄事라고 規定하고 南怡를 젊은 나이에 陋名을 쓰고 抑鬱하게 죽은 人物로 記述하고 있다는 點이 注目된다. 南怡의 玉을 捏造 事件으로 記錄한 代表的인 冊은 燃藜室記述인데 여기에는 柳子光의 計略에 依한 것으로 되어 있다. [9] 中宗 조광조 (趙光祖) 等에 依해 抑鬱하게 犧牲된 點이 勘案되어 復權 輿論이 造成되었으나 己卯士禍 로 趙光祖 等이 肅淸되면서 失敗로 돌아갔다. 柳子光에 依한 2次例의 悽絶한 史話로 柳子光에 對한 士林의 評價가 極度로 절하됨으로써 南怡의 逆謀는 抑鬱한 陋名으로 遁甲하게 되었다.

1818年(純祖 18) 右議政 남공철의 奏請으로 康純과 함께 官爵이 復舊되었다. 墓所는 京畿道 華城市 비봉면 남전리에 있으며 昌寧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配享되었다.

白頭山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豆滿江 물은 말이 먹여 없애니
남아 二十에 나라를 平定하지 못하면
後世에 누가 大丈夫라 일컬으리오

그의 詩 中에 “ 白頭山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男子 20歲에 나라를 平安히 못하면 後에 누가 大丈夫라 하리요.”라고 읊은 詩가 有名하다. 後에 그의 이 詩는 蜂起나 데모대의 弘報物에 主로 利用되었다.

日帝强占期 에서 解放된 뒤 反託示威에 金九 (金九)는 親筆로 6.23 反託데모에 將軍 남이가 지은 '남아 二十歲에 나라를 平定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大丈夫라 이르理'라는 詩를 膳賜하여 激勵하였다. [10] [11]

家族 關係 [ 編輯 ]

傳해오는 이야기 [ 編輯 ]

축령산 傳說 [ 編輯 ]

韓國의 축령산 京畿道 南楊州市 수동면과 加平郡 상면 境界에 있는 축령산(886m)과 全羅南道 將星과 全北 高敞의 境界에 있는 축령산(620.5m)이 있는데 京畿道 南楊州市 에 있는 축령산 이름의 由來는 南怡와 關聯된 것이다. 축령산에는 남이가 어릴 적 武藝를 닦았다는 南怡바위가 있고 頂上에서 東쪽 方向으로 京畿道 加平 南怡섬 과 더불어 남이 將軍 由來說이 根據가 貧弱하지 않다. [13]

柳子光의 거짓 告變을 들은 睿宗이 스물여덟의 南怡를 '車裂刑(車裂刑)'이라는 四肢가 잘려나가는 刑罰로 慘酷하게 죽이자 이 地域 사람들이 그 靈魂을 慰勞하고자 南怡와 關聯이 있는 이 山을 축령산으로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남이 將軍 由來說이 더 親近感이 간다. 이밖에도 축령산에는 남이 將軍이 武藝를 닦았다는 南怡바위가 있다. [13]

남이 將軍 墓所 [ 編輯 ]

京畿道 華城市 비봉면 남전리에는 分明히 남이 墓所가 存在하는데 江原道 春川의 南怡섬에 가보면 南怡섬의 이름이 由來된 南怡將軍의 墓所를 찾아 볼 수 있다. 逆謀를 꾀한다는 柳子光의 謀陷으로 陵遲處斬(車裂刑) 當한 南怡 將軍은 이곳 어딘가에 묻혔다는 傳說이 傳해져 온다. 傳說에 담겨 傳해져오는 돌무더기가 있어 이를 흙으로 덮어 封墳을 만들고 治粧한 게 現在의 南怡將軍妙라 하는데 實際 남이 將軍이 묻혀 있는지는 確認할 수 없다. 反逆을 꾀하였던 무리들을 殲滅했다는 慶尙北道 營養의 '남이포'와 京畿道 龍仁市 構成地域의 '南氏 家門에 내려오는 아기將軍'에 對한 얘기도 남이 將軍과 얽혀있다. 이렇듯이 現在 韓國 에는 南怡에 對한 傳說이 많다. 그만큼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南怡에 對한 안타까움이 舌禍 같은 傳說 이 되어 傳해 내려오는 것이다. [13]

無에서의 남이 [ 編輯 ]

박시백 畫伯의 歷史 漫畫 《朝鮮王朝實錄》에 依하면, 남이 將軍이 靑年 時節에 處女를 괴롭히는 惡한 鬼神 을 보고 쫓아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傳說에 따라 鬼神, 지네 等 다양한 相對를 한 것으로 傳한다. 巫俗에서 남이 將軍은 무당 이 섬기는 將軍神 中 한 분이다.

아기장수 舌禍 [ 編輯 ]

朝鮮 初期의 名匠 南怡에 關한 人物傳說로 《燃藜室記述》 · 《淸野挽執(靑野?集)》 · 《大東奇聞(大東奇聞))에 文獻資料가 傳해지고 있으며, 口傳說話度 全國에 걸쳐 分布되어 있다. 文獻資料는 純粹說話라기보다 여러 文集에 所在하여 있는 南怡에 關한 記錄을 引用한 것으로서 모두 같은 內容이다. 特記할 것은 《燃藜室記述》中 《國調記事(國朝記事)》의 資料를 引用한 南怡의 結婚過程은 現在 口傳되는 說話와 같은 것으로 보아 民間 全勝을 記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그의 丈人 권람은 韓明澮, 申叔舟의 옛 同僚이자 後日 癸酉靖難 世祖反正 을 함께 擧沙하던 同志였다. 그러나 夫人 權氏가 일찍 죽고, 丈人 권람度 1465年 에 일찍 죽었으므로 그를 支援해 줄 人物이 없었다. 권람, 太宗 과는 이中 姻戚關係로 남이는 太宗 의 딸 旌善公主 의 孫子이며, 丈人 권람의 叔父 권규 (權侊)는 太宗 의 다섯째 딸인 경안공주 와 結婚하여 그 아들 拳銃은 太宗 의 外孫이자, 그에게는 外從姨母夫가 된다. 金文起 와도 査頓間으로 拳銃의 孫女 권영금은 金文起 의 아들 김현석의 夫人이다.

첩 濁文雅 [ 編輯 ]

妓生 出身 첩 濁文雅(卓文兒)는 宮闕 에서 베풀던 宴會에도 나간 적이 있으므로 흥양群 神韻은 그를 집안 奴婢로 부릴 수 없다 하여 官婢로 定屬되었다. [14]

흥양群(興陽君) 身運(申雲)李 아뢰기를,

“前日(前日)에 下賜받은 亂臣(亂臣) 南怡의 첩 濁文雅는 御殿(御前)에서 呈才(呈才)를 하던 者이므로, 臣이 敢히 가비(家婢)로써 부릴 수가 없습니다. 또 이 앞서 妓生(妓生) 月仲媒(月中梅)와 超腰坑(楚腰?) 等이 亂神의 妾들로서 모두 다 本役(本役)에 그대로 定速(定屬)되었으니, 請컨대 이를 改正(改定)하소서.” 하니, 義禁府와 掌禮院에 前知하기를, “身運에게 하사해 준 妓生 濁文雅는 그대로 鎭海(鎭海) 館婢(官婢)로 定速하라. [14] ” 하였다.

關聯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睿宗實錄》 卷1, 睿宗 卽位年(1468年) 10月 27日(癸丑) 2番째 記事
  2. 정범조, 《해좌집》 卷39, 남將軍展
  3. 《純祖實錄》 卷21, 純祖 18年(1818年) 3月 10日(丁未) 1番째 記事
  4. 남구만, 《약천집》 卷24, 第남將軍移苗
  5. 《世祖實錄》 卷45, 世祖 14年(1468年) 3月 27日(定해) 1番째 記事
  6. 할아버지 남휘에 이어 襲封되었다.
  7. 朴榮圭, 한卷으로 보는 朝鮮王朝實錄 (들불, 1998) 125페이지
  8. 朴榮圭, 한卷으로 보는 朝鮮王朝實錄 (들불, 1998) 126페이지
  9. 朴榮圭, 한卷으로 보는 朝鮮王朝實錄 (들불, 1998) 127페이지
  10.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34쪽
  11. 도진순, 《韓國民族主義와 南北關係:李承晩, 金九 時代의 政治私》(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54쪽에서 再引用
  12. 睿宗實錄 3卷, 睿宗 1年(1469 己丑 / 名 聖火(成化) 5年) 1月 13日(무진) 1番째記事
  13. 엄주엽 記者 (2008年 12月 5日). “還甲의 ‘잣나무 숲’에 안겨… 酸素充電·活力補充” . 文化日報 . 2010年 5月 23日에 確認함 .  
  14. 睿宗實錄 3卷, 睿宗 1年(1469 己丑 / 名 聖火(成化) 5年) 2月 8日(癸巳) 1番째記事

外部 링크 [ 編輯 ]

  • 위키文獻에 남이 關聯 資料가 있습니다.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朝鮮初의 對外關係"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