貴人 鄭氏 (成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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貴人 鄭氏
貴人 鄭氏
朝鮮 成宗의 後宮
이름
정금이(鄭金伊)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死亡日 1504年 4月 14日 ( 1504-04-14 ) (陽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昌慶宮
家門 哨戒 鄭氏
父親 정인석
配偶者 成宗
子女 2男 1女
안양군 , 봉안군 , 貞惠翁主

貴人 鄭氏 (貴人 鄭氏, ? ~ 1504年 4月 14日 ( 陰曆 3月 20日 ))는 朝鮮의 第9代 王 成宗 後宮 이다. 本貫은 哨戒 (草溪)이다.

生涯 [ 編輯 ]

本貫은 哨戒 이며, 本名은 금이(金伊)이다. 정인석(鄭仁石)의 딸로 태어났으며, 成宗實錄 에 '淑容 鄭氏(귀인 鄭氏)의 동생과 引受王 對備 全義 侍女인 尙宮 조氏의 동생을 다 永久히 良人(良人)李 되도록 許可하라고 命하였다.'라는 記錄이 있는 것으로 보아 本디 그 身分은 賤民이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1]

연산군 은 母后인 廢妃 尹氏 의 죽음이 모두 貴人 鄭氏와 成宗의 또다른 後宮인 昭容 嚴氏 等의 讒訴때문이라고 判斷하여, 그女들을 매우 미워했다.

1504年 (燕山君 10年) 陰曆 3月 20日 밤, 燕山君은 貴人 鄭氏와 昭容 嚴氏를 昌慶宮 뜰에 묶어놓고 鄭氏의 所生인 안양군 봉안군 을 잡아와, 그女를 마구 때리게 했다. 當時 날이 어두워 안양군은 어머니임을 斟酌하지 못하고 마구 때렸으나, 봉안군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때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燕山君은 더욱 火가 나 그女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殺害하였다. 貴人 嚴氏와 貴人 鄭氏가 숨이 끊어지고도 燕山君의 매질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도 燕山君은 안양군과 봉안군을 仁粹大妃 에게로 끌고 가 갖은 行悖를 부렸으며, 이어 內需司(內需司)를 시켜 그女들의 屍體를 모두 찢어 젓갈을 만들어 山川(山川)에 뿌려버리라고 指示했다 [2] . 以後 안양군과 봉안군度 외딴 섬에 流配시킨 後, 1年 後인 1505年 에 모두 죽여버렸다 [3] .

中宗反正 이 일어난 後, 1506年 (中宗 1年) 10月 에 그 身元이 復位되었다. 이어 中宗 은, 같은 해 11月 에 貴人 鄭氏와 昭容 嚴氏 두 사람에 對해 3年 동안 祭物(祭物)을 支給토록 命하였다.

家計 [ 編輯 ]

本家 哨戒 鄭氏
王家 全州 李氏

貴人 鄭氏가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出處 [ 編輯 ]

  1. 《朝鮮王朝實錄》成宗 19年(1488) 9月 18日 2番째 記事.
  2. 《朝鮮王朝實錄》演算 10年(1504) 3月 20日 5番째 記事.
  3. 《朝鮮王朝實錄》演算 11年(1505) 6月 15日 1番째 記事.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