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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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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순 (洪南淳, 1912年 7月 20日 ~ 2006年 10月 14日 )은 大韓民國 辯護士 이자 人權運動家이다. 1963年 辯護士로 開業한 뒤, 軍部 統治가 强壓하던 時代에 緊急措置法 違反 事件의 辯論과 良心囚들을 위한 無料 辯論을 많이 맡아 韓國의 代表的인 人權辯護士로 꼽힌다. 5·18 光州 民主化 運動 當時에는 市民 虐殺에 抗議하는 뜻으로 行進을 펼치다 內亂 首魁 嫌疑로 無期懲役을 宣告받기도 했다.

홍남순은 1912年 7月 20日 全南 和順郡 도곡면에서 태어났다. 월곡義塾, 능주普通學校 卒業 後 學業에 對한 熱望으로 19歲에 密航船을 타고 日本으로 건너가 와카야마公立상공학교를 卒業하고 歸國, 37歲 나이로 1948年 辯護士 試驗에 合格했다. 그의 나이 38歲에 6·25 戰爭 에 參戰했고, 1953年 光州地法 判事로 任官, 光州高法, 大田地法을 거쳐 1963年 辯護士로 나섰다.

1965年 韓日協定 反對 發言으로 問題가 된 前 國會議員 유옥우 事件을 筆頭로 學生, 政治人 等 良心囚들을 위해 60件 異常을 無料 辯論海 ‘法보다 良心’을 重視하는 辯護士로 名聲을 얻었다. 1973年 全南大 ‘喊聲’地 事件, 1976年 3·1救國宣言, 1978年 全南大 송기숙 敎授의 敎育指標事件 等 30餘件의 緊急措置法 違反事件度 맡았다.

1980年 5·18民主化運動 當時에는 일흔의 나이에 內亂首魁 嫌疑로 新軍部에 逮捕돼 無期懲役을 宣告받고 1年 7個月間 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光州 5·18拘束者協議會’ 會長으로 推戴된 故人은 軍部獨裁에 맞서 民主化 運動과 5·18名譽回復에 注力했으며, 이 같은 功勞로 1985年 가톨릭 人權賞과 1986年 大寒辯護士會 人權賞, 1993年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받았다. 그는 2001年 11月 腦出血로 쓰러진 지 5年 만인 2006年 10月 14日 別世했다. [1]

賞勳과 追慕 [ 編輯 ]

  • 1985年 2月 : 韓國가톨릭平信徒 使徒職協議會 正義部門 大賞
  • 1986年 : 大寒辯護士會 會長 贈呈 人權賞
  • 1993年 : 大韓民國 國民勳章 無窮花章
  • 1997年 : 심산 金昌淑 先生像

評價 [ 編輯 ]

홍남순 辯護士의 殯所를 찾아온 朴槿惠 前 한나라당 代表는 "一生을 原則을 갖고 良心을 지키면서 올곧게 살아오신 분. 우리나라 人權伸張과 民主主義 進展에 寄與해 오신 분"으로 評價했다. [2]

鄭東泳은 "人權과 自由의 傳道師였던 洪 先生님의 犧牲精神은 永遠할 것이라며 어른의 뜻인 平和와 自由를 지키는 것이 光州市民과 大韓民國 國民의 使命"이라고 말했다.

櫜鞬 前 總理도 이날 午後 殯所를 찾아 "自身이 全南道知事 在職時節 故人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民主化와 人權을 위해 굽힘이 없었던 故人을 우리 社會의 큰 스승이었다"고 評價하고 넋을 기렸다. [3]

그의 知人들은 "新軍部의 서슬퍼런 拷問과 脅迫 앞에서도 洪 辯護士는 全혀 氣 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回顧한 바 있다. [4]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