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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露宿인 쉼터로 始作해 26年…‘社會安全網’ 構築했죠” [따萬事]|東亞日報

“露宿인 쉼터로 始作해 26年…‘社會安全網’ 構築했죠” [따萬事]

  • 東亞닷컴
  • 入力 2024年 4月 11日 12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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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敎會 이준모 牧師

仁川 계양구 계산동에 位置한 ‘來日을 여는 집’, 이곳은 1998年 當時 IMF로 거리에 내몰린 露宿人들과 失職者 家庭을 돌보기 위해 해인敎會 이준모 牧師가 設立한 機關이다.

李 牧師는 露宿인 쉼터를 비롯해 쪽방村 住民들을 돕는 ‘쪽방相談所’, 地域 兒童을 위한 工夫房, 家庭暴力相談所, 無料給食所, 老人 專門 일자리 機構인 시니어클럽 等 다양한 社會福祉施設을 運營하면서 無慮 26年 동안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다. 李 牧師는 이를 民間에서의 ‘社會安全網’이라고 表現한다. 그는 ‘社會安全網’을 構築한 功勞를 認定받아 2014年 9月에 大統領 表彰을 받기도 했다.

李 牧師는 “먹을 것이 必要한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가 必要한 사람에게는 잠자리를 주고, 일자리가 必要한 사람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病院에 가고 싶은 사람은 病院을 갈 수 있는 원스톱 支援體系를 튼튼하게 만들어 온 거죠. 한 家庭 程度는 바로 일어나도록 도울 수 있는, 그야말로 綜合社會福祉館 役割을 해주는 社會安全網을 다 갖추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라고 說明했다.



‘社會安全網’ 構築 契機된 IMF 經濟 危機
江原道 春川에서 태어난 이 牧師는 中學校 2學年 때 牧師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지만 父母님의 反對에 부딪혔다. 神學 敎授로 進路를 修正한 그는 獨逸 留學을 計劃하고 西江大學校 獨語獨文學科에 進學했다. 宗敎學을 副專攻으로 하며 留學을 準備하던 1994年 7月, 그는 留學 前 暫時 들렀다가 갈 생각으로 찾은 해인교회에서 人生을 完全히 뒤바꾸는 轉換點을 맞이했다.

“1994年 7月에 여기에 처음 왔는데 水道, 電氣, 電話가 다 끊겨 있고 敎人도 없었어요. 그런 狀態에서 敎會를 始作했는데 3年쯤 지나니까 敎人이 30名 程度가 되더군요. 그런데 1997年에 敎人들이 자꾸 失職을 하는 거예요. IMF 前哨 症狀이었죠. 敎人들이 자꾸 失職을 하니까 ‘내가 祈禱를 많이 못해서 敎人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一旦 敎人들을 就業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敎人들에게 履歷書 쓰게 해주고, 履歷書 들고 제가 막 會社를 찾아다녔어요. 社長님들을 說得하고 萬若에 解雇시킬 일이 發生하면 내가 代身 責任을 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좀 就業을 시켜달라고, 아주 熱誠的으로 敎人들을 就業시키고 다녔습니다. IMF 터지고 난 뒤에 10家庭 中 9家庭이 失職을 했었지만 結局 9家庭 모두 다시 就業이 됐어요.”



李 牧師의 ‘社會安全網’ 構築은 이를 契機로 本格的으로 始作됐다. 그는 “再就業을 한 敎人 분들이 失業者와 露宿人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보자고 해서 ‘露宿인 쉼터’를 만들게 됐어요. 이게 (社會安全網 構築의) 始作이었죠”라고 回想했다.

“敎人들이지금 IMF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우리 敎會가 失職한 사람들을 就業시켜주는 役割을 해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失業對策委員會를 만들었어요. 雇傭勞動部에서 나오는 就業情報, 無價紙에 올라오는 就業情報들을 얻어다 敎會 壁에 붙여놓고 失職者들이 와서 就業情報를 얻어갈 수 있게 했죠. 漸漸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면서 그 사람들을 對象으로 就業 活動과 함께 無料給食도 始作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집에 안 가는 거였다. 事實 그들은 갈 집이 없었다. 李 牧師가 “어제는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니 누구는 公園에서, 또 다른 사람은 빌딩 階段에서 박스 깔고 잤다고 하고, 누구는 葬禮式場에서 身世를 졌다고 했다. 山에 텐트치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그 길로 失職한 露宿人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다.

“쉼터를 設立하고 露宿人들을 돌보다 보니까 失職 家庭의 아이들이 찾아오기 始作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을 봐줄 수 있는 託兒房과 工夫房을 만들었어요. 工夫房은 2005年에 아동복지법이 바뀌면서 地域兒童센터로 變했죠. 只今 이 兒童센터에는 19名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中 16名이 多文化 家庭 아이들이에요. 몽골, 베트남, 우크라이나, 파키스탄 等等입니다.”

露宿人 自立이 ‘쪽방相談所’ 設立으로
쉼터 露宿人들이 自立해서 나간 곳은 主로 쪽房村이었다. 이는 쪽방相談所 設立으로 이어졌다.

“露宿人들이 自立해서 房을 얻어 나가는데 싼 價格에 房을 얻으려고 나간 곳이 쪽房地域이었죠. 價格이 싸니까. 當時에 保證金 50萬원에 月貰가 15萬원, 20萬 원 程度. 그래서 처음으로 쪽房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옛날에는 祝辭에 보일러를 들여놓고 한 사람이 겨우 누워 잘 程度로 만들어 놓은 房이었어요. ‘이런 데가 있구나’하고 깜짝 놀라서 仁川 地域 全體 實態 調査를 했어요. 처음에는 작전동 쪽만 調査를 하다가 所聞을 듣고서 나가 보니 만석동에 쪽房이 한 350世代 程度 있더라고요.”

이렇게 形成된 쪽방村 住民들은 只今은 自身들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爲해 十匙一飯 精誠을 모아 寄附도 하고 있다. 지난해 12月에도 廢紙나 古鐵 等을 販賣하고 共同作業場에서 볼펜과 샤프 等을 만들며 거둔 輸入을 모아 誠金 221萬 원을 사랑義열매에 傳達했다. 2008年 以後로 벌써 16年째다.

2008年 쪽방相談所에서 늘 도움만 받아 未安하다는 한 住民의 말에 李 牧師가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보자’고 提案했고, 그해 쪽방村 住民들과 露宿人 等이 生活費 等을 아껴 모은 誠金 63萬원을 傳達하며 貴한 나눔이 始作됐다. 以後 露宿인 쉼터 利用者, 쪽방村 住民과 無料給食所를 利用하는 老人 等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漸漸 늘어났다.

李 牧師는 “적은 金額이라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서 始作한 募金이 올해로 16年째를 맞이했다. 只今은 募金을 始作하는 12月이 되기 前부터 언제 募金하는지 물어보는 분들도 있다”며 “적은 金額이지만 우리 社會 더 어렵고 도움이 必要한 곳에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强調했다.



“먹는 것, 잠자리, 일자리까지 원스톱 福祉 시스템”
露宿인 쉼터로 始作한 이 牧師의 社會安全網 構築이 兒童센터와 쪽방相談所로 이어졌고, 以後에는 家庭暴力 相談所와 家庭暴力 被害者 保護施設小路까지 이어졌다. 이들을 繼續 支援하기 위한 無料給食所가 追加됐고, 以後에는 老人들 專門 일자리 機構까지 擴大됐다.

“老人들이 廢止를 주워서 古物商까지 옮기는데 힘도 없고, 道具도 없으니까 乳母車에다 앞도 안 보이게 쌓아서 그냥 無條件 밀고 가시더라고요. 그렇게 어렵게 1時間 班을 古物商에 가지고 가서 팔면 한 2~3000원 받아가지고 온단 말이에요. 어느 날은 無料給食所에 每日 오시던 老人 분이 안 오셔서 알아보니 廢止를 주워서 옮기시다가 交通事故가 난거에요. 그래서 우리 社會福祉士들에게 이야기해서 洞네에 廢紙 줍는 어르신들 全部 相談을 했어요. 10餘名 程度 되는 生計型으로 廢止를 줍는 어르신들을 모아서 실버自願 協同組合을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最初예요.”

이 실버自願協同組合은 現在 老人들이 모은 廢休紙를 組合에서 直接 收去해 트럭으로 都心 外郭에 있는 古物商까지 運搬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또 ‘來日을 여는 집’ 안에는 ‘계양구 再活用센터’와 ‘都農살림’이란 社會的 企業 두 곳이 있다. 여기에서는 再活用 物品을 收去한 뒤 販賣하고, 農村 生産者와 都市 消費者를 連結하는 일을 한다. 李 牧師는 “露宿인 쉼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여기에 就業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일을 해서 月給을 타는 거죠. 그러니까 먹는 것부터 잠자리, 일자리까지 다 원스톱 시스템으로 해주는 우리나라 唯一한 地域이에요”라며 自負心을 드러냈다.

“最終 目標는 ‘더불어 사는 社會’”
李 牧師가 强調한 ‘社會 安全網’의 원스톱 支援體系가 體系的으로 發動한 代表的 事例가 있다.

“2020年에 우리 洞네에서 불이 났어요. 한 몽골人 家族이 살던 집이 다 타버렸는데 區廳에는 外國人에 對한 豫算이 따로 策定된 게 없어서 도울 方法이 없더라고요. 우리 法人에 依賴가 와서 法人에서 500萬원을 緊急 出願해서 保證金으로 使用하고 月貰 35萬 원짜리 집을 얻어줬죠. 그리고는 우리 再活用센터에서 冷藏庫, 텔레비전, 洗濯機 같은 家電製品을 全部 提供했어요. 우리 敎人들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집에서 쓰던 수저라든지 必要한 物品들을 傳達했죠. 이렇게 한 家庭을 살려내는데 딱 3日 걸렸어요. 緊急 救助 시스템을 完全히 갖추고 있는 거예요. 現場에 答이 있어요. 脆弱階層 사람들의 隘路事項이 뭔지를 살펴보고, 그에 對한 代案을 만들고, 그걸 實行하는 能力이 있으면 可能한 일입니다.”

李 牧師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瞬間은 이렇게 만들어진 ‘社會安全網’李 善循環으로 이어지는 때다.

“가장 보람이 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結局 사람이에요. 露宿인 쉼터에 왔던 분들이 工夫를 해서 社會福祉士가 되고, 그 분들이 只今 여기서 일을 하시고 계세요. 또 우리 露宿인 쉼터에 調理院이 있거든요. 大學校 때 調理學科를 다니던 女子아이가 家庭的으로 經濟的으로 宏壯히 어려워져서 學校를 그만두고 쉼터에 왔어요. 그래서 여기서 調理士 敎育을 시켰어요. 寒食調理士, 樣式調理士, 製빵師 資格證을 따고 只今은 우리 露宿인 쉼터 調理院으로 일해요. 또 한 番은 露宿인 쉼터에 한 女子 분이 아이를 4名이나 데리고 온 적이 있어요. 그 분이 社會福祉士가 됐고, 4名의 아이들 中에 한 아이도 社會福祉學科를 나왔어요. 家庭暴力 被害者 保護施設에 찾아왔던 被害者 中에서도 社會福祉士로 일하는 사람이 있죠. 사람을 키워내는 게 第一 잘한 거죠. ”



‘社會 安全網’ 構築으로 이 牧師가 最終的으로 이루고 싶은 目標는 ‘더불어 사는 社會’를 만드는 것이다.

“해인敎會 뜻이 ‘人間 解放’, ‘仁川 解放’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人間의 問題를 해인敎會가 熱情과 獻身으로 解決하고, 더불어 사는 마을, 社會를 만들고, 나아가서 이게 좋은 모델이 돼서 全國 各地, 世界 各地에 이런 共同體가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제가 窮極的으로 이루고자 하는 共同體는 信仰 共同體, 生活 共同體, 敎育 共同體, 그래서 實質的으로 人間이 人間답게 살 수 있도록, 主體的으로 살 수 있도록 옆에서 協力하고 도와주는 거죠. 함께 잘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따뜻한 世上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萬事)은 寄附와 奉仕로 나눔을 實踐하는 사람들, 自己 몸을 아끼지 않고 危機에 빠진 他人을 도운 義人들, 社會的 弱者를 위해 空間을 만드는 사람들 等 우리 社會에 善한 影響力을 行使하는 이웃들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周邊에 숨겨진 ‘따萬事’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송치훈 東亞닷컴 記者 sch5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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