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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로저스 會長의 隨行祕書가 된 脫北女性[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짐 로저스 會長의 隨行祕書가 된 脫北女性[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1月 18日 1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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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月 서울에서 열린 나흘 間의 보드미팅에서 짐 로저스 會長을 遂行하며 通譯을 하고 있는 정유나 氏.

2018年 11月, 世界 3大 投資者로 꼽히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會長이 정유나 氏에게 電話를 걸어왔다.

“유나, 너를 補佐官으로 迎入하고 싶다.”

앞서 로저스 會長은 鄭 氏에게 몇 次例 메일을 보냈다. 鄭 氏는 장난 메일인줄 알고 無視하다가 마지막 메일에 “萬若 會長님이 맞다면 電話를 걸어달라”고 했다.

“世界的인 大學을 나온 秀才들度 많고, 英語를 잘 하는 韓國 사람들도 많은데 왜 何必 저를 補佐官으로 迎入하려 합니까?”

鄭 氏의 質問에 로저스 會長은 이렇게 對答했다.

“I saw your dazzling brain through your eyes.(네 눈을 통해 너의 눈부신 頭腦를 봤다)”

그리곤 說明을 이어나갔다.

“나 같은 投資者들은 사람을 볼 줄 아는 能力이 있다. 나는 고맙게도 그 能力을 30代 初盤에 가진 것 같다. 너는 매우 熱情的이고, 北韓 出身임에도 英語도 아주 잘한다.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너의 力量을 봤다. 내가 왜 너를 굳이 迎入하려는지 只今은 理解를 하지 못하겠지만, 나랑 같이 일을 하면 알게 될 것이다.”

電話가 오기 얼마 前 로저스 會長은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와 畫像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鄭 氏가 英語로 그와 對話를 나누었다.

※ 정유나와 짐 로저스 會長과의 첫 만남 映像 => https://tv.nate.com/clip/1920786
며칠 뒤 鄭 氏는 로저스 會長의 招待를 받아 釜山으로 내려갔다. “北韓에 全 財産을 投資하고 싶다”는 發言으로 話題를 모은 로저스 會長은 當時 3年 任期로 對北投資企業인 ‘아난티’의 社外理事로 이름을 올렸다.

釜山에 내려간 鄭 氏는 어리둥절했다. 검은 正裝에 선글라스를 낀 7~8名의 男性이 그를 迎接하더니 映畫에서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호텔 複道를 지나 커다란 門을 열었다. 로저스 會長이 그를 맞아주었다.

그날 鄭 氏는 로저스 會長의 隨行祕書로 任命돼 以後 함께 世界를 누볐다. 로저스 會長이 만나는 사람들은 世界的인 巨物들이었다. 記憶에 남는 일로 鄭 氏는 2019年 釜山에서 열린 韓-아세안 頂上會談 晩餐 때를 꼽았다. 當時 로저스 會長의 紹介로 그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 國家拷問, 리셴룽 싱가포르 總理, 쁘라윳 짠오차 泰國 總理 앞에서 北韓의 實相을 이야기했는데, 모든 頂上들이 그의 말을 傾聽하며 拍手를 보냈다.

尹錫悅 大統領이 大選 候補 時節이던 2022年 2月 짐 로저스 會長과 만날 때 이들의 對話를 通譯한 사람도 鄭 氏였다.

2022年 2月 짐 로저스 會長과 尹錫悅 國民의 힘 大選候補가 만났다. 鄭 氏가 가운데서 두 사람의 對話를 通譯했다.

● 北韓 奧地에서의 어린 時節
世界的인 巨物 投資者의 個人祕書室長(Personal executive secretary)으로 活動하고 있는 鄭 氏는 1988年 北韓에서도 가장 奧地로 꼽히는 慈江道 前川郡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當時 아버지는 北韓 最精銳 特殊部隊인 스키部隊 大隊 參謀長이었다. 스키部隊는 特性上 祕密 流出 防止와 特殊訓鍊을 위해 山間奧地에 駐屯한다.

鄭 氏의 어린 時節 追憶은 온통 山과 關聯된 것이다. 軍部隊 駐屯地엔 同甲내기度 없어 두세 살 나이 많은 오빠들과 鬱蒼한 山에서 五味子, 다래, 두릅을 따고 溪谷과 瀑布水에서 水泳을 하고 가재를 잡고, 허리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學校에 가던 삶이 日常이었다.

어린 유나가 꽁지머리를 촐랑이며 걸어가면 軍人들이 ‘새끼 參謀長’이라고 놀렸다.

鄭 氏는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았다. 工夫도 學級에서 第一 잘했고, 노래나 詩朗誦 大會가 열리면 늘 1等을 獨차지했다. 擔任先生이 그에게 늘 “유나는 커서 人民俳優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人民學校에 다니던 때는 北韓에서 苦難의 行軍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나 特殊部隊에는 供給이 좋았던 터라 유나는 배고픔을 몰랐다.

어느 날 “鷄卵 후라이를 왜 안주냐”고 투정을 부리는 유나를 아버지가 부르더니 “負袋 바깥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못 먹는데, 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魂을 냈다.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漸漸 時間이 지나면서 유나도 現實을 깨달았다. 軍部隊 마을 아이들은 隣近 農村마을 애들과 같은 學校를 다녔는데, 그의 班에서도 세 名이나 굶어죽었다. 능쟁이 독에 올라 눈사람처럼 퉁퉁 부었다가 죽은 같은 班 男學生을 그는 아직도 記憶한다.

어느 날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밤에 조용히 나누는 對話도 엿들었다.

“여보, 이러다가 우리도 配給이 끊기는 것 아닙니까. 그럼 나도 山에 가서 길짱구(질경이)를 캐야 하는데 名色이 參謀長 아내이고 職盟委員長이니 달밤에 몰래 나갈 수밖에 없네요.”

多幸히 어머니가 풀을 뜯으러 나가는 일은 없었다.

工夫를 잘했던 鄭 氏는 人民學校를 卒業한 뒤 慈江道 所在地에 있는 秀才學校인 江界1高等 中學校에 入學했다. ‘慈江道는 將軍님의 第2의 故鄕’ ‘江界精神’ 等의 빨간 看板이 곳곳에 걸려있는 風景이 낯설기는 했지만, 都市 生活은 나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있진 못했다. 1997年 旅團 參謀長(對坐) 職責으로 白頭山에 冬季訓鍊을 나갔던 아버지가 스키에 손가락들이 切斷되는 事故를 當해 1年 넘게 病床에 누워 있었다. 部隊에선 父親에게 旅團 顧問으로 남아달라고 要請했지만, 父親은 故鄕인 咸北 會寧으로 가겠다고 固執을 부렸다. 1999年 鄭 氏는 아버지와 함께 會寧으로 移徙를 왔다.


정 씨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연주, 독창 등 다방면적인 예술적 기량을 활용해 공연도 활발하게 진행한다. 위 사진은 지난해 미국에서 공연하는 모습. 아래는 국내의 한 모임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鄭 氏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連奏, 獨唱 等 多方面的인 藝術的 技倆을 活用해 公演도 活潑하게 進行한다. 위 寫眞은 지난해 美國에서 公演하는 모습. 아래는 國內의 한 모임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 國境都市에서 받은 衝擊
國境都市인 會寧은 그가 자라며 알던 世上과 너무 달랐다. 꽃제비度 많았고, 同窓들은 黨과 指導者에 對한 忠誠心도 全혀 없는 것 같았다.

果樹園에서 과일을 훔치는 同窓들에게 그가 “아니, 將軍님께서는 쪽잠에 줴기밥(주먹밥)을 드시며 現地 指導를 나가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도둑질이나 하면 되냐”고 하자 아이들이 그를 寒心하게 쳐다보더니 “너 멍충이 아니야? 宣傳部에서 나온 것 같구나. 배가 불러야 將軍님 지키지 않겠어”라고 對答했다. 慈江道에서 ‘우리는 將軍님이 記憶하는 사람들’이란 集團 催眠 속에서 살던 그는 衝擊을 받았다.

鄭 氏는 轉學 오자마자 스타가 됐다. 獨特한 慈江道 抑揚 때문이기도 했지만, 數學과 英語도 學校에서 恒常 1等을 차지했다.

鄭 氏에겐 두 살 위 오빠가 있었는데 그 亦是 學校에서 늘 1等을 도맡았다. 오빠는 北韓 最高의 秀才들에게 授與하는 ‘7.15最優等賞’을 받았다. 이 賞을 받으면 無條件 김책공대 等 中央大學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오빠는 大學에 가지 못하고 김정일 親衛部隊人 974部隊에 入隊했다. 理由는 오빠가 173㎝로 學校에선 큰 키에 屬했고, 出身 成分도 좋았기 때문이다. 北韓은 各 地域마다 中央黨 5과 選拔 對象을 割當하는데, 5과 指導員들은 黨에서 내리 먹인 割當 人員을 채우기 위해 中學校를 돌면서 人員을 選拔해 管理한다.

오빠가 卒業한 뒤 父母들이 김책공대에 보내려하자 5과 指導員이 “會寧에서 7名을 뽑아 이미 黨에 名單을 보냈는데, 이를 拒否하면 政治的으로 걸린다”고 脅迫했다. 나중에 들으니 秀才 오빠가 親衛隊라는 974軍部隊에 入隊해 한 일은 외진 山골에 있는 김정일의 別莊을 修理하는 일이었다.

鄭 氏도 中學校를 卒業하고 金正淑敎員大學 敎員學部 音樂科에 入學했다. 이곳은 人民學校 音樂敎師를 養成하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大學에 入學하자 “날라리 같은 애들과 어울리지 말고 南朝鮮 드라마 같은 것은 絶對로 보지 말라”고 當付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理解되지 않았다. 아버지야말로 밖에 나가 누구보다 많이 南朝鮮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신사동 그 사람’을 흥얼거렸다. 조금 더 取하면 “只今이 어느 때인데 終身 大統領이냐. 金正日 저 ××가 나라를 다 망친다”고 辱을 퍼부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을 막으며 “우리가 當身 때문에 管理所에 갈 거다”고 푸념했다. 事實 아버지는 軍에 있을 때부터 집에 들어와 TV를 보다가도 쩍하면 “軍隊도 안 가본 게 最高指導者라니. 우리가 나라를 지키는 軍隊이지, 김정일을 지키는 軍隊냐”고 辱을 퍼부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에게 南朝鮮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하니 그 當付가 귀에 들어올 理가 萬無했다.

지난해 10月 中國 상하이에서 進行된 國際 投資者 모임에 參席한 鄭 氏가 摩天樓를 背景으로 찍은 寫眞.

● 韓國 드라마에서 받은 衝擊
大學에 入學한 鄭 氏는 伽倻琴을 專攻하는 親舊를 사귀게 됐다. 그런데 그 親舊가 南朝鮮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鄭 氏는 난生 처음 接하는 韓國을 보면서 衝擊을 받았고, 아버지가 늘 말하던 “壁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李 무엇인지 알았다.

‘가을동화’를 始作으로 ‘皇太子의 첫 사랑’ ‘沐浴湯집 男子들’ ‘순풍산부인과’ ‘이브의 모든 것’ 等 숱한 韓國 드라마가 會寧에서 돌고 있었다.

‘이브의 모든 것’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느꼈다.

“장동건이 채림에게 告白했다가 差異는 場面이 있어요. 그 뒤 그는 집에 가서 파란 手帖을 꺼내들고 美國으로 날아가요. 그걸 보면서 아니 나라의 許諾도 받지 않고, 國家 公務도 아니면서 個人 事情으로 飛行機를 탄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생각했죠. 인천공항에 各種 飛行機가 엄청 많았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죠. 北韓 애들은 飛行機를 그리라면 다 똑같이 그려요. 飛行機라곤 映畫에서 본 6.25때 미그15 戰鬪機가 唯一했거든요. 그리고 南朝鮮은 美國의 植民地라고 배웠는데, 美國을 마음대로 가고, 美國人들과도 너무 잘 지내는 겁니다. 저는 南朝鮮 사람들은 美國 사람들을 보면 日帝 惡質 巡査를 만난 것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 숙여야 하는 줄 알았어요.”

드라마는 거짓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會寧에는 드라마 外의 映像도 많이 돌았다.

“總理에게 鷄卵과 밀가루를 뿌리는 映像도 봤는데, 北韓 같으면 家族까지 다 잡혀갈 건데 저런 일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돌도 아닌 먹을 것을 마구 던진다는 것도 놀랐어요. 演藝人 施賞式도 봤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TV를 向해 ‘엄마 보고 있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모든 榮光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말도 나왔어요. 會寧에선 迷信을 믿었다는 理由로 種種 사람을 公開處刑했는데, 저긴 저렇게 神을 自由롭게 믿어도 되는구나 싶어 놀라웠죠.”

드라마를 接한 뒤 鄭 氏는 더는 北韓에서 살 생각이 없어졌다. 大學에서 배워주는 革命歷史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꿈속에서도 元嬪이나 송승헌이 나올 때쯤 그는 脫北을 決心했다. 그때가 2006年 1月이었다.

2021年 平昌平和포럼에 參加한 짐 로저스 會長과 함께 板門店 訪問에 同行한 鄭 氏. 로저스 會長은 平昌平和포럼에 每年 參席한다.

● 韓國을 向해 떠나다
鄭 氏는 搜所聞을 통해 江을 넘겨줄 사람을 찾다가 한 國境警備隊 中隊長을 紹介받았다.

“얼마 주면 中國에 보내줄 거냐”고 묻자 中隊長은 100달러라고 했다. 當時 警備隊에 度糠粃로 주는 돈은 10달러 程度가 一般的이었지만, 鄭 氏는 그런 事情을 몰랐다.

그는 집에 와서 집 天井에 숨겨둔 아버지의 祕資金을 훔쳤다. 外貨를 돌돌 말아둔 덩어리가 3個 있었는데 그中 하나를 꺼냈더니 1200달러였다. 그 돈이면 當時 會寧에서 집 서너 채를 살 수 있었다.

中隊長에게 100달러를 주니, 그는 直接 鄭 氏를 데리고 自身이 兵士 時節 勤務했던 먼 地域으로 데리고 가서 豆滿江을 건넜다. 그날이 2006年 3月 2日이었다.

江을 건너는 데는 大略 3分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山을 타니 落葉이 워낙 많이 쌓여 소리가 搖亂했다. 이때 등 뒤에서 銃소리가 7番 터졌다. 當時는 國境을 건너는 사람을 射殺하라는 김정일의 指示가 下達됐다고 한다. 多幸히 追擊은 없었다.

中隊長이 自己가 親하게 지낸다는 中國의 한 村長 집에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곤 “이 아가씨한테 1000달러가 있으니 絶對 人身賣買犯에게 넘기지 말고 韓國行 브로커에게 바로 引繼하라”고 當付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中隊長이 다시 江을 건너왔다.

“유나야. 너를 보내고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보니,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南朝鮮에 꼭 가야 되겠냐. 내가 집이 平壤이고 집도 잘 사는데, 나랑 結婚해 平壤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

中隊長의 告白에도 鄭 氏의 뜻은 斷乎했다. 說得시키지 못한 中隊長은 돌아가면서 “東南亞까지 無事히 到着하면 꼭 村長의 집에 電話해 달라”고 當付했다. 村長에게 500달러를 주니 다음날 멋진 乘用車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떠났다.

옌지, 베이징, 쿤밍 等을 거치면서 鄭 氏는 신이 났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멍이 난 靑바지를 입으니 드디어 내가 願하던 世界가 가까이 오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노래房에 가서 마음 놓고 南朝鮮 노래를 부르니 喜悅도 솟구쳤다.

베이징에서 韓國으로 가는 다른 脫北民들과 合勢해 一行은 11名으로 늘어났다. 泰國에 到着해 警察에게 團束되기도 했지만, 이때 유나의 英語가 通했다. “100달러 줄 테니 우리를 풀어 달라”고 하자 警察이 돈을 받고 사라졌다. 一行을 이끌고 韓國 食堂으로 찾아간 것도 유나였다. 門 밖에서 보니 食堂 女主人의 머리 스타일이 韓國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같았다.

그 食堂 主人 內外의 도움으로 一行은 방콕으로 와 韓人敎會에서 도움을 받았다.

2023년 11월 이만갑 촬영 현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 씨.
2023年 11月 이만갑 撮影 現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鄭 氏.

● 調査機關에서 만난 아버지
방콕에서 3個月 동안 聖經工夫를 하며 머물던 그는 마침내 韓國行 飛行機에 올랐다. 드라마에서 보던 飛行機를 타보니 너무 떨려 신발을 벗고 타려 했고, 韓國 땅이 아래에 보일 땐 눈물이 절로 났다.

仁川空港은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멋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大理石을 처음 보는 그는 미끄러질까봐 얼음판을 걷듯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年 뒤의 未來로 간 것 같았다.

調査機關에 들어갔을 때 그의 手中에는 200달러가 남아 있었다. 調査官들은 北에서 脫北해 곧바로 어린 少女의 품에서 큰 돈이 나오자 아버지가 뭐하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8月 初 調査도 끝나고 自由로운 狀態가 되자 마당에 나가 運動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유나야”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瞬間 소름이 끼쳤다.

올려다 보니 4層 窓門에서 머리가 길고, 鬚髥이 덥수룩한 아버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會寧에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지?”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도망간 딸을 잡겠다고 中國에 넘어왔다가 公安에 逮捕됐다. 하지만 北韓 最精銳 特殊部隊 指揮官이었던 아버지는 달리는 車에서 公安을 制壓하고 脫出했다. 以後 딸이 韓國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37日 동안 山을 타고 3000里를 行軍해 大連까지 온 뒤 僞造旅券을 求해 韓國으로 오는 배를 타고 건너왔다. 鄭 氏가 방콕에 머무는 3個月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鄭 氏는 아버지가 크게 火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보고 “너 살아 있었구나. 健康히 지내다가 社會에 나가서 보자”고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鄭 氏는 하나圓을 거쳐 2006年 11月 社會로 나왔다. 아버지는 調査 期間이 길었다. 祕密을 많이 알고 있다 보니 하나圓을 거치지 않고 韓美日의 合同 調査만 6個月을 받은 끝에 이듬해 3月 社會로 나왔다. 鄭 氏는 아버지와 함께 京畿道 분당에 賃貸住宅을 받고 살게 됐다.

鄭 氏는 아버지와 함께 熱心히 돈을 모아 强制勞動收容所로 끌려간 어머니를 2年 뒤에 救出해 韓國에 데리고 왔다. 鄭 氏가 脫北한 뒤 974軍部隊에 服務했던 오빠는 奧地로 쫓겨났다. 어머니를 데려온 이듬해 오빠도 韓國에 데려왔다.

처음 오빠와 通話했을 때 軍에서 洗腦된 오빠는 “내 앞길을 막은 유나를 銃으로 쏴죽이겠다”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婦女가 돈을 보내지 않자 6個月 뒤 中國으로 脫北해 “나도 데려가달라”고 連絡해왔다. 以後 오빠는 연세대와 海外 留學을 거쳐 現在 有名 外國系 企業에서 일하고 있다.

정 씨는 전국을 누비며 활발한 강연활동도 진행한다. 지난해 삼성생명 직원들을 대상으로 북한 관련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鄭 氏는 全國을 누비며 活潑한 講演活動도 進行한다. 지난해 삼성생명 職員들을 對象으로 北韓 關聯 講演을 進行하고 있는 모습.

● 美容師로 始作한 定着
鄭 氏의 韓國 定着은 쉽지 않았다. 南朝鮮에만 가면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며칠도 되지 않아 끝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첫 職業은 커피숍 알바였는데, ‘카라멜 마키아토’ ‘블랙티 레모네이드’와 같은 生疏한 單語에 쩔쩔 매며 失手를 連發하다가 一週日 만에 쫓겨났다.

두 番째로 찾은 職業은 便宜店 알바였는데, 저녁 8時에 나가 새벽 타임을 勤務했다. 아침에 들어와 4時間 程度 자고 美容學院을 熱心히 다녀 8個月 만에 美容師 資格證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저기 履歷書를 넣어도 回答이 없었다. 그는 直接 洞네 美容室을 찾아나섰다.

“院長님, 저는 北에서 왔는데요. 시키면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就職 좀 시켜주십시오.”

하지만 20歲도 안된 그를 선뜻 받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니온美容室’ 김태연 院長을 만났다. 鄭 氏를 안쓰럽게 여긴 金 院長은 그를 키워주기로 했다.

처음 몇 달은 너무 힘들었다. 샴푸毒이 올라 손에서 피가 줄줄 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버스費조차 아끼다보니 7~8個 停車場 距離를 걸어 다녔다. 退勤길에 너무 힘들어 벤치에 앉아 혼자 슬피 운적도 많았다.

나중에 한 藝術大學 文化藝術專攻 學部에 入學하기도 했지만, 일과 竝行하기 힘들어 2學年 때 自退했다. 그는 外國에 나가기를 꿈꿨다.

그래서 隣近 地球村敎會에 나가 4年 넘게 外國人들과 하루에 2時間씩 工夫하고 對話를 나누었다. 英語 實力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중에 海外 留學을 간 오빠를 따라가 半 年 동안 캐나다에서 語學硏修도 했다.

2018年 京畿道 烏山에서 열린 講演에서 鄭 氏가 大衆들 앞에서 發言하고 있다.

● 정유나의 꿈
10年 동안 美容室에서 일하며 이제는 韓國에서 잘 살 수 있는 自信感이 붙었을 때 人生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이만갑 製作陣이 搜所聞 끝에 그에게 出演해달라고 要請을 해온 것이다. 2017年 이만갑에 처음 나간 그는 固定 出演者가 되게 됐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講演 要請도 많이 들어왔다. 苦悶 끝에 그는 美容室 일을 그만두고 放送人으로 살기로 했다.

2018年 짐 로저스 會長과 畫像 인터뷰를 한 것은 그의 人生을 바꾼 또 다른 契機였다.

코로나가 퍼지기 前까지 1年 남짓 期間 그는 全 世界를 누비며 隨行祕書 兼 北韓을 알리는 弘報大使로 活動했다.

코로나 以後 로저스 會長은 그에게 “난 이제 海外에 거의 다니지 않고 必要하면 부를 것이니 너는 韓國에서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의 끼가 本格的으로 發揮되기 始作했다.

講演, 公演, TV, 라디오 出演으로 스케줄이 빈틈없이 가득 찼다. 1月 初에도 釜山에서 三星生命, KB 損害保險 FC들을 對象으로 꿈과 動機 附與에 關한 講演을 3日 連續 한 뒤 곧바로 美國 公演길에 오른다. 公演은 그가 좋아서 選擇한 일이다. 바이올린과 손風琴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그는 脫北藝術人 公演團에서 없어서는 안 될 存在가 됐다. 하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제가 世界 有名 政治人, 經濟人, 金融人들을 많이 만나보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自信感과 꿈이 커졌어요. 앞으로 제 꿈은 韓半島를 위해 公的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脫北 女性 政治人도, 外交官도 없잖아요. 저는 로저스 會長님과 同行하면서 어떻게 外國 投資者들과 頂上들이 投資를 하게 만드는지도 배우게 됐습니다. 統一되면 저는 韓半島를 世上에 널리 알리고, 海外 投資를 積極 誘致하는 그런 役割을 하고 싶습니다. 南北이 統一되면, 그때에야 말로 統一部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인데, 統一部 長官을 脫北民이 못할 理由가 없죠. 길지 않은 人生을 살아왔지만, 只今까지 삶을 통해 꿈을 꾸는 사람에게 길이 보이고, 努力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정유나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지켜봐주시고 應援해주십시오.”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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