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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部 6級 公務員이 된 脫北靑年…“故鄕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統一部 6級 公務員이 된 脫北靑年…“故鄕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1月 30日 11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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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6급 주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강원철 씨가 정부중앙청사 통일부 실내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統一部 6級 主務官으로 일하고 있는 강원철 氏가 政府中央廳舍 統一部 室內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4年 8月 白頭山으로 自由旅行을 떠났던 脫北靑年 강원철에게 人生의 目標가 생겼다. 韓國 國籍을 따면 中國 旅行을 하겠다는 생각은, 그가 中國에 숨어 지낼 때부터 가졌던 오랜 꿈이었다. 그는 韓國에 오자마자 旅券을 만들었고, 大學 入學을 記念해 中國에서 함께 지냈던 脫北 親舊와 함께 떠났다.

仁川空港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大韓民國 國民의 自負心을 느껴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中國 延邊에 到着하자마자 일부러 公安을 찾아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3年 前엔 公安 服裝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줄行廊을 치느라 바빴지만, 韓國 旅券을 보여주니 敬禮까지 받았다. 삶이 하늘땅 差異로 바뀌었음을 體感하니 너무나 신이 났다.

다른 韓國 觀光客들과 함께 道問議 豆滿江에서 배를 타고 北韓을 구경할 때였다. 건너便에서 삐쩍 마르고 헐벗은 北韓 國境警備隊 軍人들이 江가에서 觀光客들을 쳐다보며 無聊함을 달래고 있었다.

釜山에서 왔다는 한 夫婦가 姜 氏와 親舊를 보더니 “너희들은 北韓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正말 多幸으로 생각해야 돼. 저렇게 젊은 靑年들이 너무 苦生하고 있잖아”라고 말을 건넸다. 夫婦는 이들이 脫北 靑年인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瞬間 姜 氏는 北韓 軍人들이 달리 보이기 始作했다.

“그래, 내가 北에 繼續 살았다면 只今 저렇게 보내고 있었을건데….”

白頭山으로 가는 길에 버스는 그의 故鄕 霧散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 떠날 때와 全혀 달라지지 않은 故鄕땅을 건너다보며 姜 氏는 아직 거기에서 살고 있는 親舊들을 떠올렸다.

“나는 運이 좋아 韓國에 와서 大學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外國 旅行까지 다니는데, 아직 저기 살고 있는 똑똑했던 親舊들은 저 땅에서 태어났다는 罪 하나로 얼마나 苦生을 할까. 統一이 돼 故鄕에 돌아갔을 때 親舊들이 ‘우리가 힘들게 살 때 너는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무슨 對答을 해야 할까.”

그의 故鄕에서 白頭山은 車로 3時間 距離였지만, 北韓에 살 때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白頭山을 서울에 살게 됐을 때에야 비로소 가볼 수 있었다. 白頭山에서도 그는 親舊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며 무엇을 해야 할지 苦悶했다. 統一이 돼도 그들에게 떳떳한 對答을 하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그때부터 北韓 人權問題에 穿鑿했다. 只今 그는 統一部 6級 公務員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의 軌跡은 20年 前에 세운 目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直進 中이다.

2004年 8月 白頭山 背囊旅行을 떠난 姜 氏. 江 너머 보이는 마을이 그가 태어난 故鄕 咸北 霧散이다.


● 태어나는 瞬間 決定된 運命

北韓에서 姜 氏의 運命은 태어나는 瞬間부터 定해져 있었다. 그가 1982年 豆滿江 옆 咸北 巫山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霧散鑛山 勞動者로 일하고 있었다.

자라면서 學校에 갈 때마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猖披했다. 北韓 學校에선 學生들에게 아버지가 黨員인지, 非黨員인지를 적어오라고 한다. 父母의 勞動黨 加入 與否에 따라 아이들 속에서도 階級이 나뉘었는데, 父母 모두 黨員이 아닌 姜 氏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江原道 平康 出身인 姜 氏의 아버지는 北韓軍에서 10年 넘게 服務를 했지만, 黨員이 되지 못했다. 除隊 後엔 어렵고 힘든 霧散鑛山 勞動者로 發令이 나 緣故도 없는 咸北 奧地로 오게 됐다. 姜 氏가 13살 때인 1995年 아버지가 病死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出身成分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出身成分을 보면 아버지도 비슷했을 것으로 斟酌할 뿐이다.

姜 氏의 外할머니는 江原道 通川의 地主집 딸로 이화여전을 卒業한 인텔리였다. 外할머니는 種種 “현대 정주영 會長이 우리 洞네에서 살았어. 참 못살았는데”라고 回想하곤 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姜 氏가 大學에 갈 可能性의 거의 없었다. 中學校를 卒業하고, 軍에 入隊해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공병국 같은 곳에서 10年 동안 建設腸을 轉轉하다가, 除隊해 霧散鑛山 勞動者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주어진 運命이었다.

그의 故鄕은 무산읍에서 通勤列車로 20分 程度 떨어진, 霧散鑛山 勞動者들을 위한 集團部落 性格의 마을이었다. 모두들 가난했다. 脫北할 때 豆滿江에서 처음으로 헤엄을 쳤다.

그가 살던 4層 아파트는 苦難의 行軍 時期에 北韓에서 가장 먼저 텅텅 빈 아파트로 꼽힌다.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자고 나면 사람들이 中國으로 도망쳐 사라졌다.

그나마 姜 氏의 집은 洞네에선 比較的 굶지 않고 사는 축에 屬했다. 咸鏡北道는 1990年代 初盤부터 配給을 잘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姜 氏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巫山에서 中國 物品을 받아다 黃海道 같은 앞쪽 地域에 나가 쌀을 바꾸어왔다. 그 德分에 1995年부터 本格的으로 苦難의 行軍이 始作됐을 때 姜 氏의 집은 풀粥이나마 먹고 살 수 있었다.

當時 姜 氏의 學年은 40~50名 規模의 學級 5個로 構成이 됐는데, 苦難의 行軍 막바지에는 學年에서 學校에 나온 學生을 다 모아야 30名 程度밖에 되지 않았다. 姜 氏는 學校 때 工夫를 잘해 幹部를 도맡았는데, 學校에 가면 先生이 늘 나오지 않은 學生들을 찾으려 보냈다.

親舊들 집에 가면 얼굴이 퉁퉁 부은 父母들이 맞아주었다. 그나마 그런 집은 父母가 굶어죽은 輯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北韓 판문각을 背景으로 선 姜 氏. 2017年 統一部 入社 直後에 찍은 寫眞이다.


● 어머니 장사 밑천 마련하려 脫北
1998年 姜 氏는 卒業班이 됐다. 半 年만 있으면 軍에 나가야 했다. 그때 어머니의 장사도 잘 되지 않아 집안이 힘들었다. 軍에 나가 10年 있는 동안 어머니와 5살 아래의 女同生이 굶어죽지는 않을지 너무나 걱정이 됐다.

姜 氏는 다른 親舊들처럼 中國에 건너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해 주기로 決心했다. 이미 學校는 門을 닫을 地境이었고, 學校에 나가지 않는 것이 正常일 때였다.

“入隊하기까지 半年 남았으니 그동안 中國에서 일하면 인민폐 100위안은 벌어오겠지.”

16살 少年이 집을 떠난 動機는 單純했다.

當時만 해도 霧散에는 國境警備가 그다지 森嚴하지 않았고, 特히 아이들은 團束이 甚하지 않았다. 通勤列車를 타고 霧散으로 간 그는 豆滿江 上流를 따라 걸어갔다. 軍人들이 어디 가냐고 물으면 나무 하러 간다고 둘러댔다.

어둑어둑해졌을 때 그는 無酌定 豆滿江에 뛰어들었다. 當時는 5月이라 豆滿江이 깊지 않았다. 江을 건너자마자 그는 豆滿江에서 草幕을 치고 있는 朝鮮族 男性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은 겉으론 고기잡이를 한다고 했지만, 實은 北韓과 密輸도 하고, 女性들이 건너오면 팔아먹기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은 키가 작은 16살 少年이 쓸모가 있어보였는지 함께 움幕에서 살자고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姜 氏는 이들의 提案을 受諾해 3個月 동안 함께 지내며 農事를 거들어주었다.

이 期間 姜 氏는 北에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돼 衝擊을 받았다. 朝鮮族들은 대놓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辱했다. 그런데 姜 氏가 듣기엔 그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北에 있을 때 姜 氏는 苦難의 行軍이 날씨가 좋지 않아 凶作이 들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江을 하나 건넜을 뿐인데 中國은 1年 農事해 3年을 먹고 살았고 이밥에 고기가 빠지지 않았다.

朝鮮族들은 자주 그를 마을로 데려가 韓國 TV와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姜 氏는 軍에 가는 目的이 헐벗고 굶주린 南朝鮮 同胞들을 解放하기 위해서라고 敎育을 받았다. 하지만 TV 속 南朝鮮은 너무나 풍요로웠다. 함께 있는 朝鮮族 靑年들도 韓國을 침이 마르게 極讚하며 韓國에 갈 꿈만 꾸고 있었다.

“내가 軍에 가야 할 理由가 없어졌네.”

姜 氏는 中國으로 건너온 지 3個月 만에 北韓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決心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었다. 朝鮮族 靑年들은 돈을 주진 않았다. 姜 氏는 市內에 가서 돈을 벌어 집에 보내주려고 決心했다. 朝鮮族 靑年들에게 車費를 빌린 그는 延吉로 向했다.

姜 氏가 2017年 濟州島 訪問길에 正房瀑布에서 포즈를 取하고 있다.


● 北送 飛行機에서 느낀 幸福

키 작은 16歲 少年이 中國에서 일자리를 求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敎會들을 다니며 하루하루 延命했다. 當時 延邊의 敎會들엔 그와 비슷한 身世의 脫北民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過程에 그는 自己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脫北 少年들을 알게 됐다. 어쩌다 보니 30代 脫北靑年 한 名과 10代 또래 靑少年 3名이 한 팀이 돼 서로 依支하며 살게 됐다.

30代 兄이 늘 이들에게 “南朝鮮에 가면 배고프지 않고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目標는 韓國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몰랐다. 이들은 漠然하게 中國 港口에 가서 韓國으로 가는 배에 몰래 타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共有하다보니 이들의 行先地도 中國의 港口都市를 向하게 됐다. 처음 大連에 가서 港口에 碇泊한 수많은 배들을 보며 “저걸 어떻게 탈 수 있을까” 苦悶했지만 如意치 않았다. 다시 이들은 上海로 向했다. 上海는 훨씬 더 큰 都市니 거기에선 方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해를 넘겨 1999年 6月 上海에 到着한 이들은 도움을 要請하러 韓人敎會를 찾아 들어갔다. 當時에는 脫北民들이 上海까지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敎會에 들어간 直後 公安이 들이닥쳐 이들을 逮捕했다. 敎會에 들어가기 前에 말을 나눈 助敎(北韓 國籍을 가진 朝鮮族)가 이들을 申告했던 것이다.

김일성대를 卒業했다는 公安이 들어와 이들을 審問했다. 처음에는 朝鮮族이라고 우겨도 봤지만 그때마다 苛酷한 매질이 加해졌다. 姜 氏가 調査室에 들어갔을 때 여러 名의 公安이 달라붙어 그를 거꾸로 세우고 발로 마구 때렸다.

이들에게서 脫北民이란 自白을 받은 公安은 다음날 4名을 車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點心時間이 되자 큰 食堂 앞에서 車가 멈췄다. 그리곤 이들에게 豪華로운 點心을 먹였다. 姜 氏는 태어나 그렇게 좋은 食堂을 처음 봤다. 큰 圓形 테이블에 飮食을 가득 올려놓고 실컷 먹었다.

點心을 먹은 뒤 公安이 다시 이들을 車에 태우고 가면서 “이제 너희들은 飛行機를 타고 單동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飛行機를 탄다는 것을 想像도 못했던 姜 氏는 속으로 “犯罪者를 飛行機를 타게 한다는 것이 말이냐 되냐”고 생각했지만, 車는 實際로 어느 空港에 到着했다. 飛行機에 태우기 前엔 手匣도 풀어줬다.

姜 氏는 잠깐이나마 北宋의 恐怖에서 벗어나 너무 幸福했다.

“나는 飛行機를 타봤으니 成功한 人生이구나. 이젠 죽더라도 餘恨이 없다.”

飛行機에선 機內食까지 주었다. 飛行機에서 주는 빵이 너무 비싸 보여 아끼느라 품속에 몰래 감추었다.

2時間 지나 飛行機는 단둥에 到着했다. 마중 나온 中國 邊方臺 軍人들은 傷害 公安들과 달리 이들을 거칠게 對했다. 姜 氏는 숨겼던 빵을 빼앗길 때 들었던 아까웠던 마음을 오래오래 記憶했다. “그냥 먹을 걸….”

2016년 하나은행 고려대지점에서 일하던 당시의 강 씨 모습.
2016年 하나은행 고려대支店에서 일하던 當時의 姜 氏 모습.


● 자고나면 사람이 죽었다

단둥에서 一週日 程度 收監生活을 마치고 이들은 新義州로 送還됐다. 多幸히 新義州 保衛部는 어른들에게 關心이 있었지 17살 靑少年은 酷毒하게 取調하지 않았다. 그때는 苦難의 行軍 直後라 姜 氏처럼 中國에서 求乞하다 잡혀온 아이들이 數없이 많았던 것이다.
이들 4名은 中國에 갇혀 있을 때 韓國으로 가려던 것, 敎會에 갔던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자고 約束했다. 그걸 말하면 어떤 代價가 따르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保衛部 調査가 끝나 新義州 集結所로 移動했다. 이곳은 新義州에서 1次 審問을 끝낸 脫北民들이 살던 地域으로 護送되기 前 머물며 하루 12時間 以上씩 强制勞動을 하는 곳이다. 그가 갔을 때 300~400名이 收監돼 있었다. 姜 氏는 集結所로 가기 前 일이 힘들 것보단 빈대가 더 걱정이 됐다. 그만큼 新義州 集結所는 빈대가 많기로 所聞이 났는데, 姜 氏는 빈대에 弱한 體質을 갖고 있었다.

不幸 中 多幸으로 姜 氏는 이 곳에 하루만 머물렀다. 마침 다음날에 咸鏡北道 護送員들이 到着했기 때문이다. 姜 氏는 數十 名과 함께 手匣을 차고 列車에 올랐다. 이들이 到着한 곳은 咸北 淸津의 농포集結所였다. 이곳에서 强制勞動을 하며 道 內 各 軍에서 護送員들이 오길 待機하는 것이다.

그의 故鄕 霧散은 淸津과 汽車로 不過 3時間 程度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巫山에서 護送員이 오지 않았다. 安全員들이 護送이란 귀찮은 出張이 싫어 서로 미루다보니 集結所에 온 많은 脫北民들은 期約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엔 酷毒한 强制勞動을 해야 했다. 姜 氏도 甓돌을 찍고, 시멘트를 만들고, 풀을 뜯는 따위의 일에 내몰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더러는 複道에 앉아 자야 했다.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기 때문에 이곳에선 半 年 以上 버티기 어렵다. 姜 氏가 있던 5個月 期間에도 농포集結所에서 13名이 營養失調로 죽었다. 姜 氏 옆에서 자던 사람이 아침에 屍體로 發見돼 끌려 나간 일도 있었다.

屍身들은 集結所 마당에 거적으로 덮어 放置해 둔다. 食事 時間이면 安全員이 나와 屍體들을 가리키며 “祖國을 背信한 놈들은 이렇게 죽어도 싸다”고 一場 訓示를 했다. 屍身이 腐敗하기 始作하면 收監者 中 몇 名을 불러내 손달구지에 屍身을 싣게 한 뒤 뒷山에 올라가 대충 묻어버린다. 集結所에선 이걸 ‘直播’한다고 말했다. 屍身을 깊이 묻지 않아 큰 비가 오면 山 여기저기에서 遺骨들이 露出돼 뒹군다. 地獄이 따로 없었다.

脫北大學生모임인 ‘위드유’ 事務局長으로 일하던 2014年 8月 15日 歌手 이승철과 脫北靑年 40名이 함께 獨島에서 合唱을 進行했고, 조선일보가 이를 報道했다. 이승철 氏의 마이크 뒷쪽이 姜 氏다.


● 어머니도 몰라본 아들의 모습

기다리던 霧散 護送員은 11月 末이 돼서야 나타났다. 이 때쯤 姜 氏도 營養失調에 걸려 더는 運身하기 어려운 狀態였다. 한 달만 더 있었더라면 姜 氏도 뒷山에 直播될 뻔했다.

霧散으로 가는 脫北民들과 함께 列車에 탔을 때 姜 氏는 逃亡갈 기운도 없었다. 多幸히 集結所에서 알게 된 霧散 親舊가 있었는데, 그는 北送된 지 얼마 안 돼 氣力이 남아있었다. 그는 귓속말로 “내가 가다가 틈을 타서 도망칠 것이니 집住所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곤 正말 밤中에 列車에서 뛰어내려 姜 氏의 집을 찾아갔다.

다음날 姜 氏 一行은 霧散驛에 내렸다. 이들은 다시 무산군 集結所로 移動했다. 그런데 途中에 갑자기 어머니가 나타나 아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이렇게 回想했다.

“네 親舊한테서 네가 잡혀 온다는 連絡을 받고 길에 나갔어. 그런데 사람 몰골이 아닌, 여름옷 차림의 새까만 맨발의 無理가 나타나 머리를 숙이고 지나갔어. 내 아들이 저기 있는데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겠는 거야. 一行이 지나가고, 다시 뒤돌아서 한 名 한 名 뜯어보았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할 程度로 姜 氏는 뼈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여름에 逮捕됐을 때 입었던 옷을 6個月 내내 입고 온갖 險한 일에 내몰렸기 때문에, 옷을 입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狀態였다.

어머니는 온 집안 財産을 다 털어 安全部에 賂物을 주었다. 姜 氏는 成人도 아니었던 터라 賂物이 쉽게 먹혔다. 集結所에 끌려간 다음날 그는 바로 病保釋을 핑계로 집에 왔다.

以後 3~4個月 동안 몸이 부었다 내리기를 反復했다. 잠을 잘 때엔 集結所의 惡夢이 떠올라 가위에 눌렸다. 保衛部에선 隨時로 찾아와 그가 집에 있는지 監視하고 갔다.

2012年 北韓 關聯 著書 弘報次 파리를 찾은 姜 氏.


● 몽골을 거쳐 韓國에 入國

2000年 봄이 왔다. 霧散에 USA라는 글씨가 붙은 옥수수 麻袋들이 들어오기 始作했다.

北韓 當局은 講演을 통해 “우리 將軍님의 배짱에 美國 大統領이 납작 엎드려 빌었고, 美國을 살려주는 代價로 食糧을 바치고 있다”고 宣傳했다.

北韓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中國에서 1年 넘게 지낸 姜 氏는 이것이 모두 거짓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몸이 回復되자 그는 다시 中國으로 갈 생각을 했다. 이미 外部世界를 經驗한 그는 北韓에서 到底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中國에서 일하며 벌었던 돈이 3000위안 있는데 그걸 찾으러 가야겠다”고 말하곤 집을 나섰다. 中國에서 살면서 아는 사람들도 생겼기 때문에 이番에 넘어가면 잡히지 않을 自身이 있었다.

다시 예전처럼 豆滿江을 넘은 그는 延吉에 가서 韓國 牧師를 찾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安全하다는 것을 이미 體驗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韓國 牧師를 만나 그의 保護를 받으며 隱身處에 머물게 됐는데, 聖經工夫를 하면서 1年 程度 지냈다.

勿論 完璧하게 安全했던 것은 아니어서 한 番은 中國 公安에 함께 工夫하던 一行과 함께 逮捕되기도 했다. 이들은 大連 邊方臺 廳舍 6層에 收監됐는데, 밤에 男子들은 排水管을 타고 逃亡쳤다. 女性들도 다음날 돈을 주고 풀려났지만, 北에서 各各 科學者와 醫師였던 한 老夫婦는 끝내 풀려나지 못해 北送됐다. 이들이 北韓에 가서 얼마 안돼 死亡했음이 나중에 脫北한 뒤 韓國에서 韓醫師가 된 夫婦의 딸을 통해 알려졌다.

邊方臺에서 도망치는데 成功한 그는 敎會가 運營하는 隣近의 다른 宿所로 찾아갔다. 그런데 姜 氏 宿所 사람들이 모두 잡혔다는 消息은 이곳에도 이미 傳해졌다. 가뜩이나 緊張한 채 살던 이들은 姜 氏가 門을 두드리자 窓門에 밧줄을 드리우고 逃亡쳤다. 洞네 사람들이 이걸 보고 申告하는 바람에 이들은 또 公安에 逮捕될 뻔했다. 한 親舊는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손바닥에 火傷을 입었는데, 그 傷處는 몇 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이렇게 숨을 조이며 살던 渦中에 다른 곳에 있던 韓國 宣敎師가 “只今 韓國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連絡을 해왔다. 이들은 躊躇 없이 길을 나섰다.

2001年 2月 그는 6~7名의 脫北民과 함께 몽골로 向했다. 이때가 脫北民들이 韓國으로 오는 루트가 開拓되던 初期여서 中國과 몽골 國境 警備도 森嚴하지 않았다. 鐵條網 5個를 넘어 몽골 땅에 들어갔지만, 軍人들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列車驛이 있는 작은 마을에 到着했다. 驛務員에게 “울란바토르로 가고 싶다”고 하자 그제야 申告를 받은 軍人들이 나타났다. 울란바토르에서 보름 程度 머무르다 드디어 韓國行 飛行機를 탔다. 두 番째 機內食은 빡빡 다 먹어치웠다. 2001年 3月 姜 氏는 그렇게 韓國에 到着했고 調査機關과 하나圓을 거쳐 9月 社會에 나왔다.

脫北民들은 서로 만나면 “하나圓 몇 期냐”고 묻는다. 언제 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원이 생긴지도 올해로 25年. 每달 한 騎手씩 排出되니 이제는 하나圓 騎手가 300基를 肉薄하는데, 姜 氏는 하나圓 13基이다. 이 程度면 빨리 온 것으로 따졌을 때 ‘레전드’級에 들어간다.

姜 氏가 지난해 年末 殊常한 統一部 長官 表彰.


● 人權에 눈을 뜬 靑年

姜 氏가 처음 韓國 社會에 나왔을 때 나이는 滿 19歲였다. 未成年者로 區分돼 賃貸住宅도 받지 못하고 비슷한 또래의 脫北 靑少年 2名과 함께 서울에서 天主敎가 運營하는 한 職業學校 寄宿舍로 보내졌다. 이곳은 少年院 出身도 여럿 있는 等 學生들이 大槪 거칠었다. 이들과 脫北 學生들은 자주 싸웠다. 한동안 싸우다가 나중에 싸우면서 情이 들어 親해졌다.

아이들은 서로 “우리야 말로 眞正한 南北統一을 했다”고 自負했다. 職業學校에서 1年 半 程度 머물며 姜 氏는 선반技術을 배웠다. 돈을 벌어 家族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독한 마음으로 工夫해 선반 2級 資格證 等을 따냈다.

2003年 3月 그는 學校를 卒業하고 서울 衿川區 독산동에 있는 한 金型會社에 就職했다. 하지만 會社 生活은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이 差別이었다. 그가 일하는 會社엔 東南亞 勞動者들이 많았는데, 工場 사람들은 姜 氏도 外國人과 똑같이 取扱했다. 堂堂한 韓國人이라고 생각했던 姜 氏는 적잖게 傷處를 입었다.

그는 大學에서 工夫를 해야 몸값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 6個月 만에 工場을 그만두었다. 成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번 돈을 齷齪같이 모아 北韓에서 어머니와 女同生을 韓國에 데리고 온 것이다. 工場을 그만 둔 姜 氏는 熱心히 大學準備에 邁進해 이듬해 한양대 經營學科에 했다.

大學生活을 막 始作하려던 때에 市民團體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連絡이 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人權委員會에서 北韓人權決議案을 통과시키려 하는데, 여기에 參加해 北韓 人權을 證言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그가 韓國에 올 때 費用을 支拂해 준 因緣이 있었다. 스위스에 로비를 하러 떠나는 代表團 10名 中 姜 氏 혼자만 脫北民이었다. 이미 家族도 韓國에 와 꺼리길 것이 없었던 그는 선뜻 應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世界 各國 代表團을 相對로 自身이 北韓 集結所에서 겪었던 慘酷한 實相을 證言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人權이란 槪念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世界人權宣言文을 읽으면서 自身이 얼마나 地獄 같은 삶을 강요당하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더구나 北韓이 유엔人權理事會에 加入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을 수 없는 憤怒를 느꼈다. 그가 겪은 北韓은 人權宣言文의 條項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곳이었다.

몇 달 뒤 떠난 中國 背囊旅行은 人權에 눈을 뜬 그에게 目標를 만들어준 契機가 됐다. 파란 旅券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짐승 取扱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體感한 그는 中國에서 돌아오자마자 北韓 人權 活動에 뛰어들었다.

그는 大學에서 北韓人權동아리를 만들었고, 다른 大學의 北韓 人權 모임과 連繫해 各種 캠페인과 세미나를 열었다. 나중엔 北韓人權脫北靑年聯合을 만들어 代表로 活動하기도 했다. 北韓 人權을 改善하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보니 大學 卒業도 늦어 2010年에야 卒業證을 받았다.

2004年 4月 北韓 人權 實相을 證言하기 위해 스위스 유엔人權理事會를 찾은 姜 氏.


● 理想과 現實 사이

大學을 卒業한 뒤 그는 2010年부터 2013年까지 3年 동안 民間團體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로 옮겨가 北韓의 實相을 알리는 雜誌 發刊 일도 했다.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北韓 人權團體들은 劣惡한 資金難에 시달렸다. 月給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姜 氏는 故鄕을 바라보며 親舊들을 向해 다졌던 盟誓에 充實하려 애썼다. 2013年엔 고려대 北韓學 碩士 課程에 入學해 2017年 碩士學位도 받았다.

北韓 人權을 알리는 活動도 繼續 이어나갔다. 2014年 8月 15日 脫北靑年 40名이 歌手 이승철과 함께 獨島에서 ‘홀로아리랑’과 ‘그날에’를 合唱했던 일은 只今도 記憶에 생생하다. 그는 當時 이 行事를 企劃한 脫北靑年聯合 ‘위드유’의 事務局長이었다.

하지만 使命感 하나로 버티기엔 現實은 碌碌치 않았다. 2015年 1月 그는 돈도 벌지 못하는 自身을 默默히 支持해주고 應援해주던 脫北民 出身 女性과 結婚했다. 곧 아이도 생겼다.

이제 家長의 役割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苦悶 끝에 就職을 생각했고, 2015年 하나銀行 入社試驗에 應試해 堂堂히 合格했다.

硏修와 고려대 支店 生活을 거치며 徐徐히 銀行員의 삶에 익숙해갈 무렵 그는 統一部에서 脫北民을 對象으로 公務員 募集을 한다는 公告文을 보게 됐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統一部에 가면 自身이 願하는 일을 月給을 받으며 할 수 있는 것이다.

統一部는 朴槿惠 政府 時節 脫北民에게도 一部 採用의 門을 열었는데, 2016年 12月 그가 支援했을 때가 두 番째 公告였다. 脫北民 中에서 碩士 以上 學歷의 7級 公務員 1名과 9級 公務員 2名을 募集했다. 많은 脫北民이 志願해 競爭이 나름 熾烈했는데, 試驗을 통해 最終的으로 姜 氏가 選拔됐다.

統一敎育院 建物을 背景으로 寫眞을 찍은 姜 氏. 現在 姜 氏는 統一敎育院 統一敎育擔當 主務官으로 일하고 있다.


● 統一部에서 만들어가는 未來

2017年 初부터 그는 統一部로 出勤하기 始作했다. 公務員 生活을 始作하기엔 적지 않은 35살이었지만, 姜 氏는 첫 出勤이 너무나 興奮되고 설렜다.

“光化門 政府廳舍로 出勤할 때 너무 큰 感動을 받았습니다. 北韓에 있었다면 平壤도 가보지 못했을 제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統一 政策을 다루는 公務員이 돼 일하게 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故鄕에 가도 親舊들 앞에서 堂堂하게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생긴 것 같은 自負心이 생겼습니다.”

自負心과 달리 新入 公務員 生活은 쉽지 않았다. 西廡, 豫算, 事業 等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라 낯설고 익숙하진 않았다. 部署도 자주 바뀌었다. 統一敎育院에서도 일했고, 2021年엔 京義線 出入事務所에서도 일했다. 閑散한 事務所를 지키며 그는 統一이 自身의 생각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年 그는 6級 主務官으로 昇進했다. 脫北民 中에서 公務員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別定職이 아닌 公採 出身으론 6級이 現在 第一 높다. 지난해엔 統一部 長官賞을 받는 等 部處 內에서도 認定받고 있다.

現在 姜 氏는 統一敎育院에서 公務員 對象 統一敎育 擔當 主務官으로 일하고 있다. 안내, 敎育資料 作成 支援, 講師 日程 調律 等이 그의 日課다. 2019年부터 公務員 對象 統一敎育이 法廷義務敎育이 됐다. 安定的인 公務員 生活은 長點도 많다. 家庭에 돌아와서도 딸 둘의 才弄을 보며 幸福感을 느낀다.

그럼에도 活動加刑인 그에겐 할 수 있는 일들이 限定된 公務員 生活이 完全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인터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記者가 直接 統一部에 正式 要請을 넣어야 可能하다. 하지만 그는 自負心으로 버티고 있다.

“自己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는 只今도 統一돼 故鄕에 돌아가는 날만 꿈꾸고 삽니다. 오늘 熱心히 배워 統一된 뒤 北韓에 行政組織을 만들 때 저의 經驗을 살려 이바지하려 합니다. 저는 出勤할 때마다 굶어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故鄕의 親舊들을 떠올립니다. 그것이 제가 하루하루를 사는 原動力입니다.”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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