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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은 非人間的이지만… ‘告示3冠王’ 金寬永 支社의 大學 時節 別名은 ‘스트립’[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스펙은 非人間的이지만… ‘告示3冠王’ 金寬永 支社의 大學 時節 別名은 ‘스트립’[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29日 14時 00分


코멘트

[24話]

2022年 8月 金寬永 全北道知事가 東亞日報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東亞日報DB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學窓時節에 꼭 그런 親舊가 있다. 노는 것도 잘 놀면서 工夫도 잘한다. 競爭者를 의식해 工夫 안 한 隻 안심시키고 몰래 工夫하는 ‘No 再修’도 아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지 化粧室에서 몰래 초코파이를 까먹는 ‘二等兵’도 아니었을 것이다. 班長은 高3 때 1番 맡았지만 娛樂部長은 늘 맡았다.

누구나에게나 眞心으로 對해 주기 때문에 與野를 떠나 敵(敵)이 없다. 親和力이 있고 무엇보다 疏脫하고 人間的이다. 最年少 公認會計士試驗 合格을 包含해 行政考試, 司法試驗 等 考試3冠王 스펙(spec)李 非人間的일 뿐….

金寬永 全北道知事(以下 金寬永)는 늘 웃는 賞이다. 失敗를 겪어도 自信感이 있다. 아무리 秀才與도 하나도 通過하기 어려운 考試를 3個나 패스한 經驗이 그의 資産인 것이다. 2011年 펴낸 冊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題目도 自信感이 넘친다. 누구든 幸福 바이러스로 즐겁게 해줄 自身이 있다는 거 아닌가.

● 6男 中 5男…‘리어카에서 태어날 뻔했던 아이’


“참말이지, 官營이 너는 리어카에서 나오는 줄 알았어야.”
1969年 全北 군산시 學堂群(當時 地名은 沃溝郡 회현면 학당리)에서 6男 中 5男으로 태어난 金寬永은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菜蔬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算筒을 느끼고 歸家하던 中 陣痛이 始作됐다. 버스 停留場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要請해 리어카에 실려 집에 온 뒤 無事히 自宅에서 그를 出産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農事일을 했고 市場에서 소매로 菜蔬 等을 팔았다.

金寬永度 어릴 때부터 農事일을 거들었다. 오이 심고 農藥 주고 가지 심고, 배추 다듬고, 마늘 심고 生薑 심고… 一 年 내내 農事는 이어졌다. 아버지는 工夫를 하기 싫으면 나랑 같이 農事짓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農事는 너무 힘들고 利文이 別로 남지 않는 일이라 그 말이 무서웠다고 한다.

아들만 6名인 兄弟들은 勇敢했다. 싸움을 하건 農事일을 하건 團結 하나는 끝내줬다고 한다. 兄들은 동생들이 工夫할 수 있게 도와줬고 犧牲했다. 兄弟들 사이에서 政治와 社會를 배웠다.

金寬永이 天才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兄들로부터 “야, 우리 집에 너같이 工夫 못한 사람은 없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中學校 3學年 때부터 熱心히 해서 240名 中 3等으로 卒業했다. 群山제일고에도 全校 18等 程度로 入學했지만 漸漸 工夫에 재미를 붙였다. 大入 學力考査를 豫想보다 잘 못 보았지만 아버지는 財數는 絶對 안 된다고 했다. 큰兄의 助言으로 理科에서 文科로 바꿔 성균관대 經營學科에 入學했다.

1987年 大學校 1學年 때 熱心히 데모에 參席하며 火焰甁을 던지는 等 ‘熱血靑年’으로 지냈다. 6月 民主抗爭으로 6·29宣言이 이어지자 큰兄은 여름에 “시골 父母님 생각하고 네 自身도 생각하면서 工夫를 좀 해라”라며 商業簿記 學院 受講證을 끊어줬다. 2學期부터 成均館大 考試班에 들어가 會計士 試驗을 準備했다.

그는 經濟學 等을 工夫하며 재미를 느꼈다. 다음 해 4月 치러진 1次 試驗에서 客觀式 問題가 宏壯히 쉽게 나왔다. 1次 合格者 發表가 6月이고 8月 2次 試驗 豫定이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1次 試驗 準備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合格했고 11月 最終合格者 發表에서 230名 中 自身의 이름을 發見했다. 成大 考試班에서 2學年이 合格한 것도 처음인 데다, 學校를 일찍 들어간 金寬永은 滿 18歲 最年少 合格者로 紹介됐다. 그는 이 過程에서 “試驗場에서는 끝까지 最善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試驗 準備할 때 나는 無條件 된다고 생각하고 工夫를 해야 한다”는 敎訓을 얻었다고 한다.

● 非人間的 스펙…金寬永의 工夫法

2011년 발간한 김관영의 자서전.
2011年 發刊한 金寬永의 自敍傳.


“工夫와 關聯된 一般 原則 中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集中力’을 높이는 것이다. 工夫를 잘하고 못하고의 差異는 結局 集中力의 差異다. 集中力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動機 附與’가 重要하다. 가난과 逆境에도 挫折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挑戰의 機會로 삼는다는 精神, ‘헝그리 精神’ 같은 것이다. 集中力 다음으로 重要한 것은 實踐力을 기르는 것이다. 實踐力은 ‘成功하는 習慣’을 들이는 것이다. (中略) 내가 開發한 나만의 學習法은 ‘나만의 冊’ 만들기이다. 요즘은 이런 式의 學習法을 ‘單權化’ 作業, ‘誤答 노트’ 만들기라고 하면서 奬勵하는 것을 보면, 그 效果가 檢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金寬永,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中에서

在學 中에 會計士 試驗에 合格한 金寬永은 指導敎授로부터 行政考試를 準備하라는 助言을 받고 다시 行政考試班에 들어갔다. 다시 한番 最年少 合格을 하겠다는 欲心이 있었지만 1次에서 2番 떨어졌다. 3年 9個月 동안 考試班에 있으면서 結局 1992年 10月 合格했다.

大學이랑 大學院을 다닐 때 課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考試 工夫를 했다. 敎師를 꿈꾸던 아내를 만나서 內助를 받았고 1995年 4月 會計將校로 入隊하기 前에 結婚式을 올렸다.

元來 司法試驗을 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經濟企劃院(現 企劃財政部)에 配置되고 보니 法案을 만드는 過程이 재밌었다. 마침 軍隊에서 午後 5時 退勤 後 저녁時間을 낼 수 있어 法 工夫를 始作했다. ‘이렇게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考試를 目標로 工夫를 始作했다. 두 番의 落榜 끝에 軍隊 마치기 直前인 1998年 1次 試驗에 合格했다. 財政經濟部에 復職한 뒤 工夫 時間 確保를 위해 政府果川廳舍 옆에 考試院을 얻어 ‘晝耕夜讀’을 했다.

1999년 사법시험 합격 당시 김관영과 동생 김형완 씨. 동아일보DB
1999年 司法試驗 合格 當時 金寬永과 동생 김형완 氏. 東亞日報DB
兄을 따라 성균관대에 入學한 金寬永의 막냇同生이 함께 司法試驗 工夫를 하며 資料 等 도움을 줬다. 兄弟는 나란히 1999年 合格해 言論의 注目을 받기도 했다.

“같은 大學을 나온 兄弟가 나란히 司法考試 2次에 合格했다. 主人公은 金寬永(金寬永·31) 兄완(炯完·26) 氏 兄弟. 特히 兄 官營 氏는 88年 公認會計士資格證(CPA), 92年 行政考試 合格에 이어 ‘考試 3冠王’에 올랐다. 그는 現在 財經部 監査擔當官室에 勤務하고 있다. 全北 沃溝郡 회현면에서 農事를 짓고 있는 金 氏 兄弟의 父母는 무엇보다 兄弟愛를 强調했다. 이 때문에 이들 兄弟는 이番 合格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 兄弟는 성균관대 東門으로 各各 經營學科와 行政學科를 卒業했다. 兄弟는 이 大學 司法考試 準備班인 ‘양현관’에서 함께 試驗 準備를 했다. 동생은 낮에 資料를 整理해 退勤 後 양현관을 찾은 兄에게 줬고 兄은 슬럼프에 빠진 동생을 激勵했다. 이들 兄弟는 23日 面接만 남겨놓아 事實上 合格한 狀態. 官營 氏는 財經部에서 繼續 勤務할 豫定이며 형완 氏는 判事나 檢査를 希望하고 있다.”
―1999年 11月 10日子 東亞日報
그 스스로 本人이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學生은 아니었다고 여긴다. 中學校 時節 IQ 테스트 結果도 113이었다. 代身 그는 남들보다 剛한 忍耐心과 意志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세 個의 合格證이 아니라 그 過程에서 기울였던 나의 ‘熱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大學 別名은 ‘스트립’…‘가장 金앤張 같지 않은 辯護士’로 불려
工夫도 工夫지만 그는 놀기도 잘 놀고 舞臺 體質이었다. 노래를 잘했고 中學校 逍風 때 長技자랑으로 시골 藥장사 寸劇을 벌였다. 大學校 1學年 때 엠티 長技자랑에서 4學年 先輩의 ‘픽업’으로 스트립쇼를 演出해서 別名이 ‘스트립’으로 불렸다고 했다. 大學院 新入生 歡迎會 때도 어김없이 長技자랑에 나서 노래를 불렀고 沈봉사 演技를 해 拍手를 받았다. 中央公務員敎育院 時節엔 自治會 企劃部長을 맡아 娛樂部長 役割을 했고 人氣가 많았다.

司法硏修院에 있는 동안 金앤張法律事務所로부터 스카우트 提議를 받았다. 當初 公務院으로 돌아갈 計劃이었지만 影響力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는 생각에 提案을 받아들였다. 當時 그는 나중에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에서 할 수 없는 事業에 資源을 分配하는 ‘社會福祉共同募金會’ 같은 慈善事業을 생각하고 있었다.

會計士 資格證과 財經部 在職 經驗 및 人脈 等은 辯護士로서 큰 長點이었다. 人材들이 모인 金앤張에서도 金寬永은 잘나갔다. 疏脫함과 率直함, 誠實性은 그의 品性이었고 金앤張의 第1原則인 ‘顧客中心主義’에도 잘 符合했다. 그러면서도 謙遜한 好感型이었다. ‘가장 金앤張 같지 않은 辯護士’라는 別名도 붙었다.

그의 座右銘은 ‘地境을 넓히는 삶’, 卽 善한 影響力을 끼치는 삶이다. 基督敎人인 그는 ‘야베스의 祈禱’라는 祈禱文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表現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政治人이 돼 只今보다 더 살맛 나는 世上을 만들겠다는 目標를 세웠다. 金앤張에서 勤務한 지 10年 만이었다.

● 次世代 리더로 注目…第3黨 院內代表 지내

2013년 민주당 수석대변인 시절 김관영. 동아일보DB
2013年 민주당 首席代辯人 時節 金寬永. 東亞日報DB
故鄕인 群山에서 出馬한 金寬永은 2012年 4月 19代 總選에서 民主統合黨 候補로 全北 群山에서 當選됐다. 그의 나이 43歲였다. 黨 基準으로 靑年(45歲)이었다. 그는 ‘考試 3冠王’이라는 ‘看板’으로 인해 注目을 받았고 黨 非常對策委員과 首席代辯人, 代表 祕書室長 等 要職을 차지했다. 注目받는 初選 議員이자 次世代 리더로 불렸다.

勿論 實力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19代 國會 前半期엔 國土交通委員으로 活動하다 後半期엔 기재부 出身의 長點을 살려 企劃財政위원으로 活動했다. 2014年 12月 當時 與黨인 새누리黨(現 國民의힘)李 推進하던 相續稅 및 贈與稅法 改正案 票決을 앞두고 反對討論에 나섰다. 中小企業의 家業相續控除 適用 要件을 낮춰 經濟 活性化를 꾀하겠다는 게 當時 與黨 立場이었다.

하지만 金寬永은 “大韓民國에 傳統 있는 名門 家族企業을 育成해서 持續的으로 雇傭과 成長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政府의 趣旨에 100% 同意한다”면서도 “그 方法이 企業을 하는 富者들에게 그냥 數百億 원의 稅金을 免除해주는 方式語서는 안 된다”고 主張했다. 與野가 合意한 事案임에도 金寬永의 反對討論 以後 與黨 內 棄權票가 늘면서 結局 否決됐다.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이 민주당에 있던 時節 그를 따라 國民의黨으로 옮겼다. 그는 2016年 20代 總選에서 再選에 成功했다. 朴趾源 院內代表 體制에서 院內首席副代表를 맡은 金寬永은 20代 國會에서 與野 協商 窓口를 맡으며 第3黨의 存在感을 보여줬다.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審判이 始作되자 彈劾訴追委員을 맡았다.

當時 國民宜當 安哲秀 候補가 大選에서 敗北한 뒤 유승민 議員이 創黨한 바른政黨과 合當하면서 바른未來黨 所屬이 됐다. 金寬永은 再選 議員으로선 드물게 바른未來黨에서 院內代表에 當選됐다. 2019年 4月 選擧制 改編과 公搜處 設置法 等의 패스트트랙 指定 論難에 中心에 서기도 했다.

바른未來黨이 內紛으로 黨이 깨지면서 2020年 總選에서 無所屬으로 出馬했지만 結局 落選했다. 그 뒤 싱크탱크인 韓國公共政策戰略硏究所(KIPPS·킵스)를 設立해 金成植 蔡利培 前 議員 等과 함께 與野를 뛰어넘는 共同의 政策 어젠다를 만들었다.

2022年 大選을 앞두고 민주당에 復黨했고 같은 해 6月 地方選擧에서 全北道知事에 當選됐다.

● MB의 淸溪川처럼 새萬金은 金寬永의 브랜드… 親企業 性向 批判도
전북도 제공
全北道 提供
그는 워커홀릭이다. 金앤張法律事務所에 있으면서 하루 14時間씩 일했고 國會議員이 되고 나서도 8年 동안 地域區인 全北 群山에 있을 때를 除外하고 每日 午前 6時에 京畿 성남시 분당구 自宅에서 出勤을 했다고 한다. 道知事가 된 只今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 自體가 재밌고 일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本人이 즐거우니 그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

몇 달 前 金寬永에게 行政(道知事)과 政治(國會議員) 中 어떤 게 더 재밌냐고 물어봤다.

“一旦 行政이 더 재밌지, 只今은 道知事인데… 왜냐하면 여기는 이제 내가 얘기를 하면 執行이 되잖아 그 變化가 卽刻 있잖아. 그리고 一週日 後에 報告를 하잖아. 내가 强調하는 게 ‘한 番 指示, 세 番 點檢’이야. 내가 報告받을 때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報告를 받은 뒤부터 내가 세 番 點檢하는 것. 하겠다라는 計劃에 對한 보고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 그러나 點檢이 더 重要해.”
―取材 메모 中
金寬永에게 새만금 開發事業은 政治의 始作이자 끝이다. 새만금 開發의 成敗에 따라 그의 未來도 달렸다. 2013年 새萬金廳이 設立될 때부터 地域區 議員으로 도레이첨단소재 等 海外 企業 誘致에 나섰다. 2013年 以後 9年 동안 새萬金 投資 誘致 規模가 1兆5000億 원에 不過했지만 金寬永은 7月 就任 以後 6月 末까지 60個 企業과 投資協約을 締結해 7兆1000億 원의 投資를 誘致했다. 발로 뛰고 海外 企業人들을 直接 만나 投資를 說得한 結果다.

그는 野黨 再選 議員 當時 새만금에 카지노複合리조트 建設을 推進하기 위해 새萬金 內國人 카지노 許容 法案을 내기도 했지만 野黨과 市民團體 等의 反對가 거세 挫折된 狀態다.

이런 點 때문에 一角에선 그를 向해 엘리트 出身, 金앤張 出身답게 지나치게 親企業的이라는 批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金寬永이 追求하는 건 무엇보다 實用이다. 그는 書生적 問題意識과 商人의 現實感覺을 强調한 金大中 前 大統領을 政治的 스승으로 삼고 있다.

“大韓民國은 이미 이미 政治와 行政이 이끄는 社會가 아니다. 나는 經濟人이 이끈다고 봐요. 公職者들의 月給이 어디서 나오냐. 다 稅金 걷어야 나온다. 法人稅 附加價値稅 所得稅 等 3個가 國稅의 80%인데 이 3個는 徹底하게 企業 活動과 關聯해서 나온 것이다. 大韓民國은 資本主義가 高度化됐기 때문에 結局 企業人들이 大韓民國을 이끌어 간다. 그러면 政治人의 롤은 뭐냐. 우리 企業人들이 國際的 글로벌 競爭에서 뒤지지 않도록, 그 사람들이 너무나 뒤처지지 않도록 빨리빨리 制度 改善을 해서 뒷받침하는 것이 나는 政治와 行政의 役割이라고 본다. 特히 韓國은 輸出 經濟이고 글로벌 經濟에서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글로벌 經濟에 뒤지지 않도록 制度를 政治와 行政이 뒷받침해주는 것이 너무 重要하다.”
―取材 메모 中


● 與黨과 協治의 協治 行步로 注目… 全北 國家豫算 9兆 원 時代 열여
2013년 12월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김한길 위원장과 김관영 당시 수석대변인. 동아일보DB
2013年 12月 當時 민주당 代表였던 김한길 委員長과 金寬永 當時 首席代辯人. 東亞日報DB

金寬永에게 가장 큰 影響을 끼친 政治人은 金한길 委員長이다. 金 委員長이 民主黨 代表였던 時節 그를 首席代辯人과 祕書室長 等으로 重用했다. 金寬永은 그를 보며 政治를 배웠다.

金 委員長 側이 지난해 大選을 앞두고 여러 次例 함께 尹錫悅 大統領을 돕자는 提案을 했지만 그는 “國民의힘으로 갈 境遇 群山을 떠날 수밖에 없는 狀況이 올 可能性이 높고 나중에 退任하고 나서 地域에 있는 親舊들하고 便하게 燒酒 한盞, 막걸리 한盞 마시기가 어려운 狀況이 올 수도 있다”는 判斷에서 완곡히 拒絶했다고 한다.

김한길系로 불렸지만 그다음 黨 代表였던 文在寅 大統領도 그를 아꼈고 마지막까지 國民의黨으로의 脫黨을 挽留했다. 안철수 議員도 그를 좋아해서 ‘初選 院內代表’로 내세우자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道知事가 되고 나서도 尹錫悅 政府, 國民의힘과 協治를 통해 補助를 맞추고 있다. 國民의힘 全北道黨 事務處長 出身인 박성태 氏를 3級 政策協力館 職位에 임명했고, 金 知事는 道·政協議會를 全北道-민주당이 아닌 全北道-國民의힘-民主黨으로 바꿨다. 與野 協治 結果 金寬永은 史上 처음으로 전북도 豫算 9兆 원 時代를 따내는 成果도 냈다.

지난해 12月엔 尹 大統領과 市道知事協議會 任員들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2023年 8月 새萬金 世界스카우트잼버리 開催와 關聯해 60億 원 特別交付稅가 必要하다고 言及했더니 尹錫悅 大統領이 李尙玟 行政安全部 長官에게 “豫算을 한 푼도 깎지 말고 다 도와줘라”라고 했다고 한다. 金寬永이 잼버리의 重要性에 對해 說明하자 尹 大統領이 “내가 옛날에 보이스카웃을 했다”며 關心을 갖고 呼應을 해줬다는 것이다. 豫算 支援은 勿論 잼버리 組織委員長에도 行安部 長官과 文化體育觀光部 長官도 包含시켰다고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金寬永이 尹 大統領의 信賴를 받고 歡心을 샀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이 傳해지자 다른 市道知事가 “왜 全北만 챙겨주냐. 우리도 챙겨달라”고 抗議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金寬永의 政治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哲學이 깔려 있다. 그 스스로 ‘치어리더’를 自請하는 理由다.

“우리 삶에서 元來 힘들고 지루했던 일을 그 自體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眞正 意味 있는 일이 아닐까. 政治 指導者라면 그 過程에서 누구보다도 有能한 ‘치어리더’를 自請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中略) 하지만 結局 ‘眞心은 通한다’는 것이 나의 人間關係 持論이다. ”
―金寬永,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中에서


2014年 민주당 首席代辯人이던 金寬永 全北道知事를 처음 만났습니다. 以後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冊을 읽었습니다. 그 뒤 “오늘은 저를 어떻게 즐겁게 해주실 거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政治는 成績順이 아닙니다. 하지만 工夫할 때 體得한 성실함과 熱情으로 政治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金 支社의 最大 長點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金寬永의 ‘즐거운 政治’가 國民들을 좀 더 즐겁고 幸福하게 만들어주길 期待해봅니다.

54歲, ‘道伯’으로 成長한 그는 이제 次世代 走者로 꼽힙니다. 周邊에서 2027年 大選 挑戰을 勸誘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만금 開發이 그의 政治的 브랜드로 자리 잡을지, 黨內 走者들의 力學關係에 따라 決定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낮은 認知度와 黨內 勢力 不在 等도 그가 넘어야 할 壁입니다. 여지껏 서울市長을 除外하곤 廣域團體長 中에 大權을 잡은 人物은 없습니다. 中央 舞臺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地方政治의 限界이기도 합니다.

다음 法廷冒瀆 [25話]는 7月 13日 公開될 豫定입니다. 與圈의 有力 政治人에 對해 쓸 豫定입니다. 參考로 [25話]를 마지막으로 法廷冒瀆 連載를 마칩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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