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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强 百濟’ 이끈 近肖古王, 어디 묻혔나[이한상의 祕密의 열쇠]|東亞日報

‘最强 百濟’ 이끈 近肖古王, 어디 묻혔나[이한상의 祕密의 열쇠]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2月 5日 23時 3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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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인데 왕족 무덤을 다른 귀족들의 무덤과 차별화하기 위해 외래 양식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백제 近肖古王 무덤으로 推定되는 서울 松坡區 석촌동 3號墳. 高句麗式 積石塚(돌을 쌓아 만든 무덤) 形態인데 王族 무덤을 다른 貴族들의 무덤과 差別化하기 위해 外來 樣式을 썼다는 說이 有力하다. 漢城百濟博物館 提供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百濟史에서 近肖古王은 卓越한 君主로 손꼽힌다. 東進, 新羅, 왜와의 外交로 高句麗 南進을 沮止한 데 이어 몸소 3萬 大軍을 이끌고 平壤城을 攻擊해 高句麗 故國原王을 죽였으며 各地로 땅을 넓혀 백제 最大 版圖를 이루었다. 生前 뭇사람들의 尊崇을 한 몸에 받았을 그가 世上을 뜨자 喪主인 근구수왕은 巨大 무덤을 만들고 守墓人(守墓人)을 配置하여 그곳을 管理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덤을 쓴 지 한 世紀 만인 475年 近肖古王의 陵은 高句麗의 手中에 들어갔고 다시 551年에는 新羅 땅에 編入된다. 그에 따라 王陵은 그 누구의 保護도 받지 못한 채 頹落하거나 掠奪 對象으로 轉落했고 또 많은 歲月이 흐르면서 그에 對한 傳承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只今도 發掘 中인 서울 松坡區 석촌동 古墳群에 近肖古王陵으로 推定되는 무덤이 包含되어 있다. 그것은 어느 무덤이고 또 그 一帶의 옛 무덤 發掘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百濟史의 祕密은 무엇일까.

龍頭蛇尾로 끝난 日帝强占期 發掘
한성기 百濟 무덤이 다시금 世上에 알려진 것은 日帝强占期 初盤의 일이다. 朝鮮總督府는 1911年 以來 京畿道 廣州郡 중대면 석촌리(現 서울 松坡區 石村洞) 一帶의 百濟 무덤에 對한 調査를 벌였고 1916年 그 內容을 簡略히 公開했지만, 석촌리 一帶의 무덤을 王陵으로 認識하지는 못했다.

1917年 下半期, 朝鮮總督府는 백제의 王陵級 무덤을 集中的으로 發掘하여 遺物을 確保하기로 하고 實行에 나섰다. 實務를 擔當한 야쓰이 세이이쓰 一行은 9月 21日 京城을 出發해 12月 27日 復歸할 때까지 競技(現 서울 包含), 忠淸, 全羅 地域 遺跡을 發掘했다. 特히 그들은 백제의 王陵級 무덤을 ‘빛의 速度’로 파헤쳤다. 그때 發掘된 석촌리 1號墳(現 석촌동 3號墳)은 近肖古王, 扶餘 능산리 동하총은 위덕왕, 益山 雙陵은 武王 夫婦, 羅州 신촌리 9號墳은 榮山江 流域 有力者 家族의 무덤으로 推定되는 重要 遺跡이다.

그 무렵 석촌리 一帶에 分布한 무덤은 293期 以上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석촌리 1號墳이 가장 큰 무덤이었다. 야쓰이 一行은 돌을 쌓아 만든 積石塚의 構造 및 發掘 方法을 몰랐기에 좁고 깊은 도랑 하나를 팠다가 무덤房이나 제대로 된 遺物이 드러나지 않자 서둘러 發掘을 끝냈다. 그 後 이 一帶의 百濟 무덤들은 總督府의 關心에서 멀어졌고 公主나 扶餘의 百濟 무덤들과 달리 保存 措置가 推進되지 않았다.

백제 王陵이 왜 高句麗式 積石塚?
석촌동 일대에서 출토된 ①금제 달개 ② 1호분 북쪽 적석총에서 나온 기와류 ③ 12호 목곽묘에서 나온 흑유계수호(닭 머리 모양 검은 항아리). 한성백제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 제공
石村洞 一帶에서 出土된 ①禁制 달개 ② 1號墳 北쪽 積石塚에서 나온 기와類 ③ 12號 木槨墓에서 나온 黑釉界守護(닭 머리 模樣 검은 缸아리). 漢城百濟博物館·國立公州博物館 提供
光復 後 30年이 다 되어가던 時點에 우리 손으로 석촌동 古墳群 發掘을 實施했다. 蠶室地區 開發事業에 附隨하여 서울대博物館이 1974年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석촌동 古墳群을 發掘하였는데, 그 무렵 地表調査를 進行한 結果 殘存 무덤은 5期에 不過했다.

期待를 품었던 大型 積石塚의 境遇 毁損이 甚하고 무덤 主人公의 遺骸를 安置한 무덤房 等이 明確하게 드러나지 않아 失望하였지만, 指標上에 封墳이 남아 있지 않았던 곳에서 무덤 下部가 잘 남아 있는 事例들이 續續 드러났다. 그에 더하여 大型 무덤의 境遇는 周邊에서, 작은 무덤의 境遇는 內部에서 典型的인 百濟 土器와 기와, 黃金 裝身具, 中國 靑瓷 等이 쏟아짐에 따라 이곳이 한성기 백제 사람들의 核心 墓域임이 確認됐다. 特히 눈길을 끈 것은 3號墳이었다. 이 무덤은 돌로 3層의 壇을 쌓은 高句麗式 積石塚이고 길이가 자그마치 50.8m나 되는 大型分이어서 一躍 백제 王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調査者는 近肖古王陵으로 特定했다.

石村洞 一帶에 高句麗式 積石塚이 存在하는 理由가 무엇인지를 두고 學界에서 論爭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高句麗 或은 扶餘에서 有力한 勢力들이 移住하면서 傳해진 것으로 보았고 極端的으로 4世紀 무렵 백제 王室이 北方系로 交替되었을 可能性을 上程하기도 했다. 그러나 近來에는 백제 王室이 主體的으로 自身들이 餘他 貴族들과 다르다는 點을 强調하기 위하여 外來의 무덤 樣式을 導入한 것으로 推定하는 見解가 많아졌다.

싱크홀이 불러낸 漢城 百濟
석촌동 古墳群에 對한 發掘은 1987年까지 斷續的으로 進行됐다. 그 무렵 大型 墓 發掘이 終了됨에 따라 追加 發掘은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5年 豫期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해 석촌동 古墳群 內 1號墳 北쪽 잔디밭에서 싱크홀이 發生한 것이었다. 調査를 벌인 結果 나무로 만든 現代 地下 構造物이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구덩이였음이 밝혀졌다.

이 調査에서 구덩이 周邊으로 돌이 깔려 있다는 事實이 드러나면서 發掘이 始作되었는데 只今까지도 繼續 進行되고 있다. 漢城百濟博物館이 實施해 온 이 發掘에서는 새로운 事實이 많이 確認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數十 基의 積石塚이 連接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인데 길이가 자그마치 100m를 넘어선다. 무덤 上部는 大部分 毁損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무덤이 빼곡히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아마도 血緣的으로 가까운 人物들이 오랫동안 무덤을 이어 붙여 가면서 築造한 것으로 보인다.

延接 積石塚의 下部에는 더 以前 時期에 만들어진 木管墓와 木槨墓가 分布하며, 連接된 무덤들 中間中間에서는 葬送 儀禮를 擧行하던 터가 確認됐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分의 化粧된 人骨 조각들이 發見되었고 多量의 기와와 함께 華麗한 禁制 裝飾品이 出土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석촌동 古墳群에서 出土된 기와가 어떤 用途로 쓰였는지를 把握할 수 있는 端緖도 確保했다. 旣往에는 高句麗처럼 積石塚 上部에 세운 建物의 지붕에 올려졌던 것으로 보아 왔으나 近來의 發掘 結果로 보면 積石塚 周邊에 마련된 儀禮用 建築物 지붕에 올렸을 公算이 커졌다.

이처럼 석촌동 古墳群은 한성기 百濟史 解明의 ‘一級 飼料’이지만 絶對多數의 무덤이 제대로 調査되지 못한 채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다만 지난 半世紀 동안 相當한 資料가 蓄積되었기에 그러한 資料를 통해 將次 더 한層 精密한 硏究가 進行되어 如前히 曖昧하기 그지없는 백제 初期의 歷史가 머지않은 將來에 제대로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最强 百濟 #近肖古王 #百濟史 #漢城 百濟 #百濟 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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