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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빨치산이 가르쳐준 빨치산의 意味|東亞日報

[송평인 칼럼]빨치산이 가르쳐준 빨치산의 意味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9月 19日 23時 5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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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은 아무 義兵이나 獨立軍이 아니라 共産主義 系列 義兵이나 獨立軍 意味
洪範圖의 罪는 單純히 빨치산이라는 게 아니라 自由視서 한 짓이 獨立軍 破綻 招來했다는 것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論說委員
歷史學會 等 51個 歷史團體가 洪範圖 胸像 撤去에 反對하면서 “빨치산은 非正規軍이란 뜻으로 日帝强占期에 義兵이나 獨立軍을 指稱하는 意味로 使用됐다”고 主張했다. 빨치산은 義兵이나 獨立軍을 指稱할 때는 大槪 特定한, 다시 말해 共産主義 系列에 使用됐다. 洪範圖 當時의 빨치산부터 그렇다. 歷史學界가 左派에 掌握돼 專門家의 權威로 一般人을 誤導하는 건 歷史 問題가 發生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洪範圖 硏究者들에게 잘 알려진 이인섭이라는 빨치산은 ‘1965年 9月 18日 김세일 同志 앞으로 보낸 便紙’에서 大綱 이렇게 썼다. “義兵은 甲午農民戰爭 時期 義兵, 乙巳條約 정미7조약 軍隊解散 時期 義兵, 庚戌 合倂 後의 義兵이 있다. 獨立軍은 日本의 植民地 統治 當時 中領(中領·中國 領土)과 啞鈴(俄嶺·러시아 領土)으로 移轉해 武裝 鬪爭한 部類다. 빨치산은 蘇聯에서 國民戰爭(러시아 10月 革命 後 內戰) 當時 朝鮮 民族主義 獨立運動이 社會主義的으로 轉換되면서 登場했다. 甲午農民戰爭으로부터 빨치산 때까지 繼續 指導的 役割을 擔當한 사람은 洪範圖밖에 없다.”

김승빈은 新興武官學校 嬌聲臺 出身으로 洪範圖 部下가 된 빨치산이다. 그는 ‘1970年 김세일 同志 앞으로 보낸 便紙’에서 “10月 革命에 對한 報道에 接하자 遠東(遠東)의 朝鮮 사람들도 農村에서 소비에트 機關을 選擧 組織하는 事業에 나섰다. 原動에서 公民戰爭(內戰)이 始作하는 때에 韓人社會主義者同盟은 朝鮮 사람들로 赤衛軍 部隊를 組織하여 戰線으로 내보냈으며 沿海州 守廳에서는 한창걸 동무를 비롯한 25名의 니콜라엡스카야 寸(村)소비에트 委員들의 創發的 熱誠에 依해 빨치산 部隊가 組織됐다. 이때부터 始作된 朝鮮人 빨치산 運動은 朝鮮에서 3·1運動이 일어난 以後에 擴大 强化됐다”고 썼다.

洪範圖는 鳳梧洞·靑山裏 戰鬪 前인 1919年 무렵부터 빨치산이었다고 自己 履歷書에 썼다. 그러나 胸像 撤去 主張의 理由가 그가 單純히 빨치산이어서가 아니라 빨치산으로서 自由詩에서 한 일 때문임은 歷史家들이 더 잘 알 텐데도 빨치산의 뜻을 물고 늘어지며 論點을 흐렸다.

洪範圖의 씻을 수 없는 過誤는 間島에서 넘어온 어느 部隊보다 武裝解除에 앞장섰다는 事實이다. 김좌진 李範奭 等 民族主義 系列 獨立軍은 러시아領 入國 直前 돌아가 버렸다. 入國한 中心 人物은 봉오동 戰鬪의 세 主役인 洪範圖 최진동 安武다. 그러나 崔振東과 按舞의 部隊만 해도 自由視 事變 當日 攻擊을 받고 捕虜가 됐다가 풀려났다. 洪範圖의 部隊(正確히는 新興武官學校 嬌聲臺 出身 이청천 部隊를 包含한 洪範圖 部隊)만 事變 前에 武裝解除를 主導한 이르크추크派에 넘어가 그쪽 便에 섰다. 그의 部隊가 事變 當日 討伐에 나섰다는 記錄은 없지만 다음 날 戰場(戰場) 소제(掃除)를 했다는 當時 部隊 指揮官 김승빈의 證言이 있다. 싸움은 어느 한便에 서서 2線에서 役割을 했다고 하더라도 加擔하지 않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洪範圖는 自由視 事變에 깊이 連累돼 있다.

自由詩 思辨의 被害 狀況은 當時 參加者들에게도 正確히 알려지지 않았다. 攻擊한 側은 被害를 縮小했고 공격당한 側은 誇張했다. 蘇聯 崩壞 後 밝혀진 코민테른 全權委員 오홀라의 報告에 따르면 溺死者 60餘 名을 包含해 全體 死亡者는 120餘 名이다. 捕虜로 된 後 脫出 强制勞動 收監 等의 過程에서 또 數十 名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深刻한 事實은 沿海州 基盤의 사할린部隊를 빼고도 1000名에 가까운 間島 獨立軍이 一時的 武裝解除를 거쳐 結局 永久히 武裝解除됐다는 것이다.

自由詩 事變 後 崔振東과 按舞는 다시 間島로 돌아갔다. 洪範圖와 함께 武裝解除에 앞장선 이청천은 러시아 敵軍으로 編制돼 士官學校 敎官으로 活動하던 中 路線 差異로 逮捕됐다 풀려난 後 中國으로 건너왔다. 洪範圖만 레닌의 褒賞도 받으면서 그곳에 남았다.

洪範圖가 죽었을 때 카자흐스탄의 高麗人 新聞 ‘레닌旗幟’는 이런 訃告 記事를 냈다. “洪範圖 동무는 레닌-스탈린黨의 忠直한 黨員으로서…당의 使命을 꾸준히 實行하기에 精力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時點에서 100年 前 빨치산이었다는 事實 自體를 問題 삼는 것이 아니라 빨치산으로 獨立軍의 戰力을 破綻 내고 蘇聯을 새 祖國으로 삼은 사람이 大韓民國 建國과 軍과 陸士와 무슨 相關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송평인 論說委員 pisong@donga.com
#빨치산 #洪範圖 #胸像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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